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버는 게 예술이다-73화 (73/237)

73화. 19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자리한 거장들은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커리어를 쌓고 폭넓은 음악을 경험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늘 천재라 불리는 걸 당연히 여겼고, 그런 천재들의 곡을 늘 들으며 살아왔다. 귀는 누구보다 민감했고, 미세한 음조차 놓치지 않았다.

민감한 청각은 많은 정보를 뇌로 보낸다. 뇌에 받아들인 건 심장으로 다시 혈관을 타고 머리로 전달됐다.

한데, 이 두근거림은 뭘까?

분명 귀로 듣고 있음에도 심장이 먼저 반응을 하고 뇌가 아닌 입으로 전달됐다.

아! 터지는 옅은 감탄.

연주에 방해될까 싶어 그조차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심사위원석에 앉은 모두는 멍하니 피아노 건반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한강을 바라봤다.

즉흥환상곡을 연주하는 쇼팽의 모습도 저럴까?

도리도리. 아니다. 이건 저 아이만의 환상곡이었다.

호수가 있는 높은 숲을 거니는 건반의 선율에 우아함이 실렸다. 한걸음에 힘이 실렸지만, 그렇다고 무겁지는 않았다.

숲에 새들이 모여들어 노래를 불렀다.

호수에 살아가는 생명이 숲과 하나가 되었다.

빠르고 느리게, 느리고 빠르게 선율의 흐름에 마음이 빨려갔다.

유린하는 선율에 호흡을 뺏긴 순간.

딴!

연주가 끝났다.

“......”

연주가 끝났지만, 누가 먼저 나서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쇼팽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악보를 폐기해 달라 했음에도 아름다운 즉흥환상곡을 묻을 수 없어 유언을 어기고 대중에 공개한 이유가 홀에서 공개됐다.

사랑이 주는 모든 환상을 담아낸 곡.

심사위원들은 테이블 위로 올려진 손을 매만졌다. 땀이 고여있었다.

모든 연주를 다 듣고.

“다음 라운드에서 뵙지요.”

***

[뉴스 속보입니다. 미술천재로 알려진 한리버 대표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세계 3대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파이널 12인에 들었다는 소식입니다. 최종 라운드에 오른 한국인으로...]

긴 경쟁 끝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12인에 들게 되었다. 한국은 카드대란과 JK그룹의 비리로 떠들썩하여 몇 번이고 한강의 소식이 묻히다, 이번 12인에 들면서 모든 방송에서 한강의 소식을 내보냈다.

“정말 이 아이가 거기 본선에 오른 것도 모자라 12인에 들었다고?!”

홍라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저 딸아이의 바람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운이라도 바람이 이뤄지길 기도를 했는데.

그게 진짜로 일어났다.

선택된 천재만이 오를 수 있는 그곳에.

“이러지 말고 시아버지네랑 같이 벨기에로 가요!”

윤희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은 벌써 뮤직 샤펠 성에 가 있었다.

“아니 그래도 윤희야.”

홍라혜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 아니 대표님! 저 먼저 나가볼게요!”

윤희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

저리 좋을까.

홍라혜는 한동안 시선을 딸이 나간 문을 응시했다.

***

몇 분 전.

---어머님! 한강이가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12인에 들었대요!

며느리로부터 들려온 연락은.

“어머니! 아버지! 한강 아빠! 우리 한강이가 해냈대요. 최종 결선에 올랐다고 연락 왔어요!”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온 기쁜 한강의 소식에 얼굴 위로 화사한 웃음이 만개했다.

“내 손주가 해낸 겨?”

한옥순이 눈을 동그랗게 떠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손주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난 놈은 난 놈이야. 하하하.”

유한열은 껄껄 웃으며 잔에 소주를 채웠다. 기쁜 날은 역시 술만 한 게 없었다.

집으로 모여든 온 가족은 기쁜 마음을 소주잔에 담아 건배를 외쳤다.

“캬!”

곧 입안으로 들어가는 알싸함이 입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축하해, 동생.”

“제수씨, 축하해.”

“감사해요. 형님.”

거기에 큰집도 미화에게 축하를 전했다. 여러모로 복 받은 부부라 생각하며.

“내가 더 고맙지. 좋은 동네에 집도 해주고.”

하나 그것도 잠깐. 홍아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미화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하.”

“껄껄.”

“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중심에 한옥순과 유한열이 자리했다.

한옥순의 나이 예순여섯.

유한열의 나이 일흔다섯.

나이가 든 만큼 장사는 무리란 생각해 덕화는 결단을 내렸다.

[장사 접고 내려와 사세요. 돈이야 우리가 드릴게요.]

몇 번이고 산에서 내려와 살자는 말을 거부하던 둘은 최근 들어서야 거주지를 일산으로 옮기는 데 수락을 하였다.

지금 모인 장소는 압구정 아파트. 60평이 넘는 넓은 평수는 온 가족이 모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당연한 일인걸요. 우리만 이렇게 편히 살 수 있나요. 한쪽이 성공하면 서로 돕고 살아야죠.”

덕화는 부모님이 모아 둔 재산을 깔끔히 포기한다 선언을 하였다. 돈에 대한 욕심은 더는 들지 않았다.

“우리가 미안하네.”

돈 때문에 가족이 흩어지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조금은 샘도 나, 작은집을 보기 불편했는데.

작은 집은 예전과 변함없는 태도로 가족을 대했다.

그 모습을 보니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미안하긴요. 모두가 좋으면 된 거죠. 형님.”

