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의 우주
주민은 우시영의 아들이자 이 세상에서 우시영을 영영 빼앗은 사내의 아들이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노래를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그걸 허락하지 않으셨지요. 어머니의 노래를 들어주는 유일한 관객은 오직 저뿐이었습니다.”
주민의 목소리가 무대에, 아니 무대가 있는 호텔 로비 전체에 울렸다. 그의 목소리 말고는 어떤 소음도 없었다.
수군대던 연습생들은 제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주민은 눈싸움 하듯 메인 PD를 바라보았다. PD는 더없이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입이 귀 아래까지 찢어져 있었다. 주민이 원했던 반응이었다.
“어……. 아니, 음……. 우주민 연습생이 우시영 선생님, 아니, 선배님의 아드님이셨…… 아들이었다니.”
어떤 순간에서도 매끄럽게 진행하던 유진은 보기 드물게도 당황하고 있었다. 말을 하려 노력을 하였으나 무리였다. 메인 PD는 괜히 주민의 폭탄선언이나 방해하지 말라고 사인을 보냈다. 유진은 안도하며 뒤로 물러섰다.
“유명한 사람이니? 우시영? 우주민 연습생의 어머니란 분이?”
등 뒤에서 피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형 한국인 아니져? 어떻게 우시영을 몰라여? 아우, 이따 설명해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여.”
면박을 주는 준비의 속닥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주민은 둘의 목소리를 들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만 감으면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불 꺼진 방, 차가운 침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거기에 묶인 길고 단단한 끈. 그 끈에 감긴 하얀 목.
흔들, 흔들, 허공에서 힘없이 움직이던 발.
노래를 잃은 새는 새장에서 죽었다. 제가 낳은 아이의 눈앞에서.
그 아이는 밤새, 죽은 어머니의 발을 껴안고 들어 올리려 애썼다. 어머니가 목이 아플까 봐. 제가 발을 받치면 어머니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될까 봐.
긴 밤을 지새운 아이가 무대에 올라왔다. 그녀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했던 곳.
‘영혼이란 게 있고, 천국이란 게 있다면. 어머니, 당신께서는 지금 절 보고 뭐라고 하실까요.’
아들이 제 못다 이룬 꿈을 이뤄준다고 기뻐할까?
아니.
분명, 비명을 지르며 오열하고 있으리라. 제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으려는 제가 낳은 괴물이 끔찍해서. 너무 끔찍해서.
주민은 피식 웃으며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다른 연습생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좋았다.
현덕은 주민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제 아버지는 시황그룹의 부회장이었던 고 제갈영경입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죠.”
주민은 담담히 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처음 가보는 큰 집을 갔을 때에야 제가 사실 우주민이 아니라 제갈주민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제게 할아버지가 있다는 것도, 어머니가 다른 누나가 있다는 것도.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제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아내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습니다.”
호텔 로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우주민의 어머니가 우시영이라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주민의 아버지가 시황그룹의 제갈영경이란 건 충격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두 자 성씨는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갈’은 삼국지 같은 중국 고전에서나 볼 법한 성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10대 그룹 중 하나, 시황그룹의 오너 일가가 그 ‘제갈’이었다.
왜 회사 이름을 촉한이나 삼국으로 짓지 않았냐는 질문이 회사의 여러 계열사 공식 사이트의 고객 게시판에 심심하면 올라오고, 재치 있게 답변한 상담사의 답변이 캡쳐되어 인터넷 상에 떠도는 실정이었다.
Q. 왜 회사 이름을 ‘심국’이나 ‘촉한’으로 짓지 않은 건가요?
↳ A : 시황그룹은 촉한이 아니라 대한의 국민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은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지만, 시황그룹은 반드시, 대한민국 남북통일에 크게 기여하겠습니다!
전 방위에 발을 내민 전형적인 문어발 대기업이었다. 주력 사업은 IT, 전자, 제약 분야였다. 식품이나 물류 유통 분야도 계열사를 통해 꽉 잡고 있었다. 그런 시황그룹이 유독 취약한 분야가 있었으니 문화 사업이었다.
시황그룹은 오랫동안 문화계에 크게 투자하질 않았다. 창립자이며 여전히 그룹을 움켜쥐고 있는 왕회장이 그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지는 시점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 왕회장을 설득하여 뒤늦게 투자에 나섰던 게 제갈영경이었다. 제갈영경은 젊은 나이에 시황그룹의 부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왕 회장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그는 일찌감치 문화 산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공격적으로 투자를 밀어붙였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연예계의 판도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제갈영경은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떴다. 외아들을 잃은 왕회장은 아들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던 업계에서 손을 뗐다.
그렇다 해도 시황그룹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재벌 그룹이었다. 시황그룹 계열사의 서비스와 판매 물품만으로 1년을 살 수 있다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촬영한 카메라와 필름마저 시황그룹 계열사의 제품이라는 게 알려져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제갈 성을 쓰는 오너 일가는 현대판 왕족에 비견될 만한 셀러브리티였다. 왕회장은 6.25 전쟁 시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맨손으로 재벌가를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 아들 제갈영경은 비록 요절하였으나 준수한 외모와 상냥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단란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일구어 여성지에 종종 사진과 인터뷰가 올랐었다. 한때는 인기 배우들과 함께 인기남 순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제갈영경의 외동딸로 알려진 제갈현주는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그 모습이 사진 찍혀 대중매체에 공개됐다. 선남선녀였던 부모를 닮아 어릴 때부터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미모는 물이 올랐다. 재벌 딸만 아니면 연예인을 하고도 남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는 미국 아이비리그에 합격하고도 국내의 유명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하기 전 뉴욕타임스의 ‘21세기를 이끌 젊은 20대 100인 선정’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시황그룹의 항공 계열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곧 시황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전자나 바이오 쪽으로 중임을 맡으리라는 게 그룹 안팎의 추측이었다. 가끔, 그녀의 출퇴근 사진이 인터넷에 오르면 입고 있는 코트와 구두, 신발이 하루 만에 완판되곤 했다.
몇십 년 동안, 가족 전체가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어디서고 시황그룹에 우주민만 한 손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찌라시로도 제갈영경에게 두 번째 마누라가 있고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떠돈 적이 없건만.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사생아가 제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는 건…… 우시영이 그 부회장의 첩이었다는 거야?”
현덕의 뒤에 앉은 정모가 더듬더듬 물었다. 누구에게 물어보는 질문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이럴 땐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렴.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유호는 옆에서 정모의 입을 제 손으로 막아버렸다.
“읍! 으읍?”
정모가 무언가 말하려 애썼지만 유호는 정모의 입을 놔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시영이란 가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고, 재벌이랑 결혼해서 우주민을 낳았다고? 아니, 이미 우주민보다 나이 많은 딸이 있었다는 건…….’
현덕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대한민국 민법은 일부일처제를 기본 원칙으로 규정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게 법으로 정해진 나라다. 중혼은 엄연히 위법이다. 설사 중혼을 숨기고 한쪽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만을 유지했다 하더라도…….
더 생각하기 싫어졌다.
재벌이 아내 말고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낳고, 그 때문에 집안이 난리가 난다는 내용은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가끔 신문이나 뉴스 사회면에 나오기도 한다.
언제나 그런 걸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았다.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픽션이 현실만 못하다더니.’
현실은 TV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이었다.
“어머니와 제 존재는 철저히 숨겨졌습니다. 전 단 한 번도 제가 우주민이 아니라 제갈주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주민도, 제갈주민도 존재하는 줄 모르고 있었죠. 이십 년 동안.”
주민은 현실 막장 드라마의 한가운데 서 있다기엔 너무 태연했다.
“할아버지도, 새어머니도, 누나도 제가 노래를 부르는 걸 싫어했습니다. 언제나 숨어서 노래할 수밖에 없었지요. 더는 그렇게 살기 싫었습니다. 전 누가 뭐래도 우시영의 아들입니다. 제 어머니 우시영의 아들. 그래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마음껏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주민은 목 놓아 울지도, 악에 받쳐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했다.
현덕은 그런 주민을 바라보았다. 단 1초라도 놓칠세라, 눈을 깜박이는 것도 아쉬워하며 주민을 보았다.
주민은 현덕에게 부탁했다. 오늘 무대를 봐달라고, 자신을 꼭 봐달라고.
‘이런 의미였구나.’
단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은 평가곡을 봐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 고백을 지켜봐달라는 의미였다.
현덕은 주민이 왕따 당한다는 걸 알고 그에게 뛰어갔던 날, 그때 봤던 주민을 떠올렸다.
주민은 혼자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서 있었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다가 현덕을 보고야 웃어주었다. 지금의 주민은 그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을까?’
줄곧 함께였다.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뿐 아니라 함께 어울린 다른 연습생과도.
자룡은 현덕을 대하듯 주민을 대했다. 피터와 준비도 주민을 돕는 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주었다. 그렇게 다섯이서 함께하는 동안 주민은 조금 편해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을 그냥 ‘김현덕 연습생’이 아니라 ‘현덕아’라고 불러주었다. 조금 전엔 제 눈물을 닦아주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서로의 숨을 나누고, 온기를 나누었다.
현덕은 떨렸고, 설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주민, 주민 형. 주민아.’
스무 살의 우주민에게도 열여덟의 김현덕이 그런 의미였기를 바라고 싶었다.
주민에겐 원죄 같은 외로움이 있었다. 그 외로움의 시작을 고백하는 그는 여전히, 무대 위에 혼자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위로 올라가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현덕은 제 두 손을 모았다.
그동안 종교 없이 살았기에 누구에게 빌어야 할지 몰랐다. 이제 와서 믿는답시고 기도한들,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 현덕은 그저 주민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발.’
현덕은 자신이 무얼 바라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
주민의 인터뷰 후 레드 기숙사의 무대가 이어졌다. 마지막 평가 무대인 만큼 힘을 준 멋진 무대였지만, 저조했다. 소혁과 자룡이 백덤블링을 하고 무대 위를 날아다녔지만, 주민의 인터뷰를 이길 순 없었다.
레드 기숙사의 팀 무대까지 끝난 후. 촬영이 일시 중단되었다.
일정대로라면 연습생들은 숙소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해야 했다. 오늘로써 합숙 촬영은 끝이었다.
자신이 합격인지 불합격인지도 모른 채 합숙 촬영이 끝난다. 귀가해 그 주의 방송을 보고야 자신의 성적을 알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으나 연습생들은 제작진에게 항의할 수도 없었다. 최대한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제작진의 설명에 수긍하는 척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촬영 일정은 예정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메인 PD는 급히 촬영 스태프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아 긴급회의를 열었다.
연습생들은 30분 정도 버려졌다. 평소라면 촬영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떠들거나 날뛰었겠지만. 연습생들은 조용했다. 힐끔힐끔 주민을 쳐다볼 뿐이었다.
주민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저 꼿꼿이 앉아 있었다. 현덕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룡은 현덕에게 가려다 소혁의 제지를 받아 가볍게 말다툼을 하고는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현덕은 함께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았다. 자룡 때문은 아니었다.
일어섰을 때 주민과 눈이 마주쳤는데, 주민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어서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어 보였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했다.
그런 주민을 보고 있자니 괜히 코끝이 시렸다.
