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존(6)
"사상자 집계는 끝났나?"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내부 인원 확인은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만, 우리를 습격했던 정체불명의 집단에 대한 집계는 모두 끝났습니다."
여단장은 한 대위가 가져다준 간결한 수기 보고서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들의 수는 총 172명. 그중 150명이 사망했으며 17명은 중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오늘 내일 하는 수준이다.
나머지 5명은 부상을 입긴 했지만 기절해 있었던 탓에 박한성이 미처 참살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생존자들이었다. 당연히 모두 사로잡아서 신병을 구속했다.
사상자 집계 아래에는 적들이 이번 침공을 위해 가지고 온 대량의 물자와 차량 목록도 쓰여 있었다.
탄약이 수천 발에 총기만 150정이 넘고, 박격포나 C4 등 위험한 폭약 무기도 발견되었다. 박격포는 박한성의 저격으로 포탄이 유폭을 일으킨 탓에 못 쓰게 되었지만, 잔해를 조사해본 결과 군 부대에서 사용하던 것이 맞았다고 한다.
"놈들은 호텔을 점거하기 위해 오로지 무기와 장비만 가지고 왔습니다. 식량이나 방한 용구, 텐트 같은 기본적인 생존 물자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호텔을 점거할 자신이 있었던 게지. 만약 PMC 쪽에서 우릴 돕지 않았더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호텔을 그대로 내줬을 게 자명한 사실 아닌가. 저쪽의 계획대로만 잘 풀렸더라면 무혈입성은 식은 죽 먹기였을 테니 걸리적 거리는 생존 물자를 가지고 올 필요도 없었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굉장히...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이 많습니다."
"시신의 형상 때문에 그런가?"
"그렇습니다. 모두 십수년 간 햇빛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피부가 창백했으며 피가 흘러나와야할 환부에는 검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 피는 모두 말라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이 검게 물든 시신도 있었다고......"
여단장은 부하의 보고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 배신자 과학자 나부랭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실험 대상'인 사람들이 점차 어떤식으로 변하게 될지에 대해 들은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도 야투경을 착용한 것처럼 밝은 밤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신진대사의 의미가 사라진 육체는 창백해지고 온기를 잃겠지만, 대신 별도의 음식 섭취나 방한 대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적의 몸이 될 것이라고.
여단장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런 수상쩍은 실험에 생존자 그룹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한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부하에게는 그런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만약 그 사실이 진짜라면 적들은 처음부터 생존 물자따윈 필요로 하지 않는 강철의 군단이나 다름없었다는 얘기니까.
비록 배신자의 말이긴 했으나, 그가 아주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되레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하루하루 적은 음식만 먹으면서도 한달 가까이 버틸 수 있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이 맹추위 속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일 1~2천 칼로리로 한달 가까이 버텼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죄다 허리끈을 졸라매야 할 만큼 살이 쭉 빠지는 것은 물론, 극심한 영양결핍에 시달렸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목소리에 힘이 없고 컨디션이 조금 저조한 것에서 그쳤을 뿐, 작전 수행 능력은 꾸준히 유지했다. 지난 한달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실험 대상들의 신체에 어느정도 변화가 생기긴 했다는 것이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에 여단장은 즉시 권총을 뽑아 자신의 ㅁ리에 겨누고 싶었다.
그땐 과학자 나부랭이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불쌍한 사람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지만, 진실을 알고나니 그 모든 일을 주도했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만약 PMC를 이 호텔에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PMC와 협력해서 적극적으로 적들을 소탕하지 않았더라면, 이 호텔에 있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저것들과 같은 기괴한 무언가로 변했을 거란 얘기 아닌가.
'이게 권력에 미친 인간의 추한 말로인가......'
군에 인생을 내던져서 가까스로 준장이라는 계급을 달았을 때만 해도 꽃길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권력을 추구하고, 분수에 맞지않는 삶을 꿈꾸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던 끝에 이 지경이 되었다.
누가 진짜 인간 말종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이까짓 계급장이 뭐라고, 다 망해버린 세상에서 권력따위가 또 뭐라고.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내일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을 고문하기만 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부하들도, 그래도 군대니까 한수 접어주겠다며 양보해준 경찰들도, 나라와 국민을 지켜줄 것이라며 꿋꿋하게 자신들을 믿어주었던 민간인들에게도.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 그들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봐야 비로소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더니만."
자신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어디 있을까.
투두둑!
홧김에 잡아챈 준장 계급장을 거칠게 뜯어내서 옆으로 집어던졌다. 다음 명령을 하달해주길 기다리고 있던 부하가 그 광경을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여단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제 그는 더이상 여단장이 아니었다. 그저 추하고 죄많은 늙은이일뿐.
"현 시간부로 본 여단장에 대한 모든 직책을 박탈한다. 이는 번복되지 않으며 기존에 내가 맡고 있던 모든 직무는 경찰 총경이 임시 대행을 한다."
