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58화 (158/227)
  • < 제 53장 #2 >

    &

    ‘구시온! 이 사기꾼 같으니!’

    벽 뒤에 몸을 숨긴 용호는 욕지거리를 토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빛의 화살 수십 개가 벽을 사정없이 때렸고, 벽과 벽 사이에 난 통로를 흉흉하게 관통했다.

    촉과 화살대 모두가 빛인 것 외에도 유별난 곳이 있는 화살이었다. 문자 그대로 빛살처럼 날아온 화살들은 벽면에 충돌할 때마다 폭발했다.

    연달아 울리는 굉음 때문에 청각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욕지거리를 토하며 구시온의 말을 떠올렸다.

    “사수좌- 태양의 기사 아스클레피오스. 이명 그대로 정정당당하고 명예로운 녀석이지. 좀 지나칠 정도로 무뚝뚝하긴 하지만 말이야. 아마 마주하면 고결한 기사답게 제법 장황한 예를 표할지도 몰라.”

    고결한 기사와의 만남은커녕 짤막한 인사조차 없었다. 용호 일행을 마주한 아스클레피오스의 반응은 참으로 간결했다. 다짜고짜 빛의 화살을 쏴재꼈다.

    “가주 님!”

    “용호야!”

    “막아!”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직진만 하던 빛의 화살들이 벽을 지난 순간 ‘선회’를 시작한 탓이었다.

    용호는 급히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왜곡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용호에게 딱 달라붙어 있던 카타리나는 방벽 너머로 반대편 벽에 자리한 카이완을 보았다. 카이완 역시 용호와 마찬가지로 왜곡의 장벽을 펼쳐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를 보호했다.

    콰가가가가가강!

    왜곡의 장벽과 부딪힌 빛의 화살들이 연달아 폭발했다. 용호와 카이완의 것을 가리지 않고 왜곡의 장벽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용호는 마력을 강화하며 카이완에게 뜻을 보냈다. 예속 사역마답게 용호의 뜻을 바로 이해한 카이완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시선을 교환했다.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폭이 3미터는 될법한 통로였다. 용호와 카이완은 둘이 함께 하나의 방벽을 만들어냈다. 일반적인 관계라면 불가능했을 터였지만, 하나로 이어진 가주와 예속 사역마였기에 권능을 섞는 것 역시 가능했다.

    크고 두터운 왜곡의 장벽이 빛의 화살들을 보다 순조로이 막아냈다. 용호는 아지랑이가 인 것처럼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커다란 방 한 가운데 자리한 켄타우로스를 보았다. 다시 한 번 구시온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의 이야기지만 놈이 날뛰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나리의 무기고에 있는 신록의 갑옷을 손에 넣으면 녀석의 화살 공격을 대부분 무효화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저게 신록의 갑옷이지?’

    켄타우로스의 하체는 멋들어진 검은 말이었고, 상체는 녹색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녹색 갑옷은 마치 나무줄기와 잎사귀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가느다란 줄기가 벽을 타는 덩굴 식물마냥 갑옷 곳곳에 자리했고, 넓게 자란 잎사귀가 어깨와 가슴 등에 자리했다.

    구시온의 말은 전부 틀렸다. 태양의 기사 아스클레피오스는 미쳐 있었고, 그의 공격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신록의 갑옷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스클레피오스는 단순히 위협으로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2층의 바포메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용호 일행을 죽이려 했다.

    용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동자를 굴렸다. 빛의 화살이 일으키는 폭발 때문에 시야가 자꾸 뭉개졌지만 어렵지 않게 바닥 곳곳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 대부분이 과거 마몬 가의 사역마들일 터였다. 어쩌면 전대 가주도 끼어있을지 몰랐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용호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좌우로 뿌렸다. 예속 사역마들에게 뜻을 전했다.

    격살.

    아스클레피오스는 포기한다. 광인이 된 그를 처단한다!

    용호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불꽃에서 피어난 아몬을 길게 늘어트리며 방벽 너머의 아스클레피오스를 주시했다.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카이완과 동시에 손을 놀려 왜곡의 방벽을 해체했다. 연달아 아몬으로 허공을 찔렀다.

