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 *
“안녕하십니까. 오늘 안내를 맡은 테일러 자작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하네.”
태운은 3일에 걸쳐 헤온 왕국의 수도인 리안나에 도착했다.
모두의 예상처럼 헤온 왕국은 태운 일행을 아주 잘 대접해주었다.
헤온 왕국 마법 교육 기관 입장에서는 마법으로 유명한 테렌 왕국의 인사들이 왔다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득이었으니까.
“근데 자네는 무슨 일을 하는가?”
태운이 테일러에게 물었다.
“저는 헤온 왕국 왕실 마법사, 벨자하 님의 세 번째 제자입니다. 지금은 교육원에서 학생들에게 포격 마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호오, 포격 마법?”
라온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럼 불 마법을 자주 쓰겠네?”
“부끄럽지만 제 특기가 불 마법입니다.”
말로는 겸손한 척하고 있지만 딱 봐도 으쓱거리고 있는 모양이 라온에게는 재밌게 느껴진 모양이다.
벨자하 본인이 와도 라온의 손끝도 못 건드릴 텐데 그 제자가 우쭐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롭게 느껴지겠는가.
“그럼 나중에 대련 한번 해볼까?”
“재밌겠군요. 전 여자라고 봐 드리지 않습니다.”
“웃겨, 맘대로 해봐.”
‘굿, 우리 라온이 잘한다!’
따로 전달한 적도 없는데 라온은 태운의 생각대로 잘해주고 있었다.
사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는 그림이니까.’
“가도님,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그러지.”
테일러는 일행을 교육원 내부로 안내했다.
교육원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귀족들도 이 내부를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
테일러가 어때? 라는 눈으로 태운 일행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니, 태운 일행 또한 놀라기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운의 눈에는 이것이 그저 단순한 허세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왕실 마법사께서는 사치를 즐기시는 편인가?”
“예?”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느낌밖에 안 들어서 말이야.”
“예…? 뭐라고 하셨….”
테일러가 당황하고 있는 틈에 태운은 정타를 날렸다.
“특히 저 샹들리에, 마력으로 띄우고 있는 것 같은데 저런 방식으로 운용하면 마력의 손실이 크다네. 게다가 안정성도 떨어지지.”
“그, 그게….”
반박할 말도 생각해내지 못하겠지.
이 녀석은 저 부유 마법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것으로 확실히 밝혀졌다.
벨자하는 자신의 실력도, 가르치는 실력도 한참 모자라다.
“저것도 그러네. 저 등불도 사람이 충전하는 방식으로 충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2시간에 한 번은 충전해야 할 것 같은데…. 참…. 누가 만든 것인지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실이 아닌가? 저 등불의 마법 수식은 그만큼이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네.”사실 태운의 눈에만 수준이 떨어져 보일 뿐, 아예 바닥에서부터 저것을 만들어낸 벨자하는 대단한 인물이 맞았다.
그러나 태운은 지금은 그를 자극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뒤에 몇 마디 덧붙이자 드디어 테일러가 폭발해 버렸다.
“후작님께서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트집을 잡으십니까?”
“자네 방금 트집이라고 했나?”
자작 따위가 후작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자신의 스승에게 느끼는 프라이드가 대단하다는 말이었다.
원래라면 후작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면서 권위로 찍어누르는 방법이 있겠지만 태운은 그런 방법을 쓰기 싫었다.
“마법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찌 왕실 마법사의 결과물을 깎아내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지금 테일러는 가도가 어디서 들은 단어를 아무렇게나 엮어 무작정 까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태운의 제자들의 반응은 확실히 달랐다.
“아…. 저렇게 쓰면 마력 소모가 크구나…. 잭, 이거 왜 마력 소모가 큰 거라고 생각해?”“음…. 아마 빛을 낼 때 마력을 마찰시키는 방법으로 빛을 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과연…. 그럼 이걸 이런 식으로….”
“아니, 그거 말고 이렇게 해봐.”
잭, 라온, 레일로프는 각자 자신의 결론을 내고 그것을 적용해 실험을 해보고 있었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얼이 빠진 모습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태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자신은 아무리 봐도 이 마법의 문제가 뭔지 알 수가 없는데 그들은 전부 이 마법의 문제가 뭔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더 나은 마법을 만들어냈다.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이지. 스스로 뭘 생각할 수가 없잖아.”태운도 마법을 가르쳐줄 때는 수식을 주고 외우라고 했지만 그 전에 마법의 구동 원리를 A부터 Z까지 모두 가르쳐줬고 이해시켰다.
그걸 알고 외우는 것과 모르고 외우는 것에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테일러,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때, 귀가 간지러웠는지 벨자하가 1층으로 내려왔다.
“아, 아닙니다. 벨자하 님.”
“뭐가 아니냐. 못난 놈.”
벨자하는 테일러를 가볍게 꾸짖고는 태운에게 말을 걸었다.
“후작께서 방문하신다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의 못난 제자가 무엇을 불편하게 했는지….”“아닙니다. 테일러 자작은 잘못한 것이 없지요. 그저 이 홀을 꾸미는 데 사용한 마법의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일 뿐입니다.”“허어…. 어떤 부분이 수준이 낮다는 말씀이신지….”
“전부입니다.”
“뭐, 뭐라?”
온화하던 벨자하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긴말 안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헤온 왕국이 웬 엉터리 마법사를 데리고 와서 교육원을 열었다길래 얼마나 엉망인지 한 번 구경하러 온 겁니다.”“그런 말은 삼가시오! 타국의 후작이라지만 나도 왕실 마법사요!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난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대우를 해준다네. 난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왕이라 할지라도 대우하지 않아.”“이…. 네가 뭘 알기에 나에게 자격을 논하는가!”
