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5)
‘대체 어떻게 된 놈이지.’
모두가 돌아가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몸을 기댄 에르페유는 혼란스러웠다.
로라스의 제안은 분명 건방졌다. 하지만 아꼈기에, 그리고 조금은 호기심도 들어 그 제안을 수락했다.
봐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도 대련이다.
로라스가 다른 수련생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혹독하게 굴려 주리라 생각했다.
결론은 그러지 못했다.
지도 대련이 가능한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약해진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권신이란 칭호는 전장에서 얻었는데, 그 이후 10년 이상을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이 나갈 만한 전장이 없어서 못 나간 것이지만, 도전자도 사라졌다.
‘그것도 10년은 됐지.’
예전만 해도 강자를 찾아다니는 무인들이 있었고, 자신도 많이 도전하고, 도전을 받았었다. 한데 지금은 자신의 이름만으로도 문제 생기는 게 없을 정도니 찾아오는 도전자도 없다.
‘아직 주군이 가진 경지는 구경도 못 했는데 정체기라니!’
에르페유는 그리 생각하다 또 혼란스러웠다.
이런저런 이유를 모두 합쳐도 자신이 로라스를 압도적으로, 아니 그냥이라도 제압하지 못했다.
그뿐인가?
자칫 실수라도 했다면 그 마지막 검에 어디 하나 검상이 생길 뻔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실이다.
그 탓에 골드 대회에 출전할 클래스는 아니라는 말이, 허언이 되어 버렸다.
‘그 정도면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지!’
알려진 강자들이 나서지 않는 한 로라스의 우승 확률이 높았다.
그 나이에 실버에서만 우승하더라도 최연소 우승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닐 텐데. 골드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천지가 뒤집어질 일이다.
‘고민할 것 없다.’
둔한 게 문제지, 총명한 게 무슨 문제인가.
에르페유는 자신이 더 강해지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제자에게 추월당하는 건 스승으로서 영광이라지만, 아직 창창한 나이에 추월당하면 망신이다.
‘골드 우승자라……. 그것 역시 나쁘지 않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에르페유였다.
* * *
“두 달 후면 도착하실 거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페컴이 할아버지가 에렌으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전했다.
“생각보다는 빨리 돌아오시는군요.”
“에렌은 하나의 나라다. 황제 폐하라 해도 오래 잡아 둘 수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지.”
누군가 들었다면 반역이란 오해를 할 수 있는 언사였으나, 에렌에서는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북부, 특히 에렌에서만큼은 할아버지가 황제와 동급 또는 그 이상이었다.
“아! 집사님.”
묻는다, 묻는다 해 놓고서 묻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예전 제가 에렌에 있을 때, 네페리온에서 사람이 온 적 있지요? 이번에 오면서도 만났는데. 어떤 사람입니까?”
“여자아이를 봤나?”
“네. 병사 중에 네페리온 신도가 있어서 제1후계자라 듣긴 들었는데. 맞습니까?”
페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다. 네페리온 신국의 후계자가 여럿이긴 한데, 여자아이는 그 아이 하나뿐이니까. 제1후계자도 맞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외부의 행사를 소화하는 건 제1후계자의 몫이니까.”
“너무 어리던데요.”
“교황의 선출은 나이와 업적, 이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교단에서는 오로지 신성력만 보니까. 역대 제일 어린 교황은 일곱 살이기도 했다.”
페컴은 주의를 주듯이 말을 이었다.
“보면 반드시 예의는 지키도록 해. 근래는 그냥 교황이 다스리는 상징적 의미만 있는 나라나, 옛날에는 그 위세가 대단했었다. 후계자들까지 각기 다른 문양이 있을 정도로 말이지.”
“지금은 뭐가 다릅니까? 여전히 가장 많은 신도가 있는 교단이 아닙니까?”
“네페리온 신국은 국(國)이란 명칭이 붙었으나, 정확히는 총교단에 불과하다. 지휘부는 규모가 작아. 그리고 나라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고. 무엇보다!”
