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비의 날갯짓
판소리 미션 이후 위팀 연습생 중 한 명이 집안 사정으로 자진 하차하면서 위팀 연습생은 3명으로 줄었다.
그로 인해 12명의 연습생이 마지막 미션에 도전하게 되었다.
***
트라이 온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습생은 단연 주민이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받는 팀은 주민이 속한 오팀이 아니었다. 초반부터 연달아 꼴등을 해서 팀원들이 다 탈락하고, 달랑 세 명만 남아 계속해서 버티고 있는 촉팀이었다.
촉팀의 오렌지 삼총사는 단 한 번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촉팀을 응원하는 시청자들도 결코 촉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팀은 상위권 연습생들이 하위권 연습생들의 낮은 득표수를 커버했다. 하지만 촉팀은 그럴 수 없었다. 촉팀이 살기 위해서는 세 연습생의 득표수가 상위권이어야 했다. 단 한 명의 연습생만 하위권으로 떨어져도 팀 전체가 위험했다.
‘살려야 한다!’
촉팀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은 오직 이 하나의 마음으로 단결하였다.
시청자들의 간절한 마음에 보답하듯 촉팀 연습생들은 매번,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완성도 높은 무대에 찬사가 쏟아졌다. 성실히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시청자들이 늘어났다. 주민의 팬덤만큼은 아니지만, 촉팀 연습생들을 지지하는 팬덤의 크기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트라이 온 시청자들은 매번 죽지 않고 살아남는 촉팀을 불사조 팀이라고 불렀다. 인터넷에서는 유명 판타지 소설 원작의 영화를 패러디한 ‘김 PD와 불사촉 연습생들’라는 3분짜리 편집 영상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단지 촉팀과 촉팀을 응원하는 시청자들만 열혈인 건 아니었다. 다른 두 팀의 연습생과 그들을 응원하는 시청자들 역시 촉팀 못지않았다.
대한민국은 트라이 온 공화국이 됐다. 트라이 온 2부가 방영되는 동안 시청률은 20%를 넘나들었다. 케이블 방송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의 한계를 뚫은 신기록이었다.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국가의 중요한 이슈에 대한 단평을 내놓을 때 트라이 온을 비유로 들었다. 공중파의 개그 프로그램에선 트라이 온을 패러디한 코너가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대형 기획사들은 준비 중이던 남자 아이돌 그룹의 데뷔 시기를 미뤘다.
트라이 온에 출연하는 연습생들은 당장 그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합숙 촬영이니 뭐니 바쁜 일정에 쫓기다 보니 모두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물론 아예 모를 순 없었다. 학교나 집 근처에 기자나 팬들이 몰려들고, 기획사를 통해 팬들의 서포트, 조공이 쏟아졌으니까. 그럴수록 우승에 대한 염원은 더욱 강해졌다.
한 번의 무대만 더 버티면. 그 무대 평가에서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전 국민이 열광하는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되어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될 수 있다. 살아남은 연습생들은 마지막 미션을 기다리며 각오를 다졌다. 다음 촬영까지 하루가 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현덕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판소리 미션이 끝난 후 다음 합숙 촬영에 들어가기까지의 며칠 동안, 현덕은 평소처럼 학교에 가고 오후엔 TE엔터테인먼트로 갔다.
등하교할 때마다 기자들과 팬들이 몰려들면 어디선가 주민이 붙여준 경호원들이 나타나 현덕을 감쌌다.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이 터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기자와 팬들에게 치이는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어머니가 학교에 기부금도 내고 전교생에게 떡도 돌렸으나 그런다고 미안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괜히 기자와 팬들이 미워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현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문 앞에 몰려든 기자들과 팬들을 피해, 강당 뒤쪽 담을 넘었다.
교복 대신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고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챙이 큰 모자도 푹 눌러썼다. 민철이 인터넷에서 10cm 키 높이 운동화를 사다 주어 신발도 갈아 신었다. 그렇게 김현덕이 아닌 척하고 버스정류장에 섰다.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TE엔터테인먼트로 가려는 것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버스정류장에는 스포츠음료 광고가 걸려 있었건만. 정류장 벽면 가득, 정면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현덕의 모습이 붙어 있었다.
현덕은 그게 자신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뭔가 익숙한 얼굴이다 싶어 두어 걸음 떨어져서 확인하니, 정말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1부 때의 모습인지 주황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현덕아, 너를 응원해.
광고에 걸려 있는 문구는 단 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울컥, 뭔가가 치솟았다.
현덕은 다시 광고판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 옆에 필기체로 휘갈겨 쓴 그 문구를 만져보았다.
손에 닿는 건 딱딱하고 차가운 플라스틱이었다. 온기 따위가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따뜻한 물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TE엔터테인먼트에서 했을 리는 없고. 팬들이 모여서 만든 것일 터였다.
현덕은 그들이 누군지, 어디 사는지, 나이가 어떻게 되고 직업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그들은 김현덕을 잘 알았다.
‘너를 응원해.’
그들이 현덕에게 건넨 말이었다.
기다리던 버스가 왔지만 현덕은 타지 않았다. 아니, 타지 못했다.
버스에도 광고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서도 현덕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널 알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우리가 널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계속 그곳에서 빛나줘.
우린 널 응원할 테니까.
현덕은 버스를 떠나보내고 버스정류장 옆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묻었다.
후줄근하게 입은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아 있자, 사람들은 현덕을 피해 지나쳤다.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회피 속에서 현덕은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팬들을 생각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었다. 제대로 만나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따뜻한 애정을 보내주었다.
학교나 집 근처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귀찮다고 생각한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새삼,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이 사랑에 보답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보답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걸까? 내가 열심히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과분하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현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현덕을 비롯한 연습생들이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인기와 관심을 실감하는 동안, 연습생들이 소속된 기획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각 기획사는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소속 연습생들을 지원했다.
시청자들은 월드컵에서 한일전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미션을 앞두고는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데뷔를 바라며 맹렬히 불타올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해 달라고 부탁하며 밥을 사거나 커피 기프티콘을 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지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하기 위해 대포폰 수백 대를 사들인 30대 중반 남성의 사연이 9시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시청자 투표로 프로그램 출연 연습생의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투표 열기가 과열되자 사회 현상으로 떠올랐다. 트라이 온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트라이 온에 출연한 연습생들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의 간절한 마음은 식을 줄 몰랐다.
트라이 온을 보지 않는 너에게 말한다.
오프러를 함부로 비웃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겁게 열광한 적 있는 사람이었느냐.
*오프러(Off-er) : 트라이 온을 오프라인에서(Off) 시청하는 사람(er)이라는 인터넷 신조어
유명한 시인의 시를 패러디한 글이 트라이 온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와중에 연습생들의 팬덤 사이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테두리 팬덤에서 균열이 생긴 것이다.
테두리에 속한 세 연습생의 팬덤은 트라이 온 1부가 끝날 때까지는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움직였다. 2부에서 팀이 나뉘어졌어도 초반까지는 그 분위기를 유지했다. 촉팀이 초반에 수세에 몰려 전멸될까 말까 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는 함께 안타까워하고 응원했다. 세 연습생이 모두 최종 9인에 들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찾아보기까지 했건만.
촉팀이 확 치고 오르며 현덕이 주민의 개인 득표 순위까지 위협하자, 우주민을 지지하는 팬들의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현덕을 지지하는 팬들은 1부에서 현덕에게 그렇게 도움을 받았으면서, 2부에서 현덕이 인기를 얻자 바로 경계하는 주민의 팬덤을 보며 배신감을 느꼈다.
주민의 팬들은 자룡과 1, 2등을 겨루는 것에는 관대했다. 트라이 온 방송 이후로 자룡과 주민의 커플링이 워낙 크게 흥했던지라 일반인들도 두 사람을 엮어 부르는 걸 가볍게 여기고 즐길 정도였다. 각종 팬아트와 캡처 사진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커플링으로 묶이는 자룡은 어쩐지 주민과 한 몸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주민의 팬들은 자룡을 경계하지 않았다.
자룡의 팬덤은 다른 연습생들의 팬덤보다 나잇대가 높아 그런 면에서는 무덤덤한 편이었다.
‘1등이 뭐 그리 중요하냐. 9등이어도 좋으니 데뷔만 해라.’
굳이 1등을 다투려는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주민과 현덕의 팬덤은 사정이 달랐다.
현덤의 팬덤은 현덕을 지키고자 필사적이었다. 그 열기는 당연하게 ‘현덕을 1등으로 만들어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주민의 팬들은 도전장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주민은 물론이거니와 현덕도, 이제는 탈락을 걱정할 순번은 아니었다. 우주민은 초반부터 개인 투표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엔 자룡과 함께 1, 2위를 다투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도 낮아져봤자 3위 정도에 머물렀다. 그 아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현덕 또한 2부 중반부터는 상위 5위 안에서 오르내리며 거의 데뷔 확정 연습생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 주민과 현덕을 지지하는 팬들에게 중요한 건 데뷔 여부가 아니었다. 누가 마지막에 1등을 하여 차후 결성될 프로젝트 그룹의 메인이 될 것인가 였다.
다른 연습생들의 팬들도 1위 자리를 탐냈지만. 특히나 두 사람의 팬덤은 그 자리가 절실했다. 주민을, 그리고 현덕을 지지하는 팬덤은 각기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 분노를 품고 있었다.
주민의 팬덤은 주민이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트라이 온 제작진은 프로그램 화제성을 높이기 위해 주민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철저히 이용했다.
“춤 실력이 그따위 밖에 안 되는데 아직도 살아남은 건, 결국 사연팔이를 한 덕 아니냐.”
“아이돌을 한다면서 춤을 못 추다니? 얼굴만 믿고 나온 건가?”
소수의 타 연습생 팬덤은 주민을 물고 늘어지며 공격해댔다. 그런 비난에 맞서며 주민을 응원해온 팬덤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이왕 이용당했으니, 주민이 최종 순위에서 1위가 되어 프로젝트 그룹 중앙에서 빛나길 바랐다. 그게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현덕을 지지하는 팬들 또한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 원한이 깊었다. 팬들이 보기에 현덕은 트라이 온 제작진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연습생이었다.
현덕은 다른 연습생들과 달리 평범했다. 누구처럼 가정환경이 불우하지도 않았고, 무명의 연습생 생활을 오래도록 버티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이상한 이름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지도 않았다.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으며 연습생 경력은 오 년 미만. 학교생활과 교우 관계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간혹 현덕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거나 같은 학원에 다녔다거나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사람의 글이 올라와도 훈훈한 미담뿐이었다.
트라이 온 제작진들은 이렇게 착하고 밋밋한 연습생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1부 초반에는 내내 통편집까지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현덕은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노력했다. 카메라에 찍히나 안 찍히나 최선을 다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춤 못 추는 형을 도우려고 했다. 그렇게 스스로 방송분을 만들어내고 살아남았다.
현덕의 팬들이 생각할 때 주민은 천재파였고 현덕은 노력파였다. 늘상 천재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성실한 노력파. 사람들은 천재 모차르트보다 그의 빛에 가려진 살리에르에게 더 공감하지 않던가. 물론 알고 보면 살리에르 역시 대단한 엘리트 음악가였지만.
“우리가 좀 더 잘 서포트 해줬으면 좀 더 빛났을 텐데. 불쌍한 내 새끼.”
“TE엔터테인먼트에서도 우주민만 존나게 밀어주잖아. 우리 현덕이는 그냥 바닥 깔라고 내보낸 거겠지.”
“뭐, 부모가 유명한 가수에 재벌이면 다야? 그래서 재능 물려받으면 다냐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애가 조명을 받아야지!”
“현덕아 1위 가자! 너 정도면 1위 해도 돼!”
현덕의 팬들은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우주민을 지지하는 팬덤과 김현덕을 지지하는 팬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트라이 온 중반까지는 두 팬덤이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안에서는 복작복작하게 싸워도 결국엔 ‘테두리’라는 큰 틀 안에서 한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룡의 팬덤 역시 ‘테두리’라는 틀을 좋아했기에, 미묘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두 팬덤 사이를 오가며 협력하는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오렌지 삼총사’가 등장해도 ‘테두리 팬덤’은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흔든 건 트라이 온 제작진이었다.
본 방송 전, 제작진은 연습생 별로 다음 방송 예고 영상을 공개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예고 영상에서 주민과 현덕의 대립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제는 혼자서 해보세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언제까지 제가 도와드릴 순 없잖아요.”
현덕이 땀에 흠뻑 젖고 지친 얼굴로 상대방에게 말했다. 이어 나타난 건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주민이었다.
“뭔 상관이신지. 나한테 신경 끄라고 했을 텐데.”
주민이 제 앞에 선 누군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어지는 나래이션.
같은 기획사 출신.
1부에서는 동생이 형을 도와 탈락의 위기에서 건져내었던 사이.
하지만 2부에서 팀이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에 절친했던 둘 사이는 서먹해지다 못해 더 차가운 양상을 띠는데…….
부동의 최상위권을 유지해 온 우주민과 역주행의 기적으로 1위 자리를 노리는 김현덕.
둘의 치열한 경쟁의 끝은 어디일까.
그 날, 두 연습생의 팬덤은 폭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영상은 절묘한 편집된 것이었다.
“이제는 혼자서 해보세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언제까지 제가 도와드릴 순 없잖아요.”
이건 현덕이 트라이 온 2부 첫 미션에서 같은 팀 연습생의 안무를 돕던 중 한 말이었다.
“뭔 상관이신지. 나한테 신경 끄라고 했을 텐데.”
이건 이완용이 자신의 연습을 방해하자 주민이 귀찮아하며 했던 말이었다.
눈썰미 있는 몇몇 팬들이 영상 조작 의혹을 내세우며 글을 올렸으나, 분노한 다른 팬들의 게시글에 묻혔다. 인터넷은 두 연습생을 지지하는 팬덤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제 현덕이 좀 그만 이용해 먹어.”
“언제 도와달라고 했어? 제 멋대로 도와준 주제에 이제 와서 우주민이 좀 잘나가니까 들러붙고 지랄이야.”
인터넷이 들썩이자 트라이 온 제작진은 발빠르게 영상을 하나 더 풀었다. 촉팀이 팀 1위를 차지하자, 현덕이 입 모양으로 주민에게 ‘왜? 뭐, 왜?’라고 말하는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현덕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주민 또한 그런 현덕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같은 오팀 연습생들에게도 잘 웃어주지 않는 주민이 그 정도로 웃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뭐? 모범생? 저게 범생이가 할 짓이냐? 개구리가 올챙이 적 모른다더니, 맨날 꼴등해서 빌빌거리면서 동정심 유발할 때는 언제고 이제 꼴랑 인기 좀 얻었다고 한참 형을 저렇게 무시해? 인간성은 투표로 팔아 먹었냐?”
일부 과격한 팬들은 현덕이 주민을 비웃고 모욕하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주민을 대신하여 현덕을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사명감이었다.
도를 넘은 비난 글은 올라오는 족족 삭제됐다. 글을 쓴 사람은 트라이 온 변호사단으로부터 소송장을 받았다. 그러자 과격한 팬들은 고소를 피하는 묘한 말투를 써가며 현덕을 돌려 깠다. 아예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전과 100범이 되겠다는 각오로 현덕을 비난하는 악플러들도 있었다.
그런 광경은 함께 트라이 온을 시청하고 즐기는 다른 시청자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해도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
“현덕이도 주민이도 자룡이도, 다 내 새끼들인데. 누구만 불쌍하고 누구는 욕먹어도 되고 그런 게 어딨어.”
“셋 다 데뷔시키면 되지. 왜들 이래! 투표 한 두 번 해봐?”
