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한다는 이 말 밖에는
‘도대체 연인의 교감이란 뭘까.’
화장실에 들어가기 직전, 덥석 붙잡혀버린 현덕은 이런 의문에 휩싸였다. 갑자기 덥쳐오는 누군가를 밀치거나 패야 한다는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어깨에 닿는 숨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으니까.
주민이 현덕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어찌나 꽉 껴안던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현덕은 주민에게 힘 좀 빼라고 타박하는 대신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주민은 제 입술에 닿은 현덕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화장실은 최근에 싹 수리해서 백화점 화장실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현덕과 주민,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재벌 3세의 영행력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허황된 망상일까?
현덕은 재벌 3세의 재력과 권력이 이 현대 사회에서 어디까지 통용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주민이 끄는대로 순순히 끌려 들어갔다. 주민은 현덕을 소중히 안아 들고는 화장실의 제일 안쪽 칸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민이 문을 잠그는 사이, 현덕은 돌아서서 주민을 보았다. 단추를 서너 개쯤 풀어 헤친 실크 와이셔츠에 슬림핏의 검은색 정장. 머리는 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목 위는 볼 엄두가 안 났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직도 귓가엔 주민의 노래 소리가 남아 있었다. 담백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쓸쓸하고, 또 고요했다. 기교 없이 길게 이어지는 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현덕을 슬프게 했다.
현덕이 조용히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와 화장실로 온 것도 그 슬픔을 남몰래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나쁜 말을 들으면 강가로 가서 귀를 씻는다는 중국의 고사처럼. 할 수만 있다면 귀를 씻어서라도 그 목소리를 잊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민이 찾아왔다.
주민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런 주민을 바라보는 자신은 또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혹여 알량한 동정심이나 슬픔을 드러내어 주민을 상처 입히면 어쩌지. 그러한 생각들이 머리에 꽉 들어찼다.
그런 현덕을 보았다.
“나 봐. 나 봐야지, 현덕아.”
주민은 문에 기대 서서 현덕에게 속삭였다. 달래듯, 꾀어내듯, 혹은 협박하듯.
“…….”
현덕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주민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현덕을 잡아 당겼다. 다행히도 현덕은 버티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주민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얼굴 보기 싫어?”
주민은 현덕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물었다.
“으으.”
현덕은 어깨를 움츠렸다. 주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게 입을 맞췄다.
현덕의 심장 소리가 입술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아직 내 손에 있어. 내 거야.’
주민은 현덕의 어깨를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현덕은 간지러워하면서도 주민을 털어내지 않았다.
“보기 싫은 게 아니라.”
“그럼.”
“……그냥, 내가 못 미더워서요.”
“뭐가.”
“그냥 다.”
“나 버리지 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왜 나와요.”
현덕은 주민의 앞머리를 한 움큼 쥐어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고는 다정히 쓸어 넘겨 주었다.
열여덟 살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른 살 훌쩍 넘은 나이이기도 한데. 그 나잇값을 어디로 먹은 건지, 이런 상황에서 주민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안해하며 자꾸 자신에게 치대는 주민이 안쓰러워 울 뿐이었다.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서.’
좀 더 능숙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 주민의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어떤 말로든 주민을 위로해주고 주민에게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자괴감이 들었다.
‘아냐,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현덕은 주민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우주민 옆에 있는 건 나야.’
서툴면 서투른 대로, 늦으면 또 늦는 대로. 그렇게 주민의 곁에서 주민을 좋아하자. 현덕은 마음을 다잡았다.
주민은 그저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듯했다. 주민이 웃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현덕은 그런 주민이 짠해서 애간장이 녹았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주민의 등을 슬슬 쓸어주었다.
주민은 기분이 좋은지 흐음, 낮게 신음했다. 그 바람에 현덕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딴 생각. 딴 생각.’
현덕은 애써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자꾸만 다리에 닿는 주민의 것이 신경쓰였다. 슬슬 열이 받는 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짓궂게 달려들었을 주민이 얌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 네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주민이 말했다.
현덕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주민은 현덕을 꽉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나랑 계속 트라이 온에 남아 있고 싶다는 말일까? 끝까지 살아남아서, 같이 프로젝트 그룹의 멤버가 되자는 말이려나?’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대 위에서 우시영의 노래를 부르는 것 정도는 견뎌낼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지끈-하게 속이 아려왔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난 계속 형 옆에 있을 거예요. 어디 안 간다니까?”
