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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25화 (25/227)
  • < 제 8장 - 소수정예 >

    제 8장 - 소수정예

    약육강식.

    강자존.

    하지만 단 한 명의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드넓은 마계를 지배하는 것은 여섯 명의 왕들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명의 마왕은 하나의 던전을 소유했다.

    하지만 그것은 법칙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경우에 불과했다.

    홀로 여러 개의 던전을 지배하는 마왕도 있었다. 던전을 소유한 마왕들을 휘하에 두어 일단의 세력을 이루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의 정점이라 할 수 있을 여섯 왕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십 개가 넘는 던전을 지배했다.

    마계의 동남쪽.

    일곱 조각난 마계의 한 부분을 차지한 식탐의 왕 또한 그러했다.

    그는 휘하에 마흔 세 명의 가주들을 부렸고, 예순 개에 달하는 던전을 소유했다.

    “아름답군.”

    식탐의 왕이 말했다. 무척이나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그는 거대했다.

    머리 높이만 3미터에 달했다. 성벽을 닮은 양 팔 아래 늘어진 두 팔은 무척이나 길어 바닥에 닿았다. 팔 하나하가가 첨탑이나 기둥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우람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관이 잘 발달한 턱 때문에 머리는 사다리꼴을 연상시켰다. 말을 할 때마다 가끔씩 보이는 톱니 이빨은 마치 상어와도 같았다.

    식탐의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섯 개의 뿔이 돋아난 머리를 천천히 기울이며 다시 한 번 눈앞의 사역마를 관찰하였다. 보랏빛 피부를 감싼 하얗고 넉넉한 천이 가볍게 흔들거렸다.

    식탐의 왕 앞에는 거대한 괴수가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괴수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높이만 이십여 미터에 달할 공동이 비좁게 느껴졌다.

    본 드래곤.

    언데드 계열의 최상급 사역마 가운데 하나.

    소체가 된 드래곤부터가 거대했는지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의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했다.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면 그 거대함으로 하늘을 뒤덮을 것만 같았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검은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갈색 피부의 인큐버스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던전 상회와 식탐의 왕 사이의 거래를 전담하는 담당자였다.

    식탐의 왕이 다시 말했다.

    “소체도 보통이 아니겠군. 어떤 드래곤이었지? 이 정도 덩치면 블루? 아니면 레드?”

    “레드입니다. ‘폭력의 왕’의 핏줄 가운데 하나입니다.”

    “호오. 그 놈의 후예란 말이지.”

    “4대손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덩치와 육체적 능력만큼은 폭력의 왕의 후예를 자처 할만 했지요.”

    마계를 지배하는 여섯 왕 가운데 하나인 폭력의 왕.

    ‘왕’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신기’ 가운데 하나를 소지한 그는 마계에 존재하는 드래곤들 가운데서도 최강의 존재였다.

    “여전히 자기 자식들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

    “후손을 모두 헤아린다면 수십을 넘어 수백에 달할 터이니까요. 더욱이 그는 지금 휴면기이니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식들에게 별반 관심이 없기는 식탐의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예 그의 피를 이은 아이들로만 구성된 사역마 군단이 따로 존재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식탐의 왕이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했다. 식탐의 왕은 폭력의 왕이 싫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왕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신기’와 ‘칠대죄악’.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은 자만이 마계의 진정한 절대자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칠대죄악 가운데 하나를 소지하는 것이야말로 마계의 패권을 다툴 왕으로서의 기본 요건이 아닐까?

    폭력의 왕.

    놈에게는 죄악이 없었다. 다른 왕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신기를 하나 보유했을 뿐이었다.

    불쾌함을 드러내듯 눈살을 살짝 찌푸린 식탐의 왕은 다시 본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놈의 후예가 자신의 사역마가 되어 전선에 나갈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전에 이야기한 데스 나이트와 엘더 리치의 구매는 어떻게 되었지?”

    “비밀거래를 원하신 터라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최상급 사역마는 그 숫자 자체가 적다 보니 수량에 민감한 이들이 많아서요.”

    여섯 왕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작금의 마계에서는 최상급 사역마의 구매 내역 하나하나가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다.

    식탐의 왕은 왼손에 낀 거대한 건틀릿- 왕의 신기 가운데 하나를 어루만졌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당초 그가 현재 추진하는 일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쪽 공백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이 다스리던 방대한 영지의 편린. 이제는 어중이떠중이들만이 남은 황량한 땅.

