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회
“하융의 첫사랑이에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말랑말랑하군요.”
피터 한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이네요. 하융은 젊으니까.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 때도 됐죠.”
“어떤 여자예요, 형? 얘기 좀 들려줄 수 있어요?”
“맞아요, 궁금해요.”
다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말 못 해 줄 것도 없지만….
“사실 고민이에요. 이 여자 캐릭터에 대해서.”
“어떤 점이요?”
금홍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눈을 보자, 조금 난감했다.
사실 여자 캐릭터는 여자의 자문을 받는 게 좋다.
아무래도 성별 차이에 따른 생각 차이란 게 있으니.
게다가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보수적인 사회에서 남녀의 생각 차이는 더 뚜렷하다.
당연히 금홍에게 얘길 들어보는 게 좋겠으나, 문제는….
그 두 여자가 금홍과 관련이 있다는 거겠지.
정확하게는, 금홍‘들’과.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다.
물러나지 말자.
“하융은 대학생이 된 후 등단을 하고 문단에 어느 정도 안착을 하잖아요. 우울과 권태를 드러내는 작품 세계도 점점 확고해지고. 그런데 그 시기에 하융은 두 여자를 만나게 돼요. 쉽게… 여자1과 여자2라고 할게요. 하융은 이 둘을 비슷한 시기에 만난 게 돼요.”
“음… 말해 보세요.”
“여자1은 기생이에요. 당시 문인들과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부류의 여성은 딱 두 종류였죠. 독서를 할 만한 여유가 있는 상류층 자제, 그리고 작가들을 상대해야 했던 종로의 기생.”
“기생은 좀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같은 작가나….”
지훈이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기생’이란 단어가 불편했을지도.
“그 시절엔 여성 작가는 정말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어. 그리고 당시 작가들은 성별을 구분해서 놀았지. 하융은 작가군에서도 아웃사이더야. 친한 남자 작가 하나 없는데 여자 작가와 연이 닿는 것도 어색하잖아. 게다가 당시 여자 작가는 높은 확률로 대단한 엘리트였을 텐데… 막말로 가진 것 없는 하융을 상대해 줄 리가 없고.”
“그럼 하융이 기생이랑 어울리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 말이에요?”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응. 작가에게 가장 손쉬운 말 상대는 기생들이었으니까. 당시에 기생은 종로에 나가면 발에 채게 많았어. 그만큼 흔한 직업이라… 사실 지금만큼 천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흠… 그렇구나. 그래서, 어떤 기생인데요?”
‘어떤 기생’이라….
당연히 내가 아는 그 ‘기생 금홍’이었다.
전생의 나를 버렸던 그 금홍이 말이다.
“대단히 매력적인 여자야. 노래, 시 짓기, 춤… 못 하는 게 없지. 꾸밀 줄도 알고. 하지만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남자를 우습게 알아.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돈이 좋은 거야. 하지만 하융은 젊잖아. 그런 제멋대로인 미인에 끌리는 건 정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글을 쓰지. 글을 많이 팔면 그녀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건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금홍이 말했다.
“그렇죠. 불쌍하죠. 하지만 손해 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째서요?”
“하융은 그녀를 통해 사랑이 뭔지 뼈저리게 알게 되거든요. 인생을 바쳐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맹목성, 그 달콤한 웃음에 빠져 죽길 밤마다 바라는 멜로적인 마음 같은 거요. 젊은 하융은 운 좋게 격정적인 사랑에 일찍이 빠져 버렸고, 그 힘을 그녀와 문학에 쏟아부어요. 그는 사랑시를 많이 쓰게 되는데… 그게 그의 문학적 성장을 이끌어 내죠.”
“또 다른 성장이네요.”
피터 한이 말했다.
“그렇죠. 1부가 인격적인 성장이라면, 2부는 문학적인 성장이니까요. 사랑을 모르는 작가가 사랑에 대해 쓰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럼 두 번째 여자는요?”
금홍이 말했다.
나는 조금 멈칫했다.
“…여자 2는 가난한 여대생이에요.”
“여대생인데 가난할 수 있어요? 그 시절에?”
피터 한이 딴죽을 걸었다.
말이 딴죽이지, 적확한 지적이었다.
“예리하시네요.”
“그 시절 자료를 좀 보내 주셨어야지.”
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지팡이>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20세기 초반의 시청각 자료를 보낸 일을 두고 하는 말이군.
그때 적잖이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아무튼 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가난한데 대학에 갔다는 점에서 이 여자의 캐릭터가 확립되는 거죠. 아주 똑똑하고 성실한 여자거든요.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만한 집안에서 태어 나진 못했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 생활을 하는 여자예요. 입주 가정교사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가다가 그 집에 손님으로 온 하융을 만나게 돼요. 하융의 대학 친구가, 여자가 가르치는 아이의 형이거든요. 하융은 여자에게 끌려요. 성적으로 끌린다기보단… 인간적으로 끌린다고 해야 하나요?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타입의 사람이거든요. 공손하고, 보수적이면서, 대단히 성실한데… 속으로는 어떤 줏대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는 거죠. 하융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죠.”
“그런데 두 사람의 접점이 있어요?”
지훈이 물었다.
“여자는 기생처럼 시를 짓진 못하지만 문학은 좋아해. 자신이 작가가 될 깜냥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국어 선생이 되고 싶어 하거든. 그래서 두 사람은 편지를 나누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
“편지라.”
피터 한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편지. 편지는 하융의 문학관과 예술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요. 하융의 스승이 말했잖아요.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줄 알아야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하융은 그 훈련을 그녀와의 편지를 통해 해내거든요. 세상의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와 본질에 대해 긴 글을 쓰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끌리게 돼요. 정신적으로 의지하기도 하고요.”
