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우주
5일 후.
촬영에 참가한 모든 연습생의 긴장과 떨림 속에 네 번째 평가 무대가 진행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마지막 평가와 이전 세 번의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텔 1층 로비에 마련된 평가 무대와 단상 위에 앉은 여섯 명의 선생님, 그리고 무대 위에 선 MC 유진. 무대 아래에 기숙사별로 앉은 연습생들과 그들을 빙 둘러싼 수십 대의 카메라와 촬영 스태프들.
하지만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생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모두들 전쟁터에 나서는 군인처럼 굳어 있었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해 우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5분에 한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연습생들은 여럿이었다.
그중 유독 피곤해 보이는 연습생이 있었다. 오렌지 기숙사의 뉴 페이스, 주민이었다. 평가곡의 컨셉에 맞춰 블랙 슈트를 차려입은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메이크업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다크 서클로 눈빛이 거뭇거뭇했다. 입술도 말라서 거칠했다.
그 피곤한 모습조차 빛이 났다. 관에서 갓 튀어나온 드라큘라 같은 매력이 있었다. 누구든 눈을 마주치면 내 피를 마시라고 목을 들이 밀고 싶어질 것 같았다.
명약퇴폐미를 흩뿌리는 당사자는 정작 졸려 죽으려 하고 있었다. 주민은 메이크업을 받으면서도 틈만 나면 졸았다.
다들 너무 긴장해 숨도 못 쉬고 있건만. 그 틈바구니에 끼어 꾸벅꾸벅 졸았다. 연습생들은 그런 주민의 대범함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주민은 지금까지 살아온 스무 해를 통틀어, 요 일주일 동안만큼 춤을 춰본 적이 없었다. 밤에는 자룡과 현덕이 그를 들들 볶았고, 낮이면 피터와 준비가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했다.
춤. 춤. 그리고 춤.
하루 24시간이 오직 춤이었다.
노래 연습은 거의 하지도 못했다. 일주일 동안 채 일곱 시간이나 불렀을까?
보컬 트레이닝 수업을 받으러 가겠다고 말했다가,
“지금 노래 연습을 하겠다구여? 미쳤어여? 형 아이큐 빵이에여? 그렇게 멍청하고 전술, 전략도 몰라서 어떻게 우리 현덕 형이랑 친할 수 있어여?”
자기보다 한참 어린 준비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아. 우주민 연습생은 노래 실력이 뛰어나잖아. 너무 뛰어나서 문제지. 며칠 연습 안 한다고 그 실력이 어디 달아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춤 연습을 좀 더 해보는 게 어떨까?”
곁에 있던 피터마저 완곡히 돌려 말하며 그를 말렸다.
주민은 자신이 몸치라는 걸 알았다. 그냥 춤을 못 춘다고 말하며 춤을 못 추는 보통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일 정도로.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꾸준히 연습해왔기에,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계속 연습하다 보면 박자룡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추게 되리라. 주민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니, 이미 이 정도면 제법 실력이 는 거 아닌가?’
남들 앞에서 선보인 소금쟁이 춤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비보잉의 고난도 동작과 비슷하게 미화되어 있었다. 지지난주까지는.
지난 일주일. 주민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것인지를 몸으로 실감했다.
주민의 몸뚱이는 박자에 맞춰 움직인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의 몸을 구성하는 피와 살, 그 속의 유전자에는 ‘춤’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신은 우주민이란 인간을 만들며 미모에 모든 능력치를 몰아주는 대신, 인성과 춤을 아예 빼먹은 듯했다. 나중에 노력으로 채워 넣을 기회조차 넣어주지 않았고.
그런 몸에 ‘5일’ 동안 한 곡 분량의 안무를 입혀야 했다. 이는 신이 6일 동안 천지창조를 한 것에 비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자룡과 현덕, 준비와 피터가 이를 이뤄냈다. 당연히 상상 이상의 집착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준비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주민의 옆에 앉아 허밍으로 평가곡 노래를 불러주었다. 피터는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이나 포크로 식판을 두드리며 뚱땅뚱땅 박자를 맞췄다. 숙소에서 잠을 잘 때는 핸드폰으로 평가곡을 무한 재생했다.
그들의 눈물겨운 괴롭힘은 헛되지 않았다. 주민은 꿈속에서마저 안무 연습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지옥의 수련 기간 5일을 견딘 주민은 말 그대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좀비같았다. 다크 서클이 한참 아래까지 내려왔다. 안 그래도 하얬던 얼굴은 창백해져 핏줄마저 비쳤다. 과연 스타일리스트들이 비명을 지를 만했다.
그러나 그는 신이 모든 능력치를 미모에 몰빵해준 미인이었다. 메이크업과 헤어 케어를 받으니 치명적인 피폐미가 만발했다.
“잘생긴 놈은 피골이 상접해도 잘생겨 보이는구나, 씨-앗.”
자룡은 막 메이크업을 마치고 일어서는 주민을 보고 으으,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룡도 평소보다는 피곤해보였지만 주민만큼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며 며칠씩 밤새우는 게 일상이었던 지라, 이 정도 빡빡한 일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자룡은 천상 무대 체질이었다. 분장을 마치니 당장 무대에 올라 열댓 곡 이상 춤을 춰도 쌩쌩할 것 같은 건강미를 뽐냈다. 도마뱀이 보호색을 펴듯 능숙하게 자신의 피로함을 숨겼다.
“우와.”
현덕은 메이크업한 주민을 보고는 대놓고 감탄했다.
“진짜 잘생겼다.”
머리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감상이 툭툭 입으로 튀어나왔다.
60년대 흑백 영화에서 나올 법한 창백한 안색의 미남 드라큘라보다 섹시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주민이 목이 마르다고 말하면, 현덕은 내 피를 마시라고 목을 내밀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인지.’
주민은 현덕을 보며 픽, 웃었다.
현덕은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앞머리가 안경 위에서 살랑거렸다.
안경알 너머로 끝이 살짝 처진 눈이 반짝였다.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이는데. 주민은 그 눈꼬리가 접히는 순간을 놓칠까 봐 숨까지 멈췄다. 눈을 깜박일 수도 없었다.
“형, 살아 있는 거 맞죠?”
현덕은 이 세상 미모가 아닌 주민이 신기루일까 싶어 주민의 손을 잡아 보았다.
주민은 이전처럼 현덕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더 꽉 움켜쥐었다.
“아파요, 아파.”
현덕이 손을 흔들며 아프다고 말해도 힘을 조금 풀 뿐, 놓지 않았다. 현덕은 그런 주민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힘내요. 나도 힘낼게요.”
“어.”
“그게 끝?”
“……?”
주민이 의아하다는 듯 현덕을 보았다.
“나한테도 힘내라고 말해줘야지요.”
현덕이 지적하자 그제야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웃음을 흘리며, 현덕의 손에 입을 가져다 댔다. 후- 숨을 불어주었다.
“간지러워. 힘내라고 응원해 달랬더니, 뭐 하는 거예요.”
현덕이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주민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려는 것이었다. 주민은 현덕의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주문을 외듯 나직한 목소리로 현덕에게 속삭였다.
“떨지 말라고. 긴장하지도 말고. 실수하지도 말고.”
“형도요. 마음 편히 해요.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연습하듯이.”
현덕도 절 걱정해 주는 주민의 마음을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원래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는 거 알죠?”
복도 창문에서 쏟아진 햇살을 받은 주민이 투명하게 빛났다. 정말 드라큘라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빛을 받으면 아지랑이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저 느낌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나, 현덕은 왠지 불안하여 주민을 잡아끌었다. 그늘이 있는 곳까지 간 다음 다시 주민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음영이 드리우자 더 잘생겨 보였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조금만 쳐다봐도 뭘 쳐다보냐며 톡 쏘던 우주민이 바로 어제 모습처럼 생생한데. 지금은 이렇게 쳐다봐도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준다.
두근.
주민의 웃음에 심장이 세게 뛰었다.
‘어?’
현덕은 제 손을 왼쪽 가슴 위로 가져다댔다. 주민이 손을 풀어주지 않아 주민의 손까지 얹혔다.
현덕의 손은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민의 손이 그 위에 얹히자 완전히 가려 보이지 않았다. 주민의 손가락이 현덕의 왼쪽 가슴에 닿았다. 그러자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두근두근.
‘이거 뭐지? 이 나이에 벌써 부정맥?’
심혈관 질환을 염려하던 중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주민의 손가락이 제 가슴을 더듬는 것 같은?
현덕은 줄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얇은 셔츠 위로 주민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분명 주민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등, 셔츠 위를 야살스럽게 문지르면서.
“…….”
그걸 깨닫는 순간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혀, 형?”
목소리가 떨렸다. 말을 하고도 스스로 놀랐다.
“왜?”
주민이 태연하게 되물었다.
“어어……어?”
현덕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민은 환하게 웃으며 현덕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주민은 현덕이 제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모를까. 종종 홀린 듯 제 얼굴을 쳐다보는데.
현덕을 만나기 전까지 주민은 제 얼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싫은 쪽이었다. 친가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제 어미를 닮아 얼굴은 봐줄 만하다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해댔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잘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김현덕 때문에.
주민은 현덕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상냥한 미소를 꾸며 냈다. 현덕이 아예 제 얼굴에 홀려 정신을 못 차렸으면 좋겠다고 바랐건만.
“또 현덕이 괴롭히냐?”
