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그 뒤, 3년 동안(2) (207/249)
  •  208화. 그 뒤, 3년 동안(2)

     로엘이 말을 이었다.

    “시작은 제국부터. 황제의 권위를 빌어다 쓰면 네 비무 요청을 거절하는 자는 없을 거다. 제국의 모든 검성과 검존을 찾아가서 공식적인 대련을 벌이고, 그들을 꺾어.”

    “…….”

    “그 뒤엔 각 왕국을 전전하며 초인 이상의 실력을 지닌 무인들에게 도전하면 돼. 여기서부턴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여 주든 받아들여 주지 않든 상관없어. 어느 쪽이든 네 명성이 높아지는 데 도움이 될 테니.”

    “흠.”

     레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굉장히 황당하고 허무맹랑하며 무모한 이야기지만, 확실히 명성을 얻는 데 그 이상 가는 방법은 없을 듯했다.

     게다가 그의 목표는 대륙제일검가였다. 가주(家主) 될 이가 ‘대륙제일무인’으로 이름을 떨쳐야 하는 건 대륙제일검가가 세워지기 위해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대륙 전역의 강자들에게 도전하고 그들을 꺾으며 돌아다닌다니. 이 얼마나 레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일이란 말인가. 위험성, 실리의 문제를 떠나 굉장히 끌렸다.

     옆에서 르우벤이 낄낄거렸다.

    “어우. 생각만 해도 피곤한 상황이 잔뜩 벌어질 것 같네. 고생길이 활짝 열렸구만.”

     어디 피곤하다 뿐이겠는가.

     황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제국 내에서 실력자들에게 도전하고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잡음이 상당할 터였다. 그런데 대륙 전역?

     단순히 도전하고 대결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초월자의 무력은 각국의 자존심이기도 하니까.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레인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 집단이, 국가가 대체 몇이나 될까. 그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다 좋다만, 후폭풍이 너무 거셀 것 같은데.”

    “그거야 어련히 알아서 감당해야지. 네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실력은 아니잖아?”

    “…….”

    “그리고 이게 무슨 강요도 아니고, 하기 싫으면 그냥 말면 돼. 난 그저 가장 좋은 길을 제시했을 뿐이야.”

     싱글싱글 웃으며 팍팍 부담을 주는 로엘이었다.

     레인의 이마에 골이 패였다.

     아주 남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텐데.

    “후우.”

     심호흡 한 차례. 레인은 이내 확실히 마음을 정리했다.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 * *

     다섯 각성자는 각자의 일을 모두 마무리하기까지의 기간을 3년으로 잡았다.

     우선 바르바젠은 국내의 일을 정리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진압된 반란의 뒷수습, 황권 강화, 민심 안정화, 국가 전력 강화, 남은 불온 분자 색출, 각국과의 외교 등등. 할 일이 많다 못해 넘쳐난다는 모양이었다.

     로엘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하던 대로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온갖 일을 벌이고 다녔다.

     어느새 대륙 제일로 거듭난 상단의 일도, 제국의 어둠을 지배하는 이로서의 일도, 자기 개발 및 갖가지 연구도.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카트란의 경우엔, 이레닐과 함께 대륙 각지에 마련된 모종의 은닉처를 찾아다녔다. 다름 아닌 그의 내면에 잠든 또 다른 자아가 죽기 전에 남겨둔 안배를 모으는 것이었다.

    [미래에 적합한 후인이 나타나면 내 모든 진전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남겨둔 안배였건만, 그걸 내 스스로 직접 찾아다니게 될 줄이야.]

    “하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트란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기가 막힌 일이라 여길 법도 했다.

    [대륙 각지에 남겨둔 안배를 모두 모으면, 최종적으로 내가 생전에 사용했던 연구실을 찾아 들어갈 수 있다. 너는 그곳에서 3년 동안 최대한 경지를 끌어올리는 데 주력해라.]

