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84화 (184/227)
  • < 제 61장 #2 >

    &

    죽음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마력의 강약을 초월해 산자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야기하는 힘이었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은 이러한 죽음의 기운을 알고 있었다. 본 드래곤이나 여타 언데드들이 발산하는 힘과는 질 자체가 다른 진정한 죽음의 기운을 마주한 바가 있었다.

    염소좌, 학살의 악마 바포메트.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이자 이계에서 온 죽음의 화신.

    누군가가 마른 침을 삼켰다. 용호 역시 그러했다. 긴장 섞인 눈으로 스컬을 바라보았다.

    덩치가 좀 더 커졌다. 검은 장송곡과 합체한 리치가 가지고 있던 날카로움이 인상에 묻어났다.

    보랏빛 불꽃에 휩싸인 해골 사이에 자리한 안광은 은은했다. 한순간 번쩍이는 대신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은 불길이었다.

    “스컬?”

    용호가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아주 약간이지만 검은 장송곡에게 스컬이 먹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예속 사역마들 역시 집중했다. 용호를 중심으로 하여 이어진 연결이 세차게 요동쳤다.

    스컬이 대답했다.

    “스컬스컬. 스컬컬.”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에는 웃음기까지 섞여 있었다. 방안에는 아주 잠깐 침묵이 감돌았고, 이내 미소가 연이어졌다. 용호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스컬이었다. 바포메트의 죽음을 계승하고 리치와 마검의 힘을 취해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능가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스컬스컬인가.’

    반가웠지만 아주 약간 아쉽기도 하였다. 이번에야말로 스컬이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이다.

    “잠깐. 스컬스컬?”

    용호가 눈을 깜박였다. 귀와 꼬리를 파닥이며 좋아하던 카타리나 역시 불현듯 깨달았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스컬을 보았다. 카이완이 입술을 열었다.

    “평소랑 다르게 들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스컬스컬.”

    스컬이 다시 말했고, 예속 사역마들은 새로이 놀라움을 표했다.

    분명 그냥 스컬스컬이라 말하고 있었는데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스컬스컬이라는 음성과는 별도로 머릿속에 직접 의미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왜들 그렇게 놀라는가. 나는 평소와 같다- 대충 그런 의미였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이 다시금 당황하자 이번에는 스컬이 당황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재차 목소리를 내었다.

    “스컬컬?”

    주인이여?

    “오, 맙소사.”

    용호가 감탄했다. 티그리우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강력한 텔레파시입니다. 리치와의 결합으로 인해 소서리- 타고난 마법의 힘을 깨우친 것 같습니다.”

    “소서리?”

    “산술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의지와 타고난 힘에 의존해 발하는 마법을 의미합니다. 초능력이나… 가주님이 불꽃을 부리시는 것과 비슷하죠.”

    용호도 마계에 온 이래 몇 번인가 마법을 공부해본 적이 있기에 티그리우스가 말하는 ‘산술적’인 마법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과연.’

    스컬이 산술적으로 계산해가며 마법을 쓰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냥 본능에 따라 초능력을 발하는 것이 훨씬 더 스컬다웠다.

    “스컬, 어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겠어?”

    용호의 물음에 스컬은 눈을 깜박이듯 안광을 점멸시켰다. 약간의 시간을 둔 뒤에야 대답했다.

    “스컬스컬. 스컬컬.”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지 알 것만 같다-

    스컬의 오른손에서부터 보랏빛 불꽃이 일어났다. 불꽃은 이내 번개로 화하였고, 용호는 그것이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번개임을 간파했다.

    매직 나이트가 되었을 때 스컬이 손에 넣은 번개 마법.

    스컬은 용호가 불꽃을 다루듯이 번개를 자유롭게 다뤘다. 이내 허공에 흩어버린 뒤 새로운 불꽃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죽음의 기운이 어려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좀 전의 번개가 산 자를 죽이는 힘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힘이었다.

    “단순히 리치의 마법을 가진 데스나이트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존재가 분명합니다. 가히 언데드의 왕- 결코 과장된 칭호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잔뜩 흥분한 티그리우스가 쏟아내듯 말했다. ‘노 라이프 킹’이라는 칭호를 떠올린 용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찌하여 저렇게 강대한 존재로 거듭났음에도 스컬은 제대로 된 말을 하는 못하고 스컬스컬거리는 것일까?

    ‘이거 혹시 나 때문인가?’

    진화의 권능은 용호의 힘이었다. 때문에 사역마들이 경험하는 진화는 용호의 무의식을 반영했다.

    카타리나의 귀와 꼬리가 진화 이전보다 더욱 더 파닥거리기 좋게 변한 것이나 살라미의 등 뒤에 손잡이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용호는 잠시 유창하게 말하는 스컬을 떠올려 보았고, 이내 무지막지한 어색함을 느꼈다. 역시 스컬은 스컬스컬거려야 스컬이었다.