"여단장님! 갑자기 그런......!"
"자넨 내가 얼마나 추잡하고 쓸모도 없는 뒷방 늙은이인지 몰라서 그러는 걸세. 그러니 지금은 아무 말 말고 나에 대한 직책이 모두 해제되었음을 호텔 내부에 알리고, 앞으로는 임시 대행을 맡게될 총경에게 모든 사안을 전달 및 보고하게."
어중간한 영관 계급 장교에게 이 호텔을 맡길 수는 없다. 이미 자신 아래에 있던 장교들 사이에서 배신자가 나오지 않았던가? 차라리 배신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경찰 쪽에서 이 호텔을 담당하는 게 더 나았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부탁 하나 하지. 박한성 군이 깨어나면 이 녹음기를 그에게 전해주게. 나만 알고 있는 중요 기록들을 보관해둔 개인 녹음기인데, 그에게 보답할 게 이것밖에 없더군.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부탁하지."
"여단장님!!"
"그만. 난 이제 여단장이 아닐세. 앞으로도 그렇게 불릴 일은 없을 테고. '뒷일'은 잘 부탁하네."
부하의 등을 떠밀어서 방밖으로 내보낸 그는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위대한 존재가 부여한 운명 같은 것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이란 불꽃을 맹렬하게 불태운 인간이 다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아직 희미하게 온기를 내뿜고 있는 불씨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을 쏟아붓거나 모래로 덮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꺼져버릴 듯한 미약한 불씨. 그 주변에 널브러진 것은 탄화한 장작 쪼가리가 아니라 산처럼 쌓여있는 누군가의 유골이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불꽃을 피워올린 인간은 이토록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홀스터를 풀어헤친 그는 망설임없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준장이라는 계급을 달게 되면서부터 일종의 자랑처럼 여겨왔던 애병(愛兵)이었다.
당연히 살아가면서 실제로 이것의 방아쇠를 당기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총구가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한 적 없었고.
* * *
"더 빨리 뛰어라! 우리가 바친 제물들로는 흑연의 주인들을 그리 오랫동안 붙들어둘 수 없다!"
"이 사실을 어서 대모(大母)님께 알려야 한다!"
기껏해야 분대 단위의 소규모 그룹이 검은 옷과 면사포를 펄럭이면서도 쉬지 않고 어두운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을지로입구역에서 갑자기 적들의 역공세에 밀려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 무전기를 통해 전령만 철수하라는 지휘자의 명령을 받고 다급히 몸을 내뺐다.
다행히 호텔측 생존자들도 구태여 자신들을 추적해오거나 하진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분명 큰 소란이 일어 호텔에 이목이 집중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전에 반경 500m 기준으로 넓은 원형진 형태의 제물을 준비했다. 부디 흑연의 주인들이 소란과 빛에 이끌려 자신들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이목을 잠시 돌려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몇 시간이나 지난 지금은 효력이 다했을 터.
다시금 어둠 속에서 얼마 되지 않는 빛과 온기, 그리고 소음을 찾아 움직이고 있을 흑연의 주인들은 호시탐탐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
그들이 내포한 흑연의 정수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되고, 그들처럼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꿨음에도 여전히 표적으로 노려졌다.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흑연교이 필두사제 이정춘은 감히 불경죄로 체내의 정수를 모조리 뽑힐 것을 각오하면서도 대모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어찌하여 흑연의 주인들은 빛을 갈구하는 미개하고 어리석은 자들과 자신들을 분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습격하는 것이냐고.
그때 돌아온 대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너는 원숭이가 사람의 옷을 입었다고 하여 무작정 동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흑연의 주인들은 태양광을 원하고, 인공광을 배척한다.
인간들은 태양광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공광만을 갈구하며 제 영역도 아닌 어둠을 멋대로 헤집고 다닌다.
오직 자신들만이 어둠 속에서 흑연의 주인들이 원하는대로 빛(태양광)을 빼앗지도, 빛(인공광)을 갈구하지도 않으며 그저 암흑에 예속된 자연지체의 삶을 추구한다.
언젠가는 흑연의 주인들이 자신들을 마음에 들어하길 원하면서.
저 어리석은 인간들과 자신들은 명백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채주길 바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정수를 추출하고, 동시에 숭배한다.
더이상 10년 전처럼 싱크홀만 찾아다니며 소량의 흑연을 얻었던 시대가 아니니까.
"필두사제님! 길이!!"
"!"
한 형제의 외침에 이정춘은 길게 이어져 있는 율곡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들이 호텔 인근에 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길목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물은 치워둔 상태였다. 차량도, 사람도.
그런데 다시 돌아온 지금, 간신히 차량 두 대가 오고갈 수 있는 좁은 도로 한복판에 떡하니 버스가 가로로 세워져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거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스 하나를 집어서 도로 중앙에 장식물처럼 박아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버, 버스정도는 그냥 타넘어가면 된다! 늦지 않게 교단에 합류하려면 이 루트가 가장 빨라!"
