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기억 속의 그대 (32/36)

2. 기억 속의 그대

현덕은 스크린에 뜬 ‘우시영’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민을 찾았다.

주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러 촬영 카메라들이 그런 우주민을 집요하게 찍어댔다.

오팀의 분위기는 단번에 얼어붙었다. 유호는 위 통증이 도지는지 가슴을 움켜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주민의 주변에 앉아 있는 오팀 연습생들은 감히 주민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피터가 내려와 자리에 앉으며 현덕에게 말했다.

“봐봐, 난 역시 뽑기 운이 없다니까. 내가 우시영을 뽑았어야 했는데.”

피터는 굳이 안 가져도 될 죄책감에 시달렸다. 현덕은 말없이 피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팀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자룡의 얼굴 또한 피터와 비슷했다. 밭에 뿌릴 씨앗을 한 말쯤 끌어안은 농부처럼 고뇌 어린 표정이었다.

현덕은 카메라가 잠시 꺼지면 주민에게 가려 했지만 도무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미션 공개 후 제작진은 곧바로 연습생들을 버스로 내몰았다. 다른 팀 연습생과 잠시라도 이야기 나눌 틈이 없었다.

“쉬는 건 버스에서 합시다.”

촬영 스태프들이 연습생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큰소리로 외치고 다녔다.

“우시영 선배님은 돌아가신 분인데, 저희 팀은 누굴 만나서 함께 무대에 올라야 하는 겁니까?”

유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막내 PD를 붙잡고 물었다.

“일단 버스에 올라타서 가 봐요. 가면 다 알게 될 거니까.”

막내 PD는 질문한 유호가 아니라 멀뚱히 서 있는 주민을 힐끔 보며 말했다.

오팀은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버스에 타야 했다. 오팀 연습생들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촉팀과 위팀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그들은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게 분명한 원로 가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까.

현덕은 버스를 타러 가면서도 계속 주민을 눈으로 좇았다. 한 번쯤은 눈이 마주치기도 하련만. 주민은 현덕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주민은 내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현덕의 뜨거운 눈빛을 보다 못한 정모가 주민을 툭 치고는 촉팀을 손가락질했다. 그제야 주민이 고개를 돌려 현덕을 바라보았다.

‘우주민! 화장실, 화장실 가자! 화장실 가자고!’

현덕은 강력하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날 좋아한다며. 그럼 내 마음 정도는 알아먹으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렬한 눈빛으로 주민을 쏘아보았건만.

주민은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

텔레파시는 통하지 않았지만, 현덕은 괜히 코끝이 찡했다.

주민은 현덕에게 손을 흔들고는 정모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현덕도 어서 버스에 오르라는 촬영 스태프의 재촉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단 세 명이 타기엔 너무 컸다. 카메라를 든 촬영 감독과 PD, 작가 몇 명이 동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준비와 피터가 손을 흔들어 현덕을 반겼다. 현덕은 터덜터덜 걸어가 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주민은 만나보고 왔어? 괜찮대?”

피터가 성급히 물었다. 여전히 자신이 우시영의 제비를 뽑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현덕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피터가 혀를 찼다.

“괜찮을 거예여. 그 형이 성격 장난 아니잖아여. 정 걱정되면 이따가 물어보면 되져. 형, 아직 그 형이랑 같은 숙소 쓰잖아여.”

준비가 현덕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현덕이 항상 자신을 달랠 때 그리 해준 걸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긴 한데…….”

현덕은 준비의 위로를 받으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바로 옆의 버스가 오팀의 버스였다. 창가를 훑어봐도 주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제작진도 진짜 너무한 거 아녜여? 어떻게 우시영을 넣을 수 있어여?”

준비는 제작진의 눈치를 살피다 슬쩍 현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버스가 출발하기 전 스태프들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버스 안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촉팀 연습생들의 마이크 상태를 확인했다. 그 준비가 무색하게도 연습생들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서로에게 기대 곯아떨어졌다.

준비는 현덕이 다리를 베고 길게 누웠다. 발은 피터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현덕과 피터는 사람 인자 모양으로 서로에게 기대 잠들었다. 세 사람은 버스가 급커브해도 한 번 뒤척이지도 않았다.

PD가 연습생들을 깨우려 했지만 다른 스태프들이 말렸다.

“자는 걸 왜 깨워요, 좀 내버려 둬요. 그러니까 우리 프로그램이 욕먹는 거야.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지만 저희 계획했던 거 해야 하잖아요.”

“나중에 하면 되지. 좀만 재워. 자는 거 찍어서 내보내면 되잖아. 딱 그림 나오잖아?”

“얼마나 피곤했으면…….”

“피곤할 만도 하지. 떨어질 줄 알고 엄청 긴장했을 텐데.”

작가 중 한 명이 혀를 차며 챙겨 온 담요를 연습생들에게 덮어주었다.

곤히 자는 세 연습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말똥말똥하던 스태프들도 눈꺼풀이 금세 무거워졌다. 스태프들은 하나둘, 텅텅 빈 좌석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청했다.

촉팀을 태운 버스는 요람이 되어 고속도로를 달렸다.

버스는 두어 시간쯤 지나 한적한 교외에 도착했다. 강이 보이는 탁 트인 곳에 한옥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단독주택이 서 있었다.

촬영 스태프들과 촉팀 연습생들은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잠에서 깨났다. 현덕과 피터, 준비는 졸린 눈을 비비며 버스에서 내렸다. 촬영 스태프들은 허둥지둥 촉팀 연습생들을 찍었다.

“이제들 오는군.”

집 주변에는 낮은 울타리가 둘려 있었다. 중년에서 노년 사이에 걸친 남자가 울타리 앞으로 나와 촉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덕과 준비, 피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80년대 밴드 하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몇 살 때 활동을 하신 거예요?”

준비가 손가락으로 나이와 연도를 거꾸로 세며 말했다.

“쉿.”

현덕은 얼른 피터의 입을 막았다.

“어른 앞에서 그러는 건 실례야. 알았지?”

“우읍.”

준비가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현덕과 피터, 준비는 일단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허리를 푹 꺾으니 머리 위에서 허허, 웃음소리가 들렸다.

본래대로라면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쓰리홀스’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제작진은 쓰리홀스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 후 OX 퀴즈를 할 예정이었다. 꼴찌에게는 벌칙을, 1등에게는 PPL 상품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촉팀 연습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제작진마저 푹 잠든 채 버스를 타고 왔기에, 촉팀 연습생들은 자신들을 마중 나온 노인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해외 유학파와 이제 중1, 그리고 내내 공부만 하고 연예계엔 전혀 관심 없었던 모범생 조합이기에 더더욱 배경 지식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노인과의 첫 만남은 좀 어색했다.

PD는 노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 앞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큰 돗자리를 깐 후 버스에서 해야 했던 촬영을 진행했다.

쓰리홀스에 대한 OX 퀴즈 게임이 시작됐다. 노인은 촬영 판이 벌어진 곳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나무 아래에서 촬영을 구경했다.

PD는 노인에게도 마이크를 하나 건넸다. 노인은 PD가 잘못 알고 있는 쓰리홀스에 대한 정보를 정정해주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촉팀 연습생들이 놀랄 만큼 맑고 시원했다. 성악을 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묵직하게 깔리는 저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즐거웠다.

오렌지 삼총사는 두어 시간 진행된 OX 게임 덕분에 쓰리홀스라는 밴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쓰리홀스’는 1980년대 초반에 큰 인기를 얻었던 밴드였다. 혜성처럼 나타난 건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활동했으며 음반도 여러 장 냈다. 인지도는 있었으나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닌, 그저 그런 밴드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1981년에 낸 7집 앨범, ‘씨잉-인-더-롸이프’로 대박을 쳤다. 이후 새롭게 발표하는 음반마다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의 비틀즈로서 1980년대를 풍미했다.

쓰리홀스의 멤버는 마씨 성을 가진 세 남자였다. 잘생긴 세 미남이 양복을 입고 신나게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은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는 ‘원마이크 쓰리맨’이라 불리는 퍼포먼스였다. 무대에는 세 명의 멤버가 서 있는데 스탠딩 마이크는 항상 하나였다. 세 남자는 얼굴을 맞대고 하나의 마이크로 노래를 불렀다.

쓰리홀스의 세 멤버는 한 번도 불화설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히 세 사람이 혈연관계라고 생각했다. 안 닮은 세쌍둥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쓰리홀스는 그런 말을 들으면 웃기만 할 뿐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사이를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PD는 ‘쓰리홀스의 멤버 세 사람은 혈연관계이다.’라는 문제를 내고 답을 O라고 말했다.

“잠깐.”

노인이 손을 들어 PD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아무도 알지 못했던 진실을 말해주었다.

쓰리홀스의 세 멤버의 이름은 마유상, 마계상, 마덕신이었다. 그중 정말 피가 섞인 건 마유상과 마계상이었다. 마덕신의 본명은 호덕신으로 쓰리홀스에 합류했을 때 마덕신이란 예명을 만들었다고 했다.

촉팀 연습생들을 맞이한 노인이 호덕신, 그러니까 마덕신이었다. 그러므로 답은 X였다.

현덕이 정답을 맞혔다. 피터와 준비는 O를 선택했었다.

“김현덕 연습생이라고 했나요? 왜 셋이 다 형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노인이 물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고 비슷한 또래이신 거 같은데, 만약 형제라면 세 분 모두 ‘상’자 돌림자를 쓰셨겠죠. 그런데 마덕신 선배님의 성함, 그러니까 예명에는 ‘상’ 자가 안 들어가 있었거든요.”

“항렬이 달랐을 수도 있지.”

“그럼 다른 두 분과 마덕신 선생님 사이가 조금 어색했을 거 같아요. 다른 두 분이 마덕신 선생님을 어른처럼 높이 올려 세웠거나 아니면 아래 항렬로 두고 좀 더 편하게 대하셨겠지요. 그때는 그런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세 분께서 활동하시는 영상을 봤을 때 그런 느낌이 없었어요.”

“오호라. 아직 어린 거 같은데 그 당시 시대상을 잘 알고 있군요.”

노인이 놀라워했다. 현덕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배웠어요. 저희 담임 선생님이 역사 선생님인데 생활사에 관심 많으셨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현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쪽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가리켰다. 제작진이 만든 현수막에는 쓰리홀스의 흑백 사진이 크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마덕신 선생님은 다른 두 분이랑 별로 안 닮으셨어요.”

현덕의 말에 노인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내가 제일 잘생겼지. 다른 둘은 다 메주였어. 옥떨메.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두 덩이였지.”

현덕은 혀끝을 간지럽히는 말을 꾹 참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저렇게 즐거워하는 대선배님께 마음속의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누가 더 잘생겼다고는 말 안 했는데.’

현덕은 내리 4문제를 맞췄다. 하지만 장준비라는 촉 좋은 중딩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준비는 쓰리홀스에 대해 몰랐던 사람답지 않게 신기에 가까운 찍기 실력을 보이며 현덕을 따돌리고 최다 득점했다.

피터는 정답률이 0%에 수렴했다.

OX 퀴즈 결과 1등은 준비, 2등은 현덕, 3등은 피터였다. 준비는 우승 선물로 모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를 선물로 받았다. 피터는 벌칙으로 시간 동안 코주부 안경을 쓰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도 코주부 안경의 저주를 피하지는 못했다. 피터가 눈이 뱅글뱅글 도는 안경과 코주부 코를 쓰고 현덕과 주민을 돌아보자 두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댔다. 둘 다 쉬이 웃음을 그치지 못해 촬영이 20분 정도 지연되었다.

촬영이 재개된 후에도 현덕과 준비는 피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마음껏 웃으렴. 또 언제 이렇게 웃어 보겠니.”

피터는 해탈한 사람처럼 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웃다 지친 현덕과 준비, 그리고 코주부 안경을 쓴 피터는 앞장서는 노인을 따라 전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에 2층처럼 보였던 주택은 안으로 들어가니 1층 건물이었다. 본래 2층이 되어야 할 위쪽을 아예 만들지 않고 터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천장이 다른 집보다 훨씬 높았다.

신기한 건 천장만이 아니었다.

현관부터 거실, 침실과 다른 방까지 기타가 빼곡하게 늘어져 있었다. 딱 봐도 오래돼 보이는 기타는 장식장 속에 들어가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이 아니라 기타 박물관 같았다.

“우와. 끝네주네.”

“이거 다 진짜 기타겠져?”

“저 이렇게 많은 기타는 태어나서 처음 봐요.”

세 연습생은 감히 만져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탄성만 내질렀다.

연습생들과 노인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노인은 돕겠다는 연습생들을 한사코 앉히고는 부엌에 들어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왔다. 미리 준비한 건지 각종 과일과 얼음이 동동 뜬 시원한 과일 주스를 내왔다. 주스는 직접 과일을 갈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현덕과 준비, 피터는 많이 먹으라는 노인의 말을 사양하지 않고 맹렬히 접시를 비웠다. 노인은 잘 먹는 세 연습생을 보며 푸근히 웃어 보였다.

“내가 결혼을 했다면 여러분만 한 자식이 있었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노인은 끝까지 현덕과 피터, 준비에게 말을 높였다. 연습생들이 한사코 말을 놓으시라 부탁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연습생들이 배를 채우는 동안 OX 퀴즈에서 나오지 않았던 쓰리홀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체 후의 이야기였다.

***

1985년, 쓰리홀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가수왕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뒤의 일이었다.

처음 쓰리홀스를 결성했을 때 세 사람은 약속했다. 모두가 박수칠 때 무대에서 내려오자고. 가장 어렸던 마계상이 “모든 방송국에서 가수왕 타이틀을 받으면 쫑내자고.”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셋 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즐겼다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후배들에게도 자리를 내줘야지. 노땅들이 너무 엉덩이 뭉개고 앉아 있으면 어린 사람들이 욕한다.”