    거센 녹염의 파도가 일어났다. 살상 목적이 아니었다. 녹염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시선을 순간이나마 차단한 뒤 예속 사역마들이 달려든다는 간단한 계획이었다. 용호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탐욕의 녹염이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성난 녹염이 흡사 맹수처럼 돌진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제각각 야성을 일깨웠다.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녹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녹염의 파도가 둘로 갈라졌다. 마치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개벽과 같이 완벽한 일섬에 둘이 되어 흩어졌다.

    용호는 순간을 느꼈다. 태양의 검으로 녹염 그 자체를 갈라버린 아스클레피오스를 보았다. 그는 광인이었지만 동시에 마몬의 12 사역마였다.

    다시 순간이 압축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 찾아왔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말발굽이 지면을 거칠게 박찼다. 왼손에 쥔 태양검을 늘어트림과 동시에 오른팔에 거머쥔 거창을 앞에 세웠다. 채 가시지 않은 녹염의 잔흔 사이로 돌진했다!

    무지막지한 랜스 차징이었다. 단 세 걸음 만에 최고 속도에 도달한 아스클레피오스의 거창이 용호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용호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움직임을 포착한 순간 용호 역시 움직임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거창이 허공을 부쉈다. 용호와 카이완은 좌우로 몸을 날렸고, 단순히 피하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카이완이 몸을 비틀며 사복검을 휘둘렀다. 용호는 지면에 발을 딛은 순간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원심력을 실은 아몬으로 다시 한 번 불꽃을 내뿜어 아스클레피오스의 노출된 등을 노렸다.

    사복검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오른팔을 휘감았다. 녹염이 아스클레피오스를 덮쳤다. 연이어 카이완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붙잡은 것은 카이완이었지만 그 관계를 역전시킬 정도로 막강한 아스클레피오스의 괴력이었다.

    카이완은 사복검을 놓지 않았다. 용호도 바로 지면을 박차 몸을 돌리는 아스클레피오스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스컬컬!”

    부케팔로스에 올라탄 스컬의 망치가 벼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다급히 왼팔에 낀 방패를 들어 망치를 막았지만 애당초 망치란 무기는 막는다고 어찌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왼팔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크게 밀려났다. 이 와중에 카이완은 균형을 잡았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대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등 뒤에 올라탔고, 미련 없이 사복검을 놓았다. 허리 뒤에서 시트리가 구해준 마귀 손톱을 뽑아 아스클레피오스의 마갑 사이를 찔렀다. 그치지 않고 아예 비틀었다.

    “크악!”

    아스클레피오스가 처음으로 고통을 토했다. 난폭하게 날뛰며 오른손에 부착된 쇠뇌를 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다음 공격을 허하지 않았다. 스컬이 재차 망치를 휘둘렀고,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카타리나 역시 월광검을 뽑아들고 마치 땅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낮고 빠르게 질주했다.

    완벽한 연계였다. 스컬의 망치가 아스클레피오스를 다시 한 번 밀어내자 카이완은 마갑 위에 납작 엎드리며 재차 마귀 손톱으로 마갑 사이를 찔렀다. 오필리아의 날카로운 일각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오른쪽 뒷다리를 부러트렸고, 카타리나의 월광검이 왼다리를 베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등을 향해 엘리고스가 주먹을 휘둘렀다. 납작 엎드린 카이완의 머리 위를 지난 붉은 권격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과시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밀려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마냥 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눈을 꽉 감은 카이완은 자신과 아스클레피오스 사이에 왜곡의 벽을 발생시켜 스스로를 날려버렸다. 허공에 붕 뜬 그녀를 카타리나가 일으킨 검은 거인의 손이 절묘하게 붙잡았다.

    거의 십 미터 이상을 날아간 아스클레피오스는 벽면과 충돌했다. 천장과 바닥이 뒤흔들렸다.

    방금 일격에 전력을 쏟아 부은 엘리고스는 거친 숨을 토하며 팔을 늘어트렸다. 기수를 돌린 스컬은 아스클레피오스가 충돌한 벽을 노려보았고, 카타리나는 서둘러 카이완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용호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거세게 일었던 흙먼지가 가시자 아스클레피오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다리가 부러진 켄타우로스는 바닥에 반쯤 주저앉은 상태로 큰 활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엘리고스가 남긴 충격과 카이완의 마귀 저주가 그의 육신을 헤집었지만 시위를 당기는 팔은 떨리지 않았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태양의 기사. 하지만 깊은 던전 안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태양 아래에서만 발동하는 그의 여러 신력들은 힘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몬의 기사였다. 광인이 되어 죽어가는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위가 그것을 증명했다.

