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 준비 (9/36)

다시 한 번, 이번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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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이번엔

2

두고

목차

1. 준비

2. 납치

3. 강퇴

4. 시발점과 소금쟁이 춤과 평범에 관하여

5. 반칙이 아닌 이유

1. 준비

“잠깐만요.”

현덕은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이렇게 셋이라고요?”

현덕이 두 손을 양옆으로 들어 주민과 자룡을 가리켰다.

“왜, 불만 있어?”

자룡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주민은 픽, 웃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오 팀장을 바라보았다. 현덕의 질문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이쪽은 데뷔조로 선발되었고, 자룡 형은 다른 회사 데뷔조로 들어가게 되지 않았나요?”

현덕은 자신을 쳐다보는 자룡의 부리부리한 눈을 무시하며 오 팀장을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현덕 씨가 이 둘 매니저인 줄 알겠네. 벌써 서로를 챙겨주는 건 참 좋은데. 그렇게 서로 챙겨주는 사이면서 어째 서로 소식은 감감무소식인가?”

“관심이 없으니까요.”

주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도 너한테 관심 없거든?”

자룡이 큰 소리로 대꾸했다.

“팀장님.”

현덕은 오 팀장을 힘주어 불렀다. 양옆에서 들리는 소음은 현덕을 방해하지 못했다. 오 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건 내가 현덕 씨한테 묻고 싶은 말인데.”

“네?”

“저쪽은, 아, 이제는 이름을 불러도 되니까 편하게 부를게. 아시다시피 이쪽은 우주민.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가명을 썼던 거였고.”

오 팀장이 주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부터 이름을 알고 있었던 현덕은 놀라지 않았다.

“씨발, 지가 뭐라고 연습생 주제에 가명을 써?”

자룡이 똥을 씹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주민 씨도, 자룡이도 현덕 씨랑 같이 이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다고 그래서 말이야. 현덕 씨, 무슨 재주로 이 두 놈을 그렇게 잘 구워삶았어? 저 천둥벌거숭이랑 저 세상에 다시없는 싸가지를.”

오 팀장은 자신이 들고 온 서류 뭉치를 둘둘 말더니 그걸로 자룡과 주민을 가리켰다. 둘은 동시에 기분 나쁘다는 눈빛을 쏘아 보냈으나 오 팀장은 털털하게 웃으며 무시했다.

“저랑 같이 나가고 싶다고 그랬다고요?”

현덕은 또다시 한국말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형, 진짜 그랬어요?”

자룡에게 물어보니,

“씨발, 김현덕. 너 혼자 어떻게 거길 내보내냐?”

자룡이 즉각 대답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현덕은 그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데뷔조에 들어 데뷔하기를 원했으면서. 다른 회사긴 해도 데뷔조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버리고 나랑 같이 TV 프로그램에 들어가겠다고? 왜?’

자룡에게 데뷔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무게인지 알기에 현덕은 더욱 자룡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오 팀장이 강요해서 다른 회사로 가지 못하고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았다.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는지 궁금하네?”

얼음 상태가 된 현덕을 흔든 건 주민이었다. 현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주민을 보았다. 목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주민은 턱을 괸 채 현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다 착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얼굴이었다.

“너…… 님은 왜……?”

날 물고 늘어지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이 프로그램 출연하라고 말했는데 기억 안 나나 보지? 병원 가서 검사 좀 받아 봐야겠어.”

“아니-”

현덕이 반박하려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자자, 셋이서 친목 도모는 이따 하고. 일단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주면 좋겠어.”

짝짝, 오 팀장이 박수를 치며 세 사람의 시선을 모았다.

현덕은 여전히 머리에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일단 답을 찾는 걸 잠시 미뤄두고 오 팀장을 바라보았다.

자룡과 현덕도 불퉁한 얼굴로 오 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김현덕, 박자룡, 우주민, 이렇게 세 사람이 우리 회사 대표로 아이돌 트리니티 프로그램에 나가는 건 땅땅 확정됐으니까 그렇게들 알고. 다들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거니까 불평하지도 말고, 나중에 가서 못 하겠다고 발뺌하지도 말고. 알았지?”

오 팀장은 들고 왔던 종이 뭉치를 세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아이돌☆트리니티(가제) 출연 연습생 일정 및 유의사항’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단엔 TE엔터테인먼트 로고와 대외 유출을 금한다는 문구가 진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둬. 앞으로 정신없을 거니까.”

셋은 오 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종이를 넘겼다.

문서엔 셋을 전담 마크해줄 TF팀의 구성과 관리 내용 등 설명을 들었다. 지난번 트윈 트윙클 때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꽤 체계적으로 세 명을 관리해주는 듯했다.

TF팀의 총괄 담당자는 오 팀장이었다.

신인개발팀은 원래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새로운 보이 그룹 데뷔조의 관리를 핑크키위를 담당하던 운영팀에게 빼앗겼다. 그리고는 케이블 프로그램 출연 연습생들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문서엔 그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독성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굴림체로 빽빽한 문서 열다섯 장이라니.

현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한 글자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문서를 읽었다. 몇 장 뒤로 넘기자 프로그램 일정이 나왔다. 석 달 뒤 촬영이 시작되지만, 회사 차원의 준비는 바로 다음 주부터였다.

“촬영 한 달 전부터는 프로그램 제작진 쪽에서 여러 번 오라 가라 할 거야. 프로필 사진도 찍을 거고 홍보 영상이나 프로모션 촬영 같은 것도 할 테고. 그러니까 제대로 준비할 기간은 두 달 남짓이라고 보면 돼. 거의 데뷔조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정신없을 테니까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한다.”

오 팀장이 단단히 당부했다.

“가서 선보일 경연곡, 인터뷰 자세, 발성, 태도, 눈짓, 손짓까지 전부 다 연습할 거야. 그냥 평소처럼 연습생 생활하다가 석 달 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거라 생각했다면, 경기도 오산이고.”

오 팀장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본인은 위트있다고 생각하는 회심의 농담을 날렸다. 물론 현덕과 자룡, 주민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흠흠, 뭐, 이런 진지한 자세 나쁘지 않아. 좋아, 이런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라고. 석 달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튜닝 한다고 생각해.”

문서에는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될 프로그램 출연 대비 준비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진짜 데뷔조 스케줄이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자룡이 종이를 팔랑이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프로그램은 좁은 세트장에 연습생 백 명을 몰아넣고 24시간 카메라를 돌려대는 촬영이야. 잠깐 방심해서 허튼 모습 보이거나 말이라도 한마디 잘못하면, 또 그게 피디 눈에 딱 띄어서 악편집 당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렇다고 마냥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으면 카메라에 한 번 찍히지도 못하고 바로 탈락하는 거고. 말 그대로 서바이벌이니까.”

오 팀장이 돌돌 말은 종이로 대뜸 자룡의 머리를 내리쳤다.

“넌 당장 말버릇부터 고쳐.”

“뭐 하는 거예요! 아, 씨발.”

“박자룡이. 그 씨발 소리 이제 금지야. 그동안 가만히 놔뒀는데, 이젠 안 돼. 앞으로 촬영 직전까지 넌 매일 언어 교육 한 시간씩 받을 줄 알아.”

“씨발. 그게 말이 돼요?”

“또!”

오 팀장이 다시 자룡에게 종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아, 씨발!”

자룡이 의자를 뒤로 물려 물러서며 오 팀장의 공격을 피했다.

“또, 또!”

오 팀장은 헛스윙을 되돌려 다시 자룡을 공격했다. 종이 방망이가 자룡의 옆머리를 강타했다.

“진짜, 팀장님! 이러기예요?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씨발!”

“내가 언젠가 반드시 그 입버릇 고치려고 벼르고 있었거든? 얌마, 박자룡. 너 촬영하면서도 씨발 씨발 해댈 거냐?”

“아, 씨발, 내가 언제 그런다고 그랬어요.”

자룡은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오 팀장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 팀장의 손이 움찔거릴 때마다 자룡의 어깨도 따라서 움찔거렸다.

“지금 또 그러고 있잖아!”

오 팀장의 팔이 힘찬 스윙을 선보였다.

“아, 씨-”

“뭐, 또 씨발?”

