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95화 (95/211)
  • 엘리트(1)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은 디그러쉬제 녹음기였다.

    이름모를 대령의 것도 아니고, 진현곤 대령의 것도 아닌, 전혀 다른 누군가의 녹음기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녹음기의 주인이 이미 저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사람이 내게 자신의 녹음기를 맡길 리가 없으니까.

    녹음기를 슬쩍 들어 아래를 보니 역시나 여단장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니, 이제는 전 여단장인가?"

    허탈하게 웃으며 그의 녹음기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당장 그가 내게 어떤 정보를 남겼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녹음기록을 확인하기엔 장소와 때가 맞지 않았다.

    기존에는 타인 소유였지만, 이제는 내 손에 들어오게 된 디그러쉬제 녹음기는 이로써 총 3개다.

    꼬르륵.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지 배가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날 새벽에 잠에서 깬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때부터 줄곧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허기마저 잊어버렸던 것 같다.

    뒤늦게 찾아온 반동에 전신의 근육이 팍팍 쑤시고, 위장은 당장이라도 쪼그라들 것처럼 열렬하게 음식과 물을 갈구하고 있는 상황.

    나는 배낭을 열어 대충 에너지 바와 물을 씹어삼켰다.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아 음식을 찾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내가 들어가서 잠을 청하고 있었던 조용한 방과는 달리, 호텔 로비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부서진 잔해를 수레나 포대에 담아 실어나르고 있는 사람들, 부상자를 이송하거나 말을 전하기 위해 바쁘게 달려가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환자들까지.

    그야말로 총체적난국이었다.

    '난 이런 상황에서도 용케 잠을 자고 있었구나.'

    누군가가 내 앞에 전 여단장의 녹음기를 두고간 것으로 보아 내가 편하게 꿀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을 텐데, 어째서 깨우지 않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분위기가 좀 우중충하고 어수선하긴 해도, 일단 배부터 채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염치 불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로비를 가로지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날아들었다.

    "......"

    결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태생이 태생인지라 주변으로부터 날아든 시선을 자연스럽게 읽었다.

    불안, 공포, 초조, 의심, 의문, 당혹, 혐오, 감사.

    호텔을 구한 내게 감사의 마음을 느끼는 점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었다.

    '하긴,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무작정 뛰어들어가서 닥치는대로 적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는 머리에 열이 확 오른 탓에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는 변명아닌 변명을 할 수도 있겠으나, 달리 말하면 나는 스스로의 감정도 주체하지 못하는 병신이라는 얘기가 된다.

    사람의 모가지를 단번에 썰어버리고, 짓밟아서 목뼈를 부러뜨리고, 머리통에 정확히 총알을 때려박고, 형상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주먹으로 안면을 다져놨다. 사람을 상대로.

    당연히 이런 나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의심할 수밖에.

    하지만 이제와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롯데호텔 침공은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받을 것이다.

    당당하게 식당으로 쳐들어간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허락을 받지도 않고 준비된 식사중 아무거나 골라잡았다.

    우리가 환영회에서 먹었던 이상한 음식들이 아니라, 제대로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었다.

    나를 제지하려던 취사병들이 내 모습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고는 다시 본인들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는 통조림 빵과 음료수, 그리고 어찌어찌 조미료를 쳐넣고 요리한 냉동 고기볶음 따위를 우적우적 씹어삼켰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디저트인 쿠키와 사탕까지 한가득 챙겨서 식당을 빠져나왔다.

    내 예상대로 여단장이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면 이 호텔의 임시 주인은 경찰 총경일 것이다.

    군인과 경찰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피해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으니, 지휘자가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여단장의 집무실이 아니라 총경의 집무실로 향하자 역시나 그가 주요 안건들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쉴새없이 몰려드는 군인과 경찰들의 보고를 일일이 받고, 직접 쓴 서류에 날림으로 서명해서 다시 부하들에게 넘겼다.

    한동안 집무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부하들이 어느정도 물러났다 싶을 때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우리의 주인공이 이제야 눈을 뜨셨군."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하루. 정확히는 30시간 정도였지. 자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나는 자네가 이끄는 사람들에게 별도의 객실을 따로 배정하고, 제멋대로 목숨을 끊어버린 여단장의 뒷처리를 하고, 박살난 호텔을 재건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

    누구는 30시간동안 퍼질러 자고 있었는데 누구는 30시간 내내 잠들지 못 했다고 하니 인생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 하구나 싶었다.

