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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39화 (3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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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39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경환과 수정은 오히려 북경에서의 생활보다도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경환은 자신이 계획했던 사업을 위해 수정은 그 동안 못 했던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김포공항에선 홍콩으로 떠나는 최석현을 경환이 배웅을 하고 있었다. 경환은 최석현이 걱정되긴 하였지만, 지금은 최 계장을 믿을 수밖에는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계장님의 건강입니다. 항상 건강에 소홀하지 않게 주의하세요. 페이퍼컴퍼니이긴 하지만 회사가 설립이 되면 직급도 조정을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고생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장님의 이번 고생은 제가 평생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하하하, 팀장님. 제 걱정하지 마세요. 악으로 깡으로 부딪혀 보겠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팀장님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최석현은 경환과 굳은 악수를 나눈 후 출국장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최석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경환은 자신의 꿈이 서서히 시작되는 것을 느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공항을 빠져 나온 경환은 자신의 제안에 답을 주지 않고 있는 최승화와 담판을 짓기 위해 화성산업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최승화는 자신 혼자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마산공장의 최승호까지 서울로 불러들였다. 지난주 경환이 제시한 KBR의 지분인수 제안에 대해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호야, 네 생각은 어떠냐? 사실 난 이 팀장이 한 제안만 아니었다면,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을 거다.”

    최승화는 돈 몇 푼에 회사의 지분을 넘긴다는 게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라면 지금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키워온 회사의 지분을 팔아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최승화의 마음을 동생인 최승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형님, 형님이 고민하는 이유 제가 잘 압니다. 저도 이 팀장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제안이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형님, 이 팀장이 그 동안 우리에게 해 되는 일을 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이 팀장이 아니었다면, 솔직히 우리도 얼마 버티지도 못했을 거구요. 이 팀장이 오면 얘기라도 들어 봅시다. 그 후에 결정을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최승호의 말에 최승화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최승호의 말대로 경환이 화성산업에 오지 않았다면, 치솟는 인건비에 반해 하락하는 납품가와 지나친 경쟁으로 몇 년 버티지 못하고 공장은 문을 닫아야 될 처지였다.

    “사장님, 이경환 팀장님이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경환이 들어왔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최승화와 최승호의 모습을 본 경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장님 표정을 보니 고민이 많으신 거 같으시네요. 전무님도 밝은 표정은 아니시고요.”

    최승호는 경환을 향해 말을 하려다 멈칫하고는 소파에 다시 등을 기댔다. 경환은 두 사람의 고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이 팀장, 자네의 제안을 듣고 요 며칠 잠을 못 잤어. 솔직히 말해 주게. KBR에 지분을 넘기는 일이 화성산업을 위하는 길이라고 보는가?”

    최승화는 고뇌에 찬 얼굴로 경환을 향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장님, 사장님께서 피땀으로 세운 화성산업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회사의 지분을 넘긴다는 것에 대해 크게 불안해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화성산업이 언제까지 동네 구멍가게 수준에만 머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올해 중국과 수교가 체결된다면, 단순 철골제작은 빠르게 중국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저가공세를 버틸 수가 없습니다.”

    최승화와 최승호는 중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경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렀게까지야 되겠나.”

    “사장님, 중국의 인건비는 한국에 비해 10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 10배를 원가에 반영시킨다면 버틸 수 있으시겠습니까?”

    경환의 말에 두 사람은 벌린 입이 닫히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의 단순노동자 임금은 한화로 월 5만원 수준이었다. 이런 이유로 실제적으로도 단순철골제작은 수교 후 빠르게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경환은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기술력을 확보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체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투자와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KBR과 손을 잡게 된다면 이러한 무리한 투자와 시행착오 없이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아울러 KBR의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화성산업이 글로벌한 기업으로 탈바꿈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KBR이 백그라운드에서 버티는 한 국내기업에 휘둘리지 않고 화성산업의 독자적인 브랜드를 창출할 수도 있습니다. 사장님, KBR이 제시한 23%의 지분을 그냥 줘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제안을 받아 들이셔야 된다고 봅니다.”

    최승화는 경환의 말에 눈을 감고 고민에 빠져 들었다. KBR과의 계약 이후 국내 대기업의 물량은 넘쳐나고 있지만, 그 외적으로 대기업의 압력 또한 만만치 않게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오성건설은 오성엔지니어링을 전면에 내세워, 화성산업의 제안을 거절하고 단독으로 KBR과의 기술이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형님, 이 팀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요즘 들어 오성건설과의 협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도 이 팀장의 말을 들어보니 설명이 되는 거 같고요.”

    최승화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경환 또한 오성건설과의 협의가 되지 않고 있다는 최승호의 말에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 자신이 일했던 오성건설과 인연을 쌓아 가려고 했던 경환은 자신과 엇갈려 가는 오성건설을 보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퍼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성엔지니어링은 KBR과 기술제휴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 이번 KBR의 지분참여가 이뤄지게 된다면 오성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에서도 화성과의 합작내지는 지분인수를 제의해 올 것입니다. 대기업의 특성상 KBR의 기술을 확보한 후에는 화성을 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국내 기업과의 지분거래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는 최승화였지만, 경환은 화성산업의 도약을 위해 불가피 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었다. 경환은 윌리엄이 한국에 와 있는 지금 화성과 KBR과의 MOU(양해각서)라도 먼저 체결을 시키기 위해 최승화를 설득하고 있었다. 경환은 화성산업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회귀 후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화성산업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좋네. 이 팀장의 말에 따르겠네. 그 대신 나도 조건이 하나 있어. 그 조건을 자네가 수락한다면 이번 KBR과의 지분참여를 받아들이겠네.”