가장 연상이었던 마유상이 먼저 은퇴를 언급했다.

“꼭 TV 나오고 공연을 돌아야 음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소소히 우리끼리 즐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덕신도 찬성했다.

마계상은 아쉬워했으나 이내 두 형의 뜻을 따랐다.

***

“꼭 우리들 같아여! 할아버지!”

준비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글쎄, 우리는 준비 너한테 형들이 끌려가잖아. 그러니까 똑같은 건 아닌 거 같은데?”

피터가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우씨, 내가 뭐여. 나같이 착한 동생이 또 어딨다고? 형이 어딜 가든 나만큼 말 잘 듣고 춤 잘 추는 동생을 또 얻을 수 있을 거 같아여?”

준비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져, 형?”

현덕에게 편을 들어달라고 졸랐다.

현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무조건 준비 편.”

“아싸!”

“아, 불쌍한 첫째. 원래 첫째가 이런 법이지요. 선생님, 쓰리홀스도 그랬겠죠?”

홀로 남은 피터가 덕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했다.

“글쎄, 나도 우리들 안에서는 둘째였던지라. 첫째의 마음은 잘 모르겠네요.”

덕신은 피터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피터는 흑, 우는 척을 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준비는 얼른 피터를 방석 삼아 깔고 앉으며 덕신에게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했다.

준비는 쓰리홀스 밴드의 이야기가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듯했다. 남들이 형제로 오해할 만큼 친한 삼총사. 현재 촉팀 연습생들의 상황과 비슷해서 더 마음이 가는지도 몰랐다.

덕신은 준비를 귀여워했다. 조금 당돌하게 말해도 부드럽게 받아주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안 아쉬우셨어요?”

준비가 물었다.

“물론 아쉬웠지요.”

덕신이 웃으며 대답했다.

준비에게 대답한 것처럼 물론 아쉬웠다. 언제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저 빛나는 무대에 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은퇴를 번복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무대를 내려와야 할 때임을 알았기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

마유상과 마계상은 기술을 배우고, 덕신은 못다 한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다.

두 사람이 조그만 정비소를 차리고 ‘형제 정비소’ 간판을 올리던 날. 덕신은 고사를 드리는 날에 맞춰 잠시 귀국했다. 커다란 돼지 머리에게 넙죽 절하고 콧구멍에 지폐를 둘둘 말아 꽂았다.

그러다가 돼지머리 옆에 기타를 놔둔 걸 보고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유상 형, 계상아. 이런 자리에까지 기타를 놔야겠어?”

“내 생각 아니다, 저놈 머리에서 나온 거야.”

“뭐여, 형님. 이러면 곤란하지? 좋은 생각이라고 할 땐 언제고?”

“둘 다 기타에 음식 냄새 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구나. 불쌍한 기타.”

이런 우스갯말을 나눌 만큼 평화롭고 행복했다.

두 사람은 얼굴에 기름때 묻혀가며 남의 차를 고쳐주고, 시간이 좀 남으면 한쪽에 세워 둔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렀다. 찾아온 손님 중에 형제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팬서비스 차원으로 신청곡을 받아 멋지게 불러주기도 했다.

마유상과 마계상은 어서 빨리 덕신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다시 셋이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 테니까.

뒤늦지만 적당히 자리를 잡고,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휴가 때마다 세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서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비극은 갑자기 찾아들었다.

덕신이 돼지머리에 절하고 채 1년이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정비소가 들어가 있던 건물이 무너졌다. 수백 명의 사람이 죽고 다쳤다. 부실 공사로 인한 인재였다.

대한민국은 건물 붕괴 사고로 들끓었다. 소방서와 경찰, 군인이 총 동원되어 생존자 수색에 나섰다.

덕신은 급히 귀국하여 그들의 생존을 확인했다. 부상자, 생존자 명단 어디에도 마유상과 마계상의 이름은 없었다.

덕신은 사고 현장을 지키며, 저를 유가족이라 칭하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 속에서 꼿꼿히 버텼다.

‘살아만 있어다오. 살아만. 살아만 있어. 얼마든 다쳐도 되니까, 무조건 살아만 있어라.’

덕신의 바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생존자 수색이 시작되며 한 명, 두 명, 생존자들이 구출되었다. 가족, 친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눈두덩이 퀭해진 채로 사고 현장만 바라보며 망부석이 되어갔다.

사고 후 열흘이 지나자 생존자 발견이 뜸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은 나오지 않고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리고 짓이겨진 시체들만 발견되었다. 2주째가 되니 생존자 수색을 중단하고 사고 현장을 수습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기적적으로 생존자 한 명이 발견됐다.

생존자 수색은 다시 열기를 띄었다. 수색을 중단하자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가족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사고 현장에 매달렸다. 그 속에 여전히 덕신이 있었다.

덕신은 씻지도 자지도 않고 사고 현장을 지켰다. 쓰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억지로 빵과 김밥을 씹어 먹으며 겨우 정신을 유지했다.

한 달이 되기 삼사일 부족한 어느 날. 새까맣게 탄 시신 여러 구가 발견되었다. 그 중 두 구의 시신은 서로를 껴안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그을린 남방의 체크 무늬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시신 옆에는 타다 만 기타 잔해가 놓여 있었다.

덕신은 그 시신들이 자신이 찾는 마유상과 마계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가는 납땜한 치아와 옷가지로 그들이 마유상과 마계상이라고 확정했다. 덕신은 팔에 검은 양복을 입고 팔에 삼베를 둘러야 했다.

두 형제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두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들 말했다. 책임질 처자와 자식이 없으니, 그나마 불쌍한 사람을 덜었다는 것이었다.

어쩜 사람 인심이 이러할까. 덕신은 장례식장을 지키며 허탈하게 웃었다.

마유상과 마계상은 고아였다. 엄연히 부모가 살아 있었으나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고아라고 말했다. 친어머니는 그들을 낳고 얼마 안 있다 집을 나가 행적을 알지 못했다. 새어머니는 둘을 고아원에 맡기고 떠났으며, 친아버지는 그들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둘이 쓰리홀스로 유명해진 뒤 친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둘을 찾아왔지만, 둘은 만나주지 않았다. 마유상과 마계상에게 가족은 딱 한 명, 덕신뿐이었다.

둘의 친아버지는 장례식장에 나타나 두 사람이 남긴 재산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렸다. 덕신의 멱살을 붙잡고 소송을 운운하며 핏줄도 아닌 게 어디서 나대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덕신은 미련 없이 두 사람의 재산을 모두 친아버지에게 넘겨주었다. 대신 두 사람의 시신을 인계받아 자신이 편히 오갈 수 있는 곳에 묻었다. 자식 둘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기는커녕 재산부터 찾기 바쁜 친아버지가 둘에게 제삿밥이나 잘 차려줄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상을 치르고도 덕신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

덕신은 지금도 계속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었다.

“고등학교 쌤이시라고요?”

준비가 꽥- 비명을 질렀다.

“왜, 학교 선생님이랑 안 친한가 보지요?”

덕신은 준비를 놀리듯 말하고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옛날에 가수였다는 걸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아무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거 방송 나가면 우리 반 애들이 깜짝 놀라겠지요?”

사진을 찍듯 두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는 흔들었다.

“오현고 일학년 팔반, 잘들 보고 있느냐. 너희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도 들여다보던 그 프로그램에 쌤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현덕의 눈이 댕그래졌다.

촉팀 연습생들 중에는 현덕이 유일하게 고등학생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눈앞에 있으니 허리가 절로 곧게 펴졌다.

덕신은 마유상과 마계상을 그렇게 떠나보낸 후 여러 번 병을 앓았다. 큰 수술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래서인지 또래보다 족히 스무 살은 많아 보였다. 그리고 폐 기능에 문제가 생겨 길게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말을 들은 현덕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니.’

달콤한 미성을 가진 기타리스트 마덕신은 그렇게 노래 부르지 못하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 되었다.

“학교에서 합창반 동아리도 내가 맡고 있는데, 학생들이 툭하면 쌤 노래 너무 못 부른다고 구박한답니다. 옛날엔 진짜 잘 불렀다고 했는데도 안 믿어요. 여기 방송에서 옛날에 내가 노래 부르던 걸 찾아서 좀 틀어 주려나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가 예전엔 진짜 노래를 잘 불렀거든요.”

그리 말하며 웃는 얼굴은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그는 함께 노래 부르던 멤버들을 잃고, 그들의 영정에 바치기라도 한 듯 자신의 노래마저 잃은 것이었다.

“할아버지, 힘내세요!”

준비는 포크로 깎은 사과를 콕 찍어 덕신에게 건넸다. 준비 나름의 위로였다.

“할아버지를 공경해줘서 고맙네요.”

덕신이 사과를 받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아!”

준비는 덕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른 게 큰 실수였다는 걸 깨닫고는 안절부절못했다.

덕신은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선생님이었다. 준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하지만 준비에게 괜찮다고 따듯하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덕신 나름의 작은 복수였다. 자신이 지독한 노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남에게 대놓고 늙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니까.

“자아, 인생 극장은 여기서 끝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연습을 해볼까요? 쓰리홀스의 노래를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니, 실력이 어떨지 아주 기대가 큽니다.”

덕신이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촉팀 연습생들은 덕신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마침 벌칙 시간이 끝나 피터는 답답한 코주부 안경을 벗을 수 있었다.

지하에 커다란 녹음실이 있었다. 역시나 벽면엔 기타들이 가득했다. 어쩐지 1층에서 봤던 기타들보다는 덜 반짝반짝했다. 한쪽에는 기타를 배우는 초보들이 주로 사용하는 데임 기타도 여러 대 있었다.

“쓰리홀스는 멤버들 전원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기타 밴드였어요. 그러니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그리고 나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면 기타는 반드시 쳐야 할 겁니다.”

덕신이 세 사람에게 통기타를 건네주었다.

피터와 준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현덕 또한 긴장한 얼굴로 기타를 받아들었다.

‘배워두길 잘했어.’

역시 아는 것이 힘이었다.

현덕은 작년부터 TE엔터테인먼트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기타와 랩 중 무엇을 배울까 고민할 때 자룡이 무조건 랩을 배우라고 권했다. 하지만 현덕은 기타를 선택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자룡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는데.

‘다행이다. 기타를 배워둬서.’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리도 갈대와 같았다.

하지만 ‘칠 줄 아는 것’과 ‘잘 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엉망이군요. 아주 끔찍해요.”

그건 80년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덕신에게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피터도 현덕과 사정이 비슷했다. 현덕보다는 기타를 오래쳤고, 또 잘 쳤지만 덕신이 보기엔 말도 웃음도 안 나오는 수준이었다.

현덕과 피터는 낙담하지 않았다.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연주를 들어야 하는 덕신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잠깐 귀를 좀 씻고 오겠습니다. 귀가 아프군요.”

덕신은 잠시 촬영을 중단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덕신은 나이 어린 연습생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교양인이었으나 기타에 관련해서는 가차 없었다. 못하는 건 못하는 거고, 끔찍한 건 끔찍한 거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난번에 만난 MC 네모는 각진 천사였다. 그에 비하면 덕신은 온화한 미소와 존댓말을 가진 악당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죠.”

“다시 한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다시 한번 코드 잡아 봐요.”

“아니, 그게 아니지.”

“이런, 이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쓰리홀스의 노래를 무대에 올린다는 거지요?”

현덕과 피터는 손이 부르틀 때까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점점 기타가 손에 익고 목소리 또한 기타 음과 어우러졌다. 계속 나아지고 있었으나 덕신이 보기엔 한참 부족했다.

“히잉.”

두 형이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는 동안 준비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기타를 끌어안고,

딩. 딩. 딩.

기타 음을 하나씩 치고 있었다.

준비는 아예 기타를 칠 줄 몰랐다. 덕신은 기타를 칠 줄 모른다는 준비의 말에 어이 없어 하더니, 직접 음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연습을 하라고 말하곤 돌아섰다.

“나도 저런 거 싶은데여.”

준비는 입을 삐죽 내밀며 현덕과 피터 쪽을 바라보았다. 덕신에게 혼나고는 있으나 자신이 연습하는 것에 비하면 끝내주게 멋있어 보였다.

“난 언제 저만큼 할 수 있는 거져?”

준비는 자신을 보러 온 덕신에게 물었다.

“글쎄. 한 육 개월 정도 꾸준히 하면?”

“저희 다다음 주가 경연인걸여?”

“글쎄.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쓰리홀스의 곡을 쓸 수 없을 텐데, 경연을 할 수 있을까?”

“네?”

준비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덕신에게 호되게 혼나고 헤롱거리던 연습하던 현덕과 피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 이런.”

덕신이 놀라는 척 하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 피디님한테 아직 설명을 못 들었나 보군요. 쓰리홀스가 부른 모든 곡의 저작권은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아직 쓰리홀스의 곡을 여러분이 써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고요.”

씩- 웃는 모습이 더는 인자해 보이지 않았다.

***

이번 촬영은 호텔에서 합숙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덕신의 자택에서 3일 동안 머무르며 그의 마음에 드는 게 이번 촬영의 목표였다.

다른 팀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순간, 촉팀의 오렌지 삼총사는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럼 오팀은 어디로 가는 거지? 우시영의 생가에라도 가는 건가? 그게 보존되어 있나?’

남 걱정은 말 그대로 남의 것이 되었다. 지금 급한 건 남의 팀이 아니라 우리 팀 사정이었다. 잘못하면 아예 무대에 오를 수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쓰리홀스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이야기해준 거였구나.’

현덕은 준비를 골려 먹으며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는 덕신을 바라보았다.

‘자신한테 쓰리홀스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가 알길 바란 거였어. 그렇게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곡을 절대로 아무한테나 부르게 하지 않을 테니까, 각오하라는 선전포고였던 거야.’

쓰리홀스는 1집부터 마지막 11집까지 모든 곡을 쓰리홀스의 멤버들이 작사, 작곡했다.

