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열여섯 (2/36)

2. 열여섯

분명,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눈을 뜨니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되어 있었다.

몸은 딱딱한 침대에 바른 자세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현덕은 침대 옆 옷걸이에 걸려 있는 교복 재킷과 목걸이 형태로 된 명찰을 보았다. 교복은 중학교 때 입었던 교복이었다. 명찰에는 ‘서우중 3학년 5반, 김현덕’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득 ‘명탐정 코난’이라는 만화가 생각났다. 남도일은 고등학생 명탐정이었는데 초등학생이 된 거였고. 현덕은 서른세 살의 고시생이었다가 열여섯 살 중학생이 된 거라는 나이 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꿈인가? 그럼 뭐가 꿈이지? 트럭에 치여 죽은 거? 아니면 지금 편하게 누워 있는 이 상태?’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은 분명 죽었다는 것이다. 달려오는 트럭에 치여 몸이 붕 떠오르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지금 이건 죽은 다음 세상인 거구나. 그런데 왜 하필 중학생 때 모습으로 이렇게 누워 있는 걸까.’

이상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이제 막 죽은 사람이 사후 세상의 일을 어찌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현덕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온통 새하얀 세상이었다. 고요하고 아무도 없었다.

‘난 죽었구나.’

깨닫는 순간 울컥, 뱃속에서 불구덩이가 치솟았다.

‘왜? 왜! 왜 하필? 왜 하필 그때!’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하지만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울음이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난 고작 서른셋인데. 겨우 시험에 합격해 이제야 가족들한테 돌아갈 수 있었는데. 형한테 이번엔 내가 용돈을 주겠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부모님 노후자금을 내가 다 까먹었으니까, 내가 효도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게 많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이제야 아버지랑 마주 앉아 술 한잔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랑 여행도 다니고, 형이랑 영화도 보러 다니고, 외할아버지랑 낚시도 하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제갈공명을 닮은 사람을 만나서 연애라는 걸 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걸, 시험 합격하고 난 뒤로 미뤄두고 살았다.

그랬기에 일찍 죽어서는 안 됐다.

그동안 미뤄뒀던 걸 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죽음이 이르게도 그의 남은 삶을 빼앗아 갔다.

“…….”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현덕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죽었어. 죽은 다음에 울어 봤자, 소용없잖아.’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어차피 벌어진 일. 남을 원망해서 무슨 소용이야. 죽어서까지 이러지 말자.’

날 왜 죽인 거냐고, 누구에게라도 따져 묻고 싶지만. 지금 현덕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게 끝났으니까. 김현덕은 죽었으니까.

“하-”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래도 시험은 합격하고 죽어서 다행이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났다.

‘합격 못 하고 죽었으면 비관 자살한 거라고 뉴스에 떴을지도 모르는데. 합격하고 죽은 거니 사고사라고 다들 믿어주겠지. 됐어, 그거면 돼.’

긴 숨을 따라, 어디선가 엷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 둘러쳐진 흰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온통 하얗고 조용한 공간 안에 오직 현덕만이 홀로 누워 있었다.

현실이 아닌 듯한 정적인 풍경은 현덕이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도와주었다.

‘정말 여긴 내가 살았던 세상이 아니구나. 난 정말로 죽었구나.’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운 공간에서 현덕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진짜 사후세계가 존재하네. 친구가 교회 가자고 할 때 한 번쯤 따라 가봤어야 했나. 친구 말대로라면 난 지옥에 가는 건가?’

현덕은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하얀 커튼이 빙 둘려 있는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웠다. 어서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렸다.

과연 누가 찾아올 것인가.

외할머니의 이야기대로라면 까만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찾아올 테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친구의 말대로라면 천사? 아니면 악마가 찾아올 테니까.

아니면 불교식으로 팔이 천 개 달렸다는 천수관음이나 석굴암에서 봤던 그 웃는 얼굴의 부처님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흰 커튼이 촤악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나타났다. 낯익으나 낯선 얼굴이었다.

“어?”

현덕이 손으로 그 얼굴을 가리켰다.

“깼니?”

그 얼굴은 현덕의 손가락을 보고 화를 내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잠꼬대하는 손자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네?”

“3학년 5반 김현덕! 정신 차리고. 몸은 좀 어떤 거 같아? 빈혈은 좀 가셨니? 괜찮으면 일어나서 교실로 돌아가렴. 곧 오 교시 종이 칠 거란다.”

외할머니를 닮은 인자한 할머니, 아니-

“보건 선생님?”

“그래. 현덕아. 왜? 아직도 어지럽니?”

하얀 가운을 입고 인자하게 웃는 얼굴은 분명, 현덕이 다녔던 중학교의 보건 선생님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는 벌써 십칠 년이 훌쩍 지났다. 보건 선생님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현덕은 보건 선생님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생 김현덕은 어쩌면 담임선생님보다 보건 선생님을 더 많이 만났을지 모를 정도로, 꽤 비리비리했던 학생이었으니까.

중학교 때부터 공부에 집중하고 운동에 소홀했던 현덕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창백한 안색의 남자애였다. 항상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늦잠을 자서 아침밥을 못 먹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공부한다고 앉아만 있어서 건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가 끝나면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공부하다 집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복습을 했다. 학원 다니는 게 싫었기 때문에 이렇게 공부해야 전교 5등 이내의 등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빈혈은 고질병이었다. 안 그래도 허여멀건 안색은 시험 기간만 되면 시퍼렇게 변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날은 양호실에 가 한두 시간 정도 누워 있어야 할 정도였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극도의 운동 부족이었다. 몸에는 딱 생존을 위한 근육만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경시대회 못 나가게 되고 기말고사 기간이었나? 그때 시험 보다 쓰러져서 집에 연락 간 다음에, 형이 매일 새벽에 한강으로 끌고 나가 운동을 했지.’

‘동생의 체력은 내가 책임진다!’라고 외치는 형의 등쌀에 못 이겨 매일 아침 조깅을 나갔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키도 크고 체력도 좋아졌다. 어째서인지 얼굴은 여전히 허여멀게서 형이 매번 투덜댔지만.

‘나는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서른세 살에 죽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건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또다시 이 시절을 경험하게 된 것에 대한 아련한 느낌.

무엇보다 저승길을 안내해주는 존재가 저승사자나 천사, 악마도 아니고, 일찍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나 친할머니도 아닌 중학교 때 보건 선생님이라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이 선생님 안내를 받으면 저승길도 그리 무섭진 않을 거야.’

현덕은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사로잡혀, 보건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전 자살한 게 아니잖아요. 부모님보다 일찍 죽긴 했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였고. 또 저…… 공부밖에 한 게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거든요. 나쁜 짓도 아마 그렇게 많이 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현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호 선생님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화가 난 듯한 그 얼굴을 보며 현덕은 아차 싶었다.

‘아, 나 지옥 가는 건가?’

그리고 그 길로 현덕의 어머니가 학교로 긴급 호출되었다.

***

보건 선생님은 호들갑을 떨며 전화로 현덕의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불렀다. 담임선생님은 현덕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건 선생님은 현덕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혹여 잠시 한눈을 팔면, 현덕이 당장에라도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자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현덕의 어머니가 보건실 문을 부술 듯 열어젖혔다. 머리를 제대로 묶지도 못한 채였다. 신발은 동네 슈퍼에 갈 때나 신는 삼선 슬리퍼였다.

“우리 애가 자살이라니요,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부짖었다. 현덕은 깜짝 놀랐다.

‘저승 세계에 왜 어머니가 있는 거지? 우리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실 텐데?’

오랜만에 본 어머니는 기억보다 젊었다.

‘근데 왜 젊으시지?’

현덕은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새 두 선생님과 어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시험 스트레스로 자살을 시도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어 교육청에서 주의 권고가 내려왔다, 현덕이가 자살을 입에 담았다, 부모님보다 일찍 죽게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천국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아닌 척해도 현덕이가 사실 시험 압박을 많이 받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와 가정에서 계속 감시하고 상담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등등.

‘어라?’

현덕이 고개를 갸웃하며 어머니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머니?”

“현덕아. 아이고, 내 새끼!”

