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다시 사는 인생 - 57
부모님이 귀국하고 경환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와 있었다. 마지막 학기이다 보니 학교생활에 전념은 할 수 없었다. 좋은 학점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낙제를 당할 걱정이 없었기에 경환은 귀국에 앞서 서서히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정장을 차려 입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황 부장님, 회의실로 가시죠. 박 차장님도 회의 준비를 해 주십시오.”
그리 넓지 않은 회의실에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며칠 전 김창동의 보고를 받은 경환은 대후건설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제가 SHJ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경환입니다. 황태수 부장님과 박화수 차장님은 서로 안면이 있으시니 따로 소개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해외영업을 담당하는 김준성 상무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진작 만나 뵙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서야 만남을 가지게 되었네요. 황 부장님도 오랜만에 뵙네요.”
김준성과는 안면이 있는 듯 황태수는 가볍게 목례를 하는 거로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간단히 서로의 소개를 마친 후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저희와 대후건설과는 특별한 연결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상무님께서 미팅을 요청하신 이유가 무척 궁금합니다. 저희와 논의할 일이 있으신지요?”
경환은 짐짓 그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성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다. 김준성은 KBR이 경환과 모종의 관계로 엮어 있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다. KBR이 대형프로젝트를 계속 성공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대후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지리아 입찰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실에 우려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은 경환의 실체에 대해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경환을 통해 KBR의 정보는 얻을 수 있다고 김준성은 판단을 하고 있었다.
“SHJ가 KBR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성건설의 핵심 멤버였던 황태수 부장까지 SHJ와 손을 잡을 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습니다. 솔직히 이 사장님께 여쭙겠습니다. KBR과는 어떤 관계 신지요?”
자신을 도발하려는 김준성의 직접적인 질문에 경환은 크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플랜트업무는 앞으로 여기 계신 황 부장님이 전적으로 맡고 있습니다. 부장님께서 김 상무님의 궁금증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의 지시를 받은 황태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경환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상의를 해 가면서 경환이 가지고 있는 정보력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KBR이 대형 프로젝트를 낙찰 받을 수 있었고 앞으로의 입찰에서도 경환의 정보력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환의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끝끝내 함구를 했지만, 이런 정보를 꾸준히 확보만 될 수 있다면 경환이 꿈꾸는 SHJ의 미래가 허황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저희 SHJ는 KBR과 컨설팅 업무제휴를 체결한 상태입니다. 입찰 및 플랜트 제작 등 전반적인 모든 부분에 대한 컨설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상무님의 궁금증을 풀어 드렸기를 바랍니다.”
황태수의 말에 김준성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KBR이라는 곳에서 실체도 없는 SHJ와 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에 반신반의를 하고 있지만, 황태수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경환은 그런 김준성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럼 제가 상무님께 여쭙겠습니다. 오늘 저희를 찾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김준성의 도발에 화답이라도 하듯 황태수도 직접적으로 김준성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김준성은 그런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저희 대후건설과도 업무제휴가 가능한지 궁금해서 찾아 왔습니다. 같은 한국기업이니 미국기업과의 업무제휴보다는 저희와 하는 게 서로 좋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SHJ와 협의를 해 보고 싶습니다.”
김준서의 대답에 경환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모든 걸 황태수에게 넘긴 상태에서 자신이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 자신을 훈련시킨 황태수라면 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복안을 가지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상무님, 저희와 KBR의 틈을 벌리려고 하시는 건가요? 솔직하게 KENTZ에서 SHJ의 실체를 파악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말씀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세계는 빠르게 글로벌화 하고 있는데, 한국기업 미국기업을 따지시니 제가 듣기가 민망합니다. 대후 회장님의 모토도 세계화 아니었나요?”
황태수의 일침에 김준성은 붉어지는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급히 물을 들이켰다. 경환은 두 사람의 설전을 흥미롭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황 부장님이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물론 KENTZ와는 업무제휴 관계로 공동입찰을 하고는 있지만 대후가 KENTZ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가 거북하네요. 저희는 단지 한국마인드가 통하는 SHJ와의 거래를 위해 먼 북경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정색을 하는 김준성을 향해 황태수는 고개를 끄떡이며 이해를 한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상무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오늘의 만남은 이미 KBR에 통보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괜히 사소한 일로 서로의 오해를 사게 만들면 안 된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나중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저희가 대후와는 거래가 힘든 상황입니다. 이미 다음 프로젝트를 KBR과 진행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상태라 서요.”
다음 프로젝트라는 말에 김준성은 급히 시선을 황태수에게 향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노리는 프로젝트라면 크게 곤란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프로젝트라면….”
김준성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태수는 자세를 바로 하고 김준성을 향했다.
“내년에 있을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 플랜트 입찰입니다. 대후가 나이지리아와는 특별한 관계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저희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 볼 생각입니다.”
황태수의 말에 김준성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우려했던 대로 KBR은 나이지리아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나이지리아만큼은 KBR도 대후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SHJ와의 협력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봐야 되겠네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많이 안타깝습니다.”
“저도 상무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온다면 대후와 일을 같이 해 보고 싶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무의미한 간보기가 끝나고 김준성은 일행들을 이끌고 미련 없이 SHJ를 벗어났다. 황태수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경환은 황태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10월초로 접어든 북경은 제법 한기를 느낄 정도로 싸늘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황태수와 최석현을 위해 경환은 조촐한 식사들 대접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를 했다. 수정은 눈을 흘기면서도 김창동 부인과 함께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음식들로 상을 준비해 놓았다.
“자, SHJ를 위해 먼저 미국으로 떠나시는 황 부장님과 최 차장을 위해 다들 건배합시다. 팀장님 제가 주제넘게 먼저 건배 제의를 합니다. 사모님도 이리로 오시고요. 그리고 팀장님도 한 말씀 해 주셔야죠. 하하하.”