    하지만 놀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 땅에는 아직 수십 개에 달하는 던전이 존재했고, 나약하다하나 저마다의 던전을 소유한 가주들이 있었다.

    식탐의 왕 본인이 나설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에 다른 왕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남쪽 공백지의 패권을 차지한다면 어떠할까. 그리고 남쪽 공백지를 모두 손에 넣은 그 존재가 식탐의 왕 자신에게 투신한다면.

    그 과정에서 벌어질 모든 일들.

    그것들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다른 왕들이 예상하지 못할 전력이 필요했다. 눈앞의 본 드래곤은 그러한 전력의 시작에 불과했다.

    “기다리도록 하지.”

    식탐의 왕은 나직이 말했고, 인큐버스는 공손히 예를 표했다.

    본 드래곤은 머리를 조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

    “그쪽으로 간다!”

    “오우!”

    “요우!”

    용호의 외침에 존과 론이 연달아 응답했다. 죽창 대신 멋들어진 창과 방패를 장비한 둘의 곁에는 각기 민첩과 지력 특화로 진화한 고블린 ‘욘’과 ‘준’이 자리했다.

    네 마리 고블린은 제각기 싸우는 대신 넷이 뭉쳐 일종의 진형을 갖추었다.

    체력이 강한 론이 방패를 들어 방어를 담당하고 힘이 강한 존이 도끼를 들어 공격을 맡는다.

    몸놀림이 빠른 욘은 긴 창으로 적의 빈틈을 노리고 머리가 좋은 준이 즉석에서 나머지 고블린들을 지휘한다.

    각각의 장점을 잘 살린 하나의 팀이었다.

    고블린들이 - 용호는 혼자서 고블린 사천왕 혹은 고블린 레인저라고 불렀다. - 크레이지 엔트를 상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용호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투구와 망치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방패와 갑옷까지 장비한 스컬이 크레이지 엔트들을 사정없이 박살내고 있었다.

    스켈레톤 솔져에서 스켈레톤 워리어로 승급시킨 보람이 있는지 몸놀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그저 마구 휘두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망치를 휘두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묻어났다.

    3대 전 가주의 무기고를 탈환하고 사흘.

    마력 진화 덕분에 마력량에 여유가 생긴 용호는 던전 내 시설 개축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간 미뤄두었던 고블린들을 승급시키는 한 편 이제는 카타리나와 더불어 던전의 에이스라 할 수 있을 스컬을 진화시켰다.

    지금의 전력으로 금광을 탈환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그렇기에 용호는 실전을 겸한 경험치 벌이에 돌입했다.

    금광에 직접 들어가는 대신 금광 근처를 맴돌며 크레이지 엔트와 슬라임들을 사냥하는 일이었다.

    ‘적도 줄이고 훈련도 하고 일석이조로다.’

    훈련으로도 진화 숙련치가 쌓이긴 했지만 역시 실전만은 못했다.

    ‘정수만 제대로 얻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크레이지 엔트나 슬라임에게서는 제대로 된 정수를 얻을 수가 없었다. 두 던전 몬스터가 애당초 품고 있는 마력이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용호와의 격차가 심했기 때문이다.

    ‘설사 같은 가주라 해도 마력의 격차가 월등하면 제대로 된 정수를 취할 수 없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자신과 실력이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를 쓰러트리고 정수를 취해야만 하죠.’

    새삼 카타리나의 설명을 떠올린 용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크레이지 엔트 무리와 함께 나타난 병정개미를 상대로 분투 중인 카타리나가 보였다. 용호는 진화의 권능을 발현시켰다.

    [이름 : 카타리나 (여)

    [종족/직위 : 하프 서큐버스, 하프 다크엘프]

    [분류 : 마인 (중급)]

    [주속성 : 바람 / 어둠 | 부가속성 : 번개 / 물 / 대지]

    [주요 종족치 : 서큐버스 - 매력 / 마력 | 다크 엘프 - 민첩성 / 기량]

    [진화 숙련치 : 99/100]

    [서큐버스 : 매력 특화 0레벨 | ★★★ (3)] -> [승급 루트 개방 상태]

    [다크 엘프 : 민첩 특화 2레벨 | ★★★☆ (3.5)] -> [승급 루트 개방 상태]

    [하이브리드 0레벨 | ★★★☆ (3.5)] -> [진화시 승급 루트 개방]

    [서큐버스 : 마력 특화 0레벨 | ★★★☆ (3.5)] -> [승급 루트 개방 상태]

    [다크 엘프 : 기량 특화 1레벨 | ★★★ (3)] -> [승급 루트 개방 상태]

    [서큐버스] / [쉐도우 엘프]

    지금 당장이라도 진화를 시켜줘야 할 것만 같은 카타리나의 진화 정보였다.