“……”
주민이 현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건지, 진실을 말하는 건지 가늠해 보려는 것 같았다. 현덕은 주민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눈을 깜박였다.
이내, 주민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쪽, 쪽, 새의 부리를 쪼듯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간지러워.”
현덕이 웃자 주민이 현덕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현덕아, 난 진짜 다 할 수 있어. 뭐든지 다 할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현덕의 입술 위로 쏟아졌다. 달콤한 시럽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
현덕이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혀가 살짝 맞닿았다. 그 정도의 접촉에도 현덕은 순진하게 몸을 떨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주민의 목에 감았다. 그를 잡아당겼다. 주민은 역시나 순순히 끌려왔다. 순종적인 태도는 딱 거기까지였다.
현덕이 먼저 입을 맞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들어왔다. 현덕의 입 안을 다급히 헤집고 빨았다.
정신없이 혀가 얽히고,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렀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 움찔, 몸을 떨자 주민이 아랫입술을 이로 씹었다.
“흐으…….”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것이 제가 낸 소리인 지도 몰랐다. 뒤늦게 깨닫고 나니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주민이 기어이 쫓아와 현덕의 목을 꺾고 더 안쪽까지 혀를 집어넣었다.
“으, 혀어- 기, 깊.”
신음과 애원이 입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민에게 먹혔다.
한차례 열기가 몰려왔다 흩어졌다. 주민은 헐떡이는 현덕을 끌어안고, 현덕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 혀엉…….”
“응, 현덕아.”
“읏.”
“아, 진짜 좋다,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주민은 현덕의 아랫입술을 빨며 속삭였다.
이 고백이, 제 심장을 목구멍으로 끄집어내는 고백인 줄은 모를 터였다. 주민은 현덕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며 그렇게 제 고백을 먹였다.
***
이번 미션이 공개되기 전에, 그러니까 주민이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밝힌 이후 세상이 뒤집히고 트라이 온 2부 촬영이 시작되지는 않았을 때. 트라이 온 제작진은 우시영의 앨범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음반사를 찾았다.
한때 우시영의 앨범으로 빌딩을 세웠다는 소리를 듣던 회사는 영세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폐업 신고만 하지 않았을 뿐인 상태였다. 회사가 그 지경이니 회사 사장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공시된 연락처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사방팔방으로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서울 어딘가에 우시영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는 소문을 듣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우시영 박물관은 진짜로 존재했다. 제작진은 박물관의 소유주인 익명의 자산가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연락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큰 기대 없이 박물관을 지키는 경비원에게 PD의 손편지와 촬영 협조 요청 공문을 맡기는 게 고작이었다.
두 곳에서 출발한 편지는 여러 사람을 복잡하게 걸친 끝에 한 사람에게 도착했다. 시황그룹의 왕회장, 우주민의 할아버지였다.
우시영 박물관을 세운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음반사와 우시영 박물관을 아비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도, 역시나 그의 아들이었다. 왕회장은 트라이 온 제작진의 협조 요청 공문을 대수롭지 않게 되돌렸다.
“쓰라고 하게.”
그 한마디가 여러 전달 과정을 거쳐 곱게 포장되어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 전달되었다.
왕회장은 어느 날 저녁 식사에서 주민에게 그 이야기를 말했다.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곳, 내가 빌려준다고 했다.”
“…….”
주민의 젓가락이 잠시 멈췄다.
“네.”
곧 다시 움직여 아무 반찬이나 집었다.
“그러니 그렇게 알아둬라.”
“네, 그렇게 알아두겠습니다.”
“보아하니 제 일을 제대로 이용하려는 것 같던데, 너도 알아서 잘 이득을 취했으면 좋겠구나.”
왕회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국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 시원하구나. 역시 한국 사람은 국이 있어야 밥을 먹지.”
왕회장은 밥그릇을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운 뒤였다.
주민은 채 반도 비우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떨어져 더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더 먹으려고 해봤자 왕회장은 어른보다 밥을 늦게 먹는다며 젊은 게 패기가 없다고 또 한 소리 할 터였다. 누가 그 젊은이에게 밥 한 술 마음 편히 먹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그럴 겁니다.”
주민은 제 앞에 놓인 국그릇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국그릇 속에서 맑은 된장국이 찰랑였다. 단번에 들이킨 왕회장과 달리 한술 뜨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왕회장은 주민의 대답에 만족하며 숭늉을 달게 마셨다.
