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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61화 (161/227)
  • < 제 55장 - 자각 >

    제 55장 - 자각

    폭력의 왕이 군세를 움직인 소식이 마몬 가에도 전해졌다.

    용호와 오필리아는 이 사실을 일단은 행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폭력의 왕이라는 실재하는 위협이 눈앞에 있는 지금, 식탐의 왕이 남부를 노릴 가능성은 낮았다.

    용호는 서둘지 않고 일을 하나하나 계획대로 진행시켰다.

    1층에 있던 생활 시설 전반을 탐욕의 미궁 1층으로 옮겼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에는 던전 방어 시설을 채워 넣었다.

    루시아가 위치한 심장 방은 탐욕의 미궁 5층으로 옮겼다. 루시아와 이제 막 친구가 된 유리아가 불쌍했지만 - 루시아도 많이 아쉬워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던전의 심장은 최대한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야 했다.

    던전 시설을 옮기고 방어 시설을 신설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용호는 그 시간동안 그간 미뤄두었던 사역마들의 진화를 단행했다.

    이번 원정으로 많은 성과를 거둔 스컬 부대에는 승급 대상자들이 많았다. 동기화 덕분에 스켈레톤 솔져가 워리어 급의, 스켈레톤 워리어가 나이트 급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스컬 부대인만큼 몇 번의 승급만으로도 부대 전체의 전투력이 크게 상승했다.

    일반적인 던전의 경우 던전이 성장해 더 강한 사역마를 들이면 기존의 사역마들은 버림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후에 들어온 사역마들보다 형편없이 약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화의 권능 덕분에 마몬 가에는 버림받는 사역마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던전의 성장과 더불어 던전의 사역마들 역시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녹색 피부 외에는 고블린이었던 흔적 자체가 거의 남지 않은 고블린 레인저들을 진화시킨 용호는 기지개를 쭉 폈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사역마들의 진화가 끝났지만 아직 일이 남아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쉬는 게 어때?”

    카이완이 옥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용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이완 말마따나 무리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또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용호는 부드럽게 카이완을 밀어내며 말했다.

    “시간은 금이니까.”

    “그렇다면야.”

    의외일 정도로 순순히 물러선 카이완은 다른 예속 사역마들 곁에 가서 섰다. 옥좌를 마주하고 횡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스컬 빼고는 다들 승급이 가능하네.”

    다들 마지막으로 승급을 한 게 벌써 꽤 옛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스컬의 합체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시트리가 적당한 네크로멘서 언데드를 구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스컬컬.”

    스컬이 괜찮다는 듯 껄껄 웃었다. 드래곤 본 나이트로 합체 진화한 지도 얼마 안 지났으니 너무 서둘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카타리나부터.”

    용호의 호명에 스컬 옆에 서 있던 카타리나가 쪼르르 걸어 나왔다. 카타리나의 기존 직위는 쉐도우 미스트레스. 용호는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카타리나를 쉐도우 퀸으로 승급시켰다.

    찬란한 녹색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선 카타리나는 외형적으로 크게 변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타리나 본인과 마력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용호는 현격한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외적으로도 은근한 차이를 눈치 챈 사람이 있었다.

    “흐음, 용호 취향이 저렇다 이거지. 나도 저렇게 변하겠지?”

    진화의 권능이 용호의 의도대로 외형을 변모시킨다는 것을 눈치 챈 이후로 틈만 나면 농담을 하는 카이완이었다. 카타리나 바로 다음 순서였던 엘리고스는 어째 불안한 얼굴이 되어 용호에게 다가섰고, 오필리아는 키득 웃었다. 입술만 움직여 용호에게 소리 없이 뜻을 전했다.

    “음, 그래. 그쪽으로.”

    용호가 자연스럽게 답하자 엘리고스가 움찔했다. 슬쩍 뒤를 돌아본 뒤 물었다.

    “승급…이 주가 되는 것 맞지요?”

    “걱정하지 마. 잘 해줄게.”

    긴장과 불안 속에 엘리고스의 승급이 진행되었다. 레드 데몬 타이런트에서 레드 데몬 제노사이더로 승급한 엘리고스는 가슴에도 털이 수북한, 야성미가 풀풀 넘치는 외형이 되었다.

    행복한 얼굴이 된 오필리아 이후로도 승급은 계속 진행되었다.

    오필리아는 레드 데몬 브레이커에서 레드 데몬 챔피언으로 승급하였고, 티그리우스는 위자드에서 워록으로 승급을 하였다.