그러자 어머니는 현덕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두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를 보는 사람들처럼 현덕과 어머니를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저 죽어서 많이 슬프셨어요? 죄송해요.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라, 진짜, 진짜 사고였는데.”

현덕은 더듬더듬 말하며,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현덕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예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왜, 왜 우세요? 울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아버지랑 형이랑, 잘 부탁해요. 근데 어머니가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엄마는 죽으면 안 되는데. 오래오래 사셔야 되는데.”

“현덕아, 네가 죽긴 왜 죽어. 죽으면 안 돼.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렴. 응?”

어머니가 흐느끼며 현덕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몸은 아픔을 호소했다.

그 고통과 온기는 진짜였다. 어깨를 적시는 눈물도, 현덕아- 하고 불러주는 목소리도 분명 진짜였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로 가는 길의 초입에 보이는 환상이라기엔 너무 현실감이 있었다. 마치 현덕이 진짜 중학생이고, 어머니는 현덕을 걱정해 학교로 달려온 학부모 같았다.

현덕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엉킨 실처럼 어지러웠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부인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엄마?”

현덕이 부르자,

“그래, 현덕아. 엄마야, 엄마.”

어머니가 대답해주었다.

[현덕아?]

그건 분명,

죽는 그 순간까지 귓가에 들렸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아…… 아아.”

어머니에게 끌어안긴 현덕의 몸이 덜덜 떨렸다. 오한이 든 것 같았다.

온몸이 부서질 듯 떠는 현덕을, 어머니는 절대 놓지 않았다. 자신의 온기를 모두 내주려는 듯 현덕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래, 현덕아. 엄마야, 엄마.”

귓가에 닿는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괜찮다고, 담담하자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자고 생각했건만.

“엄마, 엄마아-”

현덕은 어머니를 마주 끌어안았다.

“엄마, 나 죽기 싫어.”

잊고 있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울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온몸의 수분을 모두 뽑을 듯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게 울고 나니,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졸음인지 기절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현덕을 껴안고 일어났다. 두 선생님은 그런 어머니와 현덕을 부축했다.

어머니는 이대로 현덕을 데리고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두 선생님은 현덕을 교문 앞까지 운반해 주었다.

현덕은 어른 세 사람에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신이 아직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몸이 비리비리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덕과 어머니는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교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현덕은 택시 안에서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선잠이 든 상태였다. 몸이 물에 젖은 휴지처럼 축 늘어져 눈을 뜰 수 없었다.

교복 입은, 울다 지쳐 잠든 남학생과 급히 나온 듯 옷차림이 엉망인 어머니의 조합은 택시 운전기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좋은 소재였다. 힐끔힐끔 뒤쪽을 바라보던 택시 운전기사가 어머니에게 운을 뗐다.

“아들이 말썽을 피워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남자애들은 다 그런 거니까 너무 혼내지만 마시고, 힘내세요.”

택시 운전기사는 나름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말을 한 것이었다.

“우리 아들은 그런 아들 아닙니다.”

어머니는 평소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 했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만큼은 택시 운전기사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냈다.

언제나 공부만 해서 걱정인 아이라고, 지금도 공부하다 지쳐서, 그래서 데리러 갔다 온 거라고. 어머니는 현덕의 손을 꼭 쥐고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원했던 대답을 얻지 못한 택시 운전기사는 퉁명스러워졌다. 성의 없이 알았다고 대꾸하고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현덕은 자신의 숨소리와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고 또 따뜻했다. 다시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렇게 울었는데 아직도 몸에 눈물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걸까. 십삼 년 동안 눌러 담아 온 눈물을, 혹은 평생 흘려야 하는 눈물을 지금 다 흘려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집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현덕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현덕은 힘겹게 눈꺼풀을 뜨고,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올랐다.

집 문 앞에 서자 문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던 어머니가 멈칫, 했다. 방금까지 비틀거리던 현덕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머니, 잠깐만요.”

현덕은 어머니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열쇠를 빼앗아 들었다.

중학생 현덕은 아직 어머니보다 키가 작았다. 현덕의 어깨 위로 어머니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문 안 잠그고 나오셨어요?”

현덕은 한 손을 허리 뒤로 둘러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그게, 급하게 나와서 잘 기억이 안 나네. 잠근다고 잠갔던 거 같긴 한데.”

어머니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현덕은 발소리가 안 나게, 어머니를 꼭 붙든 채로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났다. 어머니와 비리비리한 중학생만으로는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강도를 상대할 수 없었다.

‘최대한 소리 안 나게 이곳을 벗어나서 신고부터 하자. 어머니를 지켜야 돼.’

이 생각뿐이었다.

문 안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망할 영감탱이! 판사면 다야? 아버지가 판사여서 내 동생이 학교에서 쓰러진 거 아냐!”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폭포수 아래에서 득음을 한 건지 의심이 될 만큼 우렁찼다. 당장 옆집, 윗집, 아랫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데시벨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매우 익숙했다.

“……형?”

“맹덕이?”

현덕과 어머니는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우당탕. 딩동댕 대신에 물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덕이 그 착해빠진 물탱이가 아버지 기쁘게 해드린다고, 지 머리 평범한 줄 모르고 계속 공부만 해대잖아.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현덕이한테 칭찬 한 번 해준 적 있어요? 이번에 현덕이가 경시대회 못 나가게 된 것도 위로해줬냐고요! 현덕이 그 순한 녀석이 뭐라 말을 안 해서, 내가 친구 동생한테 물어보니까 그 경시대회도 원래 현덕이가 나가야 하는 거 맞더구만! 근데 거기 학교에 구청장 딸이 다니는데, 그 경시대회 나가면 외고 가는 데 도움 된다고, 시발, 현덕이보다 성적도 낮으면서 지가 기회 가로채서 갔다던데! 아니 판사가 구청장보다 짬이 안 돼요? 뭐예요. 아들 뒷바라지도 못 해주고! 우씨, 청렴하면 다야? 아니, 청렴해서 빽 써주기 싫으면 아들한테 칭찬도 좀 해주고 격려도 좀 해주고, 그러든가! 애가 속상하고 애타니까 학교에서 쓰러져서, 자살한다 어쩐다 그런 거 아냐!”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건만. 그 안에서 형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아파트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위층, 아래층, 같은 층 아파트 사람들이라면 모두 들었으리라.

“아아……. 형. 제발.”

현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형을 강도로 오해했다는 죄책감 따윈 들지도 않았다. 그저 밀려드는 건 부끄러움과 쪽팔림뿐이었다.

“현덕아. 괜찮아.”

어머니는 그런 현덕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긴, 뭐가요.’

사흘이 지나기 전에 이 아파트에 사는 대다수 사람이 알게 되리라. A동 1301호에 사는 김 판사 댁 둘째 아들이 경시대회에 떨어지고 자살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형이 고래고래 소리 질러 말한 내용을 기반으로, 막장 드라마 요소가 덕지덕지 덧붙여져 대하 장편 드라마가 한 편 완성될 게 분명했다. 당장 내일부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련한 눈으로 현덕을 바라볼 것이다. ‘그래, 네 사연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말로 하지는 못하겠지만, 파이팅!’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몰려왔다.

현덕이 기억하기로, 그의 쪽팔림은 옛날부터 항상 이런 패턴이었다. 현덕에게 무슨 조그만 일만 있어도 ‘그게 다 아버지 때문이다!’를 시전하는 형과 그런 형을 무시하기는커녕 더 부채질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둘이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 속에 온 아파트에 울려 퍼지는 현덕의 자질구레한 사정.

부풀려진 소문으로 가련한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동정과 격려를 받아야 하는 현덕. 그걸 은근히 즐기며, 반상회에서 부풀려진 소문을 듣고 재미있어하는 어머니.

그러고 보면 언제나 그랬다.

‘설마 이번에도?’

현덕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강도가 집에 들었을까 걱정했던 어머니였건만. 지금은 현덕을 위로하고는 있지만 아버지와 형을 말리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엄마아.”

현덕이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설마 아버지랑 형한테 다 연락하신 거예요?”