덕신은 그 옛날에도 저작권의 무서움을 알았다. 그래서 레코드사에서 윽박지르며 사인하라고 내미는 노예 계약서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 당시에 거의 망해가던 작은 음반사에 제 발로 찾아갔고, 미국에서 구해 온 계약서와 저작권법을 연구하여 자신이 만든 새로운 계약서로 계약했다.

덕분에 쓰리홀스가 부른 모든 곡의 저작권은 덕신이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에 활동했던 많은 가수들이 저작권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의 노래를 생판 남에게 돈까지 줘가며 불러야 했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동안 쓰리홀스의 곡은 단 한 번도 리메이크 된 적이 없었어.”

쉬는 시간에 스태프 중 한 명이 살짝 귀띔해줬다.

그 철옹성에 트라이 온 제작진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자신들은 뒤로 쏙 빠지고, 촉팀 오렌지 삼총사를 통해서.

처음 트라이 온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덕신은 사흘 간 촉팀 연습생들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사흘 간 테스트를 해 보고 만족스러우면 쓰리홀스 최고의 히트곡을 부를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콜라보 무대에도 함께 서겠습니다. 그 연습생들이 프로젝트 그룹인지 뭔지의 최종 멤버가 되면 콜라보 했던 곡의 리메이크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덕신에게 합격점을 얻지 못한다면, 아예 무대에 오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촉팀 연습생들은 뒤늦게 제작진과 덕신의 계약에 대해 알게 됐다.

“나는 다 알고 온 줄 알았지요. 많이 놀랐지요? 그럼 좀 쉬었다 합시다.”

덕신은 충격에 휩싸인 연습생들을 지하 연습실에 놔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촉팀 연습생들에게 줄 과자와 자신이 마실 커피를 챙기러 간 것이었다.

그 잠깐을 틈 타 세 연습생은 뭉쳤다. 뭔가 대책을 의논해야 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한숨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제작진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았다. 제작진을 원망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정말로 제비를 잘못 뽑은 거였네.”

주민을 걱정하는 마음과 별개로, 피터는 다시 한번 후회했다.

“만약 쓰리홀스 노래를 못 부르게 되면, 아예 탈락이겠지여?”

준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끌어안고 있던 기타가 딩딩- 울었다.

준비는 기타를 받은 내내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원래 재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지독하게 매달려서 그런지 운지법을 금세 익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타는 며칠만에 환상적인 실력을 얻을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운지법을 익히고 가벼운 곡 정도는 칠 수 있을 수도 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게다가 준비는 어렸다. 이제 키가 크려고 팔다리가 쑤시고 아프다고 하는 중학생이었다. 아직 가늘고 짧은 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는 게 귀엽긴 했지만 복잡한 코드를 잡고 현란한 기교를 부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준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현덕과 피터 역시, 기타를 제법 능숙하게 칠 수는 있으나 딱 그 정도였다. 덕신이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갖추려면 못해도 수 년에서 수십 년은 더 기타를 익혀야 할 터였다.

“뭔가 수를 써야 할 것 같은데.”

피터가 턱을 문지르며 궁리했다.

“다른 수가 있겠어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되겠죠.”

현덕이 담담히 말했다.

“어떻게여? 형들이야 이미 그 곡을 완전히 칠 수 있게 됐잖아여. 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로망스나 칠 수 있으면 다행일 텐데여?”

준비가 울상을 지었다.

준비는 아직 어리나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연습생들을 물리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트라이 온 촬영 내내 연습 시간보다 일찍 나오면 일찍 나왔지 지각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 1부 촬영할 때 피터 때문에 딱 한 번 연습을 빼먹은 걸 빼고는.

그런데 열심히 해서 지면 모를까, 아예 무대조차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할지도 모른다니. 준비는 그런 현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허락 못 받으면 어떡해여?”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정말로여?”

피터와 현덕은 준비를 달랬다.

“그럼. 형들 믿어. 준비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자신감 잃지 말고.”

현덕은 준비를 껴안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준비는 울지 않으려 열심히 눈을 깜박였다.

“우리 저번에 밤에, 우리 회사 편의점 앞에서 했던 약속 잊지 마여.”

준비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음료수 먹으면서 했던 약속?”

피터의 말에 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꼭 다 같이 데뷔해여. 절대 떨어지지 말구여.”

준비가 두 팔을 벌려 현덕과 피터를 끌어안았다. 피터와 현덕은 준비가 귀엽고 안쓰러워 웃음 지었다.

“그래, 약속했으니까.”

현덕이 준비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꼭 살아남자. 그럴 수 있을 거야.”

피터의 손이 두 사람의 손을 덮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손을 얽어놓고 파이팅을 외쳤다. 정말 파이팅 정신이 필요한 때였다.

***

덕신이 커피와 과자를 들고 내려왔을 때. 세 연습생은 알아서들 연습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준비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기타를 껴안은 채 음을 잡고 있었다. 띵까띵까. 피터와 현덕은 준비가 외롭지 않게 그 근처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화음을 넣고 기타를 쳤다.

세 사람은 한 덩이로 뭉쳐 연습하느라 덕신이 돌아온 줄도 몰랐다.

덕신은 과자와 커피를 아무 데나 내려놓고, 벽에 기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떠 있었다.

아직 촉팀 연습생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미 덕신의 테스트를 거의 통과했다는 것을.

원래 덕신은 싱글싱글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덕신이 근무하는 학교 학생들이 덕신을 ‘호변또’라고 불렀다. ‘호덕신은 변함없는 또라이’라는 뜻이었다. 체육 선생님들을 제치고 몇 년 동안 학년 주임 노릇을 할 정도로 사나운 선생님이었다.

덕신이 근무하는 학교는 사립 남고였다. 그곳은 목소리를 잃은 덕신을 인어공주가 아니라 호변또로 진화시킨 트레이닝 센터였다.

본래 남고에서 음악 수업이란 왜 시간표에 적혀 있는지 모를 과목이었다. 덕신은 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

그렇게 십수 년간 호변또로 구르던 중 트라이 온 제작진의 연락을 받았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보다 잊은 사람이 더 많을 쓰리홀스를 굳이 찾아와 곡을 달라고 청하다니. 신기했다.

하지만 그 신기함은 오래가지 않아 사그라졌다. 그 빈자리를 짜증이 메웠다. 덕신을 찾아온 트라이 온 메인 PD는 고작 한낱 아이돌 선발 경쟁 프로그램의 미션곡으로 쓰리홀스의 곡을 요구했다. 게다가 그에게 함께 무대에 서달라고까지 했다.

덕신은 자신의 목 상태에 대해 담담히 밝혔으나 메인 PD는 그래도 상관없다며 계속 부탁하고, 자꾸 찾아왔다.

덕신은 홧김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조건을 걸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모든 걸 다 무효로 돌리겠습니다.’

단단히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TV를 통해 전국에 호변또의 또라이스러움을 알릴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를 찾아온 연습생이 삼인조였다.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우습게도 마음이 풀렸다.

두 눈에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서는 좀비처럼 걷는 모습이라니.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 생각이 났다. 그를 찾아온 연습생들은 딱 제자들 나이대였다.

비록 그를 호변또라 부르며 스승에 대한 존경을 쌈 싸 먹은 놈들이지만. 호변또, 아니 덕신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꽤 많이 사랑했다. 매년, 또 매년.

세월이 많이 지나긴 지난 걸까. 세 연습생은 쓰리홀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이제라도 잘 알고 싶다며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OX 퀴즈를 풀었다. 학생들이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은 법이었다.

어린 막내가 1등이 되어 선물을 받으니 두 형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동생을 번쩍 안고 축하해줬다. 자긴 다 컸다며 애취급하지 말라는 막내의 태도는 제법 의젓했다.

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지나간 추억이 떠올랐다. 옛날에 쓰리홀스로 활동하던 때가.

집에 들이고도 현덕과 피터는 내내 준비를 챙겼다. 준비는 자신이 두 형에게 사랑받는 줄 알고 있다는 듯 응석을 부렸다. 덕신의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러다 불리해지면 슬그머니 두 형 뒤로 숨어 버렸다. 그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갔다.

툭하면 마유상에게 대들다가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으면 얼른 제 뒤로 숨던 마계상이 생각났다. 그런 마계상이 귀여워 어쩔 줄 몰랐던 마유상과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하 연습실에 내려와서도 몇 시간이나 구박하며 기타를 가르쳤는데 세 사람 다 군말 없이 잘 따라왔다. 모두 의욕적이었다. 지칠 만도 하건만. 잠깐 쉬는 시간을 주어도 자기들끼리 뭉쳐 앉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랬었지.’

1981년 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덕신은 마유상과 계상이 사는 조그만 셋방에 누워 기타나 치곤 했다.

뜨고 나서 정신 없이 바쁜 와중에 매니저가 선심을 써 하루 이틀 휴가를 주면, 역시나 자취방에 처박혀 국수나 말아 먹고 서로의 다리를 베고 누워 기타를 치고 화음을 넣었다. 그렇게 뭉쳐 있는 게 당연했다.

그랬던 모습이 흑백에서 컬러가 되었다. 쓰리홀스에서 오렌지 삼총사가 되어, 다시 덕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쓰리홀스의 노래를 꼭꼭 숨겨둔 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던가.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고, 하늘에서 마유상과 마계상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들과 꼭 닮은 이 삼총사를 보낸 걸까.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도 늙었나 보군.’

덕신은 세 연습생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

촉팀 연습생들은 덕신의 집에서 먹고 자며 합숙했다. 주말이 끼어 있었던지라, 주말에는 덕신도 종일 함께 했다.

“다녀오세요!”

덕신이 학교에 출근하는 날. 연습생들은 현관 앞에 주르륵 서 꾸벅 허리 숙여 덕신을 배웅하고는 연습실로 내려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때때로 현덕은 주민을 생각했다.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고 주고 싶었다.

모든 걸 팽개치고 콜택시라도 불러서 주민에게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피터와 준비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면, 피터는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현덕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온기를 나누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어차피 난 여기서 못 나가. 조급해하지 말자. 아주 못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그리운 마음을 잠시 잊기 위해서라도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손가락이 부르트고 찢어져 피가 흘러도 아파할 여유가 없었다. 얇은 밴드를 손에 붙이고는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생전 처음 기타를 배우는 준비는 화장실을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기타를 몸에서 떼놓지 않았다. 형이면서 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치열하게 연습하는 중에도 덕신과 준비는 점점 더 친해졌다. 투덕투덕 싸우는 방향으로.

“이래서야 어떻게 쓰리홀스 노래를 가지고 무대에 설 수 있겠어?”

덕신은 열심히 연습하는 준비를 툭하면 구박했다.

처음 한두 번이야 잔뜩 겁먹어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상황이 반복되자 준비도 배째라는 심정으로 덕신에게 맞섰다.

“쌤.”

“내가 왜 선생님인가요?”

“그럼 아저씨라고 할까여?”

“흠, 그냥 선생님이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쌤, 쌤은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칠 때도 이러세여?”

“이렇다는 건?”

“이렇게 막 구박하고 혼내냐구여.”

준비가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럴 리가.”

덕신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답했다.

“거봐요. 그럼 우리한테도-”

“우리 학교 애들한테 지금 여러분께 하듯이 하면 큰일 나요. 전 이미 옛날에 교육청에 불려가 징계 받았을 겁니다.”

“허얼. 그런데 저희들한테는 왜 이러세요?”

준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덕신을 올려다보았다.

“여러분은 제 학생들이 아니잖아요?”

덕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에에.”

준비는 그만 의욕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준비를 이긴 덕신은 슬렁슬렁 현덕과 피터에게로 갔다.

현덕과 피터는 계속 서로의 음과 박자를 맞춰가고 있었다. 이틀째가 되자 이 곡에 한해서는 제법 잘 치는 수준이 되었다. 어디에 내놔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덕신이 듣기에는 부족했다.

덕신의 눈이 현덕의 손가락에 닿았다. 현덕의 손가락은 온통 밴드로 감겨 있었는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꽤 아플 텐데도 현덕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덕신은 혀를 차며 위로 올라가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셋 다 말고 현덕만.

쪼르르 현덕에게 달려왔던 준비는 좋다 말았다는 얼굴로 휙 돌아섰다. 피터가 준비에게 갔으나 준비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기에는 무리였다.

덕신은 자리를 잡고 앉아 직접 현덕의 손을 살폈다. 얼기설기 붙인 밴드를 떼어냈다.

“선생님, 제가 할게요.”

현덕이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 놔두면 덧나서 큰일 나니까. 제때 약 잘 발라줘야 해요. 그래야 굳은살이 박여도 예쁘게 박히지. 요즘 아이돌은 손가락도 예뻐야 한다면서요.”

“네? 누가요?”

금시초문의 말인지라 현덕이 눈을 깜빡였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덕신은 그 틈에 현덕의 손가락에 소독약을 발랐다.

“으으.”

현덕이 혀를 깨물고 얼굴을 찡그렸다.

덕신은 소독한 상처에 연고를 듬뿍 바르고 두툼한 밴드를 붙여 주었다.

“오늘은 더 연습하지 말고 쉬어요. 일단 연고가 상처에 다 스며야 하니까.”

“하지만 좀 더 연습해야 하는데요.”

“그럼 몸 망가뜨리지 말고 가만히 눈 감고 머릿속으로 연습해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봐요.”

“…….”

적절한 대안까지 제시해주는데 더는 반항할 수 없었다. 현덕은 대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현덕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한창 연습 중에 쉬라니.’

연고를 바르고 새 밴드를 붙인 손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열이 오르는지 화끈거리기도 했다.

“흠, 병원에 안 가봐도 되려나.”

덕신은 현덕의 손을 잡고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김현덕 연습생, 학교에서 공부 잘하지요?”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늘 들었던 질문이기에 현덕은 늘 대답하던 대로 대답했다. 이게 가장 무난한 대답이었다.

