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납치 (10/36)

2. 납치

케이블 채널 측에서 꽤 야심 차게 준비하는 기대작이 맞긴 한 건지. 촬영 시작 한 달 전부터 프로그램 런칭 관련 기사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주로 출연이 확정된 연습생들에 관한 기사였다.

TE엔터테인먼트는 초반 관심을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현덕과 자룡, 주민 중 가장 화제성이 있는 건 자룡이었다. 자룡은 평가곡 연습 중 오 팀장에게 붙잡혀 끌려 나갔다. 주요 인터넷 뉴스 매체와의 인터뷰가 주르륵 잡혔다고 했다.

현덕은 자룡이 돌아올 동안 주민과 둘이서 평가곡 안무를 연습했다. 노래에 관련해선 현덕과 자룡이 인정할 만큼 천부적인 감각을 보이는 주민이건만. 어째서인지 춤으로는 영 맥을 못 추었다. 자룡은 주민을 염두에 두고 안무를 최대한 쉬운 동작 위주로 짰지만 주민은 그마저도 감당하지 못했다.

현덕은 주민에게 한 동작 한 동작을 쪼개 몸을 움직이도록 했다. 꾸준히 연습 일지인 ‘댄스도보통지’를 써 온 덕분에 안무 동작을 쪼개는 건 쉬웠다.

주민은 춤과 관련된 내용이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불과 10분 전에 익힌 동작도 다시 해보라고 하면 가르쳐준 것과 전혀 다른 동작으로 선보였다. 그것도 창의력이라면 창의력이었다.

‘어쩌면 배운 대로만 추는 나보다는 차라리 이런 게 더 독창적이고 포스트모던한 게 아닐까? 혹시 내가 댄스계의 피카소나 앤디 워홀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만약 자룡이라는 훌륭한 댄싱 머신이 곁에 없었더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주민은 춤을 출 땐 매우 진지했다. 본인도 본인이 못하는 줄 알았고, 그렇기에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열심히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현덕은 주민이 한 동작을 익힐 때까지 오십 번이고 백 번이고, 계속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신기한 듯 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뭐, 내가 고맙겠지.’

현덕은 으레 주민의 생각을 짐작하고는 내심 으쓱했다.

‘은혜를 갚아야지. 까치도 갚는 은혜를, 인간인 내가 못 갚을까.’

현덕은 분명 그의 말에 큰 도움을 받았다. 지금이야 그때의 고마운 마음이 많이 산산이 조각 나고 부서져 넋이라도 있고 없고 수준이 되었지만.

‘그나저나 그 인터뷰 영상을 볼 때만 해도 이렇게 우주민이란 사람이랑 같이 있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스물여덟의 현덕은 주민이 서른 살 때 찍었던 인터뷰 영상으로 주민을 만났다. 그때 주민은 최고의 배우였다. 현덕은 사법시험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자살까지 생각하던 고시 낭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현덕과 주민은 같은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 신분으로 한 연습실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현덕이 주민에게 춤 동작을 가르쳐주고 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현덕은 새삼스럽게 주민을 바라보았다.

어리고 사나운 주민이 눈앞에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자세를 잡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팔다리를 기묘하게 꺾은 채로.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이렇게.”

현덕은 뒤로 꺾인 주민의 팔을 잡아 앞으로 밀어주려 했다. 현덕의 손이 닿기 전, 주민의 팔이 앞으로 도망갔다.

‘또?’

현덕은 눈을 깜박였다.

셋이서 한 연습실을 쓰게 된 이후. 주민은 현덕과 둘이서만 있게 되면 절대로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현덕이 자세를 알려주기 위해 주민의 몸에 손을 대면 뒤로 물러서며 현덕의 손길을 피했다. 현덕이 잘 하고 있다고 위로라도 하면 현덕을 외계인 보듯 쳐다보았다.

한두 번이면 내가 예민한가, 생각하고 말겠지만. 자꾸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교통사고가 나기 전 기억. 현재의 달라진 삶. 그리고 어린 우주민과의 만남.

그 교차점에 서서 기묘한 감상에 젖어버린 현덕이건만. 주민은 현덕의 감수성을 그런 무식한 방식으로 날려버렸다.

‘자꾸 왜 이러는 건데. 너님이 결벽증도 아니고. 내가 세균맨으로 보이나.’

현덕은 욱하는 기분에 사로잡혀 한 발 더 나아갔다.

“아뇨, 이렇게요.”

도망가는 주민의 팔을 붙잡아 앞으로 쭉 벌렸다. 슬쩍 주민을 올려다보니, 주민이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현덕의 이마에 주름이 쫙 그어졌다.

‘자룡 형이랑 있을 때는 안 그러면서.’

주민은 현덕과 자룡이 둘이서 이야기하는 꼴을 가만 두고 보지 못했다. 현덕과 자룡이 말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자룡에게 시비를 걸어 ‘씨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랬으면서. 막상 둘만 남으면 뻣뻣하게 굴었다.

‘쪽팔려 하는 건가?’

현덕은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았다.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다가 이제 슬슬 친해지고, 내 도움도 받고 그러니까 민망해졌나?’

그러고 보면 참 파란만장한 인연이었다. 현덕은 주민에게 목도 졸려 보고, 명치도 거하게 얻어맞았다. 주민은 현덕에게 세 번 까였고, 넥 슬라이스도 당했다.

‘우주민이랑 이런 사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현덕은 또 자신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서는 주민을 확 잡아당겼다. 정확한 자세를 잡아주며 실없이 웃었다.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정말 쪽팔려 하는 거면 좀 귀여운데? 아직 어리구나. 어려. 좋을 때네.’

주민이 벽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한참 함께 연습하다 지쳐 쉬는 시간을 가질 때였다. 연습실에 너부러진 현덕의 눈앞에 생수병이 툭, 나타났다.

“어?”

맨 처음에는 생수병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현덕은 생수병을 쥔 우주민을 멍하니 보았다.

물론 바로 생수병을 건네받지는 않았다. ‘이걸로 네 머리를 때리려고 대기하고 있는 거다.’라고 말할지도 모르니까.

주민은 그런 현덕을 보며 픽, 웃었다.

“설마 내가 이걸로 김현덕 연습생 머리를 치려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닌데요!”

어쩐지 민망해져서, 현덕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주민이 건넨 생수를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고마워요.”

현덕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주민의 얼굴이 굳었다. 주민은 괜히 발끝으로 연습실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현덕은 물을 마시며 그런 주민의 발길질을 보았다. 한편으로는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주민에게 예상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맞은 만큼 갚는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는 건 여전히 경계해야 할 점이었다.

하지만 현덕의 걱정과 달리 공격은 발이 아니라 입술에서 나왔다.

“애써 나를 도와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가 같은 거 딱히 없을 테니까.”

달게 물을 마시던 현덕이 생수병에서 입을 뗐다. 생수를 마신 건지, 찬물을 뒤집어쓴 건지 모를 기분이 되어버렸다.

“내가 뭔가 대가를 바라고 그쪽을 도와준다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저기 대파머리 구해줄 때 도와준 걸 빚이라 치고 그걸 갚으려고? 그런 거라면-”

“그런 거 아닙니다만.”

현덕은 주민의 말을 중간에 잘라냈다.

“사람이 호의를 보이면 고맙다고 말하면 돼요. 애써 도와준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들면 그쪽 기분이 좋아지나요?”

“호의? 그딴 걸 왜 대가도 없이 나한테 보이는 거지? 김현덕 연습생이?”

주민이 입술로만 웃어 보였다. 현덕은 그게 비웃음으로 보였다.

‘잘생긴 얼굴을 좋은 데 좀 쓰지. 저렇게밖에 쓰지 못하다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대가를 바라야 똑같은 동작을 백번씩 되풀이해서 가르쳐줄 수 있는 건데?’

갑자기 대가를 원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지금까지 주민을 도와주었던 게 굉장히 번거로운 일로 느껴졌다. 정작 연습할 때는 못 느꼈던 감정이었다.

