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다시 사는 인생 - 37
북경에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은 매서웠다. 살을 에는 듯 한 차가운 바람은 경환과 수정을 집안에만 맴돌게 만들었다. 경환은 가끔씩 학교를 가는 거 외에는 집에 틀어 박혀 사업을 위한 기초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학기말 고사를 마치고 나서 경환은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학교수업을 제대로 듣지를 못했기 때문에 좋은 시험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교통부와 대외경제무역부의 일을 의뢰 받는 조건으로 낙제는 면하게 해 준다는 확답은 받아 놓은 상태라 성적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자문위원 활동은 구정을 지난 후 본격적으로 하기로 했기에 경환은 한국에 머물면서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진행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기야, 요번에 한국에 나가게 되면 미국에 잠시 다녀와야 될지도 모르니까 미국 갈 준비도 해야 돼.”
“알았어요. 미국엔 절대 자기 혼자 못 보내니까, 혼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수정은 극도로 린다를 경계하고 있었다. 경환과 키스를 했던 여자라는 것도 있었지만, 둘을 같이 놔두면 안 된다는 여자 특유의 직감이 발동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수정의 마음을 읽었던지 경환은 수정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자기야. 내가 자길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경환은 수정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수정을 목숨만큼 사랑하지만, 수정에게도 알릴 수 없는 비밀을 평생 간직해야만 했다.
KBR본사의 사장실에 린다와 윌리엄이 초조 듯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에게 전달받은 정보를 이용하여 압둘라 왕세제를 통해 술탄을 압박하도록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동시에 경환이 제시한 입찰가로 입찰을 마쳤고 지금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린다. 잭의 말로는 제임스 뒤에 정보카르텔이 존재 한다고 하더군. 처음엔 나도 의심을 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잭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제임스 개인의 능력도 뛰어나다고 봐야 됩니다. 윌리엄. 그런 조직에서도 제임스의 위치는 낮지는 않을 테니까요.”
윌리엄은 4백만 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단지 어떤 방법으로 제임스와 KBR을 장기적으로 연결 시켜야 될 지가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띠리링~~, 띠리링~~’
전화벨이 울리기 무섭게 윌리엄은 수화기를 들었다.
“날세.”
이 한마디를 끝으로, 윌리엄은 한참 동안을 말없이 수화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통화가 끝나고 윌리엄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윌리엄, 어떤 결과인가요?”
“흠…. 제임스의 말대로 백만 불 차이로 우리가 입찰에 성공을 했다는군.”
규모가 가장 큰 프로젝트를 KBR이 손에 넣는 순간이었다. 윌리엄과 린다는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축하를 대신하고 있었다.
“린다, 잭이 제임스와는 절대 척을 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 백만 불 차이까지 예상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모르겠어.”
“윌리엄, 제임스는 이번 거래를 시작으로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할 거예요. 비즈니스에 영원한 아군이 존재하지 않듯이, 제임스도 다방면으로 자신의 정보를 활용하려고 할 거예요. 우리가 선점을 해야 해요. 마침 북경지사의 안젤라의 말로는 제임스가 곧 한국으로 잠시 귀국 한다고 해요. 제가 한국에 가서 제임스를 만나보겠어요.”
린다는 제임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입찰 수주로 윌리엄과 잭의 회사 내 위상은 한층 더 올라가게 되었지만, 야심 많은 린다는 아직 그 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임스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만 있다면, 자신의 꿈은 한 층 더 가까워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린다의 머리위에 있었다.
“아니야. 내가 직접 가야 될 거 같아. 린다도 동행을 하기로 하고. 우선 안젤라에게 연락해서 제임스의 정확한 스케줄을 파악해 보라고 해.”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는 린다는 이빨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김포공항 입국장 전광판에는 홍콩에서 출발한 항공기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고, 경환과 수정은 급히 입국장을 빠져 나왔다. 숨 막히는 중국 생활에서 반년 만에 맞이하는 편안함과 자유스러움에, 그 동안 쌓였던 긴장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선 빨리 가서 인사부터 드려요. 다들 기다리실 텐데.”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반년 만에 식구들과 재회를 할 수 있었다. 수정은 그 동안 중국에서의 생활을 뻥튀기를 해 가며 무협 소설을 쓰고 있었고, 경환은 가타부타 말없이 수정이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경환과 수정은 양쪽 집안을 오가며 그 동안에 소홀했던 사위, 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귀국 전 안젤라로부터 윌리엄의 한국 방문을 전해 듣고 서서히 준비해 온 계획을 펼칠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었던 경환은 최승화의 연락을 받고 오래간만에 화성산업을 찾았다.
“사장님 사업은 잘 되신다고 간간히 듣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경환은 윌리엄과의 협상에 화성산업과의 계약까지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윌리엄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최승화에게는 확실한 답변을 줄 수는 없었다.
“공산당이 판치는 중국에서 이 팀장이 고생이 많았겠어. 그래도 얼굴은 더 좋아진 거 같아서 보기는 좋구먼.”
최승화는 말은 마친 후 인터폰으로 최 계장을 찾았다. 곧 이어 사장실로 들어 온 최석현을 경환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최 계장도 여기 자리에 앉게. 이 팀장, 내가 자네에게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하네. 다름이 아니라 최 계장을 이 팀장이 좀 책임을 져 줘야겠어.”
