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56화 (156/227)
  • < 제 52장 #2 >

    &

    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 이래 마계를 지배하는 왕들의 이명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오만, 질시, 색욕, 식탐, 격노, 나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죄악을 가지지 않은 자는 왕이라 불릴만한 힘과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해묵은 불문율이었다. 어느 누구도 어찌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정면에서부터 부정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에게는 죄악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힘은 죄악을 가진 왕들에 필적했다. 그의 세력 역시도 일국을 세움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마계에서 가장 거대한 육체의 소유자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였다.

    왕들은 그의 존재를 탐탁찮게 여겼다. 질시의 왕은 그의 존재 자체가 왕들에 대한 모독이라 선언했고, 이 선언에 많은 왕들이 공감을 표했다.

    마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힘이 곧 정의인 세상.

    마침내 왕들 가운데 하나가 분연히 일어섰다. 죄악이 없음에도 왕이라 불리는 건방진 존재를 징벌코자 전쟁을 일으켰다.

    전대 식탐의 왕.

    파리의 왕이라고도 불린 그는 수백만에 달하는 황충 군단으로 이름 없는 왕의 영토를 공격했다. 그 기세가 실로 대단해 마계 전체를 뒤엎을 것만 같았다. 왕들은 물론이고 마계의 여러 가주들이 베엘제불의 낙승을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기대를 배신했다. 베엘제불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패했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색색의 용 군단이 황충들로 이루어진 식탐의 군대를 파괴했다.

    베엘제불은 이름 없는 왕에게 목숨을 잃었다. 최후의 발악으로 펼친 마법 덕분에 식탐의 죄와 신기를 이름 없는 왕에게 진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베엘제불의 패배 소식은 마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죄악을 갖지 않은 자가 이미 왕이라 불리는 죄악의 소유자를 쓰러트렸으니 당연했다. 지난 수천 년 사이에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이변이었다.

    이제는 마계 전체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악을 가진 왕들이 그의 존재를 탐탁찮게 여기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이름 없는 왕은 이명을 손에 넣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식탐의 왕과 군대를 박살낸 그에게 어울리는 이명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폭력의 왕.

    마계가 그를 그렇게 불렀고, 결국엔 왕들도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

    벌써 이백 년도 넘게 지난 과거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폭력의 왕은 침묵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땅을 나서지 않았다. 베엘제불과 그 군대를 격파했을 때조차도 국경을 넘지 않은 그였다.

    새로운 식탐의 왕과 격노의 왕이 나타났다. 오만의 왕 역시 그 대를 이었다.

    그 격동의 순간에도 그는 산처럼 서있을 뿐이었다.

    당대 식탐의 왕은 북부의 싸움이 극에 치달았을 때 폭력의 왕 역시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변수를 다루는 문제일 뿐이었다. 현존하는 여섯 왕들 가운데서 가장 폭력의 왕을 경계하는 식탐의 왕조차도 진짜로 그가 왕들 간의 전쟁에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폭력의 왕이 움직였다.

    자신에 대한 평가와 지레짐작을 비웃듯 색색의 용 군단에게 진군을 명했다.

    물론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용 군단은 아직 폭력의 왕의 영역 내에 있었다. 식탐의 왕과의 국경 지대에 병력이 집결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큰 위협이었다. 지난 이백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키르티무카의 보고를 들은 격노의 왕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순간이지만 자신의 신실한 벗이자 충직한 부하인 키르티무카가 무리수 넘치는 농담을 한 것은 아닌지를 고민했다. 그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저씨가 움직이셨다고?”

    확인 차 다시 물었다. 키르티무카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용 군단이 식탐의 왕과의 국경 지대에 집결했습니다. 오, 세상에… 보고만 들었음에도 살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군단입니다.”

    몸서리를 친 키르티무카는 격노의 왕에게 조금 더 다가간 뒤 팔에 끼고 있던 황금 팔찌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팔찌 위 허공에 작은 영상이 펼쳐졌다. 식탐의 왕과의 국경 지대를 순찰하던 가릉빈가들이 포착한 광경이었다.