연습 할 때 주민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못하면서도 기가 죽는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계속 현덕을 따라 하면서 동작을 익히고자 노력했다.

땀에 흠뻑 젖어 춤추는 주민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만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화보 같았다. 동작은 여전히 삐걱거리고 어설펐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이렇게 춤을 못 추는데도 왜 데뷔조로 뽑혔는지 절로 납득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감동은 주민이 입을 여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정말 재주 있는 사람이야.’

조금만 호감이 가려 하면 기다렸다는 듯 말로 그 호감을 모두 부숴버렸다. 그런 주민을 보며 자룡은 매번 대단히 ‘재주’ 있는 사람이라며 주민을 평했다. ‘재’앙의 ‘주’둥이.

현덕은 울컥하는 심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같은 프로그램 나가는 같은 팀이니까요.”

“우리가 나가는 프로그램이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이라는 걸 잊었나 보네. 같은 기획사 연습생이라고 협력해서 헤쳐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 아닌 줄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서 뭐요. 그쪽 어떻게 되든 놔두고 도와주지 마라?”

“굳이 왜 대가도 못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지 궁금할 뿐이야.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정말로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보지?”

“내가 그쪽에게 바랄 게 뭐가 있습니까? 그쪽이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전혀 없는데.”

현덕의 말에 주민의 표정이 또 변했다. 비웃듯, 아니 어이없어하듯, 아니 어리둥절하듯. 아니, 그 모두인 듯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뭐, 그쪽이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말하면 내가 고려해볼 수는 있겠지.”

“그럼 말 안 하렵니다.”

“왜?”

“내가 원하는 건 그쪽이 절대 못 들어주거든요.”

현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의 우주민은 절대로.’

그동안 셋이서 연습실 생활을 하며 조금씩, 주민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주민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건 언제나 감동이었다. 주민의 춤을 보며 자룡과 웃음을 참으려 애써야 하는 시간이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진지하게 수백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여 연습하는 주민의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움직일 뻔했다.

어떻게 쌓은 소중한 마일리지인데. 주민은 그것을 단번에 마이너스로 깎아 먹었다.

“내가 뭘 못 들어주는데?”

반쯤 빈 물병을 들고 있는 주민은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입술을 씹으며 현덕을 내려다봤다.

“말해봐. 뭔데?”

주민이 현덕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현덕은 입을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

“…….”

둘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씨이이……아앗! 힘들어 죽겠어.”

연습실 문이 덜컥 열리며, 반쯤 좀비 상태가 된 자룡이 걸어 들어왔다.

“자룡 형! 왔어요?”

현덕은 주민에게 보란 듯 벌떡 일어서 자룡에게 뛰어갔다.

“어, 어어? 어- 어.”

현덕의 과한 환영에 안 그래도 큰 자룡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 그래. 그래. 나 왔지. 왔어.”

자룡은 일단 자신에게 안기는 현덕을 덥석 껴안았다. 그러고 나선 부리부리한 눈으로 재빨리 주민을 스캔했다.

주민은 자룡에게 안긴 현덕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대략 짐작이 갔다.

‘안 그래도 요즘 저 자식이 자꾸 현덕이한테 치대서 기분 더러웠는데, 알아서 자폭을 해줬네.’

자신과 현덕, 둘이서 프로그램에 나가리라 생각했건만. 혹처럼 붙은 주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던 차였다. 게다가 매일 언어 순화 교육을 받으러 한 시간씩 연습실을 비운 새 현덕은 주민의 안무 연습을 도와준다고 했다.

‘저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우리가 형한테 방해가 되면 안 되잖아요. 열심히 연습할게요.’

이렇게 말하는 현덕에게 차마 저딴 자식 도와주지 말라고 말릴 순 없었다.

어릴 때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밍키를 옆집 못된 형한테 맡기고 시골에 내려갈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현덕은 자룡의 마음을 전혀 몰라줬다. 그 뿐이랴. 매일 혼자 교육을 받고 돌아오면 현덕과 주민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 같아 보였다. 무정한 밍키 같으니.

셋이서 함께일 때는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주민은 자룡이 현덕이랑 무슨 얘기만 할라치면 툭툭 치고 들어왔다. 자룡의 입에서 어떻게든 ‘씨발’을 얻어내려 했다. 참으로 씨앗과 씨발 사이에서 괴로운 일상이었다.

조금 전도 둘만 연습실에 놔두고 인터뷰하러 끌려가며 찜찜했건만.

‘또 저 재주 있는 녀석이 우리 현덕이 속을 긁었겠지.’

유쾌, 상쾌, 통쾌한 기분이 아랫배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씨이……. 무슨 경찰서에 끌려갔다 온 기분이야아아.”

자룡은 주민에게 보란 듯이 현덕에게 기댔다. 현덕이 무겁다고 등을 퍽퍽 내리치자, 근성이 없다면서 아예 다리에 힘을 풀고 매달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민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너 평소에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자신의 미소가 다른 사람의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라는 걸, 자룡은 처음으로 알게 됐다.

***

정식 촬영일이 다가올수록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커져갔다. 정식 촬영을 시작하고 한 달 반 후 방송이 시작되는 스케줄이건만 언론 매체의 기사나 주변의 반응은 뜨거웠다.

현덕은 이후 정말 방송이 시작할 때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오 팀장은 그런 현덕의 걱정에 그럴 리 없다고 단언했다. 오 팀장과 TF팀이 보기엔 지금 분위기가 딱 적당하다고 했다. 트윈 트윙클 때보다 더 시청률 대박이 나지 않겠느냐고 미리 예상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룡의 인터뷰 기사가 났다. 현덕은 핸드폰으로 자룡의 기사를 검색해보며 TE엔터테인먼트로 갔다.

인터넷 뉴스 창은 어제까지만 해도 ‘트라이 온’에 3대 기획사 연습생 출신이 출연한다는 소식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오늘은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JD의 트라이 온 출연 소식이 잔뜩 올라 있었다.

- TE엔터 비장의 병기 JD, ‘트라이 온’ 출연 확정!

- 핑크키위 백댄서, 솔라리스 1집 피처링 JD, 검증된 실력의 대형 루키!

- 세 번의 데뷔 실패, 네 번째 도전으로 ‘트라이 온’ 출연 선택

- TEent. 연습생 JD,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도전!”

- 대형 기획사의 준비된 연습생, ‘트라이 온’ 출연 소식에 네티즌 술렁

자룡의 인터뷰가 올라오기로 한 날인데 웬 이름도 낯선 JD?

당황했던 것도 잠시. 현덕은 뉴스 기사의 썸네일을 보고야 JD가 자룡의 예명인 걸 알게 되었다.

현덕은 스무 개도 넘는 뉴스 기사 중 무난한 제목을 단 기사들을 클릭해 읽어보았다. 회사에서 보도 자료를 뿌리고 기자들을 초대해 인터뷰를 진행한 만큼 내용은 다 비슷비슷했다.

TE엔터테인먼트에서 오랫동안 연습생 생활을 하고 몇 번이나 데뷔 실패를 경험한, 실력 좋은 연습생이 ‘트라이 온’에 출연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여러 개 읽다 보니 현덕이 알지 못했던 자룡의 과거가 드러났다.

“와, 팬클럽이 있다니.”

현덕은 얼른 자룡의 팬클럽을 검색해 보았다. 자룡의 팬클럽 ‘자색 여의주’가 정말로 있었다. 회원 수도 근 200명에 달했다.

현덕은 포털에 로그인하여 팬클럽 가입을 시도했다. 가입 창에는 붉고 굵은 글씨로 경고성 문구가 적혀 있었다.

TE엔터테인먼트 관계자 절대 가입 금지! 발견 시 즉시 강퇴.

박자룡을 응원하는 자색 여의주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팬클럽임. 공식 팬클럽 될 생각 없으니까 TE쪽 사람들은 가입NO!

현덕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론을 냈다.

“난 회사 직원은 아니니까 관계자는 아니지.”

가입 창 아래에는 이름과 나이, 직업, 박자룡을 좋아하는 이유 등을 쓰는 칸이 있었다. 포털 아이디의 정보와 가입 창에 쓴 정보가 다를 시엔 바로 강퇴라는 경고 멘트도 있었다.