“애들 데리고 뭐하는 짓이야, 쪽팔린 줄 알아야지.”
“이러다 우리 애들 다 이미지 나빠져서 순위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쟤들 팬 맞아?”
보다 못한 팬들이 들고 일어섰다. 항우영-윤우희 때도 이러더니 또 이러느냐는 지적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테두리 팬덤의 목표는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3인 모두의 데뷔였다.
사실 트라이 온 2부의 팀 발표가 나고 나서 테두리 팬덤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현덕과 주민, 자룡, 셋이 모두 한 팀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이좋게 셋 다 떨어져 각각 다른 팀에 들어가다니.
“대형은 개뿔? 이렇게 일 못하는 대형도 있냐?”
“뭐하는 거야? 지들 연습생들 케어도 안 하고? 어떻게 해서든 한 팀으로 몰았어야지!”
“이러면 표가 갈리잖아!”
팬들은 울부짖으며 무능력한 TE엔터테인먼트를 원망했다.
“우리 현덕이 어떡해!”
“현덕아!”
“자룡이 주민이는 안정권이잖아, 제발 우리 현덕이 좀 살려줘.”
현덕을 좋아하는 팬들은 이미 관뚜껑에 못을 박았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감히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테투리 전원 데뷔의 기적이 눈앞에 펼쳐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이 나다니. 테두리 팬들은 슬퍼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과거의 게시글 하나가 뒤늦게 관심을 받았다. 촉팀이 연달아 져서 3명 남았을 때, 그래도 테두리 세명이 모두 데뷔할 가능성이 있다며 시나리오를 정리한 게시글이었다. 테두리 팬들은 기어이 그 글을 찾아내 성지순례했다.
*
후기) 테두리들 다 데뷔할 수 있는 경우의수
다 비켜. 내가 찾아왔다.
써놓고 보니 암담하네.
가능성이 0%에 수렴해
하지만 0%는 아니야.
기적은 이루어진다, 몰라?
여긴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나?
2002 월드컵 직접 눈뜨고 본 사람 있으면 기운내 희망을 가지자
끝날 때까지 끄난 거 아니야.
┕ 성지 순례 왔습니다.
┕ 성지순례 왔습니다2222
┕┕ 성지순례 왔습니다3333333
┕┕ 4444444
┕┕ 성지순례 왓씁니다555
┕ 성!지!순!례!
┕ 미친...나 소름 돋았어. 이거 쓰니 혹시 신내림 받았어?
┕ 선생님 성지 순례 왔습니다. 로또 당첨되게 해주세요.
┕ 성지순례 왔습니다
┕ 혹시 알아? 이 글이 성지순례감이 될지? 믿는다.
┕┕ 이야 이거 내가 달았던 거야, 미친... 나 소름 돋았어
┕ 진짜 이렇게 되면 내가 얘들 첫 팬미팅에 티라노 사우르스 분장하고 간다.
┕┕ 나는 그 옆에서 둘리분장할게. 우리 엄마 먹지 마여ㅠㅠㅠㅠ
┕┕┕ 난 우리 현덕이의 데뷔 축하 기념으로 한복을 입곡 ㅏ서 학춤을 추겠어ㅠㅠ글니까 제바류ㅠㅠㅠㅠ
┕┕┕ 내가 리코더로 배경음 불어줄게ㅠㅠㅠㅠㅠ
┕ 늬들 내가 캡쳐해놨닼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제발 이 조합을 첫 팬미팅에서 볼 수 있게 해주세여…
┕┕┕ 똑똑똑, 날짜 잡으러 왔습니다
┕┕┕ 니들 준비는 됐냐?
┕┕┕ 여기가 핫플레이스 맛집이라면서요. 둘리 스테이크 하나 추가여ㅋㅋㅋㅋㅋㅋ
*
온건한 테두리 팬들은 옛글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테두리의 단결을 추구하였다. 더더욱 단결하여 TE 엔터테인먼트 3인의 데뷔를 기원하였다.
적당한 견제와 신경전, 일부의 과격한 선동. 인터넷 커뮤니티 여기저기에서 부딪쳐 발생하는 소소한 소동. 그리고 적절한 자정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이 버무려진 인터넷은 말 그대로 살벌한 전쟁터였다.
***
‘한 번의 무대만 버티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프로그램의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다.’
이 명제는 아직 살아남아 있는 위, 촉, 오 연습생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기획사들까지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
중소 기획사든 대형 기획사든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획사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연습생들을 마지막까지 생존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트라이 온 제작진은 1부 촬영에 앞서 기획사 직원들이 자신들을 찾아오는 걸 금지했다. 대놓고 막지는 않았으나 자제해달라고 권고했다. 초반에야 기획사들은 트라이 온에 별 기대가 없었기에 그 권고 잘 따랐다. 하지만 트라이 온의 시청률이 빵 터지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권고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었다. 각 기획사의 직원들은 방송국에 총출동하여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 달려들었다. 다들 제작진, 특히나 PD들과 밥 한번 같이 먹으려고 안달이었다. 어떻게든 제작진과 접촉하여 다음 미션 정보를 얻어듣거나, 소속사 연습생이 1초라도 더 방송에 나올 수 있도록 만들고자 노리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은 연습생들의 무대 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각 기획사의 매니저들과 부장급 인사들의 경쟁은 소속 기획사 연습생들 못지않게 뜨겁고 치열했다.
TE엔터테인먼트와 오 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 팀장은 어린 나이에 이 업계에 발을 들였다. 어느 삼류 가수의 로드 매니저로 일을 시작한 지 어언 십수 년. 이제는 대형 기획사의 팀장이 되었다. 그건 그가 매니저로 뛰어다니며 방송국에서 만났던 연출팀 막내, 수습 PD, 막내 작가 등등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용케 이 업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들 방송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파랗게 어린 매니저를 보내는 것보다는 오 팀장이 직접 찾아가 추억팔이를 하는 게 효과가 좋았다.
그리하여 오 팀장은 트라이 온 2부 촬영이 시작할 즈음부터 거의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러면서 트라이 온에 출연 중인 연습생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회사 소속 연습생들의 멘탈 관리를 위해서였다.
기획사 소속의 아티스트 중에는 매니저나 회사 직원들이 방송국을 드나들며 PD를 만나 사정하고 방송 작가들을 찾아다니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연예인들이 꽤 있었다. 자신이 재능이 있고 인기가 있으니 회사 차원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단지 회사의 아부와 술수로 인기를 얻었다고 자학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사회 경험 없는 어린 연예인들이 이러했다. 오 팀장은 그런 연예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빡침에 한숨 쉬곤 했다.
기획사는 그들이 속된 말로, ‘그 짓’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소속 아티스트는 당연히 자신의 재능을 가다듬고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획사는 소속 아티스트가 좀 더 좋은 무대에서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선보일 수 있도록 서포트해야 한다. 그래야 소속 아티스트가 더 많은 인기를 얻어 더 많은 수익을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
기획사의 이딴 노력은 소속 아티스트가 빛나기 위해 바닥에 깔아야 하는 돗자리일 뿐인 것을. 왜 돗자리에 감정 이입 해 자길 비하하는 걸까. 답답하고 이해가 안 됐으나, 그런 상태까지 돌봐야 하는 게 소속사의 임무였다.
오 팀장은 혹여 트라이 온에 출현하는 소속 연습생들도 그런 감성을 가지고 있을까 염려했다. 솔직히 말하면 연습생 ‘들’이 아니라, ‘특정’ 연습생을 걱정했다. 그 연습생의 성은 박이요, 이름은 자룡이었다.
우주민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성실하고 의외로 고집이 있는 현덕도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오직 자룡만 걱정됐다.
오 팀장이 보기에 자룡은 오래 연습생 생활을 하여 자신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노력파인 데다 실력이 워낙 좋아 트라이 온에서 선전하고 있으나, 혹여 PD에게 샤바샤바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역시 내가 내 능력으로 잘 된 걸 리 없어. 결국엔 기획사 빨이구나. 뒤에서 중소 기획사 애들이 수군거리던 대로네.’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트라이 온 촬영 전, 자룡이 한강 다리로 갔던 일은 오 팀장에게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래서 오 팀장은 방송국을 드나들 때 연습생들과 마주치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은 트라이 온 촬영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항상 성공했다.
‘나도 한물 간 건 아니라니까. 아직 현장에서 뛰어도 무리가 없다고.’
오 팀장은 여태껏 자룡이나 현덕, 주민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 한두 주만 더 버티면 계획대로 완전 범죄가 될 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지막 미션을 앞두고,
“씨-앗? 뭐야, 오 팀장님?”
자룡과 마주치게 되었다.
오 팀장은 방송국 로비 한가운데서 돌이 되어 버렸다. 설악산에 흔들바위가 있다면 이 케이블 방송국에는 오 팀장 바위가 존재할 뻔 했달까.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오 팀장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연히 트라이 온 촬영하러 왔죠.”
자룡이 생뚱맞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오 팀장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촬영장이 아니라 여기에?”
“촬영이 늦게 끝나서요. 여기 방송국 사내 식당에서 밥 먹고 합숙 촬영하러 가기로 했거든요. 저기 현덕이랑 우주민, 그 자식도 있는데. 얼굴 보실래요? 부를까요?”
자룡이 손을 들어 저쪽을 가리켰다.
오 팀장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마라. 너 본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 떨리니까.”
“왜요?”
“그러게, 왤까.”
오 팀장이 맹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그래요, 진짜 이상해 보이게, 씨앗.”
자룡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오 팀장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어, 암튼 자룡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그리하여 겨우 내뱉은 말이 고작 안부 인사였다. 자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오랜만은 무슨. 바로 어제도 봤잖아요.”
자룡의 말대로 둘은, 아니 현덕까지 끼워 넣어 셋은 어제도 봤었다.
“오 팀장님, 뭔가 이상한데? 뭔 일 있어요?”
자룡이 오 팀장에게 불쑥 다가왔다.
“뭔 일 있기는 무슨. 아무것도 없어.”
오 팀장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여긴 뭔 일로 왔는데요. 설마 우리 때문에 왔어요?”
자룡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 팀장의 상상 속 자룡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 팀장의 상상대로라면 자룡은 이렇게 말해야 했다.
‘오 팀장님이 여기 왜 있어요? 설마 샤바샤바라도 하려고 온 거? 씨발. 역시, 내가 순위 높은 건 내 실력 때문이 아니었구나. 기획사 빨이었어.’
절대 현실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안 돼!’
지레 겁먹은 오 팀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한창 순위 높고 잘 나가고 있는데, 괜히 충격받아서 남은 촬영을 망치게 둘 수는 없지.’
오 팀장은 자룡의 컨디션이 엉망이 될까 걱정하였다.
사실, 오 팀장이 솔직하게 말했다 한들 지금의 자룡은 오 팀장이 염려하는 것처럼 자괴감에 빠지거나 자신의 실력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룡은 자신감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건 자신이 숱하게 땀을 흘리며 피나게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트라이 온에 출연하며, 또 현덕과 다른 연습생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성장하여 위팀의 리더가 되었고, 팀을 잘 이끌고 있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프로젝트 그룹의 리더는 당연히 박자룡이지 않냐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 팀장에게 자룡은 여전히 트라이 온에 출연하기 전의 자룡이었다.
‘아!’
문득, 오늘 아침 회사에서 보고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변명거리로 써먹을 만한 내용이었다.
“회, 회사에서 준비 중이던 데뷔조가 엎어져서 말이야. 출연 예정이었던 프로그램 제작진이랑 그걸 좀 의논할 필요가 있어서 왔지.”
오 팀장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만족스러워서 하하 멋쩍게 웃었다.
“아, 그래요?”
자룡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수긍하자 오 팀장의 마음은 더욱 편안해졌다.
“그룹명까지 다 정해졌는데 미뤄져서, 회사 분위기가 지금 말도 아니야. 뭐냐, 우리 이렇게 우연히 방송국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가 뭐, 커피나 한 잔 사줄까? 방금 밥 먹었다고 했지. 음료수로 입가심이라도 할래?”
오 팀장은 지갑을 꺼내 들며 자룡에게 물었다. 어쨌거나 자룡을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는 그랬다. 뭐라고 하나 입에 물려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자룡은 거절하지 않았다. 다음 촬영지로 출발하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조금 전, 오 팀장이 말했던 데뷔조 무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다.
그리하여 오 팀장과 자룡은 방송국 내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둘은 엎어진 데뷔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데뷔조는 6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래서 그룹명이 뭐였어요? 또 핑크키위처럼 이상한 거로 정했죠? 씨앗.”
“이상하긴, 완전 성스럽고 파워 있는 이름으로 정했거든? 그리고 원래 아이돌 이름은 좀 쉽고 유치하고 입에 착착 감겨야 맛인 거야. 핑크키위가 뭐 어때서. 이름 때문에 망했나? 잘만 나갔구만. 그놈의 스캔들만 없었어도!”
***
마지막 미션을 앞두고 촬영 장소가 변경되었다. 연습생들은 그동안 이용했던 호텔이 아니라 개장을 앞둔 워터파크에 도착했다. 워터파크 내부에는 이전에 묵었던 호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며칠 편히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을 갖추어져 있었다.
아직 워터파크가 개장하기에는 이른 시기였으나 모든 풀장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놀이기구들 역시 현란한 빛을 내뿜으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오직 트라이 온 연습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제작진은 도착하자마자 연습생들을 풀어놨다.
“그동안 치열한 경쟁을 버티느라 고생들 많았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의미로 준비한 자리이니, 마음껏 즐기세요. 오후 7시에 이 자리로 돌아와 주시면 됩니다.”
모자를 쓴 메인 PD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연습생들에게는 그 상냥한 목소리가 마냥 상냥하게만 들리진 않았다.
“들어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다른 스텝도 아니고 모자 피디가 저렇게 말하니까, 절대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아.”
“혹시 먼저 들어가거나 하면 이번 미션에 페널티 있거나 그런 거 아니겠지? 아이돌한테 필수적인 예의범절이 없다고?”
“그건 완전 벌칙이잖아.”
“근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저번에도 이거랑 비슷한 미니 게임했었잖아.”
“일단 가만히 있어 보자.”
연습생들은 워터파크 입구에 모여 서서 쭈뼛거렸다.
“아니, 이 사람들. 진짜 속고만 살았나. 진짜 마음대로 놀아도 된다니까요? 어서 들어가요. 이러다가 시간 다 지나겠네.”
메인 PD는 어서 들어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재촉했다. 연습생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여, 역시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아.”
“난 수영 좋아하는데, 오늘부터 워터파크가 싫어질 거 같아. 들어가기 싫어.”
현덕은 그런 연습생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멀뚱히 서 있었다.
‘들어가면 안 되는 건가?’
현덕은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들어가려다가 피터에게 붙잡혔다.
“너무 앞서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딱 중간만 하자. 응?”
피터는 군대에서 배운 인생의 진리를 현덕에게 말해주었다. 현덕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군대 속담에 그냥 웃고 말았다.
피터는 트라이 온 제작진을 불신했다. 제작진이 나서서 뭔가 하자고 할 때는 무슨 일든 항상 의심부터 하고 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연습생들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굳이 나서지도 않았다.
현덕은 주민을 보았다. 주민도 현덕만큼이나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옆에 선 유호는 오늘도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제작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속이 쓰린 듯했다.
정모는 다른 연습생들이랑 워터파크 음모론을 쑥덕대고 있었다. 정말 믿는다기보다는 재미로 그러는 것 같았다.
참다못한 메인 PD가 당장 들어가지 않을 거냐고, 고함을 치기 직전.
“에이, 몰라. 뭐 이런 걸 가지고 갈까 말까 고민이에요.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지.”
준비가 쑥 튀어나와 워터파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준비야!”