시황그룹 왕회장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십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자리였다. 얼마 전까지 제갈현주는 한 달에 한 번씩 왕회장과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시황그룹 차기 총수란 소리를 들었다.
요즘, 주민은 거의 매일 왕회장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왕회장은 일부러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꼭 집으로 돌아와 주민과 함께 저녁 식사를 들었다.
시황그룹 내에서 권력의 이동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임원 몇몇은 벌써부터 주민에게 줄을 대려고 접근했다. 그런 움직임마저 왕회장에게 고스란히 보고되는 걸, 그 성질 급한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제게 뭘 원하시는지 압니다.”
“네 아버지가 하려다가 못 한 걸 아들인 네가 해야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이지요.”
“내 죽기 전에 내 제국이 완성되는 꼴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모든 걸 다 손에 거머쥔 왕회장이 가지지 못한 단 하나, 엔터테인먼트 산업.
아들이 가요제 출신 가수에게 미쳐 그쪽 업계로 손을 뻗으려 하기에 옳다구나 싶어 지원했건만.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다시 손자가 그 업계에 손을 댔으니, 채우지 못했던 탐욕이 들끓는 듯했다. 왕회장의 그런 성미와 탐욕을 알고도 이 집으로 걸어 들어온 건 주민이었다.
주민은 뜨거운 숭늉 대신 컵에 든 찬물을 한 모금 마셨다.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리고 그림에 그린 듯 웃어 보였다.
***
주민은 현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김현덕과 함께 있지 않은 우주민은 심장이 멈추고 숨도 쉬지 않는 존재였다. 사람 모양의 괴물이었다. 바늘로 찌르면 파란 피나 까만 기름이 흐를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런 괴물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현덕의 온기를 맛보면 비로소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 자신도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현덕은 주민이 이번 미션 무대 때문에 크게 상처 입고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주민은 이미 예전에, 이런 무대에 서게 될 걸 알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정말 자신이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게 될까 궁금하기는 했다. 제작진이 무슨 방법으로 자신에게, 우주민에게 우시영의 노래를 배정해줄까 싶었건만. 우연인지 조작인지 모를 제비뽑기로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게 될 줄이야. 덕분에 말로만 들었던 우시영 박물관에도 가 봤다.
아버지가 우시영에 대한 모든 초상권과 저작권을 사들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시영과 관련된 모든 걸 집착적으로 수집해 한 곳에 모아 놓았다는 것 또한.
주민은 그 끔찍한 곳을 찾아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그게 우시영에게 끔찍하게 집착하다 못해 죽어서까지 우시영을 따라가려 했던 남자의 피를 이은 아들의 권리였다. 또한 그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집착당하고 인생을 빼앗긴 우시영의 아들이 반드시 이뤄야 하는 의무였다.
하지만 주민은 그곳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주민이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을 상속해주었다. 주식, 부동산, 현금, 금괴, 그 남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민에게 충성하려 드는 시황 그룹 내 임원들. 하지만 정작 주민이 절실하게 손에 쥐기 원했던 모든 것을 주민에게 주지 않았다.
우시영이 갇혀 있던 아파트, 우시영의 저작권과 초상권, 우시영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그 흉물까지. 우시영과 관련된 모든 건 왕회장에게 넘겼다. 그는 그것들을 주민에게 상속하면 결코 온전히 보전되지 못할 것을 예감한 듯했다.
그래서 주민은 트라이 온 출연 연습생의 신분으로 처음, 그 빌어먹을 우시영 박물관에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은 공기마저도 무거웠다. 죽어서까지도 우시영을 놓지 못했던 한 남자의 집착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도대체 왕회장은 무슨 생각으로 이걸 내버려 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우시영의 초상화를 본 순간. 그곳을 만든 자신의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됐다.
거기에 우시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히 웃고 있는 우시영이.
슬프게도.
절망스럽게도.
우주민은 우시영의 아들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 남자의 피를 이은 아들이기도 했다.
만약 현덕이 자신을 떠나려 한다면, 지금 트라이 온을 촬영하는 호텔이 이 같은 공간이 되리라. 우시영을 가둬놓고 영영 우시영의 미소를 잃어버린 주민의 아버지가 이곳을 만들었듯이.
호텔 문 앞에는 아마 이런 현판이 붙을 것이다.