“적어도 당신보단 잘 알 것 같은데.”
태운은 벨자하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그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그쯤 되자 잭, 라온, 레일로프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태운이 벨자하를 자극해 일을 벌일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태운의 말에 자존심에 상처가 난 벨자하는 메테리얼을 꺼내 들어 마법을 준비했다.
지금은 마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댄 것과 같은 상황.
하지만 태운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해보자는 건가?”
“네놈은 마법사의 프라이드를 건드렸다. 네놈이 왕국의 후작만 아니었다면 이미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그렇게 자존심을 세우고 싶거든 사람 없는 곳에서 하지 말고 충분히 홍보한 후 공개적으로 하는 게 어떤가.”
“내 마법은 유희거리가 아니….”
“내 혀를 자르게 해주지.”
그의 파격적인 발언에 벨자하는 물론이고 태운의 일행들도 깜짝 놀랐다.
“좋은 조건이지 않나? 너의 위상도 높일 수 있고 적국의 후작을 공정하게 처단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은가.”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 내가 이기면 경기의 내용을 헤온 왕국을 포함해 대륙 전역에 퍼트릴 수 있게 해주게.”“하, 그런 거였나? 생각보다 순진한 면이 있군.”다른 꿍꿍이가 있는 줄 알았더니 겨우 우리 교육원의 이미지를 깎는 것뿐이었나?
벨자하는 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그러곤 테일러를 불러 명령했다.
“바로 홍보해라. 대회 일자는 3일 후. 리안나 마차 경기장을 개조해서 경기를 치르도록 하지.”
“마음대로.”
“홍보 문구에 ‘테렌 왕국 후작의 혀를 걸고 경기를 한다’라는 내용을 꼭 넣어둬.”
“연습 열심히 해두게.”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가 싶더니 태운이 그 뒤에 한마디 덧붙였다.
“참, 우리는 교육자 아닌가? 제자 3명도 한 번 붙여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 좋아, 제자들까지 4명이 1대1로 대련하는 것으로 하지.”
“제안을 들어줘서 고맙군. 가지.”
태운은 잭, 라온, 레일로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잭이 태운에게 물었다.
“지금껏 장군님의 의견에는 의심 없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련은…. 걱정됩니다.”말은 잭만 했지만 라온과 레일로프도 이번에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배운 사람으로서 마법을 못 쓰는 사람과 쓸 수 있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운은 확신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동안 나도 너희를 가르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
감히 의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가도의 묵직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저렇게 확신을 한 가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저 믿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 * *
3일 뒤, 태운과 벨자하의 대련 날짜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벨자하가 고용한 연설가가 확성 마법을 활용해 경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리게 말했다.
“오늘 이곳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테렌 왕국의 후작께서 우리의 마법 교육원 수준이 바닥이라고 하셨기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그 말과 동시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관중석 중간중간에 선동꾼이 섞여 있는 모양이다.
“오늘, 대련에 참가할 사람은 왕실 마법사이신 벨자하 님과 테렌 왕국의 후작이신 가도 님, 그리고 양측의 제자 3명이 되시겠습니다.”벨자하 측 제자들은 3일 전에 만났던 테일러와 세트, 시온이었다.
재밌는 건 벨자하의 첫 번째 제자인 세트와 가도의 첫 번째 제자인 레일로프가 둘 다 마검사 계열의 전투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모두 재미있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연설가의 비난 섞인 연설이 끝난 후 경기장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첫 대결은 세트 님과 레일로프 님입니다.”
“가보겠습니다.”
“힘내십쇼.”
“연습한 대로만 해!”
레일로프는 긴장한 상태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우우우우!!!”””
레일로프가 경기장에 나타나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레일로프,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 헤온 왕국 최고 검인 나조차도 긴장할 수밖에 없군.”“마치 자네가 더 강하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말하는 것 같군.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얼마 전에 만났던 늑대인간들도 그랬고, 어느 정도 강해지면 거만해지는 건 당연한 것일까?
레일로프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검을 손에 쥐었다.
세트도 검을 쥐고 방어 자세를 쥐었다.
“선수는 양보하겠소.”
“그럼 사양하진 않겠네.”
레일로프는 신체를 강화한 후 등, 팔꿈치, 다리에 매직 미사일을 응용한 부스터를 달았고 말 그대로 ‘쏘아졌다.’
“이 무슨…!”
레일로프는 신체 강화로 강해진 근력을 적극 활용해 엄청난 속도로부터 몸을 제어했고, 그 힘을 온전히 검에 실어 휘둘렀다.
차라락!
검끼리 부딪쳐서는 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싶어 검을 보니 부서진 것도, 잘린 것도 아니었다.
세트의 애검은 완전히 쇳가루가 되어 있었다.
세트는 그 광경을 보고 완전히 질려 뒤로 넘어졌다.
반면 레일로프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았다는 듯이 차분하게 서 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이 더욱 어려운 것이라는 듯이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하, 항…보….”
“사일런스.”
세트는 그 모습을 보고 항복을 외치려 했지만 레일로프는 사일런스를 사용해 세트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러곤 우물쭈물하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테, 테렌 왕국의 마법 교육 기관을 세우실 가도 님에게 배우면 이, 이 정도는 기본이라네!”그가 맡은 일은 바로 테렌 왕국의 마법 교육원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자.”
‘나에게 왜 검을….’
“들게. 벌써 끝나면 아쉽지 않은가.”
그것도 최대한 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