그렇게 외치며 솔선수범으로 나선 이정춘이 버스의 차체를 붙잡고 열심히 기어오르기 시작한 그때.
타캉!
반대편에서 차창을 뚫고 날아든 대구경 탄환에 의해 그의 상반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양팔은 금방이라도 어깨 조직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덜렁거렸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소리없이 즉사한 그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가 조금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뒤를 따르려던 형제자매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흑연의 주인들과 마주쳤을 때도 이정도로 긴장한 적은 없었다.
곧 매우 짙은 죽음의 향이 그들 앞에 당도했을 때, 그들이 어둠을 꿰뚫고 본 것은 버스를 가볍게 옆으로 치워내버린 걸어다니는 요새였다.
"여기는 알파 식스. 여기는 알파 식스. 잔챙이들을 발견했다. 사살해도 되는지."
-수신 양호. 브라보 원의 행방을 먼저 알아내도록.
"입감."
걸어다니는 요새 속의 중장갑으로 무장한 인간은 산소 마스크 안쪽에서 후욱후욱, 하는 숨소리를 내며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것의 오른손에 장착되어있는 대구경 라이플은 미세한 흔들림없이 몸이 굳어버린 사제들을 겨누고 있었다.
"브라보 원, 지금 어디 있지?"
"그, 그게 누구인지......"
"아,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나."
타캉!
대구경 라이플이 또 한 번 폭음같은 총성을 터뜨리자 말을 더듬던 사내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마찬가지로 시신에서 희미한 흑연이 피어오르다 말았다.
"브라보중대 박한성 병장 어디 있냐고 병신 새끼들아."
복구된 기록 A
"박뱀. 빨갱이한테 빨갱이라고 부르면 그건 레이시즘임까?"
"흑인한테 깜둥이라고 하는 건 명백한 인종차별이기 때문에 뻐킹 레이시스트가 맞아. 하지만 수령님 아래에서 사회주의 낙원을 꿈꾸는 놈은 이념적으로 빨갱이가 맞으니까 빨갱이라고 불러도 돼."
이 놈들도 우리더러 미제 앞잡이라느니 불벼락 맞을 놈들이라느니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까 쌤쌤 아닌가?
"박 병장님, 이런 병신같은 시설에 검체실 문이 최첨단 도어락으로 잠겨있다면 어떻게 보십니까?"
"난 3D로 본다."
"...장난치지 마시고 그 놈한테 ID 카드 같은 거 없는지 확인해주십쇼."
나는 즉시 연구원으로 보이는 빨갱이의 몸을 수색했지만 이렇다 할만한 인증 도구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처음 사로잡았을 때도 혹시 숨겨둔 무기나 자살용 약이 있을지 몰라 한 번 수색했는데 굳이 한 번 더 수색할 필요가 있나?
"빨갱이 1호. 너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괜히 반항하다 발가락 뼈부터 하나씩 부러질지, 아니면 곱게 이 문을 열든지."
"자, 잠깐! 남쪽 동무! 이 문은 비상 사태가 선포되면 자동적으로 잠기게 되어 있소! 이쪽에서 열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 열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요!"
"그렇다는데?"
"딱봐도 구라 아님까 박뱀. 이 새끼들은 대가리에 든 게 수령님밖에 없어서 뻑하면 구라나 치는 놈들임다."
"그렇다는데?"
내가 다시 시선을 돌리자 연구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역시 발가락 뼈가 아니라 좀 큼지막한 손가락 뼈부터 시작할까?
나는 적당히 커다란 문짝 앞에 연구원의 안면을 처박았다.
쾅!
"끄윽?!"
"문은 답을 알고 있지. 네 머리통이 튼튼한지 이 문짝이 튼튼한지 한 번 실험해볼까?"
"그, 그만...열어드리겠소!"
놈은 문짝에 달려있는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티가 잘 나지 않아서 거기에 덮개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아마 비상 사태가 선포되면 잠긴 문을 열 수 있게끔 마련된 별도의 잠금 해제 장치인 듯 했다.
덮개를 열어젖힌 연구원은 코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렌즈에 자신의 홍채를 인식시켰다. 렌즈 옆에는 제작사의 이니셜로 추정되는 'DR' 이라는 영어가 보였다.
"그래. 이렇게 제깍제깍 협조좀 해주면 얼마나 좋아."
"......"
"기분 상한 거 아니지? 표정 관리 잘 해라. 아니면 네 시체는 수령님이 계신 북한 땅이 아니라 동해에 수장시켜버릴 테니까."
"!"
진부한 협박조에도 부르르 떠는 연구원의 등을 총부리로 쿡쿡 찌르면서 계속 전진시켰다.