30분이 훌쩍 지나고야 스태프 두어 명이 나타나 연습생들을 챙겨 식당으로 인도했다. 평소와 달리 모든 기숙사의 연습생이 뒤섞여 식사했다. 스태프 둘은 주민을 데리고 금세 사라졌다.
촬영진도 없고 주민마저 사라지자, 비로소 연습생들의 입이 해동됐다. 연습생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무리 속에서 주민과 자주 부딪쳤던 사람들은 침묵했다. 이완용 패거리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건드린 우주민의 뒷배를 알고는 찌그러진 지 오래였다. 블루 기숙사의 연습생 중 한 명이 ‘너희 이제 큰일 난 거 아니냐.’고 농담조라 말했다가 완용에게 멱살 잡히기도 했다.
현덕은 한승과 유호, 정모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준비와 피터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지만 유호가 말렸다.
“괜히 붙어 있지 마. 안 그래도 너희가 우주민 연습생 도와준 거 아는 연습생들 많아. 괜히 이상한 오해 받을지도 모르니까, 계속 우리랑 같이 있어.”
유호는 현덕을 제 옆에 앉히고는 그 옆엔 정모를, 현덕의 맞은편엔 한승을 앉혔다. 괜히 이쪽을 얼쩡거리며 현덕에게 말을 걸려 하는 다른 연습생들을 다 차단했다.
“유호 형이 이럴 땐 참 든든해.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가 봐.”
정모는 여전히 쾌활했다. 현덕을 배려해서인지 우주민의 ‘우’ 자도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유호가 나이 많다며 농담이나 할 뿐이었다.
“나이 얘기하지 말랬지!”
유호도 평소처럼 정모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징벌을 가했다.
한승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슬그머니, 반찬으로 나온 고구마튀김을 현덕의 식판에 얹어주었다.
“한승아, 편식하면 안 돼.”
현덕은 그 튀김을 다시 한승에게 주었다.
“그런 거 아닌데요…….”
한승은 고구마튀김을 젓가락으로 집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식사를 마친 연습생들은 기숙사와 상관없이 삼삼오오 모여 숙소로 올라갔다. 주민과 주민의 부모님에 대해 사실과 거짓이 섞인 이야기를 나누며 짐을 쌌다.
현덕은 짐을 싸려는 유호와 한승, 정모를 말렸다. 숙소로 들른 준비와 피터에게도 말해 두었다.
“저희 오늘 퇴소 못 할 거예요. 그러니까 짐 싸지 마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호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물었다.
“오늘 주민 형이 저런 말을 했는데, PD가 우리를 순순히 내보낼 리 없어요. 저희 합격 불합격 결과가 미리 알려지는 걸 막겠다고 저희한테 결과도 안 알려주고 방송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저희를 내보낼까요?”
“그렇지, 그렇긴 하다. 우리를 더 가둬두면 가둬두지, 오늘 풀어줄 사람들이 아냐. 여기 촬영진들.”
유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신나서 짐을 싸러 간 정모를 말리러 갔다.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로비에 모였다. 성격 급한 몇몇은 문 앞을 지키고 선 촬영 스태프에게 달려가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현덕은 한승과 함께 멀뚱하니 섰다. 다른 연습생들에게 휩쓸려 로비로 내려오긴 했지만, 양 손이 비어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에게 치이는 걸 피하려 구석에 선 현덕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완용 패거리들이었다. 그들은 현덕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기둥 뒤에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야, 나가자마자 신문사나 방송사에 연락하자. 바로 말해서 정보 팔아버리는 거야. 남들이 말하기 전에.”
“그 인터넷 매체, 저번에 핑크키위 스캔들 퍼트린 거기에 제보할까?”
“거긴 얼마 정도 줄까? 돈 주긴 주겠지?”
“얼굴 가리고 인터뷰하려나? 모자이크 처리 해주겠지?”
“아깝다, 핸드폰이나 녹음기 있었으면 딱, 녹음했으면 완전 좋았을 텐데.”
그들은 주민의 정보를 내다 팔 계획을 짜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듣다 못한 현덕이 나서려 할 때였다.
“형, 형. 현덕 형. 참아요. 참으세요.”
현덕의 어깨 위로 한승의 두꺼운 손이 내려앉았다.
“저 사람들만 저러는 거 아니에요. 다들 비슷한 생각 하고 있을 거예요. 아까 유호 형 말 들었죠. 괜히 나섰다가 오해받을지도 몰라요.”
“오해받아도 상관없어. 무슨 오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면 되는 거잖아.”
현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형이 오해받으면 그 우주민 연습생이 슬퍼하지 않을까요? 그 연습생, 현덕 형이랑 꽤 친한 거 같던데. 현덕 형이 이상한 오해를 받으면 애써 용기 내 고백한 걸 후회할지도 몰라요.”
순간 울컥했던 현덕은 한승의 말을 듣고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현덕은 동생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얼굴을 살짝 붉히며 사과했다.
“미안.”
“아니에요, 형.”
한승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락부락하고 무섭게 생겼지만, 정이 드니 귀여워 보였다.
“그래도 튀김은 대신 못 먹어줘. 편식하면 안 돼.”
현덕이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아, 형. 편식하는 거 아니었다니까요.”
한승이 탄식했다.
그때 저 건너편이 시끄러워졌다. 문을 막고 선 촬영 스태프와 그 문을 나가고 싶어 미치는 연습생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는 듯했다. 얼마 안 있어 촬영 스태프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자아, 다들 숙소로 돌아가세요! 새로 공지할 테니까 확인 바랍니다. 일단 숙소로 올라가세요.”
그들은 양 떼를 몰듯 연습생 무리를 조각조각 내더니, 계단으로 밀어 올렸다. 버티는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순순히 숙소로 돌아갔다.
빈 몸으로 내려온 한승과 현덕도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선 아직도 유호와 정모가 싸우고 있었다. 정모가 캐리어에 짐을 던져 넣으면 유호가 빼내며, 정모에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냐고 구박하고 있었다.
곧 정모도 말귀를 알아먹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방마다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메인 PD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지는 뻔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합숙을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정식 해소는 사흘 뒤, 그러니까 트라이 온 1부 마지막 편이 방영하기 몇 시간 전인 금요일 오후였다.
“말도 안 돼!”
“으아악!”
“씨발!”
“싫어!”
방마다 비명이 들렸다. 정모도 캐리어를 껴안고 꽥 소리를 질렀다.
“사흘 동안 여기 더 갇혀 있으라고? 그래도 합격했는지 탈락했는지 안 알려줄 거잖아!”
복도에서 우다다, 연습생들이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진에게 항의하러 가는 듯했다.
그렇게 퇴소는 물거품이 되었다.
촬영은 끝났다. 촬영 스태프들은 우주민 소동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인지 아니면 마지막 편을 편집하러 떠난 건지 조용했다.
“내가 이런 일을 또 겪어야 하다니.”
복도에서 현덕을 마주친 피터는 대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임으로 예를 들어볼까? 만렙이 됐어, 더 이상 할 것도 없어.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그런데 로그아웃이 안 되는 거야.”
“……말년 병장의 마음이죠.”
현덕은 피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십분 이해했다.
피터야 현덕이 열여덟 살인 줄 알고 있지만, 현덕의 속에는 서른세 살에서 시간이 멈춘 김현덕이 들어 있었다. 만렙이 됐고 더 즐길 콘텐츠도 없는데 로그아웃도 못 하는 마음 따위, 이미 알고 있었다.
“아, 김맹덕 상병이 말해줬구나. 아무튼 그때의 마음이랑 지금이랑 비슷하네.”
피터의 말에 현덕은 그저 웃었다.
사흘간 추가 촬영은 없었다. 촬영 스태프들은 불만에 찬 연습생들을 버튼 눌린 핵폭탄 다루듯 했다. 어디선가 공수해온 게임기를 연습실 곳곳에 설치하고, 식당의 메뉴를 갑자기 업그레이드 했다. 끼니마다 고기가 풍성히 나왔다.
“고기 말고, 건빵이나 시리얼을 먹여야 하는 거라고.”
“맞아요. 시리얼은 분명히 성욕을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고요.”
군필자인 피터와 유호는 닭 다리를 뜯으며 촬영진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씨-앗. 정말 건빵이 그런 거? 정말로요?”
옆에 앉아 있던 자룡이 식겁하며 두 군필자에게 해선 안 될 질문을 던졌다.
“자룡 혀…… 아아.”
현덕은 자룡을 말리려 했으나 한 박자 늦었다. 심심한 군필자가 뻗은 거미줄에 자룡이 붙들렸다.
“오오, 미필자여. 이번에 여기 트라이 온에서 떨어지면 군대에 갈 생각인가?”
“내가 PX에서 사 먹어야 되는 거랑 사 먹으면 안 되는 걸 말해주마. 참, 총이랑 총알은 무조건 PX에서 사 가야 하는 건 알고 있나 모르겠네.”
“어? 아뇨, 데뷔하고 갈 건데요.”
“그래? 그래도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암, 그럼.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신성한 의무를 행해야지.”
자룡은 뒤늦게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으나, 눈을 빛내는 두 군필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현덕은 슬그머니 식판을 들고 한승과 준비가 있는 옆 테이블로 건너갔다. 한승과 준비는 연습실에 설치된 게임 공략법을 이야기하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연습생들은 사흘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평가를 앞둔 사흘은 너무도 짧게 느껴졌건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흘은 사백 년만큼 길었다.
현덕은 지루해 죽으려는 연습생들 속에서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우주민은 어디에 있을까?’
그날 이후 현덕은 주민을 만나지 못했다. 제작진이 주민을 다른 연습생들과 철저히 격리해 도무지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않았다.
“잘됐지, 뭐. 괜히 얼굴 보였다가는 싸움밖에 더 나겠어? 지금 여기 갇혀 있는 애들, 다 우주민 때문이라고 이를 갈고 있는데. 그 편이 걔한테도 안전할 거야.”
자룡은 심드렁했다.
“걔 걱정할 시간에 연습이나 한 번 더 하자. 다음 주에 바로 2부 촬영 시작이잖아. 미리 몸 풀어둬야 해. 연습 안 하고 띵까띵까 놀면 몸 굳는다?”
“자룡 형, 저는 합격일지 불합격일지도 몰라요.”
“불합격은 무슨. 넌 무조건 합격이야. 우주민도.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연습이나 해.”
자룡은 칼같이 현덕의 고민을 끊어내고는 우물쭈물하는 현덕을 질질 끌고 연습실로 갔다.
가는 중에 피터와 마주했다.
“어디들 가?”
“오, 마침 잘됐네. 할 일 없지? 우리랑 같이 연습이나 합시다.”
자룡은 연습친구 2를 획득했다.
“연습? 무슨 연습?”
피터는 영문을 몰라 현덕을 보았다.
“…….”
현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자룡에게 붙잡혀 연습해야 한다면 둘보다는 셋이 좋았으니까.
셋은 게임기가 설치되지 않은 연습실로 갔다. 자룡은 격렬하게 춤추기로 유명한 3인조 아이돌 그룹의 타이틀곡을 커버해선 2배속으로 춰보자고 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왜? 그걸 왜 해야 하는 겁니까?”