현덕은 이름과 나이를 쓰고 직업을 잠시 고민했다. 연습생으로 썼다가 지우고 고등학생이라고 썼다. 박자룡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멋진 형이라서’라고 적었다.

가입을 하니, 몇몇 게시판의 글은 읽을 수 없었지만 자유 게시판과 사진 게시판 등 기본적인 게시판의 글은 볼 수 있었다.

자유 게시판의 글을 몇 개 읽다 보니 왜 TE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가입을 금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 가입한 팬들은 꽤 오랫동안 자룡을 응원해온 팬들이었다. 자룡의 데뷔가 몇 번이고 엎어진 것을 지켜본 듯했다. 최근 데뷔조에 자룡이 들지 못했던 소식도 알고 있는지, 자유 게시판에는 온통 TE엔터테인먼트를 욕하는 글뿐이었다. 현덕도 못 외우고 있는 오 팀장의 실명까지 알고 있었다.

- 오원직, 신인 뽑는 팀장이라면서 그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냐.

오랫동안 자룡이 혼자 힘든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룡이 열심히 노력하는 걸 알아주고, 꼭 데뷔하길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덕은 마치 자신이 응원을 받은 양 기분이 좋아졌다.

‘자룡 형도 여길 알려나? 당연히 알겠지? 가입 했을까? 여기 올라오는 글들 봤으면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이 팬클럽엔 자룡이 가입하지 못한다는 공지가 눈에 들어왔다. 팬클럽이 만들어졌던 초기에 자룡이 자꾸 가입 시도를 했지만, 팬클럽 쪽에서 꿋꿋하게 자룡을 강퇴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알아서 너 응원할 거니까, 넌 이런 쪼깐한 모임엔 신경 끄고 얼른 데뷔나 해. 너 데뷔하면 이런 팬클럽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 큰 공식 팬클럽 생길 거거든? 나중에 거기나 가입해.’라는 마인드였다.

사진 게시판에는 글이 별로 없었다. TE엔터테인먼트 회사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자룡이 활짝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새벽에 지친 모습으로 건물을 나서는 모습. 낮에 다른 연습생들과 뭉쳐 장난치며 편의점으로 가는 모습. 회사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피처링 작업 때 녹음실에서의 모습. 핑크키위 백댄서 시절 영상에서 캡처한 모습 등이었다.

현덕은 사진 게시판의 글을 보며, 언제나 걷던 길을 걸어 TE엔터테인먼트 안으로 들어갔다. TE엔터테인먼트 건물 주변엔 여러 사람이 모여 서성대고 있었다. 누군가 현덕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오기도 했지만 현덕은 핸드폰에 집중하여 알지 못하고 지나쳤다.

연습실로 가니 자룡이 이미 와 있었다.

“여!”

자룡이 스트레칭을 하다 현덕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 왔어요.”

현덕도 반갑게 인사했다.

이어 자룡에게 ‘자색 여의주’에 가입했다고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음지에서 양지의 자룡을 응원한다는 팬클럽에 가입했으니, 그 모토에 맞게 행동해야 될 것 같았다.

“뭐야, 뭔 일인데 실실 쪼개. 형한테 인사도 안 하고?”

현덕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웃자, 자룡이 달려들어 대번에 헤드 락을 걸어버렸다. 팔에 힘을 주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지만 현덕은 얼른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 항복! 형 나온 기사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좋아서 웃은 거였어요. 근데 형 예명이 JD예요?”

현덕의 말은 자룡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그걸 왜 봐!”

자룡이 화들짝 놀라며 현덕을 놓쳤다.

현덕은 자룡의 옆구리에서 기어 나와, 핸드폰을 켜 조금 전 읽던 기사를 보여주었다.

기사에 실린 사진 속 자룡이 떴다. 자룡은 신인개발팀 소회의실인 것 같은 장소의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얼굴을 45도 각도로 튼 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민에게나 어울릴 법한 가식적인 모습이었다. 본인도 어색해하는 게 사진에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아, 씨발! 씨발!”

자룡이 바닥에 쓰러지며 천 원을 소비했다. 현덕은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촬영 카메라 네 대에 모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벌금 천 원의 증거 영상이 찍히고 있었다.

“씨-읍!”

현덕은 주머니 사정 따윈 생각지도 않고 ‘씨발’을 외치려는 자룡의 입을 얼른 막았다.

“읍! 으읍! 읍!”

자룡이 꿈틀거리며 괴로워했다.

현덕은 남은 한 손으로 자룡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괜찮아요, 형. 비록 종이신문 기사로 나진 않았지만 제가 꼭 컬러 복사해서 간직할게요. 나중에 형 완전 성공해서 간지 좔좔 흐르는 랩퍼가 되면 꼭 다시 인터넷에 올릴게요.”

“으읍! 읍! 읍!”

한참 괴로워하던 자룡이 결국 진이 빠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더 이상 자룡이 ‘씨발’을 외칠 힘이 없을 거라 판단한 현덕은 자룡을 풀어줬다.

‘나 체력이 많이 좋아졌네.’

자룡의 지갑을 지키고 자신의 체력도 확인했다. 현덕은 그 성취감을 바탕으로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사진 찍는 거 싫다고 했는데 망할 오 팀장님! 난 망했어…….”

자룡은 현덕에게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누웠다. 그 모습 채로 우울한 오오라를 발산했다.

“형 괜찮아요. 꼭 우주민 같았어요.”

스트레칭을 마친 현덕은 자룡을 위로했다. 자룡의 부리부리한 눈에 살포시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이상해?”

“괜찮아요. 형의 진짜 모습은 본 방송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요.”

“이상하다는 거잖아!”

“형 같진 않았다는 뜻이었어요.”

“그게 그거지!”

“비슷한 의미일 뿐. 전혀 같은 뜻은 아니지요.”

현덕은 차분하게 방어에 성공했다.

“으아악! 딴 놈도 아니고 그 개싸가지 같았다니!”

현덕은 절규하는 자룡을 놔두고 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안 오네.”

현덕은 닫힌 연습실 문을 바라보았다.

주민이 오지 않았다. 일찍 온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한 시 전엔 도착하던 사람이건만, 한 시 반이 다 되어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토바이 타고 다니던데, 무슨 사고라도 난 거 아닌가?’

현덕이 계속 문을 바라보고 있자 자룡이 겨우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들었다.

“우주민?”

자룡도 늘 늦지 않고 오던 주민이 늦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네. 안 오네요.”

“요 앞에 길 공사하던데, 그래서 뒷문으로 돌아오느라 늦나? 걔 연락처 알아? 전화해봐.”

“연락처는 모르고…… 간식 미리 사 놓을 겸 한번 나가보고 올게요.”

“같이 가자.”

자룡이 벌떡 일어서며 동행을 자처했다.

현덕과 자룡은 연습실을 나섰다. 자룡은 화장실을 들렀다 가겠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현덕은 정문 쪽에 주민이 있나 확인하고 후문 쪽에 있는 가게로 가겠다고 말했다. 얼마 전, 회사 뒤쪽 골목에 과자를 싸게 파는 가게가 생겨서 연습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현덕과 자룡은 그 가게의 VIP였다.

현덕은 혼자 회사 정문으로 나갔다. 핸드폰을 보면서 오느라 미처 몰랐는데, 자룡의 말처럼 길을 막아 놓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오가는 통로는 열어 놓았지만 차나 오토바이는 지나갈 수 없어 보였다.

‘정말 후문으로 돌아오느라 늦는 건가.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길이 막혀 사람이 지나가지 못해 회사 앞에 서 있는 건 아닐 텐데.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회사 정문 앞에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여성이었고 저마다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쇼핑백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포장지를 보니 누군가에게 주려는 선물인 듯했다.

‘핑크키위? 솔라리스? 다들 쉬는 중 아닌가?’

요즘 TE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은 대부분 휴식기였다. 그러니 회사 앞에 팬들이 모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늘 보던 것들이 없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회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 평범했다.

