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누구를 위한 드림팀? (15/36)

2. 누구를 위한 드림팀?

식사 시간 전에 현덕은 슬쩍 자룡을 찾아갔다. 연습실에서 발성 연습을 하며 목을 풀고 있던 자룡은 현덕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매점에서 산 사탕을 던져주었다.

현덕은 커피 맛이 나는 사탕을 먹으며 울적하게 자룡을 바라보았다.

“야야, 그렇게 보지 마. 내가 평가 무대 일정 앞당긴 거 아냐. 난 완전 힘없는 연습생이라고.”

자룡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사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알아요…….”

현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다른 기숙사 연습생들이야 내가 잘 모르겠다만, 현덕이 너는 이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 곡 하나 안무 정도는 삼 일이면 대충 익히잖아.”

“그렇긴 한데…….”

현덕은 말꼬리를 흐렸다.

자룡의 말마따나 마지막 평가가 한 주 앞당겨진 건 현덕에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트라이 온 촬영 이전, TE엔터테인먼트에선 매주 주간 평가를 실시했다. 한 주 동안 평가곡을 하나 준비하는 건 현덕이나 자룡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준비 기간이 2주였던 세 번째 평가 때 주민을 도울 생각도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무대를 준비하며 주민을 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정작 평가 무대에 올라서는 두 곡이 머릿속에서 마구 엉켜 실수 연발이었지만. 그건 수면 부족과 피로로 인한 집중력 저하가 원인이었지 안무 자체는 완벽히 숙지했다.

이렇듯 단지 평가곡 하나를 일주일 안에 익히는 건 현덕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현덕에게는 챙겨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새벽 연습 몇 시간만으로는 결단코 한 곡의 춤을 평범하게 출 수 없는.

미션 내용을 듣는 순간부터 현덕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우주민이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터덜터덜 자룡에게 온 것이었다.

“왜 갑자기 준비 기간을 한 주로 확 줄여버린 건지 모르겠어요. 이건 불공정한 계약이잖아요.”

현덕이 투덜대자, 자룡이 부리부리한 눈을 껌벅였다.

“김현덕, 너 정말로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 맞았구나?”

“형은 알고 있었어요? 미리? 알려준 적 없었는데? 혹시 레드 기숙사만 알려준 거예요?”

“아니,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누가 듣고 오해하면 어쩌려고.”

자룡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리고는 앉아 있던 바퀴 달린 의자를 발로 쭉 밀었다.

자룡을 태운 의자가 단번에 연습실 반대쪽 벽으로 날아갔다. 자룡은 연습실 한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탁상 달력을 획득했다.

현덕은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싱싱 돌아다니는 자룡을 보며 웃었다. 저보다 세 살이나 많은 형이건만 이런 행동을 보면 저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똑 떨어질 듯 촉촉했다. 게다가 주민이 맨날 싹 난 양파 머리라고 놀리는 녹색 머리를 한 얼굴은 꼭 만화 주인공같이 잘생겼다.

약간 양아치 삘이 나는 고등학교 교복만 입힌다면, 청춘 영화에 나올 법한 고독한 늑대 포지션의 남자 주인공 느낌이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보이는 것과 달리 성격은 너무 착해서 문제지만.’

벌써 재작년 일이 되었지만. 현덕은 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봤다. 서럽게 우는 자룡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손을 내밀었고, 그 인연으로 자룡과 현덕은 친한 형 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라니.

현덕은 바퀴 달린 의자를 싱싱 몰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룡을 보고 푸스스 웃었다.

시간은 흐르고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건만. 자룡은 한결같았다. 화낼 일이 있으면 순수하게 화를 냈다. 슬픈 일이 생기면 펑펑 울었다.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다. 춤추고 랩을 할 때면 신나 어쩔 줄 몰라했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귀찮아하기는커녕 이렇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애썼다.

현덕은 그런 자룡이 좋았다.

자룡은 한여름에 소나기를 맞으며 쑥쑥 자라는 푸른 잎의 나무 같았다. 볼 때마다 푸릇푸릇한 생기와 열정이 느껴졌다. 자룡 앞에 서면 자신이 얼마나 밋밋하고 메마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스물한 살도 저랬을까?’

현덕은 무대 위에만 서면 돌변하는 자룡을 볼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분명 나도 내 꿈에 대해선 진지했는데. 정말 법관이 되고 싶었고, 공부도 재미있었어. 열심히,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고. 일 차 시험을 앞두고는 항상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시험공부에만 몰두했고. 그랬던 나도 자룡 형만큼 반짝반짝 빛났을까?’

두꺼운 법전을 커다란 가방에 욱여넣고, 프린트물을 들고 읽으며 도서관이나 독서실로 걸어 들어가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벽 거울에 비친 지금의 자신을 보았다.

몇 시간 동안 춤을 춰도 기절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열여덟 살의 현덕이 거기 서 있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노란색 기숙사 티를 덧입고 있는데,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건강해 보였다. 얼굴이 허여멀갰지만 창백하거나 초췌한 느낌은 아니었다.

현덕은 입꼬리를 들어 웃어 보였다. 거울에 비친 현덕도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졸려? 서서 자고 있니? 왜 졸린 눈을 하고 있어.”

그 두 현덕 사이에 자룡이 불쑥 끼어들었다.

현덕은 하하, 웃어 보였다. 자룡은 그런 현덕에게 탁상 달력을 건네주었다.

“봐봐, 벌써 셋째 주야. 2월 셋째 주. 보이지?”

자룡이 오늘 날짜를 가리켰다.

핸드폰을 제출하고, 외부 소식이 통제된 호텔에서 합숙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날짜 감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현덕은 오늘 날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 확인을 못 하고 있지만 2월 첫 주부터 트라이 온 방영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아마 지금 밖에서는 한창 프로그램 방송 중일 테고.”

“그렇겠죠.”

가끔씩 피터는 현덕에게 여기가 군대보다 더 지독하다고 투덜거렸다.

트윈 트윙클 때 방송 내용 유출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후속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출연자들을 커다란 호텔 건물에 가둬 놓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촬영할 생각을 했을까. 현덕은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출연자 중에는 미성년자도 꽤 있었다. 최연소 참가 연습생인 준비는 무려 초등학생이었다.

제작진은 미성년자 연습생들의 학교와 집에 일일이 연락을 해 동의서까지 받아가며 촬영을 시작했다. 아무리 동의를 받았다고는 하나 누군가 문제 삼으면 분명 논란이 커질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현덕만 해도 준비가 힘들어할 때마다 미성년자의 장기간 합숙 생활을 강제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을 내렸던 판례를 떠올렸다. 이 정도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씩씩하게 구는 준비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데뷔라는 목표 아래, 연습생들은 자신이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걸 자꾸 까먹었다. 당연한 권리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 어른들은 네가 꿈을 이루는 걸 도와주겠다며 달콤한 우산을 펴들고, 그 그늘 아래에서 연습생들을 너무 쉽게 사용했다.

‘준비 기간이 5일이라는 거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냐. 나도 참.’

현덕은 너무 깊어진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와, 자룡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월엔 특별 편성으로 한 회당 두 시간 방영한다고 했거든. 그러면 말이야. 내 생각엔 못해도 우리, 세트장에서 찍었던 기획사 평가 무대를 첫 주 동안 방송할 거야. 그리고 여기에서 합숙하면서 찍은 걸 삼 주 동안 나눠서 방송할 테고. 그러면 우리 마지막 평가 무대까지 촬영해서 마지막 주에 방송할 텐데, 다른 때랑 똑같이 준비 기간을 이 주 줄 수 있겠어?”

자룡이 달력에서 2월 마지막 주 금요일을 가리켰다.

합숙 생활의 평가 무대는 2주에 한 번씩 금요일마다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 외부에선 트라이 온이 매주 금요일 열한 시에 방영되고 있다.

자룡의 말대로, 넷째 주에 네 번째 평가 무대를 촬영한다면, 그 내용을 2월 마지막 주 방송일에 내보낼 수 없게 된다.

“아…….”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3월부터는 무조건 생방급으로 간다고 했죠. 삼사일 정도 촬영하고 금요일에 방송하고 그런다고.”

“그래. 어쨌든 2월 합숙하는 건 무조건 2월 방송 내보내면서 1부를 끝낸다고 했어. 딱 삼십 명만 뽑고, 칠십 명을 아웃시키고. 이날 방송으로.”

자룡이 달력의 마지막 금요일을 손가락으로 톡톡 내리쳤다.

“그러니까 당연히 네 번째 평가 무대는 한 주 정도 당겨질 수밖에 없지. 레드 기숙사 연습생들은 대충 눈치 까고 있던데, 다른 기숙사에선 안 그랬나 봐?”

“우리 기숙사는 다들 미션 내용 보고 놀랐어요. 저도 그랬고.”

“그랬구나. 난 다들 대충 눈치 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룡은 달력을 내려놓고,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느긋한 자세로 앉아 현덕을 보았다.

“그래, 어쩔 거야?”

“뭐가요?”

“이번에도 우주민 도와줄 거야?”

“…….”

자룡은 가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왔다. 상대편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에 가장 강력한 한 방을 치고 빠졌다. 중요한 건 본인은 자신이 그런 크리티컬 히트를 쳤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혼자서 무리하지 말라고. 하려면 같이 하자고.”

“형.”

“입으로만 형, 형, 하지 말고, 정말 날 형이라고 생각하면 제대로 형 대접해라. 김현덕.”