“……아뇨, 하도 맞아서 눈앞에서 씨앗이 빙빙 돈다고요.”

자룡은 뚱한 표정으로, 또 얻어맞은 머리를 문질렀다. 종이를 둘둘 만 것으로 맞으니 아프다기보다는 기분이 나빴다.

“욕을 찰지게라도 하면 내가 말을 안 해. 욕도 제대로 못 하고, 할 줄 아는 건 씨발밖에 없잖아. 중학교 때 버릇을 잘못 들여서 괜히 입에 붙은 거 아니까. 지금 당장 고쳐!”

“씨……. 그게 어디 쉽냐고요.”

“어차피 너 데뷔하기 전에 고치긴 해야 돼. 이참에 고치라니까.”

오 팀장이 냉정하게 자룡의 말을 잘라냈다.

자룡은 중학생 때 TE엔터테인먼트에 연습생으로 들어왔다. 그때 기존 연습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3학년이나 20대 초반이었다. 자룡은 연습생 중에 가장 막내였다. 그러다 보니 연습생 형들 사이에서 많이 치였다. 항상 어린애 취급을 받았는데, 그게 싫어서 강해 보이기 위해 형들을 따라 욕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팀장이 아니었던 오 대리는 그런 자룡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자룡은 그 나잇대 특유의 중2병을 선보이며 한없이 건들거렸다.

“지금도 뭐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지만 그땐 정말 볼만했지. 랩 써 오랬더니 ‘크큭, 나는 어둠의 다크니스, 나는 랩의 전사’ 이딴 거나 써오질 않나. 어?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악! 뭐라는 거야. 씨발, 말하지 마요!”

“또 씨발!”

오 팀장은 정말 작정한 듯 ‘씨발’ 소리만 나오면 힘찬 스윙을 선보였다. 자룡은 씩씩대며 오 팀장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내가 그 종이 아직도 보관 해놓고 있어. 너 데뷔하면 꼭 회사 차원에서 정식으로 공개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차라리 노예 계약서를 쓰라고 해요!”

자룡이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절망했다.

“우리 회사는 표준 계약서 쓰거든? 회사를 멋대로 악덕 회사 만들지 마라.”

오 팀장은 TE엔터테인먼트가 그래도 이쪽 업계에선 제일 공정한 계약을 하는 곳이라고 어필하며 자룡을 구박했다. 이어 현덕과 주민은 꼬마 중딩 자룡이가 결국 제대로 배운 욕은 ‘씨발’ 하나뿐이었다는 슬픈 전설을 마저 들어야 했다.

주민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현덕은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현덕의 웃음소리를 들은 주민이 현덕을 보았다. 주민은 웃는 현덕을 내내 바라보았지만, 현덕은 자룡과 오 팀장을 보느라 그런 주민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꼭 아버지랑 맹덕 형 같아.’

맹덕은 군대에 갔고 아버지는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때문에 요 근래 집이 꽤 썰렁해졌다. 등하굣길에 만나는 이웃들이 요즘 김 판사네 집에 무슨 일이 있냐고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몇 달이나 지났으니 어머니와 단둘뿐인 생활이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던 것 같다. 오 팀장과 자룡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오 팀장과 자룡, 둘 사이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덕이나 주민에게는 ‘씨’ 자를 꼭꼭 붙이는 오 팀장이 자룡은 편하게 부르는 게 보기 좋았다. 오 팀장은 자룡의 오랜 연습생 생활을 함께하며 고운 정 미운 정을 모두 쌓은 듯했다.

오 팀장이 돌돌 말아 내리친 종이는 현덕을 지나쳐 주민의 앞에서 멈췄다.

“주민 씨, 주민 씨는 내가 뭔 말 할 줄 알지?”

주민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만.”

오 팀장의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진 건 당연지사였다.

“주민 씨는 아직 데뷔조야.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일단 프로그램 들어가긴 하는데, 적당할 때 하차하고 데뷔조 합류하는 거 생각해둬. 데뷔할 그룹 이미지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탈락하는 방식 말고 적당한 이유 들어서 하차 하는 걸로 가자고.”

오 팀장의 말을 들으며 현덕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조인 주민이 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갔다.

‘트윈 트윙클에서 항우영 포지션인 건가? 데뷔조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하지만 현덕의 가설은 곧바로 무너졌다.

“솔직히 예전 일도 있고 그래서, 회사에서는 주민 씨 프로그램 나가는 거 아직도 반대하고 있어. 이건 전적으로 주민 씨 사정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니까. 대신 주민 씨는 나가서 이미지 관리 잘해. 악편집거리 만들지 마. 뭐, 그쪽에서 작정만 하면 뭔 짓을 해도 어떻게든 꼬투리 잡히겠지만. 그건 우리 팀에서 케어할 거야. 그러라고 팀 만든 거니까.”

오 팀장은 셋 모두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자, 트윈 트윙클 때 항우영 사건은 다들 알고 있지? 그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고 회사에서는 우리 TF팀을 만든 거야, 우리 팀은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할 거니까 그 점은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지?”

주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현덕과 자룡만 소리 내 대답했다.

“좋았어,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다크호스 현덕 씨.”

“와아- 제가 다크호스네요.”

현덕은 영혼 없는 리액션을 보였다. 자신이 다크호스라는데도 흘려듣는 기색이었다. 오 팀장은 그런 현덕을 보며 혀를 찼다.

“참, 여러 의미로 다크호스야.”

오 팀장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룡과 주민을 볼 때의 얼굴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세상 모든 근심이 현덕의 앞에서 모두 사라진 듯했다.

“저 두 명이 현덕 씨 반만 닮았어도 내가 걱정을 안 할 텐데.”

“춤이랑 노래 면에서 제 실력이 누군가가 본받을 만한 수준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런 소리 하지 마. 현덕 씨 기본기 탄탄히 쌓은 거 우리 팀에서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솔직히 이런 프로그램 내보내도 마음 편한 건 현덕 씨뿐이야.”

오 팀장의 목소리는 소리 반, 한숨 반이었다.

“그래서 우리 팀에선 현덕 씨만 프로그램에 출연시키려고 했는데. 왜 난데없이 저 혹 두덩이가 현덕 씨한테 붙어버렸는지 영문을 모르겠네.”

역시나 답을 모르는 현덕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까진 회사와 내가 현덕 씨에게 갖는 믿음과 신뢰였고. 이제 냉정하게 말하면.”

오 팀장이 둘둘 만 종이 뭉치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대로 나가면 현덕 씨, 카메라 받기 어려울 거야. 아마 예쁘고 조용한 병풍이 돼서 스포트라이트 받는 주연급들 뒤에 서 있다가 탈락하고 돌아오겠지.”

“네에.”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팀장의 말은 현덕도 내내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한 후 현덕은 책상에 앉아 빈 공책을 폈다. 그리고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적어보았다.

‘현덕이 생각하기에’ 현덕은 주민처럼 눈에 띄게 잘생겼거나 목소리가 특이하지 않다. 자룡처럼 실력이 A급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머러스하거나 성격이 4차원적으로 특이하지도 않았다.

‘백 명 정도 되는 연습생들 사이에 내가 서 있다면, 눈에 띌까?’

현덕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로 아닐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현덕은 오 팀장의 말에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아니 아니, 그렇게 덥석 납득해버리면 내가 민망한데.”

“저도 고민하고 있던 점이어서요.”

현덕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오 팀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겠네. 저 둘 상대하다가 현덕 씨 보면, 내가 정신병 걸릴 거 같아. 온도 차가 너무 심해서.”

오 팀장이 말을 이었다.

“현덕 씨, 그렇게 땅 파라고 한 말이 아니야. 지금 현덕 씨에겐 약간의 보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일종의 메이크업?”

오 팀장은 차분한 현덕의 모습을 의기소침해진 상태라고 본 듯했다. 조금 전 자룡과 주민을 대할 때보다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메이크업? 화장이요?”

현덕이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진짜 화장이 아니라, 이미지 변신 말이야. 내가 처음 로드 뛸 때부터 오늘까지 아이돌 연습생만 수천 명을 봤던 거 같은데. 난 진짜 현덕 씨 같은 연습생은 처음이거든. 한 번도 염색 안 하고 검은 머리 계속하고 다니는 거만 봐도.”