핑크키위나 솔라리스의 팬이라면 그 팬클럽의 로고가 그려진 굿즈를 들고 있거나, 핑크색이나 파란색으로 컬러 코드를 맞추어 입고 오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회사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핑크키위 팬클럽 공식 굿즈인 분홍색 키위 망치봉이나 솔라리스의 별모양 막대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상하네.’

하지만 궁금하지는 않았기에 현덕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현덕을 불렀다.

“저기요.”

“네? 저요?”

“네. 그쪽이요.”

커다란 마스크를 쓴 여성이 현덕에게 다가왔다.

“여기 연습생이세요?”

“네.”

“그럼 혹시 박자룡이라고 아세요?”

“자룡 형이요?”

‘자룡 형’이란 말을 입 밖에 낸 순간, 회사 근처에 서 있던 여성들이 동시에 현덕을 쳐다봤다. 일제히,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현덕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기요, 저희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현덕에게 말을 걸었던 여성이 덥석, 현덕의 옷소매를 잡았다.

“어…… 대개 이상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지 않나요?”

“아뇨, 저흰 아니에요. 저희는 박자룡을 응원하는 평범한 팬들이거든요.”

“네?”

현덕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은 채 다시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처음 봤던 것처럼 다들 평범한 차림이었다. 특징이라면 예쁘게 포장한 선물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있다는 것 정도?

‘설마?’

문득, 회사에 오면서 봤던 ‘자색 여의주’가 생각났다.

“혹시 자룡 형 팬클럽 분들이세요? 자색 여의주?”

“네! 맞아요!”

현덕을 붙잡은 여성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안녕하세요.”

현덕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자신의 옷을 붙든 여성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며 싱긋 웃었다. 그제야 회사 앞에서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오랫동안 자룡을 지켜보고 응원해준 사람들이 자룡의 프로그램 출연을 응원해주러 온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자룡이랑 친하세요?”

“네. 같이 연습하고 있어요.”

“그럼, 이것 좀 자룡이한테 좀 전달해줄 수 있어요?”

여성이 쇼핑백을 현덕에게 내밀었다. 현덕의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두 현덕에게 쇼핑백을 부탁할 기세였다.

현덕은 고개를 흔들었다.

“왜요? 애써 오셨는데 직접 주시지 않고요.”

“지금 되게 열심히 연습하고 있을 텐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와아!”

현덕은 감동 받았다.

“그렇게 자룡 형을 생각해주시다니.”

“당연하죠! 자룡이가 어떤 심정으로 그 프로그램에 나갈지…… 생각만 해도 미안한 마음뿐인데!”

“왜, 왜 미안하세요?”

“그냥요. 그냥 자룡이만 보면 미안해요.”

하얀 마스크 속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기요, 박자룡이랑 친하세요?”

현덕의 소매를 잡은 여성 뒤로 다가온 다른 여성이 자신의 쇼핑백도 내밀며 물었다.

“형이 절 많이 챙겨주세요.”

같이 프로그램에 나가는 사이라고 말할까 하다, 그냥 웃고 말았다. 현덕이 순하게 웃자 사람들은 좀 더 빠르게 현덕에게 다가와 현덕을 빙 둘러쌌다.

‘우리 자룡이가 좀 착해요. 완전 리더감이죠.’

‘혹시 제 것도 같이 좀 전해 줄 수 있어요?’

사방에서 말이 쏟아졌다.

“형이 곧 여기로 나올 거거든요.”

현덕은 그들의 쇼핑백을 받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형 얼굴 보고 직접 전해주시겠어요?”

“아니, 우리 보면 괜히 긴장되고 부담되고 그럴까 봐-”

처음 현덕에게 말을 걸었던 여성이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곧 자룡이 나온다니 얼른 현덕에게 쇼핑백을 넘기고 도망칠 기세였다.

“아니에요. 형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현덕은 역으로 여성의 옷소매 끝을 살짝 잡으며, 여성이 도망치려는 걸 막았다.

“형 나오면 직접 선물도 주시고 응원한다고 많이 말해주세요. 그러면 형 진짜 힘내서 열심히 할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네. 형이 좋은 모습 보여드리려고 진짜 많이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많이 응원해주세요.”

현덕이 활짝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자룡을 응원해주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 근처에 살아서 쉽게 올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먼 곳에서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와주었으리라.

‘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벌써 이렇게나 많은데.’

대교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자룡이 떠올랐다. 매일매일 연습실에서 땀 흘려 연습하는 자룡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더더욱 자룡이 이 사람들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현덕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 다시 회사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참, 기사에 난 사진 얘기는 하시면 안 돼요. 자룡 형이 그 사진 때문에 완전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하거든요!”

사람들 사이에서 꺄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자룡 존나 귀여워!’란 말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얼마나 자룡 형이 보고 싶으면 저렇게 좋아할까.’

현덕은 기분이 좋아 더욱 크게 손을 휘두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그 밝은 표정 그대로, 회사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몸이 가벼워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자룡 형이 앞문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만나면 많이 힘이 나겠지? 얼른 과자 사서 다시 앞문으로 가보자.’

어서 빨리 그 훈훈한 현장을 보고 싶었다. 현덕은 주민은 깡그리 잊어버리고는 더없이 편한 마음으로 회사 뒷문을 나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현덕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다섯이 한 청년의 사지를 붙잡아 새까만 봉고차에 태우려 하고 있었다.

잡혀가는 청년은 두툼한 손에 입이 틀어 막힌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옆엔 청년의 것이 분명한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었다.

그 청년의 모습도, 오토바이도 현덕에겐 무척이나 익숙했다. 익숙하다 뿐일까. 불과 얼마 전, 현덕은 저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저 청년의 허리를 꼭 붙잡고 도로를 질주했었더랬다.

그때 현덕을 도와주고, 자룡을 대교 위에서 끌어내려 주었던 청년은 한 손으로 회사의 건물 주변에 빙 둘러놓은 철창을 붙잡고 있었다.

핑크키위 스캔들 때 하도 사람들이 회사 벽에 낙서하고 도망쳐 그걸 막으려 설치한 방벽이었다. 그게 청년이 봉고차로 끌려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한 남자가 청년의 손목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철창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려는 것이었다. 철창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청년과 현덕의 눈이 마주쳤다.

“……!”

“……!”

찰나의 순간이지만 현덕은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그를 알아봤으니까.

“우주민?”

현덕이 청년을 불렀다. 그러자 청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청년, 주민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었다. 주민이 그의 손을 물어뜯은 듯했다.

입이 자유로워진 주민이 외쳤다.

“도와줘!”

필사적인 목소리를 듣자, 마법에서 깨어난 듯 굳었던 몸이 풀렸다.

현덕은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112에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저건 또 뭐야.”

“어쩌죠?”

주민을 붙잡고 있던 남자들이 현덕을 돌아보았다.

“붙잡아 와.”

주민에게 손을 깨물린 남자가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주민의 발을 잡고 있던 남자 둘이 주민을 놓고 현덕에게 다가갔다.

발이 자유로워진 주민의 발버둥은 더욱 심해졌다.

“도련님, 제발 진정 좀 하십시오.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주민에게 손이 물린 남자는 어떻게든 주민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힘으로도 안 되는 게 말로 될 리 만무했다.

“놔! 놔! 놓으라고! 놔!”

주민이 발로 주변 남자들을 밀치며 철창 쪽으로 몸을 붙였다. 다섯을 상대하다 셋을 상대하니 좀 더 버틸 만한 듯했다.

한편, 현덕은 남자들이 다가오자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계속 물러섰다.

핸드폰에서 신고 안내를 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은 여기 사람이 납치당하고 있다고, 빨리 와달라고 소리치며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사 앞엔 그리도 사람이 많았건만. 어째서인지 회사 뒷문 주변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위급할 땐 살려달라는 말 대신 불이 났다는 말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던 학교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부, 불이야!”

현덕은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앞에서 피식, 비웃는 소리만 들렸다.

“잠깐 협조 좀 해주십시오.”