현덕과 피터는 거절했지만 자룡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언제 이런 연습을 해보겠어! 주간 평가나 촬영 압박 없이, 정말 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연습할 기회라고!”
자룡은 90년대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반짝였다. 현덕과 피터는 주인공의 열정에 휩쓸려 청춘을 불태워야 하는 친구 1, 2가 되었다. 주인공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주인공의 친구들은 그런 주인공에게 끌려가야 하는 법.
자룡은 정상 속도로 춰도 숨 가쁜 춤을 기어이 2배속으로 췄다. 피터와 현덕도 덩달아 성공해버렸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현덕과 피터는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죽으면 범인은 자룡 형이예요.”
“연쇄살인마…….”
둘은가슴을 움켜잡고 숨을 헐떡였다.
“거 봐, 할 수 있잖아.”
자룡은 둘을 내려보며 활짝 웃었다.
“한 번 더 어때? 응?”
그렇게 상큼해 보일 수 없었다.
“형은 차원을 잘못 태어났어요. 왜 삼차원에 태어난 거예요? 이차원에 태어났어야 했어요. 스포츠 만화 남주인공이어야 했다고. 그럼 우리 형이 그림으로 그려줬을 텐데.”
현덕은 천장이 빙빙 돌며 자신에게 내려오는 걸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뭔 소리? 정신줄 놓지 마라, 넌 가끔 너무 엉뚱해.”
자룡은 크게 웃으며 물병을 던졌다. 현덕은 그걸 받지도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병은 알아서 떼구르르, 현덕에게로 굴러 왔다.
자룡은 패잔병처럼 쓰러진 현덕과 피터를 놔두고 혼자서 음악을 켰다.
“이번에는 3배속! 가자”
“……살려줘요.”
“차라리 날 죽여.”
현덕과 피터는 연습실 구석으로 기어갔다. 겨우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물을 마시고 머리에 쏟으며 자룡을 구경했다. 춤추는 잔상이 보이는 듯했다. 경이로웠다.
노래의 1절이 끝날 때 즈음,
“우주민 연습생 어딨는지 궁금하지?”
피터가 물었다.
“궁금하죠. 이 호텔에 있기는 한 건지.”
현덕이 대수롭지 않게 듣고 대꾸하려는데,
“내가 알아.”
피터의 목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네? 정말요? 어떻게요?”
현덕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본 건 아니고 스태프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지. 나름 연습생들이 없는 데서 이야기한다고 구석에 갔는데, 내가 하필 거기에 숨어 있었거든.”
“정말요? 어디에 있대요? 뭐 하고 있대요? 괜찮대요?”
현덕은 숨도 안 쉬고 물었다.
“형!”
“진정해, 숨넘어가겠네. 그렇게 우주민 연습생이 걱정돼?”
“당연히 걱정되지요. 그렇게 폭탄 고백을 하고는 촬영 스태프들한테 붙잡혀 갔잖아요.”
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 대우가 나쁘진 않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불편했다. 잘 지내고는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걱정됐다.
피터는 그런 현덕을 빤히 바라보다 현덕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제 손가락으로 현덕의 손바닥에 쓱쓱 뭔가를 썼다. 숫자였다.
“……!”
현덕은 그게 호텔 방 번호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 있나 봐.”
“역시나 촬영진들 숙소 모여 있는 층이네요.”
“그런데 그 근처 방 쓰던 스태프들은 촬영분 편집하러 회사로 가서 비어 있나 봐. 정말 ‘외딴 탑에 갇힌 공주님’이 된 거지.”
피터는 아마도, 촬영 스태프들이 말했을 게 분명한 비유를 그대로 말했다.
“안 알려주려다가 알려주는 거니까, 요긴하게 써.”
피터는 현덕의 손을 돌돌 말았다. 현덕은 손을 꽉 주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피터가 빙긋, 웃어 보였다. 어쩐지 개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오, 이제 끝났나 보다.”
피터가 고개를 돌려 자룡을 바라보았다. 자룡을 바라보는 눈과 표정은 꽤 부드러웠다.
‘변했네.’
현덕은 문득 깨달았다.
오렌지 기숙사에 함께 있을 때는 매일같이 붙어 있어서 몰랐다. 옐로 기숙사로 내려와 숙소가 나뉘게 되니 새삼 차이가 느껴졌다.
피터가 달라졌다. 항상 상대방을 탐색하듯 날카로웠던 눈이 부드러워졌다. 준비를 놀리고 장난스레 말하는 건 여전했으나, 그 속에 보이던 뾰족한 가시가 사람 자체가 둥글어진 느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랬다. 예전이라면 마음을 떠보는 듯 의뭉스럽게 묻거나 돌려 말했을 것이다. 아예 안 알려주었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형에게 좋은 쪽이면 좋겠네.’
현덕은 피터가 내미는 생수를 받아들며, 그리 생각했다.
피터는 현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빙긋, 웃어보였다.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현덕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현덕은 어두운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7층까지 계단을 올라가 어느 방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이 밤중에 무슨 일……김현덕?”
다행히 잠을 자고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얼굴엔 짜증만 한가득할 뿐. 졸려 보이진 않았다. 그 짜증 난 기색마저 현덕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증발했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주민 형-”
현덕이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순찰을 도는 듯했다.
“일단 들어와.”
주민은 얼른 현덕의 팔을 잡아 당겼다. 현덕은 빨려 들어가듯 주민에게로 엎어졌다. 주민은 솜사탕을 안아 들듯 현덕을 번쩍 들었다. 한 손을 현덕의 어깨에 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문을 닫았다.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주민이 현덕을 벽 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등에 벽이 닿았다.
또각, 또각.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문 앞에 멈춰 섰다. 현덕은 바짝 긴장해 숨쉬는 것도 잊었다.
불을 안 켜고 있었는지 방 안은 어두웠다. 벽에 붙은 등이 은은한 빛을 내는 게 다였다. 그 빛으로는 주민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문밖에서 들리는 발소리라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필요가 있나? 아니야, 내가 나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저 발소리가 귀신도 아니잖아.’
애써 긴장을 풀렸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파드득, 현덕이 몸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튀었다. 주민이 현덕을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쉬- 괜찮아.”
나직한 저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주민의 입술이 귓불에 닿았다.
“……!”
그게 더 현덕을 긴장시켰다. 주민은 돌처럼 굳은 현덕을 보고 픽- 웃더니, 아예 현덕의 다리 사이에 한쪽 다리를 집어넣고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제야 현덕은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주민과 벽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주민은 현덕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주민의 가슴팍에 현덕의 얼굴이 파묻혔다. 둘은 한 치의 틈 없이 맞붙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현덕은 제 심장 소리가 주민에게까지 닿을까 봐 무서웠다.
“혀, 형. 잠깐만요. 잠깐만.”
현덕은 두 손으로 주민의 등을 움켜잡았다.
똑똑-.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현덕은 주민의 셔츠를 움켜쥔 채로 굳었다. 아예 주민에게 매달린 모양새가 됐다. 머리 위에서 큭큭,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현덕은 이마로 주민의 가슴을 박았다.
“아파, 때리지 마. 응?”
주민이 현덕의 정수리에 제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엄살 부리는 게 분명한데 너무 달콤했다.
‘어, 어떻게 해야 되지?’
현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머리마저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야, 뇌는 딱딱하지 않아. 딱딱한 건 뇌를 보호하기 위한 두개골이고, 사실 그 두개골도 둘로 나뉘어서 그 틈을 내리치면 두개골이 쉽게 쪼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바보 머저리가 된 것 같았다. 현덕이 울상을 지으려는데,
똑똑-.
현덕을 놀리듯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또 났다. 세 번째였다.
“자고 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주민은 귀찮아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현덕에게 엄살을 부렸던 때와 달리 살얼음처럼 싸늘했다.
현덕은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주민이 괜찮다는 듯 현덕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주민의 손이 닿은 부분이 찌릿찌릿했다.
‘이거 이상해.’
이젠 울고 싶어졌다.
“우주민 연습생,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달칵, 달칵.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났다.
‘안 돼, 문 열면 안 돼. 절대 안 돼.’
현덕은 주민의 가슴에 대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하늘에서 현덕의 간절함을 보셨는지 문이 열리진 않았다. 주민이 잠갔기 때문이지만, 현덕은 아무 신에게나 무조건 감사드렸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잠시라도 놓칠세라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식욕을 닮은 진득한 감정에 눈이 번들거렸다.
“잠깐 문을 좀 열어주십시오.”
“나중에 다시 와주십시오. 겨우 잠들었다 일어난 거라 정신이 없네요.”
“……알겠습니다.”
스태프는 세 번씩이나 문을 두드린 사람답지 않게 순순히 물러섰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아.”
현덕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주민의 가슴에 닿아 흐트러졌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어?’
현덕은 울컥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현덕은 고개를 들었다. 주민을 보며 따져 물으려 했는데,
“누구 때문에-”
채 말을 잇지 못했다.
“…….”
“…….”
서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키 때문에 주민의 입술이 현덕의 이마에 닿을락 말락 했지만. 현덕의 머리카락에 주민의 숨이 닿았다. 그리고 주민이 웃고 있었다. 새삼,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세찬 파도같이 몰아쳐서는 주민의 미소 한 번에 산산히 부서졌다.
고작 이틀, 하지만 체감 상으로는 백년 천년이었다. 오직 걱정뿐이었다. 잘 지내고는 있는지,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닌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막상 만나서 얼굴을 맞대니 단 한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보고 싶었어.’
인정해야 했다.
‘내가 정말로 널 좋아하나 봐.’
이렇게 몸을 맞대고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 뛰는데. 바라보고 있어도 그리운데. 이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면 대체 뭘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현덕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걸 눈 앞에서 지켜 보는 사람의 심정이란.
“미치겠네.”
주민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현덕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주민은 웃음을 참으려 다시 현덕의 머리를 턱으로 꾹 눌렀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진짜 나타나네. 김현덕, 팅커벨이야?”
머리 위에서 주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방에 낮게 깔리는 나직한 저음은 듣고만 있어도 좋았다. 그래도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팅커벨이라니! 난 남자고, 그렇게 작지도 않아요.”
시적 허용도 정도가 있어야지. 너무 얼토당토않다면 그건 문법 파괴였다.
“진짜 김현덕이네.”
주민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런가? 다른 걸 물어볼게.”
주민이 뒤로 반 발자국 물러섰다. 둘 사이에 빈틈이 생겼다.
“나야말로 물어볼게-”
현덕의 말이 끝나기 전에,
“여기.”
주민의 손이 현덕의 왼쪽 가슴 위를 덮었다.
“뭐하는-”
“나 때문에 뛰는 거야?”
“……!”
현덕은 숨 쉬는 걸 잊었다.
“응? 말해 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너무 놀라서-”
현덕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제멋대로 뒤엉켰다.
“그래, 그렇구나.”
주민이 그답지 않게, 순순히 수긍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밤에 날 왜 찾아온 건데?”
“…….”
“내가 걱정돼서 온 거야?”
“…….”
“내가 보고 싶었어?”
“…….”
주민은 연달아 답할 수 없는 것만 물었다. 아니, 사실 답할 수 없는 질문이랄 건 없었다.