“저희 학교는 염색 금지거든요.”

현덕은 짧아진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자룡이는 중학교 때 교칙 어기고 금발로 염색했다가 학교에서 바리깡으로 머리에 고속도로 뚫고 왔어.”

그때가 생각나는지 오 팀장이 껄껄 웃었다. 자룡은 또 ‘씨발’을 외쳤다가 오 팀장에게 한 대 맞았다.

“그리고 옆에 주민 씨는 그 머리 가발이잖아?”

의외의 커밍아웃이었다.

“네?”

현덕은 고개를 돌려 주민을 바라보았다.

엷은 빛의 갈색 머리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돈을 쏟아부은 거라고 생각될 만치 결 좋은 머리카락이었다. 아무리 봐도 가발 쓴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씨발, 얼마나 비싼 거야?”

자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현덕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시렸다.

“만약에, 그런 거라면…….”

잠깐 새 그동안 주민과 아웅다웅했던 상황들이 떠올랐다. 주민의 날 선 태도들이 팝콘 기계에서 팝콘 터지듯 팡팡 생각났다.

‘그 행동들이 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였던 거라면?’

주민의 날카로운 태도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비밀을 안고 잔뜩 예민해져 있는 주민을 좀 더 배려하지 못했던 무심함이 부끄러워졌다.

주민을 바라보는 현덕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설마, 대머리……?”

“…….”

“…….”

“…….”

현덕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돌처럼 굳었다. 순식간에 소회의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오 팀장과 자룡의 눈이 주민의 정수리로 향했다.

“그런 거 아니야.”

주민은 즉시 반박했다.

“읍!”

“픕!”

오 팀장과 자룡은 동시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는 모습이 주민의 눈에 생생하게 보였다. 주민은 이를 악물며 그 둘을 노려보았다.

현덕은 등 뒤에서 어떤 난리 부르스가 일어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지고 홀로 고민이 많았을 주민을 안타까워할 따름이었다.

“아직 어린데…….”

현덕이 안쓰러운 눈으로 주민을 보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내 말 안 들려?”

주민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현덕에게는 덧없는 변명처럼 들렸다.

“아주 벗겨진 거야? 아니면 백록담……. 음, 부분 가발이라거나…….”

“아니라고 했다!”

가히 사자후라 할 만한 발성이었다. 주민의 목소리가 소회의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윽.”

그 큰 소리를 바로 코앞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현덕은 두 귀를 움켜잡았다. 눈을 꼭 감고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주민의 손이 현덕에게 훅 들어왔다. 그 손은 바로 현덕의 턱을 붙잡고는 고개를 들게 했다.

“눈 떠.”

이 가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렸다.

현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주민의 손을 털어내려고 했지만, 주민은 뭐가 그리 절박한지 현덕의 턱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잘 봐, 아니라고.”

주민이 다른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겼다. 탈색된 갈색 머리카락 가발이 쑥 빠졌다.

“헐, 미친. 진짜 가발이었어?”

현덕의 등 뒤에서 자룡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

현덕의 눈도 커다래졌다.

주민은 가느다란 실로 만든 양파망 같은 걸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것도 마저 벗었다. 그러자 망으로 고정되어 있던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자룡보다는 짧고 현덕보다는 긴, 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다행히도 숱은 많아 보였다.

현덕은 깜짝 놀랐다.

“이중 가발?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었던 거?”

“뭐?”

주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현덕을 바라보았다.

‘슬픈 사연이 있었던 거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무신경하게…….’

현덕의 머릿속엔 한 편의 드라마가 빠르게 상영되었다.

어린 나이부터 탈모에 고민하던 주민은 주변의 놀림에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성격이 더러워진다. 탈모란 유전과 스트레스 많은 환경 등에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일 뿐이지만. 주변의 시선과 무책임한 놀림 때문에 어린 주민은 탈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 ‘탈모는 나쁜 거야, 탈모는 숨겨야 하는 병이야.’라고.

주민이 클수록 탈모는 심해진다. 그럴수록 주민의 성격은 점점 더 더러워져 간다. 탈모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쓰게 되는데, 그걸 안 나쁜 친구들은 툭하면 주민의 가발을 벗기며 놀린다. 때문에 주민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가발을 두 개나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오늘날의 우주민이 완성된 것이다. 가발을 두 개나 쓰고 다니는, 성격 더러운 우주민이.

여기까지 상상한 현덕은 깊이 반성했다.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대머리냐고 직접적으로 말해선 안 되는 거였어.’

1단계 가발을 벗을 정도로 절박했을 주민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니, 죄책감마저 들었다.

“미안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라고!”

주민이 소리 질렀다. 성량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으흐흐-”

자룡은 이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나 못 참겠어. 씨발, 진짜 미치겠다. 김현덕, 아흐, 니가 최고다.”

주민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에 재수 없는 웃음을 잃지 않던 그가 이렇게 제 페이스를 잃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현덕은 더 큰 죄책감이 느꼈다.

“저는 그 어떤 편견도 없어요.”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엔 저울을,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있다. 그리고 두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다. 눈으로 본 것 때문에 편견이 생겨 판결이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

현덕은 그런 법의 공정성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머리숱이 풍성하든 탈모이든, 그로 인해 어떤 인상과 인성을 가지고 있든. 사람은 법 앞에 모두 동등하다. 오직 그가 저지른 죄에 따라 그 대가로 형벌을 받아야 할 뿐이다, 라고.

주민이 탈모로 인해 인성이 그렇게 나쁘다 할지라도, 그건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 비뚤어진 인성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다면 상황이 달라지지만.

주민은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탈모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해 전전긍긍, 숨기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막막하고 절박했을까.

“그쪽이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에 처했든. 우주민은 우주민인 거니까.”

현덕은 흥분한 주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차분하게 말하고자 애썼다.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주민을 바라보았다.

주민이 멈칫, 했다.

“내 모습 그대로를 봐주겠다고?”

주민의 표정이 묘해졌다. 화가 난다거나 현덕의 멱살을 움켜잡고 싶다거나, 그런 방향은 아닌 듯했다.

“탈모 같은 거로 그쪽을 괴롭히거나 할 생각은 없어요. 비밀은 꼭 지켜드릴게요.”

하지만 이어지는 현덕의 말이 주민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어째서인지 주민은 더욱 열 받아 보였다.

‘지금부터라도 영상으로 찍어놓을까?’

오 팀장은 뒤늦게 고민했다.

“나, 나…… 나! 나 죽어!”

자룡은 아예 뒤로 넘어가 버렸다.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래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김현덕 연습생.”

주민은 현덕의 턱을 놓고 대신 현덕의 손목을 잡아챘다. 현덕의 손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현덕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고는 현덕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잡아당기도록 했다.

“봐, 이게 가발 같아 보여?”

어쩐지 주민은 절박해 보였다.

주민과 몇 번 마주치진 않았지만 이런 주민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다못해 자룡이 자살하려 할 때도 여유롭게 자룡의 속을 긁었던 주민이 아니던가.

‘꼭 초등학교 때 짝꿍이었던 민지를 보는 거 같아.’

현덕은 초등학교 동창을 떠올렸다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쓰는 친구였는데, 현덕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셌다. 현덕이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을 뺏어 달아나곤 했다. 공부할 때는 자기도 필통이 있으면서 괜히 지우개나 연필을 빌려달라며, 공부하는데 자꾸 말을 걸었다.

견디다 못한 현덕이 왜 자꾸 날 괴롭히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민지는 꼭 주민처럼 행동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엉엉 울며 현덕을 주먹으로 때렸다.

당시 반의 남학생 중 대부분은 민지에게 한 번 이상 맞고 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민지를 울린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민지의 주먹은 매우 아팠지만, 현덕은 우는 민지의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도망칠 생각을 못 하고 계속 민지에게 얻어맞았다.

하필 그 모습을 담임선생님이 발견했고, 곧바로 현덕의 어머니에게 연락이 갔다. 어머니는 현덕이 학교에서 여학생을 울렸다는 말에 놀라 뛰어오셨다. 그 여학생의 주먹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교무실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현덕을 보고는 머리를 감싸 쥐셨다.

