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다시 사는 인생 - 38
경환은 윌리엄과의 미팅을 내일로 미룬 후, 최석현을 호텔로 불렀다. 경환의 연락을 받은 최석현은 하던 일을 급히 중단하고 서둘러 호텔에 도착을 한 상태였다.
“계장님, 윌리엄과의 협의가 대충 마무리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계장님은 언제쯤 출국이 가능 하시겠습니까?”
사람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이라 경환은 윌리엄이 약속한 4백만 불을 최대한 빨리 받아 낼 생각이었다. 최석현은 경환의 급한 표정을 읽었는지 잠시 생각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저야 아직 부모님과 같이 살기 때문에, 주변정리만 조금 하면 출국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라도 바로 출국을 할 수 있습니다.”
최석현의 시원스러운 답변은, 경환을 급한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해 주었다. 최석현에게는 미안하긴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홍콩의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감사합니다. 식구들과 구정도 같이 못 지내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홍콩에 빨리 가 주셔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구정이 지나고 바로 홍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팀장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가서 해야 될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경환은 최석현에게 페이퍼컴퍼니 설립과 관련된 지시를 내린 후 호텔을 나설 수 있었다. 내일 있을 윌리엄과의 2차 협상을 준비해야 했고 가장 중요한 수정을 설득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경환은 처가에 도착한 후 수정의 기분부터 살폈다. 오랜만에 보는 식구들이라 그런지 수정은 한시도 쉬지 않고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 동안 맘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심심했을까’ 이런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원래의 수정이 모습이 저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경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야, 시간 있으면 나 좀 잠깐 볼까? 할 얘기가 좀 있어.”
경환의 부름에 수정은 하던 수다를 멈추고는 경환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경환은 수정의 눈치를 한참 동안 살핀 후에 수정의 손을 잡고 나직이 속삭였다.
“내일 급하게 만 불이 필요해, 은행에서 7백만 원을 환전하면 만 불 정도 될 거야. 오전 중으로 찾아다 줬으면 해.”
경환은 수정이의 반응을 걱정하며 수정이가 화를 냈을 때를 대비해 다음 말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만 불만 환전을 해 오면 되는 거죠? 아침에 은행 문 열면 같이 가서 환전해요.”
‘어? 이건 뭐지?’
중국 돈 100원을 용돈으로 주면서도, 아껴 쓰라는 잔소리를 수십 번이나 하는 수정이었기에 경환은 지금 이런 수정이의 반응이 전혀 적응이 안 되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의 눈치를 다시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게 다야? 지난번처럼 사람을 잡을 줄 알았는데.”
“돈은 아껴야 되지만, 돈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까지 막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자길 믿으니까요.”
경환은 그런 수정의 마음이 고마워 아무 말 없이 수정을 끌어안았다.
윌리엄과 린다는 어제 있었던 경환과의 만남에서 아무런 실익을 거두지 못했다고 자책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경환과 윌리엄의 사이가 벌어지는 실수까지 한 상황이었다. 윌리엄은 입맛이 떨어졌는지 포크와 나이프를 한쪽으로 치우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윌리엄, 아직 제임스와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는 아니라고 봐요. 우리가 준비하는 다음 프로젝트까지 제임스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우리와 손을 잡게 만들어야만 해요.”
린다의 말에도 윌리엄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늦게나마 경환이 말한 3%의 커미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경환은 오늘 다시 미팅을 하자는 말만 남기고 확답을 주지 않은 채 돌아가 버렸다. 자신의 실책을 후회하고는 있지만, 제임스와의 관계를 복원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를 했어. 만약 제임스가 나이지리아 프로젝트의 정보를 가지고 다른 업체로 가게 된다면…. 우리도 쉽지 않겠지? 생각하기도 싫군.”