[김현덕 박물관]
1층 로비에는 활짝 웃고 있는 현덕의 초상화가 걸리겠지.
생각만으로 토악질이 났다.
‘싫어. 그러고 싶지 않아.’
그건 현덕을 온전히 가지는 방법이 아니었다. 주민은 현덕을 원했다. 모든 걸, 온전히 다 원했다.
예전이라면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웃는 얼굴이 대수인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김현덕을 가둬놓고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하도록 만들면 되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현덕이 주민을 더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었다. 우시영에게 집착한 아버지보다 더욱더 지독히 현덕에게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현덕이 자신을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이 좋았다. 이렇듯 스스럼없이 다가와 껴안아 주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고, 걱정해주고, 먼저 입 맞춰주는 온기를 잃을 순 없었다.
“난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 그러니까 제발 날 좋아해 줘.”
주민은 참았던 숨을 토하며 현덕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현덕을 움켜쥔 손이 잘게 떨렸다.
“안 될 거예요. 내가 계속 형을 좋아할 거니까.”
현덕이 주민을 안아주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주민은 눈을 감았다.
“좋아해, 사랑해. 현덕아. 정말이야.”
이 사랑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집착했던 그 사랑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할 수 있는 사랑인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현덕에게조차.
다만 후자이길 바랄 뿐이다. 간곡히, 또 간절히.
“알아요. 나도 그러니까.”
현덕이 이렇게 계속 말해준다면. 현덕이 이렇듯 계속 자신의 곁에 있어 준다면. 어쩌면 아버지와 다른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민은 그렇게 믿었다. 간절히, 또 간곡히.
***
현장 투표 결과가 나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관객 수가 배로 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습생들이 기다리다 지쳐 꾸벅꾸벅 졸 때 즈음, 결과가 나왔다. 다들 예상했던 대로였다.
현장 투표 1위는 우주민이었다. 꽤 근소한 차로 2위는 장준비, 3위는 박자룡이었다. 세 사람의 표수는 저마다 10표 이내였다. 현덕은 자룡과 1표 차이로 4위였다.
“아씨, 일등 할 수 있었는데!”
준비는 아슬아슬하게 1위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오늘부터 기타 진짜 열심히 연습할 거예여.”
준비는 자신이 무대 위에서 어설프게 기타를 쳐서 표를 더 많이 못 받았다고 자책했다.
‘그 어설픈 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표를 받은 걸 텐데.’
‘그러게요.’
현덕과 피터는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준비는 멋들어진 기타 케이스를 껴안고 있었다. 덕신의 선물이었다. 그는 집에 있는 낡은 기타로 연습시킨 게 내내 미안했다며 세 사람에게 새 기타를 하나씩 주었다. 세 사람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손이 작아서 지금은 기타를 치는 게 힘든 거 다 안다. 그래서 요즘 나온다는 미니 기타 같은 걸 사줄까 생각을 했는데. 가게 가서 만져보니까 영 성에 안 차서 그냥 형들이랑 같은 걸 샀으니까 그냥 네가 얼른 크거라.”
덕신은 준비에게 기타를 주면서 특별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전 한창 성장기라서 금방 클 거거든여?”
준비는 투덜대면서 기타를 받았다. 입으로는 무대 끝나고도 기타 연습을 시키려 한다고 툴툴댔지만, 얼굴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준비는 덕신이 떠난 후에도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둘러메고는 한시도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현덕과 피터는 그런 준비를 보면서 푸근히 웃어 보였다.
현장 무대 촬영이 끝나고 사흘 후 원로 가수와의 콜라보 무대가 방송됐다. 시청자 문자 투표의 순위는 현장 무대의 투표와 사뭇 달랐다.
오팀은 팀 순위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1위가 촉팀, 2위가 위팀이었다. 특히나 1, 2위 팀과 3위 팀과 사이의 격차가 컸다.
이로써 오팀에서 처음으로 탈락자가 발생하였다. 유호의 걱정대로 만년 하위권이었던 연습생 세 명이 탈락했다. 그중에는 2부에 들어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던 이완용도 있었다. 완용은 오팀 연습생 중에서 득표수가 가장 낮았다.
“저는 진짜 팀을 위해서 노력했고요. 다 저희 팀이 잘되라고 한 일이었습니다.”