     카트란은 각성자들 중 유일하게 ‘세력’을 일구길 포기한 인물이었다. 그 자신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가진 힘은 그 누구의 능력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종류의 것. 딱히 큰 세력을 이끌지 않더라도 그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향후 3년간 스스로의 경지를 갈고닦아 최대한 ‘그’가 생전에 이뤘던 경지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예정이었다. 마법을 원숙하게 발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검술의 경지가 더욱 높아지도록.

     지금까진 최소한의 격조차 갖추지 못했기에 사용하지 못한 방법. 자가암시로 육체의 성장 가능성을 극대로 끌어올린 채 수행에 임하게 된다면 3년 정도로도 괜찮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네가 못 한다는 건 말이 되질 않지. 말하지 않았나.]

     내면의 자아가 확신하듯 말했다.

     확신의 근거는 단순했다. 최근 두 인격의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너는 나라고. 내 환생이라고.]

     내면의 자아와 비교해 현격한 격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카트란이 ‘주’ 인격일 수 있었던 것도. 한 육신에 두 자아가 존재함에도 그동안 서로 이상할 정도로 반발심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카트란이 각성한 것 또한 그 자신의 ‘전생’이었던 것이다. 그 각성의 형태가 다른 이들과 조금 달랐을 뿐.

    [걱정할 시간이 있다면 움직여라.]

     어쩌다 보니 내면의 자아, 그러니까 전생의 자신에게 격려를 받게 된 카트란이 재차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이후 아카데미의 졸업식 참석마저 포기하고 뼈를 깎는 수련에 매진했다.

     전생의 자신이 안배해 둔 장소에서. 어쩌다 보니 막대한 떡고물을 주워 먹게 된 이레닐 카이엔과 함께.

     그리고 르우벤, 그의 경우엔…….

    “누구세요?”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단장과의 재회를 이뤘다.

     * * *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의 졸업식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노러츠 왕국의 대도시, ‘바르디아’.

    “누구세요?”

     그곳 도시의 시장 거리에서, 르우벤은 전생의 인연을 마주했다. 지금은 겨우 12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와.

     정열적인 붉은 머리칼. 미래가 기대되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외견과 잘 어울리는 깔끔한 옷차림.

     전생에 수없이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으나, 르우벤은 어렵지 않게 눈앞의 소녀가 그녀임을 알아보았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영웅’, 세이라 실린 플리아스 명예 백작. 지금 시점에선 명예 백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 그냥 ‘세이라’일 터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르우벤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소용돌이쳤다.

    “안녕, 꼬마 아가씨. 내 이름은 르우벤이라고 해.”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이 여인은 분명 그녀이지만, 동시에 그녀와는 다른 존재구나, 하고.

     그도 그럴 게, 그토록 열렬하게 사모했던 그녀이건만,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를 대상으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질 않았다. 마치 정말로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아아. 그런가.’

     르우벤은 이내 이해했다.

     전생의 그가 그렇게나 경애하고 사모했던 여인은 이제 없다. 설사 눈앞의 소녀가 전생의 그녀와 같이 늠름하고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으로 다시 성장한다고 해도, 자신은 그녀로부터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리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한 계기가 되었던 ‘그 일’도. 그녀를 지켜보며 감정을 키워갔던 시간도. 그녀를 뒤따르며 온갖 역경을 맞이했던 순간들도.

     이제는 모두 없던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가 자신의 옆에 선 밀리아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곤 그녀를 소녀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밀리아. 나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야.”

    “아, 네.”

     소녀, 세이라는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사내를 의아한 얼굴로 응시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조심하라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딱히 르우벤을 경계하는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눈앞의 사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기에.

     그야, 자신에게 악감정이 있는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르우벤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번엔 제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드리겠습니다.’

     눈앞의 소녀는 분명 전생에 자신이 사모했던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전생에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은 또 아니었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지만, 이 시기에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언니’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결과로 그녀는 거친 세상에 홀로 내버려져 오랜 시간 고생하게 되고.