피터가 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재빨랐다.
“자, 들어왔어요! 됐죠?”
준비는 워터파크 입구 안쪽에서 두 발로 당당히 서고는 팔짱을 꼈다.
“흥, 이까짓 게 뭐라고.”
코웃음을 치며 메인 PD를 바라보았다.
메인 PD는 씩 웃으며 박수 쳤다. 조금 전까지 열 받아 하는 게 얼굴에 훤히 드러났었건만. 그 험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주 준비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전 여기서 놀아야겠어여. 아 몰라, 놀 거야. 놀라고 데려다준 거라잖아여. 형들, 얼른 이리로 와여.”
준비가 피터와 현덕에게 손짓했다.
앞서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말고 중간만 가자. 그런 비겁한 속담은 준비에게 통하지 않았다. 중딩 동생을 앞에 두고 몸을 사린 두 청년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부끄러움을 털어내기 위해 얼른 준비의 곁으로 뛰어갔다. 준비는 둘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후룸라이드여! 무조건 후룸라이드부터 타러 가여! 고고고!”
준비가 힘차게 외쳤다.
“그래, 까짓것 가자.”
“저게 후룸라이드라는 거지?”
현덕과 피터는 준비를 모시고 저 멀리에서 세찬 물길을 헤치는 후룸라이드를 향해 달려갔다.
주민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차며, 워터파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어-.”
“잠깐만!”
오팀 연습생들이 말리려 했으나 그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니 붙잡을 수 없었다.
“으아! 모르겠다!”
현덕에 이어 주민까지 들어가자, 자룡 또한 크게 소리 지르고는 워터파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괜, 찮은 거겠지?”
“뭐,그래도. 다들 들어가는데 우리도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제야 다른 연습생들도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한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었다.
“아, 몰라! 놀자!”
“워터파크, 내가 이 구역의 인어 왕자다!”
“문어겠지.”
“수영복 안 입고 수영해도 되는 거겠지?”
연습생들은 조금 전까지 머뭇거린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날뛰기 시작했다.
매일 매 순간이 경쟁의 연속이고, 무대에 오를 때면 긴장해 숨도 못 쉴 정도로 내몰리지만. 연습생들은 고작 십 대, 이십 대의 청년들이었다. 아직은 노는 게 좋을 나이였다.
내내 살벌하게 경쟁했던 호텔 합숙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장소, 그것도 물이 가득한 놀이동산. 장소가 주는 안정감이 달랐다. 팽팽했던 긴장의 끈은 대번 느슨해졌다. 연습생들은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신나게 놀았다. 가장 신나 어쩔 줄 몰라하는 연습생 중 한 명이 현덕이었다.
현덕은 워터파크에 처음 와 본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새로웠다. 그런데 하필 첫 놀이기구가 후룸라이드였다. 놀이기구는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꽤, 아니 상당히 높았다. 콸콸 흐르는 세찬 물살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현덕은 후룸라이드 앞에서 멈칫했다. 준비와 피터는 그런 현덕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제 와서 뒤로 빼면 안 되여.”
“나 혼자선 준비 감당 못 한다, 현덕아.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아씨, 내가 뭐여. 내가 형들이랑 놀아주는 거거든여? 고마워나 하세여. 군인 아저씨.”
“아저씨라니!”
“헐, 아저씨라고 불렀을 때 화내면 진짜 아저씨라던데.”
“…….”
“현덕 형, 저기 군인 아저씨는 후룸라이드 지키라고 여기 세워 놓고 우리끼리만 타여.”
준비는 말은 이렇게 했으나 정말로 피터를 버리고 가지는 않았다. 무서운 게 없는 중딩은 아저씨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군필자와 후룸라이드를 처음 타보는 고딩 형아를 잘 챙겼다. 두 형을 놀이기구에 밀어 넣고, 자신도 얼른 현덕의 옆에 앉았다.
덕분에 현덕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후룸라이드라는 놀이기구를 경험해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후룸라이드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현덕은 알지 못했지만, 이 워터파크의 후룸라이드는 아시아 최고 높이, 최대 길이를 자랑하는 극악한 것이었다.
떨어져 내릴 때마다 현덕은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으아아아악!”
“이야아아아아! 대바아아아아악!”
옆에 앉은 준비는 환호성을 질렀다.
“……!”
피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어깨에 얹은 안전장치만 꼭 붙잡았다.
촤아악- 떨어져 내리는 순간,
세 사람은 파도 뒤집어쓰고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형, 비명 완전 3 옥타브!”
“준비야, 너 머리가…….”
현덕과 준비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끄, 끝난 거지? 오 마이 갓.”
피터는 영혼을 잃은 상태였다.
물에 흠뻑 젖은 채 놀이기구에서 내리니, 직원이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네 주었다. 세 사람이 떨어져 내려 물세레를 맞을 때 찍은 것이었다.
세 사람은 사진을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사진은 뭉크의 절규 후룸라이드 버전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이었다.
“피터 형은 네모고 현덕 형은 세모네여.”
“응, 그래. 넌 동그래서 좋겠다, 준비야?”
“난 얼굴이 유 라인이거든여. 부러우면 턱 깎고 오세여. 형은 너무 뾰족해. 그런데 또 턱이 각져서 네모네. 으으.”
“네모나다니. 나름 브이 라인이거든?”
피터와 준비가 얼굴 윤곽을 가지고 투닥투닥 싸우기 시작했다.
현덕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셔츠를 두 손으로 비틀어 짜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미남들도 후룸라이드 앞에서는 별수 없구먼.”
촬영 감독이 사진을 넘겨받고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시청자들을 위해 그 사진을 밀착 촬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룸라이드를 타며 흠뻑 젖은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는 근처 기념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반갑게 세 사람을 맞이했다.
세 사람은 거기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모두 통이 넓은 사각 수영복을 입었다. 준비가 장난삼아 코끼리 코가 달린, 그런 주제에 몸에 딱 달라붙는 삼각팬티를 피터에게 집어 던졌다.
“형, 이 끔찍한 건 형이 입어봐여!”
“아직 한국에선 동성끼리 성희롱은 처벌받지 못하는 거니?”
피터는 그 흉측한 팬티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들고 흔들며, 아직 미성년자인 준비를 고소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준비가 슬쩍 현덕의 뒤로 다가와 등에 매달렸다. 그러자 현덕은 관련 법 조항을 줄줄 읊으며 피터의 고소 드립을 잠재웠다. 지금만큼은 눈을 가리고 공정해야 하는 판사가 아니라 준비를 지켜야 하는 준비의 변호사였다.
피터는 배신감 어린 얼굴로 현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배신감을 느낀 건 잠시였다. 피터는 단지 박식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현덕을 신기해했다.
“요즘 한국 중등 교육은 법도 잘 가르치나 봐?”
“대한민국에서 제일 공부 많이 하는 때가 언제일 거 같아요? 수능 준비하는 고딩이거든요.”
현덕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대한민국 고딩을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수능 보기 전까지만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어휘력과 독해력이 높은 시기니까요. 아, 암기력도 높아지죠.”
현덕은 이어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사회 과목의 개수를 알려주었다.
물론 그건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일 뿐, 그 중 몇 가지만 배우고 말 뿐이지만.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피터는 현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무지막지한 학습량에 경악했다.
“삼 년 동안 단지 사회 과목 하나에서 경제와 법과 정치와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윤리와 지리를 다 배운다고? 다른 주요 과목을 다 배우면서?”
“예의상 영어랑 제2 외국어도 배워요. 아, 과학도 그만큼 종류가 많아요.”
현덕은 위에 걸칠 얇은 후드 집업을 고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맙소사, 어디 가서 공부 좀 했다고 뻐기면 안 되겠어. 내가 공부하는 거랑 여기 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 양이 거의 비슷하잖아. 가짓수는 여기 고등학생들이 더 많고.”
피터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사이 준비는 이상한 문양의 바지와 문어 모양의 모자를 찾아 왔다.
“피터 형! 제 선물이에여.”
“오, 준비야. 마침 잘 왔다. 이거 신어 봐.”
피터는 질 수 없다는 듯 걸을 때마다 뽀짝뽀짝 소리가 나는 오리발을 들고 왔다.
“으악! 미쳤어여? 그런 신발은 네 살 때 졸업했다구여!”
준비는 기겁하며 피터에게 조개껍데기 기념품을 던졌다.
조개껍데기는 피터의 머리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천으로 만든 쿠션이라 몽글몽글해 콩- 소리를 내고는 피터의 손으로 떨어졌다.
“윽, 머리! 뇌진탕이 오는 거 같아.”
피터는 고소의 나라에서 날아온 사람답게 과격한 헐리우드 액션을 선보였다.
에휴. 현덕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대한민국 새 나라의 청소년을 지키기 위해 또 긴 변론을 펼쳐야 했다.
기념품 매장 직원은 그런 셋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좋아했다. 규정상 핸드폰을 스태프 룸에 두고 온 걸 아쉬워했다. 특히나 피터에게 문어 모자를 넘겨받아 머리에 꾹 눌러 쓴 현덕을 보고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입을 틀어막았다.
카메라 감독 역시 아빠 미소를 지으며 푸근하게 웃었다. 따라 온 작가나 촬영 스태프들도 오랜만에 마음 편히 웃으며 촬영을 즐겼다.
셋은 자신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아로마 양초같은 역할을 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투덕대며 옷을 갈아입었다. 수영복을 입고, 얇은 집업을 걸치고 문어 모자를 썼다. 뽀짝거리는 오리발까지 낀 후 본격적으로 워터파크를 헤집고 다녔다.
현덕은 의외로 워터파크 체질이었다. 처음 타본다면서도 온갖 놀이기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준비는 그런 현덕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반대로 피터의 처지는 갈수록 우울해졌다.
초반에만 해도 피터는 워터파크를 씹어 먹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고작 후룸라이드를 타고 그 높이에 놀라 넋을 잃더니, 360도로 회전하는 수중 바이킹을 한 번 타고는 쓰러졌다. 바이킹 근처 벤치에 누워 30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못난이 형 놔두고 우리끼리 한 번 더 타러 가여.”
“그래, 그러자.”
피터가 해롱대며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준비와 현덕은 손을 맞잡고 한번 더 수중 바이킹을 타러 다녀왔다.
평소라면 현덕은 기진맥진한 피터의 곁을 지키며 그를 돌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덕은 괴로워하는 피터를 두고 잔인하게 등을 보였다. 처음 맛보는 물맛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버렸다.
‘재미있어! 짜릿해! 워터파크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라니!’
현덕은 눈을 빛내며 준비와 물놀이를 즐겼다. 이때만큼은 지치거나 힘들어 허덕대지 않았다. ‘개복치 김현덕군’이 중간 진화를 건너뛰고, 단번에 메가 진화를 거쳐 ‘전설의 워터파크 문어머리 김현덕’으로 진화한 것 같았다.
놀다 보면 다른 팀 연습생들을 마주쳤다. 경쟁이든, 팀 구분이든 뭐든 생각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았다.
연습생들은 그동안 경쟁에 시달리며 지치고 스트레스 받았던 마음을 시원한 물줄기에 쏟아냈다. 놀수록 기운이 넘쳐흘렀다. 워터파크 곳곳에 설치된 촬영 카메라들은 그런 연습생들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았다. 모두 다 워터파크 개장 시 홍보 CF용으로 사용될 소중한 영상들이었다.
약속한 오후 7시가 되자, 메인 PD는 워터파크 내에 방송 장치를 통해 연습생들을 불러 모았다.
연습생들은 하나둘, 워터파크 입구로 모여들었다. 다들 처음 워터파크로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느새 수영복으로 갈아입었고, 또 흠뻑 젖어 있었다.
현덕은 문어 모자를 쓰고 홍학 튜브를 허리에 끼고 있었다. 준비는 커다란 잠수용 수경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피터는 야자수 나무가 그려진 화려한 방수 바지를 입고 오리발을 꼈다. 걸을 때마다 뽀짝뽀짝 소리가 났다.
현덕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자룡과 주민을 찾았다. 자룡은 산호초와 꽃이 가득 달린 이상한 밀짚모자를 쓴 채 위팀 연습생들과 떠들며 웃고 있었다.
주민은 아까 워터파크에 도착했을 때 모습 그대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수영복을 입지도 않았고 머리카락 한 올 물에 젖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주민이 픽,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웃는 게 아닌 그런 미소. 서로 마음이 통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현덕은 잠깐 의아해했으나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아, 맞다. 우리 사귀는 중이지. 같이 놀았어야 했는데.’
노느라 정신이 팔려 주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초보라지만, 지금, 이 상황이 100% 자신의 과실이라는 걸 모를 순 없었다.
‘미안, 진짜 미안.’
현덕은 주민을 향해 두 손을 싹싹 빌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럼에도 주민의 눈빛은 계속 불량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김현덕 연습생?”하고 말을 할 것만 같았다.
‘으으.’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시렸다.
주민이 ‘김현덕 연습생’을 ‘현덕아’라고 부르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길고 길었던가. 그게 불거품이 될 수도 있다니.
‘다시는 안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번엔 내가 진짜 잘못한 거야.’
현덕은 깊이 반성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하게 쳐다봐도 주민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이런 데 처음 와 봤단 말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미안해, 미안해.’
현덕은 그저 ‘나 죽었소.’하고 빌었다. 미안해 죽으려는 현덕을 바라보는 주민의 눈초리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주민은 처음 현덕과 눈을 마주칠 때만 해도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빈정이 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덕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니 울컥, 서러움이 치솟았다.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그럼 나랑 함께 있을 궁리를 해야지. 그깟 홍학 튜브가 그렇게 좋다고 허리에 끼고 돌아다녀?’
주민은 홍학 튜브를 허리에 끼고 꼭 껴안고 있는 현덕을 바라보았다.
‘뭐, 보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아까 계속 지켜봤던 현덕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로 치솟았다.
주민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현덕을 외면했다.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현덕을 순순히 용서해줄 마음은 없었다. 나중에 몰래 만나 뽀뽀하고 껴안게 해준다면 모를까.
“으엑?”
옆에 서 있던 정모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우주민 연습생…… 왜, 왜 그렇게 웃어?”
정모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민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다. 고로 주민의 그 얼굴을 본 건 오직, 정모뿐이었다.
주민은 바로 얼굴을 굳혔다. 현덕을 보며 웃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아, 차라리 그 얼굴이 낫다. 우주민 연습생, 웃지 마. 적응 안 돼서 무서우니까. 아우,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정모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근데, 계속 어디가 있었던 거야? 저기 촬영 스텝들도 계속 찾고 그러던데. 어- 딱히, 유호 형이 궁금한데 자기가 물어보기 좀 그러니까 나한테 시킨 건 아니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였다. 옆에 서서 딴청을 부리고 있던 유호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주민으로서는 유호가 묻든 정모가 묻든 거기서 거기인지라 정모가 유호의 사주를 받았다는 데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뭘 했는지 밝힐 생각도 없었다.
“피곤해서 그늘에서 한숨 자다 왔어. 그뿐이야.”
주민은 짧게 자신이 뭘 했는지 밝혔다.
“그럴 리가? 그럼 촬영 스텝들이 못 찾았을 리 없는데?”
정모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알 바 아니지.”
주민은 짧게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계속 등 뒤에서 현덕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민은 정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저를 보는 현덕의 시선이 끊길까 전전긍긍했다. 현덕의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으면서. 막상 현덕을 보지 않고 딴짓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혹여나 현덕이 자신에게 사과하려는 걸 포기할까 봐 몸이 달았다.
결국 주민은 다시 현덕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덕은 여전히 주민을 보고 있었다. 주민과 눈이 마주치자 검지를 들어 올렸다.