완용은 탈락 소감을 말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완용은 2부 내내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원로 가수와의 콜라보 무대 미션 방송에서 제법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우시영에 대해 말을 아끼는 주민에게 틱틱대고, 어떻게든 주민을 이용하려는 티가 너무 났다.
이름 때문에 항상 불이익을 받으며 곤란한 상황에 처하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을 툭툭 던지던 명랑한 연습생.
완용이 가졌던 이미지는 이번 방송을 통해 무너졌다.
완용을 지지하는 팬들은 악마의 편집이라고 주장했으나 주민을 지지하는 팬들의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완용은 뒤늦게 자신의 태도를 변명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쓸쓸히 촬영장을 떠났다.
무대에서 실수가 있어서 당연히 자신들이 꼴찌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위팀은 한데 뭉쳐 환호했다. 팀 리더인 자룡을 헹가래 치며 ‘박자룡 만세’를 외쳤다.
촉팀 또한 세 명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MC 유진이 그만하라고 막을 때까지 기쁨의 강강술래는 계속됐다.
어지러워 해롱거리며 자리에 앉으니, 오른쪽 볼이 심히 따가웠다. 옆을 보니 주민이 삐딱하게 서서 현덕을 보고 있었다. 뭔가 심히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1등 팀이 되어 또 한 번 전멸의 위기를 넘긴 현덕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현덕은 팔을 의자에 대고 턱을 괴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왜? 모? 왜?’
입을 벙긋거리며 주민을 도발했다.
주민의 질투를 이렇게 흘려 넘길 만큼 현덕은 기분이 좋았다.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았다. 물론 주민이 가지 말라고 발목을 붙들겠지만.
주민은 현덕의 건방진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이없어 하며 헛웃음만 지었다. 현덕은 그런 주민을 보며 방실방실 웃었다. 카메라는 그런 현덕과 주민의 모습을 담았다.
“현덕 혀엉-.”
준비가 펄쩍펄쩍 뛰어와서 현덕을 덮쳤다. 그 바람에 현덕이 앉아 있던 의자가 들썩였다.
“이크!”
현덕은 제 머리를 보호하는 대신 준비를 꽉 껴안았다. 피터가 얼른 의자를 붙잡아준 덕분에 뒤로 넘어가진 않았다.
“조심해야지. 지금 와서 다치면 난 어떡하라고?”
“얼- 그럼 피터 형 원맨쇼 하는 거에여?”
“그러게. 보고 싶은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말이 씨가 될라.”
“이열- 유학생이 그런 말도 알아요?”
“이런 건 하극상이라고 하던가? 응? 준비야?”
“히잉, 현덕이 혀엉, 피터 형 좀 봐여. 날 협박해여어.”
“형, 준비 괴롭히지 마세요.”
“현덕아, 너 자꾸 준비 편만 들래? 어?”
“네!”
“네!”
“이런.”
셋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하지만 촉팀의 세 연습생은 똘똘 뭉쳐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그 결과는 우승.
탈락만 면할 수 있으면 감지덕지하다고 생각했건만 또 1등이라니!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났다. 뒤로 넘어져 머리가 깨질 뻔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 상태에서 다음 미션을 받았다. 다음 무대는 ‘국악’이었다.
유명 판소리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무대에 올리라는 내용이었다. 팀은 일주일 동안 판소리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 받고, 대중음악으로 편곡한 판소리 곡으로 무대를 준비했다.
2부 촬영이 시작되고 난 후 연습생들은 매번 최선을 다해 무대를 준비하고, 밤새가며 연습했다. 늘 그러했으나 이번에는 더더욱 불타올랐다.
오팀 연습생들은 이제 자신들도 탈락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졌다. 오팀과 위팀은 단 세 명의 연습생만으로 계속 살아남는 촉팀을 경계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오팀의 판소리는 ‘별주부가’였다. 별주부가를 발라드로 편곡한 곡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사실은 거북이가 토끼를 사랑하여 죽을 걸 각오하고 토끼를 떠나보낸다는 게 가사의 내용이었다.
곡은 두 파트로 나뉘었다. 거북이 파트와 토끼 파트. 거북이 파트는 낮게 울리는 저음으로, 토끼 파트는 여성 보컬도 부르기 어려울 정도의 고음으로 불러야 했다. 음역이 넓은 유호와 주민이 토끼 파트를 맡았고, 다른 연습생들이 거북이 파트를 나누어 맡았다. 주민과 유호는 카스트라토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훌륭하게 토끼 파트를 소화해냈다.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3단 고음을 올려칠 때, 시청자들은 TV로 시청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는 인증 글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주민과 유호가 남자가 맞는지 바지를 까봐야 한다는 악의적인 글들은 업로드 되는 족족 소리 없이 삭제되었다.