     그 미래. 아예 일어나지도 않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 * *

    “이상하네. 당최 이 시기에 그녀가 목숨을 잃을 만한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르우벤이 엠페러 아이즈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읽어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무슨 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주위에는 딱히 ‘그녀’를 위협할 만한 게 없었다.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배경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결계사’의 이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 희귀하고 강력한 이능의 소유자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해를 입고 죽음에 이르렀으리라 여기기는 힘들었다.

    ‘단장은 자신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일단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암중에서 그녀를 호위할 인력을 붙여뒀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가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기에 마룡이 출현하지 않았나?”

     분명 그로 인해 상업 도시 블뤼벨이 반파되었었지.

     그러고 보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로엘과 모종의 대화를 나눴었다. 그 기억 속 미래에 관한 정보로부터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에.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내가 마룡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적인 건 알거든. 마(魔)에 잠식되어 이성을 상실하고 파괴본능만 남은 존재. 맞지?]

    [그렇지.]

    [그런데 네가 말한 마룡에게 피해를 입은 도시는 마룡의 봉인지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는 도시지.]

    [그런가?]

    [지도를 봐. 마룡의 봉인지인 갈메아르 영지에서 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는 블뤼벨이 아닌 바르디아야.]

    [듣고 보니 확실히 뭔가 이상하네.]

    [이성을 잃고 파괴본능만 남은 흉포한 마수가 굳이 가장 가까운 도시를 지나쳐 두 번째로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를 향했지. 이게 우연일까.]

    […….]

    [이 이상은 너도 뭔가 더 알지는 못하는 모양이네.]

    [어. 마룡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 다라서. 아는 거라곤 블뤼벨이 반파되었다는 것뿐이야.]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정보가 부족해.]

     한동안 로엘이 인력을 풀어서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정보를 모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하고 그들을 철수시켰다는 모양이지만.

     결국 이 시기에 블뤼벨 근방을 순회하고 있을 성녀에게 귀띔을 넣는 정도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던가.

    “혹시 그 일과 그녀의 죽음에 연관이 있나?”

     그것은 분명 아무런 근거도 없는, 조금은 비약적인 측면이 강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르우벤은 그 자신의 추측으로부터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무언가, 이쪽이 모르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 * *

     마룡.

     이 마룡이라는 존재는, 사실 진짜 용(龍)은 아니다. 고대인이 용을 본따 만든 키메라가 어느 날 마(魔)에 잠식됨으로써 생겨난, 특이한 생명체일 뿐.

     그러나 그 개체의 강함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설사 초월자의 경지에 든 이들일지라도 그들 중 대부분은 그 존재를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겠지.

     그 마룡이, 오랜 세월 자신을 구속하던 봉인에서 풀려나 허공을 순회했다.

     그 존재는 뇌리 깊숙이 새겨진 파괴본능에 따라 인적 없는 들판을 지나 ‘가장 가까우면서 많은 생명체의 기척이 느껴지는’ 도시를 향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르우벤이 전해 들었다.

    “블뤼벨이 아닌 바르디아로 오고 있다?”

     분명 놈이 바르디아를 두고 블뤼벨을 반파시켰다는 사실에 의아한 부분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일단 엄연히 벌어졌던 일이었기에 그냥 알 수 없는 요인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그 부분에 대한 조사에선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 없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놈이 블뤼벨이 아닌 바르디아로 오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그 괴물의 행동양식을 변화시켰을 만한 요인이, 변수가 전혀 없는데?

    “뭐지?”

     그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와중, 그가 머무는 숙소로 또 다른 정보원이 찾아와 쪽지를 건네고 사라졌다. 르우벤이 쪽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뭐야. 영주 직속 기사단이 통째로 몰려와서 그녀를 영주관으로 데리고 갔다고?”

     르우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변수에 변수가 거듭되고 있었다. 타이밍도 굉장히 절묘하고.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두 변수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것일까?

    “…….”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