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18화 (218/227)
  • < 제 74장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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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 군의 퇴각은 신속했다. 신인들의 공격에 의해 중앙이 뭉개진 상황에서 급히 이뤄진 퇴각이었지만 등 뒤의 추적자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기에 오래지 않아 혼란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격노의 영토 동부 국경지대에 위치한 던전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격노의 왕과 팔부중의 수장들은 회의를 소집했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 역시 그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 장소는 격노의 왕의 던전 최상층에 자리한 대회의실이었다.

    전투 직후 이렇다 할 휴식 없이 회의장에 집결한 상태였기에 모두에게서 전투의 흔적이 묻어났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회의의 화두는 단연 전장의 하늘 위에 갑자기 나타난 뒤틀림과 그 안에서 튀어나온 빛의 거인들에 관한 것이었다.

    시트리가 이야기를 주도했고,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 된 격노의 왕과 팔부중의 수장들은 침묵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아수라왕 라크시카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구려.”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시트리나 용호에게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탄식에 가까운 말이었다.

    마계는 수많은 이계들과 크고 작은 연결로를 가졌다.

    당장 던전 상회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이계 출신의 사역마만 하더라도 한 해에 수십을 우습게 헤아렸다.

    천계라는 세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봇물 터지듯 이어진 이야기들이 팔부중의 수장들을 혼란케 했다.

    천하고도 수백 년 전, 스스로를 희생해 마계를 구원한 탐욕의 왕 마몬.

    그를 배신하고 역사를 은폐한 오만, 질시, 색욕 세 명의 왕.

    천 년의 세월은 드래곤에게도 긴 시간이었다. 더욱이 탐욕의 왕 마몬의 시대를 살아간 드래곤들은 철저할 정도로 주변인에 머물렀다.

    드래곤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태한 개인주의자들이었다. 드래곤들이 하나의 군단을 이뤄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현 상황이야말로 드래곤들에게 있어서는 이질적인 상황이었다.

    아마 전 세대나 전전 세대의 드래곤들의 기록을 샅샅이 뒤지면 천계나 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어떤 기록도  지금 시트리의 입에서 나온 것만큼 소상하지는 못할 터였다.

    격노의 왕은 일단 시트리의 이야기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잠시 정리를 해보겠소. 나태의 왕께서는 내 이야기를 확인해주시오.”

    시트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격노의 왕은 숨을 한 차례 고른 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첫째, 천계의 힘은 마계의 존재들에게 독과 다름이 없다. 그 힘을 쐬는 것만으로도 나약한 이들은 죽음에 이를 수 있고, 강건한 이들도 오래 노출되면 영육 모두가 쇠약해진다.”

    구멍이 열리는 순간 막대한 양의 천계의 기운이 방출되었다. 구멍 바로 아래에 있던 북부 군과 남부 군의 병사들이 단체로 목숨을 잃은 것은 무방비 상태로 천계의 기운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마계와 천계를 잇는 것은 천계의 문이다. 천계의 문이 조금씩 열림에 따라 그 마계 곳곳에 뒤틀림이 생겨난다. 천계의 문이 크게 열리면 열릴수록 나타나는 뒤틀림이 많아지고 그 크기 역시 커진다.”

    시트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격노의 왕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셋째, 이번에 나타난 빛의 거인은 신인神人이다. 신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천계의 문이 이미 삼분의 일 이상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인은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몬이 격노의 왕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천계와의 싸움에서 여러 천계의 존재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일반적인 천계의 주민들로 여겨지는 천인.]

    [회색에 가까운 흐릿한 빛으로 전신을 뒤덮은 존재들이다. 작은 것은 고블린만하고, 큰 것은 오우거에 필적한다.]

    [이들은 천계의 기운을 품고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리 강하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천인들을 천계의 병사들이라 판단했다.]

    오늘 싸움에서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용호를 노리고 달려들던 빛의 촉수들 너머에 자리한 존재들을 기억했다. 아마도 그들이 천인들일 터였다.

    [신인은 밝고 하얀 빛으로 전신을 두르고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천계의 기운을 방출한 뿐만 아니라 그 크기 역시 무척이나 거대하다.]

    [오늘 보았겠지만 기실 공격 방법은 그리 대단치 않다. 어찌 보면 그저 거대하기만 한 괴물에 불과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천계의 기운이다.]

    북부 군과 남부 군 양쪽에 나타난 신인 둘이 죽인 병사의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중요했다.

    신인들은 그 거대함으로 밀집해 있던 병사들을 죽였다. 비단 신인이 아니더라도 신인과 필적한 크기의 거인이 존재한다면 오늘 전투에서 신인이 보인 것과 거의 비슷한 활약을 해낼 수 있었다.

    신인은 격노의 왕과 용호의 일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몬의 말마따나 천계의 기운만을 제한다면 그저 거대하기만 한 괴물이었다.

    물론 그 거대함 자체가 어마어마한 무기였고, 천계의 기운을 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에 불과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쪽에서도 충분히 대적할 방법이 있었다.

    [신인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중대형 이상의 구멍이 열릴 때마다 한 개체가 나타나는 정도이다.]

    [천계의 문 앞에서 치룬 최후의 결전에서도 초대형 신인의 숫자는 수십 정도에 불과했다.]

    키르티무카는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몬은 수십에 불과하다 말했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백 미터가 넘는 거인들이었다. 어찌하여 당대의 왕들이 하나로 힘을 모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거대한 신인이 아니다. 오우거와 엇비슷한 크기를 가진 신인들이 있다.]