부리부리한 눈으로 현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룡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어쩔 거야?”

자룡이 물었다.

현덕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번엔 돕고 싶어도 못 도와요.”

“정말?”

“진짜예요. 오 일이잖아요. 형 말대로 제 평가곡 하나 익히는 데만 3일이예요. 게다가 저 지금 옐로 기숙사라서 조금만 더 삐끗해서 그린으로 내려가기라도 하면, 탈락하는 거잖아요.”

현덕은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자룡은 현덕의 말을 듣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오 일 안에 주민 형이 춤을…… 연습한다고 될까요, 그게?”

이번엔 현덕이 물었다.

“안타깝지만.”

자룡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엔 진짜 니 생각만 해. 옐로까지는 무사하다고는 하지만, 백 명 중에 삼십 명 뽑는 거야. 지금 레드, 오렌지, 옐로 합치면 오십 명이 넘어. 분명 마지막 평가 때는 기준이 더 빡빡해질 거야. 잘못하면 옐로도 유지 못 할 수 있어. 현덕아, 니 실력이라면 걱정은 없는데. 그건 분명 딴짓 안 하고 니 평가곡 준비만 할 경우에만 그런 거야. 너도 알지?”

“네에.”

“이번엔 무조건 너만 생각해. 혹시나 내 도움 필요하면 꼭 말하고.”

자룡이 신신당부 했다. 현덕은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현덕은 불 켜진 블루 기숙사 공용 연습실 앞에 섰다.

‘자룡 형 미안해요.’

연습실 문고리를 잡으며, 마음속으로나마 자룡에게 사과했다. 자룡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해주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에게 또 한 번 거짓말하는 게 미안했다.

지난번처럼 준비 기간이 2주였다면, 이번에야말로 자룡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주민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준비 기간이 고작 5일뿐인 상황에서, 차마 자룡에게 말할 수 없었다.

세 번째 평가 무대에서 레드 기숙사 평가곡 메인 파트를 가져간 건 자룡이 아니라 소혁이었다. 자룡은 보컬 싸움에서 밀렸다며 꽤나 분해했다. 이번 마지막 무대에서야말로 자신이 무대 중앙에 서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런 자룡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자룡이 말한 것처럼 주민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슬아슬한 거 알아. 지금 이 상황이 나한테 불리한 것도 알고. 하지만 그렇다고 놔버릴 순 없어.’

현덕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남을 돕는다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현덕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어볼 것이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자룡만 하더라도 또 화를 낼 것이다. 이번 일에 한해서만은 자룡의 분노와 걱정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덕은 멈추지 못했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야.’

대학 입시를 앞두고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을 온전히 이 프로그램 출연을 위해 쏟아부었다. 만약 1부에서 살아남는다면, 2부는 학기 중에 촬영을 하게 된다. 그것 또한 각오하고 출연을 결정했다.

현덕은 트라이 온 출연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 충분히 고민했다. 그 결과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자신의 삶을 바꾸어도 기꺼이 감당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했다. 현덕은 촬영에 성실히 임했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주민은 현덕에게 중요했다.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돕고 싶어. 우주민 옆에 서고 싶어.’

주민 옆에는 아무도 없다. 현덕이 늦게 도착해도, 주민은 혼자였다. 아마 이전의 삶에서도 주민은 이렇게 내내 혼자였으리라. 현덕은 그게 싫었다.

현덕은 문득, 이전의 우주민이 궁금해졌다.

과거의 우주민은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 나갔을까. 현덕 말고 다른 연습생의 도움을 받아 안무를 익혔을까, 아니면 혼자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 탈락을 면했을까. 그게 궁금했다.

현덕은 자룡이나 주민이 이 프로그램에서 탈락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덕이 보기에 둘은 천상 아이돌이었다. 연예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분명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현덕은 트라이 온 촬영 후 만들어질 프로젝트 그룹이 ‘홀리포스’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렇다는 건 주민 형이 여기서 우승을 한다는 건데. 그럼 원래도 주민 형과 자룡 형이 한 그룹으로 활동했던 걸까?’

우주민은 홀리포스라는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그게 현덕이 아는 주민의 미래다.

과거, 주민의 그 찬란한 미래에 현덕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현덕은 주민이 삶 언저리에 발목을 푹 담가버렸다. 하지만 현덕은 자신이 주민의 삶에 어떤 변수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주민이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된 건 현덕과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생활하며 현덕과 주민은 여러 번 마주했지만. 그건 일상의 사소한 부딪침이었다. 적어도 현덕이 생각하기엔 그러했다.

현덕이 보기에, 이번 트라이 온 프로그램의 출연 역시 주민이 결정한 것이었다. 현덕이 함께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오히려 현덕에게 프로그램에 참가하라고 권한 건 주민이었다.

‘그러니 주민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인기를 얻는 건,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현덕은 과거에도 주민이 트라이 온에 참가하였을 것이며 지금처럼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잘 되겠지만. 그래도 내가 돕고 싶어.’

과거, 홀로 사법 시험을 준비하며 괴로워하던 자신에게 우주민의 인터뷰가 큰 도움이 되었듯이.

현덕은 마음을 다잡고, 연습실 문을 활짝 열었다.

“현덕아.”

주민이 벽에 기대앉아 있다가 현덕을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며 주춤거렸던 현덕을 탓하듯이, 주민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형, 일찍 왔네요.”

현덕은 연습실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인사했다. 그런 현덕의 등 뒤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이, 김현덕이?”

“……!”

현덕이 돌처럼 굳었다.

잠시 뒤, 현덕은 로봇춤을 추듯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룡 형?”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존재의 이름을 감히 불러 보았다. 절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건만. 그는 두 걸음 뒤에 팔짱을 끼고 서서 아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현덕을 보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졸리고 피곤한지, 아니면 또 자신을 속이려 한 현덕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건지. 자룡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나도 이럴 줄 알았어여.”

자룡의 등 뒤에서 조그만 머리통이 불쑥 나타났다. 자다 일어났는지, 보슬보슬한 곱슬머리 한쪽이 눌려 있었다.

“준비야?”

졸린 눈을 한 준비가 비틀거리자 어둠 속에서 두 손이 불쑥 튀어나와 준비의 등을 받쳐주었다.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터 형까지?”

현덕은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기계처럼 세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세 사람은 현덕을 지나쳐 연습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주민은 현덕만큼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자신의 근처로 다가와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룡이 제 옆으로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려 하자, 그 손을 쳐내며 비로소 얼굴을 구겼다.

“뭐 하는 짓이야, 양파 머리.”

“아까 낮에도 한 번 들었지만. 뭐, 아무튼. 오랜만이네. 이 싸가지 없는 목소리도 듣다 안 들으니까 그리워지더라고.”

자룡이 소리 내 웃으며 얼얼한 손등을 흔들었다.

“맨날 이렇게 우리 현덕 형 불러내서 잠 못 자게 한 거예여? 형 때문에 현덕 형이 C를 받은 거였군여.”

준비는 삐딱하게 서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터는 준비의 옆에 서서 사람 좋게 허허, 웃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꼴찌로 들어온 현덕이 연습실 문을 닫고는 안의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렇게 넷이 팀을 짰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팀명은 김현덕을 지켜라 드림팀.”

피터가 손가락으로 자룡, 준비, 주민,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은 이내 현덕을 향했다.

“어쩌겠냐, 니가 반드시 이 싸가지를 도와줘야겠다는데.”

자룡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현덕 형!”

준비가 현덕에게 달려 들었다. 현덕은 얼결에 준비를 안아 들고, 그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보고 싶었어여. 자드 형한테는 놀러도 갔다면서 어떻게 나한테는 안 놀러 올 수 있어여? 진짜 너무한 거 아녜여?”

준비의 목소리에서는 아직 잠기운이 더덕더덕 묻어났다. 졸린 걸 꾹 참고 버틴 티가 역력했다. 현덕은 괜히 속상해서 준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주었다.

주민은 어느새 일어서, 벽에 등을 기댄 채 현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민은 준비와 피터까지 나타나도 여전히 태연했다.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럼 주민 형도 알고 있었다는 건데. ……언제? 아니, 어떻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이란 걸 해보려 노력하는데, 머리가 안 굴러갔다.

새벽 두 시.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현덕의 이해를 훌쩍 넘어선,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였다.

주민만 있어야 하는 연습실에 자룡이 오다니? 그것도 모자라 피터와 준비까지?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현덕은 한 손으로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으…….”

아팠다.

그런 현덕을 보며 자룡이 와하하, 웃었다.

“쟤 봐라, 저러는 것 좀 봐.”

“너무 놀리지 마세요. 현덕이가 부끄러워하면 어떡합니까.”

자룡과 피터가 말을 주고받는 새 주민은 현덕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주민 형?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현덕이 주민에게 물었다.

주민은 대답하는 대신 현덕에게 덥석 안겨 있는 준비의 뒷덜미를 잡아들었다.

“으악! 뭐 하는 거야! 안 내려놔?”

준비가 허공에 들려 팔다리를 버둥댔다. 주민은 쯧, 혀를 차고는 준비를 쓰레기봉투 버리듯 피터에게 내던졌다.

“나이스 샷!”

피터는 준비를 덥석 받아냈다.

“뭐야, 내가 골프공이예여? 이거 놔여!”