‘그때 어머니가 뭐라고 그러셨더라?’

현덕이 기억하기로, 어머니는 밤탱이가 된 눈에 후시딘을 발라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굴 닮아 이렇게 둔할까. 역시나 네 아빠를 닮아 그런 거겠지? 현덕아, 민지는 너를 좋아했던 거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너랑 말하고 놀고 싶었던 거야.’

그때의 현덕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완벽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면 잘해줘야지.’

그런데 왜 지금 주민의 모습과 그때 민지의 모습이 겹치는 걸까.

“아!”

오랜만에 민지 생각을 하던 현덕은 뒤늦게 손끝에 와 닿는 머리카락의 탄력을 느끼고 탄성을 내질렀다. 주민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까만 머리카락은 현덕이 잡아당기자 탱탱한 탄력감을 선보였다. 정말 가발이 아니라 주민의 두피에 깊게 박혀 있는 모근이 느껴졌다.

“진짜 머리?”

“그래.”

비로소 주민의 입가에 미소가 비쳤다. 심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와 반대로, 현덕의 얼굴엔 일순간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현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주민은 그 짧은 순간을 용케 캐치했다.

“그건 무슨 의미지?”

“어?”

현덕은 움찔했다.

“탈모가 진행 중이 아니라 다, 다행이라는 생각 중?”

“생각 중이면 생각만 할 것이지. 왜 그 생각을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주민의 눈이 번뜩였다.

“삑사리 난 겁니다.”

현덕은 얼른 오 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쉬움이 남았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 겨우 답을 찾아냈는데, 정답이 아니라 오답일 때의 기분이랄까. 다시 처음부터 수학 문제를 풀어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탈모나 대머리가 아니라면 저 싸가지 없음의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현덕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현덕은 진리의 근원을 탐구하는 순례자처럼 다시금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서야 했다.

현덕이 자신을 쳐다보고, 그런 현덕을 따라 주민도 자신을 쳐다보자, 오 팀장은 이 세 연습생을 감당해야 하는 TF팀의 팀장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저기 말이야. 지금 여기서 나눈 이야기는 다 까먹고. 나중에 프로그램 나가서 카메라 앞에서 똑같이 한 번 더 해보면 안 될까? 주민 씨는 가발 쓰고 있고, 현덕 씨는 주민 씨의 머리가 가발인 걸 발견하고 지금까지 반응했던 대로 다시 한번 똑같이 반응해보는 거야.”

“오, 난 찬성! 무조건 찬성!”

자룡은 히히,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찬성의 뜻을 표했다.

자룡은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목만 달랑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제가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저 연기 수업은 아직 안 받았거든요.”

현덕은 자신에게 별다른 연기 경력도, 연기 수업을 받은 경험도 없다는 걸 오 팀장에게 상기시켰다.

“…….”

주민은 저를 빼고 한통속인 무리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

주민의 가발 소동 후 회의는 비교적 평탄하게 흘러갔다.

자룡은 웃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다. 주민은 냉기를 풀풀 날리며 회의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가발은 다시 뒤집어쓰지 않았다. 현덕은 중요한 내용을 종이에 필기해가며 착실하게 오 팀장의 설명을 들었다.

“다음 주까지 옛날 어릴 때 사진 열 장 이상씩 들고 와. 초중고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이나 졸업 앨범, 뭐 그런 것들. 그리고 어릴 때 뭔가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었으면 정리해서 가져오고. 힘들었던 친구를 도와줬다거나 남들 많이 보는 앞에서 뭔가 착한 일을 했다거나, 그런 거일수록 좋아.”

마지막은 이상한 과제였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현덕이 질문했다.

“나중에 프로그램에서 적당히 얼굴 좀 나오고 오디오 좀 따고 그래서 인지도 생기면, 우리가 친구나 주변 사람인 척하고 슬슬 풀 거야. 티 나게는 안 할 거고. 이런 거 해주는 바이럴 업체가 있거든. 그쪽에 맡겨서 전문적으로 작업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뭐, 유명세 좀 타면 알아서 여기저기서 말들 해대겠지만. 좋은 쪽으로 방향 잡으려면 초반에 바람잡이를 해줘야 해서. 참, SNS는 미리 정리해둬야 하는 거 알지?”

오 팀장은 취조 하듯 SNS 사용 여부를 물었다.

주민과 현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오 팀장은 안도하며 앞으로도 데뷔 전까지는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룡이는 뭐 하나 하고 있지? 오늘 집에 가서 쓴 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하나 읽어보고 문제 될 만한 거 있으면 다 삭제해. 알았지?”

“아예 탈퇴를 할까요?”

“아니, 아니. 그러진 마라. 나중에 괜히 미리 이미지 메이킹 하려고 계정을 지웠느니, 그 계정에 욕설이며 이상한 사진만 잔뜩 있었느니, 안 좋은 말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이왕 만들었으면 없애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나아. 다만, 이건 그 계정에 이상한 내용이 없을 때 한해서야. 자룡이는 계정 주소 다시 적어내. 우리 쪽에서도 한번 체크해볼 테니까.”

회의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회의 이후, 오 팀장의 예고처럼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느슨했던 트레이닝은 다시 빡빡해졌다. 셋은 아예 한 팀으로 묶여 함께 트레이닝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보컬, 댄스, 화술, 제스처, 표정 등 세세한 분류에 따라 전담 선생님들이 배치되었다.

셋은 매일 오후 한 시에 연습실에 모여 함께 트레이닝을 받고 연습했다. 자룡이 언어 순화 교육을 받기 위해 매일 한 시간씩 따로 수업을 받는 걸 빼면 셋은 항상 함께였다.

연습실에는 항상 촬영 카메라 네 대가 사방에 놓여 있었다. 촬영에 익숙해지라며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현덕은 오후 한 시부터 시작되는 트레이닝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학교생활을 희생해야 했다.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했을 때 이미 각오했던 바라 크게 개이치 않았다. 하지만 현덕의 담임선생님은 아니었다.

현덕이 TE엔터테인먼트에서 발급받은 ‘공결 혹은 현장학습 수업 대체 요청’ 공문을 들고 교무실을 찾아가자, 교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담임선생님은 마치 현덕이 ‘저는 인간이길 포기했습니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기겁했다. 그런 담임선생님의 반응에 놀란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이 무슨 일이냐고 모였다.

현덕은 순식간에 ‘착실하던 애가 나쁜 친구를 사귀고 나쁜 꾐에 빠져 연예인이 되겠다며 학교를 안 나오겠다고 담임선생님을 찾아온’ 학생이 되었다.

“저는 나쁜 친구를 사귄 적 없고요. 나쁜 꾐에 빠진 것도 아니에요. 몇 달간 일찍 조퇴를 하겠다는 거지 학교를 결석할 생각도 없어요.”

현덕은 해명했지만 선생님들은 현덕의 해명을 곱게 듣지 않았다. 다른 학생도 아닌 현덕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담임선생님은 현덕을 앞에 앉혀둔 채 현덕의 어머니와 장장 삼십 분 동안 통화했다. 담임선생님은 현덕의 어머니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허락했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현덕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현덕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현덕이 얼마나 미래가 촉망되는 학생인지, 학교에서 얼마나 기대가 큰지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들으며 무척 좋아하셨지만 현덕과 약속한 대로 현덕의 편이 되어주셨다.

“현덕아, 다시 생각해보렴. 너는 판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니. 그 진로를 포기하려는 거니? 연예인? 그래, 텔레비전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 돈도 많이 벌 거 같고 사람들한테 사랑도 많이 받아 행복할 거 같고.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만 명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해도 한 명이나 될까 말까 해. 또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견뎌야 하는지 몰라. 그나마 세상사 중 공부가 제일 쉽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네가 지금 가려는 길은 공부보다 정말로, 정말로 힘든 길이야.”

어머니를 설득시키지 못한 담임선생님은 다시금 현덕을 붙잡았다.

“알고 있어요.”

현덕은 선생님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의 말씀에 심히 동감했다.