두 남자가 현덕을 붙들었다. 현덕의 어깨를 붙잡고는 통째로 들어 올리려 했다.

“놔요, 이거 놔! 아악! 어깨가 부러진 거 같아!”

현덕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그렇게 세게 잡지는 않았는데.”

남자 중 한 명이 당황하며 현덕의 어깨를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야!”

반대편 남자가 소리쳤지만 현덕이 좀 더 빨랐다. 현덕은 얼른 느슨해진 쪽 팔을 잡아 뺐다. 자유로워진 팔로 반대쪽 어깨를 잡은 남자의 손도 쳐냈다. 반대쪽 남자는 만만치 않았다.

현덕은 뱀이 허물을 벗듯 위에 입고 있던 재킷을 훌렁 벗어 남자의 손에서 달아났다.

“허, 참.”

사내는 현덕의 재킷만 쥔 채 헛웃음을 지었다. 현덕은 붙잡혔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며 아픈 척을 했다.

“당신들 내가 폭행죄로 고소할 수 있어! 단순폭행죄여도 징역 살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당신들 저지르는 범죄는 미성년자 약취 및 유인입니다. 약취와 유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징역감입니다. 게다가 저 사람은 미성년자라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

“아, 시끄럽네. 진짜.”

현덕을 먼저 놓쳤던 남자가 귀를 후볐다.

“못 본 척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입 좀 닥치고, 잠시만 가만히 있어 주시죠.”

다른 남자가 현덕의 재킷을 집어던지고 다시 현덕에게 달려들었다.

법은 범죄를 예방하지 못했다. 현덕은 다시 두 사내에게 붙들렸다. 둘은 폭행죄로 신고당할 게 두렵지 않은지 현덕의 어깨를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악!”

이번엔 진짜로 아팠다. 절로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현덕은 이를 악물며 주민을 보았다.

“걘 놔줘! 나만 끌고 가면 되는 거 아냐!”

도와달라 그랬으면서. 주민은 이제 현덕을 놔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철창을 움켜쥔 손을 놓지는 않고 있었다.

“순순히 협조를 해주셨으면 좋지 않았습니까. 괜한 목격자 만들어서 일 귀찮게 만들지 않고.”

주민에게 물린 남자가 혀를 차며 주민을 잡아당겼다. 어지간히 짜증이 났는지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그대로 주민을 끌고 가 드럼통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동해 바다에 수장시키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해, 김현덕. 정신 똑바로 차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내야 해!’

자신은 둘째 치고라도 지금, 저 사람들에게 주민이 절대 끌려가선 안 될 거 같았다. 그런데 지금 주민을 도울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현덕밖엔 없었다.

현덕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당장이라도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팠다. 양옆에서 들리는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딴 두려움에 잠겨 무력하게 끌려갈 순 없었다. 눈앞에 우주민이 있었다. 아직 어린 우주민이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

현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회사 정문엔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나올 자룡도 있었다. 목격자 한 명이야 우습겠지만. 수십 명의 목격자가 생길 상황에서 사람을 납치해 가는 게 쉬울까? 답은 생각하나 마나였다.

“자룡 형!”

처음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때 기초반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복식 호흡과 발성법이 생각났다.

배에 힘을 주고 목구멍을 열고 머리를 비우고. 있는 힘껏. 폭포수 아래에서 피를 뿜으며 득음을 하고자 했던 옛 선조들같이 있는 힘껏.

“야, 박자룡!”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현덕의 모든 삶을 통틀어 가장 크게 내지른 소리였다. 온몸이 소리통이 된 듯 소리가 울렸다. 현덕을 붙잡은 두 남자가 놀라 어깨를 움츠릴 만큼 컸다. 그야말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소리였다.

“니들, 뭐해! 오늘은 실패하면 안 돼.”

주민에게 손이 물렸던 남자가 현덕 쪽을 바라보며 신경질을 냈다. 두 남자가 먹먹한 귀를 어쩌지 못해 고개를 흔들면서도 손으로 현덕의 입을 막았다. 아예 현덕을 주민과 함께 데려가려는 듯, 봉고차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현덕은 최대한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텨보려고 애를 썼지만 질질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으읍!”

주민처럼 남자의 손을 깨물었지만, 남자는 인상만 찡그릴 뿐 아무 타격이 없어 보였다.

주민도 봉고차에 끌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봉고차까지 두 발자국 정도 남았을 때쯤이었다.

“씨발, 뭐 하는 짓들이야!”

자룡이 씨발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자룡은 일단 현덕 쪽으로 날아올랐다. 자룡의 발이 현덕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박혔다.

현덕은 조금 전 뉴스 기사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렸다.

‘자룡 형 태권도 유단자랬지.’

남자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현덕을 붙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그 틈에 현덕은 남자를 밀치고 몸을 돌려 반대쪽 남자의 사타구니를 발로 깠다.

‘널 괴롭히는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니까, 발로 까버려!’

맹덕의 오랜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아악!”

다리 사이 중요한 급소에 충격을 받은 남자가 현덕을 놓쳤다.

현덕은 남자들에게 벗어났다.

“형, 저기 우주민!”

현덕은 다급히 자룡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주민을 가리켰다.

“씨발, 저 새끼!”

자룡은 바닥에 사뿐히 착지하자마자 바로 주민을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이예요?”

“꺅! 자룡아!”

회사 정문에서 자룡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현덕의 목소리를 듣고는 회사 건물을 빙 돌아 뛰어온 듯했다.

그들의 손엔 여전히 자룡에게 주려고 준비한 쇼핑백과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그들의 양손을 본 현덕은 곧바로 흰색 마스크를 쓴 여성의 팔을 덥석 잡았다.

“도와주세요! 저 사람들이 저희들을 잡아가려고 해요.”

“뭐라고요?”

“지금 저기 우리 주민 형이 잡혀가고 있어요. 자룡 형이 그거 막으려고 혼자서 저 사람들이랑 싸우고 있어요!”

현덕은 다급하게, 애절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외쳤다.

때마침 자룡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납치당하는 여주인공을 구하려는 남주인공처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에게 혼자 달려들었다. 주민에게서 그들을 떼어내려다가 그들에게 얻어맞았다. 쓰러지지 않고 그들을 때렸다. 그야말로 한바탕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한 사내의 주먹이 자룡의 얼굴을 향하자 현덕이 비명을 질렀다.

“얼굴은 맞으면 안 돼요! 형!”

그 비명을 들은 건지 자룡은 고개를 숙여 그 주먹을 피했다. 주민의 다리를 붙잡은 남자의 다리에 발차기를 날렸다.

양복 입은 남자들은 워낙 건장하여 자룡의 공격에 큰 대미지를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자룡이 혼자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영상이랑 사진 찍어주세요. 증거를 남겨야 해요!”

현덕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켜고 봉고차 쪽을 찍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찰칵이는 카메라 소리가 들리자 남자들은 다급해졌다.

“일단 도련님만 모시고 간다.”

급한 대로 자룡을 떼어내고 주민만 끌고 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현덕은 자신을 붙잡았던 남자들 중 한 명의 다리를 붙잡고 질질 늘어졌다. 남자는 현덕을 떨쳐내려 다리를 흔들고 현덕의 뒷목을 붙잡았다. 현덕은 숨이 막혀도 남자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사진과 영상을 찍어대면서 자룡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박자룡! 힘내라!”

“자룡아, 얼굴은 맞으면 안 돼!”

“꺅, 자룡아! 조심해!”

소란이 커지자 불이 났다고 소리쳐도 안 나타나던 사람들이 하나둘, 골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TE엔터테인먼트 건물에서도 직원들이 뛰어나왔다.

“젠장, 일단 철수!”

주민에게 손이 물린 남자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주민을 놨다. 다섯 장정은 일제히 주민과 자룡을 버리고 봉고차에 올라타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였다.

도망가는 남자에게 밟혀 바닥에 엎어졌던 현덕이 벌떡 일어섰다.

“차 번호까지 찍어주세요!”

현덕의 말에 사람들은 봉고차를 찍었다. 봉고차가 사라지자 사람들의 핸드폰은 일제히 주민과 자룡을 향했다.

