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가하려고 한다면 어떤 짓을 해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태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전대섭과 허덕륜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동안 태운은 강한 적에게도 맞서고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적을 따라잡기 위해 오기까지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태운이 직접 싸워본 것도 아닌, 그저 목도한 것만으로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전대섭은 믿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신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인류 전체가 A급 헌터 수준으로 강해져도….”“그런 건 의미 없습니다. 녀석들을 보는 순간 죽을 테니까요.”전대섭의 말이 끝나기 전에 태운이 말했다.
“후….”
전대섭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덕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긴…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어.’정신 방벽이라는 스킬을 가진 태운도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 이야기를 실감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둘은 태운의 말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한동안은… 힘드시겠지. 나도 그들을 상상할 때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졌는데 에테르도, 정신 방벽 같은 스킬도 없는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들겠…?’하지만 그건 단순히 태운의 기우일 뿐이었다.
“뭐,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다른 건 알아낸 게 없나?”“너라면 그 상황에서도 뭔가 알아낸 게 있을 것 같은데….”
“네…?”
전대섭과 허덕륜은 마치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는 듯,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태운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어… 그… 괜찮으세요?”
태운이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자 둘은 가볍게 웃어주었다.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직접 눈으로 본 너만 하겠느냐.”“네 말을 듣는 순간 그놈들의 존재감이 머릿속을 덮치더구나. 그런데… 해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나. 너희 아버지는 세상을 구하고도 그런 일을 당하셨는데.”허덕륜의 말이었다.
원래 강철운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줄 알았으나 그렇지만은 않았다.
레비아탄의 저주가 발동하는 조건은 ‘강태운에 대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태운도 최근에 강철운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알아냈으니 그 저주의 효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태운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것 때문에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큼… 그럼 제가 알아낸 다른 것들도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돌검은 손에서 놓지 마시구요.”
“알겠네.”
태운은 신들의 세상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로 했다.
“제가 예전에 흡수했던 마정석 중 아수라와 싸우던 용사의 마정석이 있었습니다.”
“음….”
“그 용사의 힘은 단신으로 지구의 A급 헌터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죠.”
“그 정도로 강했다니… 대단하군.”
전대섭도 일반 A급 헌터 50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 A급 헌터를 전부 합치면 수는 약 1,500명에 달한다.
1,500명에 달하는 A급 헌터들과 수만 명의 B급 헌터들을 전부 용사와 싸우게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칠죄종 서너 개체와 동시에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아마… 그럴 겁니다. 쉽진 않겠지만 가능성은 있겠죠.”아수라의 힘은 칠죄종 서너 개체와 비슷했다.
태운이 수백 번이나 실패하긴 했지만 결국엔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알겠네.”
“신들의 세상에 들어갔을 때 들은 말이 있습니다. 말로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적어드리겠습니다.”신들의 세상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내가 신들을 봤을 때보다 신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더욱 심하게 반응했어.’태운은 그것을 떠올리고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것이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의 이치는 생각보다 단순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태운은 종이와 펜을 꺼내 천천히 그 글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필멸자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이지?]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잖는가. 영웅이라고 불리던 인간이 이곳에 들어와 세계를 돌려내라는 둥 난리를 치지 않았나.]
[마물에게 멸망당한 그 세계에서 온 인간 말인가.]
[그 녀석은 더 이상 필멸자가 아니었잖나. 이미 단순한 불멸자를 뛰어넘어 초월체에 가까이 갔던 놈이니까.]
[그랬던가. 하긴 필멸자의 몸으로 ‘아수라’를 잡은 놈인데 초월체의 자격은 있겠군.]
[아수라와 싸울 때도 이미 필멸자는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니 아수라를 죽일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런데 ‘저 녀석’에게서 ‘그 녀석’의 흔적이 보이는군.]
[돌아가려는 건가.]
[‘그 녀석’만큼 멍청하지는 않은 것 같군.]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필멸자여.]
태운이 내민 종이를 읽은 전대섭과 허덕륜의 표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돌검의 빛도 한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잠잠해졌으니 종이로 적힌 단어를 보았을 뿐인데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역시… 신들의 모습보다 신들의 대화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해.’태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에테르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상을 입어 피를 토했었다.
단순히 적힌 것을 보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린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다.
“다 읽으셨죠?”