“역시, 잘하는구만. 모범생은 티가 난다니까.”

덕신이 허허, 웃으며 현덕의 손을 놓아주었다. 대신 현덕이 잡고 있던 기타를 건네받았다. 아무렇게나 한번 쳤을 뿐인데, 고운 음이 터져 나왔다. 현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타를 바라보았다. 그 뜨거운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덕신은 신경도 안 쓰고 다시 기타를 두들겼다.

내내 현덕과 피터가 연습하던 그 곡이었다. 아직 피터와 현덕은 악보를 보지 않으면 완주하지 못했다. 그런데 덕신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 곡을 쳤다.

“범생이들은 비루먹은 나귀와 같지. 십 리 밖에 있어도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혹여나 현덕이 오해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

“김현덕 연습생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서 하는 말이에요.”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음은 더없이 명확하건만 그 위에 얹은 목소리는 탁했다.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전주가 아니라 배경음이 될 뿐이다. 그는 이제 노래 부를 수 없으니까. 그래도 덕신은 계속 기타를 치며 그 음 위에 제 말소리를 입혔다.

“나 때는 말이에요. 가수들을 딴따라라고 부르면서 많이 무시하고 그랬어요. 미군 부대 가서 공연하는 걸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어른들 눈에는 좀 그래 보였겠지요. 그런데 난, 그게 좋았어요.”

덕신은 소위 KS 마크의 엘리트였다. 경기고(K)를 나오고 서울대(S)에 입학했다. 무난히 졸업하면 어디든 가서 무난히 살았을 것이다. 그 ‘무난히’란 대부분의 사람이 바라는 안정적인 엘리트의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덕신은 노래에 푹 빠져 버렸다. 그저 듣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노래를 만들고 직접 부르고 싶었다. 딴따라가 되고 싶은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무턱대고 딴따라들을 쫓아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처음엔 무시도 많이 당했다. 학벌이 너무 좋은 게 문제였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 미쳐서, 혹은 잠깐 깔짝대러 온 게 아니냐고들 생각했다. 덕신이 정말 진지하게 노래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하지 말라고 난리고, 딴따라들은 범생이 주제에 이런 데 끼적거리지 말라고 밀쳐내고. 양쪽에서 믿어주지 않으니 힘들었다. 막막했다. 포기할 뻔도 했다.

그래도 버텼다.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고 했다.

“그래도 이 녀석이 있어서 좋았으니까.”

덕신이 기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이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들도 만날 수 있었고.”

마유상, 마계상. 두 사람은 그의 진심을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뭐? 정말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싶으면 해야지. 뭐, 별수 있나?”

두 사람은 기꺼이 자신들의 옆자리를 내줬다. 그래서 호덕신은 마덕신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어떻게 감히 잊을 수 있을까. 그 시절, 그 때를.

“범생이들은 말이야, 고집이 아주 세. 한 번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기어이 하고 말지. 실패할 거 같아도 말이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생기지. 김현덕 연습생 생각은 어떤가?”

덕신이 현덕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현덕은 손가락의 통증을 잊었다.

***

약속했던 3일이 지났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또 한 차례 지독한 연습 시간이 지난 뒤, 덕신은 세 연습생과 거실로 갔다. 테이블 위에는 첫날처럼 싱싱한 과일 주스와 과일이 가득했으나 촉팀 연습생들은 손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다들 마른침만 삼키며 덕신을 올려다보았다. 덕신은 방유진이 아니었다. 그는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실력으로 보자면 셋 다 모두 탈락이네.”

“아.”

“이런.”

“왜여…….”

현덕과 피터, 준비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감당하기 힘들었다.

“음, 만약을 한 번 예상해볼까요? ‘만약’에 말입니다. 내가 통과시켜줬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두 명은 그래도 그럭저럭 기타를 칠 줄 아니 엉망이나마 연주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저 애는 어쩌나. 이제 겨우 로망스를 칠까 말까 한데.”

“할 수 있어요! 아직 일주일이나 더 남았다고여. 계속 연습하면 분명-”

“안 된다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겠지.”

덕신이 준비의 말을 댕강 잘라냈다.

준비가 입술을 앙다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라 반박하려고 했으나 덕신의 엄한 표정과 눈빛에 눌러 금세 풀이 죽었다.

“형들, 미안해여.”

준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니, 미안해하지 마. 넌 충분히 잘해줬어. 누구도 고작 사흘 만에 너만큼 그렇게 해내지 못할 거야. 그것만큼은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실 거고.”

현덕은 준비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렇지 않나요. 선생님?”

준비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덕신을 올려다보았다.

“기타를 만져 본 적도 없는 학생이 사흘 만에 운지법을 다 익히고 곡 하나를 칠 수 있게 됐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지.”

덕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현덕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불합격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미 합격자는 뽑혔지만 대기자 번호 1번을 받아들고 추가 합격을 기다리는 것 같달까. 물론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말로 표현하기 모호하지만,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지를 주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거라면 내가 그동안 고민했던 걸 말해봐도 되지 않을까?’

착각일 수도, 망상일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만약 아니라면, 이상한 소릴 한다며 구박이나 한 번 받고 말면 될 일인데.

망설이거나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썩은 동아줄이든 지푸라기든 일단 잡고 봐야 했다.

“선생님. 잠시만요.”

현덕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작전 타임을 요청했다. 덕신은 현덕에게 약간의 시간을 허락했다.

현덕은 두 손을 꼭 맞잡고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 전 겨우 붙잡은 실마리에 집중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할 말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께서 먼저 ‘만약’을 말씀해주셨으니 저도 ‘만약’을 말씀 올려도 될까요? 저희의 ‘만약’을 말입니다.”

“만약?”

“네, 선생님. 만약에 저희가 준비를 커버할 수 있다면. 그리고 저희의 부족한 실력을 커버할 수 있다면, 허락해주실 건가요?”

“현덕아?”

“형?”

피터와 준비가 동시에 현덕을 불렀다. 현덕은 그들에게 손짓하여 괜찮다고 신호를 보내고는 덕신을 응시했다.

덕신의 얼굴은 평온했다. 화나 보인다거나 어이없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제, 그리고 오늘. 촉팀 연습생들의 연습을 봐주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건 아직 상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저희한테 기회를 주실 건가요?”

답이 알쏭달쏭할 때는 처음 풀어 나온 게 답이었다. 괜히 우왕좌왕하고 고치면 항상 틀렸다. 현덕은 자신의 느낌을 믿고 밀어붙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덕신이 미소 지었다.

‘역시!’

현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나, 아리까리해도 처음에 고른 답이 정답이었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나와 기타를 칠 줄 모르는 저 꼬맹이, 그리고 쓰리홀스에 비교하면 실력이 턱도 없이 부족한 너희 두 명. 이런 구성으로 어떻게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거냐. 나를 설득해 보렴. 오늘이 사흘째고 촬영이 종료되려면 대략 두 시간쯤 남았으니. 주어진 시간은 딱 두 시간뿐이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이 필요하진 않아요.”

현덕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줄 노트를 찢은 것으로 두 번 접혀 있었다.

그것을 덕신에게 내밀었다.

덕신은 현덕이 건넨 종이를 받아들었다. 역시나 뜸 들이지 않고 바로 펴 보았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덕신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맙소사.”

현덕은 덕신의 반응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걸 방법이라고 내놓은 거니?”

“네. 아주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덕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형, 뭐예여?”

“현덕아, 뭔데?”

양옆에 앉은 피터와 준비가 현덕의 팔을 잡아당겼다. 카메라 밖에 선 스태프들 역시 소리를 죽이고 서로에게 속닥거렸다.

촬영 감독이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덕신 쪽으로 다가왔다. 뒤쪽에서 덕신과 종이에 적힌 내용을 같이 찍으려는 것이었다.

“잠깐.”

덕신을 손을 들어 촬영 감독을 막고는 누가 볼세라 종이를 두 번 접어 셔츠의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이게 되든 안 되든, 지금 밝히지 않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군요. 그치?”

덕신의 말에 현덕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작가가 스케치북에 얼른 글씨를 써서 들어 올렸다.

[공개해주세요.]

덕신은 못 본 척했다.

작가는 뒷장에 글씨를 갈겨써서 다시 들었다.

[다음 촬영 대비로 저희도 알아야!!!]

“이 애들한테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데려와서 곤란하게 만들었지요. 그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뭐, 아예 영영 모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계속 궁금해하길 바랍니다.”

덕신은 끝까지 종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준비가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함박 웃음을 숨길 순 없었다.

피터 또한 비슷한 상태였다. 그는 얼른 주스를 마시는 척하며 가렸지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설명해주겠니?”

덕신이 물었다.

현덕은 우선 포크로 사과를 쿡 찍어 덕신에게 내밀었다. 덕신은 사과를 씹으며 현덕에게 손짓했다.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하라는 것이었다.

현덕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꼭 학교 선생님 앞에서 수행평가로 쓴 에세이를 낭독하는 기분이었다.

“이전에 이와 비슷한 미션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때는 원곡을 저희가 직접 편곡해서 무대에 올리는 미션이었거든요.”

2부의 두 번째 무대였다. 편곡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현덕은 당연히 나설 수 없었다. 아니, 나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곡과 편곡을 배웠다는 원소혁과 다른 연습생들이 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 두 연습생이 다툴 때 싸움을 말릴 생각만 했지, 감히 미션에 참여할 엄두는 못 냈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굴었던 대가는 참혹했다. 팀 순위는 물론 개인 순위까지 바닥으로 추락해 탈락 직전까지 몰렸다.

현덕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내내 뼈저리게 후회했다.

낯설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됐다.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중이었으니, 팀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했다. 할 줄 모른다는 변명 뒤에 숨어 움츠리고 있어서는 안 됐다.

시청자들은 그런 현덕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현덕은 시청자들보다 더 크게,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어떤 난감한 미션이 나오더라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겠노라고. 안 되는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겠다고. 노력해보겠다고.

현실의 삶은 시험지 위 문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답과 오답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선이 분명하지 않았다. 책을 외워서 정답을 쓰고 고르는 직선적인 사고로만 생각해서는 안 됐다. 자신이 사법고시만 준비하는 삶 말고 아이돌 연습생의 길을 선택했던 것처럼. 의외의 길을 선택하는 융통성이 필요했다.

‘이번 미션도 그렇겠지. 그냥 시키는 대로, 단순히 연습만 해서는 안 돼. 다른 방법을 같이 고민해야 해.’

사흘 안에 덕신의 기준을 충족할 만큼 기타 실력을 기르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였다. 그러니 다른 수를 써야 했다.

“형하고 준비한테는 말 못 했어요. 한참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괜히 기운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또 혹시 모르잖아요? 선생님이 우리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 보고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고.”

현덕이 준비와 피터를 돌아보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결론적으로 선생님께서는 저희한테 탈락이라고 말씀하셨지만요.”

“당연하지.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를 순 없어.”

덕신은 딱 잘라 말했다. 예상한 모습인지라 현덕은 상처받지 않았다.

“알아요. 쓰리홀스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지, 사흘 동안 계속 말씀해주셨잖아요.”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흘 간. 현덕은 낮에는 준비, 피터와 함께 열심히 연습 스케줄을 따랐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이면 빈 노트를 펴고 궁리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 마음에 들 수 있는 무대를 만들 수 있을까. 옛날, 쓰리홀스의 노래를 무대에서 부를 수 있을까.’

지금의 세 사람의 실력으로 어떻게 무대를 꾸밀 수 있을까 고민했다. 덕신이 불합격을 주었을 때,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 보기 위해서.

“손이 피가 나도록 연습하지 않았니. 그런데 탈락을 예상했었다고?”

덕신이 현덕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덕신의 말처럼 현덕의 손가락엔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렸다기엔 너무 처참한 노력의 흔적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지요. 설렁설렁할 수는 없잖아요.”

지극히 모범생다운 답변이었다.

“그리고 제가 이 정도는 해내야 선생님께서 제가 하는 말을 들어는 주실 테니까요.”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린 게 아니었다. 가능성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만약 세 사람이, 아니 딴마음을 먹은 현덕이 사흘 중 단 한 순간이라도 연습에 소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덕신은 실력도 부족한 것들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감히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한 거냐면서 바로 그들을 내쫓았을 것이다.

“그렇죠?”

현덕이 묻자 덕신은 혀를 찼다. 허, 참.

“그냥 참한 모범생인 줄 알았더니 뱃속에 애어른이 들어앉아 있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어이없어서 하는 소리지.”

“그래도 감사합니다.”

덕신이 헛웃음을 지었다.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저희는 정말로 쓰리홀스 선배님들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치? 그죠?”

현덕이 준비와 피터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정말로여. 전 아직 기타는 잘 못 치지만, 그래도 형들 기타 치는 거 들으면 너무 좋아서 저도 빨리 치고 싶어질 정도예여. 노래도 너무 신나고 좋아여.”

“저희가 처음엔 쓰리홀스 선배님들을 잘 몰랐지만, 노래를 듣고 난 이후에는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무대에서 선배님들의 곡을 부를 수 있다면 정말 영광스러울 것 같습니다.”

준비와 피터가 얼른 현덕이 원하는 반응을 쏟아냈다.

덕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어린 후배들의 아부 섞인 발언이 싫지는 않았다. 현덕의 말대로 지난 사흘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봤기에 정이 가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선생님께선 처음에 말씀하셨지요.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타를 셋 다 쳐야 한다고요. 처음부터 조건은 그거 하나뿐이었어요.”

“그래, 그랬지.”

“잘 쳐야 한다거나 쓰리홀스 선배님들만큼 노련하게 쳐야 한다는 게 아니었어요. 단지 멤버들이 모두 다 기타를 쳐야 한다고만 말씀하셨지요. 조금 전 저희에게 탈락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단지, 저희의 실력이 쓰리홀스 선배님들에게 못 미친다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실력으로 쓰리홀스 선배님들의 곡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인 거지요.”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네. 안 듭니다.”