언제나 그렇듯 방해꾼이 등장했다. 현덕의 등 뒤에서 자룡이 불쑥 나타나더니 현덕을 뒤로 빼갔다. 주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양파 머리.”
주민이 더없이 띠꺼운 표정으로 자룡을 보았다.
자룡은 펑크스타일이었다. 특히나 머리가 아주 예술이었다. 녹색 머리에 좀 더 형광색을 끼얹어 닭 볏처럼 꼿꼿이 세웠다. 귀에는 화려한 귀찌를 치렁치렁 달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스모키 화장을 하니,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 형!”
고개를 위로 들어 자룡을 본 현덕이 탄성을 질렀다.
“뭔가 멋있어요!”
“그 뭔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멋있다는 말은 접수하마.”
크하하, 자룡이 크게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서는 바람에 주민은 현덕의 손을 놓쳤다.
“야, 양파 머리.”
주민이 이를 갈았다.
“머리 만져봐도 돼요? 안 망가지게 살짝만 만져볼게요.”
현덕은 손을 뻗어 자룡의 머리를 만져보느라 바빴다. 자룡은 현덕에게 머리를 내주고 주민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싸가지. 너 또 사고 쳤더라?’
주민은 자룡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싸가지 없게 웃을 뿐이었다..
‘저런 놈 뭐가 좋다고.’
자룡은 속으로 혀를 차며 현덕을 바라보았다. 교복 컨셉인지 와이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은 현덕은 평소보다 더 순해 보였다. 안 그래도 까만 생머리를 고대기로 펴선 안경까지 씌워놓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인기 많은 학생회장 같아 보였다.
‘이 순한 강아지 같은 녀석은 왜 자꾸 저런 독한 도베르만 같은 놈한테 다가가는 걸까. 잘못해서 큰 발에 꽉 눌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자룡은 현덕을 뒤에서 껴안은 자세로 자꾸자꾸 뒤로 물러섰다. 자꾸자꾸 다가오는 주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셋은 어정쩡하게 뒤로 걷고 뒤따라 걸으며 1층 로비까지 갔다. 자룡은 필사적으로 뒤로 걸었고, 주민은 네가 어디까지 가나 두고보자며 따라 걸었다. 가운데 낀 현덕은 오랜만에 셋이서 함께인 것이 즐거워 마냥 웃음지었다.
로비에 미리 와 있던 옐로 기숙사의 한승이 두리번거리다가 셋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현덕 형, 여기예요! 여기! 형, 저 여기 있어요!”
그 큰 덩치로 방방 뛰니 로비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옆에 서 있던 유호가 쭈그려 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골 아파, 이 지구를 흔들지 말아줄래?”
“오오, 역시나 늙으면 체력이……윽!”
유호는 옆에서 낄낄대는 정모의 발을 콱 밟아 응징했다.
현덕과 한 팀으로, 컨셉에 맞춰 샌들을 신었던 정모는 발이 밟히자마자 윽!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더니 밟힌 발을 재빨리 확인했다. 특히나 엄지발톱이 멀쩡한 걸 보고는,
“발톱 안 부러졌어, 역시 난 운이 좋아. 오늘 평가도 완전 A 받을 거 같은데?”
좋은 징조라며 활짝 웃었다.
“그 대책 없는 낙천주의는 뭘 먹어야 생기는 거니.”
유호가 쓰린 속을 어쩌지 못하고, 손으로 명치를 꾹꾹 눌렀다.
“음, 젊음? 악!”
정모는 연달아 같은 발을 두 번 밟혔다.
“나는 빨간색을 정말 좋아하는데. 결국 빨간 티셔츠 한 번 못 입어보고 1부가 끝날 거 같아 아쉽네.”
유호는 자룡이 손에 들고 휘휘 돌리는 빨간 티셔츠를 보며 아쉬워했다.
현덕은 자룡과 주민과 헤어져 한승과 유호, 정모가 있는 곳으로 왔다.
로비는 북적북적했다. 스태프들은 촬영 카메라며 조명, 마이크 등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연습생들을 양 몰듯 몰아 자리에 앉혔다.
이전 평가 때와 다름없이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좀 더 날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침 9시.
촬영이 시작될 시간인데도 촬영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옐로 기숙사와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이윽고 두 기숙사 연습생들 몇 명이 촬영 카메라 뒤에 서 있는, 모자 쓴 메인 PD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PD에게 하소연했다. PD는 큰 소리로 잠깐 촬영을 딜레이하겠다고 소리쳤다.
두 기숙사의 웅성거림이 연습생들 전체로 번져나갔다.
“무슨 일이야?”
“뭔 일이래?”
옆에 앉은 오렌지 기숙사 연습생들과 그린 기숙사 연습생들이 옐로 기숙사 연습생들에게 물었다. 현덕도 두어 명의 연습생들에게 질문을 받았으나 답하지 못했다.
쯧, 유호가 혀를 차며 인상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위염이 도져 힘든데, 갑자기 촬영이 늦춰지니 더 신경 쓰여 위가 아팠다.
“이 틈에 잠깐 보건실 다녀오실래요? 저랑 같이 가요.”
현덕이 유호의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유호는 찡그리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약 먹었어. 약을 또 먹는 것보다 사라진 놈들이 나타나는 게 내 위에 더 좋을 거 같아. 이완용 연습생, 마지막까지 꼭 이렇게 이름값을 하지, 아무튼.”
“왜 그래, 형처럼 너무 긴장해서 화장실에서 배를 붙잡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옆에 앉아 있던 정모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혹여 옆의 다른 기숙사 연습생들이 들을까 봐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러게요, 무슨 일이 있나.”
현덕은 고개를 빼고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으나 자꾸 그쪽으로 눈이 갔다.
옐로와 블루 기숙사의 연습생 다섯 명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전 평가 무대 때에도 늦잠을 자거나 아파서 보건실에 갔다는 이유로 빠지는 연습생들이 한두 명씩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섯 명씩이나 되는 연습생들이 아무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연습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특히나 블루 기숙사와 옐로 기숙사 연습생들의 동요가 컸다. 나타나지 않는 연습생들과 같은 팀을 짠 연습생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쯧, 자룡이 혀를 차며 주민을 보았다.
‘혼자서 뭘 얼마나 사고를 쳤기에?’
때마침 주민이 고개를 들어 자룡과 눈이 마주쳤다. 자룡은 주변의 카메라를 의식해 아무 말 없이 턱짓했다. 주민은 아까 복도에서처럼 또 싸가지 없게 웃었다. 그걸 본 자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룡의 옆에는 소혁이 앉아 있었다. 소혁은 이완용 패거리의 실종에 얼굴을 굳혔다.
***
소혁은 조금 전, 복도에서 오렌지 기숙사의 연습생 우주민을 마주쳤다. 주민은 모르는 척 지나치려는 소혁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야, 너.”
소혁은 바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민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내가 형인 걸로 알고 있는데?”
“형 대접을 받고 싶으면 형 노릇을 해야지. 먼저 태어나 밥 몇 그릇 더 먹었다고 연장자 취급받기를 바라나? 고루하네.”
“카메라 앞에서도 지금이랑 똑같이 한번 말해주면 좋겠는데. 어때?”
소혁이 복도 건너편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켰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카메라가 닿지 않은 사각지대였다.
“카메라 없는 곳에서 더러운 수를 먼저 쓴 건 그쪽 아닌가?”
주민이 픽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루머를 날조하는 거야, 우주민 연습생?”
소혁은 빙긋 웃어 보였다.
용호상박.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싸가지와 싸가지의 충돌이었다. 살벌하게 웃는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했다. 오가는 눈빛 사이로 백만 볼트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둘 다 각 기숙사에서 다른 연습생들이 혀를 내두르는 싸가지였다. 블루 기숙사에 이어 오렌지 기숙사에서도 싸가지 없게 빛나는 우주민과 레드 기숙사에서 꿋꿋하게 싸가지 없이 행동하는 원소혁.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조상님들의 지혜를 빛바래게 하는 후손들이었다.
“날 여기서 떨어뜨리는 대가로 데뷔를 약속받았다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소혁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일찌감치 무대 컨셉에 맞춰 스타일링 한 소혁은 평소와 달리 화려했다. 머리는 저렴해 보일 정도로 쨍한 금발로 묾들였다. 그 머리에 젤을 처덕처덕 발라 독 오른 고슴도치처럼 만들었고. 파란 색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징을 박은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그 저렴한 스타일을 맛깔나게 소화하고 있었다.
“아닌 척 발버둥 치는 게 웃겨서 계속 모르는 척해주고 싶은데, 내가 지금 기분이 좀 안 좋아.”
주민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찰칵찰칵, 하는 소리가 나는 투명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주민의 한 손에 가려질 만큼 작았다.
소혁은 색안경 너머로 주민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압정?”
은색 압정이 가득 든 플라스틱 통이었다.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에서건 쉽게 살 수 있는 압정이었다.
“네 앞잡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걔들이 이걸 내 신발에 뿌렸더라고.”
“…….”
태연히 웃고 있던 소혁의 얼굴에 금이 갔다.
‘아무리 지들 멋대로 하랬다고, 정말 저딴 짓을 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웃던 완용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으득, 소혁은 이를 악물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난 그런 유치한 짓은 안 해.”
“계속 그렇게 발뺌해봐. 믿고 안 믿고는 내 자유니까.”
