#59
다시 사는 인생 - 59
졸업식까지 마친 경환은 미국행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정 또한 경환과 보조를 맞춰가며 짐을 새롭게 싸고 있었다. 북경의 김창동은 추가된 탄 50만 톤을 제일그룹의 반발을 무시하며 대후에 30만 톤을 배분시켰다. 아직 케이티를 대신 할 현지인 채용이 늦어지고 있어 최석현은 똥줄이 타고 있었지만, 케이티 오빠인 고문변호사를 통해 조만간 해결을 할 예정이라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경환은 박화수를 앞세워 대현중공업을 방문 하고 있었다. KBR만 바라볼 수 없는 경환은 국내그룹 중 건설과 중공업 분야에선 최고의 정점을 찍고 있는 대현중공업과의 업무제휴를 추진할 목적으로 박화수를 통해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당시 대현중공업은 국내 최초로 LNG선박을 진수시킬 정도로 기술력을 축척하고 있었고, 현재는 해저파이프 설치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회사의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었다. 경환은 대현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고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사장님, 오성도 중공업이 있는데 대현을 선택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자신을 모질게 대한 오성그룹이지만 박화수는 오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경환에게 이유를 물었다.
“오성은 돌다리를 두들기고도 건너가지 않는 스타일이고 대현은 먼저 건너가서 이상이 있으면 부수고 다시 만드는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경환의 말에 박화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해를 못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웃어 줄 뿐이었다. 약속된 접견실에 도착한 경환은 준비한 명함을 손에 쥐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SHJ의 이경환입니다.”
“네, 서울사무소를 맡고 있는 권철중 전무입니다.”
명함과 경환의 얼굴을 계속 확인하고 있는 권철중은 믿기지 않는 듯 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북경지사를 통해 중국정부관료와 끈이 닿은 인물이라는 말에 만남을 흔쾌히 동의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이가 어릴 줄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 권철중을 향해 경환은 미리 말을 꺼냈다.
“전무님, 사실 제가 좀 어리긴 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엄연한 기업의 대표입니다. 오늘 만남의 결과를 보신 후에 판단을 하셔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환은 미소를 머금으며 웃음을 보이고 있었고 권철중은 그런 경환을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양손으로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선 이번에 국내 최초로 LNG선을 진수한 걸 축하드립니다. 단순 화물선 건조에서 벗어나 특수선박 건조를 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점 대단하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스케줄이 있다 보니 길게 시간을 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찾아오신 용건이 있으시면 간략히 말해 주십시오.”
박화수는 아무리 전무라고는 하지만, 경환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권철중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나서려 했지만 경환의 제지를 받아 속으로 분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현중공업의 해외플랜트 입찰에 컨설팅업무를 담당해 보고자 찾아 왔습니다. 저희 SHJ가 신생기업이고 실적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재 미국업체인 KBR과 컨설팅계약을 체결하고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 입찰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무님께서 제 제안을 무시 하신다면 저희는 똑 같은 제안을 대후조선과 오성중공업에게 할 생각입니다. 바쁘실 텐데 일어나시겠습니까?”
경환은 아직도 KBR을 팔아먹어야 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긴 했지만, SHJ의 이름을 동종업계에 각인시키기 전까지는 딱히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권철중의 옆에 있던 이한주 부장이 급히 권철중에게 귓속말로 말을 전했다.
“흠, 흠. 국내기업과 KBR의 기술이전을 추진한 것이 SHJ가 맞습니까? 제일그룹과 대후그룹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고 하던데…,”
경환은 권철중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떡여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권철중은 스케줄이 있다고 말한 것도 잊은 채 팔짱을 풀고 손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저희도 듣는 귀는 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대후의 앞마당인데 과연 SHJ의 컨설팅으로 수주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저희는 가능성이 없는 입찰에는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KBR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따라서 대후와는 좋은 경쟁이 될 것이 분명하니, 전무님이 그 결과를 지켜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대현을 찾아 온 목적은 석유화학단지 입찰을 성공한 이후의 프로젝트 때문입니다. 아직은 대현의 기술력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만.”
대현은 고부가가치 선박인 LNG선을 건조할 정도로 기술력을 확보를 한 상태였다. 그런 대현의 기술력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라고 막말을 하는 경환을 권철중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째려보고 있었다. 박화수는 권철중의 신경을 긁고 있는 경환을 불안한 듯 쳐다보고 있었지만 경환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우리의 기술력이 미치지 못한다니 말이 지나치군요. 들어보기나 합시다. 만약 헛소리라고 판단이 되면 각오를 해야 될 겁니다.”
나이도 어린 경환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권철중은 일갈을 터드리며 쌓인 화를 표출했지만, 그런 권철중을 경환은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FPSO, 무슨 말인지 들어보셨습니까? 권 전무님은 생소하실 수도 있으시겠네요. 그래도 이한주 부장님은 아시라고 봅니다. 이 부장님, 대현의 설계, 기술, 플랜트 제작능력으로 가능한가요?”
권철중은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단어에 눈을 크게 뜨고 이한주를 쳐다봤지만 이한주는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부유식 원유생산하역설비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사장님의 말대로 아직 저희 기술력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입니다.”
“부연설명을 드리죠. 선박의 길이 300미터, 폭 60미터, 높이 35미터, 원유저장능력 200만 배럴로 떠다니는 원유저장탱크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척의 가격은 최소 20억불 이상입니다. 군침이 도시나요?”