준비는 피터에게 붙들려 버둥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주민의 눈은 준비를 안고 있던 현덕의 손에 꽂혔다.

“……주민 형? 내 말 들려요?”

현덕은 주민의 시선을 받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주민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흔들었다.

자룡과 피터는 실실 웃기만 했다. 자신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믿었던 준비마저도 애교를 부리며 얼버무리려 할 뿐이었다. 그래서 주민에게 기대를 걸었건만, 주민도 역시나 말해줄 기색이 아니었다.

주민은 제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현덕의 손을 붙잡아 물에 솜사탕을 씻는 너구리처럼 살살 문질렀다. 어벙하게 서 있던 현덕은 손바닥과 손등을 살살 간질이는 손길에 웃음을 터트렸다.

“간지러워요.”

현덕이 킥킥대자 주민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더러운 거 만지지 말자. 현덕아.”

“내가 더럽다구? 나 아까 샤워했다구여!”

용케 그 소리를 들은 준비가 항의했지만 역시나 주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현덕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주변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불이 환하게 켜진 커다란 연습실 안에 현덕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민과 자룡, 거기에 피터와 준비까지. 서로 싸우거나 화내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주민마저 현덕의 손을 조물거리고 있을 뿐. 난데없는 불청객들의 방문에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주민 형 드림팀도 아니고 제 드림팀이 모인 이유가 뭔가요?”

현덕이 다시 물었다. 아까보단 한결 밝은 목소리였다.

“넵,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요.”

그제야 피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어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너와 여기 우주민 연습생이 식당 밖으로 나가는 걸 봤습니다요. 매우 심상치 않은 느낌이 파박, 들었습지요.”

피터가 사극에 나오는 사람처럼 구성지게 말했다.

‘만약 이 장면이 TV로 나간다면 나중에 어느 방송국에서든 사극을 찍을 때 피터 형한테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지 않을까?’

주민과 함께 새벽 연습을 하는 내내, 밤 12시 이후엔 촬영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했건만. 새삼 그게 약간 아쉬웠다. 피터가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프로그램 제작진과 시청자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진로를 대신 고민해주는 현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터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밥을 먹고 로비로 나갔는데, 이번엔 우주민 연습생이랑 박자룡 연습생이 함께 어디로 가는 걸 또 보고야 말았으니. 이 뛰어난 머리로 추리를 시작하고야 말았지. 왜냐면 나는 훌륭한 셜로키언이니까. 셜록 홈즈의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이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우리 귀여운 준비를 데리고 저 두 연습생이랑 조인을 하게 된 거지. 그렇죠?”

피터가 묻자 자룡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겠지?”

피터가 현덕을 바라보았다.

“아뇨, 전혀요.”

현덕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피터의 미래 진로를 고민한 것이 후회되었다.

“우리 아버지랑 형이 챙겨보는 주말 드라마에서도 이런 전개는 안 나와요. 형.”

“김맹덕 상병이 주말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제 말의 중점은 앞부분이 아니라 뒷부분인데요.”

피터가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시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현덕은 넘어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어지는 피터의 말에 반응을 안 할 수 없었다.

“아니, 김맹덕 상병은 항상 아이돌 나오는 프로그램만 봤는데?”

“네? 그럴 리 없어요. 우리 형은 아이돌에 별로 관심 없는데. 옛날에 핑크키위 선배님들을 좋아했던 걸 빼면?”

대화의 주제는 단번에 ‘지금 군대에 있는 김맹덕 상병은 아이돌을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로 바뀌었다.

주요 패널은 김맹덕 상병과 최근까지 함께 군 생활을 했던 피터 윤 연습생과 김맹덕 상병의 하나뿐인 동생 김현덕 연습생이었다.

관객은 주민과 준비, 자룡이었다. 셋은 맹덕이란 사람이 현덕의 형이라는 걸 대충 감 잡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어라? 아닌데? 엄-청 관심 많던데? 남자 아이돌, 여자 아이돌 가리지 않고. 아이돌 나오는 프로그램은 죄다 찾아보면서 완전 공부하듯이 탐구하던데?”

피터는 자신이 직접 본 맹덕에 대한 경험담을 풀어 놓았다.

“아니요. 우리 맹덕 형이 그렇게 파는 건 오로지 만화뿐이에요. 우리 형이 아이돌을 좋아할 리 없어요.”

현덕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러니까 맹덕이 군대가기 전까지. 현덕은 맹덕과 한 집에서 나고 자란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현덕은 자신이 누구보다 맹덕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다.

“우리 형은 현실의 여성한테 관심이 없는걸요. 예전에 핑크키위 선배님들을 좋아했던 것도 좋아하는 만화책이 애니메이션이 됐는데, 그 애니메이션 오프닝 노래를 핑크키위 선배님들이 불러서 그랬던 거였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맹덕은 모태 솔로였다. 몰래 사귀지 말고,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만이라도 한번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어머니가 물어봐도 맹덕은 단호했다.

“난 만화랑 결혼했어요.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요.”

그리고는 현덕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난 3D에 관심이 없어.”

현덕은 그 말을 들을 때는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제 같은 걸까? 형은 만화에 인생을 다 걸고, 독신으로 살겠다는 걸까?’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덕은 우연히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거기에 출연한 한 남자의 삶이 현덕의 눈길을 끌었다.

캐릭터 굿즈로 가득 찬 집에서 사는 남자는 커다란 캐릭터 베개 인형을 끌어안고는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했다. 남자는 자신이 그 베개와 결혼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현덕은 자신의 형, 맹덕을 떠올렸다.

‘아, 형이 말했던 게 이런 의미구나.’

형의 방에는 주로 모형 자동차와 건담 같은 프라모델, 그리고 레고가 많았다. TV에서 나온 것 같은 길쭉한 베개나 피규어는 없었다.

‘형은 건담이나 레고에게 사랑을 느끼는 거구나.’

그동안 왜 맹덕이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날, 현덕은 바로 맹덕에게 말했다.

“형, 학교에서 사회 시간에 배웠는데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대. 다양성을 존중받아야 마땅하대.”

“갑자기 뭔 소리? 난 수능 보고 나선 중고등학교 때 배운 걸 다 까먹었어. 기억하는 건 하와유, 아임 파인 땡큐, 앤유 뿐이거든. 나한테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는 말하지 마.”

맹덕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현덕은 굴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형, 맹덕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형이 물건을 인간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형을 싫어하지 않을 거야. 형은 내 형이니까.”

“……뭐?”

“그러니까 형, 힘내. 우리나라에선 아직 그런 걸 잘 못 봤지만 일본이나 해외에서는 많은가 봐.”

“뭐, 뭐가?”

맹덕이 기겁하며 묻자 현덕이 그 말간 눈을 들어 맹덕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베개나 로봇이랑 결혼하는 거.”

“…….”

“형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랑 결혼하고 싶은 거잖아. 난 무조건 형 편이야. 형이 좋으면 나도 좋아. 형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아, 부모님께는 형이 말할 때까지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을 거야.”

“아, 미친. 김현덕. 야, 이 또라…….”

맹덕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머리부터 떨어져 바닥에 부딪혀 퍽- 소리가 났다.

“형? 괜찮아?”

깜짝 놀란 현덕이 맹덕에게 다가갔다.

“괜찮, 괜찮아, 괜, 괜찮아.”

맹덕은 머리를 싸매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어서 맹덕은 날개를 잃은 풍뎅이처럼 거실을 등으로 쓸고 다니며 빙빙 돌았다. 그러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너무 웃어 숨을 제때 들이쉬지 못해 컥컥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등이 아픈지 다시 소파로 기어 올라가려다 굴러떨어져 또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댔다.

맹덕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보다 못한 현덕이 119에 전화해서 우리 형 좀 살려달라고 구조 요청을 해야 하나 고민할 때까지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걸.’

미친 듯 웃는 맹덕을 보는 현덕이 두 눈은 살포시 촉촉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현덕은 그 베개와 결혼했다는 일본 남자가 나왔던 TV 교양 프로그램 시리즈의 다음 편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그 TV 시리즈는 5부작이었는데, 2부가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 대한 것이었고 3부가 미국의 동성애 커뮤니티에 관한 것이었다.

3부에서 나온 미국 남자는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그걸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백할 때까지 고통스러웠다고 인터뷰했다. 문득 그 미국 남자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끙끙대고 고민했을까.’

맹덕도 그 미국 남자와 비슷한 고통을 혼자서 껴안고 있었던 걸까. 언제나 자신에겐 큰 산과 같았던 형인데. 사실 마음속에 이토록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있었다니.

현덕은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맹덕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좋아?”

겨우 웃음을 그치려 하는 맹덕에게 현덕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뭐, 뭐가?”

맹덕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내가 형을 믿는 게.”

“아…….”

맹덕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또 감동한 걸까. 현덕도 괜히 찡해져서, 맹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 위에 두 손을 꼭 주먹 쥐어 올렸다.

“형, 나는 앞으로 절대 편견 같은 거 가지지 않을게. 나는 형이 남자를 좋아하든 로봇을 좋아하든……. 나중에 베개랑 결혼을 하겠다고 해도, 무조건 형을 응원할 거야. 형이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미리 말했을 텐데.”

“으하하하!”

맹덕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기까지 했다.

“형, 울지 마. 뭐 이런 거 가지고 울어. 내가 그런 걸로 형을 이상하게 생각할 리 없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다 이해해줄 수 있어.”