주민이 걱정되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날, 무대 위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다 말해버린 건지. 지금 괜찮은 건지. 혹시 힘든데 아닌 척 혼자 삭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묻고 싶었다.
그날, 왜 자신에게 끝까지 지켜봐달라고 말했는지. 왜 입 맞췄는지.
영악하게도, 물어볼 새도 없이 도망가버린 주민이 미웠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 안쓰러운 만큼 더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주먹으로 명치를 갈기고 싶었다. 그 언젠가처럼 발로 가랑이 사이를 차버리고 싶었다.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고 고민하게 만들다니!’
33년을 살면서, 다시 열여섯 살로 돌아가 열여덟 살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만큼 심장이 뛰지 않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이 얄밉고 인성 꽝인 우주민에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런 마음을 견디며 사는 걸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이렇게 떨렸을까. 고작 이틀 만에 만나 같이 있기만 해도 이렇게 떨리는데, 어떻게 평생 함께 살 생각을 한 걸까.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은데. 왜 내게 이런 감정을 안겨준 저 자식은 멀쩡해 보이는 걸까. 뭐가 그리 좋다고 웃으면서 낯부끄러운 질문이나 해대는 걸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지금까지 풀어 본 어떤 수학 문제보다 난해하고 복잡했다. 풀이 할 엄두가 안 났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틀렸어. 망했어.’
현덕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돌이 돼버리고 싶었다. 물론 주민은 현덕이 계속 돌처럼 굳어 있도록 놔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키스해도 돼?”
주민이 물었다.
“어?”
“키스해도 되냐고.”
“……어?”
현덕은 제 귀를 의심했다.
“현덕아. 뽀뽀 말고 키스.”
하지만 나직한 저음은 계속 현덕을 꾀었다.
“자, 잠깐만요. 일단 두 발만 물러나요.”
현덕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이란 걸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너무 달달해서 위험한 우주민과 멀어져야 한다. 한 발자국, 아니, 반 발자국이라도.
주민의 어깨를 잡고 밀었다. 주민은 그대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한 발, 다시 다가갔다. 그새 벽과 주민의 사이에서 빠져나온 현덕은 슬금 뒤로 물러섰다.
“형? 주민 형?”
현덕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너한테 입 맞추고 싶어, 현덕아.”
주민이 한 발, 다가가며 웃었다. 한껏 물오른 미소였다. 반드시 현덕을 꼬셔 입술을 맞대고야 말겠다는 생각만 하는 듯했다.
“어, 아니, 잠깐,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이러면-”
현덕은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얼굴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안 그래도 잘생긴 남자가 작정하고 덤비니 심장이 위험했다. 계속 심장이 덜컥거렸다.
“형 미쳤어요? 혹시 잠 덜 깼어요?”
“나한테 찾아온 건 너잖아. 응? 현덕아.”
주민이 또 한 발, 다가갔다.
“난 얘기를 하려고, 그러려고 온 건데. 대화요, 대화. 우리 사이엔 대화란 게 좀 많이 필요한 거 같지 않아요?”
다시 뒤로 물러나려는데 발에 무언가 걸렸다. 뒤를 보니 침대였다. 어느새 침대 앞까지 스스로 걸어온 것이었다.
‘어, 이거 뭔가-’
위험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형, 주민 형?”
급히 다시 주민을 보았다.
“그래, 현덕아.”
주민은 손을 뻗어 현덕의 두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풀썩- 현덕이 침대로 쓰러졌다. 주민은 현덕의 허리 위에 올라타 현덕을 내려다보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침대 옆에 작은 소품용 전등만 켜져 있을 뿐이었다. 은은한 불빛은 현덕과 주민, 둘을 겨우 비출 뿐이었다.
그림자가 드리운 주민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특히나 눈이 이상했다. 맛이 살짝 간 듯, 돌아버린 눈이었다.
“형, 진짜 제정신인 거 맞죠?”
현덕은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닌 거 같아?”
주민이 웃었다. 평소에 보이는 그 싸가지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헉 소리 나게 아름답고, 또 야했다.
주민은 어찌할 바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현덕의 손을 잡아 내렸다. 현덕은 경찰에게 붙들린 강도처럼 얼어붙었다.
손끝으로 현덕의 손등을 쓸었다. 간지럽히듯 어르고는, 소매 사이로 그 긴 손가락을 넣었다. 현덕은 파드득,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지는 않는데, 소름이 돋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형?”
“응. 현덕아.”
주민이 현덕의 손목을 쥐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주민의 몸은 차가웠다. 손목을 움켜쥔 주민의 손도 서늘했다. 현덕은 수갑을 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형, 자, 잠깐만요.”
어쩐지 무서워져서, 현덕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괜찮아. 여기 카메라도 없고 아무도 없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기분 나빠?”
주민은 그런 현덕을 제지하고 몸을 숙였다. 현덕의 위로 주민의 그림자가 졌다. 진지한 얼굴이 무섭도록 선명했다.
“나랑 닿는 게 싫어?”
한 손은 여전히 현덕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주민은 다른 손으로 현덕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에 가렸던 현덕의 말간 눈이 드러났다. 톡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울 듯 울망해져서는, 저를 괴롭히는 사람을 순하게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현덕만 몰랐다.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에 피가 끓었다.
당장 집어삼키고 싶었다. 목이 탔다. 굶주린 지 너무 오래으니까.
하지만 제 허기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순 없었다. 놀랄 테니까. 무서워 도망갈 테니까.
‘나는 내 아버지랑 달라.’
주민은 이를 악물었다.
현덕의 손목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시뻘겋게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그 하얀 손을 끌어올려 손가락 하나하나에 공들여 입을 맞추었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이빨로 씹어 먹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런 거면 지금 당장 말해. 아무것도 안 할게.”
주민은 짐짓, 현덕을 생각해주는 척 말했다.
“다시는 손끝 하나 안 건드릴게.”
지킬 용기도 없으면서. 말만 번드르르하게.
“…….”
현덕은 그저 잡힌 손목이 아팠다. 주민은 놓아주겠다고 하면서 아직 현덕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방패삼아 정말로 놓아주지는 않았으니까.
‘……내일 자국 남겠다.’
현덕은 주민에게 잡힌 손목을 보며 괜히 손목에 남을 손자국을 걱정했다.
‘내일 긴팔을 입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해야 하지? 자룡 형이 보면 바로 우주민이 그런 거라고 눈치챌 텐데. 평소엔 둔한 형인데 꼭 이런 데는 눈치가 빨라서…….’
그렇게 잠시 멍해져 있었을 뿐인데.
“김현덕.”
주민은 그새를 못 참고 현덕을 불렀다. 저를 앞에 두고 잠깐 딴생각을 하는 현덕을 잠시도 견디질 못했다.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애써 딴생각을 했건만. 주민은 그 잠깐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아…….”
현덕의 시선이 다시 주민에게로 돌아왔다.
“대답해.”
주민이 강요했다.
“…….”
현덕은 울고 싶어졌다.
제 위에 올라탄 우주민은 무섭도록 진지했다.
싫다고 말한다고 순순히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싫으면 싫다고 말하라고 한다.
그래도 싫으면 싫은 거니까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싫지가 않았다.
그게 부끄러웠다.
무섭기도 했다.
무섭다고 느끼는 자신이 더욱 부끄러웠다.
열여덟 살 몸을 입고 있지만, 서른세 살까지의 삶을 살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정신병에 걸려 미래를 탐험하고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서른세 살, 아니 그 이상 되는 나이를 먹었을 텐데.
스무 살 우주민에게 깔려서는 그게 싫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우주민에게 말해야 했다.
억울하고, 부끄러웠다.
오직 우주민 뿐이었다.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김현덕.”
현덕이 답을 안 하고 시간을 끌자, 주민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이제는 숫제 협박하듯 현덕을 불렀다.
“그걸…….”
더 참을 수 없는 건 현덕도 마찬가지였다.
“뭐?”
현덕은 제 손목을 움켜잡은 주민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주민의 셔츠 깃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에게 잡아당겼다.
주민은 순순히 끌려 내려왔다. 눈은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현덕을 보는 채였다.
현덕은 주민의 마른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딪침은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현덕에게는 벅찼다. 머리가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현덕은 울음 같은 신음을 내며 다시 주민을 위로 밀어 올렸다. 주민은 풍선처럼 그대로 밀려갔다.
“김현덕?”
주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목소리로 현덕을 불렀다.
“그걸 꼭 말해야 알아?”
현덕은 주민에게 닿았던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았다. 아플 정도로 뜨거웠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현덕은 주민의 멱살을 잡았던 손으로 제 입술을 문질렀다.
차마 주민을 보진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현덕은 미처 보지 못했다. 내려다보는 주민의 눈이 회까닥 돌아 있다는 걸.
“김현덕.”
부르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야했다.
주민이 현덕의 양손에 제 손을 겹쳤다. 깍지를 끼고 현덕의 머리 양쪽에 파묻고는 현덕에게 제 몸을 겹쳤다.
가장 먼저 입술이 닿았다.
방 안은 고요했다. 둘의 숨소리마저 잦아든 침묵 속에서 연한 살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주민이 혀로 윗입술을 핥자 현덕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젖은 혀가 안을 파고들었다.
“아!”
현덕은 혹시나 주민의 혀를 깨물까 봐,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TV에서,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주민의 혀는 뱀 같았다. 질척하고 뜨겁고 까끌한데, 부드러웠다. 그리고 달았다. 혀를 비비는 감촉이 적나라했다.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그것이 간지럽히듯 입안을 핥았다. 입천장을 톡톡, 건드리더니 까끌하게 쓸어내렸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 킥킥대자 그 웃음마저 가져가 삼켰다. 그리고 제 숨을 현덕에게 넣어주었다.
“흐으…….”
현덕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먼저 잡은 건지 몰랐다. 다만 현덕은 주민의 악력을 이기지 못했다. 주민은 현덕의 손가락을 바스러트리려는 듯 세게 얽어맸다.
“아, 파…… 읍!”
현덕의 숨 한 가닥마저 모두 주민에게 빨려 들어갔다.
혀 아래의 연약한 점막을 주민의 혀가 쓸었다. 까끌까끌한 면이 닿는데, 질척한 소리가 났다.
“아……으…….”
혀에서 시작된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현덕은 생소한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민이 온몸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두 손은 깍지를 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숨…… 막……. 아, 흐으, 혀, 형…….”
현덕은 고개를 꺾어 주민을 피하며 겨우 말했다.
“응, 응. 쉬이- 착하지? 조금만, 좀만 더.”
주민은 현덕을 달래는 척하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현덕이 입을 앙다물고 열지 않자 혀로 톡톡 노크하듯 건드렸다. 그게 간지러우면서도 싫지 않아서. 현덕은 못 이기는 척 주민을 받아들였다.
주민은 고개를 꺾어가며 입을 맞추었다. 잠깐 틈이 생길 때마다 혀가 얽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타액이 현덕의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마다 현덕이 몸을 움찔, 떨었다. 제 다리 사이에 자리잡은 주민의 허리에 다리를 비비는 모양새가 되었다.
둘의 중심이 맞붙어 쓸렸다. 현덕의 것은 물론 주민의 것 역시 열이 올랐다. 부딛쳐 비벼질 때마다 소름 돋게 기분 좋았다.
“흐으!”
