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서른 셋의 삶 (1/36)

다시 한 번, 이번엔 1

다시 한 번, 이번엔

1

두고

목차

1. 서른 셋의 삶

2. 열여섯

3. 오디션

4. 연습생 김현덕

5. Boy meet boy

6. 다리 위에서

7. 결심

8. 시작

1. 서른 셋의 삶

올해, 대한민국 마지막 사법고시가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마지막 시험이었다.

현덕은 열세 번째 보는 시험을 더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그냥, 9급 공무원 시험을 보자. 적어도 그건 십삼 년이나 걸리지는 않겠지.’

무념무상을 넘어선 자포자기였다.

‘설마 시험에 합격할까?’라는 일말의 기대감도 가지지 않고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1차 시험에 합격했다.

딱히 기쁘지 않았다. 2차 시험도 합격하리란 보장이 없었기에 합격을 기대하지 않았다. 혹시나 덧없는 기대를 하실까 봐 걱정돼서 부모님께도 1차 시험 합격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한 지 십삼 년이 지나 처음으로 2차 시험에 합격한 것이었다.

현덕은 합격을 확인하고도 다시 수험번호를 치고 들어가 2차 시험 합격을 확인했다.

문득 전산상에 뭔가 문제가 발생하여 나타난 오류 화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합격 화면을 오십 장이나 캡처했다. 나중에 정말 오류가 난 거였다고 연락이 온다면 행정 소송을 걸 생각이었다.

‘정말 이 세상에 하나님인지 부처님인지 하는 신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그 신이 보기에 내가 참 불쌍해서 2차 시험 합격 정도는 경험하게 해주려는 건가?’

나중에 9급 공무원 준비할 때에, 주변에서 그 나이까지 여태 뭐 했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하며 무게를 잡아볼 수도 있겠지.

‘아, 2차까지는 어떻게든 갔는데, 3차가 말이지.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는데 거기서 또 떨구더라고. 물먹었지, 뭐.’

고시생 13년 차의 부동심은 꽤 단단한 것이었다. 2차 시험에 합격하고도, 자신이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3차 시험에서 불우하게 떨어지는 바보 같은 놈이 바로 나겠구나.’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3차 시험에 합격했다.

이번엔 수험번호를 다시 치고 들어가 합격자 발표를 여러 번 확인하지 않았다. 합격 발표 화면을 핸드폰으로 찍지도, 캡처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은 1차 합격자 발표 날에 연락이 없어, 떨어졌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합격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통곡하셨다.

“고맙다.”

전화를 건네받은 아버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서 짭짜름한 소금기가 묻어났다. 현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덕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신동이라 불리는 천재였다. 첩첩산중 촌구석에서 십 리 길을 걸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신동을 알아본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지원을 받아 읍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전국 50위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이후 4년 장학금에 매달 생활비까지 장학금으로 주겠다는 어느 대학교의 제의를 받아 그 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만 20세. 소년등과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밭을 갈며 일하던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열었다고 했다.

현덕은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판사가 되고 싶었다. 딱히 부모님의 압박이나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게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사람이었지만, 현덕의 형 맹덕을 키우며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지 않음을 깨우쳤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타지로 나와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남동생들을 줄줄이 학교에 보내고 장가를 보내야 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한 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한을 자식이 이뤄주길 바라진 않았다. 뒷바라지하며 달달 들볶아도 공부하지 않았던 남동생을 키워봤던 경험 덕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딱히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덕은 그냥, 매일 아침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난 아버지 같은 판사가 되어야지.’

그 생각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현덕은 성실히 공부했다. 아버지 같은 신동이나 천재가 아니었던 터라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 한 번도 전교 1등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항상 그 근처에서 맴돌았다.

내신 관리를 성실히 하고 수능도 잘 봐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대학교의 법학과 세 곳에 모두 합격했다. 그중 아버지의 모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평소 평일이나 주말이나 할 것 없이 바빴다. 또 원체 감정 기복이 없고 무뚝뚝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공부하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와서인지, 칭찬이나 자랑에 인색했다. 현덕이 경시대회에 나가 상을 타와도 잘했다는 칭찬 한 번 해주질 않던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현덕이 아버지의 모교에 진학하기로 한 날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귀가했다.

아버지는 항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술자리에서 맥주 석 잔 이상은 마시지 않곤 했다. 그런 분이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오셨다. 어머니의 부축을 받기까지 했다.

