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63화 (163/227)
  • < 제 55장 #3 >

    생각 이상으로 죽 곧은길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겨우 몇 번의 코너가 있을 뿐, 흔해빠진 함정이나 첨병조차 없었다.

    이 정도로 경계가 해이하면 오히려 긴장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더욱이 머리 위의 조명이 사브나크의 신경을 계속 거슬렀다.

    첨병으로 내세운 헬 하운드가 크게 짖어 자신 쪽을 돌아보게 했다. 사브나크가 보니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옆으로 이어진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향하는 경사면이었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경사로 쪽에만 조명이 있었다.

    십인중 사이로 시선이 오갔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의사를 교환한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수장을 바라보았고, 사브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사브나크는 마몬 가의 이 모든 기만이 그저 허세가 아니길 바라며 힘을 개방하였다.

    여섯 개에 근접한 힘을 가진 다섯 개의 뿔.

    사브나크에 이어 나머지 여섯 예속 사역마들도 연달아 마력을 개방하였다. 가장 약한 자 조차도 뿔의 개수가 다섯 개였다. 진정 던전 하나에 투자하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연달아 힘을 발한 예속 사역마들의 기세에 놀란 소환수들이 평정을 되찾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예속 사역마들로부터 가장 멀리 있었던 만큼 회복도 빨랐던 헬 하운드들이 이번에서 앞장서서 경사로로 향했다. 연이어 비프로스트가 추가로 소환한 언데드 군단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경사로를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고작해야 일에서 이 분 남짓을 내려갔을 뿐임에도 이변이 일어났다. 검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흐릿한 조명 대신 밝고 찬란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눈앞에 풍성한 곡창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황금빛으로 여문 벼들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였다. 한편에서는 향긋한 과일 향내가 바람을 따라 전해졌다.

    아름답고 가슴 한편이 따스해지는 광경이었지만 작금의 광경에서 식탐의 왕의 군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강한 위화감뿐이었다.

    헬 하운드들이 머뭇머뭇 곡창 지대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네크로멘서답게 칠흑의 로브를 깊게 눌러 쓴 비프로스트는 초조함을 드러내듯 연달아 스켈레톤 워리어들을 소환했다.

    그가 소환한 스켈레톤 워리어만 해도 벌써 삼백이 넘어섰다. 아무리 일회용이라 해도 이 정도면 마력과 재료의 소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비프로스트는 이유 모를 부족함을 느낄 뿐이었다.

    도합 사백에 가까운 인원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곡창 지대의 드넓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광대한 영역이었다.

    식탐의 왕 휘하에서 수많은 던전을 보아온 사브나크였지만 이런 던전은 처음이었다. 던전 내에서 하늘과 태양은 물론이고 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마몬 가의 병력들.

    사브나크는 새로운 소환술을 준비했다. 비프로스트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의 문 스크롤을 왼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가장 앞서 나가던 헬 하운드 한 마리가 정원 한 가운데 위치한 호숫가에 다다른 그때.

    사방에서 생명의 기운이 몰아쳤다. 죽음에 속한 언데드 몬스터인 사브나크와 비프로스트가 순간 혼미함을 느낄 정도로 막대한 생명의 힘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풍경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무 것도 없던 호수 한 가운데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푸른 물빛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환한 미소로 십인중을 맞이하였다.

    “탐욕의 왕의 정원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저 짧은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십인중이었다. 식탐의 왕의 심복들이었고, 그렇기에 남부 공백지의 왕이 가졌을지 모를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막대한 생명의 힘을 발산하는 푸른 물빛 머리칼의 여인.

    그녀가 언급한 탐욕의 왕.

    순간 머릿속에서 맞물리는 것이 있었다. 십인중 가운데 하나인 칠흑의 아크 데몬 지멘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불사의 마녀 스카자하! 마몬의 12 사역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12 사역마는 모두 죽었다. 마몬과 함께, 저 탐욕의 미궁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이미 천 년이 넘었다!

    하지만 사브나크는 즉각 지멘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는 목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딱 거기까지에 불과했다. 사브나크는 지멘스의 말을 긍정하는 자신을 느꼈다. 정신적인 서늘함을 느끼며 재차 여인을 돌아보았다.

    푸른 머리칼의 여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의 의미는 지금까지와 달랐다.

    “숙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란다, 애송아.”

    그녀가 손을 놀렸다. 생명의 정원은 정원사의 명령에 복종했다. 단숨에 솟아난 수십 그루의 거목들이 십인중의 배후에 위치한 경사로를 틀어막았다.

    사브나크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소환술을 발하기 위해 스스로의 손가락을 잘랐다. 비프로스트는 공간의 문을 열기 위해 스크롤을 들어올렸다. 나머지 십인중들 역시 저마다의 전투 태세를 갖췄다.

    나물랄 데 없는 신속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마몬 가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정원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 사이로 보랏빛 어둠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향기가 독기처럼 번졌다.

    그런데 신묘한 일이 일어났다. 상극임에 분명한 생명과 죽음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보듬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한 이적이 순간이나마 사브나크와 비프로스트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 시선의 한 가운데에 죽음의 화신과도 같은 해골 기사가 서 있었다. 칠흑의 마수 위에 올라탄 그가 죽음의 힘을 발산했다. 마치 드래곤 피어와 같은 그것은 이미 죽음의 영역에 속해 있는 스켈레톤 워리어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연이어 죽음이 줄지어 일어섰다. 수백에 달하는 스켈레톤 군단이 홀연히 나타나 식탐의 왕의 군세를 포위했다.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바로 돌격을 개시했다.