“내가 좀 예민하거든. 남이 만질 수 있는 물건에 함부로 손 안 대. 꼭 확인하고 사용해. 그게 신발이라도 마찬가지, 꼭 한 번씩 털어봐. 누가 뭔 짓을 해놨을지 모르니까.”
“……인생 참 피곤하게 사네.”
“덕분에.”
“난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
“난 믿고 안 믿고는 내 자유라고 말했고.”
“…….”
“내가 받은 만큼은 꼭 되돌려주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뭐, 내 신발에 압정이라도 뿌리겠다고?”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주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나한테만 했어도 그냥 안 넘어갔을 텐데. 이걸 옐로 기숙사 김현덕 연습생 신발에도 넣어 놨더라고.”
이른 아침. 새벽 연습을 마친 주민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오늘 있을 무대 의상을 모아 놓은 의상실로 갔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지 않았다.
제작진들은 의상과 소품이 도난, 분실되거나 망가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로 호텔 한 동을 통째로 사용하며 촬영을 하고 있으니.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쉽게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경계가 느슨했다.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훌륭한 방송 거리가 될 테니.
대부분의 연습생은 촬영진의 그러한 방관을 알았다. 따라서 적정선을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려 악에 받친 연습생에게는 그 적정선이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주민은 의상실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 설치된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촬영진이 밤 12시 소등에 맞춰 끈 게 아니라면, 주민보다 이곳에 먼저 들른 누군가가 끈 게 분명했다.
주민은 의상실로 들어가 제 의상을 찾았다. 이름 택이 달린 의상은 비닐에 씌워져 있었다. 비늘은 쉬이 벗길 수 있었다.
옷을 뒤적여 보았지만 딱히 찢어지거나 망가진 곳은 없었다. 칼로 난도질이라도 돼 있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멀쩡해 놀라웠다.
주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두를 들어 뒤집어 보았다.
후드득.
압정이 떨어졌다.
“고전적이네.”
유치해서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블루 기숙사에 서 따돌림당했던 게 더 수준 있게 느껴졌다.
주민은 떨어진 압정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대로 의상실을 나가려다 돌아섰다. 했다
‘설마.’
주민은 옐로 기숙사 옷더미에서 현덕의 의상을 찾았다. 역시나 옷에는 손댄 흔적은 없었다.
의상 아래 놓인 스니커즈를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주민은 신발 안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따끔, 했다.
“씨발.”
자룡이 금지 먹은 욕설이 주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주민은 스니커즈의 밑창을 끄집어냈다. 누군가 정성을 들여 밑창 아래에 압정을 박아놓았다. 그래서 신발을 뒤집어 흔들어도 압정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주민은 피 나는 손으로 압정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되도록 피가 신발에 묻지 않도록 조심하여 다시 밑창을 신발에 끼워 넣었다. 밑창에 피가 살짝 묻기는 했으나 티나지 않았다.
일어서는 주민의 얼굴은 서슬이 시퍼렜다.
주민은 바로 블루 기숙사의 이지용 연습생과 박제순 연습생을 찾아갔다. 바로 전주까지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던지라 그들이 찾는 건 아주 쉬웠다. 주민은 잠에 취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지용과 제순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복도를 걸었다. 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질질 끌렸다.
숙소에도 복도에도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주민과 주민에게 맥없이 끌려가는 두 연습생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제순이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우는 척 했다. 카메라를 의식한 엄살이었다. 그 바람에 주민이 잠깐, 제순을 놓쳤다. 주민은 복도 카메라에 가운뎃 손가락을 내밀고는 다시 제순을 붙잡아 끌고 갔다.
복도 끝에는 빈방이 하나 있었다. 블루 기숙사에 속한 연습생 중 개인 사정으로 중도 하차한 연습생들이 몇 있어 방 하나가 비어 있었다.
주민은 거기에 두 연습생을 처넣었고 둘의 머리 위로 두꺼운 이불을 덮어씌우고, 그대로 밟았다.
나머지 패거리도 방으로 끌고 왔다. 1대5였지만, 비몽사몽인 다섯은 우주민 한 명을 당해내지 못했다.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나? 너희 데뷔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내 데뷔를 막으려 하는 거야. 그런 대단한 사람이 건드리려는 나는 안 대단할까? 내 말 한마디면 너희 데뷔는 물론 너희 인생도 끝나.”
주민의 목소리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가장 마지막에 끌려온 완용은 몇 대 맞기도 전에 주민의 다리에 매달려 제가 알고 있는 걸 다 토해냈다. 완용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원소혁’이었다.
주민은 제 앞에 선 소혁을 보았다.
소혁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민보다 조금 작은 키에 단정한 얼굴. 이미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였다. 입가엔 주민만큼이나 싸가지 없어 보이는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주민과 소혁, 둘 다 싸가지 없기로는 만렙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급이 비슷한 두 사람의 차이는 한 가지, 제 약점을 상대방이 알고 있느냐의 여부였다.
소혁은 아직 주민의 약점을 몰랐다. 하지만 주민은 소혁의 약점을 알았다.
“스톰 데뷔조에서 나온 이유, 박자룡 때문이던데.”
주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혁의 웃음이 깨졌다.
“무, 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번번이 데뷔조를 깨고 데뷔를 안 하겠다고 튕겼던 이유가 뭔지 말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별다른 말 아냐. 그냥 네가, 굳이 박자룡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려 애쓰는 거, 최근엔 박자룡이랑 같은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다는 거.”
소혁이 속한 대형 기획사에서는 일이 년에 한 번씩 남성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켰다. 소혁은 매번 그 데뷔조에 속했다. 언제나 소혁을 중심에 두고 다른 연습생들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데뷔 직전, 소혁은 매번 데뷔조를 이탈했다.
다른 연습생 같았으면 그 한 번으로 아웃됐을 것이다. 하지만 소혁의 기획사는 번번이 데뷔를 안 하겠다고 뻗대는 소혁을 버리지 못했다.
소혁은 누가 봐도 천상 아이돌, 천상 연예인이었다. 일단 데뷔하기만 하면 바로 탑급이 될 게 분명했다. 때문에 기획사는 소혁을 놓지 못했다. 소혁은 기획사의 미련을 권력처럼 휘둘렀다.
그런데 소혁이 데뷔조에 속했던 아이돌은 유독 자룡이 데뷔조에 들려 노력했던 아이돌 그룹들과 데뷔 시기가 겹쳤다. 소혁은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인 자룡이 데뷔조에 들지 못하면 곧바로 자신의 기획사 데뷔조에서 나왔다.
여기까진 우연치고는 신기하다고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최근, 오 팀장은 데뷔조 최종 선발에서 탈락한 자룡에게 어느 중소 기획사의 데뷔조 합류를 권한 적이 있었다.
그 직후, 스톰의 데뷔조에서 나와 개인 연습생으로 있던 소혁이 그 중소 기획사에 들어가려 물밑으로 접촉했다. 긁기만 하면 당첨 확정인 로또가 굴러 들어오려 하는데, 해당 중소 기획사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기획사는 소혁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며 백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소혁과 그 기획사 간에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 묻혔지만, 소혁은 데뷔조에 반드시 자신과 자룡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자룡도 소혁도 해당 중소 기획사에서 와주기만 하면 그저 감사한 인재였다. 중소 기획사는 당연히 ok했지만 자룡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소혁은 중소 기획사와의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고 트라이 온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개인 연습생 신분으로 3차에 달하는 예선까지 치러가며 트라이 온에 참가했다.
워낙 은밀히 논의되었고 금세 파투 나서 업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주민 역시 최근에야 겨우 보고 받을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주민은 왜 소혁이 결정을 번복해가며 불리한 결정을 해왔는지 알아 보라고 지시를 내렸고 곧 추가로 보고 받았다.
보고 받은 내용은 실소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소혁은 자룡이 중소 기획사의 데뷔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 자신도 데뷔조 합류를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자룡이 트라이 온에 출연한다고 하자 자신도 개인 연습생 자격으로 트라이 온에 합류한 것이었다.
“너, 박자룡 스토커냐?”
주민은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생각했던 말을 툭, 내뱉었다.
“아, 아냐!”
소혁이 다급히 소리쳤다.
잘 익은 토마토가 거기 있었다. 소혁의 얼굴은 당장 빵-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시뻘겠다.
“스토커 같은 게 아니야. 나는, 나는 그냥 그 녀석과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선의의 경쟁?”
주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같은 그룹에 들어가려고 했던 건가? 선의의 경쟁이라는 걸 하려고?”
“그건, 그건……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데뷔할 생각을 안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같은 그룹이 돼서, 끌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소혁이 악다문 잇새로 말했다. 목소리는 자룡에게 저주를 거는 듯 음산했지만 그 내용은 사랑을 고백하듯 절절했다.
‘뭐야, 이 자식.’
주민은 떨떠름했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약점이 박자룡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 거니까.’
주민에게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자룡에 대한 소혁의 마음이 무엇이든, 둘이 어떤 인연이 있든, 그건 알 바 아니었다.
“그 정도 집착하는 거라면-.”
“집착 같은 게 아니라니까! 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싶은 거야, 내 멘토 같은 박자룡 연습생과!”
“그래, 네가 멘토로 삼고 싶은 그 박자룡.”
주민이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박자룡이 자신과 같은 기획사 연습생인 나랑 김현덕을 엄청 아끼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모르진 않아.”
