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우욱….”
“너 갑자기 왜 그래?”
“아니… 갑자기 뒤에서 소름이 돋더니 그 이후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어… 우욱….”태운이 거대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던전 공략대의 본대에서는 수많은 헌터들이 어지러움과 급격한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태운이가 말했던 게 이건가…?”
“그런 것 같네요.”
명운 길드원들은 태운이 염려했던 것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도대체 뒤에서 뭘 하고 있길래 폭발음이 멈추질 않고 갑자기 몇백 km나 떨어져 있는 헌터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거야…?”“몰라. 핵폭탄이라도 떨어뜨리나 보지. 우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면 될 뿐이야.”공전하가 태운이 했던 말을 기억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강태운이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살아서 밖으로 나가는 거야.”“알고 있어.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걸 어떡하라고,”공전하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조강현이었다.
“나라고 신경 안 쓰이겠냐. 최대한 신경 안 쓰려고 노력하는 거야.”“다들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만 노력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실제로 던전 공략대 헌터 중 1/5은 현재 원인불명의 어지러움과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는데, 명운 길드의 멤버들은 전부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명운 길드의 멤버들 모두가 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을 애써 무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았어. 내가 말을 잘못 꺼냈네.”
공전하도 그렇게 말은 했지만 강태운이 신경 쓰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강태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 * *
태운은 땅 아래에 파묻혀 있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엄청난 공포감이 엄습해 왔지만 전과는 달리 금방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들의 세상에서 보았던 눈동자와 다른 점을 하나씩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이 눈동자의 크기도 거대하지만 신들의 세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게다가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도 없었다.
“조금 침착해지자.”
그때, 태운이 들고 있는 돌검의 사용자 방어 기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신들의 세상에서 가동되었던 것과는 달리 약하게 가동되었지만 분명 그것과 같은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어 목적으로 몸에 흘러들어오는 에테르 덕분에 충격을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에테르가 소모되기 전까지 ■■■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태운이 과거 신들의 세상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알림창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다는 건… 내 앞에 있는 게 그때 보았던 ‘신’이라는 존재가 분명하다는 의미야.”하지만 신을 직접 본 것치고는 그렇게 반응이 격렬하지는 않았다.
“뭐… 추방당한 신이라도 되는 건가?”
그때, 태운의 뇌에 어떤 말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필멸자로군.]
“음…?”
마치 텔레파시처럼 태운의 뇌에 직접 전해지는 말이었다.
“넌 뭐지?”
[너 나름대로 추리하고 있던 것 같더군. 하지만 난 신이 아니다.]
“그럼 넌 누구지?”
[신의 형상… 인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아바타’라고 하면 좋겠군.]
“아바타…?”
태운은 아바타라는 말에 의아해했다.
“난 신들의 세상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모든 신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아바타라니?”
[신들의 세상에 들어가 보았다고? 믿기진 않지만… 네 말을 들어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그래서 뭐가 의문인 거지?]
“원래 신들은 자신들의 공간에 있을 때도 본모습이 아닌 아바타로서 존재하나?”아바타는 태운의 물음에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신은 형체가 없다.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내뱉지 말고 이해할 수 있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간단하다. 사랑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은 그저 사랑으로 존재할 뿐이고 죽음의 신이 있다면 죽음으로 존재할 뿐이야. 그 개념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이해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는 신의 아바타이고 신은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
“하…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네.”
신의 아바타가 정확히 뭔지, 왜 그런 아바타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저 신의 형상을 본뜬 것일 뿐인데 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것 말고도 궁금한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의문은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다. 네가 진정 신들의 세상에 ‘정당한 자격’을 가지고 들어간 것이라면 머지않아 모든 의문을 풀게 될 터이니.]
“그래. 그냥 그렇게 생각하련다.”
태운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머리를 굴리는 게 귀찮아질 정도로 힘들었다.
“다른 질문은 몰라도 이 질문에는 대답을 해줬으면 하는데.”
[뭐지?]
“네가 이 던전의 보스인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내가 죽으면 던전의 출구가 열리는 것은 맞다만.]
태운은 돌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내가 찾고 있던 게 너네.”
[가만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건 당연하겠지.”
거대한 눈동자에서 하나의 빛무리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맑고 깨끗했던 눈동자는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빛무리에서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났다.
흰 머리를 가진 잘생긴 청년의 모습을 한 그것은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분명한 것은 그가 ‘필멸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텔레파시로 말하지 않고 육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절제의 신의 전(前) 형상, 모우데라투스. 타락한 이름이지만 네놈이 신들의 세상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겠다.”모우데라투스는 손에서 흰빛을 뿜어내는 검을 소환했다.
태운은 식은땀을 흘렸다.
거대한 눈동자를 그대로 압축시켜놓은 듯한 강렬한 존재감.