‘진짜 미안. 한 번만 봐줘.’
그 모습이 꽤 간절하고 절박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낮에는 내내 주민이 현덕을 지켜봤건만,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이 됐다. 낮 동안 주민은 워터파크 중앙에 있는 워터타워 상층부의 카페에 가 있었다. 따라붙은 제작진은 적당히 따돌렸다.
현덕과 둘이서 논다면 모를까, 현덕이 자신을 버리고 훅 날라버렸는데 딱히 재밌다는 듯 웃는 척하며 물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워터타워 상층부의 카페는 아이들이 워터파크 내 놀이기구를 타며 노는 걸 부모가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곳이었다. 워터파크의 모든 곳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놀이구가 모여 있는 쪽은 훤히 내려다보였다.
촉팀 연습생들이, 그러니까 현덕과 준비는 워터파크 내 놀이기구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타보려는 생각인지 놀이기구가 모여 있는 구역에서 노느라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주민은 한가롭게 현덕을 구경할 수 있었다. 준비와 꼭 붙어 있는 모습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물놀이하며 웃는 얼굴을 때문에 참을 만했다.
‘이런 걸 좋아하나?’
현덕이 워터파크를 좋아하는 게 좀 의외긴 했다.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았다.
‘의외긴 한데. 여길 좋아하는 건지 이런 걸 좋아하는 건지는, 나중에 확인해 둬야지.’
이 워터파크를 좋아하는 거라면 사들일 생각도 있었다. 그냥 워터파크란 공간을 좋아하는 거라면 시황그룹 내 테마파크 사업을 담당할 계열사를 하나 세워 새로운 워터파크를 만면 되고.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신기한 놀이기구를 많이 세우면 현덕이 더 좋아하겠지.
주민은 왕회장이 들었으면 아주 기뻐할 생각을 하며, 턱을 괴고 현덕을 보았다.
현덕이 밝은 햇살 아래, 물에 흠뻑 젖어서는 활짝 웃었다. 뭐가 그리 좋고 재미있는지 물에 풍덩 풍덩 빠지면서도 좋아 죽으려고 했다.
까만 머리카락이 물에 흠뻑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하얀 얼굴이 더 희게 보였다. 얇은 집업을 하나 걸치고 있었는데 안 걸치니만 못했다. 물에 흠뻑 젖어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헐렁한 사각 수영복은 물에 젖어서도 흐물거렸다. 다리에 달라붙지 않아 그나마 괜찮았으나, 수영복 아래 드러난 가느다란 다리가 주민을 자극했다.
그런 꼴을 하고 누구 좋으라고 저렇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건지. 주민은 속이 다 쓰렸다.
이 워터파크를 사들이던지 새 워터파크를 짓던지, 반드시 자신 소유의 워터파크를 하나 가지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여름마다 저런 현덕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주민은 그렇게 현덕의 노는 모습을 관람하여 낮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냈다. 그러고도 자신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현덕의 시선 또한 오래도록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기회를 봐서 둘만 있을 때, 현덕을 꾀어 몇 번 입맞춤을 받을 수 있을지도. 서운한 마음 대비 소득이 높았다. 나쁘지 않은 투자였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미안해하는 현덕과 그런 현덕을 외면하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건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든 어떻게 보든, 주민에게 그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현덕과 주민이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새 다른 연습생들은 산만하게 웅성댔다. 그 소란스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MC인 방유진이 연습생들 앞에 나타나자 연습생들은 순식간에 합죽이가 됐다.
유진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청량음료 CF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상큼했다. 유진은 촬영 스태프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손에 들고는 연습생들의 앞에 섰다.
“여러분, 마음껏 즐기셨나요?”
네-. 연습생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잘됐네요. 오늘의 즐거움이 이번 미션을 준비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 들리는 유진의 말에 연습생들은 쩌정- 얼어붙어 버렸다.
“미션?”
“그냥, 오늘 하루는 노는 거 아니었어?”
“그럼 그렇지.”
“설마 놀이기구 몇 개 탔는지, 그런 거로 점수 매기는 건 아니겠지?”
“망했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했다. 개장을 앞둔 워터파크는 깨끗했고 찰랑거리는 물은 맑고 시원했으며, 여러 놀이기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신나기 그지없었다. 오직 연습생들이 서 있는 곳만 춥고 황량해졌다.
유진은 굳어버린 연습생들에게 이번 미션을 공개했다.
[원점회귀: 한여름의 뮤직비디오]
이번 주 미션은 이 워터파크에서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이었다. 뮤직비디오로 찍어야 하는 곡은 세 데뷔조 팀이 트라이 온 2부 첫 무대에서 불렀던 데뷔 후보곡이었다.
주어진 기한은 이틀이었다. 하루는 구상과 준비. 다른 하루는 촬영.
세 팀의 뮤직비디오는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받아 현장 순위가 결정되고, 이후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공개되어 투표를 받게 된다. 이전처럼 2주 동안 진행하는 미션이 아니었다. 이번 주 사흘간의 촬영으로 완결나는 미션이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워터파크를 마음껏 즐겼을 겁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찍어보세요. 기술적인 면은 여기 있는 촬영 스텝들이 보조해 줄 테지만. 의상 컨셉이나 촬영 장소, 그리고 전체적인 컨셉과 스토리 등은 모두 여러분이 직접 구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지.”
“왜 갑자기 놀라고 그랬나 했네.”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연습생들은 입을 삐죽이며 투덜댔다.
유진은 이어서 미션 우승팀이 가지게 될 혜택을 설명했다.
“여러분이 워터파크에서 노는 모습을 우리 제작진이 모두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모습은 트라이 온 방송을 통해서도 공개가 될 것이고, 또 이 워터파크의 홍보를 위해서도 쓰일 겁니다.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나요?”
유진이 물었다.
연습생 중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설마…….’
‘진짜로?’
‘아니겠지.’
다들 우승 혜택이 무엇일지 예상했으나 확신할 수 없어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세 팀이 만든 뮤직 비디오는 이 워터파크를 운영하는 회사의 사장과 임원진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평가합니다. 그 평가에서 일 위를 한 팀의 뮤직비디오는 약 30초 전후로 재편집되어, 이번 여름 시즌에 이 워터파크의 TV 광고로 쓸 예정입니다. CF를 촬영한 연습생들에게는 출연료로 각각 3억 원이 지급될 예정이구다. 아,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나중에 방송국과 기획사 간의 논의를 통해 정산될 겁니다.”
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습생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3억!”
“3억이라고?”
억 소리가 절로 났다. 금액을 듣고 놀라지 않는 건 주민뿐이었다.
“형,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져?”
준비가 현덕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음, 아마 우리가 다 같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잘못 들은 건 아닐 거야.”
현덕도 억 소리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여러분, 그 정도로 놀라시면 곤란한데요. 아직 제가 알려드릴 내용이 남아 있는데,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네에에!”
“제발요!”
연습생들은 먹이를 바라는 새끼 새처럼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미션은 심사위원단의 심사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세 팀이 찍은 뮤직비디오는 트라이 온 방송 다음 날부터 인터넷에 공개될 겁니다. 시청자분들은 세 팀의 뮤직비디오의 풀 버전을 모두 확인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연습생에게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한 번씩.”
투표. 연습생들의 귀가 번쩍 뜨였다.
“다음번 트라이 온 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주일. 성실한 시청자 한 분께서 총 일곱 표를 투표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 표는 최종 미션 무대에서 탈락자를 가릴 때 득표수로 환산됩니다.”
이제까지는 시청자는 매주 핸드폰 1대당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뮤직비디오 미션을 통해 적어도 7표를 자신이 원하는 연습생에게 줄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건 3억의 CF 출연료가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받을 수 있는 7표였다.
유진은 연습생들이 물놀이에 빠져, 또 3억에 기가 질려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지금 여기는 트라이 온 촬영장. 그들은 최종 9인에 들기 위해 경쟁하는 중이었다.
연습생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유진은 잔뜩 긴장한 연습생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쩌면 트윈 트윙클에 출연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이 워터파크에 트라이 온 방송국이 투자한 걸까? 뮤직비디오를 일주일 동안 일곱 번씩 보고 일곱 번 투표할 수 있다니. 투표하기 위해 몇 분짜리 워터파크 광고를 매번 보게 되는 거잖아.’
현덕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과 동심의 놀이동산으로 보였던 아름다운 워터파크가 더러운 자본주의의 본거지로 느껴졌다.
프롤레타리아적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트라이 온에 출연하고 있는 이상, 현덕 역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성공하고자 맨땅에 헤딩하는 도전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마지막 탈락자를 결정하는 무대가 이 워터파크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데뷔를 코앞에 둔 실력 있는 연습생들입니다. 많은 시청자분께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있지요. 여러분의 데뷔를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청자분들의 몫!”
유진이 마이크를 들지 않은 한 손을 크게 벌리며 말을 이었다.
“이 뮤직비디오 미션은 최종 미션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최종 미션은 트라이 온의 일만 관객을 앞에서 생방송 콘서트 무대에 서는 것입니다.”
최종 미션은 특별 편성을 받아 진행되는 2시간 45분 동안의 생방송 콘서트 무대였다. 출연자는 오직 열두 명의 연습생들뿐이었다.
위팀, 오팀, 그리고 촉팀. 세 데뷔조 팀은 트라이 온 2부 시작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이 무대에 올렸던 그 곡들로 다시 한번 무대 위에 서야 했다.
연습생 개별 무대도 준비해야 했다. 개별 무대는 트라이 온 1부에서 평가 무대를 준비하며 연습했던 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이 생방송 콘서트를 위해 연습생들을 훈련시켜 왔던 것이었다.
연습생들은 1부에선 관객이 없는 무대에 올랐다. 오직 100여 명의 동료 연습생들만이 관객이었다. 이후 2부에서는 관객들 앞에 서야 했다. 처음에는 300명이었다. 그다음에는 600명이었다. 그다음에는 900명, 그리고 2400여 명.
살아남은 열두 명의 연습생들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1만 명 앞에서 콘서트를 진행해야 한다.
이번 주의 뮤직비디오 촬영 미션. 바로 이어지는 다음 주의 생방송 콘서트.
‘원래대로라면 두 번 더 투표를 진행해야 했을 텐데. 연습생 세 명이 하차해 버려서, 미션이 남았나 보네. 그걸 마지막에 다 밀어붙일 셈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2주 동안 두 개의 미션, 게다가 생방송 무대 준비라는 벅찬 스케줄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연습생들의 표정 또한 그리 밝지 않았다. 아니, 중압감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유진의 표정은 그 중압감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선배로서 일까. 프로그램을 이끄는 MC로서 일까.
“뮤직비디오 투표와 현장 무대 관객 일만 명의 투표, 거기에 TV로 생방송 최종 화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투표까지 더해져서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의 최종 멤버가 결정됩니다. 여러분, 이제 한 걸음 남았습니다.”
마지막 한 걸음.
그 너머에 그토록 바랐던 기회가 놓여 있었다.
꿈을 이룰 기회. 연습생들은 한 걸음 앞에 서 있는, 하지만 아직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웃으며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어서, 자신이 딛고 선 이곳까지 올라와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오프닝 촬영 후 하늘은 붉게 노을졌다. 제작진은 슬슬 촬영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오늘은 연습생들이 워터파크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까지만 찍을 계획이었다.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미션 촬영은 내일부터였다. 하지만 그건 제작진의 생각일 뿐이었다. 연습생들은 당장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뮤직비디오 미션 준비를 하고자 했다.
“정말 괜찮겠어?”
메인 PD가 연습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가 이렇게 물어볼 정도로 연습생들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온종일 물놀이를 했는데 체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몸은 축축 처지고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연습생 중 누구도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메인 PD는 그 기세에 밀렸다. 연습생들에게 잠깐 기다려보라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습생들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공손했다. 네네, 거리면서 고개를 꾸벅이기도 했다.
“회사에 구두 허락을 받았으니, 오늘부터 워터파크는 24시간 개장입니다.”
메인 PD는 전화를 마친 뒤엔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촤라락- 워터파크에 불이 들어왔다. 폐장을 미루고 야간 개장을 한 것이었다.
메인 PD는 각 팀에 PD 한 명과 촬영 감독 한 명, 그리고 촬영 스태프들을 붙여 주었다. 세 팀은 워터파크 곳곳으로 흩어졌다. 다른 팀이 듣거나 볼 수 없는 곳을 찾아가 작전 회의를 했다.
모든 컨셉과 내용, 촬영 방식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건 연습생들의 몫이었다. PD와 촬영 감독은 카메라 밖에서 기본적인 조언을 해줄 뿐이었다. 연습생들이 하루 안에 찍을 수 없는 스케일의 컨셉을 잡으면 PD가 조언을 해주기는 했다.
각 팀은 리더의 성향에 따라, 또 팀의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자룡이 팀 리더로 있는 위팀은 처음부터 노련했다. 자룡은 데뷔만 안 했다 뿐이지 기성 가수들의 상업 곡에 여러 번 피처링을 했던 경험이 풍부했다. 종종 그들의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에 따라가 촬영을 돕기도 했고.
무엇보다 TE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하며 여러 번 데뷔조에 속해 데뷔 직전까지 가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떨 때는 데뷔곡이 나와서 녹음을 하고 뮤직비디오까지 찍은 후 데뷔가 무산되기도 했으니까.
그 시절을 되새기는 건 여전히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값진 경험이었다. 자룡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뮤직비디오 촬영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갔다.
현장 상황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애초부터 제작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효율적으로, 무엇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도 있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에 주력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위팀 연습생들은 팀 리더인 자룡을 믿었다. 믿다 못해 맹신했다. 자룡의 스파르타식 리더십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기에, 자룡이 이끄는 방향을 믿고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유호가 이끄는 오팀은 세 팀 중 인원이 가장 많았다. 다른 팀은 단 세 명이었으나 오 팀만 여섯이었다. 언제나 머릿수가 깡패였다. 오팀은 다른 팀에 비해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많다 하여 배가 사공으로 갈 리도 없었다. 병약한 리더는 절대 건들면 안 된다는 신성 불가침적인 인식이 연습생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으니까. 주민만 빼고 아무도 유호를 거스르지 못했다.
유호는 병약하나 능력 있는 리더였다. 그리고 미대 출신이었다. 이번 미션에선 유호의 전공이 빛을 발했다.
유호는 워터파크를 조형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촬영했을 때 가장 아름답게 나올 수 있는 곳을 체크했다. 연습생들이 논의하여 결정된 컨셉과 스토리텔링에 맞는 소풍과 의상을 쓱쓱 그려냈다.
조금 무리이다 싶은 소품과 의상에 대한 의견이 나와도 유호는 찰떡같이 소화해냈다. 동료 연습생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캐치하여 그 포인트를 살리는 방향으로 단순화시켰다. 덕분에 오팀은 다른 팀보다 빨리 필요한 소품과 의상 기획안을 제작진에 제출했다.
오팀과 위팀, 두 팀은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뮤직비디오로 만들어야 하는 곡의 포인트가 달랐으니 뮤직비디오의 컨셉도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두 팀은 커다란 공통점이 있었다. 이번 뮤직비디오의 미션이 가지고 있는 무게에 짓눌려 버렸다는 것이다.
3억, 그리고 7표.
이 정도 우승 특혜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더 새롭고, 더 멋지고, 더 특이하고, 더 기발하고, 더 독특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렇다 한들 하늘 아래 아주 새로운 것은 없으니 엄청나게 독특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런 방향으로 고민했다는 흔적은 그들의 작업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편 촉팀은 두 팀에 비해 분위기가 느슨했다.