현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꼬리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혀, 혀엉……!”
정신이 아득해졌다.
현덕은 제 안을 멋대로 헤집는 주민에게 모든 걸 내맡긴 채 숨을 헐떡댔다. 그 숨마저도 주민에게 빼앗겼다가 되돌려 받는 식이었다.
한참 뒤,
주민이 고개를 들었다.
감았던 눈이 천천히 뜨이고 까만 눈동자가 드러나는 게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명백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같은 남자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주민이 깍지를 꼈던 손 중 하나를 풀었다. 그리고는 젖은 제 혀를 엄지로 쓱 문지르더니, 타액이 묻은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야했다.
“우주민…….”
현덕이 멍하니, 그를 불렀다.
“현덕아.”
주민이 속삭이듯 말했다.
“난 네가 날 우주민이라고 부를 때마다 미쳐버릴 거 같아.”
현덕은 무심코 하려던 대답을 꿀꺽 삼켰다.
‘나도…….’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주민이 웃었다.
현덕의 손에 얽은 주민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주민은 둘의 몸 사이의 빈틈을 단번에 좁혔다.
주민이 다시 입을 겹치려 했다. 주민에게 취해, 무방비 상태로 늘어져 있던 현덕은 주민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앳된,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남자애가 해롱대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
가출했던 이성이 급히 백스텝을 밟고 돌아왔다.
“자, 잠깐. 안 돼!”
사람이 위기에 몰리면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더니. 사실이었다.
주민의 가슴을 힘껏 밀었다. 벌어진 틈만큼 자신도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뭐야.”
조금 전까지 달콤하게 웃으며 현덕을 홀리던 얼굴에 성급한 욕망이 어렸다.
주민의 성난 표정에 현덕은 어깨를 움츠렸다. 주민은 얼른 안색을 바꿨다.
“괜찮아.”
주민이 손을 들어 현덕의 뺨을 쓸었다. 현덕은 그 손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비장하게 말했다.
“나, 나 아직 미성년자야.”
“……뭐?”
“나 아직 미자라고.”
현덕은 매우 진지했다.
“미성년자와 성인의 성관계는 옳지 않아.”
불법인지, 몇 년 형인지, 등등. 예전에 열심히 외웠던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뇌가 모두 녹아버린 듯했다. 하지만 성인과 미성년자의 성관계가 법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건 분명히 기억 났다.
좋아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순 없었다.
현덕은 애절하게 주민을 올려보았다. 그게 주민을 더 미치게 하는 줄, 현덕은 진정 몰랐다.
“아, 씹.”
주민이 현덕의 어깨를 잡아 다시 침대에 파묻었다.
“형? 나, 안 된-”
“키스만. 키스만 할게.”
“아니- 읍!”
현덕은 주민의 등을 팡팡 두드렸지만 주민은 다급하게 현덕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
현덕이 잠들었다. 입술이 부어 아파 보였지만, 그거 말고는 편안해 보였다.
주민은 현덕을 향해 비스듬히 누웠다. 한 손으론 머리를 괴고 다른 한 손으론 현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부은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밤새 입을 맞추고 싶었다. 더는 안 된다며 울상인 현덕을 끝까지 울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하게 매달고 안 된다고 말하는데, 차마 더 괴롭힐 수 없었다.
‘너는 모를 거야. 내가 너한테만 무르다는 걸.’
어쩔 줄 몰라 하는 현덕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현덕이 잠에 취해 늘어질 때까지 안고만 있었다. 현덕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침대에 눕히고, 다시 끌어 안았다.
현덕은 베개를 베고 누워서는 주민을 현덕이 바라보더니, 웃음지었다.
“진짜 걱정했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눈꺼풀이 느려졌다. 천천히 감겼다가 더 천천히 열리더니, 다시 느리게 감겼다. 그리고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현덕은 주민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주민은 제 품에서 잠든 현덕을 보고 또 봤다. 봐도 봐도 좋았다.
현덕은 잘 때도 수더분했다. 잠든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무얼 움켜쥐는 버릇이 있는지 베개를 꽉 움켜쥐었다. 그 오므린 손이 귀여워서 손등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우수수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니 곱게 감긴 눈이 보였다. 그 위에 입을 맞추고, 코끝에도 입을 맞추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곳에 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똑똑-.
훼방꾼이 이 귀한 시간을 침범했다.
“우음.”
현덕이 몸을 뒤척였다.
쯧, 주민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또 노크 소리가 들려 혹여라도 현덕이 깨면 안 되니까. 문을 반쯤 열고 찾아온 사람을 확인했다.
촬영 스태프 중 한 명이었다. 집업의 후드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채였다.
주민은 스태프에게 들어오라 권하지 않았다. 스태프도 딱히 바라지 않았다는 듯 문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누나가 손을 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고작 연습생 하나를 꾀어 들여보내다니. 실망입니다. 똑똑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더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네요.”
주민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좀 나은 거겠지요? 난 촬영진 중에 내 사람을 꽂아놨으니까.”
“제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스태프는 살짝 목례했다.
원래 주민은 가족들 몰래 준비하여 데뷔하려 했다. 시황그룹으로부터 도망치려면 해외로 나가는 것보다 연예계로 도망치는 게 나았다.
인기를 얻는다면 그걸 무기로 휘둘러 시황그룹에서 벗어날 셈이었다. 유명해지지 못하면, 가족의 과거사를 팔아서라도 시황그룹의 이름에 먹칠 할 생각이었다.
시황그룹은 문화 예술계에 힘을 못 썼다. 제대로 된 계열사 하나 없을 뿐더러, 이미 진출한 다른 기업들의 견제 때문에 뒤늦게 뛰어들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잘만 숨기고 움직인다면 계획대로 성공할 수 있었다. 주민은 자신 있었다.
그래서 가명으로 TE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다. TE엔터테인먼트는 몇 년간 시황그룹과 여러 소송이 얽혀 진흙탕 싸움을 했던 모 기업의 투자를 받은 회사였다. 설사 주민의 정체가 들킨다 해도 시황그룹의 이름에 먹칠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민을 보호해줄 게 분명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동안 TE엔터테인먼트에서 아이돌 연습생 노릇을 했다. 집에 들키지 않으려 학업과 병행했지만, 양쪽 다 무리 없이 해나갔다.
주민에게는 어머니, 우시영이 물려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주민은 노래 부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니 어쩌면 끔찍이 싫어하는 쪽에 속했지만. 그럼에도 노래를 잘 불렀고, 외모 또한 객관적으로 매우 잘생긴 편이었다. 데뷔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데뷔 전까지 집안에 들키지 않을 수 있느냐 였다.
주민은 첩보 영화를 찍는 듯 움직이며 꽤 오래 잘 버텼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 꼬리를 밟혔다.
현덕 때문이었다. 자룡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매달리는 현덕을 외면할 수 없었다. 현덕을 돕다가 평소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가 경찰서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기록은 고스란히 할아버지와 누나에게 전달됐고, 둘은 주민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바로 알아챘다.
꽤 허무하게 들켜버렸다.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할아버지 쪽에서든 누나 쪽에서든, 방해하려 나설 게 뻔했으니까. 평범하게 아이돌 데뷔조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트라이 온에 참여했다.
역시나 할아버지와 누나는 바로 움직였다. 촬영 전 납치를 당할 뻔했고, 촬영 중에는 동료 연습생의 견제를 받았다.
다만 할아버지든 누나든 주민을 너무 얕봤다. 주민은 아무 생각 없이 트라이 온에 참가하기로 한 게 아니었다. 트라이 온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자마자 촬영에 참여하는 모든 촬영 스태프와 연습생들을 조사했다. 촬영 스태프 중에는 제가 매수한 사람을 꽂아 넣기도 했다.
소혁이 누나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고 들어 왔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소혁이 이완용 패거리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고.
적당할 때 터트리던지, 역으로 꾀어 제 밑으로 부리든지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마저 어그러졌다. 이 또한 현덕 때문이었다. 언제나 현덕이 변수였다.
소혁의 하청을 받은 이완용 패거리가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다. 현덕을 다치게 하려고 하다니, 당연히 눈이 돌아갈 수 밖에.
그리고 이제 주민은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모든 계획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또한 현덕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에게 가서 전하고 왔습니까?”
“예, 회장님께서 자나깨나 손주 걱정 뿐이라고, 건강 챙겨 가며 하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걱정?”
주민이 싸늘하게 웃었다.
“계산이 금방 끝났나 보군요. 가서 손주 역시 할아버지 걱정 뿐이라고 전하세요.”
“훈훈한 모습 매체에 내보내고 싶으면 알아서 준비하고 오시고.”
주민은 답을 듣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현덕에게 돌아왔다.
현덕은 그새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여전히 두 손으론 베개를 꼭 쥐고 있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라도 쥐듯이.
주민은 바닥에 앉아 팔을 괴고, 현덕을 보았다. 싸늘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현덕을 보기만 해도 실없이 웃음이 났다.
주민은 아예 현덕의 얼굴 옆에 제 팔을 대고, 눕듯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색색, 현덕의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너무 달콤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 그런데 도망치지 않으려고.”
주민은 작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날 좀 사랑해주지 않을래?”
문득 먼 하늘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 마, 그러지 마! 걔를 놔줘, 정말 그 아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그 아이를 놔주라고!’
미쳐버린 여인의 울부짖음이었다. 어쩌면 저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를, 제 아들의 희생양이 불쌍해 애원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머니.’
바로 이틀 전,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불렀던 그 세 음절을 입안에 굴려보았다. 어색했다.
어느샌가 소리 내어 부르지 않게 됐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걸 고통스러워하기만 했다. 그러니 소리 내 부르면, 겨우 도망친 사람을 다시 이 세상에 붙들어 매는 것 같아서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무대에선 ‘필요해서’ 불렀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어쩌면 전파를 타고 수백만 명 사람들에게 닿을지 모르는 무대 위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어머니’를 입에 담았다.
‘어머니, 전 얘가 좋아요.’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감정인지, 현덕을 만나기 전엔 알지 못했다. 영원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알게 됐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다.
주민은 베개를 움켜쥔 현덕의 손을 감싸쥐었다.
힘을 주면 이 감촉이, 온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차마 현덕의 손을 꽉 잡을 수도 없었다.
‘베개 따위 말고 날 이렇게 잡아줘. 제발.’
목구멍을 타고 기어 나오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것뿐이다. 추하고 더럽고, 비참한 구걸.
주민은 현덕의 손을 놓지 못하고 침대에 고개를 파묻었다.
***
현덕과 주민이 태어나기 전.
매년 한 TV 프로그램에서 청년가요제를 열었다. 낙엽이 지는 가을이면, 전국에서 노래 좀 하고 악기 좀 다룬다 하는 청년들이 무대를 찾았다.
시청률은 어떤 프로그램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높았다. 청년가요제가 진행되는 시기에 다른 방송국에서 새 프로그램을 내지 않을 정도였다.
대상을 받은 우승자는 데뷔와 성공을 보장받았다.