    [마몬께서는 이러한 신인들을 신장이라 부르셨다. 신인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양의 천계의 기운을 방출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강하다. 초대형 구멍이 만들어질 때나 나타나는 존재이며, 우리 12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단독으로 신장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구시온과 리처드, 엘룬 이렇게 세 사람 뿐이었다.]

    12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삼강이라 할 만한 존재들이었다.

    다행인 것은 신장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천 년 전 천계와의 싸움에서 아몬이 본 신장의 숫자는 스무 명 남짓에 불과했다.

    아몬은 잠시 동안 침묵을 가졌다. 주변의 모두가 신인과 신장의 존재를 받아들인 뒤에야 말을 이었다.

    [천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과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천계의 힘이 마계의 존재들에게 상극이라는 사실이다. 천계의 문이 모두 열리고 천계와 마계의 연결이 굳건해지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마계 자체가 멸망할 가능성 역시 있다.]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팔부중 수장들의 얼굴이 절로 창백해졌고, 키르티무카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구시온이 다소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무 쫄 것 없어. 천계의 기운에 마력으로 맞서면 된다. 천계의 기운만 차단하거나 견뎌낸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다.”

    스카자하가 말을 보탰다.

    “천계의 힘은 마계뿐만 아니라 이계에서 온 자들에게도 독과 같은 작용을 해요. 하지만 마계의 존재들에게 작용하는 것보다는 그 강도가 약하답니다. 이계 출신인 팔부중들이라면 보다 효과적으로 천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구멍이 열린 직후 목숨을 잃은 자들만을 헤아린다면 북부 군이 남부 군 보다 많았다. 양 쪽 모두 천계의 기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팔부중 자체가 마계 태생이 아닌 이계에서 넘어온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스카자하는 말을 마치며 용호 쪽을 돌아보았다. 용호는 순수한 마계 출신이 아니었다. 그 안에 마몬의 피가 흘렀지만 동시에 다른 세상인 인계의 피 역시 흘렀다.

    격노의 왕 역시 순수한 마계의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팔부중의 경우 마계에 넘어온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터라 어느 정도 마계인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은 이계의 존재라 분류할 수 있었다. 스카자하는 그 사실에서 희망을 느꼈다.

    “천계의 문이 완전히 열리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요?”

    용왕 수르카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스카자하는 구태여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확신할 순 없어요. 하지만 과거의 일을 돌이켜 본다면… 앞으로 길어야 두어 달 남짓 밖에 남지 않았을 거예요.”

    용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몬이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인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황이 꽤 심각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인이 나타날 때까지 뒤틀림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천 년 전보다 문이 열리는 속도가 빨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소란보다 더욱 혼란스런 침묵이 번졌다. 이 와중에도 냉정을 잃지 않은 용 군주 앙카블로사가 스카자하에게 물었다.

    “과거 탐욕의 왕 마몬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천계의 문을 닫으면 되는 겁니까?”

    “그래요. 그럼 모두 해결될 거예요.”

    스카자하가 엷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용호와 격노의 왕뿐만 아니라 앙카블로사와 용 군단 역시 희망이었다. 과거의 드래곤들은 하나 되지 않았고, 자연 천계와의 싸움에서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용 군단은 달랐다.

    모두들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가루라왕 비류박차가 탄식했다.

    “북부 군과의 휴전은 무리겠지요.”

    “천 년 전에도 배신을 한 연놈들이다. 절대로 믿을 수 없다.”

    구시온이 으르렁거렸다.

    전장에서 직접 오만의 죄를 느낀 구시온은 확신했다. 북부 군 너머에 있던 것은 오만의 왕이었다. 당대의 오만의 왕이 아닌, 과거 마몬을 배신한 바로 그 오만의 왕이 분명했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무슨 수로 그만한 힘을 손에 넣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복수였다.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사그라들었다 생각한 복수심이 다시 한 번 세차게 불타올랐다.

    분위기가 험악한 가운데 용왕이 다시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오만의 왕이 천계의 문을 닫을 가능성은 없겠소? 이대로 있으면 모두가 다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잖소.”

    제법 타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트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만의 왕이라면… 그 자라면 천계의 문이 열리기 전에 우리 모두를 죽이는 쪽을 택할 겁니다. 나와 탐욕의 왕, 격노의 왕의 힘을 취해 천계의 문을 닫으려 하겠죠.”

    시트리 역시 오만의 왕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미치광이었다. 마몬이 천계의 문을 닫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몬을 배신했다. 마계의 멸망을 막는 일보다도 마몬의 죽음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오만의 왕과 협력해 천계의 문을 닫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라면 천계의 문을 닫는 것보다 용호와 격노의 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우선시 할 터였다.

    “이쪽 역시 마찬가지다. 오만의 왕을 쓰러트린 이후에 다시 천인들과 싸워 천계의 문을 닫는 것이 최선이다.”

    구시온이 선언했다. 용왕과 가루라왕은 심적인 거부감을 느꼈지만 이내 납득하였다.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이계종의 말살과 노예화를 주장하는 오만의 왕이었다. 애당초 팔부중과는 평행선 위에 서 있는 자였다.

    격노의 왕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긴 숨을 토한 뒤 애써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잠시 휴식을 갖도록 하겠소. 나태의 왕과 마몬 가의 모두 여러 말씀 감사하오.”

    북부 군 역시 군사를 물린 상태였다.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격노의 왕이 회의장을 나서자 키르티무카와 가르디문디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용왕과 아수라왕, 가루라왕은 각기 용호와 시트리에게 예를 표한 뒤 회의장을 나섰고,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팔부중들이 용호와 마몬 가 사람들에게 다가와 쉴 곳을 안내했다.

    시트리가 말없이 용호를 보았다.

    용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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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74장 #5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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