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 3799103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19)
다시 사는 천재 작가 19
아침부터 그 전쟁을 치르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사무실이 텅 비었다.
지훈의 톡을 뒤늦게야 확인했다.
-형 없어서 저 먼저 점심 먹으러 가요~
난 지훈에게 답을 보냈다.
-샌드위치랑 메로나 좀 사다줘.
-역시 멜론에 진심인 사람...알았어요ㅋㅋㅋㅋ
밥 먹으러 나갈 시간 같은 건 없다.
<부활>의 퇴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속적 사랑의 노래>가 감정적인 소설이라면,
<부활>은 이지적인 소설이다.
소설의 구성은 판타지적인 장면 단 하나.
때문에 승패를 가르는 건 그 장면에서 뒤섞이는 과거와 현재의 구현이다.
즉, 내용보다는 강렬한 형식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
퇴고가 정말 중요한 소설이다.
이런 소설에 실수를 남기면, 독자는 이 세계관에서 튕겨져 나가 버리니까.
나는 <부활> 원고를 보고 또 보았다.
“형.”
어느 새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지훈이 샌드위치와 메로나를 내밀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연락도 안 받고.”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
“형 신작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구나?”
나는 메로나 껍질을 까며 말했다.
“그래도 거의 다 끝나가. 내일이면 완성할 것 같아.”
“이번 합평 기대할게요.”
나도 기대가 됐다.
이현강이 어떻게 나올지.
게다가 총장에게 한 소리 듣고 올 게 뻔한데.
그 사이에 금홍이도 자리에 돌아왔다.
그녀는 컴퓨터에서 뭔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마 아침의 공문을 취소한다는 또 다른 공문일 거다.
학과 개편 보고서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송 교수의 메일도 있을 것이고.
“저기...혜경 샘.”
“네.”
금홍이는 놀라움 반, 미안한 반의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리고 대뜸 노트를 펼쳐 필담을 한다.
-어떻게 한 거예요?
왜 필담을 하지?
의아한 것도 잠시, 금방 이해가 됐다.
우리 과 행정 문제를 다른 과 사람들에게 말하는 건 원칙적으로 어긋나는 일이었다.
역시, 똑똑한 금홍이.
-총장실 다녀왔어요.
나는 노트에 그렇게 썼다.
금홍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그래도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음...역시 대단하시네요. 진짜; 어쨌든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에요.
잠시 후, 금홍이에게 톡이 하나 왔다.
멜론 기프티콘이었다.
-아까 짜증내서 죄송했어요. 지훈샘이 샘 멜론 좋아하신다고 해서...맛있게 드세요.
아까 비상계단에서 화를 냈던 일 때문에 이러는구나.
학과 개편 보고서 일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생각하면, 내가 더 미안한데.
나도 기프티콘을 뒤져서 커피 전문점 원두를 보내줬다.
-제가 더 죄송하죠. 나중에 맛난 커피 내려주세요.
내 메시지에 금홍이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줬다.
거짓말은 못 하는 금홍이.
빈말이라도 알겠다고 했으면 그 구실로 커피 한 잔 얻어먹으려 했건만.
하지만 한 시간 쯤 뒤에, 톡이 하나 더 도착했다.
-그럴게요. 기대해주세요.
***
나는 매일 아침 교학팀에서 지훈에게 전날의 SNS와 홈페이지 결제 분석 결과를 듣는다.
지훈이의 SNS 수완이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짹짹이에 큰 공을 들이는 눈치였다.
“형, 글로벌하게 가는 건 짹짹이가 짱이에요. 일본 애들이 얼마나 많이 해대는데.”
“‘잡문’이 인기가 많지?”
“어떻게 알았어요?”
“일본은 하이쿠(짧은 시)를 쓰는 전통이 있잖아. 일본에서 단편 소설이 흥한 것도 그런 맥락이야. 걔네들 구미에는 잡문 길이가 딱 맞겠지.”
“형...아무리 생각해도 ‘잡문’도 결제 시스템 넣어야 해요.”
“그건 그냥 둬. 팬서비스라고 생각해.”
그런 일기 같은 글 하나하나에 돈을 받을 만큼 쪼잔하진 않다.
확실하게 받아야 할 건 앞으로 발표할 소설들의 값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드라마 공모도 있고.
인터넷 상에서 차곡차곡 팬들이 쌓여간다.
한국 문단 역시 내 행보를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고.
그들의 관심은 하나.
바로 나의 신작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부활>을 완성했다.
나는 <부활>을 합평 수업 단톡방에 올리며 덧붙였다.
-박사 3기 김혜경, 작품 완성했습니다.
***
오늘은 내 소설의 합평일이었다.
동시에, 한국대학교 첫 특강 날이기도 했다.
이현강의 수업은 2시부터 5시까지.