소혁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평가를 준비할 때, 자룡과 몇몇 연습생들이 주민을 돕고 있는 걸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모든 연습생이 단 5일 동안 평가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밤을 새우기를 불사했다. 자연히 주민을 돕는 새벽 연습이 알음알음, 연습생들 사이에 알려졌다. 연습시간 때 설렁설렁 구는 자룡의 태도 때문에라도 알 수 있었다.
자룡은 이번에 평가곡의 메인 파트를 욕심내지 않았다. 미련 없다는 듯 소혁에게 넘기고 자신은 부담이 적은 서브 파트를 맡았다. 자신을 희생해 주민을 돕는 자룡에게 화났으나 친하지 않으니 말릴 수 없었다. 완용에게 자룡은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튼 박자룡, 걔만 안 건드리면 된다는 거지?”
완용은 실실 웃으며 그리 물었다. 주민 말고도 손봐주고 싶은 연습생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자룡만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기에 소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자룡이 아끼는 후배 연습생이었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소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약점을 잡힌 자의 말로였다.
“난 수틀리면 박자룡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네가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무슨 일이 벌어질 뻔한 걸 방관했는지.”
소혁의 약점을 손에 쥔 주민은 거리낌 없이 그를 휘둘렀다.
“내가 뭘 어쩌길 바래.”
소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해서인지, 자룡에게 들킬까 두려워서인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러움 때문에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내가 왜 널 방해하려 했는지 알고 싶은 거라면,”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래.”
트라이 온 출연을 결정했을 때부터, 집안에서 방해 공작이 들어오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문제는 ‘어느 쪽’에서 공격을 하고 ‘다른 쪽’에서 방어를 도와줄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주민이 알아낼 일이지 소혁에게 물어볼 만한 게 아니었다. 소혁은 ‘어느 쪽’에서 보낸 졸에 불과했다.
“더 이상 아무 짓도 벌이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주민은 소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내 성질대로라면 너나 박자룡이나 가만 안 놔뒀어.”
“박자룡은 왜!”
“그래야 네가 힘들 테니까.”
“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 난 그럴 수 있어.”
주민이 소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소혁은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 말대로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수틀리면 내가 박자룡한테 그동안 네가 한 짓을 다 말해버릴 테니까.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면, 네 앞에서 박자룡을 아주 완벽히 짓밟아버릴 테니까.”
“…….”
“알지, 박자룡 정말로 데뷔하고 싶어 하는 거. 그리고 나는 얼마든지 그 데뷔 길을 아예 막아버릴 수 있다는 거.”
주민이 활짝 웃어보였다.
이 세상에 악마가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소혁은 소름 끼쳤다.
***
그게 불과 몇 시간 전 일이었다.
소혁은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지에 비벼 닦았다. 뒤돌아볼 용기는 없었다. 자신의 뒤통수를 보며 웃고 있을지 모를 주민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주변에 묻는 자룡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무서웠다.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의 연습생이 사라졌으니, 촬영 스태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진 연습생들을 찾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숙소를 뒤지던 촬영 스태프들이 연습생 다섯 명을 찾아 왔다. 다섯 명 중 세 명은 부축을 받아 계단을 내려왔다. 옐로 기숙사 완용과 블루 기숙사 제순만이 제 발로 걸어 내려왔다.
다섯 명 모두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엉망이었다. 잠옷 차림이었고, 머리가 산발이었다.
“다섯 명 모두 한 방에 같이 있었는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걸 깨워서 데리고 왔습니다.”
“기숙사도 다른데 같은 방에 있었다고?”
메인 PD는 완용과 제순에게 코를 들이댔다.
“술은 안 먹은 거 같은데, 뭐야. 단체로 약이라도 했어? 뭐 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이런 거야?”
“죄, 죄송합니다.”
완용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제순과 다른 연습생들도 얼른 따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석고대죄가 따로 없었다. 한복만 입고 있었다면 사극을 찍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 제일 앞에서 무릎을 꿇은 완용의 기세가 대단했다. 아예 얼굴을 땅에 박고 죄송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다섯 명은 렉 걸린 컴퓨터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무한 반복했다.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묻던 메인 PD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촬영 시작합니다. 자기 순번 돌아오기 전까지 준비할 수 있으면 무대에 오르는 거고. 아니면 바로 빼고 촬영 진행할 테니까 알아서 준비하고 와요. 얼른!”
그래도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메인 PD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명은 자리에서 일어서 의상실로 달려갔다.
평가 무대는 블루 기숙사에서 시작해 그린, 옐로, 오렌지, 레드 순이었다. 옐로 기숙사는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블루 기숙사 연습생 셋은 아니었다. 그들과 같은팀인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건 분명 누구한테 얻어터지고 협박당해서 입 다물고 있는 모양새야. 으, 위야.”
유호가 제 명치 부분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형, 괜찮으세요?”
현덕이 생수병을 따서 유호에게 건넸다. 유호는 물로 입술만 겨우 축이고는 말았다.
“응, 익숙해서 괜찮아. 이제 평가 때 위가 안 아프면 그게 오히려 이상해.”
“딱 봐도 처 자다 늦은 건데, 얻어맞긴 뭘. 피가 안 나잖아, 피가. 그나저나 형. 여기 주름 자국 생길라. 좀 펴요, 펴.”
정모가 검지로 유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구겨진 종이를 펴듯 문질렀으나 유호의 얼굴은 더 심하게 구겨졌다.
“치워라.”
“주름이 없어져야 치우지.”
“네 얼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름 모양의 상처 자국을 선물해줄까?”
“오, 오늘 형 완전 까칠한 거 보니까 평가 등급 잘 나오겠네.”
정모는 유호의 협박에도 낄낄댈 뿐, 겁먹지 않았다.
“그나저나 왜 쟤들이 처맞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위가 너무 아파서 앞이 안 보여? 쟤들 얼굴 완전 멀쩡해.”
“전문가에게 맞았나 보지. 상처 나게 패는 건 삼류야. 정말 잘 패는 건 상처 안 나는 곳을 패거나, 패도 상처가 안 나게 패는 거고.”
“무슨 무협지에 나올 법한 소리를 하고 그래. 역시 세대 차이는……악!”
유호가 정모의 발을 밟았다. 곧 있을 평가 무대를 생각해 평소만큼 세게 밟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모는 그마저도 아프다고 꽉꽉 거렸다.
“저 오리 주둥이, 내가 언젠가 반드시 꿰매버린다.”
유호는 빠드득 이를 갈며 정모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손정모 연습생 덕분에 형 얼굴에 핏기가 도는 거 같은데.’
곁에서 지켜보는 현덕은 태평했다. 유호와 정모가 사이가 나빠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편했다.
“난 패도 상처 없이 팬다, 그게 일류다.”
정모가 무협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목소리를 깔았다. 굵직한 대사 투의 목소리가 의외로 잘 어울렸다.
“그래, 내가 그 일류의 솜씨를 남김없이 너에게 발휘해주마.”
유호는 두 손가락으로 정모의 코를 잡고는 좌우로 흔들었다.
“으케헤헹, 재, 재성해여어어어엉헝.”
정모는 유호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애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 정도론 그의 마음을 풀 수 없었다.
유호가 정모의 코를 높여주는 시도를 하는 사이, 스태프진은 촬영 재개 준비를 마쳤다.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던 MC 방유진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느슨해졌던 분위기는 다시 팽팽해졌다. 연습생들이 바짝 긴장하여 유진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전의 무대와 다르게 준비 기간이 짧았습니다. 그렇다고 무대의 중요성이 가벼워지지는 않았지요. 오늘의 무대로 2부 진출 여부가 결정됩니다.”
유진이 잠시 말을 멈추고 연습생들을 둘러보았다.
“합격, 혹은 탈락.”
연습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연습생들 중 오직 30명만이 2부 무대에 오를 수 있지요.”
유진은 연습생들의 뼈에 새겨졌을 내용을 말했다.
연습생들 중 누구도 그녀의 말을 지겨워하거나 딴짓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그 30명 안에 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늘 평가 무대에서는 여러분의 선생님들이 여러분의 무대를 보고 매긴 평가 등급이 공개되지 않습니다.”
유진이 연습생들의 마음에 폭탄을 던졌다.
“재밌게 굴리네?”
정모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 위야.”
유호는 쓰린 속을 누르며 괴로워했다.
“형들, 제 귀가 이상해요. 이상한 말이 들려요. 이거 환청이죠?”
한승은 제 귀를 의심했다.
“우와.”
‘프로그램 방영 때까지는 프로그램 참가자한테도 안 알려주는 건가? 우린 이번 주 금요일 날 집에 가서 방송을 보고 본인이 떨어졌는지 붙었는지 알 수 있는 거고?’
현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어차피 무대 보면 대충 각 나오잖아. 자기가 떨어졌는지 붙었는지. 그냥 속 시원히 말해주면 다들 마음 접고 미련이라도 일찍 버릴 텐데, 질질 끌어서 뭐 하겠다는 거야.”
유호가 현덕의 감동을 박살냈다.
현덕은 제일 먼저 유호의 가슴팍을 보았다. 모든 연습생이 그러하듯 마이크가 달려 있었다.
“형! 마이크!”
현덕이 뒤늦게 그 마이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걱정 마, 아까 껐어.”
유호는 저를 걱정해주는 현덕에게 슬쩍 웃어 보였다.
“참고로 아까 너희들 것도 껐다. 괜히 내 목소리가 노이즈로 들어가면 위험할 거 같아서.”
유호의 말에 현덕과 정모, 한승은 허리 뒤춤에 달아 놓은 마이크를 확인했다. 정말 빨간 불이 안 들어와 있었다.