검체실이라는 곳에 들어온 우리는 바깥과는 달리 상쾌한 공기의 질을 느꼈다. 기온 역시 영하가 아니라 서늘한 수준의 영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계측해보니 6도 정도였다.
"바깥은 냉동고인데 여긴 냉장고 수준이네. 딱봐도 뭔가를 보존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 같은데......"
"나, 남쪽 동무.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해보이겠지만, 웬만하면 안쪽을 보지 마시요. 정신 건강에 매우 안 좋을...큭!"
"왜 북녘 동무가 남녘 동무 정신 건강을 걱정해주고 지랄이야? 너희 빨갱이 새끼들이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 짓을 저질렀는지 싹 기록으로 남겨서 돌아간 다음 세간에 공표할 예정인데 당연히 전부 봐야지."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중인 대한민국은 지금 명분이 필요하다. 북한이라는 수십년 묵은 암덩어리를 합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명분 말이다.
대한민국은 꽤 오랫동안 국가의 경제나 치안 수준에도 불구하고 국가 신용 등급이 그리 높게 책정되지 않았는데, 그건 모두 북한이라는 잠재적인 탄약고이자 적국때문이었다.
때문에 해외 투자기업들도 한국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꺼리는 풍조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쟁(휴전)중인 국가인데다, 하필 북한은 핵무기까지 보유한 미친 괴뢰정권이었으니까.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대한민국은 더욱 많은 투자와 해외 이주민들을 필요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을 합법적으로 제거할 명분이 필요했다.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의 최고 명령권자(대통령)는 우리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북한에서 모든 증거를 수집하길 원했다.
북한이 저지르고 있는 모든 불법적인 실험이나 반인륜적인 행위, 국제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핵 무기 실험이나 제작 시설, 뭐든 상관없으니 북한의 땅굴이란 땅굴은 모조리 뒤지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16번째 땅굴까지는 별 수확없이 빨갱이들만 처리하고 끝냈었는데, 드디어 17번째 땅굴 수색 작전에서 큰 건수를 하나 잡았다.
'이번 작전만 성공적으로 끝내면 보수 두둑하게 주고 전역시켜준다고 했었지.'
병장 노릇하는 것도 이제 질렸다. 나는 이번 작전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챙겨 본국으로 귀환해서 두둑한 보수를 받고 전역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틈틈이 지저 도시 프로젝트 관련 테마주도 사놨으니 몇년 안에 떡상하겠지? 그럼 나는 돈방석에 앉는 거다!
집 나가면 자신 도움 없인 아무것도 못할 거라던 잘난 아버지 앞에서 돈다발로 부채질을 하면서 거들먹거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만의 YOLO 라이프를 즐기며 한가하게 사는 거다.
희망밖에 보이지 않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던 중, 문득 나는 수많은 벌레가 피부를 타고 돌아다니는 듯한 기괴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가 이상했다.
마치 벌레들이 전신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기분나쁜 느낌. 내가 반드시 신경써야 하는, 지금 신경쓰지 않으면 큰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나는 이것을 '본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야, 문 열어."
"......"
검체 보관실에 앞에 도착한 나는 오랫동안 땅굴 생활을 해서 그런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연구원에게 윽박질렀다.
놈은 말없이 검체 보관실의 문을 열어 우리에게 내부를 보여주었다.
조심스럽게 검체 보관실의 문을 열어보니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오는 내부에는 원통형 특수 용기가 수십 개나 보관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액체가 보관된 용기였다.
"남쪽 동무는 우리가 어째서 이 지하에서 방한 용구도 착용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소?"
"뭐?"
"여긴 전기도, 가스도, 심지어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장소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들이 단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장소란 말이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분대원들도 떨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부러 신경쓰고 있지 않았는데,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면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처리한 북한군들은 전부 '평범한' 인민군 복장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처럼 야투경도, 그 흔한 조명도 없이 그냥 어둠 속에서 총만 들고 싸웠습니다."
"그거야 이 놈들이 워낙 가난해서 장비 맞출 돈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박 병장님. 대체 여기가 지하 몇 백 미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공기도 탁하고, 기온은 상시 영하에,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빛이 없습니다."
"......"
나는 말없이 서있는 연구원의 목을 잡아채서 들어올렸다. 켁켁거리는 놈을 노려보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희 여기서 뭐했어?"
"크, 크윽! 켁!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하긴 씨발. 명백하게 이상하잖아."
"정말...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우린 그저 수령동지의 명령에 따라...디그러쉬에서 받아온 착굴 장비를 이용해서...땅굴을 판 것 뿐이요!!"
"그럼 저 바깥에 있던 컨테이너 박스들은 뭔데!!"
나는 더욱 놈을 압박했다.
내가 컨테이너 박스를 언급하자 일순간 놈의 눈빛이 바뀐 것을 포착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 그건......"
"말해. 말하지 않으면 갈비뼈를 하나씩 부러뜨려서 뼛조각이 내장을 찌르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지."