위팀은 심청가를 랩으로 재해석한 곡으로 무대에 섰다. 랩 가사는 자룡과 사의준이 직접 썼다.
심청이 인당수로 가 뛰어내리기 전,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는 부분을 랩 가사로 썼는데. 공부에 짓눌려 괴로운 수험생, 지독한 청년실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2030 시청자들의 마음을 후벼 팠다. 위팀의 무대를 보다 울컥, 눈물이 났다는 시청자들의 사연이 시청자 게시판 트래픽을 터뜨렸다.
의준은 평소에는 항상 자신감이 없어 보였으나 무대 위에서 랩을 할 때는 자룡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발음도 매우 정확했다. 덥수룩한 앞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여서 시청자들에게 ‘삽살준’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과감하게 그 앞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다. 머리카락 속에 숨겨져 있었던 두 눈은 우주민 저리 가라 할 만큼 날카로웠다.
위팀 연습생들은 특유의 파워풀한 안무를 선보이며 무대 위를 날뛰었다.
마지막 무대는 촉팀이었다. 촉팀은 춘향가를 EDM으로 편곡한 곡으로 무대에 올랐다. 템포가 빨라 가사량이 무척 많았다. 노래를 하는 건지 판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미묘한 박자가 포인트였다.
가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춘향이 열심히 뒷바라지하여 몽룡을 한양 보내 공무원 시험에 합격시켜 놓았더니, 몽룡은 그게 다 제 능력 때문인 줄만 알고 양다리를 걸치고 춘향이를 헌신짝 버리듯 버려 버렸다.
복수심에 차오른 춘향은 얼굴에 점을 찍고 맹렬히 공부한다. 그런 춘향에게 반한 그 마을의 변 사또가 춘향의 뒤를 팍팍 밀어준다.
결국 공무원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암행어사가 된 춘향은 사또로 부임하여 부패를 일삼는 몽룡을 탈탈 털어 쪽박 차게 만들고, 자신이 돌아오길 지고지순하게 기다리고 있던 변 사또를 남편으로 들이고 행복하게 잘 산다.
중간 중간에 흥겨운 EDM 음과 함께 “춘향이 어이없어- 춘향이 어이없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었다. 그 후렴의 끝부분에서 “어머, 몽룡아. 어이가 아니라 어처구니지.”라고 찰지게 한 방 먹이는 부분이 어이없는 웃음을 주었다.
세 팀의 무대는 지난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완성도 높았다. 객석에서 무대를 관람한 판소리 명창 3인이 만족스러워하며 기립 박수를 칠 정도였다.
각 팀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연습생들은 땀에 흠뻑 젖어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객석을 향해 허리를 깊이 굽혀 인사했다.
판소리 미션에서 촉팀은 2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촉팀의 오렌지 삼총사는 다시 한번 탈락을 모면했다. 현덕과 준비, 피터는 지난번 무대에서 1위를 했을 때만큼 기뻐했다.
이번 미션의 팀 1위는 오팀이었다. 오팀은 지난번에 꼴등 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듯 맹렬히 노력했고, 그 노력은 표로 연결되었다.
1등 팀이 발표나자마자 유호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절했다. 뒤에 서 있던 정모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팀 연습생들은 1등을 했다는 기쁨에 젖어 날뛰는 대신 유호의 주변에 몰려들어 고개를 숙였다.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들 팀을 잘 이끌어 준 유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주민만 제외하고.
팀 3위는 자룡이 속한 위팀이었다. 위팀은 담담히 결과를 받아들였고 슬퍼하며 탈락한 동료 연습생들을 떠나보냈다.
이로써 오팀은 6명, 위팀은 4명, 촉팀은 3명의 연습생이 남았다.
위팀 : 박자룡, 조성환, 사의준 외 1명
촉팀 : 김현덕, 장준비, 윤피터
오팀 : 손정모, 우주민, 이유호 외 3명
이제 남은 미션은 단 하나.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고 인기 프로그램, <소년 프로젝트 : Tri/y On>의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의 데뷔까지 단 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프로젝트 그룹의 멤버는 9명.
현재 남은 연습생은 13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