최승화의 말에 경환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최 계장이 자네가 떠난 다음부터 맘을 제대로 못 잡고 있었네. 무작정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걸 내가 잡았어. 유학을 가더라도 자네가 최 계장을 도와주면 좀 수월할까 싶어서 말이야. 내가 부탁 좀 할 테니 최 계장을 자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네.”
최석현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경환은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어 내심 기뻤지만, 그걸 최승화 앞에서 표현 할 수는 없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경환은 최석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금 저는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누굴 책임질 만한 능력도 되지 못합니다. 사장님께서 이런 저에게까지 부탁을 하시니 제가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정말 고민이 많이 됩니다.”
경환은 두 사람 앞에서 고민이 많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최 계장님, 저와 함께 한다면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고,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셔야 될 텐데, 그래도 저와 같이 하실 맘이 있으십니까? 제가 당장은 제대로 월급도 드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잘 생각하셔서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네, 풀뿌리를 뜯어 먹더라도, 팀장님과 같이 일해 보고 싶습니다.”
최석현은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경환의 질문에 답을 해 버렸다. 경환은 그런 최석현이 고마웠지만, 겉으로 표현 하지는 않았다.
“사장님, 그럼 최 계장과 같이 일을 해 보겠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최 계장님은 잠시 저와 얘기 좀 나누시죠.”
최석현과 건물 앞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장님이 저와 같이 한배를 타기로 결정을 한 이상,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몇 년 만 고생을 한다면, 계장님도 충분히 보람을 느끼실 수 있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경환의 말에 최석현은 환하게 웃으며 경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팀장님과 일을 했을 때가 그리웠습니다. 보람도 있었고요. 절 받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경환은 최석현의 합류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최석현이라면 경환이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은 최석현 밖에는 사람이 없지만, 인연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을 했다.
“계장님, 며칠 후면 KBR의 윌리엄과 린다가 한국을 방문할 것입니다. 제가 그들과 협상이 끝나면, 계장님은 바로 홍콩으로 떠나 주십시오. 홍콩에서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후 외환구좌를 개설하시면, 제가 따로 지시를 드리겠습니다. 일 년만 홍콩에서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일 년 아직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분이 더 우리와 합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합류가 된다면 계장님과 업무를 분담하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윌리엄과 린다의 한국 방문부터 체크해 보겠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대답부터 해 주는 최석현이 경환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제 준비 과정을 끝내고 경환은 서서히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며칠 후 경환의 귀국에 맞춰 윌리엄은 급히 한국을 찾았다. 경환이 제공한 정보의 확실성이 확인 된 이상 우물쭈물 할 여유가 없었다. 혹시라도 경환이 다른 업체와 거래를 트기라도 한다면 앞으로의 입찰 전쟁은 승리를 장담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스터 유트. 린다도 오랜만이구요. 그리고 입찰을 수주하신 일도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리, 반갑습니다. 미스터 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윌리엄이 잭과의 계약을 무시하고 입을 씻는다 해도 경환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경환은 겸사겸사 미국을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윌리엄의 한국 방문으로 미국에 다녀 올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경환은 윌리엄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물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계약을 무시 하지 않을 정도로만.
“제가 드린 정보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급히 한국에 오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하하, 우선 미스터 리와 우리 KBR과 체결된 계약은 이행을 할 것입니다. 구좌를 지정해 주시면, 바로 송금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스터 리와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앞으로 장기적으로 미스터 리와 KBR이 상생의 파트너십을 맺으면 어떨까 싶어서 입니다.”
경환은 우선 계약된 4백만 불이 차질 없이 집행된다는 소리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구좌를 지정해서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미스터 유트의 제안대로 KBR과 장기적인 협조 체제에는 찬성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KBR에 얽매이는 파트너십 관계라면 별로 달갑지 않은 제안인 거 같습니다. 그런 조건이 아니라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미스터 유트의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윌리엄은 급히 서둘러 한국에 오느라 아직 조건에 대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 아직 준비가 안 되신 것 같네요. 그럼 저희 조건을 먼저 말하겠습니다. 낙찰금액의 3%를 컨설팅 비용으로 주십시오. 그럼 제가 긍정적으로 설득을 해 보겠습니다.”
3%는 적은 금액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입찰수주에 대한 정보가 제공이 된다면, 아님 입찰을 무리 없이 성공만 할 수 있다면 3%가 아니라 5%도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돌다리도 한 번 더 두들겨 봐야 했다.
“매번 정보가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3%는 좀 과한 게 아닌가요?”
“미스터 유트,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지금 여기는 네고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또한 이 자리는 제가 만든 자리도 아닙니다.”
경환은 윌리엄이 숨 쉴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방을 터트려야 할 시기였다. 경환은 윌리엄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어 놔야 일이 수월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이지리아 건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유가로 인해 중동지역 프로젝트가 지연되거나 취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이지리아 프로젝트를 노리는 업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미스터 유트, 당신과의 거래는 많이 힘이 드네요. 제가 KBR에 아쉬운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잭과 린다와의 인간적인 친분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미스터 유트, 이 자리가 불편하시거나 제 요구조건이 과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거래는 없던 거로 하십시오.”
윌리엄은 ‘아차’ 싶었다. 경환을 믿지 못하다가 큰 코를 다쳐 지금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또 잊어 버렸다. 자칫 경환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였다.
“미스터 리, 죄송합니다.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체결하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미스터 리의 요구는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경환은 독점권을 KBR에 줄 생각은 없었다. 프로젝트 별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KBR과 협력관계를 만들어갈 계획이었다. KBR 한 업체만 바라보기엔, 경환이 생각하는 계획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