그날, 현덕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양복을 벗지도 않은 채 고향 친구들에게 죄다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내가 다닌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아버지를 따라서 법관이 되겠다고 그랬다고. 아버지는 현덕이 자신이 다녔던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걸 마음껏 자랑했다.

평생 출세는 담쌓고 그저 평범한 판사로 살아온 아버지에게, 자신을 존경하여 그 뒤를 따르겠다는 아들의 모습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기쁨인 듯했다.

현덕은 자는 척 누워서 밤새 이어지는 전화 통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똑같은 말을 스무 번도 넘게 반복했다. 그런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덕은 다짐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꼭 합격하겠다고.

그래서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시절부터, 현덕은 학교 도서관에 열심히 드나들었다. 군대에 가서도 틈틈이 책을 보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서는 고시촌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합격하지 못했다. 아버지처럼 소년등과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현덕은 낙담하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현덕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형이 벌컥 화를 냈다. 아버지의 쥐꼬리만 한 월급 생각하지 말라고, 형이 지원해주겠다고 선언했다.

졸지에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판사가 된 아버지는 버르장머리 없는 큰아들에게 화를 냈다. 그러고는 퇴직할 때까지 현덕의 뒷바라지는 본인의 월급으로 할 거라고 선언했다.

현덕은 어머니의 중재에 힘입어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형에게 용돈을 받아가며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렇게 십삼 년을 공부했다.

아버지처럼 단번에 합격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13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아니,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이 합격할 거라는 기대조차 들지 않았다.

‘이런 게 학습된 무기력인 건가?’

애써 호기롭게 ‘올해 반드시 합격한다!’ 다짐하며 공부를 해도 결과는 같았다. 불합격.

그렇게 사법고시라는 수렁에 빠졌다.

일이 년 해보고 빠르게 빠져나갔으면 손을 탁탁 털고 쉽게 돌아설 수 있었으련만. 일 년, 그리고 일 년. 해가 더해질수록 수렁에 깊이 빠져 이젠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꼴깍꼴깍,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니, 미쳐버리기 직전.

현덕은 선택해야 했다.

그동안의 세월을 매몰 비용으로 생각하고 시험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래도 계속 시험을 준비할 건지.

그게 8년 차 때였다.

스물여덟 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말 기계처럼 공부했던 해였다. 합격하지 못하면 한강에 투신자살하리라 결심하고 죽어라 공부했다.

어째서인지 그해에는 1차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서 부모님께도, 형에게도 전화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정신이 드니 한강 다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실의에 빠진 사람이 죽으러 한강 다리에 가면 그리도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던데. 이상하게도 현덕이 찾아간 한강 다리는 밝고 아기자기했다.

산책로처럼 단장되어 있어 나무판자도 깔려 있고 조명도 예쁘게 설치되어 있었다. 벤치와 화단도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강아지와 산책하거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한강 조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마련된 자리에 서서, 현덕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지금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겠지? 내 시체를 건져야 하는 경찰이나 구급대원 분들께도, 추운 날 민폐를 끼치는 걸 테고.’

그리고,

‘어머니랑 아버지, 형한테도.’

몇 년간 싫은 기색 한번 없이 용돈을 보내주는 형이 생각났다. 원래 사법시험은 오래 공부하는 시험이라고, 건강만 해치지 말라고 당부하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어야 하는데,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은데, 죽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다면 내 삶은 그저 민폐였을 뿐이잖아.’

의미 있는 삶을 살지도 못한 채,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도 미안했다.

‘적어도, 어떤 일이라도 해서 형과 부모님이 나한테 준 돈의 얼마 정도라도 갚고 죽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변명처럼 죽지 못했다.

현덕은 다시 두 시간 반을 걸어 고시촌으로 돌아왔다.

고시촌 입구에 있는 커다란 롯데리아를 지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새삼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다렸다는 듯 허기가 몰려왔다.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까지 죽으려고 한강 다리를 걸어갔던 놈이, 배고프다는 생각이 드나? 글러 먹었네.’

애초부터 자신은 죽을 용기가 없었던 거라고. 죽기 무서워서 한강의 물결만큼이나 수많은 변명을 만들어 냈던 거라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실없이 웃음이 났다.

현덕은 터덜터덜 롯데리아로 들어갔다.

그동안은 체력 관리와 컨디션 조절을 위해, 고시원의 밥과 어머니가 택배로 보내주는 집 반찬으로 끼니를 때웠다. 햄버거나 피자, 치킨 같은 게 먹고 싶을 때마다 합격한 다음 원 없이 먹자고 자신을 달래곤 했다.