선생님도 현덕도 공부가 쉬운 일이라고 낮추어 보려는 마음은 없었다. 더구나 현덕은 사시 공부에 오롯이 십삼 년을 쏟아부은 경험이 있었다.

현덕에게 공부는 당연하고 익숙하고 즐겁고 해볼 만한 것이었다. 공부하는 모든 순간이 쉽고 편하고 행복했던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험난하고 성공하기 힘든지 현덕에게 설명해주고자 애썼다.

“선생님, 저는 판사가 되고 싶어요.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이런 걸 들고 왔니.”

담임선생님은 당장이라도 현덕이 가져온 공문을 찢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그런데 판사가 되고 싶은 만큼 이것도 나가보고 싶어요. 안 하면 후회할 거 같아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저 선생님께 미리 말은 못 드렸지만 중학교 때부터 이 회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해왔어요. 학교생활이랑 병행하면서, 학교생활에 지장 안 받으려고 많이 노력했고요. 그런데 이번에 여기 나갈 기회가 생겨서, 이거 나가는 동안만큼은 정말 여기에 집중해보고 싶어요.”

“연습생 생활을 쭉 해 왔다고? 현덕이, 네가?”

선생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짐작이 갔다.

현덕이 다니는 학교에는 연예 기획사 연습생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세 명 더 있었다. 세 학생은 누가 봐도 연예 기획사 연습생이라는 티가 났다. 공문으로 특별히 허락받은 염색한 머리, 몸에 딱맞게 줄여 맵시를 낸 교복, 점심시간 전에 조퇴, 수업 시간에 매일 조는 모습, 등등. 현덕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여기서 탈락하면 그때는 정말 다시 열심히 공부만 하려고요.”

“지금도 중요한 시기야, 현덕아. 고3 딱 1년만 공부 열심히 한다고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네. 선생님. 알아요. 지금 제가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걸. 이도 저도 아니게 될지 모른다는 거. 근데요. 혹시라도 나중에 수능을 못 봐서 재수하게 되더라도, 그래도 지금은 이걸 해보고 싶어요. 그래야 제 삶에 후회가 없을 거 같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수능을 잘 봐야 한다. 대학에 가서는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열심히 사법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 사법시험 합격 전까진 오직 합격만을 바라며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 생각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만이 옳은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사법시험을 십삼 년 동안 준비했다. 남들보다 느리게 걸어 겨우 시험에 합격했고, 바로 교통사고를 당해 생이 끝나버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한번 삶을 살아 나가고 있지만. 경험해 보았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게 있어 그걸 해보는 건, 그래서 혹시라도 재수를 하거나 삼수, 사수, 오수를 하게 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틀린 일이 아니었다. 결코.

현덕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담임선생님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허락해주세요. 후회 없이 제대로 한번 해보고 돌아올게요.”

“하, 참. 다른 학생도 아니고 현덕이 네가…….”

담임선생님은 한참 망설이다 겨우 허락했다. 대신 프로그램에서 탈락하면 바로 제정신 차리고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고 각서라도 쓰고 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탈락하고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큰 산을 하나 넘은 현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후 1시, TE엔터테인먼트에 들어섰다.

연습실을 가니 자룡과 주민이 멀찍이 떨어진 채로 몸을 풀고 있었다. 오늘은 셋이서 함께하는 댄스 트레이닝 첫날이었다.

현덕은 자룡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찢고 몸을 풀었다. 주민은 괜스레 그 근처를 얼쩡거리며 자룡에게 말로 시비를 걸었다. 자룡은 분을 못 이겨 ‘씨-’를 내뱉었다가 “씨앗에서 발아하는 새싹 같은 놈아.”라며 이를 갈았다.

오 팀장은 자룡이 ‘씨발’을 말할 때마다 벌금을 500원씩 매기겠다고 선언했다.

매일매일 TF팀이 연습실 카메라 촬영분을 빠른 속도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서 자룡이 ‘씨발’을 몇 번이나 말했는지 따로 체크하는 전담 직원이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자취하는 자룡은 ‘씨발’로 자신의 한 달 식비를 날릴 위기에 처했다. 자룡이 식비를 지키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주민이었다.

자룡이 여러 번 새싹을 틔운 후에야 댄스 선생님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현덕이 만났던 초급반 댄스 선생님이 아니었다. 핑크키위나 TE엔터테인먼트의 다른 아이돌 그룹의 주요 타이틀 안무를 짜주는 안무팀의 안무가였다.

안무팀 단장은 새로 짠 데뷔조를 담당하고, 이 안무가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현덕이네를 담당할 거라고 했다.

댄스 선생님은 셋의 인사를 받으며 유독 주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깊은 한숨 소리는 덤이었다. 전날 보컬 선생님이 주민을 두드러지게 칭찬해서 현덕과 자룡이 약간 민망하고 뻘쭘했던 터라. 현덕과 자룡은 약간 의아했다.

‘왜지? 우주민이 춤까지 너무 잘 추는 건가? 그래서 나랑 자룡 형이랑 같이 연습하고 프로그램 출연해야 하는 우주민을 보자니 아까워서 그러시는 건가? 하지만 나는 몰라도 자룡이 형은 춤 진짜 잘 추는데?’

현덕의 머리에 그려진 커다란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일단 현재 상태를 정확히 체크하겠다며, 노래를 틀어 자유롭게 춤을 춰보라고 했다.

자룡은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났다.

댄스 선생님이 빠른 비트의 팝을 틀어 주었다. 현덕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약간 흐느적거리는 안무가 붙었던 곡이었는데, 자룡은 절도 있게 춤을 췄다. 즉석에서 자룡이 노래에 맞춰 안무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1절에선 약간 노래와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2절에 가서는 원래 이 곡의 안무가 자룡이 추는 춤이라고 생각될 만치 자연스러웠다.

그런 자룡을 보는 댄스 선생님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곡이 끝나자 댄스 선생님과 현덕은 물개 박수를 쳤다.

그리고 30초 후.

댄스 선생님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걸 봐야 했던 자룡과 현덕은 돌이 되었다. 이들을 그렇게 만든 건 주민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민의 춤이었다.

주민은 이름이 불리자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처럼 일어섰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댄스 선생님 앞에 섰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재수 없어 보이는 미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룡이 춤췄던 곡과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자, 주민이 몸을 놀리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삐삐걱.

이것 말고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다른 어떤 의성어나 의태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우주민만의 버라이어티한 춤사위였다.

현덕은 저 몸짓을 감히 춤사위라고 칭해도 될는지 인지 장애에 빠졌다.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

춤에 관해선 TE엔터테인먼트의 남녀 연습생들을 통틀어 최고라 할 수 있는 자룡은 경악에 휩싸였다.

오른팔과 오른발이 동시에 뻗어 나가 서로 다른 각도로 꺾였다. 빙그르르 도는 몸은 추수 후 논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낡은 허수아비처럼 휘적댔다.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90도 꺾여 파리가 날갯짓하듯 바닥을 비빌 때. 현덕은 눈을 감아버렸다. 시력을 보호해야 한다는 뇌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얼굴, 저 몸으로 저럴 수 있다니.’

진정 신은 공평하시구나.

딱히 별다른 종교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신이란 게 존재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삐걱. 삐걱. 삐삐걱.

모두의 침묵 속에 주민의 춤사위는 계속되었다.

산을 하나 넘었더니 또 산이 나타났다. 담임선생님이 남산이라면, 춤추는 주민은 에베레스트였다.

‘이래서 그동안 월말 평가 때 노래만 불렀구나. 평가하는 직원분들도 춤 왜 안 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노래가 끝나 주민의 춤사위가 끝나고도 연습실 안의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주민은 수치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댄스 선생님이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살짝 고개를 까닥이고는 돌아섰다.

“주민아, 프로그램 나가고 싶니?”

댄스 선생님이 주민의 널찍한 등에 대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의미 없는 질문을 하시네요.”

“너 내가 말했지. 너 이번에 데뷔조 들어가는 거, 다 찬성했지만 나만 반대했다고.”

주민은 여전히 댄스 선생님에게 등을 돌리고 현덕과 자룡 쪽을 보며 서 있었다. 때문에 현덕은 주민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댄스 선생님의 말씀에도 주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대박, 씨……앗스럽네. 그런 평가를 받았다고?”