방송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하자마자 유명 감독과 영화를 찍고, 해외 순방 공연을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매년 청년가요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다. 그 최고점을 찍었던 어느 해. 헐렁한 청바지에 흰 남방을 입은, 짧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무대에 섰다. 모 여대에 재학 중인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손때 묻은 낡은 기타를 어깨에 메고 마이크 앞에 섰다.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동네잔치에 놀러 나온 동네의 끼 있는 젊은이처럼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
여자치고는 낮은 음색은 부드러우면서도 쓸쓸했다. 이제 고작 스무 살이 되었다는 대학생은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어떠할지를 상상했다.
오늘 아침에 피어오른 연기에 눈이 따가워 울고는 다시 잠들었던 하루를
서른 살의 나는 후회하지 않으련지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서서 그저 조용히 눈물 흘리며
언젠가 고요한 밤은 오리라
모두 지나고 함께 잠드는 밤은 오리라
외면하던 오늘의 나를
마흔 살의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련지
괴로운 한낮이 밤이 되려면 저녁놀을 지나야 하는데
그것이 무서워 등을 지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이것이 나의 청춘이련지
지금 내가 가지기엔 이 청춘이 너무도 아까운데
고이 접어두고 서른 살의 내게, 마흔 살의 내게 돌려줄 수는 없으련지
이것이 나의 스무 살인데
나의 청춘인데
그녀는 혼잣말 하듯 노래했다. 그 맑은 목소리와 노래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녀는 당연히 대상을 차지했다. 곧바로 대형 음반사와 계약을 했고, 앨범을 내기도 전에 여러 굵직한 광고를 계약했다.
그해 겨울, 그녀는 가요제에서 부른 노래를 주제곡으로 하여 1집 앨범을 냈다.
<우시영 1집, 무제.>
그녀와 그녀의 노래는 역대 어떤 가요제 우승자와 우승자의 음반보다 큰 사랑을 받았다. 거리마다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반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빼먹고 가게 앞에서 줄 서며 밤을 지새워 음반을 사 가는 게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 시절, 학생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우시영의 노래를 기억했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그으면서도 그들이 기억하는 우시영의 노래를 지우진 못했다.
지금도 우시영의 1집은 3, 40대, 혹은 50대 중장년층에게 사랑받는 명반이었다. 그 시절의 명곡을 투표하면 항상 그녀의 노래가 상위권에 놓였다. 여러 번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때에는 그녀의 노래를 그리 오래 듣지 못했다.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암울했던 시대였다.
정권을 장악한 군인 정치가들은 대중이 한마음으로 뭉치는 걸 두려워했다. 혹여 영화와 드라마 속에, 노래 가사 어디에 자신들을 돌려 까고, 비난하는 말이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노이로제에 걸린 강박증 환자처럼 대중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제약했다.
그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우시영의 노래가 자신들을 비난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듣기에, 온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우시영의 노래는 영 수상쩍었다. 젊은 청년들을 선동해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시위로 끌어들이는 불건전 가요였다.
우시영의 1집은 음반을 낸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전국의 음반 가게에서 음반이 회수됐다. 거리에선 그녀의 노래가 사라졌다.
우시영과 광고 계약을 맺었던 모든 회사가 계약을 철회했다. 그녀와 계약했던 음반사는 그녀에게 엄청난 위약금을 지웠다.
혜성처럼 떠올랐던 신인 가수의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우시영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노래는 더 이상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최루탄과 군화에 짓밟혔던 ‘민주’라는 두 글자가 청년들의 피를 먹고 자라 태양처럼 떠오르는 날이 도래했다.
음반 가게 앞에서 밤을 지새우던 고등학생은 직장인이 되었고, 제 짝을 만나 결혼했다. 적금을 들고, 빚을 내어 방 한 칸의 전세를 얻어 가정을 꾸렸다. 사람들은 월급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불연듯 시대에 묻혔던 그녀를 떠올렸다.
우시영.
그 어두운 시절에 쓸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노래를 들려주었던 청춘. 서정적인 가사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젊은 가수.
대중은 뒤늦게 우시영을 찾기 시작했다. TV 방송국에서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만들어가며 우시영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시영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우시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도통 찾을 수 없었다. 죽지 않고 이 대한민국 어딘가에 살아 있기는 할까 회의론이 일었다.
특집 프로그램에 나온 우시영의 친척, 지인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그들은 방송국 사람들이 아무리 집요하게 질문해도 모르겠다고,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던 중 대학에서 같은 노래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는 중년 여성이 남몰래 보관하고 있었던 우시영의 일기장과 공책을 공개했다. 그게 우시영 찾기 TV 프로그램의 유일한 성과였다.
일기장에는 1집이 불건전 가요 판정을 받은 이후 우시영이 어떻게 살았는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시영은 이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위약금을 짊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며 공장에 들어가 재봉틀을 밟으며 삶을 연명했다. 하지만 그 고단한 삶 속에서도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되게 일하는 중간중간의 짧은 쉬는 시간, 식사 시간마다 그녀는 노래했다. 관중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젓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며 그녀는 늘 노래를 불렀다.
신청곡을 받아 트로트를 부르고 번안곡을 부르고 팝송을 불렀다. 공장의 먼지로 목이 껄껄해지고 잔뜩 쉬어도 그녀는 노래 부르는 걸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 스무 시간씩 일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공책에 가사를 끄적였다. 고작 몇 시간 잠자는 시간마저 쪼개 노래를 만들었다.
그녀는 2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서른 살, 마흔 살의 나에게 부끄러운 스무 살 청춘을 보낼까 두렵다던 젊은 천재 가수는 저를 짓누르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청춘이었다.
청춘이란 말로 포장하기엔 힘겨운 삶이었다. 하지만 청춘이란 말을 쓰지 않고서는 절망적인 잿빛 삶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를 표현할 수 없었다.
손때 탄 노트에는 그녀의 미발표 곡들이 담겨 있었다. 완성된 곡도 있었고, 만들다 만 미완성의 곡도 있었다.
대중은 뒤늦게 우시영에게 어떤 부채감을 가졌다. 그리고 천재 가수의 절망, 그 속에서 피어난 희망에 열광했다.
고작 음반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진 천재 가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행방불명된 그녀는 오로지 스무 살, 1집 음반을 발표할 때의 모습으로만 기억되었다. 짧은 단발을 하고, 스스럼없이 웃는 얼굴.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으로.
우시영을 추모하는 열기는 오래 지속됐다. 우시영이 다녔던 대학에서는 그녀의 기념관을 만들었다. 우시영의 1집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대형 음반사에서는 추모 앨범을 냈다가 대중들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그 추모 앨범 자체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우시영이 태어났다는 동네와 우시영이 자랐다는 동네에서는 각각 우시영의 이름을 딴 기념 가요제를 열었다. 두 가요제는 삼 년 정도 각자 열렸다가 이후 하나로 합쳐져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의 30, 40대에게 우시영은 신화였다. 조선 시대에 날개 잃은 아기 장수 설화가 민초에게 위안과 슬픔을 주었다면, 대한민국 시대엔 우시영이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던 추억의 상징이었다.
요즘 10대 중에도 우시영의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러 아이돌 그룹은 잊을 만하면 우시영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우시영의 노래 중 하나는 어느 가수 선발 프로그램에서 여러 참가자들이 불러, 일명 ‘연습생곡’이 되었다. 이번 트라이 온 첫 촬영 때도 그 곡을 부른 연습생이 다섯 명은 넘었다.
‘우시영’은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그 우시영이 주민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주민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세상의 기억과 달랐다.
마른 몸. 웃음기 없는 메마른 얼굴. 초점 없이 흐린 눈동자. 그리고 길게 자란 까만 머리카락.
고층의 아파트. 모든 게 갖춰진 새장에서 어머니는 조금씩, 조금씩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어린 주민이 아무렇게 놓여 있었다.
밖이 내다보이는 거실의 창문은 두꺼운 유리로 막혀 있었다. 여는 손잡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와 주민은 단 한 번도 베란다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아예 나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의자를 그 창문 가까이 끌고 와 앉았다. 주민에겐 등을 보이고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미성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민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TV로 본 어떤 사람도 어머니처럼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주민은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가 좋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의자에 기대앉아 창밖을 보며 노래 부르는 어머니는 아련해 보였다. 함부로 손을 대면 스르륵, 사라져버릴 아지랑이 같았다. 신기루 같았다. 위태롭게 가녀렸다.
작은 허밍은 어느샌가 가사가 들리는 노랫가락이 되었고, 울음이 되었다. 그 울음은 주민을 향한 분노의 마중물이 되었다.
어머니가 괴물의 형상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다가 돌변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하다 주민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노래를 뚝 그치고 주민을 노려보았다.
주민은 굶주린 맹수 앞에 놓인 토끼처럼 온몸이 굳었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주민에게, 어머니는 늘 달려들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나는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어.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
어린 주민의 팔다리를 꼬집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온몸이 퍼렇게 멍이 들고 퉁퉁 부어올랐다. 손톱에 긁혀 살갗이 찢기고 피가 나기도 했다.
“죽어! 차라리 죽어! 죽으란 말이야! 왜 태어나서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다 너 때문이야!”
그녀는 울부짖으며 주민을 갈가리 찢었다.
그 큰 집에서 어머니를 말리고 주민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려주세요.’
주민은 속으로만 외쳤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외쳤다.
‘제발 우리 엄마를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한 번도 자신을 살려달라고 바란 적이 없었다. 어머니를 이렇게 만드는 자신이 계속 살아 있는 게 미안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와 주민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아니, 잠깐.
주민은 매번, 오늘에야말로 어머니가 나를 죽이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항상 주민을 죽이지 못했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는 어머니는 금세 지쳤다.
허억, 허억. 헉.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온 집 안이 그 숨소리로 가득 차면, 어머니는 다시 슬픔에 잠겼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가, 내 아가. 내가 너한테……. 주민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미안, 미안.”
어머니는 또 울었다. 펑펑 눈물을 흘리며 주민을 껴안았다. 그녀에게 폭행당한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녀는 주민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주민은 아프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혹여 어머니가 돌변해 또 저를 때릴까 봐 무서워서, 제가 아프다고 말하면 어머니가 더 슬퍼할까 봐.
주민은 노래가 싫었다. 노래 부르는 것도 싫었다. 어머니는 주민을 사랑해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건 오직, 노래였다. 그 노래를 빼앗긴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았고, 미쳐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가두고, 어머니에게서 노래를 빼앗았다. 그는 워낙 바쁜 사람이라 집을 자주 비웠다. 가끔 찾아와도 주민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거부할 때만, 아버지는 주민에게 관심을 가졌다. 주민을 내세우며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주민은 훌륭한 도구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저를 거부하면 주민에게 자신의 것을 쥐여주었다. 회사의 주식, 통장에 쌓인 현금, 부동산, 은행 금고에 쌓여 있는 금괴. 그리고 시황그룹의 후계자 자리.
“당신의 아이, 저 불쌍한 아이가 보이지 않아? 날 거부하지 마. 그랬다간 저 아이에게 준 걸 모두 빼앗아버리겠어. 그러면 저 아이는 평생 불쌍하게 살겠지.”
아버지는 항상 주민을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어머니를 끌어안고 입맞췄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내 거야. 아무한테도 못 줘. 다른 남자를 쳐다보기만 해봐. 그 새끼를 산 채로 회 떠버릴 거야. 내가 못 할 거 같아? 그럼 어디 해봐, 누구한테든 눈길 한번 흘려보라고. 가만 안 둬. 나 말고 당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버지는 어머니가 창밖을 내다보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다.
