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59화 (159/204)

159회

“그런데 혜경 샘.”

“네?”

“저한테는 왜 안 물어보셨어요?”

“뭘요?”

“하융이 그 여자 둘 중에 누굴 첫사랑으로 여길지를요.”

…그거야.

나로선 그걸 금홍에게 묻는 것도 웃긴 일이니까?

“…그러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나 좋아하냐고 물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괜히 콩닥콩닥 뛴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어쩌면 뻔한 것이었을까.

“저는… 여자2요.”

쏴― 하는 물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놀랄 것도 아니었다.

선택지는 애초에 두 개뿐이니까.

하지만 금홍이 여자2를 고른 순간, 마치 그녀를 모델로 여자2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겨우 되물었다.

“왜요?”

“그래야 하융이 행복할 것 같아서요.”

의외의 답이었다.

나는 수세미질을 하는 것도 잊은 채 금홍을 봤다.

그녀는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어 갔다.

“여자1은 하융을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융은 지금 여자1과 뜨거울진 몰라도 언젠가, 나이를 좀 더 먹고 나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

“그때의 그 마음이… 사랑이라기보단 여자1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불과했다고요.”

상당히 충격적인 이유였다.

여자1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라니.

“…어째서요?”

“하융처럼 똑똑한 사람이 여자1이라는 사람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어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것도 욕심이잖아요. 서로를 속이는 일이기도 하고. 이건 마치… 그런 관계 있잖아요. 외로움 때문에 서로를 곁에 두는 관계.”

“….”

“만약 여자1이 떠나도 하융은 그리 슬프지 않을걸요? 오히려 그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겠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전생의 기생 금홍이가 떠난 후.

나는 얼마간 슬퍼했다가… 곧장 결혼을 했다.

금홍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잘 살기 위해.

환생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금홍을 딱히 그리워한 적이 있었나?

첫사랑이란 이름을 걸어 두긴 했지만… 어쩌면 내가 그리워한 건 금홍이 아니라, 그 시절 금홍을 사랑한 내 자신이었을지도.

“그럼… 여자2는요?”

금홍은 말없이 접시를 헹궜다.

입술을 꾹 다문 채.

한참을 그렇게 모른 척 설거지를 하던 금홍이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여자2는 남을 사랑할 준비가 된 여자라고 생각해요.”

“….”

“저는 다른 거 안 바라요. 하융이 사랑받았으면 하거든요. 그게 다예요.”

남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인 이후, 나는 왠지 멍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파티는 끝났다.

“형.”

“….”

“아, 형!”

“…어!?”

나는 흠칫 놀라 지훈을 봤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빈 와인잔을 들고 있다.

피터 한과 금홍은 이미 떠난 후.

“테이블 치우다가 왜 넋을 놔요?”

“아, 아냐.”

“아까 설거지하면서 금홍 샘이랑 뭔 얘기 했어요? 그때부터 상태가 이상한데?”

“얘긴 무슨. 스피커나 다 떼라.”

“아, 맞아. 스피커. 괜히 샀어.”

피터 한에게 ‘음악 선곡’을 완전히 밀린 지훈.

뒤늦게 구시렁대며 스피커를 제 방에 들여놓는다.

그동안 나는 설거짓거리를 개수대에 넣었다.

지훈의 말처럼, 아까 금홍과 얘기를 한 후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 여자2는 남을 사랑할 준비가 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 말이 꼭, 금홍과 나 사이를 두고 한 말 같아서.

물론 금홍 입장에선 말 같지도 않은 착각일 수 있겠지.

내 생각을 알게 되면 내심 비웃을지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이 드는 걸 어쩌란 말인가.

아무튼 홈파티가 한 차례 정리되고, 나는 바로 씻고 침대에 누웠다.

평소 같았으면 작업실에서 뭐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그냥 마음 정리를 좀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하융의 첫사랑 말이다.

사실 ‘사랑’이라 한다면….

전생의 금홍이가 더 어울린다 생각했다.