    용호의 마음을 알았는지 스컬이 언제나처럼 껄껄껄 웃었다. 스컬컬 웃음소리가 정겨웠다.

    “합체 진화도 합체 진화지만… 합체 강화도 정말 놀랍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잘 믿기지가 않는군요. 아티펙트의 힘을 사역마에게 부여하다니....”

    엘리고스가 감탄을 표하자 티그리우스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노신사에서 마법사로 돌아온 그는 스컬이 검은 장송곡의 핵심적인 힘을 모두 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카이완이 용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전에 말한 것처럼 난 최소한 드래곤 하트가 아니면 안 돼. 아니, 드래곤 하트 구해서 합체 강화시켜줘. 그렇게 해줄 거지?”

    합체 강화는 아티펙트가 가진 힘을 사역마에게 부여할 수 있었다. 카이완이 조르는 것처럼 드래곤 하트를 구해 합체 강화할 수 있다면 실로 놀라운 마력뿐만 아니라 드래곤 특유의 힘들을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드래곤 브레스나 드래곤 피어, 용언 마법 같은 것들 말이다.

    합체 강화는 언데드나 골렘 같은 일부 사역마들만 가능했던 합체 진화보다 훨씬 더 다양한 조합이 가능했다. 용호는 문득 떠오른 듯 다시 아몬에게 물었다.

    “아몬, 12 사역마들도 모두 합체 강화를 했나?”

    [그런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노파심에 미리 말하자면, 난 창과 합체 강화를 하지 않았다.]

    [내가 창이 된 것은 마몬 님의 의지가 아니었다.]

    카타리나가 움찔했다. 아몬이 언급한 것처럼 창과 합체 강화를 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몬은 마치 미소 짓듯 은은한 불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주인이여, 사역마마다 합체 강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다.]

    [허나 그렇다하여 아끼기만 했다가는 오히려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게임에서도 후반부에 찍을 스킬을 위해 스킬 포인트를 아끼기만 하면 그 과정이 몇 배나 어려워졌다. 하물며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라면 아예 그 후반부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스컬은 합체 강화를 한 리치와 합체 진화를 함으로써 검은 장송곡의 힘을 손에 넣었다. 즉, 스컬에게는 여전히 합체 강화의 기회가 남아있는 셈이었다.

    ‘이번 같은 편법도 가능해. 다시 한 번 합체 진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치를 모으려면 한 세월이겠지만.’

    마몬 가의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진화를 경험한 스컬이었다. 아마 이제는 진화 숙련치 쌓이는 속도가 아몬과 필적할 터였다.

    하지만 용호는 흐뭇함을 느꼈다. 스컬에게는 여전히 성장의 여지가 있었다. 스컬에게는 아직도 다 풀지 못한 잠재력이 남아 있었다.

    용호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지킨 마몬의 무기고에 들어있는 아티펙트들을 떠올려 보았다. 예속 사역마들과 합체 강화하면 좋을 것 같은 아티펙트들이 연달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 모든 와중에 가만히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살피던 카타리나가 질문하는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아몬 님, 스컬이 12 사역마 분들의 힘을 계승한 것처럼 저도 엘룬 님의 힘을 계승할 수 있을까요?”

    합체 강화와 스컬의 성장에 모두가 놀라 잠시 잊고 만 사실이었지만, 기실 앞의 두 가지 이상으로 중대한 일이었다.

    바포메트의 죽음이 스컬을 계승자로 삼았다. 스컬에게 죽음의 정수를 전달해 주었다.

    12 사역마들의 정수는 용호의 마장 안에 잠들어 있었다. 이미 죽은 엘룬이나 아스클레피오스의 힘도 그러했다.

    그 힘을 이어받는다.

    마몬의 12 사역마의 올곧은 계승자가 된다.

    콕 집어 엘룬을 언급하는 카타리나의 모습에 아몬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기꺼움을 감추지 않고 답했다.

    [가능하다.]

    [특히 너는 그 본질이 엘룬과 무척이나 닮았으니까. 네가 자격을 갖춘다면, 엘룬의 힘인 ‘정의’는 너를 택할 것이다.]

    아몬의 말에 카타리나는 뺨을 살짝 붉히며 좋아했다. 천천히 파닥 거리는 귀와 박자를 맞추듯 꼬리가 살랑거렸다.

    카이완이 키득 웃었다.

    “신생 12 사역마인가? 구세대와 신세대가 뒤섞인. 용호의 12 사역마도 꽤 괜찮은데?”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용호의 일곱 예속 사역마에는 마몬의 사역마였던 아몬이 속해있었고, 앞으로 구시온과 스카자하 역시 용호의 곁에 설 터였다.

