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 *
다음 경기는 태운과 신가연의 경기였다.
태운은 신가연의 실력을 훤히 꿰뚫고 있고 신가연 또한 그랬다.
물론, 태운은 신가연의 앞에서 전력을 보인 적이 없긴 했지만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잘 부탁해요.”
“네가 나보다 강한 건 알고 있지만 그냥 질 생각은 없어.”경기장 안에서 태운과 신가연은 인사를 건넸다.
“알고 있어요. 저도 방심은 안 합니다.”
“방심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신가연과 태운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은 후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실력 차이는 확실하고 그걸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이기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 초반에 빠르게 끝내려 할 거야.’객관적인 강함도 강함이지만 태운의 실력은 신가연보다 더 뛰어나다.
장기전으로 갈 경우에 태운의 운영에 밀려 숨도 못 쉬고 지게 될 것이다.
태운이 예상했듯 신가연은 초반에 빠르게 끝을 내기 위해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태운이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대충 눈치챘을 거야.’그럼에도 계획을 수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무턱대고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것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똑같이 받아치는 방법밖에 없었고 이것 말고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기 시작합니다!]
‘M.O.H.’
신가연은 자신의 메테리얼을 모두 사용해 자신이 만든 고위력의 불꽃 마법을 사용했다.
“똑같은 실수를!”
태운은 메테리얼을 모두 사용한 신가연을 보고 바로 마법 파괴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신가연은 마법 파괴 때문에 크게 피 본 적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두 번이나 당해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회수!”
태운이 마법 파괴를 사용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신가연은 ‘마나의 주인’을 지닌 덕에 자유로운 마나 운용을 활용, 마법 시전을 취소하고 메테리얼 상태로 되돌렸다.
마법 파괴의 효과로 두 개의 마법은 파괴되었고 나머지 12개의 메테리얼을 활용해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마법 파괴를 연속으로 쓸 수 있으면 어차피 이길 가망이 없어! 그냥 이대로 꽂아 넣는다!’신가연이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 파괴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꽤나 길었으니까.
하지만 신가연은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태운은 메테리얼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제야 같은 조건에 선 것이니까.
‘방어에 성공하면…. 반격의 기회가 보이겠지….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네.’태운의 특성 ‘정직한 사냥꾼’ 그리고 레오의 몸 안에 있으면서 일부 흡수한 레오의 실력이 신가연의 마법 사이의 빈틈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마법이 내 몸에 닿기 전에 내가 먼저 파고들어 끝낸다.’태운은 신가연의 마법을 응시하면서 사고 가속을 활성화했다.
그 상태로 배리어 스피어를 만들어 손에 쥐었고 신가연이 쏘아내는 마법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직 사고 가속이 끝나지 않았고 신가연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퍼억!
태운은 달려오던 속도를 실어 창대로 신가연의 복부를 가격했고 그와 동시에 사고 가속의 지속시간이 끝났다.
“끄윽…!”
신가연은 모든 메테리얼을 공격에 쏟아부었기에 방어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대로 공격을 받은 신가연은 그 충격 탓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고 태운에게 후속타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 캐논.”
태운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메테리얼을 모두 사용해 신가연을 마무리했다.
신가연은 그 공격으로 KO,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 * *
“역시…. 강하네….”
신가연은 KO를 당한 후 대기실에서 태운과의 경기를 돌려보며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나름 자신의 전력을 쏟아부은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운은 간단하게 피해 버렸으니 심란할 만도 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마령의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누나, 나와줄 수 있나요?”
그는 강태운이었다.
신가연은 지금 당장 강태운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나가기로 정했다.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조금만 기다려.”
신가연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안녕?”
신가연은 최대한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어…. 안녕하세요.”
그 모습이 어색했다는 것이 태운에게도 느껴졌는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뭐…. 다른 말을 하려는 건 아니구요. 오늘 토너먼트에서 어땠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서요.”“음…. 피드백해주려고 온 거였어?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되지 않아?”“뭐…. 그렇기도 하지만 이걸 말해주지 않으면 제가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음…. 그래 뭔데. 말해봐.”
신가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운은 이번 경기에서 있었던 실수를 이야기해주었다.
너무 성급했다든가, 위력에만 치중해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했다든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말은 들은 신가연은 의욕을 불태우던 평소와 달리 의기소침했다.
그 이유는 이번 명운전을 치르면서 느낀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실력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뭐, 재능만 보면 1위가 아닌 게 이상하다는 말도 많고 그게 사실이지. 얼마 전에 깃발 빼앗기에서 느꼈어. 내가 시간을 얼마나 바보같이 버렸는지.”태운은 침묵하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평생 나를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어느 순간 나를 뛰어넘어 있더라. 물론, 너에게 배우기 전의 나를 따라잡은 거지만 말이야.”태운은 그녀의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사일런스 마법을 사용해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너희 팀의 김기열, 작년까지만 해도 이름도 모르던 학생이었는데 과녁 맞히기에서 내가 져버렸잖아? 이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시간을 의미 없이 보냈는지 알 수 있지.”마나의 주인이라는 특성을 개화했을 때만 해도 아카데미의 1위를 차지할 것이라며 설레발을 쳤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다.