“진짜네?”
“언제 이렇게?”
“완전 몰랐어요!”
분명 아까까진 멀쩡하게 불이 잘 켜져 있었는데. 셋은 한마음 한뜻으로 놀랐다.
“형님만의 독특한 기술이 있지.”
유호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형 소매치기였, 윽!”
“너는 매를 버는 기술이 있고.”
정모는 유호의 본래 직업을 의심하다가 한 번 더 발을 밟혔다.
그 즈음 블루 기숙사의 평가 무대가 시작되자 사라졌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평소 블루 기숙사의 평가 무대 때 다른 기숙사의 연습생들은 산만하게 굴었다. 안무를 연습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 편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모두 평소 레드 기숙사의 평가 무대를 보듯 블루 기숙사의 평가 무대를 보았다.
지각한 완용의패거리 중 블루 기숙사에 속해 있던 연습생들은 결국 무대에 서지 못했다. 뒤늦게 의상을 갈아입고 헐레벌떡 뛰어왔을 때는 이미 그들의 팀이 무대를 마친 뒤였다.
세 연습생의 비명이 그친 뒤 시작된 블루 기숙사의 마지막 팀 무대는 다른 기숙사 연습생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왜 저런 연습생들이 블루에 있었던 거지? 아픈 거 보면 꿈은 아닌 거 같은데.”
정모가 제 볼을 꼬집으며 중얼거렸다.
“뻔하지, 뭐. 일부러 내내 F 평가를 받은 거겠지. 마지막에 뻥 뜨려고.”
유호는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 연습생이네.’
현덕은 무대 위에서 현란한 발재간을 선보이는 연습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클라이맥스. 현덕의 시선을 끌었던 연습생의 머리 위로, 다른 연습생이 점프하여 날아올랐다.
사의준, 그리고 조성환.
현덕은 두 연습생의 이름을 확인했다.
두 연습생은 단연 돋보였다. 레드 기숙사의 평가 무대를 보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 무대 아래 연습생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현덕도 마찬가지였다.
한승은 벌떡 일어서서 물개 박수를 치다 정모에게 한 소리 듣고 다시 주저앉았다.
현덕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한참 박수를 쳐서 얼얼했다. 하지만 이 박수만으로는 제가 느끼는 감동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아쉬움을 쓸어내며, 손을 쥐었다 폈다.
‘대단해.’
블루 기숙사에 이어 각 기숙사의 평가 무대가 순서대로 이어졌다.
무대 위 연습생들은 이전 평가 무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멋있었다. 연습생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악에 받쳐서 무대 위에 섰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감정이 복받쳐 우는 연습생도 있었다. 곡이 끝나자마자 무대 위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작은 실수 하나에 하늘이 무너진 듯 괴로워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금방 티가 났다.
연습생들은 제 꿈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무대 완성도의 높고 낮음은 나중의 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화장이 뭉개질까봐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어 엷은 눈물을 닦아야 했다.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승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많이 울지 마, 눈 부으면 어떡해.”
현덕이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주자 받아서는 있는 힘껏 코를 풀었다.
“크흥! 네에, 형. 근데, 모두 다 감동인걸요. 다들 왜 이렇게 잘하는 거죠?”
많이 울었는데도 화장이 번지진 않았다. 연습생들의 분장에 사용하는 화장품은 모두 PPL로 들어온 광고 상품이었다. 이번에 워터프루프 아이라이너 신상이 나와 홍보해야 한다고 칠해주었는데, 과연 강력했다.
“한승아, 나중에 꼭 화장품 광고 찍어. 워터프루프 제품으로. 그럼 꼭 대박이 날 거야.”
현덕은 한승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여주며 말했다. 한승은 우는 와중에 좋다고 히- 웃었다.
현덕은 한승의 손을 잡고는 분장실로 갔다. 분장이 번지진 않았으나 혹시나 싶어 수정 화장을 부탁했다. 한승은 스타일리스트들에게 한 소리를 듣고야 뚝, 눈물을 그쳤다.
한승을 데리고 돌아오니 딱 무대에 오를 타이밍이었다. 현덕과 유호, 정모, 한승은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는 힘차게 무대에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두 달 동안 세 번, 이 무대에 올랐다. 오늘로 꼭 네 번째였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떨렸다. 쏟아지는 강한 조명에 눈이 부셨다.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니 무대 아래 수십 쌍의 눈이 보였다.
현덕은 오렌지 기숙사 쪽을 바라보았다.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민이 보였다.
그를 보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남들 눈에도 그런지, 아니면 자신의 눈에만 그런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주민이 현덕을 보고 웃었다.
‘눈이 마주친 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아니면 그냥 예의상 힘내라고 웃어준 건지는 모를 일이나, 전자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괜스레 마음이 떨렸다.
그 떨림을 탓하듯, 아니면 응원하듯.
곡이 시작되었다.
현덕의 마지막 평가곡이었다.
***
3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제대로 노래를 했는지, 안무를 틀리진 않았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무대가 끝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싶어 고민해 보려는데.
허억, 허억, 헉.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생각을 방해했다.
겨우 그 숨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형!”
천둥같은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한승의 목소리였다.
“어어, 어?”
얼떨떨해하는 현덕과 멍하니 서 있는 유호를 가운데 두고 한승과 정모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잘했어!”
“대박! 대박이었어요!”
그들의 웃음 소리에 귓가가 얼얼해졌다.
“아…….”
그제야 띄엄띄엄, 무대가 생각났다.
제일 걱정했던 어려운 동작도 무난히 했다. 고음에서도 음 이탈이 없었다. 덩치 큰 한승에게 맞춰 안무 선도 잘 지켰다. 지난번 평가 무대에서처럼 실수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현덕은 무대에서 겨우겨우 내려와 바로 주저앉았다.
“실수 하나도 안 했어. 다 했어.”
현덕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흐를 새도 없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형, 괜찮아요?”
뒤따라 내려오던 한승이 깜짝 놀라 달려들었다.
“야야, 놔둬.”
앞서 걷던 정모가 한승을 붙잡았다.
“하지만 정모 형!”
“맘고생 심했을 거야. 지난번 무대 때 실수 많았잖아. 그러니까 긴장 많이 했겠지. 긴장이 풀려서 그럴 거야.”
“그동안 한 번도 그런 티 안 냈는데…….”
“쪽팔리게 징징거리겠냐. 얘 성격에?”
정모는 한승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
“네가 웬일로 철든 소리를 하냐.”
앞서 걷던 유호가 뒤늦게 등 뒤 소란을 눈치채고 되돌아왔다.
무대에서는 방긋방긋 웃던 사람이 무대에 내려오자마자 다시 죽상이 됐다. 무대 효과로 잠시 까먹었던 위염의 고통이 곱절로 밀려오는 듯 햇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인성하면 바로 나, 손정모인데. 나 정도 되니까 형같이 까칠한 아저씨랑도 놀아주……악!”
철든 소리에는 칭찬을, 마음에 안 드는 말에는 벌을. 유호는 공과 사가 명확했다. 평가 무대도 끝난 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유호는 거리낌 없이 정모의 발을 밟았다. 꽉, 꽉!
“어, 어어, 형님들!”
한승은 현덕을 보랴, 정모와 유호를 보랴. 안절부절 못했다.
아무튼 요란뻑쩍한 팀이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세 사람의 유쾌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현덕은 웃었다. 웃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어? 뭐 하는 거예요.”
“걔 가만 놔둬!”
“아, 위야.”
세 사람이 누군가를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누군가의 손이 현덕의 양팔 겨드랑이로 쑥 들어오더니 현덕을 번쩍 들어 올려, 껴안았다. 마치 아기를 안듯 현덕을 품에 안았다.
‘……누구?’
당황하여 고개를 들려는데, 큰 손이 현덕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나직한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현덕은 그 손에 눌려 다시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들이켜니 익숙한 냄새가 났다. 진한 화장품 향에 묻혀 연했지만.
까만 밤. 호텔 뒤의 인정 없는 정원. 빛이 내리는 가로등 아래에 홀로 서 있던 외로운 사람.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끌어안았을 때 맡았던 그 냄새.
우주민이었다.
주민이라는 걸 알자 긴장이 풀렸다. 현덕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 진짜…….”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저를 꽉 끌어안는 강한 팔, 얼굴에 닿은 넓은 어깨.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큰 손. 귓가에 닿는 웃음이 옅게 섞인 따뜻한 숨소리. 그것들을 놓치는 게 무서워 매달릴 뿐이었다.
주민은 현덕을 안은 채로 걸었다. 무슨 일이냐며 스태프가 다가왔다.
“무대가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 약간 탈수 증세가 났나 봅니다. 밖에서 좀 쉬게 하겠습니다.”
“그래, 너무 심하면 보건실로 데리고 가요. 그나저나 오렌지 기숙사 연습생 아닌가? 곧 무대 시작할 텐데?”
“팀이 제일 끝 번호라 괜찮습니다. 그 전에는 돌아오겠습니다.”
“얼른 와요. 그 안고 있는 친구한테도 수고했다고 전해주고.”
스태프는 별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주민은 현덕을 고쳐 안고는 다시 걸었다.
무대 뒤에는 호텔 뒤쪽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주민은 빠르게 걸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자 로비의 뜨거운 열기와 박수, 함성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주민은 밖에 늘어진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그리고는 제가 걸치고 있던 패딩을 현덕에게 씌워주었다. 현덕은 주민의 다리 위에 앉아 품에 폭 안긴 모양이 되었다.