예전 같으면 준비가 “이 나무 느림보 형들 같으니라고! 빨랑빨랑 뭐라도 좀 해보자고여!”라고 소리치며 닦달했겠지만. 어느새 준비는 두 형에게 물들어버렸다.
“알아여,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거져? 어디 형들하고 싶은대로 해봐여. 뭐, 어쨌든 언젠가 하게는 되겠지.”
준비는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았다.
모범생 두 명은 준비를 데리고 노천카페로 가 자리를 잡았다. 세 사람은 테이블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펴고는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차분하게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를 늘어놓은 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구분했다. 이 부분에선 PD와 촬영 감독의 도움이 필요했다.
PD와 촬영 감독은 처음엔 최소한의 도움만 주겠다고 말하며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현덕과 피터, 준비가 순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종이를 채워나가자 더는 가만있지 못했다.
“잠깐, 잠깐만! 그건 아니지.”
“맙소사, 예산이 한 3천억쯤 되나?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라도 찍게? CG로 용 열 두마리를 만들어 넣겠다니?”
그들은 현덕과 피터가 얼토당토않게 써넣은 것들을 볼펜으로 좍좍 그었다.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브레인스토밍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피터와 현덕은 그런 둘을 막아서지 않았다. 대신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작전 성공이었다.
피터와 현덕, 준비는 모두 다 뮤직비디오의 ‘뮤’ 자도 몰랐다. 그러니 반드시 PD와 촬영감독의 협조가 필요했다. 단지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체크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아예 작정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PD와 촬영 감독을 움직이고자 한 것이었다.
가벼운 낚시여서 간파 당할까 염려하였건만. PD와 촬영 감독은 떡밥을 덥석 물어 주었다. 모두 다 잔머리라고는 굴릴 것 같지 않게 생긴 두 범생이의 관상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특히나 어른들은 모범생들이라면 무조건 착하고 순할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속이기 쉬웠다.
촉팀은 PD와 촬영 감독의 적극적인 조언을 받아 뮤직비디오 촬영을 준비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준비될 때 즈음, 준비가 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촉팀은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 팀이었다. 현덕과 피터는 준비가 잠들자 내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파했다.
“으쌰.”
피터가 준비를 업었다. 현덕은 커다란 담요로 준비의 몸을 감싸고 등을 받쳐주었다. 그렇게 촉팀 연습생 세 명은 제일 먼저 숙소로 향했다.
이번 뮤직비디오 미션 기간 동안은 팀별로 같은 방을 썼다. 현덕은 잔뜩 삐진 주민이 생각나 괜히 등골이 시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덕은 준비를 등에 업은 피터를 따라가며 마음속으로나마 주민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했다.
‘어차피 형네는 새벽까지 뮤직비디오 찍을 준비를 한다고 했으니까 애초부터 이야기는 못 나눴을 거야.’
괜스레 울적해지는 자신의 마음도 달랬다.
만약 주민이 이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뭘 모르는 소리라고 타박했을 것이다.
주민은 함께 방을 쓸 수만 있다면야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로 입실 시간이 맞지 않아 상관없었다. 현덕이 먼저 잠들고 자신이 나중에 들어온다면, 슬그머니 현덕의 침대로 가서 현덕을 품에 안고 자면 되니까.
굳이 대화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몸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데. 우주민에게 그토록 간절한 그걸, 김현덕은 아직 몰랐다.
이 무정한 애인은 별생각 없이 피터를 도와 준비를 침대에 눕히고, 가볍게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채 5초가 지나기 전에 잠들었다.
***
다음 날, 촉팀의 오렌지 삼총사는 워터파크 곳곳을 돌아다니며 뮤직비디오 배경으로 어울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면서도 쉼 없이 뮤직비디오의 컨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 하나 남의 의견을 이상하다고 말하고 반박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셋은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마음껏 말을 했다. 진정한 브레인스토밍이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뻔하고 전형적인 컨셉과 내용에 대한 의견이 반복되었다.
여름, 바다, 물놀이하면 생각나는 맑고 청량한 이미지.
현덕과 피터, 준비는 푸드 코트에서 점심을 먹으며 뻔하고 청량한 느낌의 뮤직비디오를 찍자고 의견을 모았다.
“잘 생각해 봐요. 이 뮤직비디오의 심사위원은 높은 어르신들이에요. 거의 저희 부모님뻘이겠죠? 그렇다면 너무 파격적인 뮤직비디오는 점수를 받지 못할 거예요.”
현덕은 덜 익은 스파게티 면을 후루룩- 삼키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대학에서 경제와 경영을 공부하고 있는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경쟁이잖아여. 다른 팀들은 완전 특이하고 어마어마하게 만들 텐데!”
준비가 햄버거를 씹다 말고 두 손을 크게 벌렸다.
“다들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찍을 거라구여! 그러니까 우리도 물의 드래곤을 소환해서!”
준비는 어젯밤 피터와 현덕의 브레인스토밍에 꽤나 감명을 받은 듯했다. 아침부터 꿈에서 푸른 눈의 백룡을 소환해 자색 드래곤을 가진 위팀을 해치웠다고 말하더니, 하루 종일 드래곤 타령이었다.
그때마다 한정된 자원과 촬영 기술을 가진 PD와 촬영 감독은 몸을 떨었다.
“준비야, 가만 생각해봐. 왜 하필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으라는 미션을 준 걸까?”
현덕은 콜라 잔을 들어 준비의 입에 빨대를 대주었다. 준비는 꿀꺽꿀꺽 잘 받아먹으며 눈을 댕그랗게 떴다. 준비의 푸른 눈은 워터파크의 어떤 풀장보다 푸르고 아름다웠다.
“왜 여기서 하라고 한 건데요?”
준비가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되물었다.
“이 워터파크를 홍보하기 위해서일 거야. 우승팀의 뮤직비디오를 편집해서 워터파크 CF로 쓴다고 했잖아. 이게 이번 미션의 핵심인 거지. 워터파크를 홍보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것. 너무 특이하거나 과격하거나, 아무튼 튀는 영상을 만들면 오히려 불리할지도 몰라.”
현덕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언제나 현실은 그러한 법이다.
“잠깐, 잠깐만요.”
카메라 뒤에서 막내 PD가 소리쳤다. 촉팀 연습생들이 일제히 카메라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막내 PD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두 손을 엇갈려 X자를 만들었다.
“김현덕 연습생, 너무 그렇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어떡합니까. 이건 마케팅 회의가 아닌데?”
“아……. 그런가요.”
현덕은 뒤통수를 긁으며 민망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얼굴 옆에 가져다 대고 손가락으로 가위 흉내를 냈다. 찰칵찰칵, 허공에서 가위질을 하며 공손히 부탁했다.
“편집이요, 편집. PD님 편집해주세요.”
그 모습은 조금도 편집되지 않고 고스란히 방송으로 나갔다. [노력했으나 막내 PD라 힘이 없었습니다……. 미안해요오, 현덕 연습생] 라는 자막이 달린 채로.
이런 모습이 방송에 나갈 거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현덕은 마음 편히 스파게티를 먹었다. 와구와구.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여. 홈페이지 투표에서 밀릴지도 모르잖아여. 정말 신기하고 웃긴 거라고 해야지 표를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여?”
준비는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감자 튀김에 손을 뻗었다.
“예리한데? 준비야, 나중에 대학 가서 마케팅 공부해도 되겠다.”
피터가 기특해 했다.
“뭔 소리? 난 기타 쳐서 실음과 갈 거거든여?”
준비는 덕신이 들었으면 뿌듯해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더더욱, 우리 컨셉이 먹힐 거야. 다른 팀들은 무조건 새롭고 신기한 뮤직비디오를 찍으려고 하겠지?”
현덕의 말에 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뻔한’ 뮤직비디오를 찍겠다는 현덕의 말에 불안하기만 했다. 태평하게 ‘뻔한’ 뮤직비디오를 찍자고 말하는 현덕과 피터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너무 힘들어서 자포자기해버린 건가?’
패기로운 중딩 장준비의 눈에 비치는 고딩 범생이 형과 대딩 범생이 형은 너무 연약해 보였다.
준비는 그렇게 걱정 인형이 되어버렸다.
현덕은 올망졸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준비에게 등 뒤에 펼쳐진 시원한 워터파크의 풍경을 가리켰다. 보라며 손짓했다.
“이런 곳에서 뭘 생각할 수 있겠어? 단번에 떠오르는 느낌. 그 느낌이야말로 이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아닐까? 준비야. 왜 뻔한 게 심심하고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가 함께하는 것만으로, 그건 절대로 뻔한 게 아니게 될 거야.”
현덕은 여태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내내 함께해온 피터와 준비를 믿었다.
그 많던 연습생 중에서 열두 명만이 살아남았다. 방송 분량 덕, 기획사 빨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직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른 것도 아니었다.
의욕도, 열정도 부족한 연습생이 있었다. 트라이 온에 참가할 용기는 있었으나 우승하리란 믿음은 없었다. 적당한 때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고. 떨어지면 아예 연습생 생활을 청산하고 수능 공부를 하겠다고 계획을 세운 연습생이었다.
한 주, 다시 한 주. 미션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시청자들의 투표를 받아 살아남을수록, 그 연습생의 세계가 넓어졌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던 게 들리기 시작했다. 느껴지지 않던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게 되었다. 또한 다음번 무대를 바라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현덕은 더 이상 탈락을 당연한 미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탈락이 내일의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며,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또 한 번, 다시 한 번만, 무대 위에 오르고 싶었다. 트라이 온에서 계속 살아남고 싶었다. 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 김현덕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처음, 무대 위에 올라 관객들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은 여전히 백지였다. 하지만 새하얗게 자신을 채우던 지독한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몸에 꽉 차 있던 영혼을 쏟아내는 느낌, 그러면서도 텅 빈 자신의 안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 느낌.
정말 영혼이란 게 존재한다면. 무대는 그 영혼을 끄집어내 뜨거운 조명 아래 내보이는 곳이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어도 맨몸뚱이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즐거웠다. 짜릿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충족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치 탈진됐다.
개중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건 쓰리홀스의 덕신과 함께 했던 무대였다. 현덕은 잠시나마 덕신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했다.
주변에서 너에게 어울리는 길이 아니라고 말려도 그저 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노래. 그리고 무대.
그저 하고 싶었던 마음이 쭉 이어질 수 있었던 건 곁에서 함께 그 길을 걷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덕신에게 마유상과 마계상이 있었듯이, 현덕에게는 피터와 준비가 있었다. 또 자룡과 주민이 있었다. 유호와 정모, 한승도 있었다. 지독한 경쟁 속에서도 우정은 이렇듯 존재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한번 덕신의 무대를 보러 온 관객들이 있듯이, 현덕에게도 현덕을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었다. 아직도 현덕이 다니는 고등학교 후문 근처의 정류장에는 현덕에게 보내는 팬들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그 메시지가 손에 닿았을 때의 감각은 아직도 현덕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들이 현덕을 이끌었다. 현덕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준비와 피터, 주민과 자룡, 그리고 다른 연습생들. 그토록 끼 많고 재능 있는 연습생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김현덕이 못났을 리 없다.
버스정류장 광고판까지 사서 현덕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준 팬들. 그런 팬들이 응원해주는 김현덕이 평범할 리 없다.
설사 못났고 평범하다 할지라도. 함께 무대에 서는 동료들과 함께 있는 이상. 또 그토록 뜨겁게 응원해주는 팬들이 지켜봐 주고 있는 한. 김현덕은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뭐든 할 수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얼마나 뻔하고 뻔한 작품인가요. 연극, 영화, 노래가 계속 쏟아져 나오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상 사람들 누구도 뻔하고 재미없다고 하지 않잖아요? 그치, 준비야?”
현덕이 피터와 준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피터는 현덕이 말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알았다. 준비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었어요?”라고 되물었다. 현덕은 그게 어떤 영화인지 설명하는 대신, 준비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셋이서 찍으면 뻔한 것도 절대 뻔한 게 아니게 될 거야. 준비 너랑 피터 형, 그리고 나. 셋이서 찍는 거잖아?”
현덕이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현덕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 아래, 활짝 웃는 현덕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여름의 시원한 청량함.
그 빤한 느낌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형이 잘생기긴 했는데, 이 정도였던가?’
‘현덕이가 이렇게 예뻤나?’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피터도 현덕이 말하는 ‘뻔한 청량한 이미지’가 뭔지 단번에 이해했다. 백 번 설명을 들어봤자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단 말은 이럴 때 해야 하는 말인듯 했다.
“난 찬성. 현덕이 말에 무조건 찬성.”
“저도여. 아까 제가 했던 말은 다 잊어 주세여. 철없을 때의 생각이었어여.”
“어? 정말로?”
좀 더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현덕이 고개를 갸웃, 내저었다.
그렇게 촉팀은 세 팀 중 가장 이르게 뮤직비디오의 컨셉과 내용을 정했다.
뮤직비디오의 컨셉은 ‘한여름, 더위를 쫓아내는 물놀이. 푸른 하늘 아래 청량한 웃음.’ 스토리는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던 세 사람이 워터파크에 도착해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며 행복해한다.’
뻔하디 뻔한 컨셉과 더 뻔한 내용이었다. 덕분에 뮤직비디오 촬영은 매우 쉽게 진행되었다.
***
연습생들은 온종일 뮤직비디오 촬영 준비를 한 후 밤늦게야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했다.
현덕은 간단히 식사하고 숙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주민을 발견했다. 산책로 구석에 음료수 자판기가 놓여 있었는데, 주민 그 앞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나처럼 산책을 나온 건가?’
현덕은 반가운 마음에 주민에게로 달려갔다.
“주-”
주민의 이름을 부르려던 현덕은 잠시 멈칫했다.
주민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 있는 사람은 나무에 가려서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민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게 신경에 거슬렸다.
주민은 현덕 외의 사람을 대할 때, 항상 심드렁하거나 짜증을 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현덕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이야기 나누는 상대방을 꽤나 가깝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누구랑 있는 거지?’
현덕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가 주민의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보았다.
“아.”
상대방을 본 현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룡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주민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자룡과 주민이라니. 오랜만에 보는 조합이었다. 현덕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스스럼없이 주민, 혹은 자룡을 불러 아는 척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까 내가 왜 이런 거지?’
조금 전, 자신의 태도가 매우 이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몰래 다가가 엿보듯 상대편을 확인했다. 이래서야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기 위해 숨죽이며 바라보는 사람 같지 않은가.
‘아니지, 아니야. 그냥 우주민을 오랜만에 봐서, 아는 척하기 좀 그래서 그랬던 걸 거야.’
현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어?”
캔 음료를 따서 벌컥벌컥 음료를 들이켜던 자룡이 현덕을 발견했다.
“오, 현덕아!”
자룡이 손을 들어 붕붕 흔들었다. 격한 환영이었다.
“김현덕?”
주민이 현덕을 보고 미소 지었다. 조금 전, 자룡과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낀 게 미안할 만치 밝은 얼굴이었다.
‘다행히 삐진 건 다 풀어졌나 보네.’
현덕은 자신의 질투 어린 감정은 저 멀리 미뤄버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아, 마침 잘됐다. 너도 알고는 있어야지. 현덕아, 우리 회사 얘기하고 있었어.”
자룡이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더니 자판기에 밀어 넣었다. 돈을 채우자 주민은 자룡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음료수 버튼을 눌렀다.
“현덕아, 넌 뭘 마실……야!”
자룡이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주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철커덕 소리가 나며 캔 음료가 나오자 바로 꺼내 현덕에게 쥐여 주었다. 현덕이 좋아하는 캔커피였다.
“아, 뭐야. 내가 주려고 했다고.”
자룡은 캔커피인 걸 확인하고는 누그러졌다.
“고마워요, 형. 잘 먹을게요.”