"사, 사람! 사람이었소!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디그러쉬에서 사람들을 컨테이너 박스에 잔뜩 담아와서 우리에게 보내줬던 거요! 그리고 그걸......!!"
"그걸 어떻게 했는데?"
"우리가 판 수직 땅굴 아래로 내려보내게 했소."
타앙!
나는 연구원의 머리통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귀중한 안내역이긴 했지만 도저히 그냥 살려둘 수가 없었다.
내 '본능'이 이 놈의 머리통을 깔끔하게 날려버리라고 계속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날려버린 거다.
새빨간 핏물과 질척거리는 뇌수가 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놈의 몸에서 튀어나온 것은 질척거리는 타르같은 검은 체액이었다
그건 검체 보관실 안쪽의 특수 용기에 보관된 내용물과 굉장히 흡사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놈의 시체에 대고 몇 번이나 더 총질을 했다.
탕! 탕! 탕!
"후욱...후욱...후욱."
엉망진창이 된 놈의 잔해를 뒤로 한채, 나는 얼어붙은 분대원들에게 재차 명령을 내렸다.
"나가자. 놈들이 팠다던 그 땅굴을 조사해봐야겠어."
"...샘플은 챙기지 않는 겁니까? 가지고 돌아가면 중요한 참고 자료중 하나가 될 겁니다."
"아니."
나는 저 안에 보관되어있는 검은 체액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것들은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모두 태워버려."
공병 담당인 ■상병이 내 명령을 받고 화염 방사기를 들고 나섰다.
주로 우리가 북한 땅굴에 침입했던 흔적을 인멸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증거를 인멸하는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모든 인원이 검체실 밖으로 나가고, 곧 내부에서 환한 불길이 솟구치며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철저하게 전투 및 기동 목적으로 개조된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우리와는 달리, ■상병은 매우 두터운 방호 장갑을 두르고 있었다.
덕분에 어지간한 폭발 파편이나 열기, 생화학 공격에도 매우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타오르는 검체실에서 철컥철컥 걸어나온 그는 내게 모두 끝났다는 짧막한 보고를 남겼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박 병장님? 이것도 모두 기록되고 있어서 본국으로 귀환하면 증거 훼손죄로 처벌 받으실 겁니다."
실시간으로 녹화되고 있는 헤드캠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괜찮지 않겠지만 나는 구태여 후회하지 않았다.
저것들은 절대로 지상으로 나가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땅굴 조사만 하고 우리도 철수한다."
검체실을 지나쳐 길쭉한 통로를 걸어간 우리가 끝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거대한 스타디움 경기장 같은 대공동이었다.
그리고 대공동 중앙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구덩이가 존재했다. 만약 블랙홀이라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만큼 칠흑같이 어두운 구덩이였다.
구덩이 근처에는 대형 발전기와 엘리베이터가 하나씩 존재했는데, 그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기름통이 쓰레기 매립지처럼 한가득 쌓여있었다.
만성적으로 기름이 부족한 북한에선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양이었다.
"전기가 꼭 필요한 작업은 이 발전기를 이용해서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북한은 기름을 매우 엄중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대체 이만한 기름을 어디서 구해온 거자?"
"기름통 규격을 보니 북한산이 아닙니다. 해외에서 들여온 것 같습니다만......"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에 대체 누가 기름을...디그러쉬."
착굴 기계부터 각종 원자재, 기술, 심지어 사람까지.
대체 어떤 이유로 북한에게 그만한 것들을 제공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 모든 일에 디그러쉬가 관여되어 있다면 기름의 제공자 역시 그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뭔가 엮이면 안 될 일에 엮인 기분인데......'
구덩이에 가까이 접근한 우리는 대체 얼마나 깊을지 감도 안 잡히는 어둠 속으로 라이트를 비췄다.
"엇!"
"아래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새끼들 혹시 마그마 지대라도 건드린 거 아냐?!"
그냥 주변이 온통 어둡기만 해서 라이트를 직접 비춰보기 전까지는 구덩이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줄 몰랐다.
이 미친놈들이 땅굴을 파다가 마그마가 흐르는 곳까지 건드렸다면 가스나 연기가 올라올 가능성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긴 했다.
"...이 놈들이 여기서 뭘 했는지는 알아내고 돌아가야 해. ■상병은 캠코더에 거리 측정기 붙여서 엘리베이터에 올려둬. 이대로 내려보낸다."
"저희가 직접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진 않는 겁니까?"
"저 아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또 제 시간 맞춰서 돌아온다는 보장은 있고? 사고 나면 감당할 자신은?"
"...실언이었습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정상 작동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직접 타고 내려가는 건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 땅굴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와 아래에 뭐가 있는지 대신 확인해줄 캠코더만 내려보내면 충분해. ■상병아, 준비는 다 됐냐?"
"예."