토닥토닥, 주민이 현덕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어, 수고했어.”
지금 이 순간, 현덕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으…….”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2월의 마지막 주였지만 아직 겨울. 세상은 온통 하얬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하얀 세상. 문 하나 차이일 뿐이지만 이 세상엔 오직 주민과 현덕, 단 둘뿐이었다. 주민의 온기는그 세상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번에는 해냈어. 내가 했어.’
남다른 중압감이나 부담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다른 연습생들만큼의, 꼭 그만큼의 욕심이 있었을 뿐이다.
좀 더 잘하고 싶었다. 좀 더 멋진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함께 팀을 짜 연습하고 노력한 팀 동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고 싶었다. 딱 그만큼의 욕심이었다.
현덕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리 재능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민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매력도, 노래 실력도 없었다.
자룡처럼 끼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랩과 춤을 특출하게 잘하지도 못했다. 노력이라는 이름의 지구력이 약간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주간 평가만 앞두면 며칠씩 회사에서 밤을 새우던 자룡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늘의 무대를 앞두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자고 다짐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누구를 돕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정당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고 주민을 돕는 게 아니었다. 주민을 돕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무대 또한 완벽하게 잘하고 싶었다.
그건 욕심이었다. 알면서도 그 욕심을 욕심냈다.
현덕은 자신이 이렇게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주민을 돕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무대도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었다. 드림팀이라는 이름 아래 자룡과 피터, 준비까지 모였을 때.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무대를 보이고 싶었다. 마지막 평가 무대가 끝난 후, 매일 함께 땀 흘리며 무대를 준비하는 유호와 정모, 한승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남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었어. 잘하고 싶었어. 진짜로 잘하고 싶었어.’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그 마음이 눈물이 되어 하염없이 흘렀다. 그 눈물이 주민의 어깨를 적셨다.
***
“주민, 형……. 무대요, 무대 가야지.”
한참, 혹은 잠깐.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났다. 겨우 진정한 현덕은 주민에게 눈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말을 하는 중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데, 나중에 눈이 아플까 봐 걱정된다.”
주민이 손으로 현덕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흠뻑 젖은 뺨도 닦아주었다. 현덕은 얌전히 그 손길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또 눈물이 떨어졌다. 주민의 손은 금세 현덕의 눈물로 흠뻑 젖었다.
현덕은 주민의 손에 제 뺨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주민의 손은 서늘했다. 눈물에 젖은 뺨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이 순간, 현덕은 모든 걸 주민에게 기대고 있었다. 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느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입가에 무언가 닿는 감촉이 느껴지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저 숨을 멈췄다.
찰나였다. 하지만 영원이었다.
눈물에 젖은 입술에 차갑고 메마른 감촉이 닿았다. 어쩐지 서글퍼져서. 멈추려던 다시 눈물이 흘렀다.
“……주민 형?”
현덕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주민이 있었다.
숨 막히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웃음기 하나 없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은 무섭도록 깊었다.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눈물이 마를 때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현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민의 숨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김현덕, 눈 떠.”
눈으로 덮인 하얀 세상에 새까만 먹으로 소리를 그었다.
현덕은 다시 눈을 떴다.
“왜…….”
입을 열기 무섭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뭐 하는 거야, 이 자식아!”
현덕이 주먹으로 주민의 어깨를 쳤다. 툭툭, 밀어내는 수준이었다. 주민은 현덕을 꽉 끌어안은 채로, 때리는 대로 다 맞아주었다.
“그만 울자. 눈이 녹아버릴지도 몰라.”
그러면서 계속 현덕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현덕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왜?
어째서?
그저 물음표만 머릿속에 한가득 차오를 뿐이었다.
배신감, 혹은 안도감.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김현덕이라는 형체를 가득 채웠다.
주민을 때리는 현덕의 손이 점점 약해졌다. 주민은 현덕의 손을 붙잡았다. 주민의 손은 현덕의 주먹을 감싸 쥐고도 한참 남았다.
주민은 현덕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주먹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웠고, 부끄러웠다.
“하지 마.”
현덕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끝내 빼낼 순 없었다. 주민이 놔주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오늘, 나를 봐줘.”
“…….”
주민의 손은 떨고 있었다.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봐줘야 돼.”
***
현덕은 주민의 손을 잡고 1층 로비로 돌아왔다.
주민은 미아가 되었다가 겨우 부모님을 찾은 아이 같았다. 제가 현덕을 끌고 오는 거면서 현덕의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현덕은 주민에게 이끌려 터덜터덜 걸었다. 멍한 상태였다. 입술에 살짝, 스치듯 닿았던 감촉. 그리고 손등과 손가락 하나하나에 닿았던 그 감촉. 그리고 제 손을 감싸 쥐었던 떨림. 그 감각이 화상처럼 살갗에 새겨져 현덕을 감싸 쥐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무대 근처에 도착하니 스피커에서 강한 비트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야 현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덕은 얼른 주민의 손을 뿌리쳤다.
“…….”
주민이 바로 현덕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미간만 주름져 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뭔데, 왜.’
“무대, 무대 해야죠. 형.”
현덕은 사방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말했다.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지 들리질 않았다. 그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 때문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현덕은 차마 주민을 쳐다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주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메라,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긴장한 채로 대기하고 있는 연습생들. 이게 현덕과 주민이 속해 있는 현실이었다. 그 현실 속에서 주민은 다시 현덕의 손을 잡았다.
“주민 형!”
현덕이 화들짝 놀랐다.
“나 잘하라고 말해줘.”
“일단 이거 놓고요.”
붙잡힌 손을 타고 간질간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주민에게 닿은 손목이 화끈거렸다. 그 열기가 당장이라도 팔을 타고 올라 심장을 화르륵 불태울 것 같았다. 주민에게 들킬 것 같았다.
‘싫어.’
그것만은 싫었다.
들키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쪽팔리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안 들키고 죽는 게 나으리라.
“이거 좀 놔요, 형.”
현덕은 주민의 손을 떼어내려 손을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현덕의 손목을 움켜쥔 주민의 손은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빨리 말해.”
“잘하세요, 잘해요. 됐죠? 이거 놔요!”
현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야 날 보네.”
주민이 웃고 있었다.
“어…….”
현덕은 멍해졌다.
주변은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제작진. 제 파트 안무와 춤을 연습하는 연습생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MC 유진의 목소리까지.
그런데 그렇게 바쁜 세상이 한순간에 멈춰버렸다. 얼음땡 놀이를 시작한 것 같았다. 놀이를 시작하자마자 온 세상이 얼음이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술래는 주민이었다. 현덕은 일찌감치 주민에게 붙잡혀 얼음이 된 상태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김현덕, 나 잘 봐. 알았지?”
주민의 말은 세상을 다시 움직이는 주문이었다. 땡.
“이, 이제 놔요. 놔.”
현덕은 얼른 붙잡힌 손을 흔들었다. 주민은 순순히 놓아주었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괜히 아쉬웠다.
‘아쉬워?’
현덕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
‘미쳤구나, 김현덕.’
현덕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현덕아?”
“무, 무대 잘해요. 볼 테니까.”
현덕은 뒤돌아서 오른발과 오른손, 왼발과 왼손을 같이 내밀며 뛰었다.
등 뒤에서 주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뒷목을 간질였다. 현덕은 그 목소리에 붙잡히지 않으려 더욱 열심히 뛰었다.
다행히도, 아니 아쉽게도, 아니 정말 다행히도 주민은 뒤쫓아 오지 않았다. 헉, 헉. 현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여어, 기운 좀 차리고 왔어?”
정모가 현덕을 불렀다.
“형, 괜찮으세요?”
한승은 얼른 큰 몸을 움츠리며 제 옆에 현덕이 앉을 틈을 만들었다.
유호는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얼굴이 한결 나아 보였다.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리가 현덕의 자리였다. 현덕은 얼른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라리요?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눈도 좀 부은 거 같고?”
정모의 말에 유호와 한승이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얼른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확실히 손바닥에 닿은 뺨이 뜨거웠다.
“형, 괜찮으세요?”
한승이 호들갑을 떨었다.
“응, 나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현덕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았다.
“뭐야, 수상하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정모가 짓궂게 묻자,
“가만히 놔둬. 괴롭히지 말고.”
유호가 정모의 귀를 잡아당겼다.
“으악, 내 귀! 형, 난 형이랑 달리 젊어서 그렇게 잡아당기면 아프, 프프프! 아프! 프프!”
정모의 비명을 들으며 한승이 그 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가, 가만히 있을게요.”
한승은 유호의 눈치를 보며 찍, 찌그러졌다.
유호의 배려 덕택에 현덕은 혼자 부끄러워 할 수 있었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외칠 수 없는 비명이 몸 안에서 메아리쳤다.
첫 키스였다. 아니, 첫 뽀뽀였다.
경험이 없어도 이게 키스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유치원 때 같은 반 여학생들에게 당했던 걸 첫 뽀뽀로 치지 않는다면 분명 이건 첫 뽀뽀였다.
현덕은 연애 경험이 없었다. 열여덟 살 고등학생일 때도, 서른세 살이 되어서까지도.
열여덟 살짜리가 연애해본 경험이 없다고 하면 어른들은 좋아한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 가서 여자 친구를 사귀면 된다며 덕담 아닌 덕담을 해준다.