    “좋아, 그렇기 위해선 역시 일단 9층을 공략해야겠지. 팍팍 치고 나가자고.”

    용호가 짐짓 힘차게 말하자 카이완이 찡긋 윙크했다.

    “알아 모실게요.”

    “저도.”

    “스컬컬.”

    카타리나가 슬쩍 끼어들자 스컬은 대놓고 끼어들었다. 용호는 이번에도 끼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엘리고스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를 포함한 모두에게 명했다.

    “일단 오늘은 쉬자고. 내일부터 다시 빡세게 굴러야 할 테니까.”

    카디스 요새를 정상화하고 식탐의 왕의 영토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일단 9층을 손에 넣어야 했다. 당장 눈앞의 적인 식탐의 왕이 사라지고, 격노의 왕이라는 강력한 우군이 생겼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은 마몬 가였다.

    용호의 명을 받은 모두가 해산하는 가운데 카이완이 용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용호야.”

    “응?”

    “나랑 격노의 왕이랑 카타리나 중에 누가 더 예뻐? 아니, 아름다워?”

    다분히 격노의 왕과의 정상 회담 중 나왔던 실언을 의식한 말이었다. 카이완은 가늘게 웃었고, 카타리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용호는 점점 가늘어지는 카이완의 두 눈을 마주하는 대신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 한 뒤 슬쩍 돌아섰다. 카이완이 여전히 팔에 매달린 상태였지만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카이완은 용호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고, 카타리나는 얼른 용호의 곁에 따라붙었다. 스컬이 용호를 대신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스컬컬.”

    이번에는 텔레파시도 전해지지 않았다. 용호는 스컬이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는 대신 여전히 스컬스컬 거린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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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탐의 왕이 사망한 지 벌써 스무 날이 넘게 지났다.

    권력의 중핵인 십인중까지 모두 증발한 가운데 집사장인 오를란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었다. 그는 남은 권력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맹하다 할 수 있을 국경을 지키는 세 가주에게 앞으로의 일을 부탁하였다.

    세 가주는 집사장 오를란도의 바람대로 식탐의 왕의 자식들 가운데서 적당한 후계자를 선출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당분간 식탐의 왕의 죽음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에도 이견이 없었다.

    집사장 오를란도는 안심했다.

    그리고 세 가주는 오를란도 없이 따로 자리를 가졌다. 평소 식탐의 왕 밑에서 공적을 놓고 다투던 세 사람이었지만, 막상 식탐의 왕이 사라지고 나니 신기할 정도로 뜻이 잘 맞았다.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부질없었다.

    식탐의 왕의 자식들 가운데 식탐의 죄악을 가진 자는 없었다.

    마계에는 오직 여섯 개의 나라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 숫자는 여섯 왕의 숫자와 같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간단했다. ‘왕’ 없이는 국가가 존속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세 가주는 식탐의 왕의 영토를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싸워 새로운 정점이 되겠다는 야망도 품지 않았다.

    누구에게 자신과 던전과 사역마들을 바칠 것인가. 누구에게 파는 것이 가장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세 가주의 뜻이 통하는 것도 당연했다. 식탐의 왕 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세 가주 같은 기질을 가진 자들뿐이었다.

    식탐의 왕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모르는 지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오를란도의 뜻을 받아주며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미리 의견을 교환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세 가주는 어떤 왕에게 투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지를 화두로 삼았고, 이번에도 서로가 놀랄 정도로 뜻이 통하였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세 가주의 시선이 마계 전도의 한 지점에서 하나가 되었다.

    &

    마계의 하늘은 붉었다.

    그리고 그 붉은 하늘 아래 진홍이 날개를 펼쳤다.

    폭력의 왕.

    드래곤들 가운데서도 가장 거대하며, 가장 강력한 지고의 존재.

    그는 자신의 레어에 있지 않았다. 마계의 존재들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하지만 마계에서 가장 중요한 땅 위에 서 있었다.

    탐욕의 신기에 남은 마몬의 기억이 확인시켜주었다.

    이 땅이었다. 이곳에서 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이 숨을 거두었다.

    폭력의 왕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이어진 계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천 하고도 수백 년. 이미 모두 종결된 과거의 사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마계를 구하고 배신자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사라진 남자.

    폭력의 왕은 고개를 높이 들었다. 하늘을 우러르며 나직한 목소리를 토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거센 바람이 나태의 왕이 알려준 진실을, 폭력의 왕의 목소리를 흩어 놓았다.

    폭력의 왕은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다. 마몬의 마지막 숨결이 머물렀던 땅을 뒤로 한 채 날아올랐다.

    푸르지 않은, 그리고 결코 푸르러서는 안 되는 마계의 붉은 하늘을 가로질렀다.

    제 61장 - 합체 강화 끝, 제 62장 - 전갈좌의 마그나돈으로 이어집니다.

    < 제 61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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