“그래. 내용도 다 외웠네. 으… 토가 쏠리는군.”
“그럼 이건 불태우겠습니다.”
태운은 파이어 마법을 사용해 신들의 대화가 적힌 종이를 불태웠다.
“그래, 그게 안전하겠군.”
“이게 어쩌다 밖으로 유출됐다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일반인보다 강한 각성자가 돌검에서 나오는 에테르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토가 쏠릴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일반인이 이것을 본다?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필멸자, 불멸자, 초월체라… 생각도 못 했어.”“아마… 필멸자에서 벗어나는 최소 조건은 마나의 진화 형태의 자원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오러나 자네가 가지고 있는 에테르처럼 말인가?”“네, 아수라를 죽인 그 용사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성력이라… 재밌구나.”
전대섭은 새로운 것에 대해 듣자 탐구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태운은 그런 전대섭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그 용사가 신들의 세상으로 찾아간 것을 보면 신들에게는 멸망한 세상을 되돌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있는 것 같습니다.”“…그럼 파괴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구나.”“그렇죠. 언제나 되돌리는 게 어려울 뿐 파괴하는 건 쉬웠으니까요.”태운은 데블스 에이지로 망가졌던 인류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운이 어렸을 때였기에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무너진 도시의 건물들은 여전히 태운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놈들이 1년 만에 파괴시킨 걸 우리는 십여 년이 걸려 겨우 복구할 수 있었다. 이것도 빠른 편이지만 파괴의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전대섭의 말이었다.
허덕륜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태운과 달리 그 당시 사람들을 직접 이끌었던 이들 중 하나다.
태운의 기억처럼 흐릿하지 않고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신들의 세상… 더 이상 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렇겠네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들 그들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에테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지. 에테르에 대해 연구가 진행된다면 칠죄종을 막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태운은 전대섭에게 자신이 세운 에테르에 대한 가설을 설명했다.
그 근거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와 그 가설의 의문점까지 모두 상세히 말했다.
“기적이라… 그렇다면 마나와 에테르가 다른 점은 뭘까….”전대섭도 대번에 정답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대섭이 경험도 많고 천재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새로운 무언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전대섭은 에테르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눈을 감고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렵군. 에테르도 마나도 세상의 법칙과 이치를 뒤틀고 있는 것이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에테르가 가지는 힘이 너무 강력하다…. 여기까지가 네 생각인 건가?”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르가 가지는 힘은 마나의 수만 배입니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정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렵죠.”
“알겠네.”
전대섭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 내가 에테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지는 않았을 텐데….”지금 전대섭의 상황을 비유하자면 눈도 감고 팔도 묶인 채 태운의 설명만 듣고 혁신적인 기계를 탐구하는 것과 같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허덕륜이 태운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에테르는 어디서 수급하는 것이지? 그것도 가만히 있으면 마나처럼 회복이 되는 형식인가?”“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었나요? 마나를 사용하면 일정 비율로 회복되는 형식입니다. 마정석으로 흡수한 마나를 사용해도 회복이 되고….”쾅!
전대섭은 태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상을 내리쳤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전대섭은 혼자 중얼거리며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태운과 허덕륜이 말을 걸어보았지만 전대섭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전대섭이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고 태운과 허덕륜에게 말을 걸었다.
“이 가설은 아마 진실일 거다.”
“그게 뭐죠?”
전대섭이 내놓은 가설은 이랬다.
“오러든 신성력이든 에테르든 모두 마나의 진화 형태가 아니야.”
“네…?”
“기본 전제부터가 글러 먹었다는 말이다.”
“그럼 도대체….”
태운은 전대섭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러와 신성력, 에테르가 마나와 별개의 자원이라는 말씀입니까?”전대섭은 그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다만 위아래가 바뀌었을 뿐.”
“위아래가 바뀌었다고…? 아…!”
태운도 전대섭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위력과 성능이 뛰어나다고 진화 형태라고 생각해선 안 됐어….”
“그래, 그거다.”
“뭐가… 그거야…?”
허덕륜을 제외한 두 사람은 모두 오러, 신성력, 에테르와 마나의 진짜 관계를 깨달았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허덕륜을 위해 태운은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오러와 신성력, 에테르는 마나에서 파생된 자원일 뿐이에요. 즉, 가장 위에 있는 건 마나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