    모래성을 무너트리는 파도가 연상되는 광경이었다. 똑같은 스켈레톤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비프로스트의 언데드 군단은 단 일합조차 견뎌내지 못했다. 이미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사브나크가 발악하듯 소환술을 완성시켰다. 사브나크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붉은 괴수가 소환되었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 괴수 옹골리언트였다.

    괴수의 등장이 만들어낸 아주 잠깐의 마력 공백 덕분에 정신을 차린 비프로스트는 다급히 스크롤을 찢었다. 예상 이상으로 공간의 문 마법을 방해하는 마력의 흐름이 거세었던 터라 재차 의식을 집중하였다.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스카자하가 나타났다.

    죽음의 기운을 뿌리는 해골기사와 언데드 군단은 비상식적으로 강맹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십인중 가운데 자그마치 일곱이 모여 있었다. 하나하나가 뿔 다섯 개 이상의 힘을 가진 강대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공간의 문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몇 분의 집중 정도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프로스트의 착각에 불과했다.

    재차 집중을 개시하려 한 그 순간 바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하듯 일어나는 거센 마력의 폭풍에 절로 눈이 돌아갔다.

    하나하나가 십인중과 호각을 이루는 마력!

    마몬의 12 사역마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큰 경악을 야기했다.

    붉은 맹수와 야수. 남녀 한 쌍인 두 마리 레드 데몬.

    엠브리오와 싸우기 이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던 마몬 가의 두 예속 사역마.

    새하얀 백발을 가진 다크엘프 여기사.

    마몬 가 가주의 호위 기사. 가장 처음부터 마몬 가의 가주를 보필해온 사역마, 그렇기에 가장 나약해야 정상일 사역마.

    티그리우스 란돌트. 남부 공백지의 보잘 것 없는 가주. 마몬 가의 항장.

    이름 모를 잿빛 머리칼의 여인 외에는 모두가 이미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강함은 이미 명백히 수치화되어 식탐의 왕의 정보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치 그 모든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지막지한 마력을 발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예속 사역마가 가주와 함께 강해지는 존재라 해도 이런 급격한 성장은 절대로 무리였다.

    가능성은 오직 하나.

    마력을 숨겼다.

    철저한 기만으로 마몬 가가 온 세상을 속였다.

    “비프로스트! 집중해라!”

    사브나크가 소리쳤다. 십인중은 저마다 눈동자를 굴렸다. 전투에 합류코자 매서운 기세로 돌진을 개시한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을 노려보았다.

    비프로스트는 사브나크의 지적을 옳게 여겼다. 경악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공간의 문을 열어 주군을 모셔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분명 마몬 가의 성장은 놀라웠다. 하지만 자신들은 십인중이었다. 저들의 힘이라고 해봐야 자신들과 호각일 뿐이었다. 더욱이 자신들 쪽에는 사브나크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괜찮았다. 비프로스트 자신이 공간의 문을 완성하기만 한다면 이 상황은 곧 역전될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착각에 불과했다.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다. 비프로스트 자신이 소환한 언데드 군단과 사브나크의 소환수 무리들이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 등장했을 때 이상으로 강렬한 충동이 십인중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푸른 머리칼의 여인 곁에 서 있는 자. 저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불사의 마녀 스카자하가 허리 숙여 예를 표하는 자.

    그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홍련의 불길로 타오르는 불꽃의 창을 거머쥐었다.

    불꽃의 마왕.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마몬 가 가주의 이명.

    눈앞의 진실을 목도하고도 잊게 만든 단 한 꺼풀의 거짓.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스카자하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느낀 것이 경악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차라리 절망에 가까웠다.

    홍련의 마창 아몬.

    한 번 휘둘러 천지를 불사르고 바다를 증발시키나니.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필두.

    그런 그를 부리는 자라면 오직 하나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비프로스트의 절망적인 추론을 확신시키듯 거대하기 짝이 없는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나의, 주인이여.]

    생명의 정원 전역에 아몬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간의 문을 완성시킬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비프로스트는 두 손을 늘어트렸다. 자신의 왕은, 식탐의 왕은 한 가지 사실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단순히 탐욕의 권능을 타고난 애송이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완성된 자.

    전대의 것을 올곧게 이어받은 새로운 왕.

    스카자하의 말이 맞았다. 눈앞의 자를 표현할 말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비프로스트는 탄식과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탐욕의… 왕.”

    전투가 속행되었다. 녹염의 파도가 생명의 정원을 뒤덮었다.

    &

    국경지대에 마련된 요새 형 던전 입구에 서서 폭력의 왕의 군세를 노려보던 식탐의 왕은 돌아섰다. 조급함을 감추고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채 발걸음을 내딛었다.

    족쇄에 묶여 왕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프사라스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들에게는 다행히도 식탐의 왕은 지난 경매장에서와 같이 폭급한 노여움을 토하지 않았다. 그녀들을 죽이고 잡아먹는 대신 물러갈 것을 명했다.

    아프사라스들은 눈앞의 행운에 감사하며 서둘러 물러갔다. 하지만 개중에는 지금 이 상황이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던전의 심장 방에 홀로 남은 식탐의 왕은 숨을 삼켰다. 다시 한 번 길게 토하며 의식을 집중했다. 던전의 심장을 통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였다.

    [예속 사역마들과의 연결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았다.

    식탐의 왕은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짐승같은 울부짖음을 토했다.

    < 제 55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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