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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57화 (157/227)
  • < 제 53장 - 왕의 자격 >

    제 53장 - 왕의 자격

    용호가 경매장에서 급히 귀환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후.

    스컬과 스컬부대를 필두로 한 동부 원정군이 마몬 가에 돌아왔다.

    “다녀오셨나요?”

    “그래, 잘 다녀왔어?”

    서로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나누며 용호와 오필리아가 키득 웃었다. 아직 마몬 가에는 폭력의 왕의 진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오필리아의 정보력은 선술집의 여주인이던 시절보다는 크게 강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공백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즉시 잡아낼 수준은 되지 못했다.

    오필리아를 비롯한 예속 사역마들을 환대한 용호는 여독을 풀 틈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동부에서 모은 각종 정수들을 루시아가 있는 심장 방으로 옮기며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격노의 왕을 만나셨다고요?”

    “그래, 정확히는 만났다기 보다는 그냥 눈이 마주친 정도지만. 그쪽은 아직 내가 탐욕의 왕이란 사실을 눈치 못 챈 것 같아.”

    용호의 대답에 오필리아는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입을 앙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용호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격노의 왕에 대한 느낌이 어떠셨어요? 그쪽은 가주 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고요?”

    “글쎄… 나쁘진 않았어. 얼굴을 본 건 아주 잠깐 뿐이지만……”

    말끝을 흐린 용호는 격노의 왕을 떠올려 보았다. 오색찬란한 보석안에 이어 청초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용호는 시선을 돌려 자신 옆에서 나란히 걷던 카타리나를 보았다. 이내 다시 오필리아에게 말했다.

    “어쩐지 카타리나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그쪽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군. 애당초 내가 탐욕인 것도 모르고, 대화 같은 걸 나눈 것도 아니니까.”

    용호의 대답에 카타리나는 눈을 껌벅이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귀를 파닥였다. 반면 카이완은 왠지 알 것 같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오필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분석한 내용이 맞는 것 같군요.”

    카타리나의 얼굴에는 더더욱 큰 의문이 떠올랐다.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것은 카타리나 자신이었는데, 혼자서만 이야기를 못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오필리아가 말했다.

    “언젠가는 마몬 가에 탐욕의 왕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마계 전역에 널리 알려질 겁니다. 여섯 왕이 일곱 왕이 되는 시대가 열리는 거죠. 그 때가 되었을 때, 격노의 왕은 가장 유력한 동맹 후보입니다.”

    왕이 자그마치 일곱이나 되었다. 세력의 숫자가 이 정도가 되면 일시적인 관계로나마 동맹이 구축되기 마련이었다. 혼자서 나머지 모두를 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머릿속으로 삼국지 게임을 떠올린 용호는 다시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단순히 가까이에 있어서는 아니겠지?”

    오필리아가 즉답했다.

    “전투광으로 알려진 격노의 왕이지만 제 분석이 맞다면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녀는 싸움을 즐기지 않아요. 그녀의 백성들인 팔부중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뿐이죠. 그게 싸움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요.”

    “평화주의자란 건가?”

    “비슷하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마계의 패권을 잡는 게 아니라 팔부중에게 평화와 번영을 안겨주는 걸 겁니다. 더욱이 그녀는 여섯 왕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요. 심지어는 우리 공백지와도 접경지가 있답니다. 요즘 들어 북부가 시끄럽기까지 하니 등을 맡길 수 있는 아군이 절실할 겁니다.”

    다소 정신없을 정도로 빠른 말이었지만 요점은 모두 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오필리아의 말을 되짚은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격노의 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말했다.

    “같은 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 나도 왠지 그 여자랑은 싸우기 싫고.”

    “그건 무슨 의미야?”

    카이완이 적절히 끼어들며 물었다. 어젯밤도 그러더니 눈매가 어째 날카로웠다. 카타리나 역시 카이완을 흉내내듯 슬쩍 용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 왔다.”

    시의 적절하게도 던전의 심장 방 입구에 도달했다. 스컬이 용호를 돕듯 크게 소리치며 문을 열었다.

    “스컬컬!”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날이 왔어요!]

    [두근두근! 콩닥콩닥!]

    [빨리 정수 주세요! 현기증 날 것 같아요!]

    던전의 심장 방에 들어가자마자 루시아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다른 곳이 아닌 던전의 심장 방 안이었기에 예속 사역마들도 루시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카이완이 작게 말했다.

    “던전의 심장의 말투나 어휘 선정은 가주를 따라가는 게 맞지?”

    “그렇소.”

    티그리우스가 진중하게 답했고, 오필리아는 소리죽여 웃었다. 괜히 무안해진 용호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경쾌하기만 했다. 용호의 무안 따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발랄하게 외쳤다.

    [오늘을 위해 며칠 전부터 배를 비워뒀답니다!]