현덕은 얼른 맹덕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어흐흑. 맹덕은 아예 흐느끼며 웃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었다.

현덕은 맹덕과 마음 대 마음으로 소통했던 과거의 어떤 날을 회상했다. 입가에 절로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날을 기억하는 한, 현덕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우리 형은 절대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말은 꿀꺽, 삼켰다.

‘우리 형은 아마 건담이나 레고랑 결혼할 거예요.’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맹덕이 꿈꾸는 사랑 또한 법적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오리라. 현덕은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피터는 그런 현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이상하다. 분명…….”

군대에 가면 아이돌의 ‘아’자도 모르는 사람도 한국의 모든 여자 아이돌의 이름을 줄줄 외게 된다. 사내들만 득실득실한 단체 생활 속에서 가장 행복한 일과는 휴일에 내무반에 편히 누워, TV에 나오는 아이돌 무대를 보는 것이다.

피터가 군대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개중 맹덕은 약간 다른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 맹덕은 공부하는 사람처럼 아이돌을 대했다. 아이돌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챙겨 보고, 남녀 아이돌을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그저 군대에 왔기 때문에 여자 아이돌을 보는 걸 삶의 낙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그 동생인 현덕은 자기 형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잡아떼니, 맹덕과 함께 일 년 남짓 군 생활을 했던 피터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황당함과는 별개로 맹덕을 소재로 삼아 원하던 목적을 달성한 것에는 만족했다.

결국 피터는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어째서 자신과 준비가 여기에 온 거냐는 질문을 얼렁뚱땅 두루뭉술하게 넘길 수 있었으니까.

“자자, 현덕이 형님에 대한 백분 토론은 딱 거기까지만 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보다 못한 자룡이 중재에 나서며 벽시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귀한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평가까지 남은 기간은 단 5일뿐. 일분일초가 급하고 귀했다.

“그럼 우리 현덕이 드림팀 활동 슬슬 시작해볼까? 다들 불만 없죠?”

자룡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리드했다.

“저기, 아까부터 왜 계속 주민 형 드림팀이 아니고 제 드림팀이라고 하는 거예요?”

현덕이 슬그머니 손을 들며 물어보았다.

“여기서 제일 평가 낮은 게 누구지?”

자룡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어…….”

현덕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우주민, B

박자룡, A

장준비, B

피터 윤, B

그리고 김현덕, C.

“……저요?”

“그래, 거기 C 평가 연습생. 알았으니까 됐지? 여기서 제일 위험한 게 너야. 물론 더 급한 건 저 싸가지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C 평가를 받은 김현덕 연습생이 D나 F로 떨어지지 않도록 함께 우주민을 케어해야 하는, 김현덕을 위한 드림팀이지.”

자룡이 씩, 웃으며 말했다.

***

피터가 현덕에게 얼버무렸던 어제의 사연은 이러했다.

피터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호텔 1층의 구석진 곳으로 슬슬 걸어갔다. 촬영 스태프용 화장실이 있는 복도는 촬영 스태프들마저도 안 오는 한적한 곳이었다. 촬영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은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피터는 화장실 입구를 지나 두 발자국 거리에 놓인 철제 소화전 뒤 빈틈으로 쑥 들어갔다. 잘 비집고 들어가면 피터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앉으면 몸이 소화전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합숙 촬영이 시작된 이래 이곳은 피터의 아지트가 되었다. 피터는 자유시간이 생기면 종종 이곳으로 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 다이어리를 쓰기도 했고, 전혀 예상치 않은 도청을 즐기기도 했다.

이곳이 촬영 사각지대라는 건 피터가 가장 먼저 눈치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른 연습생들에게도 알음알음 알려졌다. 물론 소화전 뒤 공간은 피터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연습생들은 말싸움할 일이 있거나 무언가 수상쩍은 모의를 할 때면 이곳을 찾아오곤 하였다.

때때로 철제 소화전 뒤에 사람이 있어 자신들의 대화나 다툼을 고스란히 듣는다는 걸 모른 채.

대개의 대화는 시답잖았다. 그런 것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고 흘려보냈다. 도움이 되겠다 싶은 것은 잘 듣고 다이어리에 기록해두었다.

그런데 어제는 이상하게도 피터가 아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첫 타자는 현덕이었다.

“주민 형, 우리 오늘부터 다시 연습해요.”

귀에 닿는 차분한 미성에 피터는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이런 음습한 곳에 찾아오다니.

‘김맹덕 상병의 동생이 아니더라도 이딴 프로그램에 나오기엔 참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속은 모를 일인가?’

미리 실망을 하고 나선 둘의 대화를 흘려들었다.

“평가곡은 뭐로 정했어요? 같은 팀을 하기로 한 연습생들은 누구누구예요?”

“이번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네.”

“주민 형, 장난치지 마요. 이번엔 오 일밖에 안 남았다고요. 급해요!”

언뜻 들으면 남의 기숙사 평가 무대의 정보를 캐내려는 김현덕 연습생과 그 연습생에게 붙잡혀 협박당하는 우주민 연습생의 대화로 들렸다.

“됐어, 현덕아. 이번엔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요? 어떻게요? 이번 무대에선 춤 안 춘대요? 아니죠?”

“그건 아니지.”

“그런데 뭘 어떻게 알아서 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네 걱정이나 해. 이번에 평가 내려갔잖아. 그거 나 도와줘서 그런 거 아냐?”

“아니에요. 제가 실수한 거예요.”

“그동안 안 한 실수를 이번에 했지. 날 도와줬던 때에.”

“주민 형.”

“안 해. 새벽에 연습실 나오지도 마. 나도 안 나갈 테니까.”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들을수록, 내용이 묘했다.

피터는 왜 그동안 현덕이 갑자기 피곤해하고 저녁 연습을 하지 않고 숙소로 올라갔으며, 새벽에 몰래 일어나 사라져서는 연습실에서 웅크려 자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우주민 연습생이라고 했나? 같은 기획사라더니, 저 연습생을 도와주려고 한 건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다이어리로 눈이 갔다. 피터는 다이어리에다 매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했다. 촬영하며 겪었던 불쾌한 일이나 제작진의 행태도 기록했지만, 연습생들 간의 다툼이나 불화도 보고 들은 대로 정리해두었다.

같은 꿈을 꾸는 백여 명의 청춘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그들 중 일부만이 다음 스테이지에 오를 수 있고, 또 그들 중 일부만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할 수 있었다.

그 경쟁 속에서 소고기 등급을 매기듯 ‘너는 A, 너는 B.’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정작 촬영 카메라에 비치는 건 그 등급과는 별개다. 남들보다 튀고 독특해야 카메라에 한 번 더 비칠 수 있다.

그런 경쟁 상황이 사람을 어떻게 미치게 만드는지는, 그 공간 안에 있어봐야 알 수 있다.

데뷔가 간절한 소년과 청년들은 충분히 비참해질 수도 비겁해질 수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촬영을 시작한 지 이제 두 달째임에도 피터는 그런 몰골을 충분히 보고 들었다.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이곳은 추적 60분에나 나올 법한 모의가 일어나는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귓가에 들리는 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인간극장이었다.

“오늘부터 새벽 두 시에 봐요.”

“싫어.”

현덕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편, 우주민의 목소리는 꽤 단호했다.

“형!”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가자. 현덕아, 이런 외진 곳에 함부로 오는 거 아냐.”

하지만 그 단호함은 거절의 단어를 뱉을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현덕에게 말하는 모든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저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나?’

피터는 조금 의아했다.

시각이 차단되고 청각에만 의지하니, 눈으로 보며 들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언제나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무표정하고 말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목소리만 들으니, 그렇지 않았다. 대화 상대가 김현덕이어서 달라진 걸까?

“형, 형! 얘기 좀만 더 해요.”

“더 할 얘기 없어. 너 얼른 가서 연습이나 해. 나도 가서 춤 연습할 거야.”

두 사람의 말소리와 목소리가 멀어졌다.

“어쩔까나?”

빈 허공에 대고 중얼거려보았다.

딱히 답을 바라지 않았건만. 그의 질문에 답하듯 또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두 명이었다.

“야, 싸가지. 다짜고짜 여기로 끌고 오는 건 뭐야? 헉, 설마 나 패려고? 야야, 나 때리지 마라. 일단 말로 해. 저번에 너 날아다니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양파 머리. 그 입, 안 아파?”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우주민이 김현덕을 보내고 다른 연습생을 끌고 온 것 같았다.

슬쩍 내다보니 쨍한 녹색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레드 기숙사의 투 탑 중 한 명인 박자룡.

“씨……앗. 너만 보면 내 입이 농사를 짓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내가 래펀데 이 정도 말한다고 입이 아프겠냐?”

“됐고.”

“됐긴, 우주민. 내가 한 살 더 형인 거 잊지 마라.”

같은 기획사여서 그런지 꽤 친해 보였다. 현덕과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지만.

“김현덕이 이번에도 날 도와주겠다네.”

주민은 다짜고짜 자룡에게 말했다.

“뭐? 걔가 또?”

자룡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야, 너 설마 넙죽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양파 머리, 난 너와 달리 머릿속에 뇌라는 게 있거든.”

“있는 놈이 현덕이를 C 받게 하냐? 걘 너만 아니었으면 이번에 A도 받을 수 있었어. 씨앗, 씨앗! 아, 존나 씨앗 같아. 넌 지금 입이 열 개 달려 있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찌그러져 있어야 해. 알아?”

