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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219화 (219/227)
  • < 제 74장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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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노의 왕은 비마나 최상층에 위치한 공중 정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밤의 어둠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안 될 말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고 잊으려 해도 현실은 언제나 눈앞에 있었다. 북부 군과 천계 모두 당면한 과제였다.

    격노의 왕은 애써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저 가벼운 허밍이었지만 가무에 능한 간다르바들의 수장답게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냈다. 달빛과 별빛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노래의 흥겨움에 취했던 격노의 왕은 얼른 입술을 닫아 흥얼거림을 끊었다. 비마나는 그녀의 던전이었고, 그렇기에 비마나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까지 모두 알 수 있었다. 공중정원에 방문객이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했건만 격노의 왕은 크게 숨을 고른 뒤에야 방문객을 향해 돌아설 수 있었다.

    방문객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오늘 몇 번이나 말했듯이 격하게 환영하는 바이오.”

    다소 과장되게 답한 격노의 왕은 넓적한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용호는 그런 격노의 왕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둘 사이에 어색함이 일었다. 격노의 왕은 쭈뼛거렸고, 용호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침내 격노의 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격노의 왕- 아니, 드리타라슈트라.”

    격노의 왕은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살짝 돌려 용호를 마주했다.

    용호는 잠시 그런 격노의 왕을 바라보았다. 사실 두 왕이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것부터가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용호 자신은 격노의 왕의 던전 안에 있었고, 격노의 왕은 이렇다 할 호위 없이 용호 자신을 마주했다.

    서로가 서로를 동맹으로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신의 동맹이자 맹우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소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부디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용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격노의 왕은 그런 용호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기다려보시오.”

    격노의 왕은 가슴 위에 손을 올린 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골랐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에야 다시 용호를 마주했다.

    “이제 말하시오. 무슨 말이든 들을 각오가 되었소.”

    격노의 왕 역시 진지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랑에 빠진 소녀 드리타라슈트라가 아니라 팔부중의 왕인 격노의 왕이었다.

    용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만의 왕은 강맹합니다. 단순히 우리 둘이 함께 싸우는 것만으로는 그를 대적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의 곁에는 색욕의 왕 또한 함께하니까요.”

    대부분의 남부 군은 갑자기 나타난 천계의 구멍과 신인들의 존재감에 짓눌려 오만의 왕을 보지 못했지만 용호와 격노의 왕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폭력의 왕이 어째서 자폭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왜 오만의 왕을 마신이라 칭했는지를 오늘 전투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마지막 순간 방출된 마력의 양은 용호와 격노의 왕을 상회했다. 더욱이 색욕의 왕은 무척이나 강했다. 용호와 격노의 왕 모두 자신의 신기에 익숙해지기 전이었다지만 색욕의 왕은 홀로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몸을 빼내기까지 했다.

    격노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싶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왕이었기에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만의 왕은 강했다. 도저히 지금의 자신으로는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색욕의 왕을 상대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터였다.

    용호는 그런 격노의 왕을 보듬는 대신 이야기의 흐름을 바꿨다. 오른팔에 자리한 탐욕의 신기를 보며 말했다.

    “탐욕의 힘은 소유입니다. 저는 제 손에 들어온 것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제 예속 사역마인 카이완과 티그리우스를 아시죠?”

    “알고 있소.”

    격노의 왕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카이완이라면 이래저래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한 사이였다.

    “그들은 가주 출신입니다. 아시겠지만 가주가 예속 사역마가 되면 권능이 크게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아예 사라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저는 그들의 권능을 마치 제 자신의 권능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 탐욕이 가진 소유의 힘 덕분입니다.”

    격노의 왕의 표정이 다소 굳었다. 그녀는 순진할지언정 어리석지 않았다. 용호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흐름에서 본능적으로 간파한 사실이 있었다.

    용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격노의 왕을 붙잡듯 다음 말을 내놓았다.