그랬던 그동안의 관리가 무색하게, 현덕은 햄버거 세트를 세 개나 시켰다.

아르바이트생이 햄버거를 포장해주었다. 호리호리한 청년이 혼자 들어와 많은 양을 주문하니 당연히 포장해가는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현덕은 빈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하나씩 까먹었다.

그때 맞은편 TV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처음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무척 잘생긴 남자였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리포터가 질문을 던졌다. 남자는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질문에 따라 이런저런 대답을 했다. 이번에 찍은 영화는 어쩌고저쩌고.

현덕은 대충 흘려들었다.

남자는 잘나가는 영화배우인 것 같았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의 홍보를 위해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꺅-.”

옆 테이블에서 행복한 비명이 들렸다. 현덕은 햄버거를 한입 크게 물며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세 여성이 앉아 있었다. 다들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역시나 고시촌 주민들이었다.

“어머머, 우주민이잖아?”

“그러게. 아, 주민이 영화가 이번에 개봉하는구나. 난 못 보는데.”

남자 배우의 이름은 주민인 듯했다. 고시촌 주민이 좋아하는 배우 이름이 주민이라니. 현덕은 완벽한 라임에 감탄했다.

“언니들, 저 홀리포스 팬이었어요. 그때 그 사건 이후로 탈덕했지만.”

“어머, 정말?”

“네. 사실, 그때 우주민 되게 욕하고 그랬었는데, 지금 저렇게 잘 나가는 거 보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때 그, 다른 멤버 팬이었구나?”

“그죠, 뭐. 아니 뭐, 사실 그때 우주민 개인 팬 말고 홀리포스 팬이라면 누구나 다 무조건 우주민 욕하고 그랬어요. 우주민 때문에 해체하는 건 줄 알고요. 그래서…… 아, 뭐, 저렇게 배우로 잘 됐으니까 참 다행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다른 사람들 대화를 엿듣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별다른 손님 없이 썰렁한 가게에서 세 여성의 목소리는 메아리치듯 울려 퍼져 안 들으려 해도 안 들을 수 없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남자 배우의 목소리를 가릴 정도였다.

게다가 그 내용이 워낙 흥미진진하고 스펙터클한지라. 현덕은 저도 모르게 라디오 방청객 모드가 되었다. 햄버거를 까먹으며 옆 테이블의 이야기를 들었다.

TV에 나오는 남자 배우의 이름은 우주민이었다. 지금은 배우지만 이전엔 홀리포스라는 6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현덕은 연예계에 관심이 없어서 그 이름이 낯설었지만. 홀리포스는 인기가 정말 많은 아이돌이었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엄청 인기가 많아 국내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몇 년 전 어떤 사건 때문에 홀리포스는 갑자기 해체하게 되었다.

그때 주민은 기획사에 남고, 나머지 멤버들은 탈퇴를 선언했다. 한 명만 기획사에 남는 모양새라, 멤버 간 불화설이 나돌며 해체의 원인이 우주민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커다란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마어마한 분노와 모욕이 한 사람에게 쏟아졌다.

기획사를 나간 멤버들은 솔로 앨범을 내거나 유닛으로 활동했다.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나가거나 배우로도 활동했다.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민은 연예계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을 만큼 매장되었다. 살인 청부 미수 건이 여러 건 적발되어 9시 뉴스에 보도될 정도였다.

모두 주민은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홀리포스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경멸할 때, 주민은 홀로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거기서 톱스타였던 자신을 버렸다. 예명을 만들고, 작은 에이전시와 계약하고,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단역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런 모습마저도 기자들에게 포착되어 한국에 알려졌다.

인터넷에선 각종 패러디와 합성이 난무했다. 모두 그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주민은 먼 타국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차근차근 단역부터 밟아나가며 커리어를 만들었다.

어느 순간, 그는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인종차별을 딛고 아시아에서 한물간 아이돌이라는 딱지를 넘어, 존재감 있는 배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국의 꽤 유명한 TV 시리즈의 조주연급으로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아 유명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기까지 했다.

이어 히어로 영화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메인 악당으로 캐스팅됐다.

감독은 주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보고 주민을 캐스팅했다고 했다. 아시아, 특히 중국 시장에서 그가 먹힐 거로 생각하고 제작사를 설득해 주민을 캐스팅했다.

모두가 승산 없는 도박이라고 만류했지만 감독은 강행했다. 주민은 연기력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감독의 도박은 성공했다.

주민은 소름 돋는 악마 연기를 선보였다. 히어로 영화 역사상 최고의 악역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또 한국에서 기묘한 티켓 파워를 자랑했다.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못하면 실컷 비웃어줘야지.”