    드래곤 수십 마리가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드래곤들의 지배하에 있는 수천, 수만 마리에 달할 여러 몬스터들까지 함께하니 그 위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격노의 왕은 심호흡을 했다. 저 군단이 자신이 아닌 식탐의 왕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주인님, 폭력의 왕은 우리 동맹이 맞죠? 그렇죠?”

    용맹무쌍한 야크샤 여전사인 키르티무카조차도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격노의 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키르티무카의 질문을 용인해주었다. 격노의 왕 자신도 순간이지만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아저씨랑 나는 비밀 동맹 관계야. 저 용 군단과 우리 팔부중이 맞서 싸울 일은 절대 없어.”

    키르티무카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까지 말했다. 심호흡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저씨랑은 동맹이니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으니까.’

    격노의 왕과 폭력의 왕 사이는 다른 왕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 격노의 왕이 폭력의 왕을 허물없이 ‘아저씨’라 부르는 것이 그 증거였다.

    격노의 왕에게 폭력의 왕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언제나 옳은 판단을 도와주는 조언자였다.

    격노의 왕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폭력의 왕의 부동 성향 때문에 딱히 정치나 군사 관련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격노의 왕 자신이 청하는 조언도 대부분 개인적인 일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동맹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고 다른 왕들과 전쟁이 일어나면 꼭 한 편이 될 거라 믿었었다.

    솔직히 말해 섭섭했다. 이 정도의 대규모 군사 행동을 하면서 어찌 자신에게 언질 한 번 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 일이 아니야.’

    폭력의 왕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을 터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격노의 왕 자신의 궁전을 향해 폭력의 왕의 사절이 달려오고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국가의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어정쩡한 친분 관계 위에 제대로 된 동맹 관계를 구축해야 했다.

    격노의 왕은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현재 일어난 일에 집중했다.

    폭력의 왕과 식탐의 왕은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이 관계는 다소 일방적이었다.

    식탐의 왕은 폭력의 왕을 증오했다. 본래 사이가 나쁜 것이 보통인 왕들 간의 관계였지만, 개중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의를 보였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다. 전대 식탐의 왕인 베엘제불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식탐의 왕이 죄악을 가지지 않은 폭력의 왕을 탐탁찮게 여겨서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식탐의 왕이 폭력의 왕에게 품은 태생적 열등감을 원인으로 꼽는 자도 있었다.

    식탐의 왕은 최하급 마수인 아귀에서 시작한 자였다. 죄악의 힘으로 아득아득 기어올라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폭력의 왕은 태어날 때부터 강대한 존재였다. 마계 최강의 종족을 꼽을 때 결코 빠지지 않는 드래곤- 그 중에서도 강력한 레드 드래곤으로 태어난 존재였으니 말이다.

    물론 식탐의 왕도 태어날 때 죄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특별한 태생인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차이가 있었다. 최하급 마수인 아귀에게 죄악은 그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였다. 식탐의 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폭력 아저씨는 지금 수면기 아니셨나?’

    북부의 전쟁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폭력의 왕이 침묵한 진짜 이유였다. 덕분에 격노의 왕도 요 몇 년 사이에는 폭력의 왕을 만나지 못했었다.

    “됐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주인님?”

    격노의 왕은 다시 귀신 가면을 뒤집어썼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키르티무카를 안심시키듯 손을 쭉 뻗어서 자기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도 돌아가자. 아저씨한테도 사절을 보내봐야지. 여차하면 내가 직접 움직이고.”

    식탐의 왕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간에 지금쯤 화들짝 놀라 몸부림을 치고 있을 터였다. 섣불리 행동할 자가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이미 폭력의 왕이 파격을 보여준 상황이었다. 식탐의 왕도 어떤 돌발행동을 할 지 몰랐다.

    “알겠습니다. 바로 돌아갈 채비를 하겠습니다.”

    믿음직한 주인의 모습에 겨우 중심을 잡은 키르티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예를 표한 뒤 발코니를 떠났다. 경매장 곳곳에 퍼져 있을 수하들을 불러모으고 마차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키르티무카의 뒤를 따르려던 격노의 왕은 막 내딛으려던 발걸음을 다시 되돌렸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설사 가슴의 두근거림이 진짜였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얼굴을 알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정말 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되리라.

