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9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JK분식회계로 시끄러운 국내 분위기는 벨기에로 향하는 한강의 기사를 묻어버렸다.
끼이익!
거대한 문을 받치고 있던 경첩에서 나는 소리였다.
문이 부르르 떨며 힘겹게 열렸다.
‘오페라의 유령이 떠오르네’ 그냥 떠오른 생각이었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세계각지에서 콩쿠르에 참석하기 위한 다양한 사람들이 주변에 자리했다. 그중에 동양인도 보였는데, 일본이나 중국 사람으로 여겨졌다.
“엇,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
그때 저만치서 들려오는 목소리. 손가락을 가리켜 말하는 걸 보면.
“날 말하는 건가?”
맞는 거 같다. 계속 한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무시하자.”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다. 그중에는 서로 안면이 있는지 러시아인도 끼어 있었다.
탐닉하듯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장소를 옮겼다.
“헤이, 브로. 혹시 한리버신가요?”
잡아끄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한강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맞습니다.”
억양으로 보아 중국인이다. 나이는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수준으로 보였다.
“와, 진짜다.”
터지는 감탄을 들으며, 잠시 기다렸다.
아직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꼈기에.
“전 센 웬유예요.”
중국인이 맞았다.
한강은 좀 더 유심히 센 웬유를 관찰했다.
키는 170~173cm 정도. 검은색 머리에 전체적으로 사각 외모에 작은 눈.
딱 중국인 외모라고 하면 될까?
눈빛은 호기심과 장난기로 가득했다.
“알아보신 대로 한리버 유한강입니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지만, 그렇다고 말을 놓진 않았다.
한강은 삐딱하게 틀어진 자세를 바로 하고 대화 자세를 취했다.
“왜 영어 이름이 한리버예요? 촌스럽게?!”
계속 입을 달싹이더니, 이걸 묻기 위함이었나 보다.
“팬이 지어준 별명을 사용할 뿐이에요. 영광이죠.”
“예~?! 그게요? 무지 촌스럽고 더러운데.”
더럽?
천역덕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이토록 얄밉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참을 인(忍)을 새기며 검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좀 있음 정신 수양은 80년이 되어간다. 무협으로 따지면 1갑자 반.
쪽은 당하지 말자.
“난 좋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내 회사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지 않나요.”
최대한 밝게 웃으며 입가를 최대한 옆으로 찢었다.
“음, 것도 그렇네요. 한국인이니까. 어울려요.”
‘이게 무슨 의미지?!’란 의문부호가 붙었다.
분명 영광스러운 별명이라 칭했는데, ‘한국인이니까’란 말이 붙자 뜻이 부정이 되어버렸다.
‘시비를 걸러 온 건가?’
이쯤 되니 의심이 되었다.
“쇼팽 즉흥환상곡 봤어요. 그거 당신이 친 거 아니죠?”
“......?”
‘맞네. 이 자식, 시비 걸러 온 게.’ 확신이 머릿속을 파고들자,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걸 왜 묻죠? 상당히 무례한 질문인 거 아시죠?”
“무례라뇨. 말이 안 돼서 묻는 건데.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런 거 밝힌다고 창피할 것도 없잖아요? 원래 그런 영상이 관심이 끌기 위해 기계나 사람들 도움받아서 올리잖아요.”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보다. 주먹이 심하게 떨렸다.
마음을 들킬 거 같아 주먹을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상상력이 많이 부족하네요. 어디서 많이 볼 법한 스토린데. 중국영화가 그러지 않나? 아차, 미안합니다. 모국을 욕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한때 모델과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연기실력을 갈고닦은 한강이었다.
어떤 나쁜 뜻도 없었다는 미안한 얼굴로 센 웬유를 바라봤다.
“하하하. 당신 본선에 오르기 힘들겠네요.”
아무래도 이번 승자는 한강이로 보였다.
눈가가 잘게 떨리는 그를 보아.
“하하. 본선에 올라 꼭 절 이기시기 바라요.”
한강은 끝으로 쐐기를 박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보시는 대로 본선에 오르려면 컨디션을 조절해야 해서요. 그럼 이만.”
몸을 돌렸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더 섞었다간.
‘꿀밤을 먹일 거 같아’ 욕구를 간신히 참아내며 자리를 피했다.
“이익! 저게... 하천에서 그림이나 그리던 하찮은 새X가.”
차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주변에 바라보는 시선들이 너무도 많았다.
센 웬유는 이번 일을 결코 가벼이 넘기지 않으리라 각오를 다졌다.
***
“이곳에 그 영상쟁이가 왔다고?”
독일 칼 하인츠 케멀링은 실소를 머금었다. 자신과 기업을 홍보하기 위한 거짓을 사실로 바꾸어 마치 자신이 친 것처럼 꾸며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사고자 하는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
한리버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림은 어떨지 모르나, 음악은 겨우 몇 달 공부를 했다 해서 터득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건 아니고, 독학으로 쳤어요’ 이 말은 그야말로 음악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칼 하인츠 케멀링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어울리지 않았다.
본선 통과자로 과연 명단에 오를 수 있을까?
전 세계 수많은 피아니스트를 사기꾼이 제치고 올라올 확률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다.
고르고 고른, 선택된 피아니스트만이 본선 무대에 오르게 될 터다.
“절대 그런 한국인이 본선에 오르게 해선 안 돼요!”
센 웬유는 목에 힘을 줬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이 너보고 이겨보라 했다지?”
무슨 생각에선지 칼 하인츠 케멀링의 얼굴에 비릿함이 머물렀다.
“네!”
“그래도 콩쿠르에 도전하는 건 피아노는 만질 줄 안다는 뜻이렷다...”