“어머, 얘. 나는 그냥, 학교에서 연락받고 너무 걱정되어 학교 가는 길에 네 아버지랑 형한테 연락했을 뿐이야. 현덕아, 아버지와 형이 네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어머니의 말에 현덕은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현덕이 학교에서 어머니를 붙들고 펑펑 우는 동안, 업무를 째고 집으로 달려온 아버지와 수업을 버리고 집으로 달려온 형은 서로를 만나자마자 멱살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우리 현덕이 살려내라고.

그 사운드는 가감 없이 온 아파트에 퍼졌을 터. 이웃들은 저 집이 또 썰 풀기 시작한다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경비 아저씨가 올라와 조용히 좀 하라고 문을 두들기지 않고 있는 걸 보니, 이번 사연은 이웃들이 꽤 재미있어 하고 있는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중학교 때면…… 우리 형의 반항기가 극에 달해 있을 때잖아. 형이야 언제나 사춘기였지만, 군대 가기 전이라 특히 아버지랑 엄청 많이 싸우고 그랬을 때인데.’

아버지와 형은 물과 기름, 톰과 제리처럼 앙숙이었다. 현덕은 어머니를 닮아 뼈도, 몸 선도 가는 데다 얼굴이 희고 쌍꺼풀도 없었다.

반면에 형 맹덕은 용가리 통뼈에 얼굴선이 뚜렷하고, 쌍꺼풀도 찐-했다. 그야말로 아버지 판박이였다. 생긴 것만 닮은 게 아니라 성격도 똑같았다. 둘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기고 있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형은 형이 유치원 다닐 때부터 잘 싸웠다. 누구랑 있어도 말수가 적고 차분한 양반이 큰아들한테는 왜 그렇게 유치하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어머니가 혀를 찰 정도였다.

현덕이 아버지를 따라 판사가 되겠다고 장래희망을 밝힌 뒤부터, 형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현덕을 걸고 넘어지며 아버지에게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처럼.

“이래서 나 군대 가 있는 동안, 어떻게 마음 편히 나라를 지키며 군인으로서의 삶에 매진할 수 있겠어요? 그동안도 우리 현덕이는 아버지의 압박에 짓눌려 자기의 꿈도 모른 채, 공부나 하고 앉아 있을 텐데. 그러다가 이렇게 세상의 더러운 꼴을 마주치게 되면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슬퍼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자살 충동이나 느끼겠지! 옆에 자길 이해해주는 형은 없고! 있는 거라고는 무뚝뚝하고 혼자만 황희 정승 되면 되는 줄 알고 있는 아버지뿐이고! 근데 사실 황희 정승 존나 비리 저지르고 그랬던 사람인 건 알아요? 그 황희 정승도 뒷구멍으로 비리 다 저지르고 그랬다는데! 아버지는 황희 정승만도 못한 사람이야! 뭘 그렇게 잘나서 혼자 청렴한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무튼 우리 현덕이 죽기만 해봐! 아버지 내가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라임이 살아 있는 형의 찰진 음성이 또다시 온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랩을 배워 래퍼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형의 목소리는 빠르고 발음은 정확했다.

현덕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그마안-!”

한참 울어 탈진 상태에 가까운 몸으로, 억지로 목구멍을 쥐어짜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만 좀 해요. 그만! 그만! 내가 쪽팔려서 못 산다, 진짜.”

언제나, 아버지와 형이 싸울 때마다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힘껏 소리를 지르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현덕은 자신이 연 현관문을 부여잡고 서서 집 안을 쳐다보았다.

거실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형의 멱살을 붙잡고 목을 짤짤 흔들어대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삿대질하며 으르렁거리는 형이 서 있었다. 둘은 그 모습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고개만 현덕을 향해 돌리고 있었다.

“에이씨, 김현덕! 너 인마!”

형은 현덕을 보자마자 이를 갈며 소리쳤다. 목소리 어딘가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현덕아.”

방금까지 맹덕의 목을 부러뜨릴 듯 흉흉했던 아버지가 차분한 눈으로 현덕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단정하게 뒤로 넘겼던 앞머리가 헝클어지고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두 사람도 역시나 현덕의 기억보다 많이 젊었다. 형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을 법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도 얼굴의 주름이 옅었다. 하지만 두 눈에 담긴, 현덕을 바라보는 두 눈에 담긴 온기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현덕은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눈을 깜박였다.

‘병원 응급실에 누워 식물인간이나 의식불명 상태로 꾸는 꿈인 걸까? 아니면 죽어서 오는 저승세계인 걸까. ……그렇다기엔 너무 리얼한 거 아냐? 이렇게까지 사실적일 필요는 없잖아.’

현덕이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서 있자 어머니가 등 뒤에 서서 현덕의 등을 쓸어 내렸다.

“우리 현덕이, 괜찮니?”

그 손길과 온기는 꿈이나 환각이라 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것이었다.

“아…….”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말도 안 되지만.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자신은 죽은 게 아니라 살아서,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논리적인 이유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생각의 결과는 단 하나였다.

‘나 살았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구나. 그래서 우리 가족한테 돌아왔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맥이 탁, 풀렸다. 현덕의 몸이 크게 휘청이자 어머니는 얼른 현덕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어머니의 온기를 느끼며 아버지와 형을 보았다. 둘은 여전히 멱살을 잡고, 또 멱살이 잡힌 채로 현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덕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어, 말했다.

“……다녀…….”

목이 메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요.”

삼십삼 년 동안 키워주신 부모님에게.

삼십삼 년 동안 함께 자란 형에게.

십삼 년 동안 믿고 기다려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

현덕이 학교를 조퇴한 날 밤, 가족들 모두가 현덕의 눈치를 보며 저녁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사과를 깎아 현덕의 입안에 넣어주며 혹시 학교 가기 싫으면 며칠 정도는 집에서 쉬라고 조심스럽게 권했다. 현덕이 괜찮다며 고개를 젓자 그걸 본 형은 또 아버지에게 시비를 걸었다.

“아버지가 옛날에 십리 길 걸어 학교 다녔다는 얘기 듣고 저 순진해 빠진 놈이 그거 따라하겠다고 저러는 거잖아요. 아씨, 진짜.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야!”

이 선전포고에 아버지와 형은 다시 한번 싸울 뻔했지만 어머니의 중재로 어찌어찌 평화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

현덕은 아삭아삭, 사과를 씹으며 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옛날에 봤던 고전 영화를 다시 꺼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형 맹덕은 ‘군대 다녀와서 철든 장남’ 케이스였다. 형은 군대에 가기 전에 자기 인생의 모든 흑역사를 차곡차곡 쌓았다.

군대 다녀와서는 가기 전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 달라고 했다. 잊지 않으면 강제로 잊을 수 있도록 기억 상실에 걸릴 때까지 괴롭혀 주겠다고 선언했다.

군대 다녀온 후의 형은 정말 정상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새 그 전의 형에 대해 잊고 있었건만. 군대 가기 전 형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다시 놓여 있었다. 새삼 새롭고 반가웠다.

이때 형은 만화가, 그러니까 웹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를 많이 좋아했고, 대학교도 전국에 몇 군데 없는 만화창작학과를 찾아서 갔다.

그 모든 건 초등학생 때 만화 책방에서 처음 빌려본 어떤 만화책으로부터 시작됐다. 그 만화는 권력을 가진 자들을 응징하는 거리의 정의로운 조폭이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이 무찔러야 하는 가장 큰 적은 재벌에게 더러운 뒷돈을 받고 그들의 부탁대로 판결을 내려주는 악덕 판사였다.

훗날, 고등학생이 된 맹덕은 초등학생인 꼬꼬마 현덕을 제 앞에 앉혀 두고는 초등학교 때 그 만화책을 본 것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현덕은 형과 아버지가 그렇게 서로의 목을 짤짤 흔들며 싸우는 이유가 그 만화책 때문이었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현덕은 형이 아무리 보라고 권하고 눈앞에 들이밀어도 만화책을 보지 않았다.

삼십 대의 맹덕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흑역사라고 싫어했지만. 현덕은 이 시절의 형이 싫지 않았다. 비록 이때 형은 아버지와 싸우며 맨날 온 아파트에 자신의 이야기를 고래고래 소리 질러 쪽팔리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꽤나 아껴주었다. 맨날 공부만 하려 하고 형이랑 잘 놀지도 않는 영 귀염성 없는 동생이었을 텐데도 잘 챙겨주었다.

