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강남구의 수호를 맡았던 가온 길드의 부길드장인 김태웅은 전대섭이 막아내고 있는 거대한 살덩어리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참… 오랫동안 헌터로 살다 보니 이런 경우를 다 보는구나.”
“저 키메라… 싸워본 적 있으시죠?”
“그래.”
김태웅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데블스 에이지 도중에 각성해 20년 가까이 싸워왔던 베테랑 헌터다.
비록 그는 C급 헌터에 불과했지만 그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백분 활용할 수 있는 특성이 그를 빛나게 해주었다.
길드장인 심중현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그 덕분에 국내 최고 길드에서 부길드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데블스 에이지 시절에 많이 싸워봤지. 미쳐 날뛰면 하위 원로들 못지않게 상대하기 성가셨어.”“…우리들이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김태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못 할 거다. 서울은 초토화가 되겠지.”
“…….”
김태웅의 부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태웅은 지금까지 이성적이고 항상 옳은 말만 해왔다.
그런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때, 김태웅이 입을 열었다.
“서울은 이미 한번 망가졌었다. 데블스 에이지 시절에는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봐라. 건물로 빼곡히 채워진 서울은 고작 15여 년 만에 만들어졌다.”마법의 힘이 없었다면 힘들었겠지만 인간의 기술력이 있다면 서울을 복구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데블스 에이지 시절 죽었던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았다.”그 말과 동시에 키메라들로부터 서울을 지키던 그물이 사라졌다.
“가온 길드 전원, 사람들을 지켜라!”
“““예!”””
김태웅의 말에 모든 길드원들이 넓게 산개해 달려갔다.
김태웅을 달려가는 길드원에게 소리쳤다.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해라! 우리는 모든 사람의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기억에 평생 남는 은인이 될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헌터로서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겠나!”김태웅의 말을 들은 가온 길드의 헌터들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서.
* * *
“후우… 힘들군.”
전대섭은 에테르와 마나를 모두 소모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이럴 때면 마법이 아닌 검을 잡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검사는 마나를 모두 소모해도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검을 사용했다면 지금까지 버틸 수도 없었겠지.”전대섭은 거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남은 건 아래 있는 후배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A급 던전에 들어간 쪽도 밖의 상황 못지않게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10분 전까지만 해도 엄청 더웠는데 지금은 얼어 죽을 것 같아…!”이번 던전은 기후가 엄청나게 기형적이었다.
던전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봄날 날씨와 비슷했다.
하지만 던전 입장 후 경계 시간이 끝나 전진을 시작할 때쯤 이변이 발생했다.
기온이 빠르게 올라가 50도를 넘었고 헌터들은 자연스럽게 얼음 마법을 사용해 견뎌냈었다.
기후에 적응하자 누군가 조종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기온이 떨어져 영하의 온도가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사막처럼 건조해지기도 하고 열대우림처럼 습해지기도 했다.
“헌터들이 이미 지친 것 같습니다. 던전에 들어온 후 벌써 기후가 6번이나 급변했습니다.”그런 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헌터들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집중력이 크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흠… 일단 휴식을 하는 게 어떨 것 같습니까.”헌터 협회 대표, 김현우 헌터가 모든 길드의 길드장이 모인 1팀으로 다가가 말했다.
김현우가 1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길드장들도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기형적인 기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헌터들의 체력이 크게 떨어지긴 했을 것 같군.”“아직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흠… 지금까지 나타난 A급 던전 중에 가장 성가실지도 모르겠군.”모두 이 사태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태운이 한 가지 의견을 냈다.
“휴식은 좋지 않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가온 길드의 심중현과 강일 길드의 강일환도 태운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지금 우리는 행동 때문에 지친 게 아니고 급변하는 기후 때문에 지친 거니까.”“우리가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기후가 고정될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은 계속해서 떨어질 거야. 체력이 소모되는 속도가 줄어들 뿐이지.”A급 던전은 미지의 세계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
“어쩜 던전은 헌터들한테 가혹한 환경만을 던져주는지….”“그러게 말입니다. 지성체가 던전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끔찍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길드장들은 지친 발걸음을 옮기며 불평했다.
“그럼 길드장님들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계속 전진하는 것으로.”“어차피 클리어하지 못하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계속 전진해야지.”만약 이 급변하는 기후를 멈출 수 있는 트리거가 던전 안에 있지 않다면 최대한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유일한 정답이다.
김현우가 1팀을 떠나 헌터 협회의 멤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밖은 어떻게 되고 있을지… 걱정되는구만.”성명 길드의 길드장인 성명훈이 밖의 상황에 대해 말을 꺼냈다.
1팀에 속해 있는 길드장들은 전부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길드원을 지원해달라고 말하려면 길드장들에게는 이 소식을 알려야만 했으니까.
태운은 성명훈에게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서울은 전대섭 헌터님이 있으니까요.”“하긴, 전대섭 헌터님이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벌써 그쪽 일을 먼저 끝내고 여기를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강일환도 말을 거들었다.
