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음? 50초 만에 그 마법을 디스펠 했다는 건가?”디스펠 관련 전문 헌터도 아닌 학생이 그 마법을 50초 만에 디스펠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네, 그렇습니다. 잠깐 펜과 종이 좀 빌리겠습니다.”태운은 옆에 꽂혀 있던 종이와 펜을 꺼내 문고리에 걸려 있던 수식을 전부 써냈다.
“호오…. 정확하군. 너는 내 생각보다 난 놈일지도 모르겠어.”전대섭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태운은 뿌듯했다.
드디어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 최고의 교육자라고 불리는 전대섭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었으니까.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네”
“말해 보게.”
태운은 원래 챌린저 등급까지의 승급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챌린저 등급을 꺼내는 것보단 그 위의 것을 요구하고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절 익스퍼트 등급으로 특별 승급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역시 안… 네?”
“된다.”
“된다고요…?”
“그래, 문제 있나?”
“아, 아뇨. 감사합니다.”
전대섭은 인공지능 바리를 불렀다.
그러자 로봇 팔이 화면을 태운의 앞으로 밀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겠나?”그러자 화면에서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금 1,000억… 길드 지원 헌터 1순위 지명권… 헌터 협회 명예 감사관…?”그 외에도 많은 글이 쓰여 있었다.
“이게 뭐죠?”
“네가 한국의 헌터로 있는 조건으로 내가 국가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최소 보상들’이다. 물론 네가 성과를 내야겠지만.”
“이게요…?”
헌터 협회 명예 감사관이란 그것만으로도 국회의원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헌터 1순위 지명권은 나중에 길드를 만들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특권이었다.
“특히 현금 부분은 1조까지도 늘릴 수 있네. 물론, 자네가 미친 듯이 성과를 뽑아낸다면 말이다.”“오… 그,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으시다고요?”그게 의문이었다.
제아무리 얼마 전에 실시한 실기 부문에서 만점을 뛰어넘는 성적을 얻었다지만 그런 사람은 마스터 등급에도 차고 넘쳤다.
자신이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굳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되지 못했다.
“네가….”
그 말을 끝으로 전대섭의 말이 끊어졌다.
입을 완전히 닫아 버린 것이다.
“허허…. 역시 이건 안 되려나….”
전대섭의 표정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뭐지? 나중에 백만서고로라도 알아봐야겠어.’태운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분위기가 처지는 건 좋지 않으니까.
“전 한국에 남아 있을 겁니다.”
태운의 대답에 전대섭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네. 그럼 네가 일정 이상의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되면 내가 직접 얘기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바라는 게 많구나. 그래, 들어나 보자꾸나.”태운은 여기에 온 본 목적에 대해 말했다.
“자하르 모로조프 박사님과 친하시다고 들었습니다.”자하르 모로조프.
그는 러시아인으로 던전이 생겨난 이후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밝혀낸 박사로 유명했다.
던전에서 나오는 자원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가장 처음 알아낸 것도 그였으며, 던전에서 나는 식물로부터 만병통치약을 만든 것도 그였다.
그 식물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자르모프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는 의료 기술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얼마 전에는 마정석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 아는 사이지.”
“그렇다면… 혹시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안 될 거야. 그 녀석이 엄청나게 바쁘거든. 내가 가도 만나주질 않아.”이것도 태운의 예상대로였다.
그렇기에 대처법을 생각해 두었다.
“그럼 메일로 마정석과 영혼의 연관점을 증거와 함께 찾았다고 보내주실 수 있나요?”“뭐, 소개해 주는 것도 아니고… 메일 정도는 가능하지. 그런데 마정석하고 영혼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그리고 증거는 또 뭐지?”“인터넷 신문에서 봤어요. 러시아 신문 보니까 ‘자하르 모로조프, 드디어 미친 건가’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증거는… 말씀드리기 힘드네요.”“러시아 신문을? 그것보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나 보군?”
“가능하긴 합니다.”
그것 말고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할 수 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그 녀석, 바빠서 메일을 본다 해도 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괜찮습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그리고 이제 진짜 마지막 용건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전투를 치렀던 전대섭에게 묻고 싶었던 한마디.
강철운, 아버지의 진짜 모습은 어땠느냐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게 아버지의 진짜 모습이 맞느냐고.
한동안 정적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거운 분위기가 둘의 어깨를 짓눌렀다.
긴 침묵 끝에 전대섭이 입을 열었다.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너희 아버지는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란다.”
“…알겠습니다.”
태운은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전대섭을 향한 것이 아닌 그에게 뭔가를 기대한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도대체 뭘 얻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말을 들어도 실망에서 그칠 줄 알았다.
하지만 전대섭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뇌를 뒤집어버리고만 싶은 구토감이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태운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그의 친절이 점점 악의로 변해갔다.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해 왜곡을 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아닐지.
가장 높은 교육자의 자리에 있기에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전대섭에 대한 혐오감이 커지자 태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의심만으로 혐오감을 키우면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조차 그에 대한 혐오를 치울 수 없게 된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우선은 자신을 선의로 대해주는 사람이 아닌가.