FPSO는 90년대 중반부터 연구를 시작해 90년대 말부터 기술력을 확보한 오성중공업과 대현중공업이 사활을 걸고 승부를 펼치는 특수플랜트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권철중은 20억불 이라는 말에 벌린 입이 닫히지가 않았다. 자신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특수선박에 대해 입찰까지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에 권철중은 경환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환은 그런 권철중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전무님이 바쁘시니 마지막 말씀만 더 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올해 있을 나이지리아 입찰의 결과를 유심히 지켜보십시오. FPSO는 그 이후에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SHJ와 손을 잡는 기업이 대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
말을 끝낸 경환과 박화수는 좀 더 얘기를 해 보자는 이한주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현중공업을 빠져 나왔다. 박화수는 경환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사장님,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세요? FPSO는 저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이한주 부장 얼굴이 아주 똥색으로 변했더라고요.”
“부장님, 아직은 저희 SHJ가 단순 컨설팅업무밖에 할 수 없어 떡고물이나 주워 먹는 신세지만, 언젠가는 플랜트산업을 통째로 밥 말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박화수는 오성을 그만두고 SHJ에 합류한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부장님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곽기철 팀장을 유심히 지켜보셔야 됩니다. 자그마한 변수가 발생을 하더라도 바로 저에게 보고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산의 최 전무님과는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십시오.”
경환의 지시를 받은 박화수는 어느 정도 경환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곽기철로 인해 화성산업은 공장과 서울사무소가 줄타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직까지는 최승호 전무의 입김을 누룰 수는 없었지만, 약혼을 통해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된다면 상황은 어떻게 바뀔지 지금으로서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휴스턴 텍사스스트리트의 작은 바에는 퇴근을 하고 찾은 많은 직장인들이 하루의 일과를 술로 풀고 있었다. 바텐더를 마주보는 자리에는 린다가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린다,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더니, 오늘은 무슨 일로 초저녁부터 위스키를 마시는 거야? 린다답지 않은데.”
린다와 같은 술을 주문한 잭은 린다의 옆에 앉아지만 린다는 일절 고개를 돌리지 않고 테이블에 놓인 술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린다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잭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린다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왜 그래? 윌리엄과 부딪히는 일이라도 생긴 건가?”
잭의 걱정스런 말에 린다는 그제야 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잭, KBR에서 왜 이렇게 아등바등 거렸는지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술 한 잔 할 수밖에 없었어요.”
말을 끝내고 린다는 잔에 남아 있는 위스키를 단번에 마시고는 한잔을 더 주문을 했다. 린다의 갈등에 잭은 마땅한 대답이 생각이 나질 않아 린다를 따라 위스키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잭, 솔직히 말해 줘요. 내가 여자라서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윌리엄의 말에 동의를 하나요? 남자들은 감정 조절이 쉬운가 보죠?”
잭은 몇 달 전 윌리엄과의 대화를 린다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린다의 상처가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까지는 린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린다, 윌리엄의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윌리엄은 텍사스 보수주의 꼴통이란 걸 알지 않나. 몇 년 만 지나면 윌리엄은 계열사 회장으로 가게 될 거야. 그 이후엔 린다가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내가 보장을 해 줄 테니, 조그만 더 참고 기다려봐.”
린다는 잭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잭을 바라본 후 의미 없는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잭은 더 불안했다.
“잭, 나 제임스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5년 후든 10년 후든 기다릴 테니 SHJ에 합류를 해 달라고 하는데,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을 끝낸 후에 제임스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생각 중이에요. KBR보다는 SHJ가 절 필요로 하네요.”
린다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잭은 술잔에 가득 차 있는 위스키를 단번에 마시고는 린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경환의 멱살을 움켜잡고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린다가 자신에게서 떠나게 된다면 자금과 재무업무에 당장이라도 구멍이 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결심을 하면 굽히는 않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잭은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만 내 뱉었다.
“아버님, 제가 술 한 잔 올릴게요. 건강하시고 미국도 자주 오셔야 돼요.”
“허허허, 그래 내 자주 찾아가마. 며느리가 따라 주는 술이 정말 맛있기는 하구나.”
경환은 출국을 하루 앞두고 조촐하게 식구들과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지막 밤을 정리하고 있었다. 경환의 부모님은 중국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먼 곳으로 떠나는 자식 내외가 아쉽기는 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어머님도 자주 오셔야 돼요. 그래야 경환 씨가 어머님 무서워서라도 저한테 잘 하니까요. 요샌 제가 뭐라고 그래도 귀찮은지 대꾸도 안 하고 그래요. 흑흑.”
“걱정 하지 마라. 내가 아주 가서 살 수도 있으니까 아범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당장 전화해라. 그 다음날에라도 내가 들어갈 테니.”
수정은 시부모를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확보를 해 놓고 있었다. 그런 수정이 경환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 실실 웃음만 보이고 있었다.
“정아 너는 석우하고 어떠냐? 그 녀석 보기보다는 순진한 녀석인데. 잘 한번 해봐”
“호호호. 별걱정을 다하네. 매일 전화하고 찾아오고 해서 귀찮긴 한데, 귀엽기도 해서 좀 만나 보려고. 그 정도면 머리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다행히 정아와 석우는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경환은 홀가분하게 한국을 떠날 수 있을 거 같았다. 경환이 도움을 보태긴 했지만 곧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갈 예정으로 있었다.
“승연아 미안하다. 너 입대하는 건 형이 함께 못해줄 거 같다. 군대 가서도 잘 하고 요즘은 구타도 많이 없어졌다고 하니 눈 딱 감고 2년만 참아.”
“알았어. 형. 나 졸업하고 유학가면 형이 좀 책임져 줘. 구박하지 말고.”
“도련님. 누가 구박을 한다고 그러세요? 졸업하고 빨리 오셔서 조카하고 좀 놀아 주시고 그래야죠.”
수정의 말에 화들짝 놀란 경환은 급히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설레발을 부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경환과 수정의 마지막 밤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