    “권능은 영혼의 힘. 죄악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선언과 다름없었다. 격노의 왕의 두 눈에서 보석안 특유의 빛이 이는 것만 같았다.

    격노의 왕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무어라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고 용호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격노의 왕 자신은 용호의 말을 모두 듣겠노라 약속했다.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협박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러합니다. 오만의 왕을 쓰러트린 이후에도 당신과 맹우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격노의 왕이 미녀이니 봐주겠다는 알량한 마음도 아니었다.

    용호는 남부 공백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주들과 싸웠다. 개중에는 당연히 여자 가주들도 있었다.

    용호가 격노의 왕과 동맹을 맺은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다. 그랬기에 탐욕의 죄를 가진 것을 감추었고, 식탐의 왕을 쓰러트린 사실 역시 숨겼다. 북부 군을 이겨낸 다음에는 어찌 될 지 모를, 그런 동맹에 불과했다.

    하지만 색욕의 왕과 싸운 이후, 용호 스스로가 탐욕의 왕이라 밝힌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격노의 왕은 여전히 용호 자신을 맹우로 여겨줬다. 사실을 숨긴 용호 자신을 비난하고 의심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그녀 역시 필요에 의해 그런 행동을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용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진심을 느꼈고, 그렇기에 용호 자신도 진심으로 응하고 싶었다.

    격노의 왕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는 계속 맹우로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를 죽여 죄악과 정수를 빼앗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제 예속 사역마가 되어 주십시오.”

    격노의 왕이 이를 악물었다. 용호는 격노의 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만의 왕을 쓰러트리고 천계를 막아낸 이후에는, 당신이 원하실 때 바로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용의 맹약으로 이 약속을 증명하겠습니다.”

    별을 헤아리는 유노가 제시한 방법이었다.

    예속 사역마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호 간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존재였다. 예속 사역마가 되어 가주에게 영육을 바친다 하여도 그 마음까지 온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용의 맹약은 마계에 존재하는 여러 계약 마법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강력한 마법이었다.

    설사 용호와 격노의 왕이 가주와 예속 사역마의 관계라 된다 할지라도 용의 맹약은 건재했다. 용호가 약속을 어긴다면 용의 맹약은 계약의 준엄함으로 용호를 벌할 터였다. 그리고 그 벌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었다.

    예속 사역마가 되어 달라는 것은 목숨을 달라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용호 역시 목숨을 담보로 세웠다.

    격노의 왕이 예속 사역마의 계약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이를 금지하면 용호가 죽는다.

    용의 맹약은 계약을 어길 시에만 발동하니, 격노의 왕이 이를 이용해 용호를 죽일 수는 없다.

    주변의 시선이나 각자의 위치 등을 모두 잊고 계약만을 놓고 본다면 참으로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탐욕을 가진 용호는 격노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격노의 왕을 예속 사역마로 삼음에 따라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는 격노의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속 사역마의 계약은 가주와 예속 사역마 모두의 성장을 야기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서로를 온전히 믿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격노의 왕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팔부중을 이끄는 자였다.

    “잠시,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소?”

    격노의 왕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마 오늘이 왕이 된 이후 제일 힘든 날이 아닐까 싶소.”

    힘겹게나마 작은 미소를 지은 격노의 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삼 밤공기의 차가움을 느꼈다.

    “쉬시오. 그대 또한 지쳤을 터이니.”

    격노의 왕이 공중 정원을 떠났다. 용호는 가르디문디와 키르티무카가 그녀의 뒤를 소리 없이 따르는 것을 감지했다. 용케도 용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한 두 사람이었다.

    [진심을 전했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때이다.]

    아몬이 나직이 말했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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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이여, 깨어나라.]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깜박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직 공중정원 안이었다. 아몬이 다른 예속 사역마들에게 연락을 취해두었는지 새벽이 다 되었음에도 딱히 데리러 온 사람이 없었다.

    눈을 뜬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호는 상황을 이해했다. 격노의 왕이 저만치 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보다 조금 흐트러진 차림의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 용호 앞에 섰다. 두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아마 태어나서 오늘처럼 고민을 많이 한 날은 없을 거요.”