    결국엔 용호도 웃고 말았다. 엘리고스에게 정수를 넘겨받은 뒤 던전의 심장 앞에 다가갔다. 루시아의 기분을 반영하듯 꿈틀꿈틀거리는 던전의 심장에 정수를 하나 밀어 넣었다.

    “꼭꼭 씹어 먹어.”

    [그렇고 말고요!]

    [얌얌쩝… 헉! 미미美味!]

    일부러 고양시킨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심이 담긴 감탄이었다.

    던전의 심장만이 루시아가 아니었다. 던전의 심장 방 자체가 루시아라 해도 좋았다.

    예속 사역마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마치 방 전체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계속 줘요! 계속!]

    루시아가 소리쳤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좀 이상했다. 마치 마약이라도 한 것 처럼 황홀경에 빠진 목소리였다.

    순간 멈칫한 용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속 정수를 주입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때 티그리우스가 외쳤다.

    “지금이 호기입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정수 흡수 효율이 배가된 상태입니다.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는 현상이니 놓치시면 안 됩니다!”

    머릿속으로 온라인 게임의 경험치 2배 이벤트를 떠올린 용호는 즉각 행동에 돌입했다. 던전의 심장에 빠른 속도로 정수들을 주입했다.

    [아아! 아아아!]

    [앗흥!]

    민망함의 도가니탕 속에서도 용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동부에서 수확해온 정수가 바닥났을 때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와아.”

    오색찬란한 빛은 결코 눈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바둑이와 함께 용호를 따라왔던 유리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순박하게 감탄했다.

    아름다웠다. 아침 해돋이를 연상시키는 찬란함이었다.

    그리고 빛이 가셨다. 마치 지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침묵이 찾아왔다.

    “루시아?”

    [던전의 등급이 3단계 더 높아졌습니다.]

    [탐욕의 미궁의 3층 장악을 완료했습니다. 즉시 4층 장악에 돌입하겠습니다.]

    [던전의 등급이 상승함에 따라 새로운 시설들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급 목욕탕 / 상급 훈련장 / 상급 작업실 / 상급 상하수도 시설 / 수면실 / 회복실 / 채광 효율이 향상된 광산 / 정재소 / 재배실 / 투기장 등이 설치 가능합니다.]

    [던전의 장악력이 높아짐에 따라 던전을 보다 세밀하게 관리 및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광맥들을 발견했습니다.]

    [은맥 하나와 금맥 하나입니다. 위치는 둘 모두 탐욕의 미궁 3층입니다.]

    [현재 4층을 장악 중입니다.]

    [4층 장악이 완료되면 탐욕의 미궁의 장비 제조 시설을 활용 가능합니다.]

    [하아!]

    [지금 최고로 High한 기분이에요!]

    흡사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낸 루시아는 여운을 즐기듯 길게 늘어진 감탄을 토했다.

    가주에게 있어 정수 흡수가 지고의 쾌락이듯이 던전의 심장 역시 정수 흡수에서 극한 즐거움을 느끼는 법이었다.

    한참 여운을 즐기던 루시아는 문득 이상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용호를 비롯한 마몬 가의 사역마 일동이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였다. 스컬 뒤에 반쯤 숨어서 구경하던 유리아가 쪼르르 걸어 나왔다. 소중한 보물인 색색이 예쁜 공깃돌을 내밀며 말했다.

    “공기놀이 좋아해?”

    루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눈을 깜박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던전의 지각 능력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형태가 변화한 던전의 심장을 인지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서 있었다. 등 뒤에 부착된 커다란 은색 케이블이 바닥에 꽂혀 있는 터라 멀리까지 움직이지는 못할 터였지만, 어찌되었든 인간형인 것만은 분명했다.

    루시아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해봤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고, 이내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오오! 공기놀이를 할 수 있어요!]

    [좋아하고말고요! 이제부터 격하게 좋아할게요!]

    루시아가 유리아를 와락 끌어안았고, 유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마몬 가 던전에서 처음으로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친구를 - 실제로도 둘 모두 한 살 남짓한 게 똑같았다. - 만난 터라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기뻐하는 유리아가 좋으면서도, 어쩐지 모를 질투심에 휩싸인 바둑이를 제외한 모두가 푸근하게 웃었다.

    &

    루시아의 급격한 성장은 마몬 가의 사역마들에게 새로운 격무를 선사했다.

    스컬과 스컬 부대는 새로운 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동부 원정 동안 사실상 정지되었던 농사일도 급했기에 스컬 부대의 일부는 생명의 정원으로 향했다. 어엿한 베테랑 농부로 거듭난 용아병들의 지휘하에 스컬 부대의 신병들이 낫과 호미를 들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역시 바삐 움직였다. 새로운 은맥과 광맥을 개발하는 작업에는 관리자가 필요했다. 오필리아의 경우엔 상하수도 시설의 설계까지 도맡아야 했다.