    용호의 예속 사역마가 된 이후 진화는 해보았지만 승급 자체는 처음인 카이완은 농담을 늘어놓던 것과는 달리 제법 긴장한 얼굴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용호는 그런 카이완의 양 뺨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카이완이 싫은 소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소드 퀸에서 소드 엠프레스로 승급한 카이완의 머리칼이 조금 더 불꽃처럼 변했다. 스스로를 슥 훑어본 카이완이 까르르 웃었다.

    “부작용 하나 없이 전신 성형이라니… 나도 남자 복이 있나봐?”

    카이완을 애써 외면한 용호는 마지막으로 스컬의 진화를 고민했다. 진화와 승급을 거듭한 터라 예속 사역마들의 진화 숙련치 쌓이는 속도가 꽤 느려진 지금이었다. 시트리가 며칠 내로 네크로멘서 언데드를 구해준다고 했으니 일단은 진화를 미루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스컬스컬.”

    용호의 고민을 눈치 챘는지 스컬이 양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루자는 뜻 같았다.

    “좋아, 그럼 오늘은 다들 푹 쉬어. 내일 아침에 바로 탐욕의 미궁 6층 공략을 개시할 테니까.”

    용호가 선언했고 예속 사역마들은 저마다 자기들 방으로 이동했다.

    용호는 바로 일어서는 대신 옥좌에 앉아 잠시 오른팔에 팔찌 형태로 자리한 아몬을 바라보았다. 아몬이 5층 공략 직후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

    “무시무시한데.”

    6층을 점령한 던전 몬스터들은 4층이나 5층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우거들을 잡아먹고 사는 흰 털이 난 고릴라 형태의 괴수 레서 데몬들뿐만 아니라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 평범한 구울들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구울의 왕자 스트라고스들이 떼로 몰려 나왔다.

    하지만 카이완이 무시무시하다고 한 것은 던전 몬스터들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스컬과 동기화 상태로 던전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는 스컬 부대를 보고 한 말이었다.

    용호의 예상대로 5층의 마법 장비들로 무장한 스컬 부대는 실로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했다. 스켈레톤 나이트 이상의 존재들로 수백 단위의 부대를 구성한 것과 다름없었다.

    지치지 않는 언데드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스켈레톤 워리어 수천, 수만 마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전투력이었다.

    6층은 다양한 생활공간과 더불어 감옥, 고문실 등이 자리했다. 엘리고스가 관광 욕구를 강하게 드러냈지만 이 자리에는 엘리고스를 완벽히 컨트롤 가능한 오필리아가 있었다. 엘리고스도 경우를 아는 남자였고 말이다.

    엘리고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6층을 탐사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용호 일행은 마침내 7층으로 통하는 연결로 옆에 자리한 유호유안의 방에 도달했다.

    6층 공략을 위한 전투는 사실상 스컬 부대가 다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에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 모두 체력적으로 조금도 손실이 없었다. 용호에게 눈짓으로 명령을 받은 스컬과 엘리고스가 커다란 강철 문을 열었다.

    쌍둥이 좌, 음과 양의 유호유안.

    마몬의 12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특히 전해지는 이야기가 적은 인물들이었다.

    아몬은 두 사람이 엘룬이나 바루나와 마찬가지로 이미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안배를 남겨두었을 거라고도 했다.

    가로로 십 미터 남짓, 세로로는 이십 미터쯤 되어 보이는 방 안에는 이런저런 장난감이 가득했다. 지금까지의 다른 방들과 달리 이 방 자체가 생활공간이라도 되듯 침대를 비롯한 여러 가구들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용호가 가장 먼저 방 안에 발을 들였다. 그러자 방 끝에 위치한 의자 위에 은은한 빛이 어렸다. 과거 엘룬의 방에서 본 것과 거의 흡사한 빛 무더기가 한 데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었다.

    ““안녕.””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년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두 눈은 푸른 색이었다.

    소년 옆에 앉은 소녀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대비되듯 머리는 흑발이었고, 두 눈은 붉은 색이었다.

    둘 다 인형같이 예쁜 소년과 소녀였다.

    용호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소년과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몬을 들고 이 방에”

    “온 건 네가 처음이야.”

    소년의 말을 소녀가 완성시켰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말했다.

    “탐욕의 신기까지”

    “가지고 있구나.”

    마몬의 12 사역마 모두가 마몬 가의 가주들에게 전투와 관련된 시험을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과 소녀는 용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이 충분히 다가서자 말을 이었다.

    “굳이 번거로운 시험은”

    “필요하지 않겠지. 애당초 네가”

    “조화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험을 통과”

    “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

    어린 아이같은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두 사람 모두 지쳐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엘룬의 방에 존재하던 것과 같은 복사체.

    유호와 유안은 다시 한 번 용호에게 손짓했다. 자신들의 앞에 설 것을 요구했다.