벼르며 영화를 보러 간 한국 관객들은 영화 속 주민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오십 번, 백번 재관람했다며 영화 티켓이나 영수증을 찍어 인증한 글이 인터넷에 올라올 정도였다.

중국 시장에서도 역대 외화 흥행 순위를 깨며 선전했다.

이에 발맞추어 주민의 한국 기획사는 공격적으로 보도 자료를 뿌렸다. 그전까지 모든 루머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태도에서 일변한 것이었다.

기획사는 그간의 루머에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악플러에게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극성 악플러들을 고소했다. 그런 움직임은 그건 영화의 흥행과 발맞춰 대중의 입맛을 자극했다.

- 삼 년 만에 드러나는 진실

이러한 타이틀 아래, 주민은 뒤늦은 동정표를 얻었다.

소속사가 악플러들을 고소한 결과가 공개되며, 루머를 생성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장난삼아. 재미있어서. 사람들 댓글과 관심을 받는 게 좋아서. 증거 없이 주민을 모욕하고 소문을 부풀렸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비로소 주민을 향한 온갖 소문들, 홀리포스 해체와 관련된 루머가 오해였다는 게 비로소 밝혀졌다. 더불어 주민이 그동안 공황장애와 여러 심리적 병을 앓아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 나라의 사람들 전체가 아무 죄 없는 젊은 청년 한 명을 매도하고 비난해, 사실상 추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뒤늦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의 크기만큼,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금 성공한 주민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민은 자신의 모국이 자신을 버리고 내쫓다시피 했음에도 절망하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성공했고, 끝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금의환향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영화 홍보를 위해 한국 공항에 입국했을 때. 기자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마이크를 내밀었다. 공항을 가득 메운 팬들은 울며 그를 환영했다.

주민은 모두의 앞에서 ‘아무도,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온화하게 웃으며 그동안 자신을 욕했던 사람들을 용서했다.

대중은 그런 그에게 다시 열광했다.

주민은 완벽하게 재도약했다.

옆 테이블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TV에서 리포터가 한창 옆 테이블에서 말했던 그 이야기를 대놓고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민감한 사안이기에 질문을 한 리포터도 머뭇거다가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보냐?”

옆 테이블에서 비쭉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은 햄버거 세 개를 다 먹고, 감자튀김을 절반 정도 먹었다. 입가심으로 콜라를 호로록 빨아먹으며 TV를 바라보았다.

TV에 크게 드러난 잘생긴 얼굴은 약간 난처하다는 듯, 하지만 상냥하게 웃었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메라 정면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힘든 시기였지요. 제 삶을 두고 봤을 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쉽게 잊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의 제 삶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건 그저, 제가 결정한 것에 따른 결과였을 뿐이니까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송곳이 되어 현덕의 귀에 박혔다.

“절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무어라 떠들어대든, 그건 제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많은 팬분들께서 제 선택을 많이 비난하셨지요. 그로 인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였을 뿐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제가 그렇게 살겠다고 결정한 것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도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어디에도 자신을 비난했던 팬들이나 대중을 향한 원망이나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너희는 날 모욕하고 죽이려 애썼지만, 그건 나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않았노라고. 내 삶을 결정하는 건 나고, 너희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결과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멋있다.”

“좀 재수 없는데?”

옆 테이블에서 정반대의 말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현덕도 그 두 가지 감정을 함께 느꼈다. 하지만 재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멋있다는 생각이 더 컸다.

현덕은 얼음을 씹으며 핸드폰으로 우주민을 검색해보았다. 잘못 쳐서 우주인을 검색했다가 다시 우주민을 검색했다. 우주민에 대한 정보가 쏟아졌다.

현덕은 가장 먼저 나이부터 확인했다. 우주민은 현덕보다 두 살 많았다.

‘그렇다면 이제 서른.’

현덕은 고개를 들어 다시 TV를 보았다.

웃고 있는 남자는 현덕의 또래로 보였다. 굳이 나이가 두 살 더 많다거나 군필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와 말만 봐도 그가 얼마나 생각이 깊은지 알 수 있었다.

현덕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죽으려고 한강 다리까지 걸어갔다가 터덜터덜 돌아왔던 자신을.

누구도 현덕에게 사법고시를 준비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사법고시에 뛰어든 건 현덕, 자기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현덕은 연달아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만큼.