    버그림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4층 시설 점검에 돌입했다. 버그림의 제자 겸 직속부하로 편입된 오크 대장장이들은 앞으로 펼쳐질 철야 지옥에 끔찍함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시설을 마주한 즐거움에 몸을 떨었다.

    용호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용호는 카타리나, 카이완과 함께 투기장으로 향했다.

    투기장 24층.

    용호의 등 뒤에는 머리 높이만 십여 미터에 달하는 트롤 마운틴 킹이 나자빠져 있었다. 파란 피부를 가진 놈의 몸은 각종 광석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맨몸임에도 불구하고 무쇠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때문에 용호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인 놈의 목을 갈랐다. 덩치가 큰 만큼 목 역시 컸기에 노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

    마운틴 킹은 단순히 방어력만 높은 거인이 아니었다. 트롤답게 엄청난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각종 속성 마법이 가능한 기생수들을 몸에 키우고 있었다.

    한 번 목을 가르는 것만으로 부족했기에 용호는 아예 마운틴 킹의 몸속으로 들어가 내장기관 일체를 불태웠다. 왜곡의 방패 덕분에 각종 속성 마법과 위액은 막을 수 있었지만, 마운틴 킹의 뱃속에 가득 찬 가스가 문제였다. 가까스로 질식사의 위기에서 빠져나온 용호는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투기장은 20층부터 달라졌다. 한 층을 격파할 때마다 더 강한 플로어 마스터가 등장하는 구도 그 자체는 동일했지만, 패배했을 경우의 벌칙과 등장하는 플로어 마스터의 구성이 20층 이전과 크게 달랐다.

    일단 벌칙이 강해졌다. 20층처럼 패배할 경우 투기장의 사역마가 되는 벌칙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패배할 경우 예속 사역마를 하나 빼앗기는 벌칙도 있었고, 마력을 절반 이상 상실하는 벌칙도 있었다.

    플로어 마스터들의 구성이 보다 화려해졌다. 19층까지는 거의 인간형 혹은 인간과 비슷한 크기의 플로어 마스터들만 등장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오늘 같은 거인은 물론이고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괴물까지 나타났다.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의 등장 역시 보다 빈번해졌다.

    ‘뭐, 과정이 힘들어진 만큼 보상도 좋아졌으니까.’

    용호는 마몬의 마력을 흡수했다. 이전처럼 바로바로 마력이 성장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하나 흡수할 때마다 마력이 정순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수 흡수를 통해 급격히 증가한 용호의 마력은 기실 넝마조각이나 다름없었다. 탐욕의 힘으로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긴 했지만 제대로 소화가 안 된 상태였다.

    마몬의 마력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하나하나 손에 넣을 때마다 서로 상이한 정수들 간의 간극을 줄이고 빈틈을 메웠다.

    24층 클리어 보상은 모든 상태 이상은 물론이고 체력과 마력까지 회복시키는 엘릭서였다. 마치 눈병 약처럼 아주 작은 유리 병 속에 황금빛 물이 담겨 있었다.

    “망할, 아주 거덜을 내는구만. 24층에서 엘릭서가 나올 줄이야.”

    구시온이 즐거운 얼굴로 구시렁거였다. 용호는 엘릭서를 소중히 갈무리한 뒤 구시온과 아몬,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기다리고 있는 특별석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니까, 그 식탐의 왕이란 놈이 널 노리고 있다는 거군. 이제 슬슬 초읽기 들어간 것 같고 말이야.”

    용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는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제각각 투기장에 도전하기 위해 몸을 풀고 있었다.

    구시온은 가만히 턱을 어루만졌다. 문득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격노의 왕을 마주했더니 번뇌력이 강해졌다고?”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동시에 눈동자를 굴렸다. 용호는 반사적으로 두 사람이 제각각 들고 있는 무기에 시선을 두었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구시온이 껄껄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세상에나 우리 카이완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호구기사도 그렇고.”

    카이완은 다소 부끄러운 듯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고, 카타리나는 호구기사라는 말에 입술을 삐쭉였다.

    그리고 아몬이 말했다.

    [어린 주인의 번뇌력이라면 강해졌다.]

    [농담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진짜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시선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용호는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아몬을 보았고, 아몬은 침묵했다. 구시온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능글맞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딱 좋네! 5층을 지키는 게 사수좌라는 이야기는 전에 했지? 우리 꽉 막힌 기사님인 아스클레피오스.”

    “맞아, 그랬지. 그런데?”

    용호가 서둘러 구시온의 말을 받았다. 구시온은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5층은 나리의 무기고다. 적에 맞설 준비를 하기 딱 좋은 곳이지.”

    &

    < 제 53장 - 왕의 자격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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