환한 플래시 조명이 켜진 캠코더에 거리측정기를 부착한 ■상병은 덕테이프를 이용해서 엘리베이터 바닥에 캠코더를 확실히 고정시켰다. 혹시 몰라 주변에 야광봉 몇개를 던져서 추가 조명을 확보했다.
미래그룹에서 만든 저 특제 캠코더는 특수작전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군 부대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문제없이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해주는 고성능 캠코더였다. 김서림, 깨짐 방지 자동형상복구 렌즈가 부착되어서 망치로 내려찍어도 멀쩡하다나 어쨌다나.
거기에 별도의 전파 증폭 장치를 함께 설치했다. 깊은 지하에서 신호를 잘 받으려면 신호 증폭 장치는 필수였다. 지그재그가 아니라 수직 땅굴이라면 아무리 깊어도 증폭된 신호를 수신받은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복구된 기록 B -1부 완결-
"엘리베이터 내려보냅니다."
"타이머로 시간 재."
"제가 재겠습니다. 지금...타이머 맞췄습니다."
"좋아. 이제 사주 경계 철저히 한다. ■상병은 거리 측정기로 들어오는 데이터 계속 확인 해."
"엘리베이터가 저렇게나 큰데 속도가 꽤 빠릅니다. 순식간에 300m 돌파. 500m 돌파. ...곧 1km 입니다."
고속 궤도 엘리베이터라. 저또한 디그러쉬의 작품일 것이다. 실제로 여러 국가의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모든 궤도 엘리베이터는 디그러쉬 작품이니까.
"휘유, 굉장히 빠른데요. 벌써 5km 돌파."
"대체 얼마나 깊이 판 거야 미친 놈들."
그러다 곧 10km를 돌파했다는 보고에 분대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10km라니.
설마 마의 12km를 돌파하겠느냐는 걱정도 잠시.
"12km...돌파했습니다."
"미친."
"12km 하고도 160m 지점에서 엘리베이터 정지. 지금 캠코더 원격 화면 잡아보겠습니다."
증폭된 신호를 받아 랩탑으로 연결한 ■상병은 곧 밝은 조명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 캠코더의 화면을 연결했다.
우리는 모두 랩탑 주변으로 몰려들어 캠코더가 대체 12km 아래에서 무엇을 찍고 있는지 확인했다.
"주변 환경이...굉장히 이상합니다."
"그래. 마치 유적같네."
"그 뭐냐, 12km 아래 지저 세계에는 고대 지저인이 살았다는 설이 유력하게 돌지 않습니까? 혹시 저 아래에 있는 것도 고대 지저인이 살았던 곳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봐. 저게 '거주' 목적으로 지어진 것 같냐?"
나는 랩탑의 원격조작툴을 이용해 캠코더의 상을 확대시켰다.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지만, 저건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상 같은 느낌의 웅장함과 막연한 공포, 위압감과 불길함, 신성함,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모든 기운이 응축된 것 같은 건축물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봉인해둔 것 같은......?'
그것도 바깥에서 봉인한 게 아니다. 건축물의 입구 형태를 보면 안에서 스스로 걸어잠글 수 있는 형태였다.
당연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건축물의 입구가 닫혀있지 않았다.
아니, 왜 닫혀있지 않은 거지?
"!"
그 순간 무언가가 캠코더를 강하게 후려치고 신호가 끊어졌다.
깜짝 놀란 분대원들이 헉 소리를 내며 물러섰다. ■상병은 몇 번이고 랩탑을 조작해봤지만 결국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를 돌아보았다.
"■일병. 구덩이 벽에 동작감지기 뿌려."
"진짜 뿌립니까?"
"뿌려."
■일병이 팔목에 부착된 기계 장치를 구덩이 안쪽에 겨누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무언가가 푸슛! 푸슛! 하고 날아가더니 곧 구덩이 벽에 박혔다.
저 동작감지기는 아군표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크기를 가진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500m 내에서 감지하는 고성능 일회용 동작감지기였다. 당연히 미래그룹 작품이다.
하나당 수천 만원짜리라며 아껴쓰라는 구박을 몇 번이나 받았지만 나는 지금이 사용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저 아래에 뭔가가 있다."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님까?"
"두눈으로 직접 확인해서 '기록'으로 남긴 뒤에 철수한다. 전원 전투 준비."
분대원들이 곧 각자 무기를 점검하고 정해진 역할대로 위치를 잡았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동작감지기의 신호를 체크하고 있던 ■일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래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우리와 최소 1km 정도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나는 총구를 아래로 겨누고 조명을 최대 밝기로 설정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레이저처럼 쏘아져나간 조명 아래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매우 창백하고 말라비틀어진 몸을 가진, 기괴한 인간형 생명체였다.
그것들은 조명과 닿자마자 매우 귀에 거슬리는 비명을 내지르더니, 한층 더 빠른 움직임으로 벽을 타고 뛰듯이 기어올라왔다.