현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 그룹 데뷔를 목표로 하는 저희 연습생들이 아무리 노력한들 쓰리홀스 선배님들만큼 기타를 잘 칠 순 없어요. 쓰리홀스 선배님들은 평생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셨던 분들이시잖아요. 저희가 고작 몇 년, 그리고 며칠 연습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요. 기타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텐데, 선생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 리가 없지요.”

대선배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덕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하며,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어떤 생각으로 처음, 제작진의 제안을 받아주시고 저희에게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셨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실력을 믿으셔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실력은 전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겠죠.”

“확실히 실력은 기대를 안 했지.”

단지 아이돌 연습생들이 온다고 하여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설사 잘 나가는 밴드가 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대한민국에서 기타 좀 친다는 누가 와도 쓰리홀스만큼 칠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전에도 이후에도, 쓰리홀스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타 밴드다. 누구도 마유상, 마계상만큼 기타를 잘 칠 수 없을 것이다. 이게 덕신의 한평생을 지탱해 온 신념이었다.

그동안 온갖 연예 기획사와 밴드 매니저들이 찾아왔다. 쓰리홀스의 곡을 리메이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며 내세우는 말은 다 똑같았다.

“우리 애들이라면 분명, 쓰리홀스의 노래를 다시 한번 히트시킬 수 있을 겁니다. 자신합니다. 정말 실력 있는 애들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 회사의 밴드만큼 실력 있는 밴드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쓰리홀스 선배님들의 곡을 리메이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밴드는 딱, 우리 회사의 밴드뿐일 겁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우리 애들이 쓰리홀스 선배님들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믿어만 주십시오. 저작권료로 여생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가수, 혹은 밴드의 실력을 자신했다. 집 앞에 와서 하루 종일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던 인디밴드도 있었다. 호기로운 출사표였다.

그때마다 덕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 어이가 없어서 웃기는 했다.

트라이 온 제작진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제는 하다못해 아이돌 연습생들까지 몰려오나 싶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진 아이돌 연습생님들께서 납시시려나, 꼬인 마음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현덕은 그간의 사정을 알고 말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겸손했다. 자신들의 하찮은 실력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저희는 꼭 쓰리홀스 선배님들의 노래를 무대 위에서 부르고 싶습니다.”

현덕은 물집이 잡힌 준비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허락해주세요. 선배님과 함께 무대에 올라서 쓰리홀스의 무대를 재현해 보고 싶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그때의 빛났던 그 모습을요.”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현덕이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

덕신은 현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현덕과 준비가 맞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잠깐, 목이 메였다.

“……말은 잘하는구나. 기타를 그렇게 쳤어야지.”

덕신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치며 말했다. 현덕이 내민 종이가 들어 있는 주머니 쪽이었다.

“하지만 이건 밴드 무대가 아니야. 이러면 쓰리홀스의 무대라 할 수 없어.”

“네.”

현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리홀스의 무대지요. 쓰리홀스의 무대를 실력으로 재연할 수는 없겠지만, 쓰리홀스를 기억하는 많은 분께 쓰리홀스의 무대를 추억할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을 테니까요. 정말 자신 있습니다.”

사실 하나도 자신 없었다.

덕신에게 내민 제안은 현덕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밴드 음악에 자부심이 강한 대선배에게 조잡한 수작을 거는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덕은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자신 있는 척 말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돼.’

지난번과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되든 안 되는 필사적으로 덤벼서 단 1%의 가능성에라도 매달려 보고 싶었다.

덕신은 현덕의 얼굴에 어린 절실함을 보았다. 현덕의 모습 위에 아주 오래 전, 기타 하나만 들고 거리를 떠돌던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쳤다. 얼마나 씩씩하게, 겁 모르고 외쳤던가. 소위 딴따라라 불리는 이들이 보기에 얼마나 같잖아 보일지도 모르고.

‘노래가 하고 싶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절 받아주십시오.’

“내가 받아들일 거 같나, 아니면 안 받아들일 거 같나.”

덕신이 물었다.

“……받아주실 거 같습니다.”

현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저희한테 말을 편히 놓으셨잖아요.”

“뭐?”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마덕신이 드물게 당황했다.

“그건 저희를 제자로 받아주신다는 뜻이죠? 제자들이 선생님을 존경해서 학예회 수준으로라도 선배님들의 옛날 모습을 따라 해 보겠다는데, 허락 안 해주실 리가 없잖아요.”

학생에게 부모님은 딱 두 분이지만,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일 년에 수십 명이다. 학원 선생님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더 커진다.

그렇게 겪다 보면 알 수 있다. 이 선생님이 정말로 날 아끼고 사랑해주는지, 내게 관심을 쏟고 있는지. 고작 사흘이지만 덕신이 어떤 선생님인지 감 잡기에는 충분했다.

빽빽한 연습 스케줄과 독설은 고작 사흘, 그 짧은 기간 동안 쓰리홀스와 기타 연주를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었다.

“학예회 수준일 거라는 생각은 드나 보지?”

덕신이 허허, 웃었다.

“저희가 무얼 하든 선생님 보시기에는 그렇지요.”

“학예회라……. 그래, 학예회겠지.”

덕신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요즘 고등학교에서는 학예회 같은 건 안 해. 축제라면 모를까. 고등학생이니까 잘 알고 있겠지.”

“네! 그럼 축제 수준으로 하겠습니다.”

현덕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대답은 잘하는구나. 그래, 축제 수준까지 끌어 올릴 사진은 있고?”

‘그래, 수능을 잘 볼 자신은 있어서 여기로 원서를 넣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냐.’ 아직 수능을 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반드시 이 대학교를 가겠다며 고집하는 고3 학생을 상담하듯 물었다.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면요.”

“난 노래를 못 부른다고 말했을 텐데.”

덕신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말이 쓰리홀스의 곡을 무대에 올려도 된다는 허락으로 들린 건 현덕만이 아닌 듯싶었다.

“노래는 저희가 부르면 되져!”

준비가 소리쳤다. 얼마나 컸는지 천장까지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목청 하난 좋구나. 기타는 못 치면서 노래는 잘 부르나 보지?”

“춤도 꽤 잘 추거든여?”

“아무튼 기타만 못 친다는 거구나.”

“이제부터 배울 거예여.”

“진작 배웠어야지.”

“아우. 저 이제 중딩이거든여- 읍.”

피터가 준비를 뒤에서 껴안으며 입을 막아 버렸다.

“우으읍!”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디 함께 해주세요.”

피터가 공손히 말했다.

덕신은 피터의 품속에서 버둥거리는 준비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뭐? 정말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싶으면 해야지. 뭐, 별수 있나?”

서울대생 주제에 딴따라가 되겠다고 찾아온 샌님한테 대한민국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될 둘은 그리도 태평하게 말했다.

자기들 앞에서 기타를 한번 쳐보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옆자리를 내주고 딩, 딩, 딩, 기타를 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때 자신들의 모습을 꼭 닮은 어린 후배들, 아니 제자들이 앞에 앉아 있었다.

“심술 좀 그만 부려요, 형. 누가 공부만 한 좀팽이 아니랄까 봐, 하여튼.”

“하고 싶다잖아. 그럼 하게 해줘야지.”

귓가에 마계상과 마유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심술은 무슨. 정말 쓰리홀스의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는지 확인한 거지.’

덕신은 손을 뻗어 소파 옆에 세워 놓은 기타를 잡았다. 기타를 끌어안듯 잡고 딩, 딩, 딩. 지난 3일간 준비가 그토록 연습한 기본음을 울리며 말했다.

“그래, 하고 싶으면 해야지. 뭐, 별수 있나? 어디 한번 해보게.”

심술만 부리는 좀팽이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사실, 그도 궁금하기는 했다. 눈앞에 조르륵 앉아 있는 셋이 만들 쓰리홀스의 무대가.

***

불이 들어오지 않은 무대 위. 오른쪽 구석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불빛 아래에는 낡은 벤치가 덜렁 놓여 있었다.

뚜벅, 뚜벅.

힘없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 어깨가 축 처진 남자가 빛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손엔 낡은 클래식 기타를 들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서 노인처럼 보였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제 50대나 되었을까 싶은 중년의 남성, 덕신이었다. 그는 허름한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키가 커서 그런지 헐렁한 매력이 있었다.

그는 벤치 가운데에 기타를 기대 놓고는, 한쪽 끝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이어서 교복을 입은 중학생 소년이 한 명 벤치 앞으로 걸어왔다. 준비였다.

꺄아악-

준비야!

교복 입었어!

객석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준비는 얼른 손을 입에 가져다댔다.

“쉿!”

그러자 순식간에 객석이 조용해졌다.

준비는 벤치 끝에 주저앉았다.

우읍!

꺄-읍!

객석에서는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오다 말았다.

준비는 포슬포슬한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듯 우울해 보였다. 그러다가 팔꿈치로 기타를 툭- 쳤다.

기타가 스르륵 미끌어졌다. 준비는 얼른 기타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기타의 주인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덕신을 발견했다.

준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타를 내밀었다. 덕신은 기타를 받는 대신 손짓했다. ‘친 김에 한 번 쳐봐.’라는 뜻이었다. 준비는 손을 들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요?’

덕신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준비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기타와 덕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뭇머뭇, 칠까 말까 고민을 하는데,

“장준비이이이이이! 하고 싶은 거 다해에에에에에에!”

객석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객석에서 입을 막고 비명을 참고 있던 사람들까지 피식, 웃고 말았다. 준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객석을 향해 찡긋, 윙크하고는 기타 줄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딩-

고요한 무대에 준비가 만들어낸 음이 울렸다.

준비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신기한 듯 기타를 내려다보고는, 벤치 위에 펄쩍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정말 이 세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도 된 것처럼 기타를 멋들어지게 들고 힘차게 손으로 내리쳤다.

당연히 엉망진창인 소리가 났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준비는 마음껏 기타를 쳤다. 오직 준비의 귀에만 세계 제일의 연주로 들리는 엉망진창의 소음이 무대 위를 가득 메웠다.

덕신이 경악하는 얼굴로 그런 준비를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나 기타를 빼앗았다.

갑자기 두 손이 썰렁해지자 준비가 눈을 번쩍 떴다. 기타는 어느새 덕신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준비가 울상을 지으며 기타를 돌려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덕신은 ‘안 돼, 돌아가.’하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는, 벤치에 앉은 자세로 다리를 반쯤 접고 기타를 고정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기타를 튕겼다. 그는 준비와 완전히 다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어라?’ 준비가 딱 이런 표정을 지으며 덕신을 바라보았다.

그때.

무대에서 음악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기타 선율이 엮인 단조로운 간주였다. 거기에 덕신이 치는 기타의 음이 더해졌다.

덕신이 입을 열었다.

이 나이가 되어 살다 보면 때론 과거를 돌아보지.

돌아보면 단 하나뿐인 것을.

청아하다 싶을 정도로 맑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노래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일직선의 목소리였다. 조금이라도 기타 음을 따라가려 하면 목소리는 금방 탁하게 쉬어버렸다. 소위 말하는 삑사리가 났다. 그때마다 덕신의 얼굴 위로 애수가 드리웠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느릿하고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노래, 노래, 그리고 노래.

오직 노래만 부르고 싶었다네.

오, 빛나는 내 청춘이여.

노래할 수 없는 옛 가수의 쓸쓸한 독백이자 낭독이 끝나는 순간.

무대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벤치 뒤로 화려한 무대가 나타났다. 1970, 80년대 주한미군 부대의 음악 무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나무판자를 뚱땅뚱땅 못질하여 만든 단상 위에 알록달록한 알전구가 빼곡히 드리워졌다. 미국 국기와 한국 국기가 엇갈려 꽂혀 있고, 조그만 만국기가 허공에서 펄럭였다.

간이 나무 무대 아래에는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사람들이 둥그런 테이블 여러 개에 나뉘어 앉아 있었다. 맥주병을 들고 휘파람을 불며 어서 노래를 부르라고 성화였다. 허리업, 허리업~ 씽잉! 허리어업!

무대 위에는 유치찬란한 복장의 밴드가 서 있었다. 빤짝이가 가득 달린 촌스러운 조끼, 바닥을 청소하는 대걸레처럼 보이는 긴 나팔바지, 빤딱빤딱 빛나는 백구두.

다 낡은 드럼이 무대의 절반을 채웠고, 트럼펫이나 탬버린을 든 연주가는 악보를 앞에 세워두고 알이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다 풀어헤친 가슴팍에는 어설프게 가져다 붙인 가슴 털이 휘날렸다. 머리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따라한 듯 잔뜩 부풀어 빤짝빤짝 빛났다.

이 엉터리 밴드의 중앙에는 기타를 든 두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피터와 현덕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피터는 가발이라도 쓴 건지 머리를 뽀글뽀글하게 볶아 둥그렇게 만들었다. 아프로 머리가 아주 잘 어울렸다. 입고 있는 옷은 번드르르한 에나멜가죽 재킷과 나팔바지였다. 멕시코에서 직접 공수한 듯한 가죽 술이 재킷과 바지 재단 선을 따라 달려 있었다. 피터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피터 옆에 폼을 잡고 서 있는 현덕은 올백 스타일이었다. 구두약이라도 바른 건지 머리가 번들번들했다. 덕분에 하얀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가 형광 분홍색 쫄바지였다.

꺅!

미쳤어!

잘 어울려!

객석에서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함성이 터져 나왔다.

피터는 그 함성을 의식하듯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맨 가슴을 드러냈다. 그리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큰 빗을 꺼내 머리를 빗어 넘기는 시늉을 했다. 빗은 당연히 꼬불꼬불한 머리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피터는 빗이 사실은 머리핀이었다는 듯 머리에 꼽은 채 놔뒀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 앞에는 스탠딩 마이크가 하나 서 있었다.