페컴은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말했다.
“30년 전 신황대전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한 이후로 모든 힘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페컴의 말은 그랬다.
원래 신국은 정말 하나의 나라라 할 정도로 규모도, 그 위세도 막강했다고 한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는 법.
신권과 황권의 충돌이 벌어졌고, 승자는 각 나라의 황제와 왕들이었다.
그 이후 네페리온 교단의 헌금에 세금이 매겨졌고, 각종 명목을 붙여 교인들에게 수탈에 가까운 헌금을 받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했다고 했다.
“그 대전에서 주군께서 가장 큰 몫을 하셨다.”
“할아버지께서요?”
“그래.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이건 내가 할 말이 아닌 것 같구나.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다오.”
페컴은 말실수를 했다고 여겼는지 급히 수습했다.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왜 이곳에 있었는지. 북부에 있었으니 다시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거다. 이 시기가 되면 항상 지원을 요청하거든.”
“무슨 지원요?”
“재정적 지원 정도지. 매년 꽤 많은 액수를 기부하고 계시지.”
좀 이상하다. 신황대전에서 할아버지의 역할이 컸고 했는데, 그러면 재정 지원은 말이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도 아닌 할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한다는 건, 자신을 죽인 사람에게 도와 달란 꼴 아닌가.
할아버지가 많은 액수를 기부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때 페컴이 말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두면 돼. 혹시 네가 에렌에 정착할 생각이라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다.”
그건 사양이다.
할아버지의 호출만 아니었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실 지금도 락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또 여쭙겠습니다.”
“곤란한 게 있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페컴이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말을 이었다.
“좋은 방향으로 흐를 거다. 주군께서 너를 각별히 여기시니 말이다.”
“너무 각별한 건 부담인데요.”
가볍게 받아들이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끝이 없다더니.’
분명 무의 끝을 보았다 생각했고, 실제로 등선……이 아니라 전생이었지만…… 여하간 분명 그러했다 여겼다.
‘뭐든 게을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란 뜻이겠지.’
에르페유와의 대련은 분명 내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줬다.
‘작고, 사소한 부분도 정성스럽게! 그리하여 능히 변화 시킨다.’
예기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 *
뒷골목, 왈패, 양아치, 밤의 거리, 건달, 난봉꾼, 도박, 여자, 기루, 칼, 의리, 배신 등등.
흑사회를 논하고자 할 때 생각나는 단어들이다.
흑사회.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별거 아니다.
사회에 대놓고 나오지 못하는 것들이니 앞에 흑(黑) 자 하나를 붙인 것뿐이다. 반(反) 자 붙이는 것보다는 좀 더 나으니까.
흑사회에 존재하는 것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량, 게으름뱅이, 사기꾼, 도둑놈들. 내 노력보다는 남의 것에 빌붙어 먹고사는 부류.
그런 것들에게 피를 빨려 먹히는 부류.
그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많은 돈이 오간다.
돈 냄새 풀풀 나는 곳에 무인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무슨무슨 회, 무슨무슨 파, 무슨무슨 방이라 이름을 칭한 수많은 것들이 거기에 착 달라붙어 있다.
그런 무인들이 뭔 힘이 있겠냐고 묻는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절정고수도 먹고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각기 달라서 가진 무력으로 추구하는 바도 다르다.
돈을 추구하는 무인들이 어디 한둘로 그칠까?
날고뛰는 무인들도 흑사회로 흘러든다. 그리고 뒤통수를 치든지, 정면으로 달려들어 배를 쑤시든지 싸운다.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많은 곳이니까.
날고뛰는 무인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놈들이 흑사회의 무인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들어 오는 무인들과 싸워야 하는 놈들이기도 하고.
사람 사는 세계는 다 똑같다.
중원에 있는 것이 이 세계에 없을까?
―에렌은 정말 많은 조직이 있습니다. 먹을 덩어리가 크니까요. 규모가 있는 조직은 귀족이 뒤를 봐주기도 합니다.