주민이 보고 있든 보지 않든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잡아먹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의 손아귀에 붙들린 어머니는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렸다.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가 주민을 쥐어뜯는 걸 발견했다. 그는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그 광경을 구경했다.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주민을 구해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주민을 괴롭히는 걸 기꺼워했다. 주민은 어머니가 저를 죽이려 할 때마다 즐겁게 웃는 아버지를 보았다.
주민은 아버지에게 좋은 도구였다. 어머니를 붙들어 매 놓을 수 있는. 그렇기에 아버지는 제 자식인 주민마저 끔찍이 싫어했다. 어머니가 주민에게 애착을 가지는 걸 증오했다.
가끔 주민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어머니가 저를 할퀴고 괴롭히는 건 사실 아버지로부터 저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어머니가 주민을 꼬집고 때리다 지쳐 쓰러지면,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를 안아 들었다. 싫다고 발버둥 치는 어머니를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그 후엔 드물게도 주민을 눈에 보이는 사람 취급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주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네 어머니를 사랑한단다.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저 밖은 너무 위험해. 난 시영이를 지켜주고 있는 거야. 절대 네 어머니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그렇게 혼잣말을 하듯 말하고는, 주민을 놔두고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쾅. 주민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그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는 간간이 어머니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 거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주민은 거실 구석에 웅크려 앉아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낮에,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를 따라 불러보았다. 노래 따위, 끔찍했지만 할 줄 아는 것 역시 노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TV에 나왔다. 어머니는 창가에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아, 팔다리가 망가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었다. 주민은 그 의자 아래 웅크려 앉아 TV에 나오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아내라고 소개하고, 주민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애를 외동딸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웃으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TV에 나오는 아버지는 낯설었다. 아버지는 주민과 어머니와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주민은 TV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다짐했다. 어른이 되면 사랑 같은 걸 하지 말자고. 아무도 사랑하지 말고 살자고.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고 짓밟는 게 사랑이라면.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혼자 살다가 혼자 죽으리라.
바라는 건 딱 하나.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영영 찾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어머니와 도망가면,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을 때리고 꼬집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TV 드라마에 나오는 여느 어머니와 아들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바랐건만, 기다렸건만. 어머니는 주민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주민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매 죽었다. 주민은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려 울며 맹세했다.
절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그렇게 살다가 혼자 죽고야 말겠다고.
몸에 흐르는 피는 저주받은 피였다. 노래 말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 여자와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파멸로 몰고 간 남자의 자식. 저주받은 괴물이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엔 아버지와 같이 되리라. 어머니같은 사람을 만들고 말리라.
할아버지, 제갈영정은 사업에 미친 사람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막내로 태어나 죽 한 그릇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6.25 전쟁 때 겨우 살아남아, 1.4 후퇴 때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맨손으로 시작하여 작은 회사를 세우고, 성공에 성공을 거듭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재벌 총수가 되었다.
그는 성공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했다. 그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 주민의 아버지, 제갈영경은 어렸을 때부터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때려도 울지 않았고 장난감을 뺏기면 뺏기는구나, 할 뿐이었다.
맹숭맹숭한 아들을 보다 못한 할머니가 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들은 정신과 치료를 권했다. 할아버지는 그 성격이 회사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아들을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어느 날, 평생을 감정 없는 로봇처럼 살던 아들이 변했다. 갑자기 한 여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집착하다 못해 그 여자의 인생을 말아먹었다. 제갈영정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정략 결혼한 아내와의 관계만 잘 유지하고, 지금까지 그러했듯 회사 일만 잘 해나가면 방해하지 않겠다고 거래까지 제안했다.
제갈영경은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 우연히 TV로 청년가요제를 보다 통기타 하나 메고 나온 우시영에게 반했다.
우시영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남자는 무슨 짓이든 했다.
일부러 대형 음반사에 투자하여 우시영과 계약하도록 하고, 큰돈을 주고 시황그룹 아파트 광고 계약을 맺었다. 그가 굳이 손쓰지 않아도 우시영이 곧 누릴 것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가로채 베풀 듯 떠안겼다. 우시영의 모든 것이 저로 인한 것이어야 성에 찼다.
제갈영경은 얌전한 신사인 척, 총각 행세를 하며 제갈영경에게 다가갔다.
우시영은 입안의 혀처럼 구는 제갈영경에게 빠졌다. 그가 사랑을 속삭일 때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에게 제 모든 걸 넘기지 않았다.
예술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감이란 게 있는 듯했다. 우시영은 제갈영경을 사랑하면서도 제갈영경을 수상쩍게 여겼다. 제갈영경이 제 질척한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평범한 척 행동했음에도, 우시영은 제갈영경의 속에서 꿈틀거리는 수렁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우시영이 제게 완전히 넘어오지 않자, 제갈영경은 ‘어쩔 수 없이’ 우시영을 나락으로 빠트렸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군인 정치가들에게 정치자금을 상납하는 술자리에서 우시영의 순수한 노래에 대한 정치적인 의혹을 몇 마디 지껄이면, 게임 끝이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산이 없어지던 시대였다. 정권에 대항하던 젊은이들이 소리소문없이 끌려가 사라지던 세상이었다. 시황그룹 금고에서 나온 돈과 몇 마디 모함만으로 가요제 우승자에게 쏟아지던 화려한 조명은 단번에 꺼졌다.
우시영의 노래는 너무 쉽게 짓밟혔다. 우시영은 노래 부를 수 있는 무대를 잃었다. 그녀의 노래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다. 그녀는 음반사와 여러 광고 계약 회사에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제갈영경은 최선을 다해 우시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더욱더 비참해져서, 곁에 남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우시영이 내게는 당신뿐이라며 비틀대며 자신에게 걸어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우시영은 그에게 기대지 않았다. 그녀는 진창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희망을 품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끌려 내려와 공장을 돌며 하루에 스무 시간씩 일하면서도 노래했다. 짧은 잠 시간을 쪼개 노래를 만들며 재기를 꿈꿨다.
도와주겠다며 다가오는 제갈영경을 거부했다. 우시영은 그즈음에 이미 눈치를 챘던 건지도 몰랐다. 제 삶을 엉망으로 만든 악마가 누구인지를.
하지만 우시영은 제갈영경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게 제갈영경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우시영의 사랑도, 증오도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우시영은 유일한 사랑도 증오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최고의 복수였다.
견디다 못한 제갈영경은 우시영을 납치했다. 감금하고 강제로 관계를 맺어 임신시키고 그녀의 몇 안 되는 친척들에겐 돈을 주고 협박하여 입을 막았다.
가끔 매체에서 비운의 천재 운운하며 우시영을 찾을 때마다 자애롭게 바라보았으나, 뒤로 손을 써서 프로그램이 조기 종영되도록 했다.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해 문화 산업에 투자했다.
우시영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었으나, 우시영은 세상에서 잊혔다. 우시영은 제갈영경의 손아귀에 갇혀 숨 쉬는 것만 허락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못했다. 꿈도 희망도 꺾인 채 하루하루 시름시름 앓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래도 제갈영경은 만족했다.
우시영은 제 목숨을 끊어 제갈영경에게 복수했다.
우시영이 자살한 후 제갈영경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회사에 미친 제 아버지가 아무리 닦달해도 예전처럼 열의를 가지고 일하지 않았다. 본처가 바람 나 이혼을 요구해도 시큰둥했다. 아버지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딸의 양육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어느 날.
제갈영경은 제가 가진 것 중 대부분을 주민에게 남기고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명백한 자살이었으나 평범한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주민은 그 모든 걸 보고 자랐다. 그런데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만나버렸다. 우주민이, 김현덕을.
처음엔 볼 때마다 짜증이 났다. 멋대로 제 이름을 부르고 아는 척하는 현덕을 의심했다. 할아버지, 혹은 배다른 누나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원소혁처럼 대가를 받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자꾸, 부딪쳤다. 밀어내고 협박하고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시할 수도 없었다. 밀어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보낸 보안 팀에게 붙잡혀 갈 뻔했을 때, 현덕이 그를 구해주었다. 얻어맞아 엉망이 된 얼굴로 웃어주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본 순간.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그동안 주민이 살던 세상은 아무 의미 없는 무채색이었다. 그 속에서 현덕만 온전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 눈꼬리가 살짝 처진 까만 눈. 얻어맞아 터져 피난 입술. 가느다란 목, 작은 어깨. 찢어진 옷소매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손목.
현덕의 모든 게 눈에 박혔다.
그 뒤로 주민은 현덕을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다.
고마워.
고마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에 들어찬 더럽고 질척한 감정이 대신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너였지’
혼자 있는 그를 걱정해주는 것도, 그가 못하는 걸 도와주겠다 다가온 것도, 곁에 있어 준 것도. 현덕이 처음이었다. 유일했다.
현덕이 좋았다. 한 톨이라도 더, 현덕의 관심을 받고 싶어 목이 탔다.
그런 자신이 끔찍해서, 밀어내는 척했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는 그마저 포기했다.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주민 형,’ 하고 부르며 웃으며 다가오는데, 그런 현덕을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가지고 싶어.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거지?’
현덕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어디에 가둬두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는 크고 아름다운 새장을 만들어서, 유인하자.
내 얼굴을 좋아하니까, 바라는 대로 웃어줄까. 원하는대로 웃어줘서 경계심을 풀고 살금살금 유인해 새장으로 데려오면 되겠지. 일단 가두면 도망가지 못하겠지. 저 모습을 나만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더 이상 내게 웃어주지 않겠지.
한 번 생각에 빠져들면 걷잡을 수 없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주민은 머릿속에서 현덕을 몇 번이든 붙잡고 납치하고 감금했다.
주민의 머릿속에 사는 현덕은 언제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어머니처럼. 노래를 잃고 문 없는 새장에 갇혀 죽었던 우시영처럼. 그러면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때마다 토악질이 났다.
‘나도, 결국 내 아버지와 같은 쓰레기구나.’
온몸의 피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그냥, 힘없이 흔들리던 어머니의 차가운 발아래 매달렸던 그 어린 날의 맹세대로 살아야 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말고, 누구의 사랑도 받을 생각 하지 말고, 혼자 살다 쓸쓸히 죽어야 했다.
왜나면, 불쌍하니까. 우주민이란 사람에게 사랑받고, 또 우주민에게 사랑을 주도록 강요받아야 하는 사람이 불쌍하니까. 너무 불쌍하니까.
우주민이란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고 배운 건 사랑하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방법뿐이었다.
하늘 높이 날아야 하는 새를 두 손에 쥐고는, 날개를 뜯고 입을 꿰매버리는 게 그가 배운 사랑의 방식이었다. 그가 본 사랑은 날아가지 못하게, 울지 못하게 만들어 잘 꾸며진 새장 안에 넣는 것이었다.
그게 올바르지 않은 방법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랑 말고는 알지 못한다.
김현덕은 올바름을 좋아하지만, 우주민은 김현덕이 좋아하는 그것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태어난 것부터가 죄악이었다. 우주민이란 인간이 태어났기에 어머니가 망가졌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얽어맬 훌륭한 도구를 얻었다.