하지만 서른세 살까지 여자 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면 걱정스러운 표정부터 짓는다. 쯧쯧, 혀 차는 소리는 기본이다. 현덕은 그런 취급을 받는 삶을 살았다.
변명을 하자면, 공부만으로도 벅찼다.
‘애인이 있다면 헤어지지 말고, 애인이 없다면 만들지 말라.’
고시촌에 떠도는 제 1 계명이었다.
현덕은 성실히 따랐다. 간혹 친구나 후배, 선배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소개팅에 나간 적도 있었지만 숙맥처럼 앉아만 있다 왔다.
여성분이 좀 더 만나보자며 전화번호를 건네기도 했지만, 현덕은 자신을 배려해주는 거라고 생각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물론 그 뒤엔 어째서인지 주선자에게 욕을 한 바가지씩 얻어먹었다.
“너 걔가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안 드는데? 여자 쪽에서 먼저 번호를 물어보는데, 핸드폰 번호는 왜 안 가르쳐줘?”
“아, 그분. 정말 상냥하고 좋은 분 같아. 혹시나 내가 우울해하거나 부끄러워할까 봐 마음에도 없는데 애프터를 물어봐 주신 거잖아. 그걸 정말 넙죽 받으면, 여자분께서 부담스러워하실 게 뻔한데, 그걸 어떻게 받아.”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야?”
“내가 눈치가 없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알거든? 오늘 하루 종일 내가 말을 할 때마다 계속 날 쳐다보기만 하던데. 뭘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한참 뒤에야 짧게 대답하고. 약간 멍해 보이기도 하고 졸려 보이기도 하고……. 좀 그랬어. 내가 지루하고 재미없었나 봐.”
나름 낙심했건만. 어째서인지 소개팅 주선자는 방방 뛰며 더 크게 화를 냈다.
그렇게 몇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니 소개팅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소개팅을 제안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더는 소개팅에 응하지 않았다.
현덕이라고 대학 시절, 여자 친구와의 풋풋한 연애를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를 사귀어서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싶었다.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위안 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은 하나둘, 연애하며.
좋아 죽는 꼴을 보니 더더욱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개팅 제안이 와도 거절하지 않았건만, 소개팅 결과는 항상 나빴다.
그리하여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마음만 간직한 채 외로운 대학 생활을 하던 어느날. 같은 학과 내에서 성적 장학금을 다투던 여학우와 썸 비슷한 걸 탔다. 존경할 게 많고 배울 점도 많은 여학우였는데 이름은 수연이었다.
우연히 필수 교양 수업에서 팀플을 하게 됐는데 그녀와 현덕 빼고는 모두 복학생들이라, 조 모임 때마다 연락이 두절됐다. 결국 현덕과 수연 둘이서 조별 발표를 책임졌다. 그 고생 속에서 전우애가 싹터 금방 친해졌다.
조별 발표 이후, 현덕은 용기 내 함께 밥을 먹자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 현덕을 쳐다보고는 승낙했다.
이후 둘은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시험 기간엔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맡아주면 상대방은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샀다.
학기가 끝나고 현덕은 전액 장학금을 탔다. 수연은 아예 성적 장학금을 타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덕은 우울해하는 수연을 위로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사귀자고 말할 뻔했다. 수연은 그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깨고 벌떡 일어섰다.
“역시 안 되겠어. 너랑 같이 있으면 공부가 안돼.”
“……뭐?”
현덕은 충격을 받았다.
“난 우리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독서 취향도 같고, 공부하는 방법도 비슷하고. 그래서 분명히 서로의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바보야! 그런 게 어딨어. 됐어, 앞으로 나 아는 척하지 마.”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현덕을 등졌다. 그 다음 학기부터는 정말로 현덕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현덕이 군대를 다녀오니 수연은 조기 졸업 후 일찌감치 고시촌으로 들어 간 뒤였다. 그 소식도 학과 동기들에게 전해 들었다. 현덕이 졸업 전 막학기를 보낼 때, 수연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녀가 자랑스러운 선배로서 합격 수기를 발표하려고 학교를 찾았을 때 현덕은 동기들과 함께 그녀의 발표를 들으러 갔다.
발표 후 수연은 한턱 쏘겠다며 학과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 호프집으로 향했다. 현덕은 공부를 하러 가려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김현덕.”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현덕을 쫓아온 듯했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왔네.”
“그럼, 노하우를 전수 받아야지.”
현덕은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 너는 일찌감치 합격할 줄 알았어.”
“…….”
수연은 현덕이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현덕의 손이 민망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아직도 내가 싫은 건가?’
현덕은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먼저 말을 걸어서 마음이 풀린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
현덕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다.
그때.
“현덕아!”
수연이 현덕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꽉.
“수연아?”
아프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있지, 현덕아. 김현덕.”
수연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응. 말해.”
“너 혹시 지금, 여자 친구 있어?”
“여자 친구? 아니, 무슨 소리야. 나 이제 곧 졸업이야. 졸업하면 신림동 들어갈 건데, 연애는 무슨.”
현덕은 멋쩍게 웃었다.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합격할 때까지 연애는 물 건너갔지 뭐. 대학 다닐 때도 못 해본 연애를 신림동 들어가서야 하겠어?”
“고시촌에 들어온 사람들 다 공부만 하는 거 아냐. 공부 안 하는 사람들도 꽤 많아. 그 안에서 연애하는 사람도 많고.”
그녀의 목소리는 꽤 진지했다. 현덕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그랬어?”
“아니, 난 그런 거 쳐다도 안 보고 죽어라 공부만 했어.”
“그럼 나도 그래야지. 우리 김수연 선배님 쫓아가려면.”
현덕이 빙긋 웃어 보였다.
“동기지만 먼저 합격했으니까, 법원 가서 만나면 선배님이라고 불러야겠지?”
“…….”
수연이 멍하니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화르르. 정말 ‘화르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연아? 너 감기 기운 있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내 얼굴 빨개?”
“응. 엄청.”
“감기 기운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럼?”
“너 좋아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아아,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거구……. 어?”
합격 수기를 읽을 때 그녀는 빛이 났다. 당당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존경심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수연의 목소리는 안쓰러울 만치 떨렸다.
현덕은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신경 쓰여, 정작 그 목소리에 담긴 말을 뒤늦게 이해했다.
“김현덕. 나 너 좋아했어. 학교 다닐 때 내내, 그리고 지금도.”
현덕은 당황했다.
“그때 너, 내가 불편하다고 그랬잖아. 같이 있으면 공부가 안 된다고!”
그것도 모자라 그다음 학기부터는 투명 인간 취급하며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현덕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데, 둔해서 잘못한 것도 모르고 수연에게 상처를 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번, 수연에게 말을 걸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했다. 그 때마다 수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맹덕에게 상담을 하기도 했었다. 맹덕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혀를 끌끌 찼다.
“니 잘못이네, 무조건 니 잘못이야.”
“내가 뭘 잘못한 건데?”
“그걸 모르는 게 니 잘못이야.”
“그게 뭐야! 모르면 알려줘야 고치지.”
“알려줘도 지금 넌 몰라. 아아, 그 애가 누군지 진짜, 내가 다 미안하다. 아는 사이면 내가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 열 상자 사서 들려주고, 달달한 거 먹고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한 달 월급을 다 털어주고 싶어.”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도 이 비스무리한 면박을 당하지 않았던가 싶었지만, 아무튼. 맹덕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같은 학과 친구들에게 말할 순 없었다. 잘못 소문이 나서 혹시나 수연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현덕은 그렇게 김수연이라는 좋은 친구를 잃어버렸다.
그랬건만.
‘이제 와서 날 좋아한다니고?’
현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랑 있으면 자꾸 설레서, 마음이 떨려서 공부가 하나도 안 됐어. 우리 책상에서 서로 마주보며 공부했잖아. 공부하다 가끔 서로 같이 고개 들고 눈 마주치면, 니가 나한테 웃어줬잖아. 나 그때마다 집중력이 완전히 달아났어. 네가 먹으면서 하라고 커피도 사다 주고, 음료수도 뽑아다 주고, 그럴 때마다 설레서 공부가 하나도 안 됐어. 그거 건네받다 살짝 손가락이라도 마주치면 그날은 하루 종일 책을 한 장도 못 읽었고.”
“어…… 어?”
“계속 그렇게 있다간 이도 저도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공부에 매진한 거야. 일단 합격부터 하려고. 그래서 합격했어.”
“그럼 아까…… 공부의 원동력이라는 게…….”
“합격하면 너한테 고백하려고 했으니까.”
“아…….”
“그래서 김현덕. 넌 나 어때?”
“나?”
현덕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아직 여자 친구 없다며. 그럼 여자 친구로 난 어떠냐고.”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는…….”
현덕은 제 손을 붙잡은 수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연은 손이 작았다. 현덕의 손은 수연의 두 손에 완전히 감싸지지도 않았다. 그 작은 손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진짜, 진심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니,
“미안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현덕은 수연에게서 제 손을 빼내고, 수연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사법시험 준비 들어갈 거야. 언제 합격할지 몰라.”
“내가 괜찮다고 하면? 내가 기다리고, 공부하는 거 도움도 줄 수 있고, 어? 그렇잖아.”
수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면서…… 너랑 사귈 수는 없어.”
“날 좋아하지 않아서구나.”
“…….”