“시끄러워. 그러니까 널 여기로 데리고 온 거잖아. 양파 머리.”

주민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싸가지 없게 말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했다.

자룡의 주장대로라면 그의 나이가 더 많고 연습생 생활도 길었던 것 같은데. 까마득한 연습생 선배를 대하는 주민의 태도는 영 불량했다. 그런데 자룡은 투덜대면서도 그런 주민을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난 분명히 거절했는데 현덕이가 말을 안 들어.”

“걔가 좀 고집이 있긴 하지.”

“멋대로 현덕이를 잘 아는 척 말하지 말아줬음 좋겠는데.”

“어쭈? 이제는 아주 대놓고 지랄이다. 내가 현덕이랑 친하니까 기분 나쁘냐? 나도 네가 현덕이한테 치근댈 때 그런 마음이었어. 현덕이가 둔하고 순진해서, 뭘 몰라서 그냥 모르고 넘어간 거지. 솔직히 너 그동안 좀 스토커 같고 변태 같았거든? ……잠깐! 야!”

약간 거친 소리가 들렸다. 짐작하기로는 자룡이 주민의 멱살이라도 움켜쥐려 시도하다 실패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현덕이, 현덕이, 하고 부르는 거야? 너 원래 꼬박꼬박 김현덕 연습생이라고 했잖아.”

“양파 따위가 모르는 역사가 있었지.”

뻐기는 듯한 주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들렸다.

“너 자꾸 양파양파 할래? 꼬박꼬박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됐고. 아무튼 양파 머리, 현덕이 좀 막아.”

“막긴 뭘 막아! 니가 싫다고 해야지!”

자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내가 걔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그럼 난? 나는 현덕이한테 싫은 소리 하는 게 쉬운 줄 아냐?”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하고. 아무튼 나 못 도와주도록 막아.”

제삼자가 듣기에도 주민이 억지를 부리는 거로 느껴졌다. 그러니 당하는 당사자는 오죽하랴. 자룡이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댔다.

“일단 말려보고. 안 되면…… 나도 간다.”

“뭐? 양파 머리, 오긴 어딜 와? 오지 마.”

“입 닥쳐. 지금 너에게 선택권 따윈 없다.”

자룡은 단호했다.

“여차하면, 씨앗, 내가 B 정도 받고 니가 C 정도 받아서 살아남으면 되겠지. 현덕이는 B를 받든 C를 받든 아무튼 유지시키고. 너도 너 때문에 현덕이 떨어지는 거 싫어서 나한테 이러는 거 아냐?”

“…….”

“아무튼 만약에 이번에도 현덕이가 또 널 돕는다고 나서면, 나도 무조건 합류한다. 난 현덕이 때문에 여기 나온 거야. 그러니까 너 때문에 현덕이 떨어지는 건 죽어도 못 봐. 우주민,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 한 번만 더 현덕이한테 민폐 부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나도 김현덕 때문에 여기 나온 거니까.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 각오 잊지 마라. 떨어져야 하면 너나 떨어져. 애먼 현덕이 발목 잡고 늘어지지 말고.”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다, 양파 머리.”

“씨앗, 넌 왜 자꾸 나보고 양파 머리라고 그러는 거야? 내 머리 완전 최신 헤어스타일이거든?”

“……거울은 보고 사냐?”

“야!”

둘의 투덕거림이 정겹게 이어지며 소리가 멀어졌다.

근래 엿들었던 대화 중 가장 재미있었다.

길게 대화를 나누어본 적은 없지만, 묘하게 자룡과 주민에게 정이 갔다. ‘김현덕’이란 공통분모가 있어서 그런 걸까.

‘이제 슬슬 나갈까?’

긴 몸을 오래 구기고 있으니 몸이 뻐근해졌다. 눈물겨운 우정의 대화 릴레이가 감명 깊어서 몸의 고통 따윈 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소설이 아니었다.

벽을 잡고 몸을 일으켜 철제함 밖으로 나가려는데, 또 발소리가 들렸다.

‘이크.’

피터는 얼른 다시 주저앉았다. 급히 앉느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

꼬리뼈부터 찌르르-한 고통이 올라왔다. 피터는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이완용 연습생,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역시 C나 받는 연습생 따위를 믿은 내가 바보였지.”

비꼬는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젠장,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니라고!”

욱해서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는 꽤나 익숙했다.

‘이번엔 레드 투 탑 중 한 명이랑 옐로 분위기 메이커인가?’

오늘은 무슨 날이기에 이 외진 곳까지 찾는 사람들이 이리 많은 걸까. 피터는 속으로 한탄했다.

생각외의 조합이긴 했지만 딱히 흥미롭진 않았다. 이미 앞서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인간극장급 우정의 릴레이를 들은 터라, 시답잖은 음모로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쟤들이 갈 때까지 차라리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피터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밖에서 두 연습생이 적당히 시끄럽기를 바랐건만.

“변명 한번 끝내주네. 이번 일이 네 탓이 아니라면 그동안 우주민이 블루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네 업적은 아니겠지.”

“제기랄, 아니라고 했잖아!”

둘의 대화 내용에 눈이 번쩍 뜨였다.

생뚱맞은 이름이 나왔다. 조금 전 피터에게 눈물겨운 우정의 릴레이를 선사해주었던 가운데 연결고리, 우주민.

“갑자기 그렇게 춤출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느냐고!”

“그러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막는 게 그쪽이 해야 할 일이었을 텐데?”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피터는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려버렸다. 어차피 소화전에 가려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귀로 듣기만 해도 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눈과 귀가 썩어버릴 것 같았다.

“이제 우주민은 블루 기숙사도 아니니, 네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연습생들을 이용하긴 힘들 테고. 나도 더 이상 깔끔하고 신사적으로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지시는 못 주게 되어버렸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알아서 하라고. 네가 그동안 즐겨 쓰던 더러운 방식을 쓰든, 어떻게든 이번에 우주민이 무조건 D 평가 이하로 받게 만들어.”

소혁은 완용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어떻게! 씨발, 걘 지금 오렌지라고. 난 옐로고, 딴 녀석들도 옐로나 블루에 있단 말이야.”

“그건 네가 고민해야 할 일이고.”

명령조의 말에 완용이 벌컥 화를 냈지만 소혁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게 나랑 그쪽의 거래조건이었으니까. 뭐, 데뷔 생각이 없으면 말고.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잖아?”

소혁은 가차 없었다. 뒤이어 완용의 욕설이 들렸지만, 그 저렴한 욕 몇 마디가 소혁의 발목을 붙잡지는 못했다.

소혁이 먼저 자리를 뜨고, 이어 완용이 쿵쾅거리며 사라졌다.

둘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피터는 몸을 일으켰다. 또 누군가가 오기 전에 얼른 소화전 뒤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오랫동안 구겨져 있던 몸 여기저기에서 으드득, 뼛소리가 낫다.

“그런 거였나?”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피터는 다이어리를 챙겨 숙소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어여.”

숙소에는 준비가 혼자 덜렁 앉아 있었다.

“왜, 우리 준비. 나 기다렸어?”

피터가 싱글 웃으며 대꾸하자 흥, 콧방귀를 뀌었다.

준비는 요 며칠 내내 저기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기숙사가 바뀌었다고 하나 잘 지내냐고 한번 놀러 올 법도 하건만. 현덕은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현덕 대신 올라온 주민은 찬바람이 쌩쌩 돌았다. 딱 봐도 싸가지 없어 보였다. 곁에 남은 건 속을 모르겠는 피터뿐이었다. 그런데 그 피터마저도 어디를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한참 뒤에나 돌아왔다.

피터를 바라보는 준비의 표정은 말 그대로 ‘나 심통 났다, 어쩔래.’였다. 현덕이 있었다면 분명 상냥하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그 포슬포슬한 파마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준비는 금세 얼굴을 풀고 헤실 웃으며 현덕에게 안겨들었을 것이다. 현덕은 그런 준비를 한없이 얼러 주었을 거고.

‘현덕 군 흉내라도 내줄까나.’

피터가 모처럼 마음을 먹었건만.

“뭐예여, 가까이 오지 마여.”

‘나한테 손대기만 해봐. 물어 뜯어버릴 테니까.’

준비가 이를 드러냈다.

현덕은 항상 준비 편이었다. 어린데 이런 경쟁 프로그램에 출연하다니. 안쓰럽고 장해 둥둥 싸고돌았다.

하지만 그건 현덕만의 생각이었다. 다른 연습생들, 적어도 오렌지 기숙사 연습생들이라면 누구나 준비에게 학을 뗐다. 현덕에게 하는 모습 보고는 ‘준비가 착하고 귀엽구나.’ 착각하고 다가온 연습생들은 모두 준비에게 한 방씩 얻어맞았다.

사납고 제멋대로 안하무인 꼬맹이.

그게 준비의 본모습이었다.

하다못해 피터와 둘이 있을 때조차 사나웠다. 준비가 유일하게 강아지처럼 따르는 사람은 현덕뿐이었다.

그 현덕이 떨어져 나갔으니, 준비는 어미 잃은 아기 사자처럼 털을 잔뜩 세우고 독이 올라 있었다. 잔뜩 뿔난 준비 때문에 숙소 안으로 들어가기도 겁내야 할 판이었다.

