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85화 (185/227)
  • < 제 62장 - 전갈좌의 마그나돈 >

    제 62장 - 전갈좌의 마그나돈

    마계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왕들이 있었다.

    일곱 개의 대죄- 칠대 죄악의 힘을 가진 그들은 왕으로 군림하였고, 저마다의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그 어떤 가문도 대를 이은 ‘왕가’가 되지는 못했다.

    오직 하나, ‘오만의 왕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왕가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죄악은 계승되지 못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양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 번 죄악의 소유자가 태어났던 가문이면 그나마 죄악의 힘을 가진 자가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겨우 그런 가능성 정도로 왕가를 이룰 수는 없었다.

    정수 흡수처럼 죄악의 소유자를 죽여서 빼앗을 수 있다면 그나마 나았을 터였다. 죽기 직전의 노쇠한 왕을 계승자가 죽여서 죄악을 이으면 되었으니까.

    잔혹한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계가 아니라 인계에서조차 단지 돈을 위해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들이 있지 않은가. 죄악의 계승이라는 포장이 더해지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죄악은 그런 식으로 전승되지 않았다.

    왕의 자격을 가진 자라면 정수를 흡수하듯 상대를 죽여 죄악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왕의 자격 유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계승자라고 세워둔 자가 왕의 자격이 없으면 노쇠했다고는 하나 왕임에 분명한 자가 괜히 목숨을 잃을 뿐이었다.

    죄악의 힘을 넘기는 확실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왕이 다른 왕을 죽이는 것.

    죄악의 소유자가 다른 죄악의 소유자를 죽여 죄악을 강탈하는 것.

    그렇기에 왕가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계승자가 이미 죄악의 소유자라는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문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만의 왕가는 달랐다.

    죄악이 자연스럽게 대를 이어 계승되었다.

    최초로 오만을 손에 넣었던 초대 오만의 왕이 무언가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계승’ 자체가 오만의 죄악이 가진 특별한 능력일지도 몰랐다.

    마계 유일의 왕가.

    오만의 왕가의 주인인 당대 오만의 왕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상을 굽어보았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질시의 왕과의 전쟁은 처음 계획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질시의 왕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고, 색욕의 왕은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남부에서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식탐의 왕과 격노의 왕이 서로를 견제하기 바빴다.

    폭력의 왕이 격노와 식탐 사이에 끼어든 것은 의외였지만 계획을 뒤흔들 정도의 변수는 아니었다.

    탐욕의 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 년 이상 모습을 감춘 나태의 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유의미한 변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쾌하군.’

    잡종에 불과한 격노의 왕과 식탐의 왕이 분에 넘치는 보물을 손에 넣고 왕이랍시고 히히거리고 있는 것은 오래된 불쾌함이었다.

    거기에 새로운 불쾌함이 더해졌다.

    버려진 땅이라 불리던 남부 공백지가 통일 되었다. 비록 아직은 제대로 된 통일이 아니었지만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마몬 가.

    한 때 영화를 누렸던 가문. 허나 왕을 가졌던 대부분의 가문들이 그러하듯이 대를 잇지 못해 몰락한 가문.

    불쾌했다. 죄악도 없는 가문이 공백지를 통일했다. 남부의 왕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공백지를 공격하지 못했다. 오만의 왕 자신은 남부의 정반대편인 북부에 있기에 직접 손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만의 왕이 불쾌함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마몬 가의 당대 가주에게는 이계의 피가 흘렀다. 마몬 가의 어떤 얼간이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순수한 마계의 피가 다시 한 번 흐려졌다. 잡종 따위가 다 무너져가던 마몬 가를 일으켜 세워 남부 공백지를 통일했다.

    오만의 왕은 숨을 골라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잡종들이 설치는 것도 지금뿐이었다.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만의 왕은 남부를 향했던 시선을 다시 북부로 돌렸다. 첫 제물이 될 질시의 왕의 영토를 바라보았다.

    &

    스켈레톤들에게 무참히 침략당해 곳곳이 농기구로 유린당한 생명의 정원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정원이라 부를만한 곳이 남아있기는 했다.

    스카자하의 저택이 위치한 호숫가 근처에 남은 잔디밭 위에서 유리아가 치마를 살짝 들어올렸다. 예쁘게 예를 표한 뒤 호수 너머 저택 마당에 앉아 있는 스카자하를 보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스카자하는 짝짝짝 작게 박수를 치는 것으로 응답했다. 유리아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돌아서더니 등 뒤에 도열해 있던 이들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바둑이와 낑낑이! 공중제비!”