“한국 1~15위 길드들의 2군, 3군 멤버들이 전부 출동했는데 칠죄신교 녀석들의 습격은 가볍게 막았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게다가 이번에 A급으로 승급한 괴물 놈들도 팀이 되어 움직인다더군.”
“아, 정일준과 시저를 말하시는 거죠?”
태운은 아카데미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도 태운과 구찬영을 제외하면 이레귤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둘이었는데 더욱 발전했다니.
태운이 뭘 한 것은 없었지만 굉장히 뿌듯했다.
“그래. 시저의 탱킹 능력과 1km 밖의 적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말도 안 되는 광범위 도발 스킬. 거기에 이번에 2차 각성을 하고 괴물이 된 정일준까지… 칠죄신교 전사들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야.”그제야 성명훈 헌터가 근심을 덜고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로들은 전대섭 헌터님이 전면 커버해주신다고 했으니… 아, 강태운 헌터님, 전대섭 헌터님과 친분이 있으신 것 같던데… 전대섭 헌터님은 어느 정도로 강하신 겁니까? 같은 A급 헌터이긴 하지만 솔직히 그분의 강함은 저도 가늠이 안 됩니다.”성명훈은 B급 헌터로 7년간 헌터 생활을 하다가 꾸준한 기량 발전으로 3달 전쯤에 A급 헌터를 단 사람이다.
B급 헌터로 큰 규모의 길드를 꾸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A급 헌터증을 가슴에 찬 뒤로는 그 영향력을 더욱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런 능력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답지 않게 사람이 겸손했지만 말이다.
“흠… 사실 저도 전대섭 헌터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게 된 거죠.”전대섭이 에테르를 가지기 전까지는 그의 한계가 눈에 보였다.
드래이그 고흐에게 사용한 롱기누스. 아마 에테르를 얻기 전의 그는 그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강함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테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전대섭은 달랐다.
전대섭은 에테르를 가진 이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태운의 눈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치를 에테르를 얻은 지금에서야 폭발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50살,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후에야 그는 잠재력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대원로 한 명과 그를 따르는 원로들이 전부 덤벼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전대섭 헌터님은 그만큼 강해지셨습니다.”
“대원로라….”
태운은 대원로와 직접 맞닥뜨린 적이 있었지만 여기 있는 대부분의 헌터들은 대원로와 직접 싸워본 적이 없었다.
데블스 에이지 시절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전선에서 대원로나 칠죄종에게 맞선 사람은 대부분 죽거나 은퇴를 했으니까.
아마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초창기 헌터 중 대원로와 싸워본 사람은 전대섭, 셀, 허덕륜, 하오밖에 없을 것이다.
태운이나 김현우도 마르기가스와 전투를 벌인 적은 있었지만 그건 싸웠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태운은 마르기가스와 쟝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원로는… B급 헌터는 장난으로도 죽일 수 있고 A급 헌터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습니다. 현직 헌터와 비교해보자면… 제가 만나본 대원로 중 약한 자가 하오 헌터님과 비견될 정도고 강한 자는… 셀 헌터님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런 사람이 6명이 있다고 합니다.”그 말을 들은 헌터들은 놀란 듯 말했다.
그 자리에는 금호 길드의 길드장으로 던전에 들어온 하오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로 중 약한 자가 나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하오는 자존심이 상한 듯 태운에게 말했다.
다른 헌터들을 중국말을 하지 못했기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험악한 분위기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예, 마르기가스라고 하는 놈이었죠. 주둥이는 악어처럼 튀어나와 있고 그 입으로 사람을 통째로 씹어먹습니다. 대원로 중 약한 자라고는 했지만… 그놈, 강합니다. 그 당시 저는 A급 헌터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요.”태운은 자존심이 강한 하오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로 마르기가스에 대해 묘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그래. 그런 자도 있어야겠지….”
“……?”
창을 들고 있는 하오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약 칠죄신교와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놈은 내가 맡도록 하겠다.”하오는 갑자기 승부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태운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냥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칠죄신교의 첩자, 알리제였다.
그녀는 던전 공략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장군 길드의 길드장, 신영근을 암살한 후 변장을 사용해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길드의 길드원들은 모두 알리제 휘하의 원로들로 바꿔치기했다.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줄 알았던 알리제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당황했다.
‘전대섭이 여기 없다고…? 그럼 아까 단상에서 브리핑했던 놈은… 도대체 누구야? 게다가 15개 길드의 2군, 3군 공격대가 서울을 지키고 있다고…? 어떻게….’알리제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서울의 일은 내 임무가 아니야. 여기의 임무만 성공한다면… 서울에서의 일은 무마할 수 있어. 다행히 여기 있는 놈들은 내가 칠죄신교에서 왔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아직은 계획대로다.’알리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1팀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헌터들은 신영근이 칠죄신교에서 온 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아. 칠죄신교의 첩자가 신영근으로 변장해 들어온 것은 확실해졌어. 이제 녀석이 움직일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바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태운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