    "대체 뭘 하면 30시간이나 퍼질러 자는 건지 모르겠지만...그래도 호텔을 구해준 사람을 무작정 때려서 깨울 수는 없으니 일단 그대로 뒀어. 나한테 고마워 하라고."

    "총경님이 저한테 더 고마워 하셔야죠. 이러나저러나 결국 이 호텔의 주인으로 만들어 드렸으니까요."

    "네가 호텔을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여단장이 자살한 건 제가 관여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갑작스럽게 폭탄 선언을 하자 총경은 입을 떡 벌린 상태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단장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결과적으로 내부자 관리를 못해서 배신자가 나오게 만들었으며, 그 모든 잘못을 이용해 압박했어요. 적들의 침공을 막아내면 그때 처벌하겠다고 일러두기까지 했으니 자살하지 않고는 못 배겼겠죠."

    "그게...그러니까...넌 어떻게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거냐?"

    "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라고 배웠지, 짐승을 인간으로 대우라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제가 현역 군인이었다면 즉시 여단장에게 프래깅을 했을 걸요."

    "......"

    그러니까 너를 호텔의 주인으로 만들어준 건 내게도 일정 부분 공이 있다, 그런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자 총경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그렇게까지 독하게 말하는 걸 보니 원하는 게 있군. 그렇지?"

    "이 호텔에 대한 이권을 주세요. 지분은 30%. 나머지 70% 지분은 군인과 경찰들이 알아서 나눠드시고."

    "30%라...과하긴 하지만 세운 공이 있으니 안 주겠다고 버틸 수는 없군. 좋아, 30% 떼주지."

    "30%를 우리에게 떼주겠다는 건, '우리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 이 호텔의 30%에 달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객실, 식사, 보호, 거래 등등.

    "너같은 사람들이 더 있나?"

    "많죠. 사실 우린 PMC도 아니거든요."

    "오늘따라 충격 속보를 많이 듣게 되는군. 내가 한 번 맞춰볼까? 다른 생존자 그룹의 사람이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리셨네요."

    다른 생존자 그룹인 건 맞지만, 정확히는 지저 도시쪽 사람이다.

    "우리가 이곳의 이권을 30% 만큼 확보한 이상, 앞으로 우리같은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이용하게 될 거에요. 이곳이 서울 중구의 진짜 중심이 되는 거죠."

    "말썽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야. 그래야 정보와 물자가 활발하게 돌면서 완전히 죽어버린 경제도 다시 회복할 테니까."

    그게 우리의 목적이기도 하다.

    정보와 물자, 필요에 따라서는 피난처 겸 물자 보관소까지 겸할 수 있는 훌륭한 상업 거점.

    서울 동부에는 이미 노원역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소수의 조직원을 주기적으로 그쪽에 보내서 근황을 알아보니 꽤 잘 굴러가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목숨까지 걸어가며 이 호텔을 서울 중구의 진짜 중심으로 만드려한 진짜 이유는 뭐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일에 목숨 걸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한때 인구 천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대한민국 최대 메카이자 수도를 완전히 장악할 생각이거든요. 거점을 하나둘씩 만들어서 서로 연결시키고, 사람들의 생존율를 높이고, 죽었던 경제를 회복시키고, 최종적으로는 그 위에 제가 서는 거에요."

    "빈말로도 오만하다고 지적할 순 없겠군. 이런 일에 목숨까지 걸어대는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런 걸 논할 자격이 있지.'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서류에 잉크를 묻혀서 지장을 찍고 서명까지 한 다음 내게 넘겨주었다.

    내게 롯데호텔의 이권 30%를 영구적으로 양도한다는 보증서이자 계약서였다. 거기에는 전 여단장과 내가 나눴던 일에 대한 추가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가 조항 : 롯데호텔의 전기와 수도를 복구하면 호텔의 이권을 20% 추가 양도.

    "조건이 나쁘지 않네요."

