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4)
“으응?”
잠시 골드 선출전을 준비하던 에르페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거 뭐하는 거야?’
베젠이라고 했던가?
에르페유는 사실 모든 센터 수련생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몇몇만을 기억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강자와 싹수가 보이는 놈.
그런 의미에서 에르페유가 베젠의 이름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는 건, 베젠이 나름 괜찮은 수련생이라는 뜻이다.
“베젠입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센터에서 기대가 컸으나, 오만함 때문인지 한계선을 뛰어넘는 수련을 하지 않더군요. 그 때문인지 최종 승급반에서 번번이 탈락합니다.”
센터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파라스가 하는 설명에, 에르페유는 미간을 찡그렸다.
센터는 네 개의 클래스로 나뉜다.
초급, 중급, 상급,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최종반.
“수련을 제대로 안 한다는 뜻이야? 그런 놈은 어느 반이든 그냥 쫓아내라니까.”
“뭔가 계기만 있으면 분명 한 단계 성장할 것 같은데 그게 아직……. 재능이 정말 아쉬운 아이입니다. 덕분에 상급반에 매우 일찍 승급했었습니다. 아직 몇 년 도전할 수 있으니 지켜보고 있었지요.”
“몇 살이지?”
“올해 서른 되었습니다.”
“나이 서른이나 처먹고 저 꼬라지면 재능은 거기까지인 거야. 그리고 여기에 재능 없는 애가 있긴 해? 고만고만한 재능이면 열심히 하는 놈이 성장하는 건데.”
“엄중히 경고를 주겠습니다.”
파라스의 말에 에르페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연무장으로 돌렸다.
‘그건 그런데 저건 좀…….’
연무대 위에서는 로라스가 수련생들을 아주 묵사발로 만들고 있었다.
‘저런 애가 아닌데 말이지.’
로라스를 곁에서 지켜봤고, 어렸을 때 가문의 시험 결과까지 보고받았다.
굳이 나서는 성격은 아니나, 주변의 애들을 챙기며 시험을 통과했었다. 게다가 에렌에서 공작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누구에게든 허세가 없어서, 로라스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저 표정은 분명 비웃음이었고, 압도적인 실력 차에도 조금의 인정도 없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평상시 그가 아는 로라스가 아닌 것이다.
‘저거 힘 조절도 하는데…….’
기절하거나 쓰러지면 심판을 보고 있는 교관이 멈추기라도 하겠지만, 베젠은 용케 쓰러지지 않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건 곧 로라스가 지능적으로 그만큼의 힘 조절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항복은 안 하네!’
그건 그렇고 맞고 있는 베젠의 전의는 칭찬할 만했다. 저리 얻어터지면서도 검은 굳게 잡고 방어를 도외시 하며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 어떻게든 기회를 노려야지.’
이해는 한다.
억울하고 화가 날 것이다.
어떻게 이길지 생각하기보다는 한 대라도 때리고 싶은 마음일 터. 하지만 그럴수록 옷깃이라도 스칠 확률은 줄어든다.
‘로라스, 정말 무슨 생각인 거냐?’
보통 이런 비무에서는 서로 고통을 수반하는 건 당연하다. 기본이 멍이요, 심하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도 생긴다.
에르페유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것에 무심한 편이다. 그런 그가 봐도 로라스의 비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중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로라스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지켜보는 것이다.
“그만 됐다.”
비웃음만 짓고 있던 로라스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베젠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로라스가 잽싸게 부축하고는 사람들에게 그를 넘겨줬다.
그런 로라스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묘했다.
대부분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으나 몇몇은 적개심을 품었고, 또 몇몇은 겁을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출전은 계속되었다.
다시 로라스가 연무대에 올라왔을 때, 실버 대회에 참여하는 수련생들은 물론이고 교관과 최종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비무가 시작됐다.
베젠을 대했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상대는 로라스에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기 시작했다.
베젠의 경우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많은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오른쪽 다리. 옆구리. 그리고 겨드랑이.”
“…….”
“보고 움직이면 늦어. 상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게 좋지만, 놓쳤다면 예측하고 있어야지.”
“…….”
“하체는 단단하지만 유연성이 받쳐 주지 않으면 충격이 그대로 몸으로 간다. 스승님과 교관님들이 몸 풀 때 보지 못했어? 관절이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거?”
분명 비무인데, 실제로는 지도 대련이다.
‘나보다 더 잘 가르치는데.’
에르페유는 감탄했다.
로라스가 상대에게 지적하는 건 틀린 게 없었다. 오히려 보는 눈은 자신보다 나은 부분도 있다.
‘그럼 아까는 왜 그랬지?’
베젠에게 한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과 말들이 아닌가.
에르페유는 그 이유를 비무가 진행되어 가면서 알아챘다.
로라스가 상대에 맞춰 비무 방식을 달리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승부욕 가득한 놈들은 비웃어 가며 괴롭히고, 받아들일 만한 상대에게는 아낌없이 말을 퍼붓고 있었다.
‘이거 교관으로 삼아야 하나?’
에르페유는 흐뭇한 마음으로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로라스가 어떤 이유로 저런 방식의 비무를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로 말이다.
* * *
실버 대회에 나갈 사람들이 뽑혔다.
하지만 세 사람이 아닌 단 한 사람이었다.
“너라면 우승도 노려 볼 수 있다.”
“왜 안 나가? 이 기회가 어떤 기회인데!”
교관들이 설득했으나 2위, 3위로 뽑힌 수련생의 의지는 확고했다.
“제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우쭐했었습니다. 여기에서 최고면 세상에서도 최고일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수련생들의 포기한 이유는 로라스 때문이었다.