피터는 그런 준비를 놔두고 갑자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이고, 우리 예쁜 준비한테 구박을 당하니 그 슬픔을 스트레칭으로 승화시켜 볼까나?”

뜬금없이 혼잣말을 하고는 침대에 그 긴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두 팔과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미쳤어여?’

준비가 입 모양을 벙긋거릴 때였다.

퍽, 소리가 났다. 피터의 발에 맞은카메라가 천장에서 뚝- 떨어졌다.

피터는 아예 촬영 카메라의 전원까지 꺼버렸다.

“뭐 하는 거예여? 왜? 나 패게?”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준비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아니아니, 난 그저 스트레칭을 하다가 실수로 카메라를 부쉈을 뿐이야. 나중에 촬영 스태프 오면 알아서 입 좀 맞춰줘.”

피터는 싱긋 웃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창가에 걸터앉아 준비에게 물었다.

“현덕이 보고 싶어?”

“당연한 걸 왜 물어봐여.”

준비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피터 형이 떨어지고 현덕 형이 붙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 그건 좀 섭섭한 말인데?”

“내 마음 뻔히 알면서 묻지 마여, 그럼.”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현덕이에게 붙느니 나한테 붙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어, 장준비 연습생.”

“……무슨 개소리예여?”

“화제성 있고 널 잘 챙겨줄 좋은 연습생 형이 필요해서 현덕이를 골랐던 거잖아. 제일 화제인 우주민이나 박자룡, 원소혁이랑 갈라져서, 그럭저럭 괜찮다 싶은 김현덕 연습생한테 붙은 거 아냐?”

“……아, 아닌데.”

입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준비의 큰 눈이 심하게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피터는 그런 준비가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온몸의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같이 굴지만 준비는 아직 어렸다. 제 마음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자신과 달리 이다지도 서툴렀다. 피터는 그런 준비가 귀여웠다. 준비는 피터가 자신을 귀여워하는 걸 영 못 견뎌 했지만.

피터는 팔짱을 끼고 준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합숙하면서 좀 아니다 싶지 않았어?”

“뭐가여?”

“현덕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 안 들었냐고.”

“…….”

준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쩐지 어린아이를 골리는 나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건만.

“같은 기획사인 박자룡, 우주민 두 명이 너무 독특하게 튀어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김현덕 연습생도 튀어 보였던 거야. 그 둘과 찢어져 혼자 있는 김현덕은 그리 튀지 않아. 알잖아?”

“…….”

“우리 셋이 묶여 다니는 것도 내가 웃기고, 또 네가 어려서 튀는 거야. 그 사이에 리액션 잘 해주는 김현덕 연습생이 끼어 있는 거지. 네가 김현덕 연습생과 붙어 다니면서 어리고 귀여운 최연소 연습생 캐릭터 이미지를 잘 잡을 수 있었다는 건 인정. 그런데 이제 그 약발도 다하지 않았나? 그 이미지 유지하려면 김현덕 연습생이 좀 더 튀어야 하는데, 걘 지금 네 생각만큼 그리 튀는 연습생이 아니잖아. 이번에 평가도 쭉 미끄러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여.”

“갈아타고 싶으면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라고. 준비야.”

피터가 빙긋 웃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원한다면 내가 좋은 형 포지션을 맡아줄게.”

“형을 한 트럭 가져다 줘도 현덕 형이랑 안 바꿔여.”

준비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피터의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이 자리에 준비의 소속사 실장이 있었다면, 그녀는 피터에게 바로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우리 준비 좀 잘 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그만큼 피터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준비의 소속사에게는.

‘싫어. 피터 형 따위가 현덕 형을 대신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준비는 싫었다.

트라이 온 출연이 결정되고 나서 한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절대 방송에서 네 성질머리 다 드러내면 안 돼. 넌 지금 어린 게 최대 메리트야. 틀림없이 네가 최연소 연습생이 될 테니까, 가서 딱 보고 제일 화제성 높아 보이고 어딘지 좀 만만해보이고 순해 보이는 형뻘 연습생한테 붙어. 형한테 예쁨 받는 어린 연습생 이미지 만들어야 해. 알았지? 절대로 여기 회사에서 하는 것처럼 짜증 내고 화내고 개판 치면 안 돼! 무조건 귀엽게! 귀엽게!”

소속사 실장은 준비를 마주치기만 하면 이렇게 읊어댔다.

“아, 씨,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만 좀 말해요!”

“형뻘 연습생에게 빌붙어야 해.”

“빌붙기는 누가, 왜 빌붙어! 다른 연습생이 나한테 빌붙으면 모를까!”

“장준비!”

“아, 씨. 아무튼 알았다고요!”

준비는 그 소리가 짜증이 나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곤 했다.

그렇다고 실장의 말을 아예 못들은 척 하지는 않았다. 실장의 말대로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니까.

준비도 알았다. 자신의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걸.

‘안 더러우면 어쩔 건데? 혼혈이라고 신기해하고, TV에 나오는 원숭이 보듯이 쳐다볼 거잖아. 만만하게 봐서 놀리고 괴롭힐 거면서.’

아버지를 닮은 파란 눈은 언제나 놀림거리였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는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려는 애들도 많았다.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만난 선배들도 또래의 다른 연습생들은 다 놔두고 준비에게만 텃세를 부렸다. 준비를 견제한 것이다. 그들은 준비의 푸른 눈과 귀여운 외모를 질투했다.

핍박을 견디려면 강해져야 했다. 사납고 까칠해져야 했다. 준비는 고슴도치가 되었다. 누구든 다가오기만 하면 육탄전으로 달려들어 찔러버렸다. 그렇게 버텼더니, 이제는 순한 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 떨어져 버렸다.

준비는 자신이 꼭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걸리버 같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소인국, 오늘은 거인국. 어제는 까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오늘은 순진한 척을 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준비의 기획사에서는 준비를 트라이 온에 내보내면서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트라이 온을 제작하는 방송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적당한 연습생을 내보낸 것뿐이었다. 아직 어려서 데뷔 가능성이 적고, 실력은 적당해서 기획사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 정도의 연습생. 그게 준비였다.

준비의 기획사는 준비가 트라이 온 프로그램의 최종 데뷔조 멤버에 들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장은 준비의 자존심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지껄인 것이었다. 남에게 빌붙어 적당히 살아남으라고.

기획사의 어른들 중 누구도 네 실력을 다 선보여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준비는 기획사의 전략대로 움직였다. 저와 같은 오렌지 기숙사에 속한, 같은 평가를 받은 연습생 중 제일 착해 보이는 연습생을 골라잡았다. 마침 옆자리에 앉기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 연습생 형을 따라 기획사를 옮겨버릴까 고민할 정도로 좋아하게 되버렸다. 그러니 지금 준비는 피터의 제안이 같잖았다.

“현덕이가 왜 그렇게 좋아?”

이어진 질문은 더 같잖았다.

준비는 맑은 가을 하늘처럼 파란 눈으로 피터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현덕 형이니까여.”

다른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

준비는 팔짱을 꼈다. ‘어디 계속 같잖은 소리 해보시지. 난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테니.’라는 표현이었다.

“현덕이도 지금 여기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네가 한 말을 들으면 무척 좋아했을 거야.”

“현덕 형도 이미 알고 있거든여. 내가 현덕 형 겁나 좋아하는 거.”

“응. 그래. 나도 알 거 같아. 준비가 날 싫어하는 거.”

“피터 형도 잘 알고 있네여. 알면 됐어여. 오늘 괜히 쓸데없는 질문 해서 더 싫어졌다는 것도 알아두세여.”

채 두 달이 안 되는 합숙 기간이었지만 준비는 그 사이에도 훌쩍 자랐다. 키가 크고 얼굴이 갸름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겉이 자란 만큼 속도 단단해져 있었다.

피터는 제게 퉁명스럽게 구는 준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기분 나쁘게 자꾸 웃지 마여.”

덤처럼 준비의 타박이 따라왔다.

어른들 세계에 던져진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 눈치도 빨라진다. 상대방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날 이용하려 드는지, 날 정말 아끼고 걱정해주는지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현덕은 준비의 그 예민한 기준을 통과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프로그램에서 남을 도와주다가 자기가 피해를 입는 거겠지.’

한 번 정도는 그럴 수 있다. 자기가 감당해내야 하는 피해가 이 정도일지 모르고 그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두 번은 힘들다. 쉽지 않다. 자기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된 후에는 또 자신을 희생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현덕은 또 주민을 도우려 하고 있다.

이 업계는 자기가 데뷔하기 위해서라면 더러운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다. 남을 찍어누르기 위해 더러운 술수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아직 초등학생인 준비마저도 저를 지킬 방법 정도는 생각해 오건만. 어쩜 그렇게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착하게 굴 수 있을까.

‘이대로 현덕이 떨어지면 준비가 많이 실망하겠지. 서운해하고.’

그건 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에게 일찍 좌절과 슬픔을 맛보게 하는 나쁜 일이다.

피터는 새삼 이 나라의 꿈과 미래인 준비를 걱정했다.

한번 가정해보았다. 이번 최종 평가에서 현덕이 탈락하여 이후 준비와 둘만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답은 뻔했다. 준비는 정 붙일 또 다른 연습생을 찾지 못할 것이다. 짜증과 까칠함은 더 심해질 것이고. 그걸 온전히 감당해내야 하는 것은 피터였다.

독이 잔뜩 올라 가시를 뾰족하게 세운 고슴도치와 함께 지내야 한다니.