***
따끔따끔.
피부를 찌르는 듯한 시선들. 외계생명체가 당장 이곳에 등장해도 이 정도로 따갑지 않을 터다.
힐끔 보던 시선은 아예 노골적으로 변했다.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미술계에 있던 때랑 완전 다른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와중에 적개심마저 느껴지는 시선도 있었다.
‘실수한 기억은 없는데, 대체 뭘까?’
전생 시절에도 느껴 보지 못한 불쾌한 시선들이 참 적응되지 않았다.
어쨌든 장르는 다르지만, 자신은 세계에 이름을 올린 입장. 거기서 오는 시기일까?
알 수 없는 저들의 기분과 감정.
옹졸한 마음으로 좋지 않은 생각은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쨌든 여기도 전쟁터다 이거지. 선택된 20여 명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
명부에도 올리지 못한 햇병아리들이라 하더라도 저들도 프로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기를 들고 전장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신예들.
그들의 기세는 가히 뮤직 샤펠 성안으로 입장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한리버.”
그때 익숙한 이름이 귓가를 스쳤다.
가장 처음으로 호명된 이름이었다.
“아, 네!”
한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한강인 잘하고 있을까?”
일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한강의 생각뿐이었다.
무심히 떠난 연인이지만, 심장에 박힌 사랑은 한강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뭘 그리 멍하니 있어?”
“아, 엄... 대표님.”
홍라혜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멍때리던 윤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다.
지금도 충분히 실수를 저지른 꼴이지만.
“방으로 들어와.”
홍라혜는 안 되겠다 싶은지, 윤희를 데리고 대표실로 들어갔다.
“남편이 그렇게 걱정돼?”
홍라혜는 한강을 ‘윤희의 남편’이라 칭했다.
식만 올리지 않았지, 둘은 부부나 마찬가지였기에 한강을 진정한 사위로 받아들였다.
“그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끄덕.
“후후.”
독립하여 동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홀연히 떠난 사위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참 바쁜 남자야. 그치?”
끄덕.
윤희는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면 혼내줄까?”
“아, 아니요! 저 아직 눈물 안 보였어요.”
“......어쩌다 내 딸이 이렇게 됐을까? 그 말괄량이에 자기밖에 몰랐던 아이가.”
한때 윤희도 사고를 친 적은 많았다. 사춘기 시절 한강으로 인해 흐려졌을 뿐이지, 집에 있을 땐 나름에 히스테리를 부렸던 딸이었다.
고등학교에선 도도한 여자였고, 대학교에선 친구들과 잘 어울려 다녔지만, 남자와는 완전히 철벽을 치고 다녔던 여자가 윤희였다.
그런 윤희가 한강에 의해 마음이 태평양으로 갔다가도 인도양으로 향했다.
“대표님, 저 한강이가 파이널에 들면 휴가 내도 될까요...?”
윤희는 조심히 속마음을 밝혔다.
“한강이가 파이널에 들 거라 자신하는 눈치구나?”
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어떤 곳인가?
1937년 이자이 콩쿠르로 시작해 세계 2차 대전을 기점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변경되어, 명망 높은 세계 3대 국제 콩쿠르에 속하게 된 대회.
그만큼 수년간 음악에 매진하여 올라온 엘리트들이 득실대는 그곳에서 본선에 오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어느 콩쿠르의 본선에 올랐는지까지 경력에 넣을까?
그런 엄청난 업적을 우습게도 자신의 딸은 본선에 진출하는 걸 넘어 파이널에 오를 거라고 바보처럼 믿고 있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라 할 수 있을까?
“응, 아니. 네! 한강인 꼭 12인에 들 거예요. 나랑 약속했거든요. 지금까지 약속한 건 어긴 적 없던 남자예요.”
당시 피아노 연주를 잊지 못한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연주 등을 쭉 보고 들어왔다.
자신만 하더라도 바이올린 피아노는 어느 정도 할 줄 안다. 전문가에 비해 떨어질 줄 모르나, 적어도 귀는 트여 있다 자신했다.
미세한 힘의 조절과 터치.
건반을 노니는 장난스러운 손가락, 거기에서 느껴지는 터프함과 부드러움은 수많은 환상을 보여주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선율은 아직도 심장을 두들겨 주변을 노닐었다.
“좋아. 그만한 대회에서 12인에 속하면, 응원을 가줘야지. 휴가 쓰도록 해.”
아!
“대신 오늘 같은 모습은 보이면 안 돼. 휴가 자를 거야.”
“감사합니다. 대표님!”
저리 좋을까?
동거를 허락할 때와 또 다른 행복감이 얼굴에 머물렀다.
‘좋을 때야.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어.’
행복으로 물든 딸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얹어졌다.
그래서일까? 홍라혜는 속으로 기도했다.
벨기에에 있는 사위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
‘후’ 시험무대는 역시 다르다.
이런 조용한 압박감을 언제 받아봤을까?
그때가 아마 후계자로서 자각을 하기 시작한 때인 거 같다.
“시작하세요.”
한강은 천천히 걸음을 움직여 긴장감을 떨쳐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섰다.
‘시작이다. 이대로 간다.’
손가락과 손목을 가볍게 풀고 손가락을 건반 위로 올렸다. 건반 끝에 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작은 감촉에 긴장감이 확 달아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건반이 눌러지고 공기를 타고 흐르는 소리에 심사위원석에 앉은 사람들의 자세가 바뀌었다.
가장 익숙하고 내 인생을 표현한 곡. 쇼팽 즉흥환상곡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새롭게 재해석되어, 알을 까고 하늘을 날았다.
곧 환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