주민은 창살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 창살 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자룡은 그런 주민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은 채였다. 두 사람의 다리가 엮여 있었다.

둘은 자신들이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한 듯했다.

“헉, 허억, 헉.”

그저 함께 헐떡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땀에 흠뻑 젖고, 납치될 뻔한 위험에서 겨우 버틴 두 청년이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둘의 모습은 사람들의 핸드폰에 고스란히 담겼다.

주민은 찡그리듯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철창에 머리를 대고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주민에게 웃어 보이고 싶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야.”

말을 하려 입을 여니, 입술이 아팠다. 손으로 입술을 만져보니 피가 묻어났다. 아까 남자의 발길질에 입술이 찢어진 것 같았다.

누군가와 몸싸움을 해서 입술이 찢어지다니. 현덕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다시금 인생을 살고 있는 지금도.

현덕은 제 손에 묻어난 피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하하,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눈 깜짝할 새 상상도 안 해봤던 일을 겪어버렸다. 주민이 도와달라고 했고, 그런 주민을 구했다.

현덕은 자신의 두 손을 펼쳐 보았다. 바닥에 쓸려 잔뜩 까지고 피가 났다.

‘내가 구했어. 내가, 우주민을 구하는 걸 도왔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어떤 사정이 있는 건지 알아야 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건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주민을 붙잡고 물어봐야 했다. 그게 지금 당장 현덕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현덕은 주민에게 엉금엉금 기어가 주민을 닦달하는 걸 잠시 미루고 두 손안에 뿌듯이 차오르는 작은 성취감을 즐겼다.

고개를 들어 주민을 바라보았다. 아까 발에 차인 허리가 아팠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서른 살의 우주민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날 구해주었듯 내가 당신을 도왔어.’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김현-”

현덕이 자신의 감정을 감당해내는 그새를 못 참고 주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요.”

현덕은 주민을 제지했다.

“현덕이가 입 닥치란다.”

주민의 배 위에 얼굴을 박고 있던 자룡이 손을 들어 주민의 입을 턱, 막아 주었다. 꺄악! 어째서인지 현덕의 등 뒤에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현덕은 열아홉의 주민을 보았다. 주민은 자룡에게 입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힘이 없는지 자룡의 손을 떼어내지도 못했다. 인상만 팍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열아홉 살 우주민은 서른 살의 우주민처럼 선해 보이지도,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말은 또 얼마나 싸가지 없게 하는지. 처음 만난 사람한테 입은 가죽이 모자라 뚫어놓은 거냐고 하질 않나, 애써 시간을 내 도와줘도 고맙다는 말 대신 뭘 바라냐고 지껄이기나 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스물여덟 살의 현덕이 보았던 서른 살 우주민의 단단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있는 정 없는 정 다 떼어내는, 참으로 싸가지 없는 우주민. 그런데 그 주민이 구해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현덕은 그 우주민을 구해주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로, 고맙다는 말만 해요.”

비록 입술 말고 얼굴 다른 데는 다친 곳이 없기를. 그래서 지금 웃는 얼굴이 정말로 웃는 얼굴로만 보이기를 바라며.

“고맙죠?”

현덕은 열아홉 살 주민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

자룡과 주민의 숨이 잦아들 즈음, 오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이게!”

오 팀장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현덕과 자룡, 주민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오 팀장을 알아본 자룡의 팬클럽 사람들은 대번 얼굴을 찡그리더니 자신들의 핸드폰을 얼른 숨겼다.

오 팀장 효과(Captain O’ Effect)는 놀라웠다. 자룡의 팬클럽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룡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박자룡 화이팅!”

“자룡 오빠, 응원할게요!”

응원의 말 한마디와 함께 쇼핑백을 던지듯 자룡의 앞에 내려놓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현덕이 보기엔, 자룡이 좋지만 오 팀장과 한 공간에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엥? 저요?”

자룡은 영문도 모른 채, 그 큰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어, 저기!”

현덕이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범인 잡으려면 핸드폰 영상, 우리한테 주셔야 하는데!”

현덕의 목소리는 의미 없는 메아리가 되었다. 눈앞에서 증거와 증인을 모두 놓쳐버렸다.

“영상? 무슨 영상! 니네 뭐 이상한 영상 찍혔어?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오 팀장만 영문을 모르고 펄쩍 뛸 따름이었다.

“뭐 해, 얼른 가서 붙잡아. 핸드폰 영상 지워야지!”

오 팀장은 주변에 멀거니 서 있는 직원들을 닦달하며 도망치는 자룡의 팬클럽 사람들을 쫓게 했다.

이어 경찰차가 도착해 최초 신고자를 찾았다. 현덕은 ‘저요.’라고 이실직고하며 손을 들었다.

“현덕씨, 얼굴은 또 왜 그래!”

오 팀장은 그제야 현덕의 얼굴을 보고 꽥 소리를 질렀다.

현덕의 얼굴엔 자잘한 생채기가 여럿 나 있었다. 입술은 터져서 피가 났고 입가엔 멍이 들어 시퍼렇게 붓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빵 반죽이 오븐에서 부풀듯 현덕의 얼굴이 붓는 게 보였다. 명백히 폭행의 피해자였다.

오 팀장은 얼른 주민과 자룡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둘은 얼굴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둘의 멀쩡한 얼굴을 본 오 팀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너네 설마, 얘 팼냐?”

오 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눈은 자룡과 주민을 향했다. 손가락은 현덕을 가리킨 채였다.

“우주민, 내가 너 사고 칠 줄 알았어!”

“읍!”

여전히 자룡에게 입이 막혀 있는 주민은 두 눈에 힘을 빡 줬다.

“아, 씨……앗.”

자룡은 씨앗을 찾다가, 오 팀장이 자신이 아니라 주민만을 콕 집어 물어봤다는 걸 깨닫고 낄낄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현덕은 날뛰는 오 팀장을 막기 위해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일어서려니 몸이 휘청이며 균형을 잃었다.

엎어지지 않으려 손으로 바닥을 짚은 현덕은,

“으으.”

신음을 뱉으며 어깨를 떨었다. 손이 잔뜩 까져 어디에 닿기만 해도 아팠다.

경찰들은 움직이기 힘든 현덕을 위해 오 팀장을 데리고 현덕 쪽으로 왔다. 현덕은 주저앉은 채로 그들에게 조금 전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아직 주변에서 서 있던 TE엔터테인먼트 직원들과 주변에서 구경 나온 사람들의 추가 증언이 이어졌다. 핑크키위 스캔들 이후 회사에서 뒷문 쪽에 설치한 CCTV를 확인해보자는 얘기도 나왔다.

현덕은 경찰들에게 꼭 범인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냥 놔두면 언제고 다시 주민에게 접근할지 몰랐다.

“잠깐만. 잠깐만요.”

그때였다. 주민이 자룡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사건의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자 경찰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주민은 철창에 기대 몸을 일으키고는 현덕 쪽으로 걸어왔다. 휘청이는 걸음새가 위태로워 보였다. 오 팀장이 주민을 부축해주려 했지만 주민은 오 팀장의 손길을 쳐냈다.

“별일 없었어요. 아니, 별일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주세요.”

“아무 일도 없었단 말입니까?”

“아니, 여기 신고자도 있고, 보아하니 목격자도 많은 거 같은데.”

“……!”

“아, 씨-!”

경찰은 물론 현덕과 자룡까지 놀라 주민을 보았다.

오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작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현덕의 귀에 닿았다.

‘그럴 줄 알았다고?’

현덕은 오 팀장을 보았다. 오 팀장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뭐지?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경찰들은 곤란해 했다. 목격자와 증거가 있는데, 피해자가 자신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다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건의 최초 신고자이자 증인이자 증거를 만들고자 애썼던 한 사람으로서, 현덕은 순수하게 화가 났다. 손만 멀쩡하다면 주민의 멱살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민은 현덕을 내려다보더니 눈을 찡그렸다.