‘꽤나 피곤해지겠지.’

그러니 현덕이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논리였다. 보편타당한 결론이기도 했고.

“준비야.”

“왜 불러여. 할 말 없으면 괜히 부르지 마여.”

“우리 현덕이 도와주러 갈까?”

피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비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현덕 형을 도와주다니여?”

준비의 귀가 쫑긋하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너가 좋아하는 현덕이. 너랑 내가 안 도와주면 다음 평가 때도 회복 못 할 거 같은데. 어때? 도와주러 갈까?”

피터가 물었다.

“…….”

준비는 바로 그러자고 대답하지 않았다.

“음?”

예상외의 반응에 피터는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건만, 준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준비는 벌떡 일어서 소리치지도, 당장 현덕에게 가자고 조르지도 않았다.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피터를 볼 뿐이었다.

“형은 왜 항상 말을 그렇게 해여?”

“나? 뭐가?”

“피터 형도 지금 현덕 형 도와주고 싶은 거잖아여. 도와주고 싶으면서, 왜 꼭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도와주러 가야겠다는 식으로 말하는데여? 지금 피터 형이 나한테 끌려가는 거 아니잖아여. 피터 형이 나한테 하자고 하는 거잖아여.”

준비의 말에 피터는 잠시 멈칫했다.

“아니, 나는 그저…….”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랬나?’

문득 지난주 어느 날 아침이 생각났다.

피터는 연습실에 웅크려 잠든 현덕을 발견했다. 피곤해 보이던 현덕을 차마 깨우지 못하고, 안아 들고 숙소로 데려와 침대에 뉘었다.

옆에서 쿨쿨 자는 준비를 보았고 벽시계를 보았다. 아침 촬영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현덕과 준비를 모두 깨워야 했다. 그게 옳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그러지 않았다. 피터는 준비, 현덕과 함께 늦잠을 자는 걸 선택했다.

그날 하루가 어땠던가. 준비는 종일 투덜거리고 틱틱댔다. 현덕은 오랜만에 푹 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멍해 보이기도 했지만, 핏기가 도는 얼굴로 웃으며 준비를 달랬다.

소소하게 시끄러운 하루였다.

‘……즐겁기도 했고.’

피터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 달 반 합숙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그러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현덕, 준비와 함께였다. 오렌지 삼총사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릴 정도로.

‘즐거웠다, 라.’

피터는 제 감정을 되집어 보았다.

제 앞에서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내며 귀여운 얼굴을 구기는 준비가 선명하게 보였다가 흐릿하게 보였다. 이젠 제 앞에 없는 현덕이 궁금해졌다.

‘너도 우리처럼, 조금쯤은 섭섭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우린 잊고 그 우주민과 박자룡만 걱정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새로운 사람들과 금세 친해져 어울리느라 우린 까맣게 잊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서운했다. 그리고 서운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나는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비교적 자기객관화도 잘 되어 있고.’

‘그런데 아니었나 보네.’

피터는 조소했다.

이렇게 서운해할 거면서, 왜 그동안 몰랐던 걸까.

1층 복도 구석에서 남의 대화를 조금 엿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급해져, 어린 준비에게 뛰어왔다. 그랬던 주제에 아닌 척 했다. 아니, 모르고 있었다.

현덕과 헤어진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현덕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준비가 툴툴거리는 걸 변명으로 삼아 현덕을 다시 데리고 오고 싶을 만큼.

피터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걸 어린 준비가 알아챈 것이다.

피터는 자신과 준비 사이의 거리를 재보았다. 문가에 기대 서 있는 자신과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준비. 둘 사이는 겨우 두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사이엔 항상 현덕이 있었다.

현덕은 언제나 순하게 웃으며 준비를 챙기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피터 형은 괜찮은 거냐고, 물어봐 주었다. 그렇게 셋이서 함께였다.

그 빈자리는 준비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이런.”

피터는 손으로 제 입가를 문질렀다. 몸에 좋은 건 약에 쓰다더니. 입 안이 썼다.

“참고로 내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예여! 난 이 프로그램에서 꼭 데뷔할 거고, 그러려면 나한텐 현덕 형이 꼭 필요하니까!”

준비는 뒤늦게 피터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준비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달려갈 듯 발을 굴렀다.

“그래서, 뭐, 어떻게 현덕 형을 도와주면 되는데여?”

파란색 눈동자가 며칠 만에 반짝 빛났다.

“나한테 계획이 있어.”

“I have a plan.”

피터가 준비에게 손짓했다.

같은 기획사 연습생이어서 현덕과 친한 두 연습생이 있다. 레드 기숙사 붙박이 박자룡과 이번에 오렌지 기숙사로 올라온 우주민. 현덕과 함께 원조 삼총사로 불리는 이들. 그 중 우주민은 준비와 피터에게서 현덕을 떨어트린 장본인들이었다.

그 둘은 자기들끼리 현덕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새로운 삼총사인 피터과 준비는 그 둘에게서 현덕을 빼내 와야 했다.

“일단, 훼방을 놓으러 가자.”

피터가 싱긋 웃으며 준비에게 손짓했다.

***

첫날은 계획을 짜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현덕과 주민, 자룡, 피터, 그리고 준비. 다섯 명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5일 안에 주민이 평가곡의 안무를 완벽히 익힐 수 있을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현덕을 제외한 네 명에겐 목표가 하나 더 있었다. 어떻게 하면 현덕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까. 본인이 알아채지 못하게.

일단 주민의 평가곡부터 다시 정했다. 자룡이 제안이었다. 시간이 5일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평가곡을 바꾸는 건 위험할 수도 있으나, 준비와 피터는 개의치 않았다.

주민과 피터, 준비는 셋이서 한 팀이었다. 본래 다른 연습생 두 명이 더 포함되어 있었으나, 피터는 오늘 저녁에 바로 다른 팀으로 두 연습생을 넘겨버렸다.

기숙사장의 권한이었고, 그간 쌓아온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마찰 없이 팀을 재조정했다. 그러니 준비와 피터만 괜찮다고 하면 팀 평가곡 따위는 이 자리에서 얼마든지 교체 가능했다.

주민이 속한 오렌지 팀의 평가곡은 자룡이 속한 팀의 평가곡과 현덕이 속한 팀의 평가곡, 이 두 평가곡과 전혀 다른 장르에서 골랐다. 혹시라도 연습하다가 헷갈릴 것을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이미 지난 평가 무대에서 안 좋은 경험을 했던 현덕은 반대하지 않았다. 주민은 좋다, 싫다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이 없었다.

주민에게 안무를 알려주는 방식은 지난 평가 때 현덕이 주민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던 방법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주민을 제외한 네 명은 곡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각자 익히고, 그것을 주민에게 주입시킨다. 일단 무반주로, 박자를 무시하고 안무 동작을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게 1차. 준비와 피터가 낮에 함께 음악에 맞춰 연습시키는 게 2차.

이번 작전은 파이브 맨 투 뎁스 전법이었다.

“오! 파워레인저 같아여!”

“……어디가?”

“아, 쫌! 무조건 맞장구 좀 쳐봐여!”

준비와 피터의 투닥거림이 소소한 웃음을 주었다.

현덕은 자신이 어떻게 안무를 세세히 쪼개 주민에게 알려주었는지 설명했다.

“우와, 이렇게 춤을 연습할 수도 있군여.”

준비가 현덕의 설명을 들으며 감탄했다.

“여전히 이렇게 연습했던 거야?”

자룡도 새삼 신기해했다.

노래가 나오면 몸이 알아서 춤을 추고 있고, 어떤 새로운 안무도 두세 번 보면 금세 카피해내는 경지에 이른 두 사람에게는 낯선 방법이었다.

“처음 영어 배울 때 생각나네요. 긴 단어는 끊어서 읽으면서, 비슷한 단어들끼리 모아서 외우곤 했는데.”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비보잉을 했던 피터 역시 신문물을 보듯 했다.

현덕의 지도 아래 같은 동작을 수백 번 반복하며 연습해야 했던 주민은 ‘저걸 또 해야 한다니.’라는 표정이었다.

제각각 다른 반응 속에서 현덕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쑥스러워 그런 것이었다.

확실히 둘과 다섯은 매우 달랐다.

커다란 연습실에서 현덕과 주민, 단둘이 연습할 때는 대화가 많지 않았다. 음악 소리에 서로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들 뿐이었다.

하지만 다섯 명이 모이자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끌시끌했다. 안무를 익히기 위해 노트북을 켜 평가곡 영상을 보면서도 말이 끊기지 않았다.

가장 목소리가 큰 건 자룡과 준비였다. 둘은 음악만 틀어도 몸을 들썩였다. 특히나 준비는 춤신랩왕 JD와 함께 안무를 짠다는 것이 꽤나 신이 난 듯했다.

“여기선 이렇게 돌아가는 게 맞는 거져?”

“오른손 말고 왼손 먼저 아니었어?”

“아니었거든여. 안경 쓰셔야겠네여. 오른손이었어여.”

“아닌데, 왼손 같은데.”

“우씨, 다시 돌려봐여. 레드 기숙사면서 왤케 자꾸 헷갈리세여? 자드 형, 생각보다 실력 별로네여?”

“너 왼손이기만 해봐. 씨앗, 얼른 영상 뒤로 돌려!”

