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60화 (160/204)
  • 160회

    ― 혜경 샘… 왜 자꾸 ‘심’ 이름에 제 이름을 쓰세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금홍이 이름을 쓰다니?

    그리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얼른 <지팡이> 파일을 열어 최신 글을 확인했다.

    그 글에는… 종종 금홍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심’이 들어갈 자리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뭐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단순한 오타일 뿐이라고?

    금홍이 여자2를 추천해서 어쩌다 이름이 나왔다고?

    파일 상의 오류라고?

    금홍인 바보가 아니다.

    또… 나도 바보처럼 굴기 싫고.

    하융을 또 다른 나 자신이라 생각하는 만큼, ‘심’ 역시 내가 상상해 낸 또 다른 금홍의 모습이다.

    지적이고, 침착하며, 가끔씩 폐부를 찌르는.

    그런 매력적인 여인.

    사실 평소의 나였으면 뭐라도 변명을 했을 거다.

    하지만 뭐랄까.

    파티 때부터 이어져 온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갈팡질팡한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이렇게 답장을 해 버린 것이다.

    ― 그러고 싶었나 보죠.

    금홍은 톡을 읽고도, 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휴대폰을 저 멀리 밀어 두고, 벌렁 누워 버렸다.

    “휴우….”

    …일냈다.

    작가가 실존하는 여자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쓴다?

    게다가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에?

    바보가 아니고서야 답은 뻔하다.

    작가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티를 낸 거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티를 내놓고 이제 와 아닌 척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소설에 부끄러운 작가는 될 수 없으니.

    …그런데 이제 금홍이 얼굴은 어떻게 보지?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팀 이상’ 회의 전에 금홍에게 먼저 원고를 보인 거다.

    이 실수를 지훈이나 피터 한이 먼저 봤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튼 나는 그날 밤.

    침묵뿐인 휴대폰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뭐야, 이게?”

    금홍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봤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 그러고 싶었나 보죠.

    하지만 대화의 앞뒤 맥락을 다시 따져 봐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일부러 금홍의 이름을 넣었다는 것.

    혹시 무의식적으로 금홍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

    이제 물음은 단 하나였다.

    대체 왜?

    원고에서 처음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금홍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원고 쓰시느라 피곤하셨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금홍의 이름이 두 번, 세 번을 지나 일곱 번에 육박했을 때.

    금홍은 그것을 예삿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일반적인 설명이나 묘사에서는 ‘심’이라고 잘 썼다가, 어째서 ‘심’에 대한 하융의 마음을 진술하는 부분에서만 ‘금홍’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금홍.

    결국 톡으로 그 점을 짚어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이… 바로 저 한 줄이었다.

    ‘그러고 싶었나 보죠’

    “이, 이건 꼭….”

    ‘고백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상황 아냐?’

    금홍은 차마 혼잣말로도 그 말을 못 뱉었다.

    고백이라고?

    갑자기?

    …그러고 보니 파티에서도 좀 이상했다.

    이상이 여자2에 대해 설명할 때.

    금홍은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힘들게 공부를 하는 여대생.

    그녀가 하융에게 보이는 태도 하며….

    ‘나랑 스타일이 좀 비슷하네.’

    그래서였을까.

    설거지를 하는 이상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자1은 누군가를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반면 여자2는 하융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 의견만큼은 진심이었다.

    금홍도 번역을 하면서 하융에게 애정이 생겼다.

    첫사랑인 만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자를 만났으면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상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소와 같지 않게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금홍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답이 나오는 순간.

    “…아.”

    금홍의 손에서 휴대폰이 툭 하고 떨어졌다.

    ‘혜경 샘이 날 좋아한단 뜻인가?’

    금홍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 * *

    일본 도마크 출판사.

    미쯔하루 편집장은 오늘도 격무 중이었다.

    상반기 판매 실적이 들쭉날쭉했다.

    출판사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승세를 타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었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한참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편집장님, 무라카미 히루키 작가님께서 오셨습니다.”

    “히루키 상이?!”

    미쯔하루 편집장은 벌떡 일어났다.

    히루키 작가는 vip, 아니 vvip 손님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업무가 있다 한들, 그를 접대하는 것만큼은 아니리라.

    “얼른 제1응접실로 모셔. 커피는 안 드시니 좋은 차 한 잔 내려 드리고. 나도 곧 갈 테니.”

    “네. 편집장님.”

    비서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간 후.

    미쯔하루 편집장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거울을 보며 구겨진 미간을 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미쯔하루 편집장.

    바쁜 걸음으로 제1응접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과연 그가 와 있었다.

    언제나 비슷한 청바지에 셔츠 차림.

    일본 제일가는 작가치고는 여전히 수수하다.

    하지만, 그 수수함이 대체 불가능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히루키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아, 오셨군요. 미쯔하루 편집장님.”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이렇게 뵙는 건 기대도 안 했는데요. 정말 반갑습니다.”

    “인쇄 공장에 친구가 있어 잠깐 들렀습니다. 저번에 낸 에세이의 판매 지표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하~ 당연히 알려 드려야죠. 지금 바로 실무팀에 지표와 그 분석 내용을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

    마침 문이 열리고 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그에게 방금 전의 자료를 부탁했다.

    비서가 나간 후, 미쯔하루 편집장이 말했다.

    “분석 내용까지 취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긴 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요즘엔 남는 게 시간이라서요.”

    글을 쓰지 않는 그는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시간이 있지 않았더라면, 여길 들리지도 않았을 테니.

