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 *
연정아는 정일준과의 경기를 준비하면서 경기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나올 이유가 있었을까.’
얼굴도 바꿨고 전투 스타일도 바꿨으니 칠죄신교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연정아와 지금의 연정아는 완전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괜히 유명한 대회에 자신을 알릴 위험을 안고 나와야 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익스퍼트 등급으로 승급하고 이렇게 대회까지 나와 있다.
그래서 연정아는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숨어 사는 생활에 지쳐 버린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생각보다 더 강태운과 한 약속을 믿고 있다고.
‘그래서 더 지기 싫어.’
지금 당장 자신이 태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마기가 들통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할 거야.’
[연정아 VS 정일준의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연정아는 절대 지지 않겠다 결심하고 경기장 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것은 정일준도 마찬가지였다.
깃발 빼앗기, 공성전 등 단체 경기에서 부딪쳐본 결과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도 태운처럼 특별 승급 대상이다.
태운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잘 부탁하지.”
“그래.”
연정아와 정일준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심판은 그것을 확인하고 케이지 밖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연정아 선수 VS 정일준 선수!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정일준은 바로 검을 뽑으면서 검기를 날렸다.
연정아는 손톱을 길게 뽑아 검기를 찢어 버리고 여러 가지 공격 마법을 사용하며 정일준에게 달려들었다.
‘어리석어….’
정일준은 직선적으로 달려드는 연정아를 보고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것처럼 보였지만 그 검에는 엄청난 절삭력과 위력이 담겨 있었다.
스윽.
하지만 연정아는 가볍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정일준의 검의 옆면을 타고 흐르듯이 피했고 손톱으로 그의 얼굴을 노렸다.
챙!
정일준은 검 손잡이로 연정아의 공격을 겨우 막았다.
하지만 그녀는 달려오며 많은 공격 마법을 시전한 상태였고, 연정아의 공격 탓에 마법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그 마법 하나하나가 고위력의 마법이었던 탓에 한 번에 그 공격을 맞으면 단번에 KO당할 것 같았다.
퍼퍼퍼펑!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들리고 폭발로 인한 연무가 경기장을 자욱하게 메웠다.
[아아! 엄청난 공격! 이번 공격은 아무리 정일준 선수라고 해도 무사하기는 힘들겠는데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자욱하게 깔려 시야를 가리던 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그 연기가 흩어지자 볼 수 있던 것은 멀쩡한 정일준과 유령포에 잡힌 채 자신의 마법에 공격당한 연정아였다.
공격에 당하기 직전, 정일준은 유령포를 소환해 순식간에 연정아를 잡았고 연정아로 마법 공격을 막은 것이다.
마기로부터 회복된 아티팩트 영가의 유령포는 전보다 더욱 섬세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찰나의 순간 유령포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연정아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쿨럭….”
연정아는 유령포에 널려 있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축 처져 있었다.
정일준은 그런 연정아에게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연정아는 거기서 그렇게 쉽게 꺾일 사람이 아니었다.
촤-악!
연정아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유령포를 전부 찢어 버리고 정일준에게서 멀어졌다.
“흐어…. 허어….”
그녀는 거리를 벌리고 조금이라도 숨을 고르려 했지만, 정일준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일준은 연정아에게 접근해 계속 공격했다.
‘솔리드 아머…!’
깃발 빼앗기 당시 보여줬던 것과 달리 지금의 유령포는 정일준이 공격할 때도 같이 공격해왔다.
전부 피할 수 없으니 정일준의 공격만 피하고 비교적 공격력이 낮은 유령포의 공격은 솔리드 아머를 3겹으로 씌워 막기로 한 것이다.
‘약점을 못 찾겠어…!’
정일준의 강함은 완벽에 가까운 기본기에서 나오는 거목과 같다.
자신의 실력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쉽게 공략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오로지 그보다 더 뛰어난 실력과 힘이 있어야지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마기를 드러내지 않는 선까지만 봉인을 푼 연정아는 정일준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터터터터텅!
유령포는 계속해서 연정아의 솔리드 아머를 두들겼다.
어떻게든 정일준의 공격을 피하고는 있지만 유령포의 공격 탓에 균형을 잃어갔다.
“성가셔!”
연정아는 강화 마법을 사용하곤 유령포를 전부 찢어 버린 후 정일준을 공격했다.
정일준은 그녀의 공격을 피하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연정아도 그 공격을 피했다.
공격하고 피하는, 단순하지만 화려한 공방이 이어졌다.
[연정아 선수! 위험에 벗어나 정일준 선수와 엄청난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공방의 균형도 빠르게 기울어질 겁니다. 연정아 선수의 데미지도 있지만 유령포의 공격도 굉장히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해설자의 말은 정확했다.
연정아는 유령포의 공격에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때문에 사용한 솔리드 아머에도 금이 가고 있었다.
“크윽….”
연정아가 얼굴에 조바심을 보이자 정일준은 승부수를 던졌다.
영가에서 나오는 유령포는 더 이상 유령포가 아니었다.
유령포는 십여 자루의 유령검이 되어 정일준의 검로를 따르기 시작했다.
유령검은 공방 모두의 역할을 하는 유령포와 달리 위력도 상당했다.