    “왈왈!”

    “낑낑!”

    유리아가 명령한 순간 바둑이와 새끼 던전 미어 캣인 낑낑이가 - 다분히 용호의 센스가 느껴지는 이름이었지만, 놀랍게도 용호가 아니라 유리아가 지은 이름이었다. - 높이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았다.

    오우거 뺨치는 근력을 가진 바둑이가 수 미터 이상을 도약해 공중제비를 도는 모습은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낑낑이는 달랐다. 아무리 몸이 가볍다고는 해도 제 몸에 몇 배나 되는 높이를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도는 것은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뱅글뱅글 연달아 공중제비를 도는 바둑이와 낑낑이를 흐뭇하게 쳐다본 유리아는 좀 더 뒤를 보았다. 기운차게 소리쳤다.

    “흰둥이도 공중제비!”

    엠브리오가 이끌던 늑대 무리의 수장- 흰둥이라는 이름과 달리 회색빛 털을 가진 늑대는 꼭 해야만 하냐는 듯한 눈으로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지면을 박차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유리아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창 신이 난 유리아는 더욱 소리 높여 외쳤다.

    “자, 다 같이!”

    이미 수장인 회색 늑대까지 공중제비를 도는 상황이었다. 늑대 무리에 속한 늑대 십여 마리는 별다른 불만 없이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았다.

    늑대 십여 마리가 동시에 공중제비를 도는 모습은 경탄을 토하기에 충분했다. 스카자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잘하네. 정말 잘해. 언니 감동했어요.”

    “헤헤헤.”

    스카자하의 칭찬에 베시시 웃은 유리아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살짝 꼬았다. 언제까지 돌아야 하냐는 듯 헥헥 거리는 낑낑이의 신음을 듣고는 얼른 돌아서서 모두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루시아는 스카자하와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감탄을 토했다.

    [무척이나 강력한 군중 제어 능력이에요.]

    [아무래도 반복된 진화의 결과 크레이지 앤트 공주개미로서 가진 능력이 몬스터 테이머로서의 재능으로 승화된 것 같습니다.]

    몬스터 테이머는 단순한 조련사를 의미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에게 힘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역량 이상의 힘을 이끌어내는 자를 말했다.

    군락을 지배하는 크레이지 앤트 여왕개미의 능력이 몬스터 테이머의 재능으로 승화한 만큼 유리아가 가진 힘은 꽤나 강력했다.

    진화의 권능은 용호의 무의식을 반영했다. 진화를 반복한 결과 유리아는 더 이상 크레이지 앤트의 공주개미라 할 수 없었다. 여왕개미가 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할 터였다. 이미 너무 많은 부분이 ‘인간화’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왕개미가 되는 대신 강력한 군중제어 능력을 손에 넣었다. 이 능력을 잘 활용한다면 크레이지 앤트 군락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단을 이끌 수도 있었다.

    [기특하죠?]

    루시아는 1층 생명의 정원과 8층 보물고를 동시에 보았다.

    8층, 정확히는 8층과 9층을 잇는 계단 위에 서 있던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의 말대로 기특했다. 가슴 한 구석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게 딸바보들의 마음인가?’

    저도 모르게 키득 웃은 용호는 유리아에 관한 일들을 일단 머릿속에서 치워두었다. 지금은 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격노의 왕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일주일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투기장에서의 수련과 더불어 충분한 휴식을 가진 용호는 예속 사역마 전원을 이끌고 9층으로 향했다.

    전갈좌, 대지를 질타하는 대마법사 마그나돈.

    그의 이명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몬의 마법사인 그는 당대 최고의 마법사였다.

    9층은 8층과 그 구조가 꼭 닮아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여러 빈 방들을 점령하고 있는 던전 몬스터들의 종류 정도가 다였다.

    던전 몬스터들을 문자 그대로 쓸어버리며 전진한 용호 일행은 오래지 않아 커다란 문앞에 당도했다. 8층과 비교하자면 보물고의 입구라 할 수 있을 곳이었다.

    [주인이여, 잠시 발걸음을 멈추라.]

    [오랜 친구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몬의 목소리는 용호뿐만 아니라 예속 사역마 전원에게 전달되었다. 용호는 아몬의 말대로 멈춰 서서 커다란 전갈이 양각된 강철 문을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아몬이 말한 기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일곱 가지 색의 마력이 강철 문 앞에서 소용돌이 쳤다. 한 데 뭉친 마력은 곧 원형이 되었고, 이내 다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실체가 아니었다. 3층에서 나타났던 엘룬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마법에 의해 남겨진 분신이었다.

