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5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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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왕은 자신의 레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세 시간 전.
여덟 번째 예속 사역마 탐쿠루쿠가 남긴 최후의 전언이었다.
식탐의 왕은 탐쿠루쿠의 소멸을 인지했다. 전언을 전달받고 약 십여 분 뒤에 그와 관련된 모든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필멸의 땅으로 화한 폭력의 왕의 레어에 직접 침투해 천금과도 같은 정보를 얻어낸 충직한 부하였다. 사실상 목숨을 내건 임무임을 알면서도 군말 없이 떠났고, 끝내 임무를 완수 해냈다.
식탐의 왕은 탐쿠루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야기한 폭력의 왕을 저주했다.
일반적인 가주들에게 있어 예속 사역마의 죽음은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식탐의 왕에게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일곱 개의 대죄- 칠대죄악은 저마다의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탐욕’이 일반적인 마왕들보다 더 많은 예속 사역마들을 휘하에 둘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식탐의 왕이 보유한 ‘식탐’은 한 번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지 ‘소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예속 사역마를 들임에 따라 얻은 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가주가 예속 사역마를 잃었을 때 함께 잃는 마력의 상대치를 100이라 가정한다면 식탐의 왕은 그보다 훨씬 더 적은 20에서 30정도의 마력만을 잃었다.
식탐이 가진 여러 능력들 가운데 하나이자, 식탐의 왕이 다른 왕들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예속 사역마들을 소모하거나 물갈이 할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예속 사역마였다. 자신의 수족이 끊긴 것 같은 통탄함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식탐의 왕은 생각했다.
폭력의 왕은 현재 자신의 레어에 머물고 있다.
용 군단은 국경 지대에 대기 중이다.
격노의 왕의 군대는 폭력의 왕과 어떤 동맹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 오직 북부와 동부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북부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기회는 지금 뿐이다.’
식탐의 왕은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 생각을 버렸다.
남부의 농사는 이제 충분했다. 탐스럽게 익은 과실을 취할 때였다.
식탐의 왕은 자신의 최정예 친위대인 십인중을 생각했다. 예속 사역마 여덟과 일반 사역마 둘로 이루어진 이들은, 하나하나가 일인군단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엠브리오는 십인중 가운데 최소 중위권에 오를만한 실력자였다.’
물론 엠브리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전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숨겨두었을 저력을 최대치로 쳐주어도 십입중 중상위권 이상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십인중 가운데 중상위권만 해도 굉장한 힘이었다. 뿔 다섯 개, 그중에서도 중위권 이상의 마력을 가진 존재는 드넓은 마계에서도 무척이나 드물었으니 말이다.
남부 공백지의 왕- 저 마몬 가의 가주는 그런 엠브리오를 꺾었다. 남부 공백지 동부의 패자인 스트라바디 또한 흡수했을 터이니 십인중 가운데 상위권이라 쳐도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머릿속으로 대강의 계산을 끝마친 식탐의 왕은 손가락을 놀렸다.
십인중을 집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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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인중의 수장인 소환술사 사브나크는 주군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수백 년 전 마계에 불시착한 이계 출신의 마법사인 그는 강대한 마력을 가진 미라- 리치가 되는 길을 택함에 따라 마계의 존재로 거듭났다.
그는 식탐의 왕이 거두어들인 예속 사역마들 가운데서 최강인 동시에 가장 오랜 삶을 살아온 자였다.
미라가 되었지만 그의 자랑인 매부리코는 여전하였다. 황금으로 치장된 신관 복을 걸치고 뱀의 형상을 한 지팡이를 짚고 선 그는 지면을 주시했다.
새와 짐승과 악마의 머리를 가진 괴수 트라이곤의 등 위에는 십인중 가운데 일곱이 자리했다. 어디까지나 사브나크 자신의 계산일뿐이었지만, 힘의 평균치만을 논한다면 엠브리오 대 여섯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더욱이 그 일곱에는 소환술사인 자신뿐만 아니라 엘더 리치인 비프로스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수백 이상의 정병들을 소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 정도면 던전 하나에 투자하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주군이신 식탐의 왕께서는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철저하셨다.