    격노의 왕은 다시 돌아섰다. 청순한 처녀가 아닌 일국의 왕으로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

    격노의 왕이 마음을 다잡은 그 때 용호는 번민에 휩싸여 있었다.

    ‘설마 들킨 건가?’

    격노의 왕과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왜.’

    본 경매가 시작한 시간이었다. 격노의 왕이 발코니, 그것도 비행마차들이 이륙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 발코니에 나올 이유는 딱히 없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고 이유가 될 수 있는 ‘우연’이란 것이 존재했지만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만약 격노의 왕이 자신을 찾아다닌 것이라면. 그리하여 두 번째 마주침을 겪은 것이라면.

    최악의 경우 탐욕의 왕이라는 사실을 발각 당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단순한 낙관이 아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 느낄 수 있었다.

    당혹감. 놀람. 두근거림.

    ‘이거 완전 눈치 채는 각 아닌가.’

    용호가 탐욕의 왕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놀랐다면 모든 게 설명되었으니까.

    ‘아, 몰라. 아니겠지. 가능성이 낮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격노의 왕에게는 마신왕의 심장이 없었다. 더욱이 두 번째 만남은 과거 용호가 식탐의 왕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먼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눈치 챘을 가능성은 낮았고, 만약에라도 눈치 챘다면 격노의 왕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쳐다만 보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쪽도 수확은 있어. 격노의 왕의 맨 얼굴을 봤으니까.’

    격노라는 이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청초한 느낌의 미녀였다. 용호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격노의 왕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런 용호를 지켜보는 이가 둘 있었다.

    “저거, 지금 딴 여자 생각하는 거 맞지?”

    싸늘한 눈으로 용호를 지켜보던 카이완이 소리 죽여 말했다. 카타리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 엘프답게 밤눈이 특히 밝은 카타리나 역시 발코니에 선 격노의 왕을 보았다. 다만 귀신 가면을 벗고 있었던 데다가 워낙 순간적으로 본 거라 격노의 왕이란 생각을 못하고 그냥 청순한 미녀라고만 생각했다.

    카타리나가 자신이 본 것을 속삭이자 카이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검푸른 머리칼의 청초한 미녀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카이완이 다시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내가 뇌쇄와 고혹함을 담당할 테니까 네가 청순함과 백치미를 맡아. 알았지?”

    살라미가 들었다가는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터였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은 살라미가 아닌 카타리나였다. 카타리나는 눈을 한 번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금 속삭였다. 카이완이 코웃음 쳤다.

    “아니, 네가 뭐가 섹시… 젠장, 서큐버스 혼혈 맞네.”

    잠시 게슴츠레한 눈이 되었던 카타리나가 귀와 꼬리를 파닥이며 히죽 웃었다. 카이완이 다시 말했다.

    “아무튼 한눈팔지 못하게 하는 거야. 알았지?”

    카타리나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완과 마찬가지로 나름 싸늘하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용호를 쳐다보았다.

    &

    마계의 하늘은 검었다. 하지만 그 어둠도 쏟아지는 별빛 아래 자리한 거인들의 자태를 완전히 가릴 순 없었다.

    드래곤.

    하나로서 완벽한 존재들.

    그런 드래곤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군단이 되어 식탐의 왕의 땅을 주시하였다.

    폭력의 왕은 용 군단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의 거체는 여전히 마계의 서쪽 깊은 곳에 위치한 드래곤 레어에 산처럼 자리했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깨어있었다. 탐욕의 왕 마몬의 신기를 가진 그는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을 보았다. 그리하여 대강이나마 탐욕의 왕 마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파악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은폐된 사실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어쩌면 현재와 미래와는 무관한, 그저 전설이라 부르며 흘려보내야 할 흥밋거리에 불과할지 몰랐다.

    폭력의 왕은 눈을 뜨지 않았다. 허나 그의 열린 의식은 고개를 들어 남쪽을 보았다.

    그는 직감했다. 한때 탐욕의 왕 마몬의 손에서 전장을 질타했던 신기가 말해주었다.

    지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죄악. 사라져버린 일곱 번째 왕.

    탐욕이 돌아왔다.

    그는 지금 남쪽에 있었다.

    제 52장 - 이변 끝, 제 53장 - 왕의 자격으로 이어집니다.

    < 제 52장 #2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