물론 그 뜨거운 형제애가 언제나 고맙고 좋았던 건 아니었지만.

현덕은 오늘부터 한 침대에서 함께 자자는 형을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자신의 방으로 가 문을 꼭꼭 잠그고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현덕은 아침밥을 먹고,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갔다.

학교 앞까지 태워 주겠다는 아버지와 형을 물리치기 위해 10분간 실랑이를 벌였던 걸 뺀다면,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반 친구들에게는 현덕이 감기 기운이 있어 어제 학교를 조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건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의 배려였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 몇몇이 쉬는 시간에 현덕을 쿡쿡 찌르며 이젠 안 아프냐고 안부를 물어왔다.

현덕은 실수로라도 친구들의 이름을 잘못 부를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반가운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안경을 쓰고, 머리를 교칙에 맞게 단정히 자른 범생이들이었다. 현덕은 그들과 함께 쉬는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었다. 점심시간엔 서로 영어 단어 물어봐 주기를 했다. 그러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름들을 다시 기억해냈다.

서른셋의 김현덕이 열여섯 살의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조카같이 보이고 세대 차이가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했건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명탐정 코난에서도 코난이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어린이 탐정단 활동도 하고, 재미있게 잘 놀았지.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나이 먹어서 뭔 주책인가 싶었지만 친구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 보니 어느새 다시 중학생이 돼버렸다. 중학생처럼 말하고 웃게 되었다.

학교 수업은 쉽고 재미있었다. 물론 수학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가물가물해서, 조금 위기감이 들긴 했다.

두꺼운 법전만 들여다본 세월이 어언 십삼 년. 그에 비하면 중학교 교과서는 너무나 컬러풀하고 다채로웠다.

수학도, 영어도, 국어도, 하다못해 과학도 재미있었다. 체육은 역시나 체력이 달려 수업을 따라가기 벅찼지만, 주변 범생이 친구들 모두 비슷한 체력 상태였던지라 서로를 위로하며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현덕은 더없이 평범한 중학교 3학년 학생의 삶을 살았다. 그 행복하고 평범한 삶 속에서 현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죽지 않고 중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왔구나.’

어쩌면 사고 후 병원 응급실에 코마 상태로 누워 있으며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식물인간이 되어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학교에 와 친구들과 공부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기적이 일어나서,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SF 영화에 나오는 타임 워프를 해서, 과거로 돌아온 거라는 실감이 났다.

피부에 와 닿는 상황은 분명, 어렴풋이 기억하는 중학교 때의 현실이었다. 그 현실은 현덕의 행동에 따라 ‘기억하고 있는 그때’와 다르게 바뀌었다.

예를 들면 체육 수업 시간이 그러했다.

이전까지 현덕은 체육 시간에 열심히 수업을 듣지 않았다. 워낙 체력이 저질이기도 했지만. 체육 시간에 너무 많이 움직이면 다음 수업 시간에 졸게 되는 게 싫었다. 몸이 격한 활동을 버티지 못하기도 했고.

올해 현덕이 다니는 중학교에 처음으로 부임한 체육 선생님은 현덕을 깍두기로 취급했다. 현덕을 주말 드라마에 가끔 나오는 불치의 백혈병에 걸린 여주인공을 보듯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체육 선생님의 팔뚝은 현덕의 허벅지보다 굵었으니, 그렇게 볼 법도 했다.

체육 선생님은 현덕이 조금만 비틀거리고 안색이 창백해져도 열외로 두고, 벤치에 앉아 있도록 했다. 현덕은 그러한 취급을 받는 게 싫지 않았다.

그랬던 현덕이 체육 시간에 열심히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햇볕이 뜨겁네. 몸 상태 안 좋은 녀석들은 운동장 뛰지 말고, 저기 벤치에 가서 앉아 있어라.”

준비 운동 겸 운동장을 뛰기 전 체육 선생님이 말했다.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체육 선생님의 눈은 현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현덕은 알아서 줄에서 빠져나와 벤치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덕은 선생님의 눈빛을 못 본 척하며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맸다. 체육 선생님은 그런 현덕을 보며 고개를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콕 집어 현덕에게 나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현덕은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 세 바퀴를 뛰었다. 꼴찌로 도착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운동장에 대자로 누어 헥헥거렸다. 운동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올려다 본 하늘은 빙글빙글 돌았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현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친구들은 그런 현덕을 빙 둘러싸고 박수쳤다.

“우와, 나 현덕이가 운동장 세 바퀴 다 돈 거 처음 봐.”

“현덕아, 왜 그래. 설마 너 경시대회 못 나가는 거 때문에 충격받았냐?”

현덕은 친구들이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나며 그냥 실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 현덕을 보며 친구들은 ‘얘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면서, 경시대회 못 나간 게 충격이 크긴 했구나.’ 생각했다.

현덕은 친구들과 농구공을 들고 운동장 구석에 있는 농구대로 가 수행평가인 3점 슛 던지기 연습을 했다.

현덕이 던진 공은 골대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뚝, 뚝, 바닥에 떨어졌다. 함께 연습하는 친구들의 공은 현덕과 달리 골대에 맞기는 했지만, 역시나 골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3점 슛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덕은 꽤나 즐거웠다.

‘왜 예전엔 이런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현덕은 있는 힘껏 농구공을 던지며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투덜거림에 끼어들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농구 시합 규칙을 외우라면 다 외우겠어. 열 번 던져서 일곱 번 이상 슛을 성공해야 만점이라니. 이건 불공평해. 키 큰 애들만 유리하잖아.”

“내 말이. 왜 체육은 중간고사 때 시험을 안 보고 수행평가로 점수를 내는 거냐고. 그럴 거면 체육 교과서는 왜 나눠준 거야. 한 번 펴보지도 않은 거 같아.”

“체육 선생님, 완전 직무유기야. 제대로 슛하는 거 가르쳐주지도 않고 알아서 연습하라고 공만 가져다주고는 계속 앉아 있잖아. 근데, 손 이렇게 하면서 던지는 거 맞아?”

범생이들은 농구 3점 슛 던지기 수행평가에서 만점 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투덜대면서도, 체육 선생님이 가르쳐준 자세대로 공을 던지는 연습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슬그머니, 공기 빠진 축구공을 들고 축구를 하러 간 지 오래였다.

“근데 현덕아, 너 저번 주보다 더 못 던지는 거 같아.”

“감기 심해지려고 그러나? 곧 중간고사 있으니까 당분간 내 옆에 오지 말아줄래?”

“어, 그래.”

현덕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워하며 기꺼이 옆으로 다가가 가짜 기침을 해댔다. 으악, 싫어, 저리 가! 등등의 반응을 보이며 좋아하는 친구를 보니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근데, 저기- 저 아줌마 보여? 아까부터 저기 서서 계속 이쪽 보고 있는 거 같은데, 맞지?”

친구들 중 눈이 가장 나쁜 민철이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어디?”

현덕이 뒤를 돌아보려 했다. 민철이 농구공을 운동장 바닥에 튕기며 현덕을 말렸다.

“야야, 대놓고 뒤돌아보지 마. 변태 성욕자일지도 모르는데 찍히면 어떡해. 드리블 연습하는 척하면서 살짝 봐봐. 되게 이상해. 진짜 변태 같아.”

현덕은 민철의 충고를 받아들여 농구공을 놓친 척 뒤로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돌려 데굴데굴 구르는 공을 주워들며 학교 후문 쪽을 바라보았다.

민철의 말처럼 한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하이힐을 신은 건지 구두 굽이 높아 보였다. 머리는 하나로 묶었고,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이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분명 현덕과 친구들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을 아예 농구 골대가 있는 쪽으로 틀고 있었다.

“헐, 뭐야?”

현덕이 깜짝 놀라 돌아서자 다른 친구들도 힐끔힐끔 후문 쪽을 쳐다보았다.