“그래, 저 싸가지 말고 형이 사는 거야.”
“네, 형.”
현덕은 주민한테 말고 자룡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캔을 땄다.
주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이 꿈틀, 했다. 반대로 자룡은 만족스러워했다.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예요. 우리 회사라면 TE엔터요?”
“어. 우리 촬영하기 전에 데뷔조 뽑았던 거 기억나?”
자룡이 음료를 단숨에 비우고 캔을 한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그것을 농구공 던지듯 높이 던졌다.
구겨진 캔은 포물선을 그리며 휴지통으로 쏙- 들어갔다.
“나이스!”
자룡이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씩- 웃었다.
“네, 기억나요.”
현덕은 골인 장면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거기 포함 안 됐다고 병신 짓을 할 뻔했지.”
자룡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의 일을 입에 담았다.
“어, 음…….”
현덕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 캔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입을 가렸다.
“대파 머리였을 때 말하는 건가? 그때 머리도 참 볼만했는데.”
주민은 자판기에 기대선 채로 비웃음을 흘렸다.
“야, 싸가지. 너 자꾸 대파, 양파, 하지 말랬지.”
자룡은 주민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 데뷔조가 왜요? 이번에 데뷔하나요?”
현덕이 자룡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 어. 아니 아니, 안 한대, 없어졌다고 그러네. 아니, 미뤄진 건가? 뭐, 그게 그거겠지만.”
“네?”
“여기 오기 전에 방송국에서 오 팀장님을 잠깐 마주쳤거든. 그때 얘기를 들었어. 데뷔 일정이 뒤로 확 밀려 버렸나 봐. 우리가 너무 잘 돼서, 비슷한 시기에 데뷔시키는 건 위험할 거 같다고 해서 밀렸다는데. 말이 미룬 거지 그냥 파투난 거지, 뭐.”
그 데뷔조에 들지 못해 괴로워했던 적도 있었으니. 그 데뷔조가 파투났다는 소식이 반갑게 들리거나 고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자룡은 그러지 않았다. 여러 번 데뷔조에 속했다가 데뷔가 무산됐을 때를 떠올리며 안타까워 했다. 데뷔하지 못하게 된 연습생들에 대한 연민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잡혀 있던 데뷔 스케줄 정리하려고 방송국 왔다나 봐. 우주민, 너 어떡하냐. 데뷔 못 하게 돼서?”
“원래부터 거기 들어갈 마음 없었어. 여태 여기 남아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주민이 짜증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없긴 무슨. 오 팀장이 너한테 트온 촬영 중간에 자진 하차하라고 그랬잖아.”
“안 했잖아.”
“그러고 보니 안 했네. 왜 안 했어? 혹시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자룡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양파 따위가 인간의 깊은 생각을 어찌 알려고 드는지.”
쯧, 주민이 혀를 차며 자룡에게 손짓했다. 훠이, 훠이. 참새를 쫓는 모양새였다.
자룡은 저놈을 어쩌면 좋냐, 하는 표정으로 주민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낀 현덕은 오랜만에 느끼는 푸근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준비, 피터와 함께 있을 때도 좋지만. 이렇듯 주민, 자룡과 함께 있을 때면 다른 곳에서는 느끼지 못할 소속감을 느꼈다.
“아무튼, 거기 데뷔조였던 애들은 다 다른 기획사로 갈 건가 봐. 그룹명까지 다 나와서 데뷔 확정일 줄 알았을 텐데, 안됐지.”
자룡의 말에 현덕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룹명이 뭐였다는데요?”
“촌스러워. 홀리포스라고 하더라고.”
“아아, 네에.”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현덕이 우뚝 멈춰 섰다.
“네? 형, 방금 뭐라고-.”
“네가 듣기에도 이상하지? 무산됐으니까 까놓고 말하는 건데. 홀리포스가 뭐냐, 홀리포스가. 차라리 라이트 사이드나 다크 사이드라고 할 것이지. 핑크키위 때도 그렇고, 아무튼 우리 회사가 이름은 참 이상하게 지어.”
자룡이 혀를 차며 말했다. TE엔터테인먼트의 처참한 작명 실력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
현덕은 맞장구 칠 수 없었다.
“형, 자룡 형. 잠깐만요. 한 번만 다시 말해주세요. 그 그룹명이 뭐라고요?”
현덕은 손을 뻗어 자룡의 팔을 잡았다. 다급히 움직이느라 발을 헛디뎌 몸이 크게 휘청였다.
“왜 그래?”
주민이 등 뒤에서 현덕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현덕은 주민의 부축을 밀쳐냈다. 감히 주민과 맞닿아 있을 수 없었다.
“김현덕?”
주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현덕이 쳐낸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실수 앞에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 뿐이었다.
“현덕아? 왜 그래, 무섭게.”
자룡은 당황하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아프게 움켜잡는 현덕의 손을 쳐내는 대신, 다른 손을 현덕의 이마에 댔다. 열이 있나 재려는 것이었다.
현덕은 그 손마저도 붙잡으며 물었다.
“형, 그 데뷔조 이름이 뭐였느냐고요!”
숫제 다그치는 수준이었다.
“야, 야야. 현덕아?”
“형!”
“어? 어, 어어. 호, 홀리포스. 홀리포스라고 들었어. 오 팀장님이 그러던데. 왜? 왜 그래. 왜 그러는 건데.”
자룡이 당혹스러운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홀리포스.
네 음절의 단어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먼 미래라고 해야 할지, 지나친 과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전의 삶에서 들었던 단 한 단어. 과거에, 아니 이제는 미래에- 우주민이 소속되어 활동했던 남자 아이돌 그룹.
현덕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단서였다.
현덕은 그 단서를 손에 쥐고 이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연습생 생활을 하다 보면 혹시나 연습생인 우주민을 만날 수 있을까 설렜다고, 주민과 함께 트라이 온에 출연하면서 내심 기대했다.
‘이 트라이 온에서 만들어진 프로젝트 그룹의 이름이 홀리포스가 아닐까.’
처음부터 확신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분명 트라이 온의 프로젝트 그룹이든, TE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 중인 남자 아이돌 그룹이든, 둘 중 하나가 홀리포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러니까 트라이 온 촬영을 하며 주민과 가까워지고 난 다음부터. 현덕은 어느새 이 트라이 온의 프로젝트 그룹이 홀리포스일거라고 확신했다.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이 프로그램에서 데뷔하는 그룹이 홀리포스가 아니었던 거야. 우주민이 뽑혀서 들어갔던 그 데뷔조가 홀리포스였어.’
그런 줄도 모르고 트라이 온 1부에서 주민이 일찍 탈락할까 봐, 그것만은 막으려고 기를 썼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주민은 TE엔터테인먼트의 원래 계획대로 일찌감치 트라이 온에서 하차했을 텐데.
우주민이 없었다면 트라이 온이 이렇게나 화제성 있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트라이 온 방송 전부터 주민은 납치 소동으로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트라이 온 방송 이후에는 불우했던 출생의 비밀을 밝히며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트라이 온은 인기를 끌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춘 프로그램이다. 주민이 아니어도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민이 없었다면 이 정도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TE엔터테인먼트 같은 대형 기획사가 준비 중이던 아이돌 그룹의 데뷔를 미룰 만큼이나 커지지도 못했을 것이고.
하지만 주민은 트라이 온에 출연했고, 현덕의 도움을 받아서 탈락하지 않았다. 트라이 온은 생존한 주민을 가지고 화제성을 키워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래서 주민은 홀리포스가 되지 못했고, 홀리포스는 데뷔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고 보면, 주민이 트라이 온에 출연하기로 한 이유 또한 현덕과 관련된 것이었다. 분명, 납치 소동이 있고 나서 주민은 자룡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 자살 소동 벌인 덕에 내 오토바이가 경찰서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와서, 내가 좀 곤란해졌거든. 그래서 급한 대로 트라이 온이라도 나가보려고 했던 건데 말이야. 데뷔조는 데뷔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테니까.”
그때는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건만. 하필 지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망친 거야. 나 때문에 모든 게 다 틀어진 거야.’
현덕은 자룡의 손을 놓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현덕아?”
자룡이 현덕을 불렀다. 현덕은 자룡조차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노라면 자룡 역시 현덕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거라고 그랬다. 오 팀장은 분명 현덕에게 그렇게 말했다.
‘혹시나 자룡 형도 나 때문에 뭔가 달라진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번지니,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현덕은 뒤를 돌아섰다.
“현덕아,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주민이 현덕을 붙들었다. 저를 올곧이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숨이 막혔다. 까만 눈에는 현덕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토록 한 치의 티끌 없이 자신을 좋아해 주고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건만. 한없이 한없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건만.
‘내가 다 망쳐버렸어.’
예정되어 있던, 이 사람의 빛나는 미래를 망쳐버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떡하지?’
어쩐 일인지 서른셋이었던 김현덕은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런데 김현덕은 열여섯이 되어도 지난 생의 기억을 알차게 써먹지 못했다. 써먹을 수 있는 기억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줄곧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 일에 무지했다. 그 흔한 로또 번호 하나 외우지 못했다. 미래에 무슨 주식이 껑충 뛰어오르는지도 몰랐다. 신인 배우 중 누가 나중에 대스타로 성장하는지도 몰랐다.
소설에서 보면, 과거로 돌아가 미래에서 알고 있었던 지식을 이용해 성공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하던데. 현덕은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기억도 없었다.
기억하고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스물여덟 살 때 봤던 서른 살의 빛나는 우주민.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여 승승장구하지만 활동 중간에 고난을 겪고 미국으로 갔고, 거기서 유명한 배우로 성공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가 됐다는 우주민. 그 우주민의 홀리포스.
주민이 성공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계단.
‘난 왜 이 프로그램의 프로젝트 그룹이 홀리포스일 거라고 생각한 거지?’
끔찍한 착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이유도, 근거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어 믿은 것에 불과했다.
왜나면.
‘그래야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트라이 온 출연 전까지 현덕과 주민은 남만도 못한 사이였다. 트라이 온에 함께 출연하며 친해졌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계속 트라이 온에서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포기했다.
자신이 주민의 삶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을 거라고 한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자신이란 존재가 주민의 삶의 궤적을 바꾸는 어떤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야지만 계속 주민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주민의 옆에 있는 게 ‘잘못’이 아닐 테니까.
김현덕은 그렇게 안일했다.
그래서 우주민은 언젠가 반드시 그에게 주어져야 할 빛나는 자리, 만인에게 사랑받으며 배우로서 활약할 수 있는 미래를 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현덕 때문에.
‘내가…… 나,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울컥, 울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울 순 없었다. 김현덕에겐 그럴 자격따윈 없었으니까.
“현덕아?”
코앞에서 주민의 잘생긴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야, 김현덕!”
자룡의 목소리가 너무 멀리서,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비겁하게도 현덕은 안도했다. 주민의 얼굴도, 자룡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싶었으니까.
현덕은 몰려오는 어둠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세상이 온통 까맣게 변해버렸다.
***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눈꺼풀뿐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굵은 밧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묶어 놓은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쉬이익- 쉬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베이더가 된 기분이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링거를 확인하다가 현덕이 눈을 깜박이는 걸 보았다.
“김현덕 환자! 정신이 들어요? 제 말이 들리나요?”
간호사는 현덕이 보청기를 낀 어르신이라도 되는 양 소리쳤다. 현덕은 귀청이 따가웠지만, 작게 말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꺼풀만 깜박이며 말을 알아들었다는 티를 냈다.
간호사가 밖으로 뛰어나가 의사와 다른 간호사들을 한 무리 데리고 왔다. 그제야 현덕은 자신이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의사가 현덕의 상태를 살피며 끊임없이 무슨 상황인지 말해준 덕분이었다.
가족들이 현덕을 보러 왔다.
어머니는 눈을 뜬 현덕을 보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오열했다. 그런 어머니를 부축하는 아버지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맹덕은 현덕의 손을 부여잡고 끊임없이 고맙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니 이후 회복은 기적적으로 빨랐다. 현덕은 곧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바로 퇴원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서너 달은 입원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맹덕은 아예 직장을 관두고 현덕을 간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병실을 찾아왔다. 가끔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가족도, 형도, 친구들도. 아무도 현덕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현덕은 겨우 사법 고시에 합격했는데 연수원을 못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사법고시가 폐지되어 내년에 연수원을 뒤늦게 갈 수도 없을 텐데. 이 일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 건지 궁금했으나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다들 현덕이에게 괜찮다고만 말했다. 살았으니 됐다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다시 건강해질 생각만 하라고 했다.
현덕은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응원 속에서 빠르게 회복했다. 곧 목을 가눌 수 있게 되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맹덕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벽을 짚고 일어서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서서 부모님을 맞이하자, 두 분은 현덕을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셨다. 곁에서 현덕을 부축해주던 맹덕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현덕은 그런 부모님과 맹덕의 품에 안겨 가만히 있었다.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게 기적 같은 삶을 더해가던 어느 날이었다.
현덕은 침대에 기대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햇볕이 내리쬐는 세상은 더없이 맑았다. 꼭 커다란 워터파크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현덕이 있는 하얀색의 사각형 병실은 고요하기만 한데. 창밖은 왁자지껄했다. 현덕 또래의 남자 연습생들이 뛰어다니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푸들처럼 고슬고슬한 파마머리를 한 중학생 남자 연습생도 있었다. 그 연습생이 현덕이 있는 병실 아래까지 달려와 두 손을 흔들었다.
“형, 거기서 뭐해여. 얼른 내려 와여. 우리 뮤직비디오마저 찍어야져.”
현덕에게 얼른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현덕아, 얼른 와야지.”
멀리 서 있는 청년도 현덕을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뽀짝뽀짝. 발에 낀 커다란 오리발이 자동차 경적처럼 울려댔다.
현덕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닿을 리는 없지만, 그들이 내미는 손을 맞잡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돼, 현덕아.”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맹덕이 현덕을 말렸다. 현덕을 뒤로 잡아끌더니 창문을 닫아버렸다.
“형, 그러지 마. 왜 그래.”
현덕은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보느라 맹덕을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왜 쟤들 인생에까지 멋대로 관여하려고?”
“……!”
맹덕이 문을 닫았다. 시원한 물소리와 웃음소리가 단번에 사라졌다.
하얀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단지 창문 하나를 닫았을 뿐인데, 밖의 소리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처음부터 현덕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현덕은 굳은 목을 억지로 꺾어 뒤를 돌아보았다. 내내 헌신적으로 현덕의 병시중을 하던 맹덕은 온데간데없었다. 분명 맹덕의 목소리였건만. 맹덕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맹덕이 아니었다.
주민이 와 있었다.
“우, 주민?”
“안녕, 현덕아.”
주민이 허리를 굽혀 현덕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도 상냥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싸늘했다.
“대답해 봐. 내가 물어봤잖아, 김현덕 연습생. 나만으로 부족해? 쟤들 인생에까지 관여해야겠어?”
“…….”
현덕의 눈이 커졌다.
“네 덕분에 나는 홀리포스로 데뷔하지도 못하게 됐고, 겨우 11개월짜리 시한부 아이돌 그룹이나 하게 됐네. 넌 모르지? 홀리포스가 얼마나 대단한 그룹이었는지. 아, 내내 사법 시험 준비한다고 고시촌에 들어가 있었으니 모를 만도 하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주민이 소리내 웃었다.
“그러니까 네 멋대로 내 미래를 망쳤겠지.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야?”
“나는-”
“몰랐다고 말하지 마. 정말로 몰랐어? 정말로 몰라서 내 곁을 빙빙 맴돌고 들러붙으려고 그 난리를 폈냐고.”
정당한 비난이었다.