"우리에게 친절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아. 사거리 내에 들어오면 사격하고 '기록'이 끝나면 즉각 철수한다!"
마침내 선두에서 맹렬하게 흙벽을 찍으며 올라오던 놈이 사거리에 들어왔다.
나는 정확히 놈의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탄환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
머리부터 총탄에 꿰뚫린 괴생명체는 그대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놈을 대신하듯 더 많은 괴생명체들이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그 수가 가볍게 백을 넘고, 천을 도달하였으며, 어쩌면 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의 움직임이 너무 빠릅니다!"
"철수! 철수!!"
가장 앞에 있던 ■일병의 어깨부터 두들겨서 뒤로 빼낸 다음, 공병 역할을 맡고 있는 ■상병도 철수시켰다.
"으억?! 박뱀! 놈들이 제 조명을 박살냈습니다!!"
■상병의 헬멧 옆에 달린 헤드램프가 무언가에 의해 박살나는 것은 나도 보았다. 그건 마치 긴 채찍 같았다.
"빠져! 수류탄 투척한다!!"
마지막 분대원까지 출구로 내보낸 나는 기어이 땅굴을 기어올라온 놈들의 중앙에 수류탄을 던졌다.
콰아아아앙!
사람 정도는 가볍게 육편으로 만들어버릴 폭압과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괴생명체들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럼에도 숫자가 너무 많았다. 특히 내가 들고있는 조명이나 헤드램프를 집요하게 노리는 기괴한 채찍 공격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빛이 없으면 이 어둠 속을 헤쳐나갈 수 없다.
"좆같은 새끼들!!"
대공동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출입구 문을 닫아버리고 시한신관을 짧게 설정한 C4를 설치해둔 다음 다시 달렸다.
꽈아앙!
금속 문짝을 거칠게 두들기다 못해 우그러뜨리며 몰려나온 괴생명체들은 다시 한 번 C4의 폭발에 휩쓸렸다.
운 좋게 통로가 무너졌더라면 놈들이 빠져나오지 못 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콘크리트를 있는대로 처바른 통로는 너무 튼튼했다. 빌어먹을 빨갱이들은 하여튼 도움이 안 돼요.
"개! 좆! 씨발!"
울부짖어라 나의 엑소스켈레톤! 박한성 Mk2!!
배터리 잔량을 고려하지 않고 최대 출력을 끌어올려서 힘차게 지면을 내딛자 육상 선수 못지 않은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바짝 약이 올라서 나를 뒤쫓고 있는 괴생명체들 역시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12km 흙벽을 단숨에 타고 올라올 만큼 빠른 속도로 금세 내 뒤를 잡았다.
까앙!
두껍고 강력한 채찍 공격에 내 헤드램프가 박살났다. 이제 남은 것은 총에 부착된 조명과 몇 개의 야광봉 뿐이다.
야투경은 있지만 단 한 점의 빛도 없는 공간에선 야투경도 쓸모가 없다.
저 앞에서 열심히 길을 되짚어 올라가고 있는 분대원들이 보인다.
하지만 곧 나는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최대 출력으로 달리고 있어도 아슬아슬한 마당에, 우리중에 가장 기동력이 느린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박 병장님! 먼저 가십쇼!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공병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최선준 상병. 그래 최선준 상병이다.
그가 거대한 금속 격벽에 테르밋 폭약으로 뚫었던 작은 구멍 앞에서 버티고 서있었다. 그의 주무기는 화염방사기였고, 특별 제작된 중장갑 엑소스켈레톤을 두르고 있었다.
"박 병장님과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건 내 잘못......!"
"저는 군 생활 내내 면회 오는 가족도 없었고! 바깥에서 따로 연락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통장 잔고에도 몇 푼 없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천애고아였거나 그보다 더한 인생 밑바닥인 놈이었겠지요!!"
"아니, 넌......"
"어차피 우린 '기억'이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돌아가봤자 저는, 우리는 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기억조차 없는 병신이 되어서 또 이런 작전에 투입될 겁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박 병장님 전역하시는 길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가 충분히 빠르게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처음부터 철수를 계획했다면 그를 훨씬 먼저 앞서서 내보냈어야 했다. 명백한 내 실수였다.
그리고 지금, 분대장의 죄를 분대원이 대신 짊어졌다.
"와라 이 개새끼들아! 죄다 웰던으로 바싹 구워주마!!"
나는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기고, 그를 지나쳐서 내달렸다.
금속 격벽의 작은 구멍. 그곳을 철통같이 막아선 최선준이라는 상병의 이름을 나는 확실히 기억했다. 두 번 다시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올라가는 것은 분명 어렵지 않다.
혼이 쏙 빠진 상태에서 어둠을 헤집으며 출입구를 찾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크게 지치는 일이었다.
"박뱀! 길이 어느쪽인지 햇갈립니다!"
"표식 남겨뒀잖아 이 빡대가리야!"