1위는커녕 1위와 경쟁을 하지도 못하고 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시간을 너무 버렸고 이 결과가 이거지.”태운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자신도 효율적으로 쓰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이 너무나도 후회됐으니까.
빠르게 성장해 어린 나이에 높은 성취를 이뤘지만, 이 능력을 1년이라도 빨리 얻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 생각하는 게 태운이었다.
그렇기에 당당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었다.
“후회는 후회에서 그치면 안 돼요.”
“…….”
“후회를 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무언가를 깨달아야 후회가 후회로만 남지 않습니다.”신가연의 태운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태운은 말의 톤을 확 바꾸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뭐, 이렇게만 말해도 누나라면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제 제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겠습니다.”
“음? 할 말이 남았어?”
“당연하죠. 고작 피드백 하나 하겠다고 이렇게 찾아왔을 리가 없잖아요. 물론, 그걸 밑밥으로 깐 거긴 한데.”태운은 사용했던 사일런스 마법의 효과가 남았는지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훈련장에 처칠 할아버지가 한 번 더 오실 거예요.”“그분이? 두 달간 코빼기도 안 보이시던 분이 오늘?”“네, 사실 제가 동아리에 들어간 날 밤에 처칠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죠.”
“제안?”
“제가 속한 동아리가 명운전에서 우승하면 저, 구찬영, 서혜연, 누나한테 장비를 하나씩 준다고 하시네요.”
“그래?”
신가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재벌가의 딸이다.
한 달에 천만 원씩은 우습게 쓰는 그녀는 마음에 드는 장비들을 경매로 매수하여 사용하니 장비를 하나씩 준다는 것에 딱히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처칠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무기들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반응.
태운은 그녀가 처칠이 꺼내는 장비를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어쨌는데?”
“아마 처칠 할아버지가 누나한테 줄 장비는 누나가 버린 몇 년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의 장비일 테니까요.”
“흠….”
“이건 믿으셔도 됩니다.”
처칠에게서 통달의 팔찌를 얻은 태운의 보증이니까.
* * *
[구찬영 선수! 빠른 검격으로 3초 만에 경기를 끝내 버립니다!]
[이번 명운전은 참 볼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구찬영은 전 경기도 그렇고 매우 빠르게 경기를 끝내고 있었다.
3초 만에 경기를 제압한 찬영이었지만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2초 만에 적사단의 셀을 제압한 태운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표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다.’이만큼 자신의 성장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 선의의 경쟁은 곧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럼 A블록의 승자를 가리는 준결승은 언더독의 강태운 선수와 기사단의 구찬영 선수의 경기가 되겠습니다!]
둘의 승패는 길어도 1시간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다.
태운이 구찬영과의 경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동안 언더독의 경기가 하나 더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경기는 기사단의 정일준 선수와 언더독의 연정아 선수입니다!]
“다녀올게.”
“그래, 잘하고 와.”
태운은 그녀에게 대충 대꾸해주곤 다시 이미지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연정아 정도면 자신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애초에 봉인만 없었으면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전부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할 수 없는 실력이니까.
태운의 걱정은 오지랖에 불과했을 것이다.
‘30%만 쓰면…. 질 수도 있겠지만…. 져도 내가 이기면 되는 거니까.’그때 연정아가 경기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처칠이었다.
“연정아…. 잘 자라줬구나.”
그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공간에서 홀로그램처럼 화면을 띄워놓고 연정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왠지 모를 그리움까지 서렸다.
처칠은 화면을 돌려 태운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태운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철운아, 보고 있느냐. 누가 네 아들 아니랄까 봐. 너와 똑같은 버릇이 있구나.”그는 혼잣말을 하더니 감상에 젖어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던 처칠은 자신의 가방을 끌어와 열었다.
“자, 그럼 이제 그 녀석들에게 줄 물건을 정리해볼까.”처칠의 가방에는 엄청난 물건들이 많았다.
물건 하나하나가 모두 한 세계를 구한 영웅이나 세계를 멸망시킨 악당이 사용할 법한 무기들이었다.
하지만 처칠은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는지 가방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그러자 가방의 내용물이 바뀌어 있었다.
처칠은 그 중 오른쪽 어깨를 보호하는 견갑을 꺼내 손에 들었다.
강렬한 적색의 견갑이었다.
“맡겨둔 물건을 돌려주는 것이지만…. 강철운, 자네에게 미안하네. 이 정도 시험은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이 정도 과제도 해결하지 못하면 이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테니 말이야.”처칠은 그 물건을 꺼내 휴대용 캐리어에 넣고 닫았다.
그러곤 다시 연정아의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