피터와 현덕은 신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스탠딩 마이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엉덩이로 서로를 밀쳤다. 반딱반딱 윤이 나는 백구두로 상대방의 발을 밟아댔다.

무대 위는 금방 난장판이 되었다. 뒤에 선 밴드 멤버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결국 피터가 스탠딩 마이크를 차지하고 현덕을 옆으로 밀어 버렸다. 현덕은 피터에게 다시 달려들려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 준비와 눈이 마주쳤다.

현덕의 얼굴에 ‘오!’하는 표정이 어렸다. 그는 얼른 피터의 어깨에 달린 가죽 술을 잡아당겨 준비를 보게 했다.

현덕과 피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고는 준비를 향해 손짓했다.

준비가 다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피터와 현덕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덕신이 준비에게 기타를 건네주었다.

‘한 번 가봐.’

준비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기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현덕과 피터가 있는 무대로 달려갔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군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피터와 현덕이 준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비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준비가 가운데 서자 피터와 현덕이 양옆에 섰다.

딱, 딱딱. 딱딱!

하품을 하며 졸고 있던 드럼 연주가가 정신을 차리고 채를 두드려 박자를 잡았다.

그렇게 노래가 시작되었다. 기타 밴드 쓰리홀스가 십 년 무명의 세월을 딛고 날개를 펼 수 있게 해준 노래. 1981년, 대한민국 최고의 히트곡. ‘씨잉-인-더-롸이프’였다.

현덕과 피터가 기타를 신나게 쳤다. 준비도 그 사이에서 기본음을 치며 선율을 보탰다.

꿈을 꾸었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 믿었지

막다른 골목 끝 왔던 길을 돌아설 용기도 나지 않았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건 내가 부르는 나의 노래,

노래. 노래. 그리고 노래여.

sing in the life 그게 나의 길 나의 노래

현덕과 피터가 한 마이크에 입을 대고 화음을 맞추었다. 그걸 지켜보던 준비가 펄쩍 뛰어 스탠딩 마이크를 잡아당겼다. 준비의 키에 맞춰 마이크가 아래로 쑥 꺼졌다. 마이크를 독차지한 준비가 아름다운 미성으로 독주했다.

나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이까짓 막다른 골목 백번쯤 부딪쳐도 좋아

산산조각 난대도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노래. 노래. 그리고 노래여.

sing in the life 그게 나의 길 나의 노래

현덕과 피터는 허리를 굽히고 준비의 음색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무대 위로 가득 차올랐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지 어리석은 고집쟁이라고

막다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도 모르냐고 말했지

그럼에도 노래를 부르는 내 맘속에 가득 차 있는 건

노래. 노래. 그리고 노래여.

sing in the life 그게 나의 길 나의 노래

이윽고, 간주에 접어들었을 때. 준비가 마이크를 빼 들고 무대 아래로 펄쩍 뛰어내렸다. 깜짝 놀라는 두 사람에게 어서 내려오라고 손짓하고는 벤치를 향해 뛰어갔다. 현덕과 피터는 얼른 준비의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벤치에 앉아 있는 덕신의 앞에 섰다. 준비가 덕신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덕신은 주저하며 마이크를 받지 않자 준비가 억지로 마이크를 넘기고는 벤치로 뛰어올랐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덕신을 벤치에 앉히고는 그 옆에 섰다. 피터와 현덕은 벤치 뒤로 가 허리를 숙였다. 하나의 마이크에 네 사람의 음이 모였다.

현덕과 피터, 준비, 그리고 덕신은 서로를 바라보고 눈을 마주쳤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네 사람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 나는 그들에게 말할 거라네

결코 공허한 꿈이 아니었다고

노래 부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법처럼

나의 꿈이 이뤄지는 걸

나 오직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막다른 골목에 또 부딪쳐 울게 된다 해도 좋아

노래. 노래. 그리고 노래여.

sing in the life 그게 나의 길 나의 노래

그건 노래라기보다는 느리고 느린 음의 낭독과도 같았다. 잘 어우러진 세 사람의 화음 위로 잔뜩 쉰, 탁하고 거친 목소리가 더해졌다.

오, 노래. 노래. 그리고 노래여.

sing in the life 그게 나의 길 나의 노래

마지막 후렴구가 끝나자 눈부신 조명이 솓아졌다. 덕신은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무대가 끝난 뒤, 찰나인지 영원인지 알 수 없는 이 순간. 현덕도 준비도 피터도, 그리고 덕신도, 자신의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환희와 공허의 영역에 던져졌다.

잠시 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걷히고, 객석이 드러났다.

와아아아아아아-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쓰리홀스!

쓰리홀스!

쓰리홀스!

객석에서 쓰리홀스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파도를 이루어 덕신을 덮쳤다.

덕신은 눈을 떠 객석을 바라보았다.

본래대로라면 1,200명가량의 관객이 와 있어야 했지만, 두 배인 2,400명가량의 관객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트라이 온의 시청자인 듯한 젊은 사람들 옆에는 부모 뻘인 중년의 사람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상견례에 나온 것처럼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나온 것이었다.

원로 가수와의 콜라보 무대는 특별히 현장 무대 당첨자에게 1+1표를 주었다. 부모님 중 한 분을 모시고 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딸, 아들과 비슷한 나이에 쓰리홀스의 노래를 듣고 열광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와 준 쓰리홀스의 덕신에게 감사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현덕과 피더, 준비는 살짝 덕신의 등을 떠밀었다. 자신들은 덕신의 뒤로 물러서서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려 박수를 쳤다.

이 무대는 트라이 온 경연 무대이기 이전에 쓰리홀스에게 바치는 무대였다. 쓰리홀스의 음악을 아끼고 사랑하며, 끝까지 지키려 애쓴 덕신이 주인공이었다.

덕신은 무대의 맨 앞에 서서, 수천의 관객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그립고 보고 싶은 건- 너무 일찍 떠나버린 그의 동료이자 친구이자 형제였던 마유상과 마계상이었다.

***

은퇴를 발표한 날 밤.

세 사람은 포장마차에 모여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을 못 마시던 마계상은 사이다를 마셨다.

“우와, 이제 뭐 해 먹고 살지?”

제일 나이 어린 마계상이 앞날을 걱정하며 탁자에 쿵쿵, 이마를 박았다.

“이크, 안주 조심해라.”

마유상은 동생의 머리보다는 안주가 엎어질까 걱정하며 우동 그릇을 들어 올렸다. 옆에 앉은 덕신은 끌끌 웃으며 빈 소주잔을 채웠다.

“그럭저럭 먹고살다가 한 오십쯤 되었을 때, 우리 다시 한번 쓰리홀스를 재결성합시다. 네?”

이마가 벌게진 마계상이 고개를 번뜩 들며 말했다.

“왜, 오십 되면 먹고살 게 없어질까 봐?”

덕신은 빈 소주병으로 마계상의 이마를 문질러 주며 말했다

“아, 이 쫌팽이 형. 아무튼 공부 잘하는 사람은 저래서 안 돼. 너무 이득만 따진다니까. 형님, 그런 게 아니잖수. 그때쯤 되면 우리도 자식들 놓고, 뭐, 먹고 사는 것도 자리 잡히고 하지 않겠어? 그즈음, 다시 한번 노래를 부르자는 거지. 리-쏴이틀! 디이나쇼! 그런 거!”

“어이구, 말은 잘 한다.”

“말만 잘할 거 같아? 진짜, 두고 봐. 내가 꼭 디-나쇼 하고야 말테니까.”

마계상이 구시렁거리며 입을 아- 벌렸다.

“형, 이마는 됐고, 나 꼼장어.”

덕신은 웃으며 꼼장어 대신 닭발을 마계상의 입안에 쑥 밀어 넣었다.

으악! 비명을 지르는 계상을 보며 마유상과 덕신은 소주잔을 부딪쳤다.

“계상이 소원대로 이십 년 뒤 쓰리홀스 재결합을 위하여!”

“뭐, 그때까지 우릴 기억해주는 팬이 남아 있다면. 까짓것, 위하여!”

“아, 왜 둘만 해. 무조건 한다, 재결합. 그리고 디나쇼!”

마계상이 뒤늦게 사이다가 든 잔을 들고 짠- 부딪쳤다. 그렇게 세 사람은 분명 약속했다.

***

그 약속의 무대에 덕신이, 셋이 아니라 하나인 채로 섰다.

‘계상아, 유상이 형.’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없는 멤버들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그리고 자신들을 여전히 기억해주는 팬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벅차올랐다.

덕신은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기억해주셔서.”

목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퍼졌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터 형, 현덕 형.”

준비가 슬그머니, 현덕과 피터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헤어지지 말고 오래오래 같이 해 먹어여. 건강하게, 아프지 말고여.”

준비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히잉. 준비는 현덕과 준비의 손을 붙잡은 채로 제 손에 눈을 비볐다. 피터와 현덕의 손에 준비의 눈물이 닿았다.

트라이 온에 합격한다 해도 프로젝트 그룹의 활동 기한은 11개월. 준비가 말하는 오래오래 같이 해 먹고 싶다는 소망에는 한없이 못 미치는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현덕이나 피터는 누구도 그 짧은 기간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준비의 손을 꾹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그러자.”

“약속할게.”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뭉친 세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가 오래도록 담았다.

***

촉팀 다음은 위팀의 무대였다.

위팀의 무대는 원조 섹시 댄스 가수라 불리는 하원양과의 콜라보 무대였다.

하원양은 중학생 때 데뷔하여 무명 기간 없이 단번에 뜬 수퍼 루키였다. 당대 유명했던 다른 두 솔로 여가수들과 함께 묶여 가요계 트로이카로 불렸고, 그 인기를 발판으로 연예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하였으며, 여러 대형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그녀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엔터테이너였다. 하지만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다.

당시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계약했던 기획사가 문제였다. 조폭과 연계되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곳이었는데, 노예 계약을 강요하고 연예인을 혹사하기로 유명했다.

기획사는 하원양을 돈 벌어 오는 기계쯤으로 여겼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스케줄을 짰고, 쉴 시간을 주기는커녕 잠도 잘 재우지 않았다. 정산 또한 거의 없었다.

그녀는 심할 때는 일주일 동안 단 열 시간만 자며, 물과 김밥만 먹으며 공연을 다녀야 했다. 아무리 젊다 한들 몸이 버텨줄 리 없었다. 하원양은 유명 TV 가요쇼 생방송 무대 중 각혈하며 쓰러졌다. 역대급 방송 사고였다.

이후 하원양은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딸이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안 하원양의 부모님은 기획사에 소송을 걸었다. 2년여 긴 법정 싸움 끝에 하원양은 기획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기획사는 하원양을 그냥 놔주지 않았다. 그녀의 앞길을 막을 생각으로 온갖 더러운 루머를 퍼트렸다.

신문과 뉴스에서 연일 하원양과 온갖 남자들의 스캔들이 쏟아졌다. 그녀의 얼굴을 더러운 사진에 합성한 것이 버젓이 스포츠 신문 1면에 나기도 했다.

하원양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다시 쓰러졌고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재활 훈련을 하면서 연예계 복귀는 아예 단념했다.

수년 후, 하원양은 그 힘든 시절 내내, 자신의 곁에서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자신을 꼭 닮은 예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최근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딸은 데뷔 전 연습생 때부터 포스트 하원양으로 불렸다. 데뷔 후에도 하원양 닮은 꼴로 화제를 모았다. 그래도 딸은 자신의 어머니가 하원양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소속된 아이돌 그룹이 정상에 오른 뒤에야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밝혔다. 어머니의 명성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숨겨왔던 것이었다. 하원양도 그제야 모 아이돌 그룹 멤버의 어머니로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원양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미모는 여전했다. 세월이 그녀만 빗겨 난 것 같았다.

위팀 연습생들이 하원양을 만나러 갔을 때, 하원양은 자신의 딸과 함께 있었다. 딸이 소속된 기획사의 연습실에서 딸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는데, 위팀 연습생들은 그 모습에 다들 넋을 잃었다.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인 딸이 옆에 있는데도, 그녀보다 하원양이 더 돋보였다.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위팀 연습생들은 인사해야 한다는 것조차 까먹었다. 가장 얼빠진 모습을 보인 건 자룡이었다.

“말도 안 돼, 저 동작 진짜 어려운 건데. 각도가 완전 예술이잖아.”

자룡은 숭배하듯 하원양을 우러러 보았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잘생긴 청년이 자신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자 하원양이 호호, 웃어 보였다.

“자룡 군, 만나서 반가워요. 완전 팬이에요.”

하원양이 손을 내밀었다,

자룡은 바지에 손을 싹싹 문지르고는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할 때도 감히 하원양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저희 엄마가 맨날 박자룡 연습생님한테만 투표해요. 이번에 여기 출연하실 때도, 박자룡 연습생이랑 같이 안 찍으면 안 하겠다고 막 그러셨어요!”

딸이 옆에서 촐싹이며 말하자,

“어머, 얘는. 안 해도 될 말을 왜 하고 그러니.”

하원양이 딸의 등짝을 철썩철썩 때렸다. 그 손길이 채찍처럼 매서웠다. 자룡은 그 소리를 듣고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박자룡입니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옛날부터 엄청 존경했습니다.”

자룡이 몸을 반으로 접으며 인사했다.

하원양은 자룡이 존경하는 선배 중 하나였다. 그 옛날에 지금 보기에도 파격적인 안무를 선보였는데, 모두가 하원양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했다. 자룡은 TE엔터테인먼트에서 주간 평가를 준비할 때 때때로 하원양의 안무를 커버하곤 했다.

존경해왔던 선배님은 실물로 보니 더 위대하고 아름다웠다. 자룡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해롱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 심장이 다른 의미로 미친듯이 뛰기까지는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룡이 그냥 스파르타라면 하원양은 원조 스파르타였다. 하원양과의 연습이 시작되자, 위팀 연습생들은 자신들이 여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 개미지옥에 발을 담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오호호호호호호호-.”