오히려 현덕의 옆에 있는 자룡의 얼굴이 더 버라이어티해졌다.

“네, 치매 걸리신 건지, 말한 걸 잊으시고 볼 때마다 말씀하시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네요.”

주민이 돌아섰다.

“너 이 정도 실력……. 하, 실력이란 단어를 쓰기도 미안한데. 아무튼 이 정도 가지고는 절대 데뷔 못 한다고 했지. 네가 까먹을까 봐 볼 때마다 말했던 거야. 그래도 그동안 주민이 네가 매일같이 열심히 연습했던 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데뷔조 준비 기간 동안 내내 빡세게 연습해서 다른 멤버들한테 피해 안 갈 정도가 되면, 그러면 내가 너 인정해주겠다고 했지.”

“그러셨죠.”

“그건 네가 데뷔조에 속했을 때 가능했던 거였어. 데뷔조로 준비하는 거랑 거의 생방송처럼 촬영하고 방영할 TV 프로그램 나가는 건 천지 차이라고.”

댄스 선생님은 아예 머리를 싸매며 주저앉았다.

“아우, 머리야. 오 팀장, 이 미친 인간은 왜 하필 딴 애도 아니고 이 자식을 내보낸다고 결정해가지고는.”

매일같이 트레이닝을 위해 만났지만, 그럼에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주민의 춤사위였다. 주민의 춤을 볼 때마다 댄스 선생님은 깊은 내상을 입었다. 이미 이 연습실에 들어오기 전에 우황청심환을 먹고 들어왔지만, 그 효과가 몸에 돌기 전에 우주민 바이러스가 댄스 선생님을 감염시켜버렸다.

속에서 열불이 나 죽겠는데, 나 죽었소 하고 엎드려야 할 주민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불난 데 기름 붓는 격이었다.

댄스 선생님은 주민이 데뷔조로 결정이 나자마자 주민을 회사 어디 빈 연습실에 가둬 놓고 삼시 세끼 군만두만 먹이며 춤 연습을 시킬 계획을 짰다.

데뷔곡이 나와 안무가 잡히면 하루에 열일곱 시간씩 그 안무만 계속 추게 할 계획이었다. 아예 몸에 그 안무를 박아버리고자 했다. 서너 달 동안 한 곡만 미친 듯이 연습시키면, 북극곰도 비보잉을 할 수 있게 되리라. 하지만 오 팀장과 우주민은 댄스 선생님의 눈물겨운 계획을 산산조각냈다.

‘몇 달 동안 똑같은 춤만 반복시켜도 될까 말까 한 애를,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내보낸다니.’

다른 것도 아니라,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 백여 명과 춤과 노래를 경쟁하는 프로그램에!

“너를 어쩌면 좋니.”

댄스 선생님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지 모르겠네요. 그 수를 생각해내는 게 선생님의 업무일 텐데.”

댄스 타임이 끝난 뒤 여유를 되찾은 주민은 다시금 그 화려한 미소를 흩뿌리며 말했다.

“이 싸가지야.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니?”

주민은 나오던 눈물도 쏙 들어가게 했다.

‘앓느니 죽지, 죽어.’

댄스 선생님은 잠시나마 감상에 젖어 있던 자신을 탓했다.

“……됐다, 됐어. 일단 들어가 있어.”

훠이훠이- 댄스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며 주민을 몰아냈다.

다음 차례는 현덕이었다.

‘긴장되네.’

처음에 자룡 다음으로 주민이 나갈 땐 자룡과 비교당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좋아했건만. 이제는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됐다.

댄스 선생님은 10년은 더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힘없는 손짓으로 현덕에게도 같은 노래를 틀어 주었다. 이미 두 번이나 들었던 그 노래였다.

현덕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자룡처럼 독창적일 순 없었다. 나름 익숙해진 곡에 맞춰 그동안 자신이 배워 왔던 춤동작들을 연결시켰다.

현덕은 자룡처럼 노래만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그 음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계속 머릿속으로 동작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댄스 선생님이나 자룡, 주민을 볼 틈이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삼 분 동안 춤을 췄다. 곡이 끝나자 현덕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짝짝짝- 댄스 선생님이 박수를 쳤다. 자룡 때처럼 격렬한 박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민을 볼 때와는 다르게 밝은 표정이었다.

“많이 늘었네. 저번에 볼 때보다 훨씬.”

칭찬은 현덕을 웃게 만들었다.

‘인생은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구나.’

갑자기 주민의 존재 자체가 고마워졌다.

“현덕이는 자세가 반듯하고 춤 선이 정확해서 좋아. 현덕아, 나중에 쌤이 춤 관련 책 내면 사진 모델 좀 돼 주라. 자룡이, 네가 훨씬 잘 추긴 하지만 이런 건 현덕이한테 배워야 해. 너만의 느낌 넣는 것도 좋지만, 그건 너 파트 포인트 때 그래야 하는 거고. 나중에 그룹으로 데뷔해서 전체 군무 출 땐 현덕이처럼 하는 게 정석이야.”

“전 자룡이 형 발끝의 때만도 못 미치는데요?”

“어머, 얘, 넌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 자룡이가 잘 추긴 하지. 내가 언제 네가 자룡이보다 잘 춘댔니? 반듯하게 잘 춘다고 했지. 그게 네 강점인 거야. 자룡이 저 자식은 가오 잡는다고 슬슬 춤에 겉멋이 들어서, 그거 조심하라고 그러는 거고.”

댄스 선생님은 오버하지 말라며 현덕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현덕이 춤 선 좋다는 건, 저도 완전 동감이에요. 씨……앗, 현덕이 춤추는 거 보면 진짜 깔끔하다니까요.”

자룡도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며 현덕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감사합니다.”

현덕은 어쩐지 민망해 뒷머리를 긁적였다. 댄스 선생님께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후 남은 시간 내내 댄스 선생님은 주민을 어찌하지 못해 안달했다. 현덕과 자룡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프로그램 촬영 시작 때 선보일 평가곡을 고민했다.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회사도 현덕과 자룡도, 초반에는 예전 ‘트윈 트윙클’ 때와 같은 방식으로 출연진을 소개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기획사 단위로 무대에 올려 심사위원에게 그 실력을 평가하게 하는 방식.

“우리 셋이서 하려면 최대한 쉬운 춤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럼 형이 손해잖아요.”

“난 랩을 잘해서 괜찮아.”

“그러지 말고 저쪽을 다리 다쳤다고 붕대 감아서 의자에 앉혀 놓으면 어떨까요. 센터에 의자 놓고 앉아서 노래 부르라 하고 양옆에 형이랑 저랑 서서 춤추면?”

“붕대 감아 놓는 건 좀 그런데, 의자에 앉혀 놓는 건 좀 땡기네. 아, 근데 계속 우주민 연습생 이름을 안 불러?”

대화를 하던 중 자룡이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현덕에게 물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고 그래서요. 이름 부르기가 어색해요.”

현덕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스레 목이 가려워지는 거 같아서 목을 긁적였다.

주민과는 ‘우주민’ 이름 석 자 때문에 초반부터 트러블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민의 이름을 정식으로 듣고 소개를 받아도 영 입에 주민의 이름이 붙질 않았다.

‘형이라고 부르기는 더더욱 어색하고.’

현덕은 뚱하게 주민을 보았다. 댄스 선생님이 주민에게 잔소리를 쏟아붓고 있었다. 주민은 대놓고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난 또 저번에 나 구하러 같이 와서 친한 줄 알았지.”

자룡은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댄스 수업이 끝났다. 이후엔 셋이서 함께 할 평가곡을 같이 의논했다.

자신의 춤 실력을 제대로 인지하고는 있는지, 주민은 큰 불만이 없었다.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앉자, 현덕은 괜스레 주민의 머리에 눈이 갔다. 오늘도 주민은 갈색 머리 가발을 쓰고 있었다.

저 안에 진짜 머리가 있는 게 아쉬웠다.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던데 왜 굳이 가발을 쓰고 다니는지도 궁금했다.