    간다르바 특유의 향긋한 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격노의 왕은 용호의 옆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밤새도록 고민해봤소.”

    격노의 왕은 차가운 밤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더니 한참이나 지나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소.”

    용호는 침묵했다. 격노의 왕은 용호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보석안이 빛났다.

    “첫째, 내가 당신의 예속 사역마가 된다는 사실은 비밀이오. 나태의 왕이나 당신의 12 사역마들에게까지 속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 외에는 안 되오. 평범한 팔부중들과 마몬 가의 사역마들 모두 몰라야 하오. 이건 가르디문디가 제시한 조건이오.”

    격노의 왕이 예속 사역마에서 해방되었을 때를 염두에 둔 조건이었다.

    용호가 생각해도 타당했다. 자신들의 왕이 아무리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다른 가주의 예속 사역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팔부중들이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차피 오만의 왕과의 단기 결전만을 위한 계약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격노의 왕은 말끝을 흐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야 겨우 다시 용호를 마주하였다. 약간은 지르듯이 말했다.

    “두 번째 조건이오. 나와 팔부중을 책임지시오.”

    “드리타라슈트라?”

    용호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격노의 왕의 얼굴에는 더 이상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이 없었다. 그녀는 팔부중의 왕으로서 말했다.

    “탐욕의 왕 당신은 이계에서 혈혈단신으로 넘어온 자요. 그렇기에 당신에게는 당신의 종족이나 일족이 없소.”

    용호는 인계 출신이었다. 가르디문디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직 카이완만이 용호와 마몬 가의 피를 공유하는 혈육이었다.

    격노의 왕은 담담히 인정했다. 탐욕의 왕은 강했다. 용호와 격노의 왕 자신의 힘의 균형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졌다.

    용호가 탐욕의 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키르티무카는 팔부중과 마몬 가의 결합을 위한 혼담을 포기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가르디문디와 팔부중 수장들의 생각은 달랐다. 마몬 가의 가주야말로 정략혼의 대상으로 적합했다. 왕들간의 균형이 무너진 세계에서 팔부중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기르거나 강한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팔부중을 당신의 종족처럼 여겨주시오. 오만의 왕을 쓰러트리고 천계를 물리쳐서 평화로운 마계를 팔부중들에게 선물해주시오.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주시오.”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격노의 왕은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한다면 나 드리타라슈트라는 그대와 평생을 함께 하겠소. 무, 물론 용의 맹약은 맺을 거요.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에 가서 돌연 수줍음이 돌아왔다. 용호는 기쁨과 당혹 속에 입을 열었다.

    “저기, 잠깐. 지금 말은…….”

    “아직은 아니오. 아직은. 오만의 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예속 사역마가 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은 좀 더 친밀해진 다음에. 당신이 진짜로 팔부중을 아껴줄 사람인지도 확인한 다음에.”

    빠르게 횡설수설한 격노의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차례 표정을 고친 뒤 용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신을 믿겠소. 탐욕의 왕.”

    참으로 큰 믿음이었다. 용호는 격노의 왕의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격노의 왕. 반드시 그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오만과 질시, 색욕의 왕이 마몬과 맺었던 약속과는 달랐다. 서로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마몬과 시트리의 약속과 같았다.

    “저기.”

    용호의 커다란 손 안에서 자신의 손을 꼼지락 거리던 격노의 왕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다시 수줍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이제 서로 말을 좀 더 편하게 하는 것은 어떻소? 처음보다는 많이 친해졌고… 앞으로도 친해질 터이니.”

    용호는 결국 웃고 말았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리타라슈트라.”

    격노의 왕은 해맑게 웃었다. 용호에게 마주 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손을 꼼지락 거렸다.

    제 74장 - 드리타라슈트라 끝, 제 75장 - 마몬으로 이어집니다.

    < 제 74장 #6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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