"박 병장님, ■상병님은 어디 계십니까?"
"최선준 상병은 뒤를 맡아주기로 했다."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분대원들을 다시 챙긴 나는 그들보다 앞서서 탈출구로 향했다.
우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저 뒤쪽에서 펑!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심적 여유가 있지 않았을까.
"최 상병님이...크윽!"
"울지마 개새끼야. 장례식장이 아닌 곳에서 울면 실례다."
"하지만 우린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 하잖습니까! 우린 또......!"
"아가리 닥치고 움직이기나 해!!"
어둠 속에서 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른 최선준 상병의 시신을 타넘고 저 괴생명체들이 다시 우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400m, 300m, 200m.
특정 구간에 도달할 때마다 지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일었다.
우리가 대체 여기서 뭘 본 거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이 모든 일의 뒷감당은 어떻게 하지?
"커헉! 놈들이 여기까지!!"
"조명 지켜! 조명 없으면 안 돼!!"
까앙! 챙그랑!
어둠 속에서 날아든 채찍이나 날카로운 파편 같은 것들이 정확히 우리가 가진 '빛'을 노렸다.
출구가 머지 않았는데!
놈들은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어둠 속을 자유롭게 헤집으며, 철저하게 우리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땅굴 출입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엄마! 아빠!!"
타타타타! 탕! 탕!
가장 경험이 적어 가장 먼저 패닉에 빠진 ■일병이 어둠 속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해대며 발광했다.
"박 병장님! 도와주세요! 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간 그의 이름을 안다.
김호연 일병. 백일휴가를 나갔다왔을 때도 만날 사람이 없고 형편도 어려워서 단기 아르바이트만 뛰고 왔다던 녀석.
"우린...빛이 필요해! 지금 당장!!"
펑! 펑! 콰앙!
유탄발사기를 들고 어둠에 잠식된 ■상병의 머리통이 무언가에 맞아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의 시신이 축 늘어지며 바닥을 뒹굴었을 때, 나는 그가 떨어뜨린 랩탑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챙겼다.
항상 자신처럼 어려운 사람을 챙기기 위해 내게 깐깐하게 굴던 녀석이다. 내가 적들을 사살할 때도 전쟁범죄라며 막으려 들었던 마음씨 좋은 녀석이다.
내가 챙긴 랩탑 덮개에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대검으로 삐뚤빼뚤 새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지훈 상병.
"박뱀!"
"달려! 다른 애들은 이미 늦었어!!"
"먼저 가십쇼!"
"저기 출구 안 보여?! 저기로만 나가면 우린 살 수 있다고!!"
항상 내게 까불거리는 짜증나는 놈.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
말투는 혀를 씹은 것처럼 짧아서 듣다보면 괜히 짜증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어지는 놈.
땅굴 입구로 먼저 빠져나온 나를 발로 걷어차서 아래로 떨어뜨린 녀석은 양손에 C4를 들고 있었다.
"너 이 새끼 미쳤......!"
"브라보는 항상 알파보다 앞서나간다! 그건 우리 브라보 중대가 알파 중대보다 더 용감하고 뛰어나다는 뜻 아니겠슴까! 그딴 엘리트주의에 빠진 새끼들보다도 우리가 훨씬 더!!"
놈은 좁은 땅굴 출입구에 몰려든 괴생명체들을 전신으로 막으면서 외쳤다.
"우린 쓸모없는 놈들이 아님다! 천애고아라서 별 볼일 없고, 덜떨어진 것도 아니고, 각자 잘하는 것이 있는 뛰어난 인재들임다! 브라보 중대인 우리가 언제나 알파 중대보다 앞서나가면서 증명하지 않았슴까! 박뱀이 우리가 쓸모있다고,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주지 않았슴까?! 우리 모두 그것만큼은 '기억'하고 있슴다!!!!"
그러니까 우리는 버림패로 써도 되는 천애고아에, 아무리 소모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고기방패가 아니라고.
우리도 저 엘리트 집단에 비해 꿀릴 것 하나 없는 인재들이라고.
몇 명이 죽든, 단 한 번도 작전을 실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브라보 중대 아니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기록'한 내게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절규하듯이.
"브라보는 항상 알파보다 앞서나간다!!!!!!!!!!!!!!"
"장상우 상병! 이 개새끼야!!!!!!!!"
기록 종료.
-1부 완결-
-작가의 말-
딥 인사이드 아웃은 제목에서도 느끼셨겠지만 역대급 트롤러 먹방처럼 주인공이 특정 목표를 두고 움직이는, 주인공만의 세계관을 다룬 소설입니다.
2부 완결로 스토리의 완전한 끝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이야기가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역대급 트롤러의 먹방과 비슷하거나 좀 더 짧을 수도 있겠네요.
1부 완결까지 따라와주신 분들께는 미리 감사드리는 바이며, 2부 완결까지도 계속 함께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