현덕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분명 그녀는 배울 점이 많은 동기였다. 함께 공부하면 편안하고 좋았다. 서로 공부하는 방법이 비슷해 부딪치는 일이 없었고, 공부하는 힘겨움을 알았기에 서로를 배려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연애를 한다면, 캠퍼스 커플이 된다면, 그 대상은 분명 상대방은 그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곧 연수원에 들어간다. 자신은 막학기를 마친 후 사법시험, 그 끝없는 수렁으로 걸어 들어간다.
함께 공부할 수 없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서로를 위로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사귄다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에게 수연이 너무 아까웠다. 이 마음은 ‘배려’였다. 그리고 수연이 말하는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미안해. 내 마음을 강요해서.”
수연이 현덕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수연아. 너 나한테 그러지 않았어.”
현덕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넌 참 끝까지…… 김현덕이구나. 김현덕. 이 잔인한 놈.”
수연은 고개를 들어 현덕을 보고 웃었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입술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까만 정장을 입고, 단발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겼다. 엷게 화장한 얼굴은 빛이 났다. 평소 화장기 없는 얼굴에 추리닝 차림으로 학교를 오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더없이 어여쁜 모습이지만.
지금처럼 심장이 뛰지 않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태어나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현덕은 날뛰는 제 심장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심장과 머리가 제멋대로 놀아났다.
‘난 남자인데, 같은 남자한테 이렇게 떨려도 되는 건가? 난…… 동성애자인 건가? 그럼 우주민은? 우주민은 왜 나한테 뽀뽀를 한 거지? 날 좋아해서? 그럼 우주민은 동성애자인 거고?’
여러 질문이 잔뜩 뒤엉켜, 단 하나의 답도 찾아내지 못했다.
생각나는 거라고는 코끝까지 가까이 와 닿았던 우주민의 숨결. 눈을 떠 자신을 보라고 말했던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입술에 닿았던 또 다른 입술의 감촉. 그런 것들이었다.
‘우와, 우와. 우와.’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해졌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아니라 얼굴이 팡 터져버릴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견딜 수 없을 만치 부끄러웠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서로 할 수 있는 거지?’
이런 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리도 부끄럽고, 이리도 설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자, 다음은 오렌지 기숙사의 마지막 팀입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아주세요.”
MC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은 손에서 얼굴을 떼고 눈만 들어 무대를 보았다. 현덕과 부끄럽고 설레는 걸 한 주민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대 위 주민이 무대 아래 현덕을 보고 있었다.
무대 효과로 관객 대부분이 자신이야말로 무대 위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지만. 지금 이 순간, 현덕은 자신이 느끼는 이 기분이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주민과 피터, 준비. 이 셋이 한 팀이었다. 준비가 중앙에, 주민과 피터가 뒤쪽에 섰다.
안무는 준비와 자룡이 머리를 맞대 뜯어고친 대로였다. 한 동작 한 동작을 떼어내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과 합쳐지고, 세 사람이 딱딱 맞춰 군무로 추자 꽤나 스타일리시했다.
현덕도 완전한 무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눈을 뗄레야 뗄 수 없었다.
주민의 무대는 많은 사람에게 교훈을 줬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없구나. 하지만 한계는 있어.’
주민은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무사히, 평가 무대를 끝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팔다리에 뼈와 관절이 있는 사람이긴 하구나, 보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었을 뿐.
지난주에 비하면 아쉬웠다. 연습시간이 턱없이 모자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쉬웠다.
무대가 끝난 후 피터와 준비, 주민은 모두 거친 숨을 헐떡이며 무대 중앙으로 모였다. 준비는 무대가 만족스러운지 얼굴이 밝았다. 피터와 준비는 숨을 쉬기 바빴다. 셋 모두 굵은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얀 조명 아래 선 주민은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였다. 셔츠를 들어 제 얼굴을 닦고는, 무대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현덕이 있는 쪽이었다.
또각, 또각. 유진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이전 팀들에게 그랬듯 마지막 무대에 오른 소감을 물어보았다. 팀의 리더를 맡은 준비가 먼저 마이크를 받았다.
“이번 무대는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준비한 만큼 보여드린 거 같아서 좋아여.”
“장준비 연습생, 이름답게 정말 잘 준비했군요.”
“그럼요, 이름값을 제대로 했죠. 저는 준비된 연습생 장준비입니다!”
준비가 손으로 브이를 그려 보였다.
“그리고 이번 무대에 같이 오른 두 형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여.”
두 형을 돌아보는 대신 저를 집중해서 찍는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안무를 짜고 고쳤거든여. 레드 기숙사 JD 형한테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여. 두 형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여. 두 형이 솔직히 춤은 잘 못 추는 형인데, 이번엔 짧은 기간 동안 정말 잠도 거의 안 자면서 연습했거든여. 그래서 진짜 고마워여.”
준비가 마이크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피터 형, 주민 형. 고마워!”
트라이 온의 최연소 출연자다운 깜찍함이었다.
유진은 시청자를 대변하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준비를 보았다. 무대 아래에선 야유와 박수가 쏟아졌다. 춤이 좀 어설픈 두 형을 잘 이끈 초등학생 리더를 향한 동료 출연자들의 격려와 칭찬이었다.
“허억, 허억……. 아, 잠시만요. 아직도 숨이…… 좀 벅차네요.”
이어 마이크를 건네받은 피터는 헥헥거리느라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유진이 마이크를 뺏는 시늉을 하니, 그제야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붙였다.
공기 반 소리 반의 음성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니,
“어? 피터 윤 연습생. 누구에게 고맙다는 거죠?”
유진이 묻었다. 피터가 대답하기 전에 준비가 톡 나섰다.
“당연히 저한테겠죠!”
피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마이크를 주민에게로 넘겼다.
주민은 앞서 두 사람이 인터뷰하는 사이 숨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상태였다.
“우주민 연습생, 오늘도 아주 멋있었습니다. 지난번 평가 때 기적의 연습생으로 뽑혔지요. F에서 B로 바로 점핑 업! 오늘은 어떤가요, 지난번 무대에서처럼 좋은 평가를 기대하고 있나요?”
주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제 손에 쥔 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객석을 바라보았다.
“좋은 평가이든, 나쁜 평가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러 연습생이 함께 우주민 연습생을 도왔다고 하는데, 이런 서바이벌 현장에서도 연습생들이 우주민 연습생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는 걸까요? 본인에게 어떤 매력이 있어서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하나요?”
유진의 질문에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은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지를 준비를 했다. 혹시나 주민이 얼토당토않게 인성이니 성격이니,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 야유하리라.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던 것도 아닌데 모두 한마음이었다.
다행히도 주민은 제가 착해서 주변에서 도와주는 거 같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제 어머니께서 도와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도와준 다른 연습생들에게는 정말로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번 평가 무대를 준비하며 어머니가 많이 생각나서…….”
주민이 처연히 웃었다.
무대를 보던 원소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재수 없는 자식, 날 벤치마킹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지금,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주민을 향하고 있었다. 슬픈 사연을 팔기에는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소혁은 첫 촬영에서 안타까운 사연을 풀며 출연 분량을 챙겼다. 그랬기에 자신과 같은 수를 쓰려 밑밥을 까는 주민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싸가지. 설마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거야?”
소혁의 곁에 앉아 있던 자룡은 눈을 껌벅였다. 지금 자룡은 펑키 룩 스타일로 분장한 모습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분위기대로라면, ‘약한 소리를 하는 놈은 필요 없다아아앗!’ 고음으로 저주하며 단번에 주민의 허리를 뒤로 꺾어 롹의 제단에 제물로 바칠 것 같건만. 자룡의 부리부리한 눈은 벌써부터 촉촉해져 있었다.
자룡은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소혁의 시선을 알지 못했다. 소혁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무대 아래 연습생들 중 자룡처럼 안타까워하는 연습생은 몇 없었다. 대부분은 소혁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노렸네, 노렸어.”
“저러려고 일부러 블루 기숙사에 버티고 있었던 건가?”
“참 나, 누군 행복한 유년 시절 보낸 줄 아나.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현덕은 주변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집안 사정이 복잡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 걸까?’
주변의 수군거림처럼 주민이 일부러 제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고 의심하진 않았다. 그저 주민을 걱정할 따름이었다.
주민은 무대 위에서 잔잔히 웃었다. 평소처럼 재수 없어 보이는 웃음이 아니었다. 현덕의 앞에서만 보이는 환한 웃음도 아니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예의상 내보이는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나 보네요. 어머니께서 우주민 연습생의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을 많이 응원해주셨나 보죠?”
유진은 카메라 쪽을 힐끔 봤다. 메인 PD는 무조건 계속 인터뷰를 이어가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아니요,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저한테 무대를 향한 꿈을 물려주셨지요.”
“혹시 어머니도 연예인이셨나요?”
시간상, 무대 후 인터뷰는 짧게 진행되었다. 소감 정도만 묻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주민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고, 주민의 인터뷰 시간은 끝없이 길어졌다.
PD는 이 인터뷰에서 어떤 폭탄선언이 나올 것을 예감하며 주시했다.
“네, 제 어머니는 가수셨습니다. 트라이 온 시청자 분들 중에 혹시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주민이 촬영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제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기에 나왔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해야 했던 제 어머니, 우시영을 위해서요.”
PD의 배팅은 성공했다.
1집 앨범만 내고 갑자기 행방불명 되어버린, 비운의 천재 가수 우시영.
그 우시영의 아들 우주민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선 것이다. 한때 우시영이 섰던 무대에. 우시영을 되찾지 못했던 시청자들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