    다섯 개의 진화 루트 가운데 무려 네 개가 승급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 반면 개방 예정인 승급 루트는 두 가지.

    ‘아마 서큐버스 관련은 전부 서큐버스가 되는 것일 테고, 다크 엘프 관련은 쉐도우 엘프겠지.’

    아직 진화의 권능은 완벽하지 못했다. 용호 자신이 강해질 때마다 진화의 권능 역시 강해졌고, 그 때마다 분석 가능한 항목 역시 늘어났다.

    ‘서큐버스 관련은 전부 0레벨이야. 그런데도 승급 루트가 개방되어 있다는 건… 하프 서큐버스에서 진짜 서큐버스가 된다는 뜻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짜 승급이라 보기에는 좀 애매했다. 차라리 아예 다크 엘프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쉐도우 엘프 쪽이 전망이 더 있을지 몰랐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것이 용호의 첫 고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브리드.’

    현재 승급 루트가 개방되지 않은 유일한 진화 루트.

    하이브리드로 진화시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어떤 승급 루트가 나타날까.

    카타리나는 애당초 서큐버스와 다크 엘프의 혼혈이었다. 그렇다면 이왕지사 어느 한 쪽으로 몰아가는 대신 양쪽 모두의 특징을 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문제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건데.’

    기면 좋고 아니면 만다는 느낌으로 섣불리 진화를 시킬 수는 없었다.

    마치 게임에서 레벨 업을 할 때마다 더 많은 경험치를 요구하는 것처럼 진화 역시 더 많은 진화 숙련치를 요구했다. 숫자 자체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100이었지만 1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경험의 양이 달랐다.

    진화에 따라 다른 진화 루트의 진화 포텐셜이 달라진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차라리 게임 캐릭터면 공략 사이트를 찾아본다든가, 아니면 새로 키운다는 느낌으로 실험이라도 해보았을 터인데.

    ‘역시 본인의 의사에 맡겨야겠군.’

    예속 사역마라 하나 카타리나는 하나의 인격체였다. 고블린 레인저처럼 지능이 낮은 것도 아니었고, 스컬처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본인의 희망을 따르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았다.

    “좋아.”

    저 병정개미만 잡고 나면 진로 상담 시작이다. 마침 딱 진화 숙련치도 100을 채울 것 같았으니 말이다.

    마음을 정한 용호는 허공에 손가락을 놀려 던전 전도를 담은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진 던전 현황도를 보며 사역마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카타리나, 스컬, 고블린 레인저는 용호 자신과 함께 크레이지 엔트들과 교전 중.

    트리엔트는 코볼트들과 더불어 마왕의 방 입구에서 훈련 중.

    살라멘더는 엘리고스와 더불어 던전 밖에서 사냥 중.

    벌써 사역마들의 숫자가 열 세 개체에 달했다. 처음 단촐한 세 식구로 시작했을 때와는 식비 지출과 마력 소모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일단은 소수정예로 간다.’

    여기서 섣불리 더 입을 늘릴 수는 없었다.

    전력을 고급화 한다.

    하나하나가 일당백인 소수정예 집단을 만들어 금광을 공략한다!

    ‘으음, 소수정예.’

    어째 정예화의 이유가 꽤나 안타깝고 볼품없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소수정예라는 단어에는 어쩐지 모를 낭만과 멋스러움이 묻어났다.

    ‘이럴 때 딱 경험치 벌이를 해줄 잔챙이가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사역마들과 용호 자신의 진화 숙련치도 쌓고, 정수도 습득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편의주의적인 생각이었기에 용호는 실소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던전에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던전의 영혼이 소리쳤고, 용호는 다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 막 병정개미를 쓰러트리고 호흡을 고르고 있던 카타리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

    용호와 카타리나는 동시에 돌아섰다. 스컬과 고블린 레인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왕의 방을 향해 달렸다.

    &

    < 제 8장 - 소수정예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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