미화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우리 모두 한강이 응원가요. 저도 해외는 다녀온 경험은 없지만.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한강의 성공은 가족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새로운 미래를 안겨주었다.

사람들에게 듣기로 엄청 대단한 일이란다. 전 세계 음대생이 바라는 자리에 음대생도 아닌 한강이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그 자체라 하였다.

이웃들은 이것저것 선물을 가져와 한강을 축하해주었고, 시간 되면 아들에게 개인레슨을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가슴으로 몰려오는 뿌듯함을 두 손으로 끌어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축하해. 아들.’

***

벨기에 브뤼셀.

“음... 이것참 곤란한데.”

해외로 나오면 늘 따라다니는 문제, 밥!

건물 안에 갇혀 생활하며 요리를 직접 해먹는데, 으휴.

“느끼해...”

고추장이 아른거리고, 김치가 아른거렸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청국장이 무척 그리웠다.

“휴...”

한강은 배고픈 배를 매만지다, 이내 멈췄던 숟가락을 움직였다.

이건 맛있어서 먹는 음식이 아닌, 배고파서 먹는 음식이었다.

배고픈 배는 기름으로 채워졌다.

[육성그룹 이건호 회장과 홍라혜 대표 벨기에로 떠나다.]

[한강 자동차 대가족 벨기에행에 오르다.]

그 사이 한국에선 육성과 한강의 집안이 벨기에로 향하는 소식이 대서특필로 다뤄졌다.

***

뮤직 샤펠 성 대기실.

“대체 선생님은 왜 그 자식을 올린 거야!”

칼 하인츠 케멀링의 의도를 모르겠다. 진작 떨어져 나갔어야 하는 그가 버젓이 버티고 자신과 같은 12인에 들어 파이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피아니스트에 대한 모욕이었다.

유명한 음대에 들어가 명당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해왔던가?

한데, 피아노라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던 녀석이 그들의 노력을 짓밟아 버렸다.

“선생님을 만날 수도 없고...”

답답한 속을 풀 길이 없었다. 배 안으로 넣어둔 음식물이 입 밖으로 쏟아질 거 같다.

한강을 보는 것만으로 역겨움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내가 이겨 보이겠어.”

그것만이 이곳에 뽑히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길이라 여겼다.

또한, 한국인을 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했다.

***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남자의 보폭이 심상치 않았다.

무척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코너를 돌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노란 금발의 남자가 작게 고개를 숙여 들어온 남자를 맞이했다.

칼 하인츠 케멀링, 들어온 남자의 이름이었다.

현재 12인에 오른 센 웬유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내가 말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만 확실하다면, 계획대로 진행될 겁니다.”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잔금은 모두가 끝난 뒤, 현금으로 입금될 거요.”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지요.”

“그럼 당신만 믿고 있지요.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선...”

“걱정 마시죠. 모든 건 제 실수로 빚어진 일입니다.”

“후후, 좋군요. 잘 부탁하리다.”

칼 하인츠 케멀링은 들려온 목소리에 만족하며, 들어온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

쉬이이이이이잉.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의 기분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국가적 행사.

사회자는 2천여 명에 달하는 청중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떨리며 홀 안을 메웠다.

“친애하는 폐하, 신사 숙녀 여러분.”

어느 때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청중들의 관심은 사회자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2003년 콩쿠르를...”

웅장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퀸 엘리자베스 피아노 콩쿠르 파이널을 알렸다.

***

흐읍, 후우.

떨리지 않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끄럽던 중국인 센 웬유도 긴장감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무게를 이겨내는 자가, 진정한 프로겠지.’

분명 프로들도 이런 큰 행사는 떨 것이다.

‘이 또한 시험이다. 중압감을 어떻게 내 거로 만드느냐, 작은 실수조차 용납해선 안 돼.’

시험이란 무대는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건드려 기본 실력을 깎아냈다. 한강은 흥분감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이곳에 들어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많은 이들의 실력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음악의 폭을 넓혔다.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감정을 피아노에 고스란히 녹였다.

“한리버!”

이십여 분이 지난 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떠, 시선을 가져갔다.

“네 차례야.”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한강은 기지개를 켜 뭉친 근육을 풀고 무대로 향했다.

***

“마지막 연주는 한국의 피아니스트...”

어느새 마지막을 남겨두고 있는 때.

“어머니, 아버지 이제 한강이 차례에요.”

윤희의 낮은 음성이 긴장하고 있는 덕화와 미화에게 향했다.

“......”

“......”

바로 옆에 이건호와 홍라혜가 있었지만, 윤희의 시선은 오로지 유덕화와 김미화에게 쏘려 있었다.

그런 딸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란 참으로 씁쓸한 것이었지만, 굳이 책을 잡지 않았다.

그들은 애써 시선을 무대로 집중했다.

“......한리버입니다.”

무대 위로 내리쬐는 조명 위로 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작게 홀 안에 퍼졌다.

멋스럽게 슈트를 차려입은 모습은 무대 안에 흐르는 작은 소음조차 흡수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피아노 앞에 자리했다.

마에스트로의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한강이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낸 순간.

지휘봉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협주곡 모차르트 피아노 23번,

“......?!”

아니 18번이 연주됐다.

‘뭐야. 이건...’

연습하지 않은 곡이 흘러나왔다. 한강은 당황스러운 눈을 마에스트로에게 던졌지만.

그는 등을 돌려 지휘봉을 긋고 있었다.

정말 십X 같은 상황이 라이브로 벌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