이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태운의 안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혐오감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태운은 그것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뭐 어떻게 해야 하지?’
도저히 이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태운은 생각을 지우려 마정석 창고로 갔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는 것만큼 생각을 지우는 데 좋은 게 없으니까.
태운은 항상 저녁이 되면 마정석 창고에서 시간을 보낸다.
마정석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지만 엄청나게 지루한 작업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작업에 익숙해진 태운의 작업량은 이미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작업량을 전부 합하여도 태운의 작업량을 이기지 못했다.
그 속도 덕분에 태운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마정석의 양이 하급 마정석 2박스에 이르렀다.
“음?”
여느 때와 같이 마정석을 분류하던 중 마정석 무더기 중 특별한 기운을 내뿜는 녀석을 보았다.
[최하급 마정석]
마정석 위에 떠 있는 인터페이스에 적힌 바로는 분명 최하급 마정석이었지만 분명 평소의 그것보다 더욱 특별한 힘이 담겨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분명 그랬다.
태운은 바로 그 마정석을 들고 창고 소장에게로 달려갔다.
사무실의 문을 두들기자 머리 한 군데에 머리카락이 없는 창고 소장이 문을 열며 나타났다.
“어, 태운아, 왜 그러냐.”
“소장님, 오늘 보수에 이 마정석을 넣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게 뭔데 그러냐?”
소장은 태운에게서 건네받은 마정석을 사무실 책상에 있는 저울에 올려놓았다.
“음…. 그냥 최하급 마정석 아니냐?”
“그렇긴 한데…. 음…. 모양을 보니까 전에 받아 갔던 마정석에 딱 들어맞을 것 같아서요.”태운은 짧은 고민 끝에 그럴듯한 핑계를 내놓았다.
“그래, 알았다. 다른 거랑 안 섞이게 따로 종이에 싸서 넣어주마.”
“감사합니다.”
태운은 그 길로 빠르게 작업을 마치고 그날의 보수를 챙긴 후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마정석을 빨리 흡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처음으로 마정석을 흡수할 때나 마정석 저장 스킬을 테스트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처럼 두근거렸다.
집에 들어오니 윤아는 잠을 자고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문을 조용히 닫아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대충 책상 옆에 던져두고 침대 위에 올라갔다.
그러곤 종이로 고이 포장되어 있는 마정석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10시네.’
시간은 충분했다.
태운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스킬을 오랜만에 새로운 느낌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마정석 흡수를 사용한 순간.
“마정석 흡수.”
태운은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이 즉시 기절했다.
* * *
휘이잉.
조금은 쌀쌀한 어딘가의 평원.
사방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고 시야에 산조차 보이지 않는 끝없이 광활한 평야였다.
“여기가 어디지?”
이곳에 태운이 있었다.
‘분명 침대 위에서 새로 가져온 마정석을 흡수하고 있었는데…. 기절한 후의 꿈인 건가?’그때.
띠링!
[살아남으십시오.]
“뭐?”
떠오르는 메시지와 동시에 멀리서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160cm 정도 크기의 사마귀 같은 형태의 몬스터였다.
몸에 칼날이 3쌍이나 달린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런 씨….”
상황 파악조차 되지 않는 마당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죽일 듯이 달려오기 시작하자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약한 몬스터도 아니었다.
‘흉포 사마귀.’
외국에선 Monster와 mantis를 합쳐 montis라고 불린다.
‘E급 1티어 몬스터다. 이길 수 있을까?’
현재 자신에게 장비라고 할 수 있는 건 얄팍한 창 한 자루와 철판이 덧대어진 가죽 갑옷 뿐이었다.
달려오는 흉포 사마귀들의 흉포한 기세를 보니 가죽 갑옷은 제 역할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태운은 저도 모르게 창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푸확!
태운의 오른손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갈무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강력한 마력이었다.
“내가 이런 마력을…?”
마정석 저장을 사용한 기억은 없었다.
이상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키가 이렇게 컸었나?”
태운의 키는 180cm가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눈높이로 추측하건대 족히 190cm는 될 듯했다.
알고 보니 지금의 신체는 태운의 것이 아니었다.
손도 태운의 손보다 두껍고 거칠었으며 팔뚝과 허벅지에는 근육이 잔뜩 붙어 있어 훨씬 두꺼웠다.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어느새 흉포 사마귀들이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흐읍!”
태운은 창대를 어설픈 폼으로나마 잡아 내질렀다.
푸욱!
그러자 가장 앞에 있던 흉포 사마귀의 머리가 꿰뚫리며 절명했다.
“됐다!”
태운은 창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읏!”
창이 제대로 뽑히지 않았다.
“흐읏!”
아무리 힘을 주어 당겨보아도 흉포 사마귀의 사체와 같이 끌려올 뿐 창은 쉬이 뽑히지 않았다.
질걱질걱 징그러운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첫 번째 흉포 사마귀를 죽일 때 이미 가까이 와 있었던 놈들이 동시에 태운을 덮쳤다.
창은 여전히 괴물의 사체에 박혀 있는 상태였고, 이 창을 뽑아낼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태운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창을 버리는 것뿐.
태운은 창을 놓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