현덕은 작게는 수없이, 크게는 세 번이나 주민을 붙들었다. 처음에는 다리 사이의 급소를 까버렸고, 두 번째로는 납치당하던 주민을 구했다. 세 번째로는 트라이 온 탈락 위기에 처한 주민을 새벽 연습실로 이끌었다. 그렇게 주민을 만났고 알게 됐고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주민의 미래를 망치는 과정이었던 걸까?
“나로 인해 좀 더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뀐 걸 수도 있잖아.”
목소리가 떨렸다.
트라이 온 1부 촬영 때였다. 주민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 현덕은 주민을 찾아 호텔 건물 뒤의 정원으로 달려갔다.
하얗게 눈 내린 세상에서 가로등 불빛 하나가 깜빡, 하고 빛나는데. 그 아래 우주민이 혼자 서 있었다. 외로우면서, 그게 외롭다는 걸 알지 못하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현덕을 봐줬다.
자신을 보며 슬며시 웃던 그 얼굴이 좋았다. 화선지에 물이 번지듯 차오르던 그 웃음이, 감격스러웠다. 좀 더 일찍 주민에게 다가가지 못한 게 미안하고, 또 속상했다. 그래서 마냥 서툴고 늦은 자신을 탓했다. 좀 더 일찍, 좀 더 가까이 주민에게 다가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랐다.
그 생각마저 오만이었을까. 가만히 있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주민에게 와줬을까. 아니면, 주민은 홀로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났을까.
본래 우주민의 삶은 해피엔딩이었다. 해피엔딩으로 가기 전, 잠깐의 고난을 보고 그걸 못 견뎌서 난입해버린 게 그토록 큰 죄인 걸까.
그 고난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는데. 우주민의 삶에서 그 고난마저 없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 뿐인데.
“자신할 수 있어? 네가 내 미래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줬다고? 김현덕 연습생, 신이었어? 사람의 미래를 네 멋대로 바꾸는, 그것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지 마. 난 신이 아니야.”
“신이 아닌데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거야? 정말 더 좋은 방향으로 내 인생이 바뀌었어?”
“내가 네 옆에 있잖아. 자룡형도, 또 다른 사람들도.”
“내 이전의 삶에선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건가? 그걸 네가 왜 마음대로 판단하는 거지? 내 인생인데.”
“…….”
“왜 갑자기 말이 없어지실까? 말 좀 해봐. 어? 다른 인간의 인생을 멋대로 수정한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좋게 변했을 수도 있잖아. 좋게 변했을 수도 있잖아!”
현덕은 이를 악물고 주민을 보았다.
“트라이 온은 인기가 아주 많아. 여기서 프로젝트 그룹으로 데뷔하면, 홀리포스보다 훨씬 더 인기가 많아질지도 몰라. 옆에 자룡형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우주민,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옆에 있을 거야. 그런데도 안 돼? 내가, 내가 다 망쳐버린 거야? 성공이 보장된 네 미래를?”
말을 하면 할수록 변명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참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주민은 현덕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단 한 가지를 물었다.
“그게 내 원래 삶을 네 멋대로 바꿔도 되는 이유냐고 묻잖아.”
“…….”
“단지 더 나을 거 같다고 네 멋대로 판단해서 내 삶을 바꿔도 되는 거야?”
“…….”
조금 전까지 그렇게 장황히 변명을 늘어놓았던 주제에.
감히,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 단편적으로 보고 스물여덟 살 때 보았던 우주민의 모습이 괜찮다, 안 괜찮다고 말하는 것 또한 섣부른 오만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우주민을 잘 알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 실물로 만나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스물여덟 살의 현덕이 봤던 우주민은 우주민이 선택한 우주민이었다. 그런데 현덕은 주민에게 묻고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주민의 삶의 궤도를 바꿔버렸다.
바뀐 궤도가 더 행복하고, 더 성공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면벌부는 받을 수 없었다.
‘내가 트라이 온에 출연하지만 않았다면…….’
현덕은 뒤늦게 후회했다.
트라이 온에 출연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엔 사실 다른 연습생이 서 있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원래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 연습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애초부터 아이돌 연습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예전처럼 길거리 캐스팅을 거절하고, 하던 대로 공부를 해야 했을 것을.
그저 조금만, 다르게 살아 보고 싶었다. 단지 나 자신의 삶만 바꾼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넓고 큰데, 고작 자신이 조금만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어냐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난 사실 트라이 온 최종 12인에 선발될 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이쪽에 조금이나마 재능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먼 발치서 한 번 보고 좋아하게 된 사람 곁에서 다가가서,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날개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자신의 날갯짓이 커다란 태풍이 되어 돌아올 줄 모르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했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걸 알면서도, 현덕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가만 놔두라고? 눈앞에 네가 있는데, 보기만 하라고? 그랬어야 하는 거야?”
현덕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주민은 사라지고 없었다. 맹덕도, 주민도 없었다. 주민이 서 있던 자리에는 대신 현덕이 서 있었다. 서른세 살의 김현덕이었다.
지치고, 외로운.
그렇게 혼자 서 있는 현덕이 현덕의 앞에 서 있었다.
“왜-”
‘네가 거기에 서 있는 거야.’
서른 셋 김현덕이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그 눈빛 아래에서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느낌을 받았다.
“…….”
“…….”
“정말 우주민을 위해서였어?”
서른세 살의 김현덕이 물었다.
“그럼?”
현덕이 되물었다.
서른세 살의 김현덕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지치고 외로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지치고 외로워서, 자신이 지치고 외로운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김현덕.
“…….”
현덕은 목이 메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린 거야?”
현덕이 물었다.
서른셋 김현덕은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천장. 형광등. 현덕은 눈을 깜빡, 감았다가 떴다.
“정신이 들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이번에는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졌다.
의자에 주민이 앉아 있었다.
“잘 잤어?”
주민이 물었다. 잘 자던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목소리가 평이했다. 하지만 그건 꾸며낸 목소리일 뿐이었다.
주민은 이불 위로 나온 현덕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던 건지, 또 언제부터 그렇게 떨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잘생긴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온몸에 피를 다 쏟아낸 사람 같았다.
현덕은 손에 힘을 주어 주민의 손을 맞잡았다.
“김현덕, 너…….”
그것만으로도 주민은 무너져 내렸다.
“우…… 주, 민.”
현덕이 힘없는 목소리로 소리 내 그를 불렀다. 목이 뻑뻑했다.
“응, 그래. 현덕아.”
주민이 다급히 고개를 들어 현덕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 속에 오직 현덕이 비쳤다.
내내 울지 않았던 현덕은 이제야, 울고 싶어졌다.
“미안해.”
눈가에 슬며시 눈물이 고였다. 눈물에 잠긴 눈동자가 흐릿하게 주민을 담았다.
“왜, 뭐가.”
주민이 손을 뻗어 현덕의 얼굴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다, 전부 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려 주민의 손을 적셨다.
벽에 걸린 시계는 밤 11시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덕이 쓰러지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눈앞에서 현덕이 쓰러지자, 주민은 현덕을 안아 들고 숙소 내 의료실로 달려갔다. 대기해 있던 의사가 현덕을 진찰하는 동안, 자룡은 제작진을 불러오겠다며 달려 나갔다. 주민은 곧바로 주치의를 호출했다.
자룡과 메인 PD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얼마 안 있어 주민이 부른 제갈 가문 주치의가 당도하였다. 긴급 사태라는 연락을 받고는 헬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했다. 워터파크 중앙 건물의 옥상에 긴급 대피용 헬리콥터 이착륙 공간이 있었다.
제갈 가문 주치의는 멀쩡히 서 있는 주민을 보고 순간 당황하였다.
“크게 다치신 게 아니었습니까?”
중년의 의사는 주민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물었다. 주민은 침대에 누워 있는 현덕을 가리켰다. 주치의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현덕을 진찰했다.
주민은 자룡과 제작진, 그리고 주치의를 내보내고 현덕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자룡이 함께 옆에 있겠다고 했으나 주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의사들은 곧 깨어날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차분히 현덕이 깨어나길 기다리면 되건만. 주민은 현덕이 깨어나기 직전까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잠들어 있는 현덕의 얼굴을 보며, 격해지려는 마음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자신의 손을 쳐내고, 또 자신의 앞에서 스르륵 쓰러지던 현덕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왜. 어째서.
분명 현덕은 주민에게 약속했다.
현덕이 주민을 거부하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우주민을 거부하는 김현덕마저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주민은 자신의 손을 쳐내는 김현덕을 다시 붙잡고, 자신을 보게 만들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덕을 그렇게 거칠 게 다룰 순 없었다.
현덕에게 거부당하는 건 숨이 멎을 정도로 끔찍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이 굳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현덕에게 손을 뻗을 수도 없었다.
고작 손 한 번 밀쳐졌다고 이 정도인데, 정말로 현덕이 진심으로 그를 밀어내고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살 수는 있을까?
그럴 리가.
주민은 심장이 멈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오늘에야 실감했다.
의료실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핸드폰 번호를 잘못 누르고,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하다가 겨우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현덕만 바라보고 있는데, 현덕의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현덕은 천천히 눈을 떴다.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며 천장을 보고 고개를 돌려 주민을 보았다. 그 모든 과정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현덕의 눈에 제 얼굴이 비치고야 주민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주민에게 현덕이 말했다.
“미안해.”
주민은 현덕의 눈물을 받아 내며 이를 악물었다.
현덕은 주민의 손을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좀 더 누워 있어.”
다정히 말하는 주민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
현덕은 그런 주민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문득 꿈속에서 봤던 주민이 떠올랐다.
현덕은 주민의 손을 잡아끌어 가슴 위로 올렸다. 딱 두 사람의 손만큼의 무게가 심장을 짓눌렀다. 그 무게가 서글펐다.
“우주민.”
현덕은 충동적으로 주민을 불렀다.
주민은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느냐고, 묻지조차 않았다. 현덕은 그런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한번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면 믿을까. 자신이 멋대로 우주민이란 빛나는 삶을 다른 길로 접어들게 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주민은 농담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믿고, 자신의 인생에 멋대로 끼어든 방해물을 경멸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든 돌아올 주민의 반응이 무서웠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었다.
“말해. 뭐든지 다 말해, 현덕아.”
꿈이 아닌 현실의 주민은 이토록 부드럽고 따듯한데. 그에게 내가 멋대로 네 삶의 궤도를 바꿔버렸다고 말해야 했다.
멀지 않은 어느 때, 주민이 자룡을 가지고 소혁에게 협박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주민에게 약속받았다. 무슨 일이든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함께 의논하자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고 말했으면서, 현덕이야말로 주민에게 말하지 못하고 숨기는 게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영영, 말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비밀.
그날, 주민과 했던 약속이 오늘의 현덕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100% 솔직하지 못한 불완전한 용기라 할지라도, 그래도 용기는 용기였다.
“있잖아요, 형. 만약에 말이에요.”
오직 시험공부만 하며 서른세 살까지 살았던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살아 보고 싶어서, 자신이 예전에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갔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딱 한 번 만났던 사람이었다. 남자는 그 사람이 좋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서 멋대로 다가갔다.
그런데 남자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 버렸다.
그 사람은 중간에 잠시 힘든 일을 겪긴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고, 아주 크게 성공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 사람이 가지게 될 미래는 아주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다 망쳐버렸다. 그 사람은 남자로 인해 원래 자신이 가져야 할 미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주민은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누구 얘기야?”
“……친구 얘기라고 하면 안 믿을 거죠?”
현덕이 주저하다 대답했다. 현덕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주민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역시.”
현덕이 쓰게 웃었다.
“……꿈을 꿨어요.”
누군가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현실로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 또한 겪고도 때로는 거짓말 같아서 믿어지지 않는데.
“그 꿈에서 너와 내가 나왔어? 우리 둘의 이야기였던 거야?”
주민이 물었다.
현덕은 눈을 크게 뜨고 주민을 바라보았다. 주민은 놀라지도, 웃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눈치 챈 걸까. 아니면 그냥 던져본 말인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럼 시간을 거스른 남자가 현덕이 너고, 그 미래가 어그러졌다는 게 나였겠네.”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
주민은 코웃음을 쳤다.
“그랬다면 막 잠에서 깨어나서 나한테 화를 냈겠지. 이렇게 내 눈치를 봤겠어? 천하의 김현덕이?”
현덕은 반박하지 못했다.
“난 또, 뭔가 했네.”
주민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깨어나자마자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기에. 그리고 기절하기 전, 자신의 손을 밀쳐내기까지 했던 터라. 현덕이 더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이렇게 빨리, 별 계기도 없이 현덕의 마음이 쉽게 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을 아예 잘라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걸 미안해했던 거라니. 울기까지 했던 거라니. 마음이 놓였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꿈속에서마저 현덕이 자신과 함께하려 했다는 거니까.
“그런 거 가지고 울지 마. 현실의 내가 꿈속의 날 대신해 말해줄게.”
주민이 현덕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등에 입 맞추며 말했다.
“고마워, 날 구해줘서. 네가 없다면 그 어떤 빛나는 미래도 아무 쓸모가 없었을 거야. 그딴 거 다 버려서라도 널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의 나도 꿈속의 나도 반드시 널 선택했을 거야. 그러니까 넌 나를 위해 최고의 선택을 해준 거야.”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형이, 네가 뭘 잃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면서.”
“너야말로 함부로 미안해하지 마.”
현덕이 움찔, 몸을 떨었다.
“네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너도 하나도 모르잖아.”
주민의 입술이 현덕의 입술 위로 내렸다. 현덕은 피하려 했지만 주민은 끝까지 따라붙어 기어이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 흡.”
주민은 현덕의 사과를 먹어치웠다. 울음 섞인 숨마저 욕심껏 빨아들였다. 그래도 현덕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주민은 젖은 현덕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알았어. 정 그렇게 미안하면 계속 미안해해.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주민이 현덕을 끌어안았다. 현덕은 힘없이 주민에게 안겼다. 제 몸을 온전히 주민에게 내맡겼다.
주민은 현덕의 두 눈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이 세상 모든 빛으로부터 현덕을 가리고, 오직 자신을 향한 미안한 마음만 남기를 바라면서,
현덕의 눈썹의 움직임과 눈물의 감촉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닿았다. 이마에서 뜨끈한 열도 느껴졌다.
“일단 한숨 자고 또 이야기하자. 계속 네 옆에 있을게. 나한테만 미안한 거잖아? 내가 다 받아 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응?”
“하, 하지만-.”
“괜찮아. 다 괜찮아. 현덕아.”
주민이 현덕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마법의 주문처럼 현덕을 옭아맸다.
현덕은 울다가 지쳐 주민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피로와 슬픔, 그리고 약간의 몸살기가 현덕을 깊은 수면으로 밀어 넣었다.
현덕이 완전히 잠들자 주민은 현덕의 눈을 덮었던 손을 들어 현덕의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온종일 워터파크에서 뛰놀고 다음 날 또 얇은 차림으로 뛰어다녔으니. 열이 오를 만도 했다.
“그 꿈이 현실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치, 현덕아?”
주민은 잠든 현덕의 뺨과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물기를 닦아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넌 지금처럼, 미안해서라도 절대 내 옆에서 떠나지 못하겠지. 난 나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네 착한 마음을 인질 삼아서 평생토록 널 가질 수 있을 텐데.”
하마터면 현덕의 말을 진짜로 믿어버릴 뻔했다. 아니, 진짜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나 솔깃했다.
만약 현덕의 우는 얼굴에서 열꽃을 보지 못했다면, 현덕이 정말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와 감기몸살이 겹쳤나 보군.’