    용호가 유호유안의 앞에 섰고, 둘은 용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어린아이다운 미소를 그렸다.

    “가주 님을”

    “닮았구나.”

    유호와 유안이 동시에 손을 들어 용호의 신기를 만졌다.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힘을 넘겨주었다.

    유호유안의 힘은 조화.

    아몬이 지금까지의 힘들과 달리 특히 중요하다 말했던 것.

    조화의 힘을 받아들인 순간 용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힘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호유안이 어째서 조화의 힘을 다루는 것 자체가 시험이 될 거라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용호는 조화의 힘을 발했다. 국소적으로 발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용호 스스로를 뒤덮었다. 자신의 모든 것에 조화의 힘을 행사했다.

    길을 잃을 것만 같은 방대함이었다.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용호는 그 사이에서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이내 친숙한 기운들을 찾아냈다.

    조화의 힘. 그것으로 어루만졌다. 다소 무질서하게 이어져 있던 힘들을 매끄럽게 연결시켰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크게 영향을 받은 부분은 예속 사역마들에 관한 것이었다.

    예속 사역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

    그 안에 자리하고 있던 예속 사역마들 각각의 영역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틈이 메워졌고, 차지하고 있던 영역 자체가 줄어들었다. 동부의 패자였던 스트라바디를 쓰러트렸을 때 확장되었던 영역이 보다 큰 여유 공간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충분하다 할 수 있었다. 조화의 힘을 다시 한 번 발한다면 말끔히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용호는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시간 같기도 하였고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였다.

    용호는 돌아섰다. 예속 사역마들을 보는 대신 손을 들어올렸다. 홍련의 마창을 손에 쥐었다.

    “아몬.”

    [나의, 주인이여.]

    더 이상의 문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용호는 아몬의 예속 사역마 화를 선언했다. 아몬은 용호의 뜻을 수락했다.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였던 그가 마침내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홍련의 마창으로부터 새빨간 불길이 일었다. 용호의 머리에 다섯 개의 뿔이 돋아났다. 거칠게 포효하며 마력을 발산했다.

    예속 사역마들 또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현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막대한 마력의 홍수를 느꼈다.

    아몬.

    홍련의 마창.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필두라 할 수 있을 존재!

    용호가 단숨에 벽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벽을 뛰어넘었다. 용호의 머리 위에 여섯 번째 뿔이 새로이 돋아났다.

    아몬의 불길은 멈추지 않았다. 홍련의 불꽃은 이내 녹염으로 화하였고, 녹염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예속 사역마들을 휘감았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티그리우스에게 다섯 번째 뿔이 돋아났고, 스컬의 전신으로부터 웅장한 용의 힘이 발산되었다.

    유호와 유안은 녹염 속에서 미소 지었다. 용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옛날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왕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마침내 돌아오신”

    “탐욕의 왕이시여.”

    유호와 유안이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용호로부터 다시 한 번 막대한 마력이 용솟음쳤다.

    &

    격노의 왕은 친필로 작성한 서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책상 한 편에는 쓰다 구겨버린 서신이 한 가득이었다.

    “좋아. 이 정도가 딱 적당해.”

    옆에서 오두방정을 떠는 키르티무카를 밖으로 내보낸 보람이 있었다. 서신 안에는 친선 교류를 시작해보자는 내용이 정중한 어조로 적혀 있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그쪽도 당황할 테니까.’

    격노의 왕 자신도 그렇고.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격노의 왕은 서신을 봉했다. 문 밖에서 오매불망 대기 중인 키르티무카를 불렀다.

    &

    유리아는 던전 미어 캣들에게 먹이를 나눠주었다. 겨우 생긴 또래 친구가 먼 곳으로 이사 가 버려서 우울했지만 그래도 울적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유리아 자신에게는 바둑이도 있었고, 이렇게 재롱을 부리는 던전 미어 캣들도 있었으니까. 친구 하나 없는 먼 곳으로 이사 간 아이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유리아의 울적함을 눈치 챈 던전 미어 캣들이 평소보다 더 재간을 불렸다. 새끼 미어 캣들이 목 위로 기어오르며 간지럼을 태우자 유리아는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유리아는 밥 주던 것도 잊고 던전 미어 캣들과 바닥을 구르며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연 어른 미어 캣들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두 마리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미어 캣들이 그랬다. 유리아의 몸 위에서 놀던 새끼 미어 캣들 역시 몸을 꼿꼿이 세우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왈왈.”

    바둑이도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가리켰다. 유리아는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새끼 미어 캣을 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저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하늘을 달려오고 있었다.

    새와 짐승과 악마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괴수.

    식탐의 왕의 군세였다.

    &

    ‘폭력의 왕은 드래곤 레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 제 55장 - 자각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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