농구 골대가 후문 쪽에 가까웠기에 현덕과 친구들이 일찍 눈치를 챈 듯했다. 운동장 가운데서 축구를 하고 있는 같은 반 다른 친구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체육 선생님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누나 다니는 여고에 바바리맨 나타난다는 말은 가끔 들었는데, 무슨 공학 중학교에 여자 변태가 나타나냐?”

“그러게. 근데 여자 변태는 바바리코트를 안 입고 있네?”

“체육 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모두들 여자 변태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했다. 그 중 안경 도수가 가장 낮은 정우가 반론을 제기했다.

“내 생각엔 변태가 아닐 거 같아.”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이유를 대봐.”

민철이가 두꺼운 안경을 다시 추어올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안경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생각해봐. 변태가 왜 우리만 쳐다보냐? 그건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돼. 변태라면 우리 말고 저기 축구 하는 애들을 봐야 하는 거 아냐? 혹시 외고나 그런 데서 우리 스카우트하려고 온 거 아닐까? 우리 성적을 소문으로 듣고, 경시대회 입상 조건은 없지만 특별 전형으로 외고에 오지 않겠냐고 제의를 하는 건지도 몰라.”

정우가 논리 정연하게 말했다.

현덕과 민철이, 그리고 다른 두 친구는 함께 한숨을 내쉬며 그런 정우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우는 현덕과 함께 학교 대표로 경시대회에 나갈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너야말로 아닌 척하더니 진짜 실망이 컸구나.’

‘학원 다섯 개씩 다닌다면서 만화책 볼 시간은 있었나? 뭔 개소리야.’

물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우리가 아니라 얘, 현덕이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민철이 턱으로 현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농구공을 튀기며 서 있던 현덕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네 쌍의 안경 쓴 눈동자가 일제히 현덕을 향했다.

“흐음.”

“그럴지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우리 누나가 나한테 현덕이에 대해 물어봤어.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너 잘생겼대.”

“저번에 조퇴한 후로는 뭔가 좀 건강해지고 있는 느낌이야. 운동장도 세 바퀴를 다 뛰고.”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친구들의 눈빛에 현덕은 “으아아-” 괴음을 지르며 팔에 돋은 닭살을 보여줬다.

“나 팔 봐봐. 니들 때문에 닭살 돋았잖아.”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다니, 아직 어리군. 김현덕.”

민철이 웃으며 현덕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지금 날 허락도 없이 터치한 거? 가까이 오지 마라. 넌 내 취향 아니다.”

현덕은 슬금슬금, 민철에게서 멀어져 정우의 등 뒤에 섰다.

현덕이 경계 어린 눈초리로 민철을 바라보자, 민철이 들고 있던 농구공을 집어던졌다. 현덕은 당연하게 자기보다 키 큰 정우를 방패로 이용했다. 정우는 별생각 없이 서 있다가 어깨에 농구공을 맞고는 민철에게 도끼눈을 떴다.

농구 골대를 향하던 농구공들이 친구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이씨, 김현덕. 안 떨어져?”

“나 아파서 조퇴했었잖아. 지금 농구공 맞으면 뒤질지도 몰라. 살려줘.”

“꺼지라우, 나 먼저 살고 봐야지.”

“야, 야야- 공 날아온다. 피해!”

현덕은 정우의 등 뒤에 찰싹 붙어 살길을 도모했다. 정우는 현덕을 떼어내기 위해 난리 부르스를 추면서 날아오는 농구공도 피해야 했다.

어느새 후문에 서 있던 검은 선글라스 여성은 소년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과연 변태인가 아닌가. 그리고 현덕은 여성 변태가 하염없이 쳐다볼 정도로 잘생겼는가 아닌가. 이런 의문 또한 금세 잊혔다.

그랬기에 현덕을 포함한 다섯 명의 범생이들은, 하교할 때 교문 앞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그 여성이 선글라스를 벗고, 전혀 변태스럽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현덕을 바라보며 하얀 명함을 내밀 때 더욱 놀랐다.

“학생. 혹시 연예인, 그러니까 아이돌 연습생에 관심 있나요? 나 TE엔터테인먼트 사람인데, 학생을 캐스팅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여성의 말에 현덕의 옆에 서 있던 민철이 팔을 휘저으며 나이스- 하고 외쳤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눈앞의 하얀 명함을 내려다보던 현덕은, 고개를 들어 여성을 바라보았다. 혹시 변태가 아닐까 의심했던 게 죄송스러울 정도로 정상적으로 생긴 여성이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특히 매의 눈이 연상될 정도로 날카로운 눈이 낯익었다.

“아……!”

예전의 현덕은 딱 한 번 이 여성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맘때? 아니…… 중간고사 끝나고 난 다음이니까 지금이 아니라 몇 주 뒤였던 거 같은데. 아무튼 그때도 이분이었지.’

그녀는 현덕에게 아이돌 연습생 오디션을 제안했었다.

“우리 TE엔터테인먼트 오디션 한번 안 볼래요?”

다시 한번 그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눈앞에 놓인 하얀 명함에는 필기체로 멋들어지게 ‘TE ent’가 쓰여 있었다.

‘그때는 명함 받지도 않고 거절했지.’

현덕은 과거, 아니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중학교 3학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약간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경시대회에 나가지 못해 맥이 빠져 있었다. 그런 상태로 중간고사를 맞닥뜨렸으니 당연히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했다.

결국 간당간당하던 체력이 바닥을 쳤고, 현덕은 시험 시간에 푹 쓰러졌다. 제일 자신이 없던 수학 시험을 볼 때였다. 시험을 보던 중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

심각한 지병은 없지만 스트레스를 잘 다스리고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들었다. 몇 번 더 정기적으로 병원을 들러 검진을 받고, 약간의 약을 꾸준히 먹으라는 진단도 받았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니 형과 아버지는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었다. 현덕은 형과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날 시험 볼 내용을 공부했고, 남은 시험을 별 탈 없이 보았다. 하지만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정신이 너덜너덜했다.

현덕은 시험이 끝나고도 영 음침한 표정으로 학교와 집을 오갔다. 그 상태가 꽤 심각했는지, 형이 이제야 사춘기가 왔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일이었다. 시험이야 다음 기말시험을 잘 봐 만회하면 되는 것이었다. 설사 만회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외고가 아니라 일반고를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내신 관리에 목맬 필요가 없었으니까.

서른셋까지 살아 본 현덕이 보기엔 그랬지만, 열여섯 살 현덕에게는 그 정도의 통찰력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여성이 무슨 엔터테인먼트에서 왔다며 명함을 내밀었다.

“왜 저한테요?”

“학생 마스크가 마음에 들어서요.”

현덕의 질문에 여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던 열여섯 현덕에게는 그녀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내 얼굴?’

현덕은 매일 아침, 화장실 거울로 본 자신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창백하고, 핼쑥하고 쪼그맸다. 쌍꺼풀도 없었다. 남자답지도 않았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반짝반짝한 느낌은 단 한 톨도 없었다.

‘잘생겼다는 건 아버지나 형처럼 남자답고 강하게 생긴 걸 말하는 거 아닌가?’

예전의 현덕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판사인 아버지에게 원한을 가지고, 비리비리해 보이는 자신을 납치하러 온 예비 납치범이든가.

설령 그녀가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매니저라고 믿었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니까.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아이돌 연습생 제의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요, 전 그런 거에 관심 없는데요.”

현덕을 설득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말을 꺼내려는 여성을 무시했다. 내민 명함을 받지도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현덕의 거절이 조금의 여지도 없어 보일 정도로 단호했던 건지, 아니면 여성의 캐스팅 제의가 그리 진지하지 않았는지. 매몰차게 거절한 이후 여성은 다시 현덕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만남은 끝났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여성은 현덕에게 명함을 내밀고 있었다.

“야, 야, 김현덕.”

현덕이 멀거니 서서 명함만 바라보고 있자 민철이 현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학생 이름이 현덕인가요? 김현덕? 나쁘진 않은데 나중에 데뷔하게 되면 예명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여성이 생글, 웃으며 현덕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민철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자신이 쓸데없이 입을 놀려 현덕의 이름을 알려준 게 아닌가,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세 친구의 표정도 민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현덕은 그런 친구들을 둘러보고는 괜찮다는 의미로 민철의 발을 꽉 밟았다.