하원양의 웃음소리가 연습실에 울릴 때마다,

“자룡 형은, 그냥 사람이었던 거야.”

“살려줘,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차라리 죽여줘.”

위팀 연습생들은 연습실 바닥을 뒹굴며 신음했다.

연습실 한구석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원양의 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괜히 요즘 아이돌 중 제일 춤을 잘 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 엄마에게 ‘나 연예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 이후, 하원양에게 지옥의 트레이닝을 받아왔다.

“드디어 나 말고 다른 피해자가 생기네요. 언젠가 어머니의 저 모습이 만천하에 알려지길 바랐어요.”

하원양의 딸은 카메라 앞에 서서 조용히 고백했다.

“오호호호호! 역시 젊은 사람들이랑 같이 춤을 추니까 뭐가 달라도 달라. 어머나, 벌써 지친 건 아니죠?”

하원양의 딸이 힐끗, 뒤를 보았다. 하원양이 위팀 연습생들을 달달 볶고 있는 게 보였다.

“저는요, 아직도 춤 실력이나 체력 면에서 저희 어머니를 절대 못 이겨요.”

하원양의 딸은 위팀 연습생들을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그토록 불쌍한 위팀 연습생들 중에 유일하게 생생한 인간이 하나 있었다.

“역시 대선배님! 존경합니다!”

자룡이었다.

자룡은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하며 무릎을 잡았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마에 맺힌 땀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장 시원한 스포츠음료를 쥐여 주면 CF 한 편이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원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리가 흘러내릴까 두른 헤어밴드는 땀에 절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땀에 푹 젖은 지 오래였다.

춤을 출 때 그녀는 한쪽 눈이 실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연예계를 떠나서도 한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게 분명했다. 춤추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있었다.

자룡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역시나 땀에 젖은 셔츠로 닦아내며 상쾌하게 웃었다. 그 바람에 드러난 복근이 울끈불끈했다. 하원양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자룡 군. 그럴 줄 알았어요. TV로 봤을 때부터 어쩐지 마음이 가더라.”

“선배님, 저도 선배님을 비디오 녹화 화면으로만 뵈었지만, 선배님이 춤추시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부터 존경했습니다.”

허공에서 자룡과 하원양의 눈빛이 마주쳤다.

자룡과 하원양은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들 사이에 동족혐오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쳐 쓰러진 위팀 연습생들이 데굴데굴 굴러 연습실 구석에 도망가도, 둘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간혹, 하원양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댈 때가 있었다. 한 쪽 눈만으로 세상을 보다보니 무리를 하면 시야가 흔들렸다.

자룡은 몇 번 그녀를 부축하려 하였으나 하원양이 손을 들고 자룡을 막았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바로 섰다. 자룡은 그런 하원양의 모습에 다시 한번 존경의 눈빛을 내뿜었다.

하원양은 촬영 스태프에게 클렌징 티슈를 빌려 얼굴을 닦았다. 화장을 닦아내도 다를 건 없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하얀 얼굴에선 여전히 빛이 났다. 굵은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다시 한번 더 해볼까요?”

“넵, 선배님. 좀 더 빠르게 가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둘은 눈을 빛내며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하원양의 딸은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하원양을 말리지 않았다. 연습실의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에어컨을 틀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맹연습 한 무대가 시작되었다. 하원양의 1집 데뷔곡, ‘회전목마는 사랑을 모르네’였다.

재즈풍의 느리면서도 끈적한 곡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 하원양과 댄서들은 그 당시에 폴 댄스를 연상시키는 안무를 추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 그것도 여가수가 그토록 파격적인 춤을 추는 건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하원양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논쟁이 격해졌다.

트라이 온은 그 곡을 탱고 풍으로 편곡했다. 빠른 템포와 탭댄스, 그리고 줄에 묶인 마리오네트들의 칼군무가 포인트였다.

하원양은 새빨간 탱고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었다. 긴 생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붉게 염색한 타조 깃털로 장식하고 입술을 붉게 칠했다.

그녀는 그 붉은 입술로 씩- 웃어 보이며 관객의 마음을 매혹했다. 그녀가 무대 정중앙에 서자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위팀 연습생들은 몸에 짝 달라붙은 검은 가죽바지와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하원양의 주변에서 마치 하원양의 백댄서처럼 늘어섰다.

하원양이 풍성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화려하게 발을 놀렸다. 무대 위에서 그녀가 찬란하게 빛났다.

퀸의 귀환이었다.

관객들은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하원양은 손을 뻗어 그런 관객들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손짓 하나도 예술이었다. 손가락 끝까지 힘을 주어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섹시하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열 손가락엔 보이지 않는 줄이 걸려 있었다. 그 줄 하나하나에 위팀 연습생들의 팔다리가 묶여 있었다. 하원양의 손짓에 따라 위팀 연습생들은 실에 묶인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였다.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군무였다.

하이라이트는 간주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천장에서 여덟 개의 봉이 내려왔다. 하원양과 위팀 연습생들은 그 봉을 잡았다.

허공에 매달린 봉을 붙잡고 난이도 높은 폴댄스를 선보였다. 마치 환상적인 서커스를 보는 듯 했다.

마지막 동작은 봉의 제일 윗부분까지 올라가 다리를 꼬아 봉을 잡고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위팀 연습생들 중 두 명이 실수하여 봉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꺄악!”

“안 돼!”

객석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떨어졌던 연습생들은 벌떡 일어나 다시 봉에 매달렸다. 나머지 연습생들은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동작을 끝맺었다.

간주가 끝나고 다시 곡이 시작되었다. 하원양은 연습생들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서로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춤을 췄다. 마지막은 하원양과 자룡의 댄스 타임이었다.

“자룡아!”

“안 되에에에!”

“자룡아아아!”

객석에서 통곡이 나올 만큼 멋있고 끈적하게 섹시했다.

하원양이 자룡의 어깨를 감싸 쥐고 몸을 뒤로 확 젖혔다. 자룡은 한 손으로 하원양의 허리를 휘어 감고 그녀를 지탱했다. 그 아슬아슬한 동작으로 곡이 끝났다.

자룡은 땀에 젖어 흘러내린 녹색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객석을 보고 씩- 웃어 보였다. 언제나 씩씩하고 건강하게만 보였던 자룡은 거기 없었다.

격렬한 안무를 소화해낸 오팀 연습생들은 곡이 끝나기 무섭게 무대 위로 쓰러졌다. 살아서 서 있는 건 하원양과 자룡이 유일했다.

하원양마저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자 크게 휘청였다.

“엇, 선배님!”

자룡이 얼른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하원양은 기쁜 듯 방긋 웃으며 자룡을 올려다보았다.

자룡의 팬들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오열했다. 가족권으로 객석 구석에 한 자리를 얻어 앉아 있던 하원양의 남편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울었다.

“여보, 안 돼요.”

“괜찮아, 아빠. 그냥 무대일 뿐이야.”

아빠를 챙길 겸 함께 구경 나온 딸이 옆에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모두의 비명과 오열 속에 위팀의 무대가 끝났다.

이어지는 마지막 무대는 오팀의 무대였다.

***

다른 팀들이 원로 가수를 만나러 떠날 때, 오팀이 탄 버스 또한 어디론가 향했다.

“우시영 선배님은……. 그, 뵐 수 없지 않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아까 리더 형이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주더래.”

오팀 연습생들은 불안해하며 수군댔다. 다들 주민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주민은 귀에 이어폰을 낀 채 구석진 자리에 앉아 눈았다. 잠든 건지 잠든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팀으로 활동한지 시간이 꽤 흘렀건만, 여전히 오팀 염습생들에게 주민은 낮설고 불편한 존재였다. 누구도 감히 그에게 다가가 ‘우시영 선배님 돌아가신 거 맞지?’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버스는 서울 서쪽의 어느 공단 지역에 도착했다. 예전엔 방직 공장 등 여러 경공업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텅 비었다가 최근에 IT 관련 산업 회사들이 입주해 발전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PD가 앞장서고 오팀 연습생들이 뒤따랐다. 주민은 맨 뒤에서 느릿하게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시멘트로 만든 성냥갑 같은 건물이었다. 겉보기에는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었으나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이곳을 지키는 경비소도 있었다. 바닥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건물을 빙 두른 화단에는 오색의 꽃이 피어 있었다.

연습생들은 건물의 철문 앞에 걸린 금속 현판을 보고서야 아아, 고개를 끄덕였다.

[우시영 박물관]

현판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양각되어 있었다.

PD는 오팀 연습생들을 철문 앞에 모이게 한 뒤 이곳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여러분. 여기가 어디냐 하면, 우시영 님께서 1집 앨범 활동을 끝낸 후 다니던 공장입니다.”

우시영이 행방불명된 뒤, 몇 년 안 되어 이 공장은 폐업 처리됐다. 그 뒤 어느 자산가가 이 부지를 사들여 우시영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그 자산가는 우시영의 오랜 팬으로, 세상 사람들이 우시영을 잊어가는 걸 아쉬워했다. 그래서 우시영이란 가수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자료를 모아 박물관을 채우기 시작했다.

자료를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어 아직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트라이 온 제작진이 어렵사리 허락을 구해 앞으로 3일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3일이요? 그럼 매일 호텔과 이곳을 오가는 건가요?”

유호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호텔에서 여기까지는 삼십 분 내외의 거리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였다.

“그렇습니다. 다른 팀은 원로 가수가 있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여러분은 호텔에서 이곳으로 출퇴근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이곳의 개방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입니다.”

멀직히 떨어져 서 있던 경비가 다가와 철문을 열어주었다.

PD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의 사항을 반복해 말했다.

- 모든 소장품을 보기만 할 것

- 절대 만지거나 훼손하지 말 것

오팀 연습생들은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밖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모던하고 심플했으며 고급스러웠다. 바닥은 대리석이 깔려있고 천장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공장 건물이었던 터라 안은 널찍했다. 그 넓은 공간 군데군데에 유리관이 서 있었다. 유리관 안에는 우시영과 관련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는 활동 당시 우시영의 사진이나 포스터, 앨범 재킷 등이 걸려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한쪽 벽면 전체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우시영의 초상화였다.

연습생들은 두셋씩 짝을 지어 흩어졌다. 살아있는 우시영을 만날 수 없으니 우시영의 흔적이라도 보며 우시영에 대해 알고자 했다.

몇몇은 유리관 안에 든 우시영의 노트, 공장에서 입었던 작업복, 가요제에 들고 나왔던 기타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우와, 이런 걸 어떻게 다 모았다냐?”

“그러니까 자산가지. 보통 사람이 어떻게 모았겠어.”

“이걸 다 모으는 데 얼마나 들었을까?”

연습생들은 박물관의 소장품을 둘러보며 정체 모를 자산가의 재산에 대해 떠들었다.

유호와 정모는 벽에 붙어 있는 사진과 초판 레코드 등을 자세히 살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거나 기타를 치고 있는 우시영의 모습도 유심히 보았다.

“으으.”

우시영의 사진이 걸린 복도를 걸으며 유호가 진저리 쳤다.

“왜?”

정모가 물으니, 유호가 벽에 걸린 사진들을 가리켰다.

우시영의 일상이 담겨 있는 사진들이었다. 여고 친구들과 수학여행가서 찍은 사진. 여름 해수욕장에 가 큰 바위 위에서 폼 잡고 서 있는 사진. 대학교 건물 앞에서 입학 기념으로 찍은 사진. 광고 모델 때의 사진. 또 공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웃고 있는 사진 등등.

“이런 걸 어떻게 알고 다 모았을까? 딸이 행방불명됐는데 부모가 필요 없다고 내다 팔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시간이 지난 뒤에 그 가족들이 다 죽거나 이사 가서 쓸모없는 짐이 되었을 때 받아온 걸 수도 있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모은 거 같지 않아서 하는 소리야. 이렇게 말하긴 좀 그런데…… 뭔가 음습한 느낌이 들어.”

유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느낌은 항상 틀린 적이 없어.”

“형이 무슨 점쟁이야?”

“점쟁이보다 정확하지. 점쟁이는 대부분 틀리고 간혹 맞히지만, 내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얼씨구? 그럼 그 정확한 예감으로 우리 팀이 이번에 합격할지 안 할지 맞춰봐.”

“바보니? 우리가 탈락할 리가 없잖아. 저기 우리 우승 토템이 있는데.”

유호가 손으로 주민을 가리켰다. 더없이 적절한 예언인지라 정모는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오팀의 우승 토템, 주민은 한 곳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벽 한 면 전체에 꽉 들어찬 우시영의 거대한 초상화 앞이었다.

초상화는 세밀하게 그려진 걸작이었다. 우시영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장인 정신과 그림을 의뢰한 인간의 지독한 집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민은 아무 말 없이 오래도록,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넋을 잃은 듯 보이기도 했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카메라 한 대가 그런 주민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렌즈 안에 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오팀 연습생들은 박물관 중앙에 모였다.

오팀은 함께 무대에 설 원로 가수가 없었다. 우시영, 그녀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오팀에게 제공된 건 어느 자산가가 집요하게 모은 우시영의 자료가 전부였다.

오팀 연습생들은 일단 우시영의 1집 <무제> 레코드판을 전축에 돌려 들었다. 그리고 녹화된 화면으로 우시영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우시영의 노래 부르는 스타일을 익히고, 우시영 없이 어떻게 무대를 채울지 고민했다. 유호와 정모가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주민은 그 속에 끼어 있기는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호와 정모도 딱히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연습생 한 명이 주민에게 따졌다.

“저기, 힘든 걸 알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말해줬으면 좋겠어.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순 없을까? 아무리 그래도 우주민 연습생의 어머니잖아. 그럼 적어도 우리보다, 아니 누구보다 우시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건 팀을 기만하는 거라고 생각해.”