그 동안 여러 인원들을 신경 쓰느라 고생한 김창동의 건배제의에 모두를 술잔을 들었다. 경환은 술을 한잔 비운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동안 제 아내와 태어날 자식을 위해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포함을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일에 매진하는 건 좋지만 절대 가정에 소홀하지 말아 주십시오. 일이 가정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그래서 요새 제 아내에게 많이 혼나고 있습니다.”
경환의 말에 모두들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고 수정은 부끄러웠던지 경환의 허벅지를 아무도 모르게 꼬집기 시작했다.
“부장님, 법인설립이 완료되면 직급을 다시 조정할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만 고생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자리가 잡히는 대로 한국에 계신 식구들을 미국으로 부르십시오. 식구들이 떨어져 있는 건 개인이나 회사에 좋지 않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셔서 주택을 임대해 주십시오.”
경환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 황태수는 가볍게 고개만 끄떡였다.
환송식이 끝나고 다음날 두 사람은 한국을 잠시 거친 후 미국으로 들어갔다. 이젠 경환도 서서히 북경생활을 정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직 왕샹첸과 마무리를 하지 못한 일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상태였다. 왕샹첸과의 정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경환은 경무부를 찾아 왕샹첸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왕 조리님,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제안을 해 주셨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왕샹첸은 이토록 강경하게 경환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줄은 몰랐었다. 총영사인 황민호에게도 요청을 했지만 황민호의 제안까지도 단칼에 잘라 버린 경환의 배짱에 왕샹첸은 더 이상 추태를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샤오 리, 그 동안 내가 자네를 잡기 위해 억지스러운 일들을 벌여 미안했네. 더 이상 자네를 힘들게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게. 그렇지만 우리의 관계는 계속 될 것이니 앞으로 자주 연락하세.”
순순히 자신을 놓아 준 왕샹첸의 진심을 안 경환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찌 되었건 중국 사업을 시작하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 왕샹첸이었기 때문이었다.
“형님, 형님께서 제안하신 일은 김창동 부장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사무실이 안정이 되면 김 부장이 따로 형님을 찾아 뵐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제가 계속해서 지시를 내릴 것이니 염려 마시고 김 부장에게 한번 맡겨 주십시오.”
경환의 말을 들은 왕샹첸은 경환의 어깨를 두들기며 고마움을 전했다. 북경을 떠나기 전 자리를 한번 마련하겠다는 왕샹첸의 말에 경환은 흔쾌히 동의를 한 뒤 경무부를 떠났다. 경환은 북경에서 맺은 인연 하나하나를 정리해 가고 있었다. 이후로도 그 인연들이 필요한 시기가 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기말 시험을 끝으로 경환의 중국유학은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아직 성적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경환은 빠르게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북경과 홍콩의 모든 업무는 김창동에 일임을 했고 관리능력이 뛰어난 김창동은 경환의 기대에 부응을 하기 위해 세심하게 운영을 하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가 짐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가방이 턱없이 부족한데 큰일이네요.”
일 년 반의 북경생활에서 수정이 알게 모르게 사들인 장식품들로 인해 귀국 짐은 예상보다 훨씬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내가 가방을 더 준비할 테니까 우선은 당장 급한 옷들만 먼저 싸자고. 나머지는 미국으로 바로 보내야지 뭐.”
경환은 짐을 정리하다 말고 수정의 손을 잡고 베란다로 향했다.
“아쉽지 않아? 겨우 북경생활에 적응을 하려니 미국으로 가 버리니. 남편 잘못 만난 탓이지 뭐.”
수정은 경환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얼굴을 경환의 가슴에 묻었다.
“아니에요. 난 자기와 결혼을 하게 돼서 너무 행복해요. 그 동안 투정도 많이 부렸는데 싫은 소리 한마디고 안하고, 내가 주변사람한테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 했다고 해도 믿어 주질 않더라고요. 고마워요 자기가 내 옆에 있어줘서.”
경환은 그런 수정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급히 수정의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술로 덮쳐갔다. 손을 뻗어 수정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경환은 입술을 내려 봉긋한 수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급히 수정을 안고 침대로 향하던 경환은 갑자기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 누구.세요?”
“사장님, 저 인준이 엄마에요. 짐 싸는걸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갑자기 찾아온 인준 엄마의 방문에 급히 옷을 추린 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을 달랜 후 문의 열어 주었다. 분위기가 묘한 것을 느낀 인준 엄마는 얼굴이 붉어졌다.
“호호호, 제가 너무 빨리 왔나 보네요. 미안해서 어쩌나.”
경환은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었고, 수정은 급히 인준엄마의 손을 붙잡고 짐 싸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인준엄마는 수정을 향해 눈치를 계속 주고 있었고 수정은 알았다는 듯이 경환을 불러 세웠다.
“자기, 나하고 약속하나 해줘요.”
느닷없는 약속타령에 경환은 무슨 약속이냐며 수정에게 되물었다.
“앞으로 김 부장님 미국 출장 자주 갈 텐데, 가끔씩이라도 언니를 같이 부르겠다고 여기서 약속해줘요. 나 미국가면 혼자 외로울 텐데 언니도 많이 보고 싶을 테고….”
경환은 멍한 표정으로 수정과 인준 엄마를 바라 봤지만, 두 여자는 이미 작당을 했는지 결연한 표정들 이었다. 김창동이 불쌍하긴 했지만 수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알았습니다. 제가 제 아내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매번은 힘들겠지만 일 년에 한번 정도는 미국에 같이 오실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경환의 약속을 받아낸 두 여자는 서로 호호 거리며 짐 싸는 일을 계속했다. 남자는 여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경환은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