이번 사우디 입찰 건에서 보여준 경환의 정보력은 상상이상의 것들이었다. 윌리엄은 이러한 정보력을 갖춘 경환이 KBR과 등을 돌리게 된다면, 총 없이 전장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나이지리아 입찰은 최악의 경우 포기를 해야 될 지도 몰랐다.
“윌리엄, 제임스가 지난번 미국에서의 만남 때, 화성산업과의 기술이전에 대해 협의를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나요? 윌리엄이 거절을 했던…. 제 생각엔 제임스가 오늘 가지고 올 내용이 기술이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린다의 말에 윌리엄은 사우디 입찰이 끝난 후 다시 협의를 하자는 말로 거절의 의사를 표시 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 이후로 제임스와의 틈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린다는 이 문제를 제임스와의 관계 회복에 활용하려고 했다.
“윌리엄, 우리가 제임스 보다 먼저 기술이전에 대한 제안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 계장님, 우선 이거 먼저 받으세요.”
경환은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최석현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받아 든 최석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만 불입니다. 우선 이 돈으로 가지고 최대한 빨리 홍콩으로 떠나시기 바랍니다. 돈 아끼신다고 허름한 호텔에 머물지 마시고, 최소한 4성급 이상의 호텔에서 묵으세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적당한 아파트를 찾아 임대계약도 하시고요. 페이퍼컴퍼니와 외환구좌는 개설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가능하면 제가 홍콩에 가기 전에 완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주셨으면 합니다.”
최석현은 봉투를 받아 양복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알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출국을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팀장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지시하신 사항을 처리해 놓겠습니다.”
“오늘 윌리엄과의 미팅에 저와 같이 참석을 하시고, 홍콩으로 떠나시기 전에 전화 한 통 주세요.”
최석현과 말을 마친 경환은, 빠르게 자리를 이동했다. 오늘 있을 윌리엄과의 최종 협상이 어떻게 진행 되느냐에 따라 경환의 행보도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긴장된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경환과 최석현을 윌리엄은 과장된 액션까지 보이며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미스터 리, 어제의 오해는 다 풀었기를 바랍니다.”
과장된 웃음을 보이면 자신의 손을 머리 쪽으로부터 떨어트리며 경환에 악수를 청하고는 경환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경환의 손을 잡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미스터 유트, 린다. 미스터 최는 아시리라 봅니다. 오늘부터 저와 같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KBR과의 업무연락은, 미스터 최가 당분간 홍콩에서 담당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최석현을 정식으로 소개를 시켰고, 경환이 홍콩에서 사업을 먼저 시작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윌리엄과 린다는 홍콩과 경환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경환과 최석현은 윌리엄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미스터 리, 어제의 일은 정식으로 사과를 합니다. 아울러, 우리 KBR은 특수플랜트 제작에 대한 일부 기술을 화성산업으로 이전을 진행시킬까 생각 중입니다. 이에 대한 컨설팅 업무를 미스터 리가 맡아 주었으면 합니다.”
윌리엄의 말을 들은 경환은 찝찝했다. 물론 기술이전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제 좀 무리하게 윌리엄을 압박한 건 있었지만, 윌리엄이 선수를 치고 들어올 줄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윌리엄의 의도를 파악해야만 했다.
“미스터 유트, 좋은 소식입니다. 화성산업은 KBR의 좋은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조건이 있으십니까?”
윌리엄은 두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린 후 웃던 웃음을 멈추고 경환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화성산업의 지분 30%를 인수하는 게 우리의 조건입니다. 10%는 기술이전에 대한 대가이고 20%는 현금 인수방식입니다. 아울러 미스터 리와 KBR과의 독점적 컨설팅 계약이 그 두 번째 조건입니다. 컨설팅 비용은 미스터 리가 요구한 수주금액의 2% 입니다.”
경환은 미간을 찡그리며 윌리엄의 제안에 대해 적절한 답안을 만들고 있었다.