그만큼 우린 불같은 사랑을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들었던 금홍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똑똑한 하융은 알고 있을 거라고.

여자1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몸을 웅크리고 생각했다.

이건 내게 조금은 가슴 아픈 문제였다.

내가 실제로 해 보고, 이뤄 본 사랑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뜨겁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잿더미만 남은 폐허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가 현재 꿈꾸는 사랑은….

이상적이고 안정적이며 날 성장하게 한다.

하지만 아직 이뤄본 적이 없어 생생하지 않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그래, 답은 하나뿐이다.

일단 하융을 그 상황에 던지자.

내가 모르는 이 답을, 하융은 알고 있을지도.

* * *

<지팡이> 1권이 집으로 배달됐다.

그것도 한 박스 가득.

작가는 책이 나오면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는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사인본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원래라면 더 일찍 받아야 했지만… <지팡이> 1권 같은 경우는 사전 예약으로 1쇄가 다 나갔다.

그 덕에 작가인 나조차도 내 책 구경을 못 한 것이다.

2쇄가 끝난 지금에야 이렇게 받아 보게 된 거고.

아무튼 나는 거실에서 책에 사인을 했다.

책을 보낼 곳은 적지 않았다.

‘팀 이상’ 팀원들, 조인후 감독과 강인춘 PD, 한국대학교 교수진들, 동료 작가들, 또… 해외의 출판사까지.

상자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저린 팔을 툭툭 털며 마지막 두 권을 꺼냈다.

한 권은 나의 소장용이고.

나머지 한 권은… 도마크 출판사로 보낼 거였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길지 고민했다.

의례적인 인사치레로는 부족한 이 기분.

그렇게 펜을 든 채 가만히 책 내지를 내려다보다가, 일본어로 이렇게 적었다.

― 하융을 끝까지 지켜봐 주시길. 이상 배상.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융은 언젠가 일제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할 글을 쓸 테니까.

물론… 그건 그가 조금 더 성장한 후의 일이겠지만.

지금 당장 하융이 맞닥뜨리고 있는 건, 피할 길 없이 몰아칠 그의 첫사랑이다.

책을 배송용 봉투에 다 넣은 후.

그걸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작업실로 들어왔다.

내일쯤이면 지훈이 책들을 우체국으로 가져가 줄 거다.

작업실 칠판에 붉은색 마카로 동그라미 된 글자.

‘하융의 첫사랑’

나는 그 글자를 가만히 바라본 후.

<지팡이>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종이책으로 따지자면 2권의 끝부분쯤.

하융은 종로의 한 기방에서 기생 ‘희’를 만난다.

희는 어딘지 권태로운 얼굴을 한 미인이다.

그녀는 딱히 남자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지만,

그런 노력 없이도 남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는 걸 잘 아는 여자다.

하융도 처음엔 그 ‘남자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점차 ‘희’는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가 그럴듯한 작가라는 게, 작가 특유의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게, 동시에 어딘지 자신과 같은 권태로운 눈을 한 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융과 ‘희’는 첫눈에 반한다.

마치 거울 속 자신에게 반하듯 속절없이 빠져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연애를 하진 않는다.

‘희’는 이렇게 말한다.

연애하는 기생 따위를 찾는 남자는 없다고, 결혼을 할 게 아니라면 연애는 꿈꾸지 말라고.

억울하면 너 역시 다른 여자를 만나도 좋다고.

그럼에도 하융은 ‘희’가 좋다.

가장 좋은 시간은 그녀를 위한 시를 쓰는 시간이다.

문학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희’지만, 그녀는 그 시들을 슬쩍 보곤 서랍에 넣어 버린다.

시는 그렇게 하찮게 쌓여 간다.

하융은 돈을 벌기로 한다.

돈을 벌어 기방에 몸값을 주고, ‘희’를 데리고 나와 결혼할 꿈을 꾼다.

자신과 비슷한 우울한 성장기를 보낸 여자.

비슷한 권태와 약간의 반골 기질마저 닮은 여자.