‘뭐야, 또-’

안무 연습을 도와줬을 때처럼 불필요한 참견이었다느니, 툴툴거리는 게 아닐까. 현덕이 그렇게 지레짐작할 때였다.

“너 얼굴- 하아.”

주민이 한숨을 내쉬더니, 대뜸 손을 내밀어 현덕의 입가를 만지려 했다.

“아야!”

주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찢어진 입술은 그 손길마저 버거워했다. 그러자 주민이 얼른 손을 뗐다. 하지만 찡그린 얼굴은 여전했다.

‘나 다친 걸 걱정해주는 건가?’

그냥 잡혀가게 놔두지 그랬니, 다친 거 자업자득이다, 꼴좋다, 누가 이렇게까지 도와달라고 했나? 등등. 최소 이 정도 말은 들으리라 싶었건만.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을 뒤덮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현덕은 다시 주민의 얼굴을 보았다. 편견을 걷어내니, 찌푸린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괜히 일을 키운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다친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왼쪽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하지만 이게 무슨 기분인지 오래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주민은 경찰들에게 다시 아무 일도 없고, 자신은 사건 당사자로서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고 거듭 말했다. 현덕으로서는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는 발언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아는 사람이 납치당할 뻔한 일이 벌어졌다. 그걸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 순 없었다.

“저기요-.”

“현덕씨, 잠깐만.”

현덕이 나서려하자 오 팀장이 현덕을 제지했다. 현덕과 자룡에게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주민에게 합세했다.

오 팀장이 나서자 상황은 금세 정리됐다. 경찰들은 오 팀장의 간절한 설득에 넘어갔다. 당분간 회사 주변 순찰을 강화하겠다고 말하고는 상황을 마무리 짓고 돌아갔다.

오 팀장은 넉살 좋게, 구경하러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드라마 촬영 연습이었다고 말했다. 현덕과 자룡은 오 팀장과 주민에게 항의하려고 했으나 그럴 틈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주민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리고만 있었다.

오 팀장은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룡과 주민을 연습실에 가두고 현덕을 의료실로 데리고 갔다. 현덕이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상처가 붓는다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현덕은 불만이 그득 쌓인 뚱한 표정으로 치료를 받았다. 얼굴에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덕지덕지 붙여야 했다.

오 팀장은 프로그램 촬영 전까지 얼굴이 낫지 않으면 어쩌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의료실 담당자는 그 전까진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현덕이 아니라 오 팀장을 위로해줘야 했다.

현덕은 오페라의 유령 분장을 한 것 같은 모양새로 연습실로 귀환했다.

연습실 분위기는 칙칙했다. 자룡과 주민은 이미 둘이서 한바탕 말다툼을 한 눈치였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는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오 팀장은 그런 둘에게 현덕을 던져주었다. 주민에게는 네가 알아서 설명해주라고 소리쳤다.

현덕과 자룡의 눈은 주민을 향했다. 주민은 두 쌍의 뜨거운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요지부동이었다.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뭐냐, 이 정도 상황이면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

자룡이 시비 걸듯 말했다.

“아, 씨. 뭐냐고! 도대체 뭔 일인데!”

“…….”

주민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 해보는 건 어때요? 적어도 우리 둘한테 고맙긴 하잖아요.”

현덕의 말에 주민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도와준 거에 대해선…….”

자룡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돌부처처럼 꼼짝도 안 하던 주민이 현덕의 말 한마디에 흔들렸다.

주민은 여전히 딴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평소 어떤 싸가지 없는 말도 또박또박 잘만 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태도였다.

“대해선?”

현덕은 아예 주민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다리에 팔을 걸쳐 턱을 괴고는 주민을 바라보았다. 자룡도 슬그머니 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주민은 현덕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현덕과 자룡은 그런 주민을 보다 서로에게 눈짓하고는 그냥 웃어버렸다.

“허, 참.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면 영원히 데뷔 못 할 거라는 저주라도 받았냐? 씨, 앗.”

자룡은 눈가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프로그램 출연 준비를 하기 위해 매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연습했다. 게다가 오늘은 함께 힘든 고비를 넘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주민이 가깝게 느껴졌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어물거리는 주민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고까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을 맞대고 거친 숨까지 나누었던 자룡은 특히나 주민이 평소보다 만만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 진짜 비싸게 구네. 진짜.”

자룡이 혀를 차며 주민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어이없고 우스운 농담을 던져 보았다.

“재벌 3세라도 돼? 아니지, 그냥 재벌 3세가 이렇게 대낮에 납치당하진 않겠지. 입에 풀칠을 했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거 보면 분명 재벌 3세이긴 한데 평범한 재벌 3세는 아닌 거 같단 말이야. 혹시 엄청난 재벌 가문 사생아로 태어나서 본부인이랑 그 본부인 자식들한테 구박이란 구박 다 받고 자라서 성격 겁나 삐뚤어진 거 아냐? 그 본부인 자식들한테 납치당할 뻔한 거고.”

자룡이 웃으며 현덕에게 말했다.

“현덕아, 그렇지 않아? 드라마 보면 막 그런 내용 나오고 그러잖아.”

현덕은 맞장구를 치며 웃으려 했다. ‘그러게요, 형. 진짜 재벌 3세인 거 같아요.’라고.

맹덕이 군대 가기 전, 맹덕 형과 아버지가 본방 사수하던 주말 드라마들을 보면 그런 인물이 한 명씩 등장하고는 했다. 슬픈 출생의 비밀로 인해 성격이 삐뚤어진 남주인공. 그리고 착하고 씩씩한 여주인공.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만나 개 같은 성질머리를 고치고, 자신을 망하게 만들려는 악당들을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을 맞곤 했다.

하지만 현덕은 차마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낄낄대며 웃는 자룡을 보는 주민의 눈빛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어떻게 알았지?”

주민이 자룡을 노려보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덕도 덩달아 굳어버렸다.

“뭐, 뭐?”

자룡은 당황했다. 웃자고 농담을 던졌는데 정색한 얼굴이 비수처럼 돌아오다니.

“뭐래? 야야, 진짜 재벌 3세인 것처럼 반응하고 난리야, 말하는 사람 민망하게.”

자룡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고자 더 막장 드라마같은 내용을 말해보았다.

“근데 진짜 왜 납치당할 뻔한 거냐. 사실 엄마가 연예인이었는데 재벌 아버지 눈에 띄어서 인생 망가지고, 아들이었던 너도 엄청 불행하게 살았고, 뭐 그런 건가? 그 집안에서 벗어나려고, 유명해지면 그 사람들도 함부로 너를 못 대할 테니까, 그래서 몰래 연예인 준비하다가 딱 걸려서 가족 중 누군가가 납치하려고 한 거?”

자룡이 바랐던 건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허황된 말에 현덕이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그런 분위기에서 주민도 어이없어하며 작게라도 웃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 왜 납치당할 뻔했는지 진짜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다. 그뿐이었건만. 그 소박한 의도는 산산조각 났다.

“내 뒷조사를 한 건가?”

주민의 두 눈이 격한 동공 지진을 선보였다. 그 순수한 경악은 자룡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뭐야, 왜, 왜 그래? 진짜 그런 사람인 것처럼. 어? 야, 야야. 아이돌 아니라 배우 하러 왔니? 왜 그렇게 연극해, 씨발, 진짜 같잖아. 하지 마. 하지 마아! 현덕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자룡은 현덕을 바라보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하지만 현덕에겐 자룡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도움의 손길은 바깥에서 날아들었다.

“야, 이 자식들아!”

연습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오 팀장이 들어왔다. 9회 말 투 아웃 상황에서 도루를 시도하는 선수같은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거 뭐야. 뭔데 이 영상이 벌써 풀려서 난리가 난 건데!”

오 팀장이 울부짖었다. 한민족의 시조 중 한 명이 곰이라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 포효였다. 그는 사람의 형상이었으나 곰의 패기를 갖추고, 세 연습생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이거 무슨 일인지 당장 말해! 당장!”

오 팀장이 자신의 핸드폰을 던졌다. 자룡은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핸드폰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화면엔 방금 올라온 뉴스 속보가 떠 있었다.