비프로스트의 품에는 공간 도약의 문을 설치할 수 있는 스크롤이 들어있었다. 외부로부터의 마력 흐름을 자연스럽게 차단하는 던전의 특성상 제대로 된 공간의 문을 만들어내는 데는 몇 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터였지만 그 정도 시간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군께서는 명하셨다.
십인중만의 힘으로 부친다는 판단이 서면 즉시 공간의 문을 설치하라. 문을 통해 내가 직접 강림할 터이니.
주군의 명령은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더욱이 근 몇 년을 통틀어 가장 무거운 명령이었다. 사브나크는 솔직히 긴장하였다. 평소 엠브리오를 높게 평가하고 있던 그였기에 마몬 가의 가주를 더욱 경계하였다.
허나 그것도 출발했을 당시만의 이야기였다. 왕의 땅을 떠나 남부 끝을 향해 날아오는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법의 힘을 빌려 초고속으로 기동하는 소환수를 포착하거나 비행 자체를 방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가주라면 방비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상대는 명색이 남부 공백지의 왕이었다. 초고속 비행 마법을 저지하는 마법장은 고사하고 포착하는 수단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은 실망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지면에서 던전 미어 캣들이 뻘뻘 거렸다. 이쪽을 주시하는 놈도 있었고, 서둘러 굴속에 몸을 숨기는 놈도 있었다.
가장 기초적인 던전 방비 시스템을 통해서야 겨우 자신들의 침공을 인지했다는 증거였다.
웬 개머리 괴물이 소녀를 어깨에 메고 급히 던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 역시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부로 사라질 던전이었다.
트라이곤이 지면에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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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미어 캣들의 경보는 즉각 마몬 가 전역에 전달되었다.
던전 수비를 담당하는 수비대장 리쿰은 블랙 오크 전대에게 무장 명령을 내렸다. 5분 대기조에 속해 있던 오크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움켜쥐고 방어지를 향해 달렸다.
집사보 준은 비전투 사역마들의 대피를 지휘하기 위해 복도로 뛰어나갔다. 고블린 레인저의 나머지 삼인인 존과 론, 욘이 그런 준을 호위했다.
경보가 울린 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리고 트라이곤이 마몬 가의 던전 앞에 착지했을 때, 마몬 가 사역마들의 머릿속으로 새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 시간부로 마몬 가는 특수 방어 태세에 들어갑니다.]
[사역마들은 모두 정해진 방침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전합니다.]
[현 시간부로 마몬 가는 특수 방어 태세에 들어갑니다.]
루시아의 명령이었다.
대부분의 사역마들은 특수 방어 태세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비대장인 리쿰과 집사보인 준은 달랐다. 두 사람의 얼굴에 한 층 더 짙은 긴장의 빛이 어렸다.
특수 방어 태세는 1층의 방어 시설 대부분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1층의 전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전력이다.
시간 벌이 외에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특수 방어 태세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만 발동했다.
리쿰은 즉각 블랙 오크 전대에 내린 명령을 수정했다. 이미 방어지로 출발한 병력은 물론이고 방어 태세를 갖춘 오크들에게까지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 후 집결지는 1층이 아닌 지하 1층- 탐욕의 미궁 1층에 자리한 최종 집결지였다.
준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리쿰은 속이 바짝 타오르는 가운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작금의 마몬 가는 남부 공백지의 패자였다. 공백지 내에서 마몬 가를 이토록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지금 나타난 적들이 외부에서 온 자들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외부의 적들 가운데서 가장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적은 정해져 있었다.