“저는 화성산업의 오너가 아니기 때문에 지분인수에 대한 답변을 드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그러나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하에서, 총 20% 그 중 기술이전의 대가로 5%, 현금인수로 15%, 이 수준이라면 화성산업과 협의를 해 볼 의향은 있습니다. 또한 저와의 독점적 컨설팅계약은 거절하겠습니다. KBR을 우선적으로 고려는 해 볼 수 있지만, KBR만 보기에는 제가 꿈이 좀 큽니다.”
경환은 이를 악 물고 있었다. KBR을 발판으로 자신의 꿈을 펼쳐야 되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KBR에 종속되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윌리엄이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또 다시 힘들 길로 가야 될 수도 있었다.
“미스터 리, 당신이야 말로 쉽지 않은 사람이군요. 좋습니다. 기술이전 대가 7% 현금인수 16%, 총 23%의 지분참여가 제 마지막 제안입니다. 미스터 리와의 컨설팅 업무 제휴의 독점은 저도 포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미스터 리도 말했듯이, KBR이 최우선적인 지위를 갖는 것은 인정을 해 주셔야 됩니다.”
최승화가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모든 프로젝트를 KBR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한다면 KBR과 장기 협력 체제를 갖추는 것도 사업초기 나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윌리엄이 선수를 치고 나오는 바람에 주도권을 윌리엄이 가지고 협상을 했다는 것이 경환은 자존심이 상했다. 오늘 있은 협상은 윌리엄에게 제대로 한방을 먹은 경환이었다.
최석현은 정신이 없었다. 이 팀장의 능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KBR의 사장 입에서 독점적 컨설팅 계약과 화성산업의 지분참여까지 협의가 될 줄은 상상을 하지 못했다. 최 계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아직은 자신이 경환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느끼며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환은 린다의 요청을 받아들여, 호텔 바에서 술을 한잔 나누고 있었다.
“제임스, 당신은 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흔한 동양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흐트러지고 있는 린다를 보며, 경환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린다, 난 꿈이 큽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떼돈을 벌고 싶다는 게 내 목표이고 꿈입니다. 많이 힘든 길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도전을 해 보고 싶네요.”
“그 꿈을 이루기를 옆에서 지켜볼게요. 이럴 때는 나이를 먹었다는 게 너무 후회가 되네요.”
린다는 술을 마시고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겼다. 30대 후반의 여자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린다는 매력적이었다.
“린다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입니다. 과거의 저라면 린다의 이런 모습에 정신을 못 차렸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지켜야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호호, 제임스가 지켜야 될 사람 중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린다는 손을 뻗어 경환의 손 위를 슬그머니 덮었다. 그러나 경환은 그런 린다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받아주었다.
“린다가 간절히 원하는 꿈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경환의 질문에 린다는 잠시 주춤하더니, 경환의 손 위에서 자신의 손을 슬며시 거둬들였다.
“지금의 위치에서 더 위로 올라 가보는 게 내 꿈이에요. 그러나 요즘 많이 힘에 부치네요.”
말을 마친 린다는 경환을 향해 씁쓸한 웃음을 보이고, 술 한 잔을 급히 마셨다.
“린다는 시간이 지난다면 분명 자신의 꿈을 이룰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거나 해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저는 최소한 KBR 보다는 더 크게 성공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제 주위에 그걸 도와 줄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그렇다고 린다에게 윌리엄이나 잭을 배신하라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단지 린다의 꿈을 다 이루고, KBR에서 더 큰 꿈을 꿀 수가 없을 때, 저와 같이 일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린다라면 5년 후든 10년 후든 상관하지 않고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경환은 린다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끌었고 고개를 숙여 린다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요. 린다는 앞으로도 저의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남을 겁니다.”
“한 번 더 해줘요. 이후엔 우린 좋은 친구로 남게 될 거에요. 나도 미련을 버리겠어요.
린다는 주위의 시선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경환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나눈 후 경환의 품에 안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