자괴감.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가득 찬 상태.
게다가 로라스는 자신들보다 어렸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한 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됐어! 모자람을 깨달았으면 대회에 나가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이득이 될 거야.”
에르페유는 교관들이 설득하는 걸 보다가 한마디 했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이상하리라. 하지만 거짓도 아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새로운 세계를 본 무인은 발전하게 된다. 로라스가 그것을 보여 줬으니 그들도 더 수련에 매진할 것이다.
게다가 무조건 실버 스워드 우승자가 될 로라스가 출전하는 만큼 문제 될 건 없다.
“봤지? 너 이제 무조건 나가야 한다. 가서 실버 스워드 가져와.”
에르페유가 흐뭇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로라스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장담 못 하겠습니다. 그보다 스승님, 잠시 이야기 좀.”
“여기서 하지?”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에르페유는 의아해하면서도 로라스와 함께 센터 실내로 들어와 물었다.
“그래, 뭔데?”
“골드 대회에 저도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응?”
에르페유는 순간 머뭇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다.
“로라스. 지금 뭐라 했냐?”
“골드 대회 참가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로라스의 대답에 에르페유가 말했다.
“나갈지 안 나갈지도 결정 못 했잖아. 아니, 그 전에 골드 대회에?”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로라스, 너의 재능과 성취 모두 높게 평가하지만 지금 골드 대회에 나가는 건 무리다.”
“확인하고 싶어서요. 이 세계 무인들의 수준을.”
“밖에서 확인할 것 없이 여기서 봐도 돼. 여기 교관들은 모두 내게 훈련받은 자들인데도 골드 대회는 우승을 장담 못 한다.”
“여기 교관분들은 훌륭하지요. 하지만 다른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단지 그 이유만이라면…….”
에르페유는 말끝을 잠시 흐리다가 말을 이었다.
“다른 한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기에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구나.”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로라스도 그 부분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만한 대가를 줘야지요.”
“아까 내가 했던 지도 대련으로 말이냐?”
“그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십 대의 검과 사십 대의 검은 무게부터가 다르다. 그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에르페유와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이 잔뜩 묻어 있는 물음.
하지만 로라스에게 답은 간단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에르페유는 자신의 본신의 실력을 알아도 문제 될 게 없다. 사실 일부러 알려 줘야겠단 생각도 있다.
‘촉천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니까.’
로라스는 그리 생각하며 말했다.
“압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냐?”
“확인하셔도 됩니다.”
자신과 맞대결하겠다는 뉘앙스에, 에르페유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무인이다.
로라스를 아끼긴 하지만 도전을 피하고, 살살 다룰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럼 확인해 보자.”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 * *
부우우우웅.
강력한 파공음.
휘몰아치는 압력에 흐트러지는 검로를 잡아야 했다.
카아아앙!
가죽으로 만든 수갑이나 검과 부딪칠 때 느껴지는 감각과 소리는 금속음과 다름없다.
‘권신이란 말이지.’
인정해야 했다.
그가 권신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자라는 것을.
에르페유의 공부는 중원의 권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무인에게 무기는 생명이다. 맨손보다 무기를 쥐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맨손과 무기를 쥔 자의 경계의 간극은 아득히 멀기만 하지만 가끔 그 경계를 뛰어넘는 권사가 나온다.
그 순간부터 그는 전혀 새로운 무인이 된다.
무림에서는 한 치가 길면 한 치가 유리하고, 한 치가 짧으면 한 치가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장병기의 유리함, 단병기의 치명성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인데, 권사가 맨손의 불리함을 극복했을 때 남는 건 장점밖에 없다.
그래서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치면 권사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경우가 많이 연출되는 것이다.
‘누구였더라?’
만류귀종이라 했던가?
에르페유를 보니 절로 떠오르는 무인이 있었다.
검왕이니, 도황이니, 창제라고 불리는 이들을 뛰어넘는, 유역후 시절 진심으로 감탄했던 고수.
‘소림의 까까머리. 불호가 공문이라 했지?’
그 단순한 나한권으로 날 여러 번이나 위험에 빠뜨렸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에르페유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내가 내공과는 분명 다른 포스의 성질에 익숙지 않을 뿐이었고, 그래서 까다로웠을 뿐이다.
씨이이이익!
권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칼로 베기 할 때나 나오는 파공음에 가깝다.
실제로 저걸 맞았다가는 칼에 맞았을 때의 상처가 생길 것이다.
‘화가 난 것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에게 나는 단순히 전도유망한 어린 제자일 뿐이었을 테니까. 비무를 이리 오래 끌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 승부욕이 넘치는 사내였으니 전력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 탓에 나 역시 전력을 다해야 했다.
촉천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까지 힘을 발휘할지 생각할 여력이 많지 않았다.
주도권을 뺏긴 채 막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이리 버티는 게 기적이라 할 정도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상대는 권신 에르페유.
이름이 알려진 고수들 중에서 그는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고수다.
그렇다는 건 지금의 내 경지로 스스로를 지키는 건 문제가 되지 않다는 뜻이다.
파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몸이 뒤로 쭉 밀려 나가는 바람에 균형을 잡으려 애써야 했다.
‘원하는 것을 알았으니!’
신체적, 시간적 조건이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나나 이대로 끝나면 뭔가 억울하다.
나를 위해 그리고 그를 위해 가슴 서늘한 한 수를 보여 주리라 마음먹었다.
보법을 빨리해 가면서 그와 거리를 벌리려 하였다.
에르페유는 거리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의 권역이면서도 나의 검역이기도 한 거리.
천왕의 검.
뒤를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