    최승화는 고민을 끝냈는지 큰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경환은 최승화의 조건이 무엇인지 몰라 긴장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 어떤 조건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능력이 닿는 것이라면 수락을 하겠습니다.”

    최승화는 긴장을 하고 있는 경환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최승호는 자신의 형님인 최승화가 어떤 조건을 말할지 경환과 같이 궁금해 하고 있었다.

    “화성은 우리 집안의 기업일세. 여기 최 전무가 20%, 내 아내가 15%, 우리사주 5%를 가지고 있어. 우리 화성이 살기 위해선 KBR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자네의 말 동감하네. KBR의 지분참여는 자네가 우리 화성산업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먼저 선결되어야만 진행을 할 것이네. 그러기 위해서 내 지분 10%를 자네에게 무상으로 양도 하겠네. 자네가 수락한다면 나도 KBR의 제안을 수락하겠네.”

    “하하하, 형님 그거 아주 묘안이시네요. 나도 사장님과 같은 의견이네. 자네가 우리 화성과 끈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다른 곳에 휘둘리지 않게 자네가 방패막이가 돼 주지 않겠나. 형님, 난 찬성입니다.”

    경환은 뜨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최승화의 조건이 이런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해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망해가는 회사라도 지분 10%를 무상으로 양도해줄 사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조건입니다. 저는 단순하게 화성산업이 플랜트업계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다른 조건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조건은 없네. 이 조건을 수락하고 안하고는 자네 맘이야. 알아서 결정하게. 나도 자네의 결정에 따라 KBR의 제안을 결정할 것이야.”

    경환은 황당한 최승화의 제안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화성산업으로 향하는 윌리엄과 린다는 차 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미 본사의 경영진들은 윌리엄이 설득하여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였다. 린다는 경환의 제안을 받은 이후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KBR에서의 자신의 성공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 왔지만 요즘 들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며 한계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건가?”

    “아… 아니에요. MOU 체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린다는 자신의 생각을 윌리엄에 들키기라도 한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화성산업의 미스터 최도 가볍게 볼 사람은 아니야. 자신의 지분 10%를 제임스에게 무상으로 양도를 할 생각을 다 하니. 허허.”

    “우리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제임스를 중간에 둔다면 우리도 화성산업을 우리의 입맛대로 통제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이겠죠.”

    린다는 좀 전의 생각을 빠르게 머리에서 지워 내렸다.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KBR의 직원일 뿐이었다. 차는 빠르게 화성산업에 도착을 하였다. 건물 로비에는 최 사장과 경환이 두 사람을 반갑게 반기고 있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두 회사의 관계는 미래를 향해 같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두 사람을 인도하여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 도착한 윌리엄은 테이블에 놓여진 MOU를 살펴본 후 린다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우리 KBR은 화성산업의 특수플랜트 제작에 대한 기술이전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아울러 KBR과 화성산업은 동반자로 세계무대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윌리엄은 노련한 기업가답게 최승화의 손을 맞잡고 환한 웃음을 선 보였다. 린다의 검토를 마친 MOU가 윌리엄에게 전달되고 최승화와 윌리엄은 MOU에 각자 사인을 마쳤다. 사인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악수를 하며 한 달 이내에 정식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오성건설 해외영업부로 엔지니어링의 고승철 이사가 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황 부장의 자리로 뛰어갔다.

    “황 부장님, KBR과 화성산업 간에 기술이전에 대한 MOU가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MOU가 체결 되었다니요?”

    황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 이사를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화성산업과의 협력관계에 대해 경영진들을 끊임없이 설득해 왔지만, 단순 하청업체인 화성산업에 대해 경영진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황태수의 제안을 묵살해 버렸다. 이에 더 나가 오성엔지니어링을 전면에 내세워 KBR과의 직접 협상을 추진해 오고 있었다.

    “KBR이 화성산업의 지분을 23% 인수하는 조건으로 특수플랜트의 기술이전에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렸어요. 허…, 참.”

    “이젠 KBR 뿐만 아니라 화성산업에게서도 우리 오성이 신뢰를 잃게 생겼습니다. 전 그게 더 걱정이네요.”

    “화성산업과 연결을 해 봤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와의 만남을 모두 거절을 했습니다.”

    고승철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황태수를 바라보았다. 황태수로부터 화성산업의 일을 이관 받은 후 자신들의 2차 하청업체였던 화성산업을 무시한 채 KBR과의 독자협의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황태수는 자신이 좀 더 경영진을 설득하지 못한 것을 후회 하고 있었다.

    “고 이사님, 앞으로 어떤 계획이십니까? 화성산업에서는 당연히 저희와의 거래에 미온적인 태도일 것은 뻔 하지 않습니까?”

    황태수는 고승철을 은연중에 질책하고 있었지만, 고승철은 헛기침만 할 뿐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화성산업은 황 부장님이 제안한 업체이니, 다시 건설에서 추진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희 보다야 경험도 많으실 테고…. 윗분들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고승철의 얼굴에 욕지거리를 뱉고 싶었지만, 황태수는 억지로 삼키고 있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친구가 있으니 연결을 해 보긴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도 해결할 방법은 쉽게 보이지 않는군요.”

    황태수의 말을 들은 고승철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듯이 사무실 문으로 빠져 나갔다. 황태수는 이경환이란 친구가 이번 MOU 체결에도 관여를 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급히 경환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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