    “슬슬 신간 작업에 들어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아직은 그런 생각이 잘 안 듭니다.”

    “언제든 신간에 들어가시게 되면, 저희 도마크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하….”

    말인 즉슨, 신간 계약도 도마크와 하자는 뜻.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는 히루키는 그냥 웃고 말았다.

    “아참, 이상 작가의 신간 <지팡이> 말입니다.”

    히루키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미쯔하루 편집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예.”

    “한국에서는 이미 책이 나왔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여기, 작가님께서 도마크에 직접 보내 주신 책이 있습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진열대로 갔다.

    그리고 한국판 <지팡이>1권을 가져다줬다.

    히루키는 그 책을 살펴보며 물었다.

    “일본에서는 아직인가요? 물론 그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볼 순 있지만….”

    “아, 그게… 제안을 드려 보긴 했습니다만, 한국 외의 어떤 나라에도 완결 전까진 종이책을 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흠… 그러면 완결 이후에는 도마크에서 나오는 건가요?”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쪽 조건을 먼저 들어 보신다고 하시긴 했습니다. 여길 보시죠.”

    미쯔하루 편집장은 <지팡이>1권 내지를 열었다.

    그곳에는 일본어도 이렇게 쓰여 있었다.

    ― 하융을 끝까지 지켜봐 주시길. 이상 배상.

    히루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상 작가가 의미심장한 글을 보냈군요.”

    “그렇… 습니까?”

    “일종의 돌려 말하기죠. <지팡이>에서, 한때의 하융은 친일적인 행위를 했고, 지금은 일본에 무관심하죠.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겁니다.”

    “….”

    “하융이 일본 제국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할 수도 있단 뜻이에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걸 바라고 있지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히루키의 말이 현실이 된다면, 지금 누구보다도 난감한 쪽은 도마크였다.

    히루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또 입을 다물었다가, 결국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도… 그걸 받아들여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못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 알고 계시죠?”

    “도마크는 이미 <갈림길>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셨죠. 저도 그 일은 좀 실망스럽습니다만.”

    “당시엔 그게 옳은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이상 작가님과 계약 이야기를 하려니… 참, 상당히 부끄럽더군요.”

    “부끄러운 일이죠. 당시 일본에서 <갈림길>을 낼 만한 출판사는 도마크뿐이었는데요.”

    “그래서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보려고 합니다. 출판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꺾인 경험은, <갈림길>로 충분해요.”

    미쯔하루 편집장이 결연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히루키는 생각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괜찮은 출판인이다.

    어떤 것을 책으로 남겨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그런 그가 도마크를 위해 <갈림길>을 포기했을 때, 그 역시 적잖이 상처를 받았으리라.

    물론 작가 본인만큼은 아니었겠지만.

    히루키가 말했다.

    “당연한 말입니다만… 저는 <지팡이>가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동의합니다.”

    “작가들이 지레 겁을 먹는 대하소설이란 장르를 그토록 자유롭게 밀고 나가는 재능이며… 그에 걸맞은 무거운 주제의식이며….”

    “….”

    “이대로 <지팡이>가 순항을 해 준다면, 언젠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그렇게까지.”

    히루키는 세계 시장에 콤플렉스를 많이 느끼는 작가다.

    동양인이 느끼는 유리천장에 대해 누차 말해 왔고.

    그런 그가 노벨문학상과 이상을 함께 운운했다.

    어쩌면 히루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진심 어린 극찬일지도.

    “저는 도마크가 그 책을 꼭 냈으면 해요. 어중이떠중이 같은 출판사에게 넘어가기 전에. 하지만 도마크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사전 준비를 좀 하셔도 괜찮겠죠.”

    “사전 준비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편집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전문가는 편집장님이잖아요.”

    히루키는 예의 그 장난기 어린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히루키가 에세이 판매 지표를 확인하고 돌아간 후.

    미쯔하루 편집장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맞아. <지팡이>의 내용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모른다. 독자들의 반응은 둘째 치더라도, 이사회에선 언젠가 <지팡이>를 낼 수 없다고 또 떼를 쓸지도 몰라. 수를 쓰긴 해야 해.’

    그는 만년필로 노트에 ‘사전 준비’라고 휘갈겨 썼다.

    이 네 단어를 구체화하기 전에는, 절대 퇴근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 * *

    어김없이 ‘팀 이상’ 회의가 돌아왔다.

    즉, 금홍이를 보는 날이라는 뜻.

    어제까지만 해도 어떤 얼굴을 하고 갈지 고민했다.

    어색함, 부끄러움, 애써 당당하고 싶은 마음까지.

    온갖 감정이 얽히고설킨 채 밤을 보냈다.

    마치, ‘심’을 생각하는 하융처럼 말이다.

    회의를 하기로 한 곳은 금홍이 일하는 카페.

    “어서 오세요. 두 분 모두.”

    금홍은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우릴 반겼다.

    “예이~ 금홍 샘. 오늘도 케이크 줘요?”

    “이제 좀 사 드시죠?”

    속없는 지훈이 농담 따먹기를 하고,

    금홍은 그 농담을 웃으며 잘도 받아 준다.

    금홍의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우리 세 명은 모여 앉았다.

    금홍의 서비스 케이크도 물론 테이블을 차지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회의 분위기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금홍은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다.

    …별수 있나. 일단 일을 하자.

    “자, 그럼 슬슬 얘길 해 볼까요?”

    그리고 일을 할 거면, 확실하게 하자.

    그러니까… 여러모로 말이다.

    나는 금홍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금홍 샘은 어떻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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