    대마법사 마그나돈.

    그는 마치 전갈을 의인화 시킨 것 같은 존재였다. 붉은 망토로 전신을 거의 가리고 있었지만, 망토로도 모두 가리지 못한 크고 우람한 꼬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구릿빛 피부 위에 하얀 수염이 난 그의 머리는 눈동자의 구분 없이 눈이 통째로 붉은 색이라는 것 외에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다.

    반투명한 마그나돈의 분신은 아몬이 처음 말했던 것처럼 다짜고짜 공격마법을 날리지 않았다. 그는 용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침내 주군의 계승자가 나타난 것인가. 참으로 길었군.”

    [마그나돈.]

    용호의 바로 옆으로 홍련의 불길이 일어났다. 평소 침착한 아몬조차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그나돈은 분명 마지막 그날 살아있었다. 죽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째서 본인이 아닌 분신이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마그나돈은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눈으로 홍련의 불길을 보았다. 씩 웃으며 부름에 대꾸했다.

    “그래, 아몬. 난 이미 죽었다. 탐욕의 미궁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서 기력이 다 쇠하고 말았지.”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몬이 무어라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아몬 이 친구야, 그런 표정 짓지 말게. 탐욕의 미궁을 통째로 옮긴 것이 누구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더불어 미궁과 우리 12 사역마들을 유지한 것도 말이야. 그렇잖아도 부상이 심했던 나일세. 이 정도로 큰 힘을 썼으면 죽는 것이 순리에 맞겠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껄껄껄 홀로 웃기까지 하더니 시선을 홍련의 불길에서 용호에게로 돌렸다. 간단히 목례로나마 예를 표했다.

    “인사가 늦었구려. 나는 주군의 마법사인 마그나돈이라 하오.”

    “마몬 가의 현 가주 천용호다.”

    용호가 스스로를 밝히자 마그나돈은 잠시 뜸을 들이듯 눈두덩이를 움직였다. 용호의 곁에 다소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선 카이완까지 돌아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새로운 탐욕의 왕. 그렇다면 주군의 계승자가 분명하군. 하지만 천 년도 넘게 걸릴 줄이야. 그래도 안배가 통했다고 봐야 하려나. 어찌되었든 계승자가 나타났으니 된 것이겠지.”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거린 그는 아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용호와 카이완에게도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두 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이다. 이 문 안쪽에는 내가 만든 마법 함정들이 가득하오. 실로 제작자의 악의가 느껴지는 함정의 연속이지.”

    악의 운운하며 킬킬 웃는 것이 영락없이 사악한 마법사였다. 마그나돈은 하얗고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방 끝에는 함정들을 제어할 수 있는 제어장치가 있소. 그리고 그 너머에는 9층의 진정한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관제소가 있다오. 이것이 내가 계승자를 위해 준비한 시련이오. 그리고 분명 아몬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 쓸데없이 관제소 따위에 무에 그리 공을 들인단 말인가! 쯔쯔, 그래서 자네가 안 되는 거라네, 아몬. 관제소는 자네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장소라네.”

    혼자 북치고 장구치듯 연달아 말을 쏟아냈다.

    마그나돈은 중요함을 강조하듯 용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과거 주군께서 구축하신 ‘네트워크’는 비단 그분의 휘하 던전들만을 포함하지 않는다오. 주군의 네트워크는 마계 전역에 이르렀지.”

    중요한 말이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던 말의 홍수 사이에서 홀로 단단한 바위와도 같았다.

    용호의 표정을 읽은 마그나돈은 다시 웃었다. 만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소. 네트워크의 많은 부분들이 무너졌을 터이고, 마계 곳곳에 세워둔 공간의 문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는 곳 역시 많을 것이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곳들이 있소. 이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하오.”

    용호가 처음 기대한 것은 단지 휘하 던전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공간의 문이었다.

    그런데 마그나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말대로 공백지 너머 다른 곳으로까지 네트워크가 이어져 있다면.

    마그나돈은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깊이 숙이는 예를 표한 뒤 연극풍의 손짓으로 강철 문을 가리켰다. 도발하듯 말했다.

    “내가 만든 역작, 부디 가볍게 뚫어 주셨으면 하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의 시선이 강철 문으로 향했다. 양각된 전갈이 마그나돈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고, 이내 강철 문이 개방되었다.

    &

    “필살! 와이프 실드!”

    “용호 너어어!”

    < 제 62장 - 전갈좌의 마그나돈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