TV 속 그는 현덕과 달랐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세계가 한순간에 돌아서는 것을 경험했다. 모든 사람의 비난을 받으며 범죄자처럼 한국을 몰래 떠나야 했다.

자신을 짓밟았던 세상을 원망하고 화를 내도 좋으련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내 선택에 따른 결과이니 감당해야 하는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TV 속의 그를 보자니, 조금 전까지 자살 생각을 하며 한강 다리를 걸어갔다 온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또한 부러웠다. 담담히 자신의 삶을 감당해내는 모습이.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길에 따른 결과를 감당해내야겠다고. 눈앞에 저 남자처럼. 담담하게. 흔들리지 말고. 웃으며.

현덕은 롯데리아를 나와 고시원으로 걸어가며 부모님과 형에게 전화했다. 이번엔 1차도 붙지 못하고 떨어졌다고 말했다.

형은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너 열심히 공부한 거 안다고, 괜한 생각 말고 푹 쉬라고, 오직 그 말뿐이었다.

어머니도 며칠만이라도 집에 들러 푹 쉬고 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원래 그 시험이 그런 시험이라고,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말해주었다.

현덕은 어머니의 말을 따라 집으로 가서 일주일을 푹 쉬었다. 독립하겠다고 집을 뛰쳐나갔던 형도 그 일주일간은 집에 와 현덕의 옆에 있어 주었다.

아버지와 형이 투닥투닥 싸우는 걸 보면서, 현덕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로스쿨 생겨서 사법고시 몇 년 안에 없어진대요. 그 몇 년 안에 제가 합격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계속 해보고 싶어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싶어요, 어머니.”

현덕은 말을 하기 전, 자신이 말을 하다 중간에 울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현덕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TV에서 봤던 우주민처럼.

“해보렴. 나중에 사법고시 없어지면 로스쿨 들어가면 되니까. 그 정도는 엄마 아빠가 지원해줄 수 있어. 걱정하지 말고 해봐.”

“아니요. 로스쿨 가고 싶진 않아요. 그냥 사법고시 없어지기 전까지만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요.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하긴. 나는 네가 항상 자랑스럽단다. 현덕아. 엄마랑 아빠가 네 이름을 현덕이라고 지은 건-.”

“삼국지 유비한테서 따온 거잖아요.”

“그래, 유비가 조조보다 늦게 성공한 건 알지?”

“그걸 늦게 성공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요?”

“아무튼 무명 시절이 길었잖아. 그니까 너도 이름대로 사는 거야. 네 형이 일찍 잘나가니까, 너도 느긋하게 살면서 천천히 잘나가면 되는 거야. 이름값 하고 살아.”

“네. 근데 제갈공명 찾는 건 시험 끝나고 할게요.”

“이왕이면 아내로 데리고 오렴. 너같이 맹한 애는 옆에서 붙들고 험한 세상 헤쳐 나가 줄 똑 부러진 사람이 옆이 있어야 하니까.”

어머니의 말을 듣는데 문득, 우주민이 생각났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욕해도 똑 부러지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간 사람. 이만큼 똑 부러진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되게 착해 보였는걸. 똑 부러지려면 좀 덜 착해야 할 텐데.’

현덕은 혼자 피식, 웃었다.

‘엄마는 제갈공명같은 사람을 아내로 데려오라는 건데 난 왜 그 연예인을 생각하는 거지?’

이후 현덕은 형 차를 타고 고시촌으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공부하다가 미칠 것 같을 때마다, 또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현덕은 롯데리아에서 봤던 우주민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우주민의 소식을 찾아본다거나 영화를 보러 가는 사치는 부리지 않았다. 그런 건 시험 합격 혹은 사법고시 폐지 이후로 미뤄두었다.

그저 그날 들었던 우주민의 말만 떠올렸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현덕은 미치지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현덕은 고시원에서 짐을 빼고,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었다.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털고는 버스를 타고 영화관으로 갔다.

이럴 때 운명적으로 우주민의 영화가 개봉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우연은 없었다.

현덕은 요즘 흥행 중이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를 선택했다.

십삼 년 만에 마음 편히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시리즈물인 건지, 전작을 안 본 현덕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좀 있기는 했지만, 재미는 있었다.

현덕은 영화를 보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에게 곧 집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버스를 타고 가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좀 더 가면, 집까지 한 시간 좀 넘게 걸릴 거라고 말하는데.

문득.

세상이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옆에서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현덕은 핸드폰을 든 채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현덕아?]

핸드폰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철골을 가득 실은 트럭이 버스 정류장을 덮쳤다.

그리고.

김현덕, 33세(무직)

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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