동시에 육체적 쾌락을 아낌없이 나누는 여자.

하융에게 이 모든 조건은 완벽했다.

그런 시간이 일 년쯤 지났을까.

하융은 어느 날 친구의 집에 놀러 간다.

꽤 부자인 그 집엔 상주 가정교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심’으로, 여대의 인문대 재학생이다.

여자라곤 기생밖에 몰랐던 하융은 의아하다.

여자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한다고?

여자란 남자를 잘 만나 시집을 가면 그만이 아닌가?

남들보다 똑똑한 하융은 그 똑똑한 만큼 심심하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여대생.

그녀에게 묘하게 관심이 간다.

하융은 장난질을 좀 치기로 한다.

기생들에게 하던 대로 화려한 글솜씨로 연정의 편지를 쓴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기생들은 그런 편지를 받으면 까르르 웃어넘기고, 편지를 받았단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곤 했으니.

그 여자가 웃으면 여자를 웃게 했으니 좋은 일이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른다면 그것도 재미난 일이 아닌가.

아무튼 하융은 그 편지를 몰래 ‘심’에게 준다.

‘심’은 그 앞에서 편지를 읽어 보더니,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재미없는 여자.

하융은 그렇게 툴툴거리곤 그녀를 잊는다.

그리고 한 달이 흐른다.

하융은 오랜만에 그 집에 놀러 간다.

친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거실에 앉아 있던 하융에게 ‘심’이 다가온다.

그녀가 내미는 하얀 편지 한 장.

― 하도 안 오셔서 못 드리는 줄 알았습니다.

하융은 엉겁결에 편지를 받는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심’이라는 여자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편지를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친구가 오기 전에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다.

편지에 쓰인 것은 고백에 대한 명백한 거절 의사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친구가 하융의 이야기를 했는지,

혹은 잡지에 몇 번 발표한 하융의 글을 봤는지.

그녀는 하융에게 편지로 이렇게 물었다.

― 어떤 인간이 글을 쓰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참으로 난해한 물음이었다.

젊은 나이에 작가가 된 하융은, 그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쏟아 내기 바빴으니.

그 물음은 ‘자신에게 솔직해져라’라는 스승의 말보다 한 차원 깊은 것이기도 했다.

스승의 말이 하융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면, ‘심’의 말은 하융과 그밖의 인간에게도 포함된 물음이니까.

하융은 여자의 현학적 물음 앞에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철학과 역사학을 모두 쏟아부어 긴 편지를 썼다.

물론 이런 치졸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너보다 아는 것이 많다는 치기 어린 마음.

편지는 여자에게 배달되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답장이 왔다.

― 저는 글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나누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 대해선 어찌 여기시나요.

그 역시 공손하지만 본질을 찌르는 물음.

풀어내 보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까지.

하융은 또 밤새 편지를 쓴다.

하지만 그 편지는 아침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하융을 편지를 모두 찢어발기곤, 백지에 이렇게 쓴다.

―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모 시에 모 다방으로 오십시오.

“…흠.”

나는 여기까지 쓴 후, 손가락을 멈췄다.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여자 캐릭터를 다루는 부분이라, 왠지 좀 더 조심스러운 것이다.

‘팀 이상’ 회의에 올리기 전에, 금홍이에게 먼저 보여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어색한 점이 있다면, 회의에 올리기 전에 수정을 하는 게 좋을 테니.

금홍에게 톡을 보내 사정을 설명했다.

금홍은 흔쾌히 읽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바로 소설 원고 파일을 보냈다.

머리를 식힐 겸 주방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자신과 성별이 다른 캐릭터를 다루는 건, 남녀를 떠나 작가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 역시 이게 도전이라면 도전이었고.

그렇게 커피잔을 비우며 머리를 식힌 후.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금홍의 톡이 와 있었다.

벌써 다 읽었나? 싶어서 톡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말로 설명 못 할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 혜경 샘… 왜 자꾸 ‘심’ 이름에 제 이름을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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