몇몇 연습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그 정도 불만으로는 주민을 움직이지 못했다. 주민은 귀찮다는 듯 연습생에게 손짓했다. 꺼지라는 뜻이었다. 그걸 본 연습생이 발끈하여 주민에게 달려들려 했다. 정모가 얼른 그를 말렸다.

“이거 놔아! 저 자식이 날 무시하잖아.”

“진정해, 진정! 이해해줘야지. 너라면 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이성적일 수 있겠어?”

“나는-”

“너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하지 마. 안 겪어 봤잖아. 안 겪어 봤으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정모는 연습생을 달랜 뒤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촬영 중이야. 괜히 우주민 동정 여론만 올려주고 욕먹고 싶지 않으면 이쯤 해.”

“…….”

연습생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팀의 분위기는 급 어색해졌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후 남은 이틀 동안 오팀은 호텔에 머물렀다. 제작진은 원한다면 얼마든 다시 우시영의 박물관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유호가 거절했다.

“죽어 있는 우시영은 충분히 봤습니다. 더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렇게 준비한 무대였다.

무대는 흰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무대 뒤 벽은 커다란 스크린이 되어 우시영의 모습을 비췄다. 기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영원한 청춘, 우시영이었다.

오팀의 연습생 여섯이 무대 위에 늘어섰다. 모두 다 새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마이크를, 다른 한 손에는 국화를 들고 있었다. 함께 무대에 오르지 못한 우시영을 추모하듯 고개를 숙였다.

앞선 두 무대는 화려하고 뻑적지근했다. 오팀의 무대는 앞선 무대와는 전혀 달랐다. 눈부시도록 하얗고 엄숙했다. 관객들은 금방 그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객석이 고요해지자 전주가 울려 퍼졌다.

우시영의 무제 1집, 제일 마지막 트랙의 곡이었다. 제목은 ‘희망’. 어쿠스틱 기타로 편곡한 곡이 특유의 감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 감았다.

첫 소절을 부른 건 주민이었다.

가운데 서 있던 주민이 고개를 들어 객석을 응시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달싹일 때마다 버석한 겨울바람이 날 것만 같았다.

입고 있는 건 장례식장의 상복을 연상케 하는 듯한 까만 정장이었다. 목소리는 더없이 담백했다.

지하방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는 하루였다오.

금간 유리창에 배인 빗물이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데

나는 서글퍼 울고 말았네.

빛 속에서 주민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고 위태로워 보였다. 관객들은 주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민이 천천히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손에 감았다. 객석에서는 숨 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어제 떠나간 그대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까

내일을 기다릴 수 없어 오늘을 붙잡는다오.

연습생들은 자신들의 파트에 맞춰 하나, 둘 고개를 들어 노래를 불렀다. 주민의 독주를 시작으로 연습생들이 한 명씩 화음을 더해가는 방식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일곱 명의 목소리가 일곱 겹의 두께로 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 외로운 기타 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는 말했다오

빈 소주병을 기울이니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쓰디쓴 빗물을 마시며 나는 술처럼 울었다오.

이룰 수 없기에 사랑해선 안 된다고 말하진 말아주오

그대가 있어 나는 오늘을 버틸 수 있었다오

또 내일이 오면 오늘이 될 텐데

나는 다시 그대를 그리워할 거라오.

주민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음과 저음을 넘나들면서 곡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유호가 높은 음을 더했고, 정모가 묵직한 저음으로 바닥을 깔아 주었다.

하늘에서 작은 국화꽃이 떨어졌다. 무대 뒤에선 여전히 스크린에 비친 우시영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간다는 말 없이 떠나간 그대가 언제든 돌아오리라

기다리는 내가 있음을

내일의 그대는 알아주오.

오늘도 또 이렇게 그대를 잃은 하루를 보내고 나는 잠드네.

아직 창 밖에선 비가 내리는데

아직도 창 밖에선 나의 눈물이 내리는데.

노래를 마친 주민이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오팀의 무대가 끝났다.

어느 무대에서 감동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대 위에 오른 MC 유진의 눈시울이 부어 있었다.

관객들은 세 팀의 무대가 끝났는데도 바로 퇴장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객석에 머무르며 자신들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이름을 외치고 박수쳤다. 연달아 멋진 무대를 관람한 관객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관객들은 제작진의 안내를 받아 뒤에서부터 퇴장했다. 그들은 공연장을 나서며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연습생에게 투표했다.

현장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연습생들은 무대 뒤에서 대기했다. 특별히 출연해준 두 원로 가수는 메인 PD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떠나기 전, 덕신과 하원양은 함께 무대에 선 연습생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덕신은 촉팀 연습생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했다.

“꼭 우승해서 우리 노래를 리메이크 하러들 오렴. 너희 셋이 없다면 리메이크고 뭐고 없으니까 알아서들 잘하고.”

덕신은 협박인지 허락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너는 꾸준히 기타 연습 좀 하고.”

준비에게 한마디를 더 남겼다.

하원양은 위팀의 모든 연습생을 한 명 한 명 포옹해주었다. 자룡과는 다른 연습생들보다 세 배는 더 오래 껴안았다.

마침 하원양을 찾아 무대 뒤로 온 하원양의 남편과 딸이 그 모습을 보았다. 하원양의 남편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딸은 에휴,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질질 끌고 하원양에게로 갔다.

“아빠,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충격을 받으면 어떡해.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여보, 난 아직도 당신뿐인데…….”

“엄마, 그만하고 여기 좀 봐요. 아빠 또 울어.”

하원양은 딸의 목소리를 듣고야 자룡을 풀어주었다. 아쉽다는 듯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자룡에게 말했다.

“무조건 순위 안에 들어서 데뷔해요. 그리고 나중에 나랑 듀엣 한번 해봐요. 어때?”

“완전 감사합니다. 무조건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자룡이 목이 부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원양은 그런 자룡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떠났다.

그렇게 원로 가수 둘을 떠나보낸 연습생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이 이천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했다. 무대가 끝나 긴장이 풀리니 뒤늦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닥쳐오는 감동의 여운을 거셌다. 몇몇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속에서 촉팀의 오렌지 삼총사는 셋이서 한 몸처럼 꼭 붙어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맞잡고 있는 손을 통해 서로의 마음이 느껴졌다. 탈락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은 하지 못했다. 무대에서 느낀 감동을 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꼭 붙어 있던 중 현덕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피터와 준비는 기진맥진해서 따라가지 못했다.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 게 고작이었다.

현덕이 비척비척 화장실 쪽으로 사라지자 주민 역시 조용히 일어나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유호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 과호흡 증후군으로 쓰러졌다. 정모가 어디선가 비닐봉지를 구해 와 코와 입에 대주어 금방 진정됐으나 몸이 축 늘어졌다. 유호는 구석의 벽에 기대 앉아 정모가 먹여주는 대로 미지근한 생수를 조금씩 나눠 마셨다.

“좀 괜찮아?”

정모가 묻자 유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랬잖아. 나이도 많은 양반이……윽.”

정모는 나이를 운운하며 기어이 매를 벌었다. 유호는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정모의 뺨을 주욱- 잡아당겼다.

“나이 얘기 하지 말랬지.”

“아우, 넵!”

“넌 기억력이 삼 초냐?”

유호가 픽, 웃으며 손을 풀었다.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정모는 얼얼한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투덜댔다. 유호는 정모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팀 연습생들이 있는 곳에 주민이 있는지 확인했다. 주민이 보이지 않자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를 찾았다.

“갑자기 왜 그래. 누구 찾아? 우주민 연습생? 왜?”

유호가 저를 앞에 놔두고 주민만 찾자 정모가 못마땅해 했다.

“가만히 좀 있어, 현기증 나.”

두리번거리는 유호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기까지 했다. 유호가 숨 막힌다고 놓으라 말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건데.”

정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호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제 목을 움켜쥔 정모의 손만 찰싹찰싹 내리쳤다.

“아, 따가워.”

정모가 유호의 목을 풀어주며 엄살을 부렸다.

“따질 걸 따져라. 지금 내 기분 모르겠어? 내가 지금 꺼림칙해 하고 있잖아.”

“꺼림칙? 뭐가?”

“우주민 연습생.”

“그 연습생이 왜?”

“……진짜 위험한 놈 같아.”

유호가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아픈 게 또 위장병이 도질 것만 같았다.

“뭐야, 그걸 여태 몰랐어?”

정모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긴 알았지만…….”

유호가 뒷말을 흐렸다.

‘이 정도로 미친놈인지는 몰랐지.’

얼마 전, 차마 정모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유호는 우시영 박물관에 다녀온 이후 잠깐, 주민과 대화를 나눴다. 항상 유호의 곁을 맴돌던 정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필이면 우시영이라니. 팀을 대표하여 제비를 뽑은 유호는 적잖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나 자신을 내려놓고 아무 춤이나 막 출 걸. 하다못해 위팀보다 먼저 제비를 뽑을 수 있었다면…….’

우시영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팀은 우시영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나마 유호가 주민을 배려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이 우시영 박물관에 다시 오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이후의 우시영 콜라보 무대에서 주민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것.

‘어차피 우시영 선배님과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없어. 같은 팀에는 우시영 선배님의 아들이 있고. 그러니까 차라리 아예 다르게 가보자. 괜히 우시영 선배님에 대해서 깔짝대지 말고. 차라리 우시영 선배님과 전혀 관련이 없는 방향으로 무대를 연출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유호는 이번 무대에서 우시영의 색깔을 철저히 지워보고자 했다. 또한 우주민도 메인으로 내세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윤곽으로 무대 연출을 구상했다.

주민은 개인의 득표수로 내내 팀의 승리에 큰 공헌을 해왔다. 그런 주민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팀 순위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번 무대만큼은 우주민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경쟁 이전에 이건, 인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짓이야. 난 사람이야, 개돼지가 아니라고. 빌어먹을 제작진 놈들.’

우주민의 가정환경이 평범하지 않고, 우시영의 죽음에 뭔가 야리꾸리한 점이 있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연습생들과 시청자들이 짐작하고 있었다. 우시영의 곡을 부르는 게 우주민에게 심적으로 꽤나 큰 부담이라는 걸 제작진이 모를 리 없었다. 유호는 비록 자신이 제비를 뽑았으나, 이런 상황으로 주민을 몰고 간 제작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우주민이 우시영 아들인 걸 알기 전부터 준비했던 거라고 말하겠지. 젠장, 그럴 리가 없잖아. 설사 알기 전에 짠 거라 해도 알았으면 바꿔야지. 살아있는 원로 가수가 한둘이야?’

어쩌면 이런 생각이 이기적인 걸 수도 있다. 유호는 현재 연습생 개인 순위에서 상위권이었다. 그러니 설사 팀이 3위를 해서 3명이 탈락하더라도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우주민을 배려하려는 생각 자체를 못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이었다. 매 순간 비정한 선택의 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때론 비겁하고, 때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

오팀에도 순위가 하위권인 연습생들은 존재했다. 지금까지 그들의 모자란 표까지 채워서 팀을 끌고 온 건 주민이었다. 무대에서 주민이 부각되지 않아 그의 표 수가 적어지면 오팀이 꼴찌팀이 되고 그들은 탈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유호의 계획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그래서 유호는 정모에게까지 자신의 생각을 숨기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굴었다. 유호는 주민과 둘만 있는 틈을 노려 주민에게 말을 걸었다.

트라이 온 제작진이 내버린 인의와 도덕을 자신이라도 바로 세우려 했건만.

“혹시, 아니 당연히 이번 무대가 불편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역시 이번 무대에서는 좀-”

“아니,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만.”

“……괜찮다고?”

유호는 주민의 대답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주민이 팀을 위해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숨기고 일부러 괜찮은 척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하는 말은 그의 본심일 확률이 높았다.

역시나.

“두 번 말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싸가지 없는 목소리는 가차 없었다.

유호는 주민의 얼굴을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주민은 정말 잘생겼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었다. 잘생김이란 말을 넘어선 아름다움이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 속에 담긴 성격이 얼마나 개차반인지 알면서도 겉껍데기에 홀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트라이 온 첫 세트 촬영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주민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었다. 유호는 외모에 홀려 두근거리는 한편, 말로 설명하기 힘든 쎄-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주민을 마주하는 게 항상 껄끄러웠다.

유호가 자신을 탐색하듯 쳐다보자 주민이 픽, 웃었다. 같잖다는 웃음이었다. 덕분에 유호는 짜증 낼 타이밍을 놓쳤다. 그 모습마저도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워서 잠시 넋을 잃은 탓이었다.

‘내가 예쁜 거에 이렇게 약했나?’

잠시나마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아니, 분위기 때문이겠지.’

이 괴물 같이 아름다운 미인과 경쟁해야 하는 다른 팀 연습생들이 불쌍했다. 자신이야 같은 팀이라 다행이지만.

궁색한 변명같이 느껴지지만, 우시영 박물관에 서 있는 주민은 특히나 더 기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주민은 내내 우시영의 커다란 초상화 앞에 서 있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이 그런 주민을 비추었다. 그 빛은 꼭 박물관 소장품을 비추는 조명등 같아 보였다. 그래서 주민은 이 우시영 박물관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값비싼 소장품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우시영 박물관에 두 번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런 유호에게 주민이 말했다.

“마음껏 이용해 봐요. 내 과거든 어머니의 일이든 뭐든.”

“뭐?”

유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난 두 번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을 텐데.”

그리 말하는 주민의 얼굴 확인한 유호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때의 주민을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하게 몸이 저려왔다. 유호는 주민의 잔영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정모의 품에 매달렸다. 정모는 두 손으로 유호를 단단히 받쳐주었다.

“왜 그래, 또 몸이 안 좋아?”

자신을 걱정해주는 정모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호는 정모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비어 있는 주민의 자리를 계속 바라보았다.

‘분명 웃고 있었어.’

주민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아름답게 웃었다. 유호는 죽는 날까지 그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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