솔리드 아머는 빠른 속도로 부서졌고 더 이상 맞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촥! 촤악!
유령검은 솔리드 아머를 뚫고 꾸준히 연정아의 몸에 상처를 냈다.
‘무슨 이런 사기템이 다 있나…!’
연정아는 폭넓은 사용법을 가진 기사단의 아티팩트를 보고 이를 갈았다.
꽈악.
연정아는 순간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깜짝 놀라 풀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순간적으로 본래의 전투 스타일을 꺼낼 뻔한 연정아는 솔리드 아머를 사용하고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일준은 이 지루한 전투를 길게 끌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스슥!
정일준은 검을 움직여 연정아의 팔을 봉쇄한 후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 연정아를 베었다.
터-억.
“큿….”
경기의 흐름을 빼앗기고 꾸준히 뒤로 밀려난 연정아의 등 뒤에는 케이지의 벽이 있었다.
‘이익!’
연정아는 등 뒤에 케이지가 있는 것을 인지하고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여 검을 피해냈다.
연정아는 그 과정 중에 정일준의 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기회…. 어…?’
퍼-억!
정일준은 연정아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을 포착, 즉시 무릎으로 연정아의 턱을 가격했다.
“16연격.”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지는 연정아에게 마무리 공격을 날렸다.
촤자자자작!
정일준이 쓰러진 연정아를 공격하자 경기장의 결계에서 데미지 과다 판정을 내리고 경기장 안의 모든 마나가 정지했다.
동시에 정일준의 공격이 무거워졌고 경기가 끝났음을 깨달은 정일준은 공격을 멈췄다.
[엄청난 공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경기가 정일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 졌네.”
연정아는 경기장에 쓰러진 채로 한숨을 쉬었다.
의료진은 쓰러져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 상태를 확인했다.
결계로 충분한 안전을 확보했다지만 확실하게 체크를 해야만 했으니까.
의료진들의 허가가 떨어지자 연정아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수고했어.”
태운은 연정아가 돌아오자 그 한마디와 함께 어깨를 치며 격려해주었다.
“고마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연정아도 분할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와 관계없이 고작 19살의 학생이니까.
연정아는 구석의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운은 그런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B블록의 6번째 경기가 시작되었고 결과는 당연히 시저의 승리였다.
‘그럼….’
B블록의 승자를 정하는 경기는 시저와 정일준의 경기가 된 것이다.
* * *
[준결승과 결승은 1시간의 휴식 후에 진행됩니다.]
“후….”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태운도 지금만큼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지금 계속 쥐어짜 내고 경기에서 본래의 컨디션을 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오늘은 양식 도시락이네.”
태운은 배달 온 도시락을 받아들고는 언더독 멤버들에게 나눠주었다.
태운은 서둘러 밥을 먹고는 소화를 하기 위해 운동장을 걸었다.
운동장을 걷는 도중에도 태운은 찬영과의 전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찬영이의 무기는 기사단의 지원 덕에 원래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사비로 더 좋은 무기를 샀지….’태운이 괜찮은 무기를 찾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참…. 돌검이 있었지….”
태운이 무구전 당시 거금을 들여 매입한 그것 말이다.
“한번 보러 가볼까.”
태운은 그것을 명운 헌터 아카데미의 무구 보관실에 맡겨놨었다.
‘한번 다시 시도해볼까…?’
태운은 그 길로 바로 무구 보관실로 향했다.
“강태운입니다.”
“네, 무슨 일로 오셨죠?”
“맡겨둔 돌검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잠시만요. 여기 측정기에 손을 올리세요.”태운은 원판 모양의 측정기에 손을 올렸다.
마나 파형, 강도, DNA, 지문 등을 측정하고 신분을 증명하는 기기다.
물론 made by 전대섭이다.
“확인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태운은 무구 보관실의 직원을 따라 돌검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여기 있습니다.”
무려 5,000만 원이나 하는 무기인 만큼 나름 철저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태운은 열린 무기 보관고에서 돌검을 꺼냈다.
“흐음….”
혹시나 해서 여기저기 둘러 보았지만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구전에서 낙찰하고 관찰했을 때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사고 가속.’
사고 가속은 자신의 시간을 느리게 느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사실상 집중력과 계산력, 판단력 등 두뇌와 관련된 모든 능력이 대폭 상승하는 것이다.
관찰력도 그것에 연관되어 있다면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태운은 그렇게 생각하고 사고 가속을 시전한 상태로 관찰했다.
그러자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검
등급: ??? (성장형)
종류: 도검
유명한 일류 장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명운 헌터 아카데미의 무구전에 출품했다.
전대섭의 부탁을 받아 출품했다.
전대섭은 본래 커다란 돌을 갈아 만들어주기를 부탁했지만, 장인의 독단으로 마정석 가루와 흙을 섞어 굳혀 만든 돌로 만들어졌다.
그 덕에 특별한 능력이 추가되었다.
특성
*주인의 의지에 비례해 강도와 경도가 상승한다.
*마나를 잘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무기에 주입된 마나가 증폭된다.
*평소에는 뭉툭하고 절삭력이 없어 둔기와 같지만 마나를 주입하면 절삭력을 가지게 된다. 절삭력은 주입된 마나에 비례한다.
*마나를 저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