    아몬이 용호에게 속삭였다. 그는 과거 신실한 벗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아몬은 알았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회생할 수 없었다. 충직한 태양의 기사는 그날, 자신의 태양이었던 왕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 왕이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행한 배려가 오히려 그를 지금과 같이 망가트리고 말았다.

    용호는 아몬을 움켜쥐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예속 사역마들은 가주의 뜻을 존중해 뒤로 물러섰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시위를 놓았다.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빛 화살을 쏘았다.

    용호가 지면을 박찼다.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그 순간 경로를 예측했고, 주저 없이 질주했다.

    화살이 용호의 뺨을 스쳤다. 아몬의 창끝이 신녹의 갑주를 뚫고 아스클레피오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용호는 녹염을 일으키지 않았다. 창끝에 꿰뚫린 아스클레피오스의 심장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부서져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몬을 느꼈다. 그 너머로 이어져 있는 용호의 탐욕을 감지했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용호와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말을 만들어냈다. 쥐어짜낸 목소리였다.

    “마계를 구원하신… 나의… 왕…이시여…….”

    그것이 다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 이상의 말을 남기지 못했다. 주군을 잃고 천 년의 세월 동안 껍데기만 남은 기사는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용호의 왼팔에 장착된 마장으로부터 새로운 빛이 일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힘인 ‘명예’를 상징하는 찬란한 주황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시신이 재가 되어 무너졌다. 용호는 마지막 순간 전해진 아스클레피오스의 심상을 보았다.

    왕이 홀로 계단을 올랐다.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언제고 뒤쫓았던 그 등을 그저 멀리 떠나보내야만 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절망했다. 자신의 왕이 죽었다는 사실에,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규했다. 왕의 뜻과는 달리 천 년의 세월동안 자괴 속에 천천히 말라죽어갔다.

    심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용호의 머릿속에는 연달아 다른 기억들이 떠올랐다.

    피눈물을 흘리며 마몬의 이름을 부르짖던 구시온. 그의 곁에서 함께 눈물짓던 스카자하.

    엘룬을 끌어안은 채 마몬을 떠나보낸 시트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혼자만의 죽음을 택한 마몬.

    마몬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이 마지막으로 본 마몬의 모습 또한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이었다.

    마몬이 올랐던 계단 끝에는 대체 무엇이 존재한단 말인가.

    마몬과 12 사역마들의 마지막 싸움은 어째서 마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인가.

    ‘마계를 구원하신 나의 왕이여.’

    [죄악과 신기를 가졌다하여, 과연 그것만으로 그를 왕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에 이어진 것은 아스클레피오스가 아닌 아몬의 목소리였다. 용호는 아몬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홍련의 마창은 여전히 대답을 거부했다. 한줄기 불꽃이 되어 스스로의 모습을 감췄다.

    용호는 아몬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마몬은 마계를 구했다. 그리고 그의 행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현재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아몬을 비롯한 예속 사역마들이 마몬에게 일어난 일을 감추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결코 용호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기다리리라. 구시온이 말했던 때가 오기를. 더욱이 그 때는 이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스컬스컬.”

    머리 위에서 스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처럼 껄껄 웃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용호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유품인 태양검과 신록의 갑옷, 이름 모를 쇠뇌와 대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구시온의 말마따나 충직했던 기사에게 짧게나마 묵념한 뒤 돌아섰다.

    예속 사역마들이 보였다. 용호는 짐짓 크게 웃었다.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마주친 뒤 말했다.

    “가자. 이제 한 번 대차게 털어봐야지.”

    스컬이 다시 껄껄 웃었다. 카타리나가 꼬리를 살랑거렸고, 카이완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무기고의 문을 열었다. 어쩌다보니 아스클레피오스와의 싸움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티그리우스가 마법의 빛으로 무기고의 어둠을 밝혔다.

    [무기고의 장악을 시작하겠습니다.]

    루시아가 말했다. 마몬의 무기고가 새로운 주인에게 자신을 허락했다.

    제 53장 - 왕의 자격 끝, 제 54장 - 조우로 이어집니다.

    < 제 53장 #2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