그런 주제에 현덕이 좋았다.
‘좋아해. 너를 좋아하는 거 같아. 어떡하면 좋지? 미안해, 좋아해서. 좋아해, 너무 좋아해.’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인마에게 공감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부인할 순 없었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을까. 내가 김현덕을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지고 싶었던 거겠지. 저 눈이 오직 나만 향하게 하고 싶었겠지. 가둬서라도 갖고 싶었겠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빼앗고 싶었겠지. 나만 보고 나만 보게 만들고 싶었겠지.
현덕과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힘들어 하는 걸 알면서도 달래는 척, 어르는 척하면서도 혀로 파고들었다.
달았다. 김현덕이 달았다. 김현덕의 안은 더 달았다. 더 깊은 곳에 닿으면 얼마나 달까. 황홀할까.
현덕을 보면 볼수록 허기가 졌다. 이제 절 바라보며 웃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씹어 먹고 싶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먹어치워 버리고 싶었다.
좀 더. 더. 더. 더더더.
더 원했다. 모든 걸 남김없이 가지고 싶었다. 내쉬는 숨마저 먹어치우고 싶었다.
‘아무한테도 말고 나만 봐줘. 나만 사랑해줘, 제발.’
주민은 차라리 현덕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그러면 착한 김현덕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울어주겠지.
고작 스무 살짜리가 이런 감정을 갖는 게 말이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하듯 풋풋하게 사랑하고, 닿는 것마저 설레하고. 그렇게 풋풋하고 달달해야 할 텐데.
열여덟 김현덕은?
짧은 입맞춤만으로도 행복하고, 바라보며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연애. 밝은 햇살 아래, 손잡고 걸으며 밝게 웃는 달달한 연애.
현덕에겐 그런 연애가, 그런 게 당연한 사람이 어울렸다.
알면서도, 제 손안에 들어올락 말락 가까워진 현덕을 도무지 놓칠 수 없었다.
둘 다 같은 남자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서 쏟아붓는 감정의 더러움이 더 큰 문제였다.
애초부터 마음의 깊이가 달랐다. 주민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패고 또 패어 깊은 구덩이가 졌다. 그 위로 핏물과 눈물이 빼곡히 차올랐다. 그 시꺼먼 수렁이 출렁이며 현덕을 원하고 있었다.
현덕을 만난 건 기적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하는 게 무서울 정도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기적을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의 귓속에 속삭였다. 내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애초부터 이 순하고 예쁘게 웃는 사람이 내 것일 리가 없지 않냐고.
마지막 양심의 소리일지 몰랐다.
하지만 주민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엔 너무 굶주렸다. 죽어가는,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 양심 따위에 흔들릴 여유따윈 없었다.
본래 내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놓쳐선 안 됐다. 실수로라도 놓아주면 훨훨 날아가 버릴 텐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텐데. 저를 정말 아끼고 따뜻하게 사랑해줄 누군가에게 가버려 행복해질 텐데. 나를 놔두고 행복해질 텐데.
그걸 견딜 수 있을 리가.
겨우 입술을 닿은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제게 말을 걸고, 아무 경계심도 없이 순하게 웃는 그 모든 게…… 다른 누구의 것이 된다니.
생각만으로도 그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려서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웃어주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
몸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고개를 쳐 들고 쉭쉭, 혀를 날름거렸다. 그 노란 독니가 현덕을 향할 때마다 주민은 갖은 힘을 다해 참았다.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저 봐. 날 향해 웃어주고 있잖아.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지 않아. 나랑 몸을 맞대고 입을 맞어. 내 거야. 김현덕은 내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현덕이 남자라는 것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현덕이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김현덕, 김현덕이어야 했다. 김현덕이면 됐다.
우주민에게는 김현덕이 있어야 했다. 김현덕에게는 우주민이 그만큼의 무게가 아닐지라도.
***
주민은 고개를 들어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쩜 이렇게 아무 경계 없이 잠들 수 있는 걸까. 더는 만지지 않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을 수 있을까.
더 만지고 싶어. 싫다고 울고 도망쳐도, 붙잡아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핥고 싶어.
안돼.
왜?
싫어.
좋아.
할 거야.
미움 받기 싫어.
해.
참아야 해.
마음은 두 갈래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웠다.
울리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현덕이 안 된다고, 싫다고 하는 일은 하기 싫었다.
주인이 언젠가 먹이를 줄 거라 믿고, 먹이통 앞에서 ‘기다려’란 말만 듣고 얌전히 앉아 있는 개처럼. 그렇게 현덕에게 순종하고 싶었다. 굶어 죽기 직전에 현덕이 은혜처럼 내려주는 입맞춤에 몸을 떨며,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울리고 싶었다. 제 품 안에서, 제가 주는 쾌락에 젖어 우는 걸 보고 싶었다.
바로 눈앞에 현덕이 있는데. 손을 뻗으면 닿는데, 왜 지켜만 봐야 하는 거지?
웅크린 몸 위로 올라타서, 다리 사이를 파고들면 어떻게 될까. 저 순한 얼굴로 혼자 자위를 해본 적은 있을까? 저 바지를 내리고 빨아주면 설까. 흥분할까? 잠을 깰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겠지. 그리고 떼어내려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겠지. 그러다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비비 꼬겠지. 허리를 비틀고, 몸을 들썩이겠지. 그 떠는 몸을 붙잡고, 더 세게 빨아주면 결국 사정하겠지.
입으로 받아내 삼키면, 그걸 보고 울까. 충격을 받을까. 범죄를 저지른 거라고, 올바르지 않은 일을 했다고 화를 낼까. 그럼 혀로 그 뒤를 빨면 어떨까.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갈 때까지 만지고 빨고, 그렇게 먹어치우면 어떻게 될까.
날 싫어할까?
울까?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현덕의 손가락이나 겨우 움켜쥐었던 손이 어느새 현덕의 목을 타고 내렸다.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난 쇄골을 쓸어내렸다. 손은 얇은 셔츠 위로 타올랐다. 판판한 가슴 아래 갈비뼈가 도드라졌다. 그 아래가 홀쭉하게 가라앉았다. 마른 몸이었다.
편편한 배가 아플 정도로, 뒤를 쑤시고 제 것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현덕이 울면서 더 해달라고 매달리게 만들고 싶었다.
주민의 긴 손가락 끝이 현덕의 배꼽 근처를 어루만졌다. 셔츠 위로 만지는 게 감질나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으음…….”
주민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현덕이 뒤척이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현덕이 주민에게 등을 졌다.
셔츠가 반쯤 말려 올라가 하얀 등이 드러났다. 살짝 등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주민은 홀린 듯 그 도드라진 뼈를 손으로 쓸었다.
이 선을 따라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아니, 그냥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하얀 살갗을 잘근잘근 씹어 자국을 내고 싶었다.
그럼 그만큼 울어줄까. 신음을 내며 울까.
만지고 싶다. 듣고 싶다. 원초적인 욕구에 휩싸인 손이 현덕의 등을 더듬었다.
막, 셔츠 속으로 손이 들어갔을 때였다.
“흐이……. 간지러.”
현덕이 잠결에 웃으며 어깨를 움찔, 움직였다.
“……!”
정신이 들었다.
손을 내렸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현덕의 마른 등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손 끝에 남은 감촉의 여운을 더듬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뒤 현덕의 발밑에 뭉쳐 있는 얇은 이불을 들어 현덕의 목 끝까지 덮었다.
현덕이 자신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아니,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하고 챙겨주고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 주제에.
현덕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할 뻔했다.
‘내가 지금 뭘 하려 한 거지?’
주민은 침대 매트리스에 얼굴을 박았다.
현덕이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다. 현덕이 싫어하는 걸 하면 안 된다.
‘해도 들키면 안 돼.’
주민은 속으로 되뇌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현덕의 몸 선이 은은하게 빛났다. 길고 가는 목, 뼈가 가늘어 보이는 어깨, 그리고 이어지는 허리와 등의 선. 어느 것 하나 탐나지 않는 게 없었다.
주민은 조심스럽게 현덕의 등에 제 머리를 댔다. 강아지가 제 주인에게 애교 부리듯 부볐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결코 눈을 뜬 현덕에겐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정말 널 사랑한다면 놔줘야겠지. 내 아버지처럼 그러면 안 돼. 널 내 어머니처럼 만들면 안 돼. 하지만 놓아줄 수가 없어. 도무지 널 놓고 살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고 나한테 와.
내가 잘할게. 네게 잘할게. 참아볼게.
내 어머니처럼 만들지는 않을 거야. 너그러운 척 네 옆에 서서,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웃어주는 걸 참아볼게.
대신 항상 네 옆에 있을래.
난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내 어머니를 팔아서라도, 내 아버지의 성을 이름 앞에 달아서라도, 할아버지 밑에 기어들어 가서라도. 내 누나라는 사람과 싸워서라도, 모든 걸 갖겠어.
그래서 그걸로 널 감쌀 거야. 두텁고 높은 성벽을 만들어서 네가 내가 갇힌 줄도 모르게 만들 거야. 네가 보는 세상이 유리벽에 둘러싸인 걸 모르게 할게, 내 손안에 붙잡힌 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살게 할게. 내 옆에서.
주민이 할 수 있는 배려는 이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현덕의 전부를 바랐다.
‘제발 날 사랑해줘. 널 사랑하는 날 용서해줘. 이렇게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날 받아줘. 이런 날 영영 알아채지 말아줘.’
그저 현덕의 사랑과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네가 몰랐으면 좋겠어. 평생 모르게 할 거야. 너와 관련되지 않은 모든 것에 내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너와 관련된 모든 것에 내가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게 할 거야.’
주민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현덕아,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끔찍한 내 인생이 그래도 계속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언제나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어머니의 유령, 아버지의 그림자, 할아버지의 탐욕으로부터 도망쳐 혼자가 되고 싶었다. 도망칠 수만 있다면- 텅 빈 채로, 죽는 날까지 아무 의미 없이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가 되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곳에 섰다.
유명해질 생각이었다. 할아버지와 누나란 사람이 저를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의미없는 삶, 태어난지도 모르게 흔적 없이사라지는 죽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제갈주민이 아니라 우주민으로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이상으로 할아버지와 누나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도망치는 것으로는 안 됐다. 저를 도와주었던 현덕이 등급이 떨어졌던 날, 깨달았다.
‘내가 부족하면, 쟤가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내가 힘이 없으면 쟤는 또 저런 얼굴을 하겠구나.’
저를 도와주느라 충분히 연습을 못 한 현덕은 무대에서 계속 실수했다. 실수 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국엔 울상이 되었다. 그런 현덕을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작 그 정도에도 죽을 것같이 힘든데. 혹여 할아버지나 누나, 돈과 권력을 가진 냉혈한들이 건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진절머리 났다.
다른 누가 피해를 받고 괴로워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현덕만큼은 아니었다.
현덕을 온전히 가지기 위해, 지키기 위해, 주민은 그동안 도망치려 했던 소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현덕을 잃는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거야.”
주민은 현덕의 마른 등을 감싼 셔츠 위에 입을 맞추었다.
열여덟 살의 현덕을 손에 넣었다. 이제서야, 아니 다행히도 일찍 만났다.
그러니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평생, 죽어서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