그리고 그 존재감에 걸맞은 힘까지.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싸워온 적보다 강할 수도 있겠는데…?”
* * *
모우데라투스.
그는 절제의 신이 선택한 첫 번째 형상이었다.
다른 신이 선택한 눈동자보다 작고, 빛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올곧음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절제의 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우데라투스의 생각은 달랐다.
절제의 신이 빛나지 못하는 이유가 볼품없는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억지로 자신의 크기를 키우고 빛나게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속에 있던 올곧음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절제의 신은 격노했고 모우데라투스는 모든 권능과 자격을 박탈당한 채 한 던전의 지하에 갇혔다.
모든 권능과 자격을 박탈당한 탓에 힘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오랜 기간 신의 형상으로 존재했던 덕에 필멸자로 돌아가지 않고 불멸자로서 몇백, 몇천 년 동안 살아 있었다.
게다가 모우데라투스의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 절제의 신에 대한 신앙심, 충심은 그대로였다.
그랬기 때문에 수인족
몬스터들을 조종해 신의 적인 칠죄종의 기운이 느껴지는 놈들을 죽인 것이다.
그런 그의 충심 덕분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신의 기운을 잃지 않았다.
그게 바로 태운과 헌터들이 느꼈던 답답함, 어지러움의 이유였다.
카-앙!
“크헉…!”
태운은 모우데라투스와의 격돌 직후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에테르라…. 신들의 세상에 들어가고도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가 이건가.”
“후우….”
태운은 방금 첫 합에서 둘의 힘 차이를 느꼈다.
힘은 명백히 태운의 열세. 둘의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하나 있었다.
“엄청난 힘이구만….”
“내 힘은 신에게서 기인한 힘이다. 고작 필멸자가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태운의 패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무엇인지 체감하게 해주마!”모우데라투스가 태운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쾅!
태운은 다시 한번 모우데라투스의 검을 받아내고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제법 잘 버티는구나!”
모우데라투스는 약한 자를 상대하며 기회를 주고 봐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모우데라투스는 엄청난 속도로 벽에 처박힌 태운에게 달려들었다.
태운의 목에 모우데라투스의 검이 닿기 직전.
휘릭!
태운은 모우데라투스의 검날을 아슬아슬하게 타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에테르 블레이드를 최대 출력으로 사용해 모우데라투스의 목을 노렸다.
푹!
태운의 검이 모우데라투스의 목에 절반 정도 박혔다.
“힘의 차이가 꼭 승패를 가르는 건 아니야.”힘의 차이를 메우고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뛰어난 ‘기술’이었다.
언제나 강했던, 자신의 약함을 본 적이 없는 존재들은 기술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반면, 누구보다도 약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강해진 이후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탐구해온 태운은 그 누구보다 기술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
모우데라투스는 자신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말했다.
“내 피는 처음 보는군. 사실 싸움이라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싸워보는 게 처음이라니… 그래놓고 그런 자신감이었던 거냐?”모우데라투스는 태운과의 거리를 벌렸다.
“확실히 좀 놀랐다. 네가 가지고 있던 것이 에테르가 아니라 오러였다면…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르겠어.”사실 태운은 단 일격에 녀석을 쓰러뜨리고 싶었다.
방심하고 있을 때 단숨에 녀석을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은 수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계속해서 최대 출력으로 싸우는 수밖에!’태운은 마정석을 흡수해 모우데라투스에게 온갖 마법을 쏘아냈다.
모우데라투스는 그 공격을 손짓만으로 모두 파괴했다.
“방금 공격은 놀랐지만… 이번 공격은 단순히 발악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구나.”
“발악이 맞으니까!”
태운은 엄청난 속도로 고위력 마법을 속사하고 에테르를 충전해 검과 온몸에 에테르를 둘렀다.
키이이잉!
태운의 돌검과 모우데라투스의 검이 맞닿자 태운은 검을 비스듬히 세워 모우데라투스의 검을 흘려냈다.
그 과정에서 돌검과 모우데라투스의 검이 듣기 싫은 마찰음을 내었다.
“흐아압!”
모우데라투스가 휘두르는 검의 압력을 견뎌내느라 압축되었던 전신 근육이 단번에 풀려나며 태운의 검에 힘을 실어주었다.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은 모우데라투스의 가슴을 길게 베었다.
어린아이도 울지 않을 것 같이 얇은 상처였지만 태운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통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쓰러뜨릴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후우….”
태운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호흡이 변하지 않을 정도의 운동량이었지만 강자를 상대할 때의 압박감 탓에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태운은 다시 마정석을 흡수했다.
그리고 마나를 많이 사용하는 고위력의 마법들을 시전했다.
“다들 던전 밖으로 내보내 줘야지.”
태운은 마법을 사용해 생긴 에테르를 돌검에 주입하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