주민은 고이 잠든 현덕을 보며 혀를 찼다. 현덕의 상태가 스트레스로 인한 단순 쇼크성 기절이라고 말했던 두 돌팔이를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꿈을 꾸고 헛소리를 할 정도인데,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니.’
주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의료실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한 시간 뒤, 헬기가 다시 워터파크 중앙 건물 옥상에 내렸다. 새로운 의사가 허둥지둥 달려갔다. 현덕은 잠든 새 다시 진찰을 받고 링거를 맞았다.
잠든 현덕의 얼굴이 한층 편안해지자 주민의 얼굴도 한결 나아졌다.
의사를 내보낸 뒤, 주민은 잠든 현덕 손등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며, 잠든 현덕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꿈속에서라도 그런 꿈을 꿔줘서 고마워. 현덕아.”
***
새벽이 되어서도, 현덕의 상태는 영 좋아지지 않았다. 열이 더 오르진 않았지만 내리지도 않았다. 주민은 곁에서 선잠을 자며 현덕을 돌봤다.
새벽 6시 즈음에 메인 PD가 내려왔다. 촬영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살풋 잠에서 깬 현덕은 답했다.
“할 수 있어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주민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현덕은 못 본 척했다.
몸이 뜨겁고 나른했다. 의사의 말대로 푹 쉬어야 할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단 하루, 뮤직비디오를 찍는 날이었다. 중요한 미션을 놔두고 침대에 누워 있을 순 없었다.
현덕이 기를 쓰고 일어나려 하자 주민은 못마땅해하면서도 도왔다. 어딘가로 연락하더니, 곧 전복죽과 해열제를 들고 나타났다. 현덕은 주민이 떠먹여 주는 죽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며 주민을 보았다. 주민은 전복죽을 숟갈로 그득 떠서 후후- 부느라 바빠보였다.
어젯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났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후회하다가도, 열에 달떠 헛소리를 한 걸로 들은 듯한 주민의 태도를 보며 안심했다.
현덕은 주민이 주는 죽을 받아먹으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알고 있는 미래가 바뀌었다. 단지 주민의 미래만 바뀐 게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자룡의 미래 또한 바뀌지 않았을까. 주민과 자룡, 본래 홀리포스로 데뷔할 뻔했던 연습생들까지. 당장 생각나는 피해자들은 이 정도였다. 이보다 더 있겠지만, 일단은.
트라이 온에 출연하면서 연습생들이 얼마나 데뷔를 꿈꾸고 있는지를 경험했기에, 그들을 향한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젯밤 주민이 해준 말이 현덕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빛나는 성공의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데도, 주민은 현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아마도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정말로 꿈속의 이야기로 들어서 그렇게 말한 걸지도 몰라.’
그럼에도 주민의 말은 현덕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또한,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이 되었다.
‘이미 바뀐 미래를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수는 없어. 또다시 중학생 때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전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캐스팅 매니저의 명함을 받아든 순간부터, 현덕의 미래는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미래를 따라 다른 사람들의 미래도 바뀌었다.
만약 이렇게 될 걸 알았다면, 그래도 그 명함을 받아들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진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계속 계속, 잊지 말고 기억하자. 그리고 고민하자.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지금 당장은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무언가 보상을 하거나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덕은 감히 미래를 기약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먹었다.
누가 뭐라도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현덕이 서 있는 건 오직 현덕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편법을 쓰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노력하고, 새롭게 도전을 하여 자신의 미래가 바뀌었다. 그와 연결되어 다른 사람들의 미래까지 바뀌어 버렸다. 그러니 그 바뀐 미래에 부끄럽지 않도록 현재에 더욱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하자. 바뀐 미래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게 현덕이 내린 결론이었다.
아마 홀리포스로 데뷔할 뻔한 연습생들이 이런 마음을 안다면, 이기적이고 안일하다고 욕을 할지도 모른다.
주민과 그들을 생각하면 숨이 목이 턱, 걸렸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들. 이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민과 그들이 나중에 정말로 홀리포스란 이름으로 데뷔하지 않는 이상은.
현덕은 오랫동안, 아마도 평생 가슴에 지고 살게 될 그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며 주민을 바라보았다.
“형, 만약에 나중에요. 형이 많이 못 떠서 돈을 많이 못 벌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서 사람들한테 비난을 많이 받게 되거나 하면요. 내가 다 책임질게요. 내가 돈 벌어서 형 다 먹여 살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형을 욕하고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나만은 무조건 형 편을 들게요.”
현덕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해서 나 평생 먹여 살려 줘. 듣는 것만으로도 좋네.”
주민이 빙긋 웃으며 전복죽을 내밀었다.
현덕은 미래에 주민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전복죽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주민을 책임지려면 아프지 말고 체력을 튼튼히 길러야 했다.
현덕이 굳은 각오로 죽을 거의 다 먹었을 때였다. 피터와 준비가 찾아왔다. 밤새 현덕을 걱정했는지 표정이 안 좋았다.
“형, 아프면 그냥 누워 있어여. 무리하지 말아여.”
“미션 걱정은 말고. 우리 둘이서 잘 해낼 수 있어.”
둘은 현덕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을 쏟아냈다. 의료실에 찾아오기 전 서로 말을 맞춘 듯했다.
“아니요, 저는 꼭 뮤직비디오 찍을 거예요.”
현덕은 그들의 노력을 덧없게 만들었다.
“아픈 사람이 미션은 무슨 미션이예여. 그냥 누워서 쉬어여.”
“나도 준비 말에 동감이야. PD님이나 다른 제작진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준비와 피터는 열심히 말리면서, 옆에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주민에게 눈짓을 보냈다. 얼른 자신들과 함께 현덕을 뜯어말리라는 신호였건만. 현덕에게 전복죽까지 바친 상태인 주민은 합류하지 않았다.
결국 현덕은 촉팀의 다른 연습생들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하늘은 어제보다 더 푸르고 맑았다. 그 하늘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두둥실- 몸이 떠올랐다.
현덕은 자기 건강을 걱정해주는 피터와 준비에게 씩씩한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하며, 뮤직비디오 촬영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워터파크 곳곳을 돌아다니며 즐겁게 물놀이하는 장면을 찍었다. 몸에 좀 열이 있어 그런지 물이 유독 시원하게 느껴졌다.
풍경이 좋은 곳에 서서 ‘촉! 촉! 촉!’을 춤췄다. 장소를 바꿔가며 찍어야 했기 때문에 온종일 스무 번 이상 춤을 춰야 했다.
촬영 스태프 한 명이 현덕을 쫓아다니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물에 있다 나오면 얼른 전기스토브를 들이대고 핫팩과 커다란 수건으로 현덕을 똘똘 감쌌다. 굳이 묻지 않아도 주민의 입김이 닿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스태프의 보살핌 아래, 현덕은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잘 끝마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현덕은 커다란 담요에 둘둘 말린 채 벤치에 앉았다. 피터와 준비는 PD와 촬영 감독 등 스태프들과 함께 주변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현덕도 도우려고 했으나 아무도 현덕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아픈 사람은 앉아서 쉬기나 해여.”
“고생했어. 영상 보니까 너무 잘 나왔더라. 아픈 티 하나도 안 났으니까 안심하고 좀 쉬어.”
현덕은 멍하니 피터와 준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눈을 의심했다.
“어? 인어다.”
저기 멀찍이, 인어가 한 명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상태가 더 안 좋아졌나?’
현덕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 보았다. 미열이 있기는 하지만, 헛것이 보일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인어가 보였다.
그 인어가 현덕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현덕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눈이 마주쳤다.
현덕은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인어의 얼굴을 봤다.
가발을 쓰고, 가슴에 조개껍데기 수영복을 두르고, 다리에 인어의 비늘을 닮은 듯한 하늘하늘한 반짝이 천을 두른 우주민 인어라니.
현덕은 단번에 인어에게 홀렸다.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둘둘 두른 담요를 헤치고 일어섰다. 인어는 그런 현덕을 보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계속 가던 길을 갔다. 현덕은 좀비처럼 인어의 뒤를 쫓았다.
준비와 피터, PD와 촬영 감독은 머리를 맞대고 웅크리고 앉아 뮤직비디오의 편집점을 논의하고 있었다. 한 대뿐인 촬영 카메라도 주민과 피터 쪽을 찍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무도 현덕이 인어에 홀려 사라지는 걸 알지 못했다.
“어? 현덕 형 어디 갔어여?”
준비가 뒤늦게 현덕이 사라진 걸 알아차렸을 때, 현덕은 인어에게 홀려 멀리멀리 가버린 뒤였다.
인어는 외진 곳에 있는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분명 여자 인어인데,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현덕은 따라 들어갔다.
칸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마지막 문만 닫혀 있었다. 현덕이 그 앞에 서자, 문이 빠끔히 열리며 인어가 현덕을 잡아당겼다. 현덕은 순순히 끌려 들어갔다. 인어는 현덕을 벽으로 밀치고, 몸을 밀착했다.
더운 숨이 현덕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현덕은 멍하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인어는 참으로 건장했다. 그럼에도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긴 머리카락 가발도 잘 어울렸고, 짙은 화장도 더없이 잘 어울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현덕은 손을 들어 인어의 눈썹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인어는 현덕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드는가 싶더니 대뜸 입을 맞췄다.
“흐읍…….”
현덕은 기꺼이 입을 벌리고 주민의 혀를 받아들였다.
“아직 열이 있나 보네.”
인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그 잠깐 떨어져 있는 것마저 아깝다는 듯 다시 입을 맞췄다. 현덕은 두 팔로 인어를 끌어안았다.
‘우주민이다.’
현덕은 제 입안을 헤집는 거친 혀놀림에 순응하며 눈을 감았다.
인어가 현덕의 입술을 터트릴 듯 씹었다. 현덕이 숨이 딸려 도망가려 하자 혀를 살살 달래며 간지럽혔다. 열에 뜨겁고 바싹 말라 있던 현덕의 입 안이 금세 축축해졌다.
“으응, 흐…… 나, 으, 흐으…….”
현덕은 버거운 키스를 견디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인어는 현덕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뒤에야 겨우 입술을 뗐다. 헐떡이며 서로의 부은 입술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리며 이마를 맞댔다.
“미안해서 받아주는 거야?”
인어가 한국 말을 했다.
“아니요.”
“그러면?”
“그냥, 좋아해서.”
현덕이 열에 달떠,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 놓았다.
“내가, 정말로 좋아?”
현덕의 허리를 움켜쥔 주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
현덕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하하, 웃었다.
”이런 변태 같은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될 정도로 형을 좋아하나 봐요.”
그리고는 손을 들어, 주민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주민은 현덕을 홀리기로 작정하고는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현덕이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자 주민이 뻐기듯 말했다.
“난 원래 이런 것도 잘 어울려.”
“아무튼 조금만 칭찬해주면 금방 이런다니까.”
현덕이 주민의 긴 머리카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웃었다.
내내 물속에 들어가 있어도 오르지 않던 열이 주민의 키스 한 번으로 빵 터졌다. 현덕은 발그레한 얼굴을 들어 금세 메마른 혀로 주민의 입술을 살살 쓸었다.
주민은 못 참고 다시 현덕에게 달려들었다. 아프다고 칭얼대는 현덕을 살살 달래며, 열이 올라 더 뜨거운 현덕의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둘은 한 몸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해 봐, 그 꿈에서는 어떻게 됐어? 우리 둘 다 여기서 붙어서 가수가 되나?”
주민이 물었다. 현덕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웃음 지었다.
“글쎄요. 형이 붙고 내가 떨어졌던 거 같기도 해요. 아닌 거 같고. 내가 그거에 속상해서 형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형이 나 붙잡아서 딱풀 붙여서라도 옆에 두라고 말했던 거 같아요.”
현덕이 소곤소곤 대답했다. 주민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딱 하나 아쉬운 걸 덧붙여 말했다.
“딱풀 말고 본드.”
“몸에 안 좋은데, 그거.”
“내가 친환경 본드를 개발할게.”
“그런 거 개발할 시간에 그냥 나랑 좀 더 같이 있어요.”
언뜻 비치는 이 불안한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안쓰럽고 사랑스러운지. 계속 계속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덕이 주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요. 형.”
주민은 아무 말 없이 현덕을 꽉 끌어안았다. 현덕은 주민의 품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
연습생들은 각 팀 단위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온종일 워터파크를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장면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춤추는 장면도, 연기하는 장면도 다 마찬가지였다. 촬영 후엔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편집해 완성된 뮤직비디오를 제작진에게 제출했다.
결과 발표 순간이 되어서야 연습생들은 다른 팀에서 어떤 뮤직비디오를 찍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팀은 인어 후룸라이드를 배경으로 하여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뮤직비디오에 담았다. 코믹하게 건장한 인어 주민과 병약 왕자 유호 컨셉을 잡고 주민을 여장시켰으나 결과는 그들의 계획과 다르게 나왔다.
주민이 너무 예뻐서 안 어울리고 건장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퇴폐적이고 섹시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인어공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왕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
주민이 미끄러진 조개껍데기 가슴 가리개를 위로 추어올리는 장면이 나오자, 워터파크 사장님과 임원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라는 걸 알고 보는데도 너무 야했다. 분명 웃기라고 찍은 장면이었으나 뮤직비디오를 본 테마파크의 사장님과 임원 중 누구도 그 장면에서 웃지 않았다.
“전체 연령가가 아니군요.”
“CF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심사위원들은 매우 난감해했다.
위팀은 오 팀과 정반대로 강하고 거칠게 밀고 나갔다. 컨셉은 바이킹이었다.
모두 웃통을 까고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진만 입은 채로 높이 점프했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풀장 위에서 난타하듯 물을 튕기고 거친 춤을 췄다. 정말로 전쟁터에 나가기 전 바이킹의 춤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춤을 이끄는 건 자룡이었다. 허리에 맨 벨트에 손을 얹고 춤을 추는 자룡은 주민과 다른 의미로 섹시하게 빛났다. 지난번 하원양과의 무대가 자룡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 듯했다.
더없이 멋있었으나. 역시나 테마파크 사장님과 임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음……. 우리는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워터 파크를 지향하는데, 저건 너무 거친 느낌이 들지 않나요?”
한 임원이 말하자 다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촉팀.
촉팀의 뮤직비디오는 워터파크의 곳곳에서 캐스터네츠를 이용한 귀여운 딱딱이 춤을 추는 뮤직비디오였다. 편곡 버전이 아닌, 본래의 귀여운 원곡 버전 ‘촉! 촉! 촉!’이었다. 시청자들이 원곡 버전의 ‘촉! 촉! 촉!’무대를 보지 못해 아쉬워했던 걸 캐치하여 원곡 버전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이었다.
촉팀은 워터파크의 7대 명소라고 불리는 장소를 모두 방문하여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무대를 번갈아 가며 편집했다.
컨셉은 바캉스였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테마파크에 와서, 친구들과 즐겁게 물놀이를 즐긴다는 내용이었다.
현덕과 준비, 피터는 뮤직비디오 속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물속에 풍덩 들어가 물싸움을 하는 셋의 모습은 더없이 시원해 보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현덕은 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은 청량함 그 자체였다.
“좋군.”
“요즘 젊은 아이들은 이런 느낌의 아이돌을 좋아하는가 보군요.”
“흐음.”
워터파크 사장님과 임원들은 심히 만족했다. 그들의 반응이 곧 결과였다.
현덕의 예상대로 뮤직비디오 제작 미션의 우승팀은 촉팀이 되었다. 이후 인터넷에 공개된 뮤직비디오 투표 역시 현덕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촉팀의 뮤직비디오 조회 수는 다른 팀의 뮤직비디오에 비교하여 뒤처지지 않았다. 비등비등한 관심을 받았다.
매일 아침, 트라이 온 공식 홈페이지는 먹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