나는 거기까지 말했다.
금홍이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2의 모델은 지금 눈앞의 금홍이었다.
금홍이는 멀뚱멀뚱 날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선.
지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흠… 여자1과 여자2 둘 다 매력적이긴 하네요.”
“그렇긴 한데, 사랑의 종류가 다르니까. 여자1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이라면 여자2는 뭐… 요즘 말로 하면 소울메이트라고 해야 하나. 그런 존재를 만난 거지.”
“전 여자1 쪽이 더 멋진 것 같아요.”
“왜?”
“사랑이라는 건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남녀관계니까. 육체적 끌림이나 관능에 이끌리게 되지 않을까요? 특히 남자 입장에서 ‘사랑’을 떠올릴 땐 더 그렇죠. 물론 여자1과 여자2를 두고 봤을 때, 정신적으로 리스펙하게 되는 건 여자2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1에게 마음이 타오르잖아요. 전 그렇게 설명 못 할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제법 일리 있는 말.
동시에 보편적인 말이기도 했다.
지훈의 말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겠지.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너 만약에 진짜 그런 여자 만나면 절대 제정신 못 차릴걸? 양말 한 짝 못 챙기고 쫓겨날 거다.”
“엥? 형 그런 여자 만난 적 있었어요?”
그 말에 금홍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봤다.
나는 좀 당황스러워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냐. 대학원 다니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리고 재빨리 피터 한에게 물었다.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두 여자 중에서요?”
“네.”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보면 첫사랑 에피소드를 마무리 못 하신 모양이네요.”
그가 예리하게 말했다.
하여간 못 당한다니까.
“네, 맞아요. 결과적으론 두 여자 모두 하융을 떠나가거든요. 한 시절의 사랑인 거죠.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것도 모를 때 만났던 남녀는 그 관계가 끝나고 나서야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요.”
“….”
“두 여자 모두 하융을 떠난 후. 하융이 누구를 사랑으로 기억할지… 전 그걸 못 정하겠어요.”
세상의 모든 감정들.
그중에 사랑만큼이나 어려운 건 없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육체적 관계.
한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정신적 관계.
어느 관계가 더 중요한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 순위를 지어야 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하융의 마음에 달린 거겠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피터 한이 말했다.
“저라면 여자2를 선택하겠어요.”
“음… 왜요?”
“육체적 관능은 다른 육체로 대체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정신적 매혹을 대체하긴 쉽지 않죠. 정신적으로 누군가를 매혹할 수 있는 인간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짓입니다.”
경제적인 논리로 ‘사랑’을 정의하다니.
대단히 이성적인 계산법이었다.
어쩐지 인간적이지는 않지만, 동시에 피터 한답기는 하다.
피터 한은 사랑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 같았다.
하융 아니, 나와는 달리 말이다.
나는 금홍을 보았다.
이 대화의 흐름대로라면 금홍에게도 물어야 했다.
하지만 금홍을 모델로 여자2를 만든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내가 알고 있는 두 명의 금홍이.
전생의 불꽃 같던 사랑이 기생 금홍이었다면.
현생의 좋아하는 마음은 언제나 내 앞에 앉은 금홍에게 가 있었다.
물론 피차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 터라, 연애를 바랄 짬이 안 났지만… 어쩌면 금홍이 ‘팀 이상’으로 남게 한 것도, 일적으로라도 그녀와 엮이고 싶어서인지도 모르지.
나는 눈앞의 금홍에게 여전히 큰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직 금홍과는 팀 메이트일 뿐이고.
반면 실제로 ‘사랑’을 나눴던 건 전생의 금홍이다.
그 어쩔 수 없는 괴리가….
<지팡이>의 전개에 이런 고민을 남긴 거겠지.
“잠깐, 이것부터 좀 치울게요. 좀 쉬다가 케이크를 먹죠.”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금홍에게는 끝내 묻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말씀 나누고 계세요. 저만 말이 너무 많았네요.”
나는 접시를 하나둘씩 주방으로 옮겼다.
금홍이 겨우 소생시킨 음식들은, 다행히도 거의 다 동이 났다.
내친김에 설거지까지 해 버릴까 싶었다.
슬쩍 거실 쪽을 보니 세 사람이 이야기 중이었다.
들리는 말들로 미루어 보아, 피터 한 교수가 현대 음악의 경박함과 클래식의 고아함에 대해 설파하는 듯했다.
…그래, 저걸 듣느니 설거지를 하는 게 낫지.
하는 마음으로 물을 틀고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스윽 내 옆에 섰다.
고개를 돌려 보니… 금홍이 소매를 걷고 있었다.
“어? 왜 오셨어요?”
“도와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손님인데요. 가서 쉬세요.”
“지금 저곳이 쉬는 곳으로 보이시나요?”
금홍의 말에 다시 거실을 봤다.
와인잔을 들고 뭔가를 이야기하는 피터 한 교수.
이미 기가 다 빨린 듯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지훈.
“…잘 빠져나오셨네요, 금홍샘.”
“그쵸? 피터 한 교수님 생각보다 말이 많으시다니까요. 수세미질 하고 주세요. 제가 헹굴게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조금만 부탁드려요.”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조금 전까지 했던 이야기 때문일까.
금홍과 함께 설거지를 하는 이 자세와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온몸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혜경 샘.”
“네?”
“저한테는 왜 안 물어보셨어요?”
“뭐가요?”
“하융이 그 여자 둘 중에 누굴 첫사랑으로 여길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