“네. 제 이름이 김현덕이에요.”

현덕은 여성이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

TE엔터테인먼트 캐스팅 매니저 나미나. 명함에는 여성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현덕은 명함에 쓰인 이름을 조그맣게 중얼거려보았다.

“거기 쓰여 있는 대로 나는 나미나라고 해요. 우리 회사 연습생들은 그냥 편하게 나 대리님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시는 건가요?”

“학생 마스크가 마음에 들어서요.”

미나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때랑 똑같은 대답이네.’

현덕이 눈을 껌뻑이며 미나를 보았다.

“현덕 학생이 우리 회사에서 찾고 있는 이미지에 딱 맞아떨어져서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내가 현덕 학생 같은 학생 찾고 싶어서 근래, 두 달 동안 서울에서 웬만한 남중 남고를 다 돌아다녀 봤거든요. 피시방이랑 오락실도 가보고. 그런데 우연찮게 옆에 있는 여고 지나가다 학생들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이 중학교에 공부 잘하고 잘생긴 남학생 있다는 소문이 꽤 찐-하게 돌고 있다더라고요. 그래서 요 며칠 이 학교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현덕 학생이 내 눈에 딱 띄지 뭐야?”

“……네에.”

마치 여장한 맹덕 형과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 형이랑 같은 과구나. 이렇게 빠르게 많이 말하면서 발음까지 정확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니.’

현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미나는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현덕 학생은 몰랐겠지만, 내가 요 며칠 현덕 학생을 여러 번 봤어요. 암만 봐도 딱 연예인 할 상인데.”

“아아…….”

‘저는 십삼 년 동안 고시 낭인으로 살아갈 관상일 텐데요.’

현덕은 영혼 없는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혹시 어디 다른 기획사 소속되어 있거나 그런 거 아니죠? 이 정도 마스크 가지고 어디 기획사 안 들어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데. 뭐, 설사 어디 들어가 있다 해도 전속 계약한 거 아니면 괜찮으니까. 우리 TE엔터로 와요. 기획사랑 얘기하는 건 내가 맡아 줄게요.”

“다른 기획사에 들어가 있지는 않아요.”

“그래요? 잘됐네. 이런 원석을 여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니. 나 오늘 완전 득템했네. 현덕 학생, 우리 기획사 오디션 한번 보러 와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후에 진행하니까 편할 때 와서 내가 준 명함 데스크에 내밀면 안내해 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티엔 엔터테인먼트나 ……나미나 캐스팅 매니저님을요.”

“어머?”

현덕의 질문에 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덕 학생, 연예인, 아이돌, 그런 거에 별로 관심이 없나 봐요?”

“네, 아마도?”

현덕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정우가 현덕의 어깨를 툭 쳤다.

“얌마, 아까 내가 들려준 노래 잊었어? 그거 부른 핑크키위가 여기 소속 아이돌이야.”

민철은 한술 더 떠 친절히, 김현덕을 위한 맞춤식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엄청 큰 회사래. 고등학교로 치면 외고나 과고급.”

“정말?”

현덕은 그제야 제가 손에 든 명함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렇게 큰 회사에서 왜 나를?”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건만, 미나는 용케 알아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현덕 학생 마스크가 딱, 마음에 들어서요. 그리고 성격도 마음에 드네요.”

“…….”

‘날 언제 봤다고?’

현덕의 눈초리가 가느다래지자, 미나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차분하게 질문하고 확인받으려 하고 그러는 거 보니까, 어떤 성격인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사람들이 흔히 아이돌, 연습생, 하면 뭔가 끼 많거나 좀 놀아보고, 그런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사실 현덕 학생처럼 차분하고 수더분한 학생이야말로 아이돌 연습생에 잘 어울리거든요. 이건 꽤나 지구력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멀뚱멀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현덕을 상대하면서도 미나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착한 동네 누나같았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미나의 두 눈은 현덕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신체검사 때 키와 체중을 재는 기계 앞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이후로도 미나는 10여 분 동안 현덕과 친구들을 붙잡아 두고, 현란한 말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기어코 현덕에게 언제고 회사에 들러 보겠다는 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미나와 헤어지고, 현덕은 친구들과 서점으로 갔다. 오늘 새로 나온다는 EBS 교재를 사고 헤어지며, 친구들은 현덕에게 물어보았다.

“정말로 그 티이인지 이티인지 하는 기획사에 찾아가 볼 거야?”

“아이돌 연습생 할 건 아니지?”

“그 나중에 수시 넣을 때 특별 활동 같은 걸로 포장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공부에 방해되긴 할 텐데, 수시로 대학 갈 거 아니면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친구들은 현덕이 아이돌 연습생 제의를 거절하지 않은 것을 의아해했다.

“역시나 경시대회에 못 나가서 실망이 컸던 거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일탈은 좀 아닌 거 같아.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공부에 방해될 게 뻔해.”

정우가 대놓고 반대했다.

“어차피 안 할 거 아냐? 하지도 않을 거면서 그 아줌마 기대하게 명함은 왜 받았어.”

민철은 당연히 현덕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현덕은 친구들의 질문 세례를 한 몸에 받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명함이 닿았다. 네모반듯하고 딱딱한 느낌은 확실히 자신과 안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게, 왤까.”

현덕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런 두루뭉술한 것뿐이었다.

***

친구들과 헤어져 집을 돌아오니, 맹덕이 거실에 누운 자세로 현덕을 반겼다.

“이제 오냐, 왜 이렇게 늦었어?”

“친구들이랑 서점 갔다 왔어. 오늘 EBS 문제집 새로 나왔거든.”

“이제 뭐 하냐?”

“EBS 들어야 돼. 수학.”

“학교 갔다 왔으면 됐지, 집에 와서 또 공부를 하겠다고?”

“복습하고 예습해야지, 형.”

“미친. 야,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거야. 내일 할 공부는 내일 하는 거고. 복습 예습은 개뿔. 네가 그러니까 자살 충동이 드는 거야, 인마.”

맹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덕을 잡아끌었다. 현덕은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형에게 끌려 다시 집 밖으로 나서야 했다. 맹덕은 자나 깨나 공부 생각뿐인 동생을 데리고 집 앞 만화 카페로 갔다.

‘오늘 형 때문에 못 하게 된 공부는 토요일 오후에 비워둔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 하자.’

현덕은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조정했다.

이곳은 맹덕이 고등학생 시절, 매달 어머니께 받은 학원비를 기꺼이 바치며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다. 맹덕은 알바생에게 열렬한 환영 받으며 명당 자리를 안내받았다.

“머리 좀 식혀. 오늘 공부 안 한다고 내일 세상 망하는 거 아니니까, 만화책도 좀 보고, 배고프면 형 이름 대고 카운터에 라면 끓여 달라고 해.”

맹덕은 현덕을 푹신한 소파에 앉히고는 만화책을 가지러 갔다. 현덕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만화 카페는 말 그대로 만화 카페였다. 사방에 만화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소파나 벌집같은 룸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현덕처럼 교복 차림인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맹덕이 양손에 만화책을 가득 들고 돌아왔다.

“얼레?”

현덕을 본 맹덕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당황했을 때의 버릇이었다.

“이번엔 안 도망갔네?”

“내가 도망을 왜 가.”

“뭐야, 너 내 동생 아니지. 내 동생 어디 두고 여기 앉아 있냐? 너, 누구냐?”

“내가 가길 바라면 지금이라도 가고.”

현덕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맹덕이 얼른 현덕을 붙잡았다.

“알았어, 알았어. 아, 진짜 농담이 안 통해. 동생아, 만화 좀 봐라. 그래야 형이 농담할 때 농담인 줄 알아들을 거 아냐.”

예전에도 종종, 맹덕은 현덕을 만화 카페로 데리고 왔다. 그때마다 현덕은 맹덕이 자리를 비울 때를 틈타 슬그머니 집이나 도서관으로 가곤 했다. 형이 섭섭해하고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왜였을까.’

현덕은 과거의 자신을 새삼 돌이켜 보았다. 이미 중학생 때부터 현덕에게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공부는 언제나 제1순위였다. 나머지 모든 것은 뒷순위로 밀렸다. 언젠가 공부가 끝나면, 공부를 다 하면 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미뤄만 뒀던 것 같다.