현덕이 주민을 쳐다볼 때마다 자룡은 옆구리를 쿡쿡 찔러 현덕이 다시 자신을 보게 했다. 현덕이 간지럼을 타 킥킥대면 주민이 그런 현덕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는 괜히 자룡에게 말로 시비를 걸어 자룡의 입에서 ‘씨발’ 소리가 나오게 했다.

밤 10시가 되면 셋은 내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현덕이 강력하게 주장한 귀가 시간이었다.

자룡은 아예 침낭을 들고 회사로 와서 연습실에서 석 달 동안 합숙이라도 하자고 주장했다. 주민은 돌았냐고 코웃음을 쳤고, 현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을 푹 자야 돼요. 그래야 배우고 익힌 게 자는 동안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니까요. 잠을 줄이고 연습하는 건 효율이 낮아요. 체력도 약해지고. 프로그램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최대한 체력을 길러 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귀가 시간은 밤 10시로 못 박혔다.

현덕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침 공부를 하는 대신 TV 프로그램을 봤다. ‘트윈 트윙클’을 기본으로 최근 3년 이내 개봉한 모든 연예인 선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TV 프로그램들이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떤 편집이 주로 이루어지는지. 눈에 띄게 자주 나오는 출연자는 어떤 성격과 특성이 있는지 리뷰를 썼다.

학교에 가서는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트윈 트윙클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행히 민철이를 비롯한 반 친구들이 트윈 트윙클을 좋아했던지라 이런저런 얘기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항우영과 윤우희 사건을 비롯해 트윈 트윙클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건과 악의적 편집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했다. 그 시절 글을 찾는 건 꽤 많은 인내력과 지구력이 필요했다. 삭제된 글이 많았지만 정리 글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논란을 설명해주는 웹페이지들이 꽤 남아 있어 도움이 되었다.

TE엔터테인먼트에서의 일정은 수업과 연습의 반복이었다. TF팀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안 난 프로그램과 관련된 사안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아왔다. 그에 맞춰 현덕과 자룡, 주민은 프로그램 촬영을 준비했다.

셋이서 함께 선보일 평가곡을 연습하고, 각자 자신의 특기를 선보일 개인 평가곡도 준비했다. 자룡은 랩과 춤을 준비했다. 현덕과 주민은 보컬 곡을 준비했다.

빽빽한 시간표로 움직이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갔다. 고3 때만큼이나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때문에 현덕은 토요일 밤, 집 현관문 앞에 서서야 오늘이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씨, 아부지가 뭔데 안 된다고 그래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건데. 난 완전히 진지하거든요!”

“넌 부모도 없이 혼자 태어났냐. 무슨 말버릇이 그래. 군대를 헛 갔구나. 하나도 철이 안 들었어!”

“원래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는데, 그런 소리도 안 들어봤죠? 머릿속엔 법밖에 없으니까, 나 같은 청춘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모르는 거예요. 잘 해보라고 응원은 못 해줄망정 듣자마자 왜 그렇게 역정을 내는데요. 내가 진짜 하고 싶다니까!”

현관문을 열자 맹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란 걸 염두에 두고 있는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현덕은 맹덕의 목소리가 복도로 새어나갈까 봐 얼른 현관문을 닫았다.

“우리 현덕이 왔니.”

문 여닫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어머니가 현관으로 걸어 나오셨다. 어머니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현덕을 맞이하셨다.

“형 왔어요? 형이랑 아버지랑 왜 싸우시는 거예요?”

“맹덕이가 제대 후에 학교 자퇴하고 다시 수능 공부해서 다른 학교를 가겠다고 하지 뭐니. 그래서 난리가 났단다.”

“아!”

어머니의 말에 현덕은 눈을 껌벅이며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이 즈음이었던가?’

예전에도 꼭 이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때는 연예 기획사 연습생이 되어서가 아니라 학교 야자를 마치고 집에 왔었다. 아버지와 맹덕은 지금이랑 똑같이 싸우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현덕은 어머니와 함께 거실로 갔다. 거실 풍경은 현덕의 기억대로였다. 드라마 재방송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군복 차림인 맹덕은 빨간색 천을 본 황소처럼 잔뜩 열받아 씩씩대고 있었다. 서서 거실을 왔다갔다 걸어 다니는 아버지의 얼굴도 붉었다. 넥타이는 한껏 늘어져 있었다. 항상 반듯하게 넘기는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둘 다 최고로 흥분한 상태였다.

“난 간호사가 될 거라니까요!”

“간호사가 뉘 집 개 이름이냐. 너 같은 놈이 다른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겠다니. 누가 너 같은 놈한테 자기 생명을 맡기겠냐. 무책임한 놈! 그림 그리겠다고, 그렇게 반대를 해도 기어이 그쪽으로 진학하더니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 그러면서 뭐? 간호사를 해? 간호사란 직업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현덕의 삶을 통틀어 생각해 보건데, 아버지가 이정도로 화를 낸 적은 이 사건이 유일했다.

“내가 만만하게 본다니, 뭔 소립니까. 아들을 그렇게 몰라요?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거로 보여요? 나름 군대 가서 빡세게 구르면서 고민, 고민하다 겨우 결정한 건데! 내가 그 싫은 공부를 다시 하겠다니까? 이게 농담으로 들려요?”

맹덕이 끝까지 아버지에게 맞선 것도 이 사건이 유일했다. 기억과 똑같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형이-’

집을 나가리라.

“됐어요. 아버지한테 이해를 바란 내가 등신이지. 이놈의 집구석! 아들이 간호사 되겠다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요? 내 인생 내가 잘 살겠다는데, 젠장. 괜히 말했네. 됐어요.”

맹덕이 군복 차림 그대로 어머니와 현덕을 지나쳐 집을 나갔다. 곧 등 뒤에서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맹덕은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현관문은 조용히 닫았다. 옆집에 피해를 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놈은 어째 군대를 가도 전혀 변한 게 없어. 도대체 언제 철이 드는 거야.”

아버지는 양복 재킷을 벗어 소파에 집어던졌다. 양복 재킷이 철푸덕, 소파에 들러붙었다. 역시나 바닥에 던지면 아랫집에 피해를 줄까 봐 소파에 던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서재로 들어가자 거실에는 현덕과 어머니만 남았다.

‘그때 나는 어땠지? 뭘 어떻게 했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 방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거나 그러진 않았겠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내가 그렇게까지……. 아닐 거야.’

현덕은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움직였다.

“어머니, 저는 형한테 가볼게요.”

현덕은 돌아서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었다.

“그래, 너희 아버지는 내가 맡으마. 맹덕이는 어디 근처에 있을 거야. 괜히 자취하는 친구네 전화해서 신세 진다고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른 데 못 가게 잘 달래서 데리고 들어오렴. 겨우 휴가 나왔는데, 그래도 집에서 쉬어야지.”

“네. 꼭 데리고 들어올게요. 그리고 형 웬만한 친구들은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 못 찾으면 형 친구들한테 전화해 볼게요.”

현덕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맹덕은 어디 멀리 가지 않고 집 앞 놀이터에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삐걱삐걱, 그네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뿜어져 나와 흩어졌다.

“형, 담배 안 피우잖아.”

현덕은 옆의 빈 그네에 앉았다.

“군대 가서 배웠어. 너도 피울래?”

맹덕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현덕에게 내밀었다. 담배를 내려다보는 현덕의 얼굴이 뚱해졌다.

“나 고등학생이야.”

“아, 맞다. 미안.”

맹덕은 짧은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겸연쩍어했다.

“짜식, 너는 왜 나 헛갈리게 애늙은이처럼 구냐. 너 보면 꼭 서른세 살 먹은 형님이랑 있는 거 같아.”

맹덕은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껐다.

“왜 어머니가 나 도망갈까 봐 붙잡아 오래냐?”

“오랜만에 휴가 나왔는데, 또 어디 가면 싫어.”

“짜식, 잘 지냈어?”

“응. 형은?”

“나야 뭐. 잘 지냈지. 군대에 말뚝 박으란 소리도 심심찮게 듣고.”

맹덕이 웃으며 발을 크게 굴렀다.

삐걱- 그네가 높이 흔들렸다.