상인 렘이 정보를 줬지만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만날 사람은 다 만났으니, 할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 이 흑사회 조직을 어느 정도 정리하려 했다.
계획은 간단하다.
북부의 마적과 산적들을 통합시킨 것처럼, 에렌의 흑사회도 그럴 생각이다.
조심은 해야 했다.
다른 귀족들이 괜히 나서지 않고, 알게 모르게 뒤만 봐주는 건 아니니까.
‘좀 쓸 만한 놈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밤이 되었고. 에렌의 흑사회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성을 나섰다.
번화가에 도착했다.
‘테라나 포플러라도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나온 후에야 이곳의 지리가 익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탑과 센터를 오갈 때는 마차를 이용하여, 길은 알았으나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색다르긴 하네.’
야시장.
낮에 노점들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노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노점들이 파는 길거리 음식들의 냄새가 밥을 먹었음에도 배 속을 자극했다.
‘나쁘지 않네.’
이렇게 걸으니 왠지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중원에서도 이런 야시장을 돌아다닌 경험은 없다.
원체 바쁘기도 했고, 한 번 밖으로 나가면 수행원들이 너무 많이 달라붙어 혼란스러웠으니까.
아이처럼…… 그래, 아이처럼 어느새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길거리 음식도 이것저것 먹어 보고, 작은 장신구며 봉제 인형 따위를 파는 것도 구경했다.
이게 소박한 행복이지 싶다.
그 와중에 건들거리는 사내들도 보았지만, 목적을 잊었기에 그냥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기분인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분명 그랬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눈에 뜨였다.
행색이 일반 아이들보다 남루하고 비쩍 마른 게 ‘나 배고파요.’ 하고 있었으며, 대체 언제 씻었는지 추측이 안 될 정도로 땟물이 전신에 흐르는 느낌.
아주 옛날.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막내도 저랬지.’
그 순간 아이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 푼만 주시면 천국 가실 거예요.”
“빵을 먹은 지 이틀이 지났어요, 한 푼만 주세요.”
구걸을 하면서도 내게 가까이 달라붙지 않았다.
이유는 짐작한다.
전신에 멍이 있는 것을 봐서 너무 가까이 붙으면 맞았으리라.
아이들 패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말했다.
“일해서 먹고 싶은데 아무도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혹시 아무거나 시켜 주시면 뭐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아이들의 형이냐?”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친동생들은 아니지만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아무거나 시켜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빵 하나씩 먹여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돈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구걸하는 소년.
‘똑똑한 놈일세.’
동냥질의 기본이 되어 있는 놈이었다.
누구나 거지가 일거리를 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저런 말은 기분을 좋게 한다.
“특별히 시킬 일은 없지만.”
허리에 찬 가죽 주머니를 여니 은화가 보인다.
페컴이 혹시 모르니 가지고 다니라고 챙겨 준 전낭이다.
은화 한 개의 시세가 동화 수십 개였지만 그대로 하나 꺼내서 건넸다.
“받아.”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전 몇 닢을 구걸했을 뿐인데 은화라니. 손에 쥐어나 본 적이 있을까?
“고맙습니다, 공자님.”
소년의 말에 뒤에 있던 꼬마 애들도 소리 높여 말했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그리고 난 웃었다.
실로 재능이 출중하지 않은가 말이다.
동냥질도 그렇지만 도둑질도 저리 기본이 되니 크게 될 놈들이다.
뭔 소리냐고?
난 봤다.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작은 꼬마 아이가 전낭을 열어 은화 한 개를 빼 가는 걸.
모른 체했다.
그냥 동냥을 더 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소년에게 준 건 동정이지만, 꼬맹이가 돈을 훔친 건 대가를 치른 거라 생각했다.
‘훌륭한 길잡이가 되지 않겠어?’
나를 뒷골목으로, 그들의 세계로 안내할 안내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