자룡과 준비는 바로 주요 동작을 대충 따라 하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피터는 종종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말이 격해지는 걸 막으며 농담을 던졌다.

현덕은 영상을 집중해서 보다가 어려운 동작이 나오면 바로 자룡과 준비에게 물어보았다. 둘은 앞다퉈 설명해줬다. 둘이 동시에 말했을 때, 준비가 ‘찌찌뽕!’을 외치며 자룡의 볼을 꼬집었다.

“니가 찌찌뽕을 알아?”

“왜여, 제가 마이클 잭슨을 안다고 하면 기절하시겠네여.”

“너 혹시 우주민 친동생 아니냐?”

“으으, 이렇게 심한 말 처음이야.”

“오, 너 뭘 좀 아는구나.”

자룡과 준비는 금세 어깨동무를 하며, 주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투덜댔다. 그 모습이 워낙 친해 보여 피터가 농담 삼아 서운하다고 투덜댔다.

“My son. 난 보이지도 않지?”

“절로 가 있어여. 이 노래엔 비보잉 동작 없으니까 형은 필요 없어여.”

준비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연습실은 활기찼다. 모두 잠을 잊고 분위기에 취해 자신의 평가곡을 준비하듯 집중했다.

현덕은 그 분위기가 좋아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갑자기 나타난 자룡과 준비, 피터의 모습에 놀랐던 게 먼먼 옛날 일 같았다. 처음부터 이 다섯 명이 함께 연습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다섯이서 계속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힘내자. 딱 오 일만 더.’

현덕은 슬그머니, 두 손을 주먹 쥐며 의지를 다졌다.

주민은 저를 빼놓고 이것저것 정하느라 바쁜 준비와 자룡, 그리고 그 틈에 끼인 현덕과 피터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자룡과 준비는 아예 주민을 잊고 자신들만의 춤 세계로 빠져들었다. 간간이 안무에 너무 어려운 동작을 추가하면 피터와 현덕이 말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민은 딴 사람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웃는 현덕만 관람했다.

웃는 현덕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자꾸 현덕을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걸 참는 게 고난이라면 고난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자룡과 피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전의 새벽 연습은 그와 현덕, 둘만의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고,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만족을 모르는 마음은 조금 더, 조금 더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마지막 평가 무대를 앞두고서는 그 욕심을 버려야 했다.

만약 지난번 평가 무대에 오른 현덕을 보지 않았더라면, 주민은 염치 모르고 계속 현덕과의 새벽 연습 시간을 즐겼을 것이다. 현덕의 평가 등급이 더 떨어지든 말든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당장 앞에 놓인 달콤한 기적에 취했을 것이다.

매일 새벽, 현덕과 단둘이 있었다. 만질 수 있었다. 땀에 흠뻑 젖어서는, 오히려 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환하게 웃어주는 현덕을 혼자서 볼 수 있었다. 이보다 더 황홀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자신 때문에 피곤해하는 현덕을 보는 것조차 좋았다.

그렇게 탐욕스럽게 현덕을 붙잡고 있었던 탐욕의 대가는 끔찍했다.

주민은 B 등급을 받았다. 오렌지 기숙사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덕과 한 기숙사가 되었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현덕의 무대가 시작되었고, 주민은 B 평가를 받았다고 좋아하던 방금 전의 자신을 저주했다.

현덕이 평가 무대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주민은 별 생각 없었다. 앞선 두 번의 무대가 그랬듯 현덕의 세 번째 평가 무대 역시 깔끔하고 완벽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덕은 처음부터 실수 연발이었다. 춤에 문외한인 주민조차 알 수 있었다. 두 곡의 안무 동작이 섞여, 현덕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성실히 다져왔던 무대가 흔들리는 순간, 현덕의 얼굴은 당장 눈물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울상이 되었다. 그런 현덕의 모습에 주민은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안무 미스 날 때마다 현덕은 자신의 실수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다. 부끄러워하고 민망해했다. 2절 후렴부에 가서는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준비한 무대를 마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들의 꾸중과 질책을 받으면서도 현덕은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주민은 차라리 저를 돕느라 그런 거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덕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변명하러 나선 제 입을 막느라 바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따윈 들지 않았다. 우주민이 아는 김현덕은 그런 사람이었다. 현덕과 함께 하는 새벽 연습에 취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다신 그런 모습 보고 싶지 않아.’

현덕과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해야 된다 하더라도.

주민의 이기심이 최대한 타협할 수 있는 선이 오늘 밤의 이 광경이었다. 현덕을 걱정하는 다른 연습생들의 도움을 받는 것.

자룡과 준비의 말다툼에, 혹은 피터의 농담에 웃음 짓는 현덕을 볼 때마다 좋으면서도 짜증이 났다. 그들을 바라보는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얼굴을 굳혔다.

현덕의 하얀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가끔 졸음이 내려오는지, 감기는 두 눈을 손으로 비벼 뜨며 또 웃었다. 숱 많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걸 알면서도.

‘만일 내가 제대로 된 생각이란 게 있다면, 아예 지금 이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맞겠지. 하지만 안 돼. 그건 싫어.’

그런데도 현덕의 얼굴에 웃음으로도 감출 수 없는 피곤함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양털 껍데기를 뒤집어쓴 늑대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는 건가.

주민은 그리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새벽에도 환한 연습실. 선의와 우정이란 낯간지럽게 빛나는 감정으로 따뜻한 분위기. 그 속에 한 점 까만 얼룩이 있다. 그 얼룩의 이름은 우주민이었다.

***

준비와 자룡의 격렬한 토론이 계속되는 가운데, 현덕은 두 다리를 모아 안더니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잔뜩 흥분한 자룡과 준비는 그런 현덕을 보지 못했다.

살짝 삐친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뒷덜미가 드러났다. 하얗고 길었다. 헐렁한 노란색 셔츠 아래로 숨어드는, 어깨선까지 이어지는 선이 가늘었다.

주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삐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두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삐친 머리는 영 둥글어지지 않았다. 제 주인을 닮은 고집이었다.

이어서 막, 주민의 손끝이 현덕의 하얀 목에 닿으려 할 때였다.

찰싹, 소리가 났다.

바로 옆에서 커다란 손이 툭, 튀어나와 주민의 손을 쳐냈다.

“잠든 아이를 괴롭히면 쓰나, 우주민 연습생?”

피터였다.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현덕과 주민 사이에 섰다.

“뭐야, 왜들 그래?”

자룡이 고개를 길게 빼고 현덕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 현덕 형 자여? 피터 형, 비켜봐여, 현덕 형 안 보이잖아여.”

준비도 동영상을 정지시키고, 대뜸 피터를 타박했다. 확실히 피터의 긴 다리 사이 너머 현덕이 웅크린 모습이 보일락 말락 했다.

자룡과 준비가 몸을 일으켜 주민과 피터, 현덕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니, 다섯 명은 금세 한덩이가 됐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현덕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마음먹은 게 제법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벌써 후회됐다. 무표정하던 주민의 얼굴이 절로 찌그러졌다.

네 쌍의 시선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든 현덕에게 모였다.

현덕은 주변이 시끌시끌한데도 깨지 않았다.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발차기 하듯이…… 그렇게…….”

그 잠깐 새 꿈을 꾸는지 잠꼬대까지 했다.

“뭐냐, 꿈속에서도 싸가지 춤 가르치냐?”

자룡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켜.”

주민은 거보라는 듯 피터의 다리를 밀어냈다. 김현덕은 꿈 속에서도 내 생각 뿐이거든?

“어이쿠.”

피터가 오버 액션을 취하며 휘청거렸다.

준비의 조력을 바랐건만, 준비는 오히려 피터가 밀려난 자리를 탐냈다. 쪼르르- 현덕의 옆에 웅크려 앉았다.

“현덕 형 많이 피곤한가 봐여. 우리 형 자는데 다들 조용히 좀 하져?”

그리고는 민폐 층간 소음꾼을 바라보듯 세 형을 째려보았다.

“꼬맹이, 너나 조용히 해.”

주민은 성큼 다가가 준비의 뒷목을 잡아챘다. 대롱, 떠오른 준비는 언제나 그랬듯 피터의 것이 되었다.

주민은 셔츠 위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현덕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현덕이 조는 김에 우리도 잠깐 쉬자.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다 아프네.”

자룡이 맨바닥에 슬라이딩 하듯 쓰러졌다.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괴고는 주민에게 턱짓을 했다.

“너 잘해, 인마. 현덕이 봐서라도. 탈락하진 마라. 알았지?”

“양파 머리, 그쪽이나 조심해.”

주민은 웃는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을 정도로 싸가지 없어 보이게 웃었다.

“야, 난 지금 널 도와주려고 이러고 있거든? 고마워는 못 할망정.”

자룡이 어이없어하며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민은 현덕에게 둘러준 제 옷의 소매를 묶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자룡에게 쌀쌀맞던 얼굴이 돌변해 부드럽게 웃었다.

“헐, 두 얼굴의 사나이. 나 저거 만화책에서 봤는데. 그거 있잖아여, 배트맨에서 나온 거.”

“투 페이스?”

“그거여! 아주 동전만 손에 하나 쥐여주면 딱이겠네여.”

준비가 혀를 내둘렀다. 피터는 준비의 보슬보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가 준비의 이빨에 물릴 뻔하고는, 얼른 손을 치웠다.

시계는 네 시 이십 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시계 중앙에 뚫려 있는 검은 구멍이 반들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