군복을 입은 다 큰 사내가 긴 다리를 잔뜩 구부리고 그네를 타고 있다. 그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궁상맞아 보였다. 어쩐지 우울해 보이는 맹덕의 얼굴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형, 나는 무조건 형 응원해.”

“뭘.”

“뭐든.”

“내가 뭘 어떻게 할 줄 알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간호사가 될 거잖아.”

“……들었냐?”

“중간부터? 처음부터는 아니고.”

“그래.”

맹덕이 툭툭, 발끝으로 모래를 찼다. 현덕은 그런 맹덕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자신은 이때의 맹덕에게 무어라 말해줬을까. 형을 믿는다고, 형은 잘할 거 같다고, 그렇게 말해 주었을까? 부디 그랬기를 바라지만. 아니었던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맹덕은 웹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그 간절한 꿈에 비해 그림 실력은 많이 모자랐다. 관련 학과로 대학을 들어갈 때도 실기 점수가 많이 낮아 대기 번호를 받았다. 학교 문 닫히기 직전에 겨우 추가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래도 맹덕은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 열정은 진짜였다. 옆에서 하루만 맹덕을 지켜본다면 누구라도 만화를 향한 맹덕의 마음이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맹덕이 대학에서 만화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부모님도 그런 맹덕의 노력과 열정만큼은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군대에 간 맹덕은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 휴가 때 나와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수능 공부를 다시 해서 간호학과를 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화를 냈다. 아버지는 맹덕이 자신의 삶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막산다고 보았다. 판사 아버지를 두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겁 없이 제멋대로 군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산골짜기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오로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공부를 했다. 오직 법관이 되겠다는 목표로 공부해 법관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런 아버지가 보기에 맹덕은 너무 맹했다. 만화를 그리겠다고 했다가 간호사가 되겠다며 이랬다가 저랬다 하다니.

게다가 다른 직업도 아니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간호사라니? 아버지는 군대에서 무슨 이상한 만화를 보고 이상한 환상에 빠져 헛바람이 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때부터 맹덕이 정말로 간호 대학에 갈 때까지 맹덕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의 사이가 다시 좋아진 건 맹덕이 정말로 간호학과 입학 증명서를 가져오고 난 뒤였다.

그 긴 기간 동안 맹덕은 혼자 자신이 결심한 미래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아버지가 믿지 않고, 어머니가 정말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고, 동생이 자기 공부에 바빠 관심도 가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덕은 그런 맹덕이 훗날 어떻게 되는지 알았다. 현덕이 킥킥 웃자 맹덕이 현덕을 째려보았다.

“뭐가 웃기냐, 형한테 혼날래?”

“아니, 형 보고 웃은 거 아닌데?”

현덕은 괜히 그네를 흔들며 대꾸했다. 확실히 현재의 맹덕을 보고 웃은 건 아니었다. 미래의 맹덕이 생각나 웃은 것이었다.

맹덕이 간 학교는 맹덕이 2학년이 되자 서울에 있는 모 여대와 통합되었다. 그래서 맹덕은 전국에 단 일곱 명뿐인, 여대를 다니는 간호학과 남학생이 됐다. 그 때문에 TV에도 출연했다.

여대 이름이 새겨진 학생증을 받아와서는 집에 와서 절규하던 맹덕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껄껄 웃으며 너무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모습도.

이후 맹덕은 학교를 무사히 졸업해 정말 멋진 간호사가 된다. 대학 병원 소아과에 들어가선, 자기가 환자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많은 줄 아느냐고 툭하면 뻐겼다.

아버지는 남들 앞에서 장남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셨다. 남들이 남자가 남세스럽게 의사도 아니고 무슨 간호사냐고 말하면, 남의 아들이 사람을 구하는 귀한 일을 하는데 무식한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분명 나중에, 아버지는 형을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현덕은 오로지 사실에 기반하여 예언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버지 펄펄 뛰면서 화내시는 거 못 봤냐?”

“그건 걱정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 형이 정말로 웹툰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걸 아시니까 많이 놀라신 거지, 형이 간호사 되는 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닐 거야.”

“얌마, 아버지를 겪어도 내가 너보다 몇 년을 더 겪었어. 짬밥 차이는 무시 못 하는 거야. 아버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맹덕의 말에 현덕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은 확실히 내가 형보다 아버지를 더 오래 겪은 걸 수도 있는데?’

맹덕에게 말해봤자 뭔 개소리냐고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나는 형이 간호사 된다는 거 찬성해. 형이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거라는 거 아니까.”

현덕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형은 좋은 간호사가 될 거야.”

현덕의 말에 맹덕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목이 멘 듯 보였다.

“……제일 잘생긴 간호사다.”

“응. 제일 훌륭하고 잘생긴 간호사.”

“고맙다. 김현덕.”

맹덕의 축 처졌던 어깨가 다시 판판해졌다.

“그나저나 너, 그건 어떻게 됐어?”

“뭐?”

“너 그, 뭐, TV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안 그래도 오늘 아버지랑 형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나 나가기로 했어.”

“나가기로 했다고?”

현덕의 말에 맹덕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지금 이 상태에서 뒤통수를 때리면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 그래서 요즘 맨날 학교 일찍 조퇴해서 회사 가. 연습 많이 하려고.”

“네가 학교 공부를 팽개치고 그걸 한다고?”

“팽개치는 건 아닌데.”

“암튼. 너 진짜 진지하구나.”

대화 주제는 현덕의 TV 프로그램 출연으로 바뀌었다. 맹덕은 조금 전 자신이 집에 폭탄을 하나 던져 놓고 나온 건 까맣게 잊고, 현덕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현덕은 순순히 대답했다. 맹덕은 현덕의 말을 듣고는 잘 생각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나저나 그거 언제 방송한대? 웬만하면 나 병장 된 다음에 했으면 좋겠다. 남자들만 드글드글 나오는 걸 딴 놈들이 순순히 봐줄 리가 없는데.”

맹덕의 가장 큰 걱정은 그것이었다.

***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공식 촬영 일자가 가까워졌다.

‘아이돌☆트리니티’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이 결정되어, 회사에 정식 공문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프로그램의 정식 이름은 ‘트라이 온’이었다.

처음 프로그램 이름을 전해 들었을 때 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공책에 ‘트라이’가 무엇일지 적어보았다.

Try or Tri

자룡과 주민이 거의 동시에 공책을 들여다보았다.

“뭘 쓴 거야?”

자룡이 물었다.

“트라이 온 이라길래요. 트라이가 뭘까 싶어서요.”

“당연히 이거 아니겠어?”

자룡이 Tri를 가리켰다.

“이거 노력하다? 뭐 그런 뜻이지? 아이돌 그룹 선발 프로그램이잖아. 노력하는 연습생을 뽑아달라! 뭐 그런 의미 아니겠어?”

자룡의 말에 주민이 코웃음을 쳤다.

“정말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보네. 아까 오 팀장 설명 들은 거 전혀 기억 못 하지? 연습생들 세 팀으로 나눠서 경쟁시킨다잖아. 당연히 이 뜻이겠지.”

주민은 Try를 가리켰다.

“현덕아, 넌 뭐 같아?”

“김현덕 연습생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네?”

둘은 짠 듯 동시에 현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 저요?”

현덕은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는 잠시 고민했다.

‘둘이서 뜻을 바꿔 말했다고…… 말하지 말자.’

현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샤프로 공책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Try와 Tri가 모두 동그라미 안에 들어갔다.

“둘 다일 거 같아요.”

“뭔 소리야, 김현덕. 씨……실하고 날실이 옷감 짜는 소리 하네. 사내 자슥이 이거면 이거다! 딱 선택할 줄 알아야지.”

어째서인지 자룡은 화를 냈고, 주민은 인상을 쓰며 공책을 노려보았다. 졸지에 어중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현덕도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야야, 아까 준 자료에 빠졌는데, 그 프로그램 정식 로고 나왔다더라. 이거 보고 적당한 드립 좀 생각해봐. 센스 있게. 자룡이 넌 프리 랩 같은 거 한번 구상해보고.”

연습실에 온 오 팀장이 내민 종이를 본 현덕의 얼굴은 더 찌그러졌다.

‘뭐야, 내 말이 맞잖아.’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소년 프로젝트 : 트라이 온(Tri/y O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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