하나도 못 하게 될 줄 모르고.

공부를 다 하고 나면 해야지, 생각했던 것을 어느 순간부터 모두 잊어버렸다. 시험 합격 후에는 잊어버렸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했다. 죽어버렸으니까.

‘그러지 말걸. 좀 더 형이랑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현덕은 맹덕을 보았다. 맹덕은 현덕이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인기 있는 만화책들을 소개해주었는데 꽤나 즐거워 보였다.

맹덕과 함께 노는 즐거움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덕은 맹덕이 소개해 준 만화책들 중 하나를 골라 읽어 봤다. 맹덕은 만화책을 읽는 현덕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소리에 현덕이 고개를 들었다.

“형, 뭐 해?”

“꿈일까 봐. 증거를 확보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맹덕은 인증 사진을 실컷 찍은 후에야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아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현덕은 만화책을 몇 장 읽다가 슬쩍 맹덕을 바라보았다. 맹덕은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말을 걸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나한테 할 말 있어?”

어떻게 알았는지 맹덕이 먼저 말을 걸었다.

“만화책 안 봐?”

“너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쳐다봤잖아.”

“어떻게 알았어?”

“내가 형이야. 원래 형들은 그런 거 본능적으로 알게 돼.”

맹덕은 동생을 위해 그 재미있는 만화책을 중간에 덮었다.

“무슨 일이야. 말해봐.”

부드러운 목소리가 현덕의 귀에 착 감겼다.

“……이거.”

현덕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맹덕에게 내밀었다.

“뭐냐, 이거?”

맹덕은 명함을 확인하고는 설명을 요구했다.

현덕은 육하원칙에 따라 왜 저 명함이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건지 설명했다. 맹덕은 현덕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며, 한편으로는 현덕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다시 봐도 참, 뉘 동생인지 겁나 잘생겼네. 시발, 누구 동생이긴. 내 동생이지.’

현덕은 외탁했냐는 말을 할 정도로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머리카락은 숱이 많으면서도 가늘어서 언제나 찰랑찰랑했다.

눈은 크고 동그란데,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처져 천상 강아지상이었다. 눈을 크게 뜨면 울망울망하니 순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맹덕은 특히나 현덕의 그 눈에 약했다. 그래서 한창 동생을 괴롭히고 싶은 중2병 시절에도 차마 꿀밤 한번 때려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에도, 대학을 다니는 지금도, 솔직히 주변에서 현덕보다 잘생겼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TV를 보다가도 미소천사니 우윳빛깔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 남자 아이돌 멤버를 봐도 다 현덕이만 못해 보였다.

‘현덕이보다 못생겼는데 미소천사는 무슨. 내 동생이 더 하얀데? 우윳빛깔? 커피 우윤가 보네.’

현덕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며 밤늦게까지 안 자고, 아침식사를 걸렀다. 그러면서 안색이 유달리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눈 밑의 다크 서클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곤한 느낌에 그 미모를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잘생긴 얼굴은 어디 안 갔다.

그런데 한 일주일 전부터, 그러니까 자살 소동이 있고 난 뒤부터는 잠도 일찍 자고 아침밥도 잘 챙겨 먹어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피곤한 오오라에 가려져 있던 미모가 슬슬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피어나는 미모가 길거리 캐스팅에 딱 걸린 듯했다.

‘현덕이가 아이돌 연습생? 오디션? 연예인이 되겠다고?’

듣고도 실감은 안 났다. 그렇지만 이게 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맹덕은 명함에 적혀 있는 회사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회사는 일단 오케이.’

꽤 익숙한 이름이었다. 3대 엔터테인먼트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큰 대형 기획사였다. 최근에는 맹덕이 관심을 가졌던 아이돌, 핑크키위가 빵 뜨기도 했고.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맹덕이 물었다.

“나?”

현덕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래, 너. 김현덕, 니 생각.”

“어…….”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어, 아니, 별생각 없어. 아니, 뭘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보고 그래. 그냥 나 길거리 캐스팅 받았다고 자랑하려고 말한 거뿐인데.

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하지만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난 명함을 왜 받았을까?’

죽었다 부할했다고 해서 새삼 연예인이 되고 싶어졌다거나, 아이돌에 관심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덕은 여전히 점심시간에 들었던 노래가 어떤 아이돌 그룹이 부른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명함을 받았던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다시 열여섯 살부터 삶을 이어나가게 된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한 번 다르게 살아가 보라는 신의 뜻으로 일어난 기적일지도 모른다.

현덕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요 일주일 동안 예전과 다르게 살아보고자 노력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지 않고 일찍 잠들었다. 자고 싶은 만큼 푹 잤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언제나 혼자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현덕과 함께하는 아침식사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매일 출근하며 용돈을 쥐여주려 하셨으니까. 늦잠 대마왕 맹덕은 절대 몰라야 하는 비밀이었다.

학교에서도 체육 시간에 몸을 빼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면서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했다. 그럼에도 김현덕은 여전히 얌전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중학교 3학년 모범생이였다.

그런 현덕 앞에 과거 가지 않았던 길이 다시 놓였다. 가보지 않은 길을 잊어버리고,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걸 후회조차 해본적 없건만.

다시 한번 열여섯 살이 되어 그 선택의 순간에 놓이자 이상하게도-

“해보고 싶어.”

“해보고 싶어?”

“응. 그런데, 잘 모르겠어. 연예인이 되고 싶다거나 아이돌이 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진로 희망은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 판사. 그러니 이후의 삶 또한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 법학과를 지망할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모교로 진학할 것이고. 거나하게 취해 밤새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그날의 아버지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무 살 때부터는 사법고시를 준비할 것이다. 무슨 문제가 출제되는지 대충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아버지처럼 소년등과를 할 순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막대한 공부량이 필요한 시험이니, 몇 년간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지.

꾸준히 열심히 하면, 합격까지 또 13년이나 걸리진 않을 것이다. 한 7년, 혹은 8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 합격하면 영화 같은 건 보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형에게 전화해 데리러 와 달라고 해 형의 차를 타고 집에 갈 것이다. 그리고 연수원에 들어가 또 공부를 하고, 아버지 뒤를 이어 판사 임용에 도전하며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고3이 되기 전에 다만 얼마만이라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평소대로라면 자신의 인생에 단 한 번의 접점도 없었을 경험을. 자신의 삶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놓인 가지 않은 길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워져 보고 싶었다.

우주민에게.

스물여덟 살의 겨울. 그저 TV로만 만나봤던 그 사람에게.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현덕에겐 공부가 우선이었다. 우주민을 공부 다음으로 미뤄뒀다. 일단 공부를 끝마친 후 그의 남팬이 되든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내 그에 대해서 좀 더 알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아는 거라고는 우주민이라는 이름과 TV에서 봤던 영화 홍보 인터뷰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게 아쉬웠다.

‘아이돌 연습생이 되면, 운 좋게 연습생 우주민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 우연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번에는 그가 속했다는 홀리포스란 그룹을 일찍부터 알게 되어 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살며 버텼다는 아이돌 세계를 나도 경험해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망설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지 못하는 현덕에게.

“하고 싶어? 그럼 해. 하고 싶으면 해보면 되는 거야.”

맹덕이 말했다.

***

형과 놀고 집에 들어오니 아버지가 와 계셨다. 현관문에 놓인 아버지의 신발을 보자마자 맹덕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게?”

“친구네 집에서 좀 놀다 올게.”

맹덕은 손을 휘휘 저어 인사하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현덕은 멀어지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배웅했다.

“형, 입대까지 28일 남았어. 몸 조심히 놀고 와. 격하게 놀지 말고.”

“야! 씨, 날짜 세지 마! 나도 안 세는데 네가 왜 내 입대 날을 꿰고 있어!”

“정확히는 27일하고 6시간이야!”

“아우, 씨. 저것도 동생이라고. 으구! 날 쌀쌀하니까 얼른 집에나 들어가. 거기 계속 서 있지 말고.”

맹덕은 현덕에게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군대 가기 전까지 형이랑 아버지 사이가 극악이었지.’