- [급보] 유명 기획사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 결정 후 납치…….

- 과열된 서바이벌 프로그램 경쟁, 연습생 납치 시도로 이어져…….

- 서바이벌 프로그램, 이대로 괜찮은가? 출연 예정자 납치 소동 발생

‘아! 맞다.’

현덕은 급히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자색 여의주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게시물 몇 개가 새로 올라와 있었다. 뒤의 민감한 부분은 자르고 앞의 사건 부분을 잘라 언론에 제보하였다는 내용이 보였다.

TE엔터테인먼트가 연습생 보호를 제대로 안 해줘서, 연습생들이 납치와 폭력, 인신매매에 노출되었다며 분노하는 글도 있었다. 동료 연습생을 구한 자룡에 대한 찬사는 기본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현덕이 본 카페 글과 오 팀장이 본 인터넷 기사는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말하고 있었다.

자룡의 팬클럽 사람들은 회사가 연습생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앞날이 창창한 연습생들이 회사 근처에서 납치될 뻔한 사건을 언론에 제보했다고 했다.

그런데 방금 뜬 뉴스 기사는 사건은 그들이 곧 출연할 프로그램 ‘트라이 온’의 경쟁 과열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 단언하고 있었다.

‘기사가 잘못 쓰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일어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을, 그 사건의 목격자들이 이제 막 제보한 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용을 짜 맞추어서 낼 수 있는 건가?’

특종감이라 판단해 제보된 내용을 교차 검증하지 않고 바로 내보낸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제보한 사람들의 주장을 정리한 수준이어야 한다. 기사 제목과 내용도 ‘A모 연예 기획사 앞에서 미모의 연습생이 한낮에 인신매매를 당할 뻔했다.’는 식으로 단순히 나오는 게 보통일 테고.

그러나 제보자들 누구도 ‘트라이 온’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보한 사람들은 자룡이 ‘트라이 온’에 출연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자룡과 함께 출연할 다른 연습생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를 보고도 자룡 형을 아느냐고 물었지, 자룡 형이랑 같이 프로그램 나가는 연습생이냐고 물어보지 않았어. 나랑 우주민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몰랐다는 건데. 그렇다면 더더욱 제보했어도 트라이 온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말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런데 뉴스 기사는 납치극에 휘말린 연습생 ‘두 명’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 확정이 된 상태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현덕은 자룡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아 뉴스 기사에 첨부된 사건 동영상을 재생해 보았다.

‘내 얼굴이 보여. 절대 그럴 수가 없을 텐데?’

동영상은 측면에서 찍은 듯싶었다. 사내의 다리에 매달린 현덕의 얼굴, 여러 사내와 밀고 밀치는 자룡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삼각대라도 놓고 찍은 듯 화면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형 팬클럽 분들은 분명 내 뒤에서 핸드폰으로 찍었어. 그러면 나는 뒤통수만 나와야 하는데. 자룡 형이나 우주민의 얼굴이 보이면 보였지, 내 얼굴이 드러날 순 없어.’

골목이나 회사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찍었다고 하기엔, 영상에 찍힌 상황은 초반부였다. 골목에서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보러 나온 건 몸싸움이 붙어 시끄러워진 이후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영상에서 주민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주민이 안 보이는 쪽으로 영상을 찍어 보냈거나 주민의 얼굴이 나온 부분을 잘라 편집한 것처럼.

“선수 쳤네.”

현덕의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주듯 주민이 말했다. 그의 얼굴엔 경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역시.’

현덕은 입술을 깨물었다.

“뭔 소리야?”

자룡은 마치 뉴스 기사를 낸 게 주민인 양 주민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방금 그 입으로 말했잖아. 대단한 재벌 가문의 사생아가 몰래 연예인 데뷔하려다 실패해서 납치될 뻔했다고.”

“그건, 내가 농담한 거라고 말했-”

“맞아.”

“……뭐?”

“맞다고. 대파머리.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 현실이라고. 바로 니 눈앞에 놓여 있다고.”

주민이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대파머리,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말한 거랑 비슷한 상황이거든. 내가.”

“정말…… 재벌 3세라고?”

“그래. 네가 자살 소동 벌인 덕에 내 오토바이가 경찰서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와서, 내가 좀 곤란해졌거든. 그래서 급한 대로 트라이 온이라도 나가보려고 했던 건데 말야. 데뷔조는 데뷔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테니까.”

주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뒤에까지 이어 말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조금 전 그쪽 납치하는 데 실패한 쪽에서 먼저 터뜨려버렸다는 뜻이군요.”

현덕이 말하자,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야!”

오 팀장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포효했다.

“네, 물론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죠. 이대로 놔두면 프로그램 욕먹고 우리 회사도 욕먹고. 괜히 욕먹은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우리에게 페널티를 줄 수도 있잖아요?”

현덕의 말은 오 팀장이 염려와 같은 내용이었다. 현덕은 시뻘게진 오 팀장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시 우리 쪽으로 주도권을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요?”

“뭐? 어떻게?”

“오 팀장님, 영상과 상황 정보 주면 바로 기사 써서 올려줄 수 있는 언론 매체나 기자들, 지금 당장 연락할 수 있나요?”

“연락이야 할 수 있지만. 뭐 어쩌길 바라는 거니. 응?”

“저쪽이 이렇게까지 해서 우주민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서든 우주민이 드러나게 만들면 되지요.”

자료는 충분했다. 자룡의 팬클럽 분들이 찍은 영상과 목격자들의 증언.

현덕은 오 팀장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 팀장님, 이 사건으로 우주민 빵 띄워주세요.”

“띄워달라고?”

“그냥 평범한 서바이벌 경쟁 과열로 인한 납치 사건이 아니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오른 연습생 우주민을 타깃으로 벌인 납치극이라고요.”

굳이 타 기획사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기본적인 재료만 던져주면, 이야기는 알아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의 핵에는 ‘우주민’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으리라.

“맞불을 놓자는 거구나. 우주민을 아주 그냥 대놓고 언급해서.”

오 팀장의 말에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팀장은 현덕에게 목격자들의 증언과 영상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현덕은 말하는 대신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 새로 고침을 하자 조금 전까지 사건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이 올린 게시물들이 우수수 떴다.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다며 링크 주소를 걸어 놓은 글들도 여럿이었다.

“좋았어!”

오 팀장은 현덕의 핸드폰을 들고 연습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몸이 문에 세게 부딪쳐 쾅, 소리가 났는데도 아픈 줄도 모르고 사라졌다.

“어! 잠깐만요, 그거 제 핸드폰인데!”

현덕이 핸드폰은 돌려달라고 외쳤지만, 오 팀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설마 잊어먹기야 하겠어.’

현덕은 부디 핸드폰이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얼얼한 입 주변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찢어진 입술에서 다시 피가 나는 듯했다. 찝찔한 피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피 섞인 침을 뱉을까 그냥 삼킬까, 실없는 고민을 하던 현덕은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주민은 뭔가 현덕에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고맙다는 말일까, 쓸데없는 참견 좀 그만하라는 말일까.’

어쩐지 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주민 형.”

현덕이 주민을 불렀다.

낯선 호칭에 주민의 어깨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는-”

“그럼 주민아, 할까? 두 살 어린 나랑 말 놓을래요?”

“뭐?”

주민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귀여운 게 다 죽었네.’

현덕은 잠시나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질색하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 어떻게 해서든 꼭 한 번 들어야 겠어요. 내가.”

“오올! 멋지다, 김현덕!”

자룡이 박수를 치며 현덕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현덕은 자룡의 응원에 힘입어 주민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출연하는 프로그램 최고의 다크호스로 만들어 드릴게요. 프로그램 출연 전부터 아주 유명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게 그쪽 목표잖아요. 그렇죠?”

“…….”

주민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럼에도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잘생겨 보였다.

현덕이 알고 있는 서른 살의 우주민에 비하면 한참 앳되고 서투르지만, 우주민은 우주민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꼭 고맙다고 말해줘요.”

나는 비록 당신한테 그 한마디를 전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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