리쿰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망상을 지워버렸다. 오직 명령에 충실키 위해 지면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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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어깨에 들쳐 업고 헐레벌떡 던전 안에 들어선 바둑이는 요란하게 울려대는 경보에 정신이 없었다. 더욱이 연이어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가 더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특수 방어 태세가 대체 뭐란 말인가?
분명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유리아랑 나눠 먹던 치킨 맛만 생각났다. 양념이 참 맛있었는데.
하지만 유리아는 조금 달랐다. 처음 던전에 들어설 때만 해도 바둑이와 마찬가지로 혼비백산했지만 - 얼결에 딸려온 새끼 던전 미어 캣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 머릿속에 울린 소녀의 목소리가 차이를 만들어냈다.
유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유리아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
[내 말 들리니?]
“루시아!”
이제는 확신했다. 머리 세 개 달린 괴수의 공포도 잊고 유리아가 반갑게 외쳤다. 갑작스런 유리아의 버둥거림에 깜짝 놀란 바둑이는 뒤뚱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새끼 던전 미어캣은 그런 바둑이의 머리 위에 우뚝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루시아가 연달아 소리쳤다.
[그대로 달려! 직진하다가 보이는 경사로를 따라 아래층으로 향하는 거야! 스카자하 언니의 정원 알지?]
“응!”
유리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손발을 놀려 허둥거리는 바둑이를 집중시킨 뒤 루시아가 알려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금방 유리아의 뜻을 알아차린 바둑이가 호응했다.
“왈왈!”
[달려!]
“응! 달려! 바둑아!”
유리아가 다시 손짓했다. 일단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자 바둑이는 혼란에서 벗어났다. 그간의 진화 성과를 뽐내기라도 하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몇 분 뒤, 유리아와 바둑이가 막 경사로에 접어들었을 때.
마몬 가 던전의 문이 열렸다. 십인중이 던전 안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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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나크는 고개를 들었다. 적이 침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천장의 조명을 노려보았다.
조명은 입구 방에서 그치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계속해서 이어졌다.
공중을 통해 침투하는 적에 대한 방비가 미비한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던전 방어의 기초라 할 수 있을 조명차단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기초가 허술하다 정도로 평할 일이 아니었다. 다른 곳도 아닌 가주 본인의 던전을 이토록 엉망진창으로 관리하는 자가 저 엠브리오를 꺾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는 의도된 것이라 봐야 할 터였다.
‘함정인가?’
어둔 복도 사이로 쭉 이어진 조명은 곧 안내판이기도 하였다. 이쪽으로 오라. 자신들의 인도를 따르라.
십인중 가운데는 성급한 자도 있었고 신중한 자도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엘더 리치 비프로스트는 사이한 붉은 안광으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냈다. 다소 마력 소모가 있더라도 지금부터 병력을 소환해 함께 나아가자는 뜻이었다.
사브나크도 동의했다. 미라 형태의 리치인 그는 손가락에 낀 반지 세 개를 매개체로 하여 세 무리의 마수들을 소환하였다.
하나 같이 던전 공략에 특화된 마수들이었다.
길을 찾고 적을 추적하는 데 유용한 헬 하운드.
함정을 파괴하는데 유용한 영체형 거인 마수 데우.
강력한 마법 저항능력과 재생력을 갖춘 식인귀 버그베어.
각각의 무리가 못해도 열은 되니 순식간에 복도를 채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프로스트는 품에서 꺼낸 뼛가루를 바닥에 뿌렸다. 뼛조각 하나하나로부터 스켈레톤 워리어가 소환되니 순식간에 스켈레톤 워리어 수십 마리가 갖춰줬다. 뼛조각을 매개로 소환한 객체였기에 제한 시간이 다하면 소진되는 일회용들이었지만 그렇기에 부담 없이 소모할 수 있는 강점도 있었다.
스켈레톤 워리어들 사이사이로 강력한 본 골렘들이 일어서는 것을 확인한 사브나크는 헬하운드를 필두로 재차 병력들을 진군시켰다.
< 제 55장 #2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