그러고 보면 군대 가기 전까지도 맹덕은 집에 잘 안 들어왔다. 대학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우거나 친구네 자취방에 가서 잤다. 군대 가기 전에 위대한 작품을 그려 세상에 던져 놓고 군대로 끌려가겠다는 마음 반,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은 마음 반이라고 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도 한 끼 안 먹고 군대 갈 거냐고,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한 다음에야 겨우 집에서 잠을 잤다. 입대하기 일주일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진 형 보는 게 힘들어지는 건가?’

현덕은 아버지의 신발 옆에 나란히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 큰 소리로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오늘 사온 EBS 교재를 두고 앉은 현덕은 샤프를 드는 대신 오늘 받은 명함을 꺼냈다. 하얀 명함은 약간 구겨져 있었다.

‘그럼 해. 하고 싶으면 해보면 되는 거야.’

그런 말을 들은 후에도 주저하며 망설인다는 건, 비겁한 태도일 터였다.

현덕은 명함에 쓰여있는 번호를 꾹꾹 눌러 전화를 걸었다. 연결 신호음은 오래 가지 않아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네, TE엔터테인먼트 나미나 대리입니다. 누구시죠?]

낮에 학교 교문 앞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안녕하세요. 낮에, 서우 중학교 앞에서 명함 받았던 김현덕이라고 합니다.”

[네, 현덕 학생. 기억해요. 다시 목소리 듣게 돼서 반가워요. 반나절 동안 잘 지냈어요?]

미나는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려면 이렇게 사교성이 좋아야 하는 거구나.’

현덕은 감탄했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었어요? 혹시 마음이 움직여서, 우리 회사 오디션 봐볼 생각이 강하게 들었나요?]

“네.”

[오, 이런 결단력. 아주 좋아요.]

미나가 웃으며, 이미 회사에는 연락을 해두었으니 언제든 시간이 될 때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저는 매니저님께서, 음, 매니저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요. 뭐든 편하게 불러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매니저님께 명함을 받기 전까지는 아이돌이나 연예인 생각은 하나도 안 해봤거든요.”

[네에, 네에. 솔직하게 말해주는군요.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조언을 구하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오디션을 보러 가면서 제가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요? 매니저님 명함을 들고 가면서 아무 준비 없이 가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현덕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어이없어하거나, 명함 준 거 취소해도 되냐고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다.

[아, 정말. 현덕 학생. 이제 두 번 얘기한 것뿐이지만, 볼수록 매력 있네. 진짜 마음에 들어요.]

걱정과 달리 미나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네. 일단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들어 해주셔서요.”

현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빈말 아니라 진짜로요. 정말 바른 모범생이네요. 이렇게 대놓고 전화해서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봐요. 대개는 흥분해서, 그냥 무턱대고 우리 회사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뭐, 좀 준비된 사람들은 알아서 준비해 오고.]

“제가 그 좀 준비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요. 역시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나요?”

[아니, 아니요. 현덕 학생처럼 아예 생짜는 아무것도 준비 안 해도 돼요. 괜히 며칠간 뭐 준비한다고 이상한 물 들으면 그게 더 마이너스니까. 지금 그대로 가도 돼요.]

“네에.”

‘이상한 물’이라는 게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현덕은 일단 다소곳이 대답했다.

[오디션 볼 마음 먹어준 게 고마워서, 또 가서 당황할까 봐 미리 말해줄게요. 일단 우리 회사 찾아오면 이것저것 시켜 볼 거예요. 프로필 사진도 찍어 볼 거고 카메라 테스트도 받아 볼 거고. 그러면 거기 사람이 시키는 대로 그냥 서 있거나 걷거나 빙- 돌거나 하면 돼요.]

“네에.”

[춤이랑 노래해보라고 시킬 텐데, 혹시 할 수 있으면 하면 돼요. 춤은 못 추면, 리듬감 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냥 음악 따라 몸 좀 흔들고 그러면 돼요. 정 못 하겠으면 크게 박수 치면서 몸 좌우로 흔들어도 되고.]

“춤은 못 추니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하면 되겠군요.”

[노래는 좀 부를 줄 알아요?]

“음악 시간에 배운 건요.”

[뭐든 제일 자신 있는 거 부르면 돼요. 음색에 맞는 팝송이나 가요를 부르면 좋을 텐데, 뭐 아는 거 없어요?]

제일 자신 있는 노래라. 현덕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애국가를 불러도 되나요?”

[애국가? 지금 애국가라고 했나요?]

“네, 제일 많이 불러본 거기도 하고. 제일 자신 있어요.”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꽤 긴 시간 웃기만 하더니, 여전히 웃음이 반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그래. 애국가 좋네. 4절까지 다 부를 수 있어요?]

“네. 근데 4절까지 다 부르면 꽤 긴데 괜찮은가요?”

[음……. 괜찮다고 말하면 다 부를 거죠? 농담도 못 하겠네. 음색을 확인하려는 거니까 1절만 불러도 될 거예요. 애국자네요, 현덕 학생. 애국가를 4절까지 다 외우고. 아주 기특하네요. 기특해.]

칭찬을 들을 타이밍이 아닌데 과한 칭찬을 들었다.

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나의 말에 숨겨진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미나와의 통화는 현덕이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그런 현덕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나는 꽤 즐거워하며 현덕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이십여 분 정도 통화한 끝에 현덕은 감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은 개통된 이후 처음으로 장시간 통화를 감당하고서는 뜨끈해졌다. 현덕은 미나와 통화했던 내용을 포스트잇에 정리했다.

“사진 찍고 카메라 테스트. 춤을 춰보라고 하면 박수를 치면서 왔다 갔다 하기.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애국가 부르기. 일 절만.”

포스트잇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두고는 맹덕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토요일에 티이엔터테인먼트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줄 수 있어?]

답은 금방 날아왔다.

낼ㄱㄱ?

니혼자어케보내 이길치야ㅡㅡ

낼점심밥먹고 형이랑 가자

ㄳㄳ

훌륭한 내비게이터까지 확보한 현덕은 인터넷 검색 창에 ‘아이돌 연습생’을 쳐 보았다.

아이돌 연습생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한다는 르포 기사부터 아이돌 연습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는 질문에, 어느 엔터테인먼트 어느 연습생이 좋다는 글까지.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가 펼쳐졌다.

자극적인 제목을 클릭해보면 대개는 힘들고 고단한 길이라는 결론이 대부분이었다. 빛나는 청춘들이 인기 아이돌이 되기 위해 연습생으로 엄청 고생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데뷔조차 못 하고 업계를 떠나는 게 현실이라고들 말했다.

어설픈 생각으로 이쪽에 발을 담갔다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꿈을 가지고 정말 절실하게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이쪽 현실이다. 과거 연습생이었다던 누군가가 쓴 글이 매섭게 현덕을 내리쳤다.

현덕은 그런 글들을 읽으며 오히려 안심했다.

‘이렇게 힘든 길이구나. 아이돌이 된다는 게. 그럼 나 같은 건 절대 될 수가 없겠네.’

고작 이런 마음가짐으로 오디션을 보러 가 봐도 되는 걸까. 꿈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창피나 당하고 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안일한 자신 따위는 피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발판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이돌 연습생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없었지만 현덕은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음…….”

현덕은 망설이다가 검색창에 ‘우주민’을 쳐 보았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뜨지 않았다. 검색창 상단에는 ‘우주인’을 검색해야 하는데 잘못 검색한 게 아니냐는 친절한 안내 문구까지 떴다.

“지금은 이게 당연한 거겠지.”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우주민을 처음 알게 됐던 날, 현덕은 핸드폰으로 우주민을 검색해보았다. 그때는 검색창이 이렇지 않았다. 우주민의 프로필, 사진, 뉴스 기사 등등이 가득했다.

우주민에 대한 정보는 여전할 거라 생각했기에 그때의 현덕은 고작 나이만 확인해 보고는 말았다.

“적어도 어느 기획사 소속이었는지 정도는 봐 둘걸.”

현덕은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시 EBS 교재를 폈다.

찰칵찰칵. 샤프심을 누르던 중 문득 든 생각에 현덕은 피식, 웃었다.

“설마 TE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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