    "그렇지? 내 나름대로 그쪽의 동기 부여를 위한 출혈 서비스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당연히 저희도 성의를 보여야겠죠. 전기와 수도 복구 작업은 재정비를 한 뒤에 여건이 되는대로 진행할게요."

    어차피 혼자서 꿀꺽하기 힘든 호텔, 내가 이곳을 먹고 살만하게 만들어주면 통크게 절반을 뚝 떼어주겠다는 의도였다. 쉽게 말하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다.

    총경은 여단장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인물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일수록 어떤 환경이든 악착같이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그럼 재정비 뒤에 떠날 건가?"

    "바로 한강 방면으로 내려가지는 않을 거에요. 일단 '집'에 한 번 돌아갔다가 다시 나와야 할 것 같거든요."

    "우리 호텔에 또 방문해주길 기대하지."

    최대 50%의 이권이 걸려있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깔끔하게 사후처리를 끝낸 나는 총경의 집무실을 나와 곧장 조직원들이 머무르고 있는 객실 층으로 향했다.

    그들은 30시간 전에 있었던 전투 때문에 대부분 요양중이거나, 손상된 장비를 정비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명호에게 사상자 보고를 받아보니, 최종적으로 사망한 조직원은 세 명, 부상자는 다섯 명이라는 씁쓸한 내용이었다.

    사망자 세 명 중 두 명은 역저격에 당했고, 나머지 한 명은 운 나쁘게 박격포에 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부상자들이 대부분 경미한 수준의 부상만 입었다는 것 정도.

    "이제 어떻게 합니까?"

    "물자 챙겨서 지저 도시로 돌아가야죠."

    마침 오늘이 3일째라 다시 격벽의 문이 열렸을 것이다. 물자를 한가득 챙겨서 시간 맞춰 돌아가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으리라.

    "들었지? 모두 짐 챙겨서 복귀한다."

    김명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직원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복귀 준비를 했다.

    사실 내가 오기 전부터 대부분 자기 점검에 힘쓰고 있었는지라 채비를 갖추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자가 가득 쌓여있는 롯데마트에서 우리가 챙길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물자들을 챙긴 다음, 장갑차와 물자수송 차량에 실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안 좋게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우리가 아니었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진즉에 실험체 신세가 되었거나 죽었을 텐데.

    장갑차 상부에 올라탄 나는 차체를 탕탕 두들기며 조직원들에게 복귀 신호를 보냈다.

    롯데호텔을 벗어나 다시 중량구에 도달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상한 벌레를 쏘아대는 나이트슈터-내 작명 센스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만 조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씨발."

    설마 경복궁 앞을 지나칠 때 정체불명의 중장갑보병들에게 둘러싸일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 했다는 얘기다.

    차라리 나이트워커 무리가 덮쳐왔다면 개박살을 내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우리보다 무장 상태가 훨씬 더 좋은 중장갑보병들이 한 무더기로 몰려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서로 불편한 침묵 속에서 말없이 대치하고만 있던 그때, 중장갑보병들 사이에서 유독 무장 상태가 남다른 인물이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구태여 나를 지목했다.

    "거기 있는 인간만 두고 가면 나머지는 그냥 보내주겠다."

    "왜 하필 나야 씨발!"

    "두고가지 않는다면 거기 있는 인간만 제외하고 모조리 사살하겠다."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긴 했으나, 불리한 건 이쪽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김명호에게 총지휘권을 넘겼다.

    내가 인질이 되지 않으면 정말로 다 잡아죽일 기세였던 것이다.

    "지저 도시에 돌아가면 일단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만 알리고, 각 조직의 장들에게 지저 도시 북부 지구 개발에 조금씩 투자해서 자력생존에 서두르라고 하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만 두고 가라는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최소한 죽일 것 같지는 않아요. 새로운 랑데뷰 포인트는 롯데호텔로 정해둘테니 차도식파도 차후 지상작전을 진행할 때는 그곳을 전초기지 삼아 움직이세요."

    "알겠습니다."

    김명호에게 대략적인 전달사항을 전해둔 나는 짐을 챙겨 중장갑보병들에게 얌전히 구속되었다.

    조직원들은 불안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다가도, 김명호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30시간을 내리 잔 게으른 인간에게 주어지는 벌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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