한국대 특강은 6시부터.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국대로 날아가야 한다.
지훈이와 강의실에 가니 다들 내 소설을 보고 있었다.
빽빽한 필기들을 보아하니 열심히들 읽은 모양이다.
김혜경의 합평 때는 이렇지 않았다.
다들 혜경의 글을 무시했고, 제대로 읽어오지도 않았다.
메모 하나 없는 소설을 보면서 비난들은 어찌나 그렇게 잘 하던지.
“왜들 이렇게 시끄러워.”
이현강이 짜증스러운 말과 함께 등장했다.
낯짝 두꺼운 장선미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현강은 요즘 부쩍 히스테리를 부린다.
아니나 다를까. 재학생 외부강의 제약 건으로 총장에게 적잖이 잔소리를 들었다지.
송 교수가 먼저 꼬리를 잘랐으니 떠넘길 곳도 없을 테고.
이현강은 성의 없이 출석을 부르곤 출력해온 소설들을 연필로 툭툭 찔러댔다.
“합평부터 시작하지. 오인나 소설부터.”
신입생의 소설 합평은 필요 이상 길었다.
이현강이 모두에게 합평을 시켰고, 자신도 이례적으로 긴 평을 덧붙였다.
어느덧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남은 합평 시간은 고작 삼십 분이 남았다.
“김혜경 소설 합평 시작하지. 오희라, 할 말 있어?”
이현강은 첫 칼자루를 오희라에게 쥐어준다.
판을 깔아줄 테니 알아서 짓이겨보라는 허락.
이 기회를 오희라는 놓치지 않겠지.
“전 이번 소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음.
“두 개의 시간이 합쳐진 것도 재밌고, 줄거리도 흥미로워요. 또, 워낙에 혜경이가 필력이 좋으니까 이 모든 상황이 그럴듯하게 느껴지잖아요.”
그래?
“감사합니다. 오 선배님.”
나는 오희라의 말을 잘랐다.
거기까지 말하라는 의미였다.
“아. 좀 더 할 말이 남았는데요. 혜경아, 괜찮지?”
오희라는 눈을 찡긋거린다.
자신은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듯.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듯.
“네. 그럼요. 해 보세요.”
“문제는 ‘그럴 듯’하다는 거예요. 진짜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뭐...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이런 느낌? 이건 진정성의 문제이기도 해요. 소설이 그냥 잘 만들어진 가짜 같다고요.”
역시.
그렇다 이거지?
“소설은 우리에게 진정성을 느끼게 해줘야 하잖아요. 거기서 감동도 오는 거고. 그게 소설의 힘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가짜 같은, 어머...제 말이 좀 심했나요? 그러니까 만들어진 가공품 느낌이 이렇게 심하게 나면 아무리 잘 써도 좋은 소설이란 느낌을 못 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그냥 기교 자랑 같달까요?”
오희라가 신나서 작두를 탄다.
제 발바닥이 베어가는 건 모르고선.
“오 선배님께,”
나는 그녀의 말을 막았다.
“추천해 드릴 수업이 하나 있는데요.”
“...수업?”
“학부 1학년 시간표를 보면 ‘소설의 기초’라는 수업이 있어요. 시간 되시면 꼭 들어보세요.”
“뭐, 뭐?”
“아직 소설에 대해 너무 순진한 생각을 가지신 것 같아서요. 소설은 가짜예요. 누가 소설을 진짜라고 생각하죠? 소설이 가짜라는 건 초등학생도 다 알고 봅니다. 진정성과 감동 얘기도...참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감동을 얻으려면 티브이를 트세요. 감동 주는 드라마, 인간 극장,... 수도 없이 많습니다. 소설도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하지만, 글쎄요 그게 과연 소설‘만’이 주는 요소일까요?”
“하. 김혜경. 너 그게 합평을 듣는 자세야!?”
오희라가 꽥 소리를 지른다.
그녀도 임계점을 넘고 만 거다.
좋다.
끝을 내자.
이놈의 수업 따위 오늘 털고 이제 안 들으련다.
“무례한 건 선배님이죠. 가공품이니, 가짜니 하는 건 예의가 있는 표현입니까? 똑같이 돌려드렸는데 왜 이리 화를 내시는지. 그리고 수업 추천은 진심입니다. 문창과에서 19년을 계셨는데 아직도 소설의 미학을 모른다는 건 심히 걱정이 되네요.”
“교수님! 혜경이 좀,”
“소설만이 주는 미학은 감동이 아닙니다. 언어가 주는 재미죠. 그것이 형식이건 이야기이건. 언어를 통한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되죠. 그럴 듯하다고 하셨죠? 그럴 듯하면 된 거예요. 그럴 듯한 세계에게 진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소설을 보니까요. 진정성의 의미도 한참 틀리게 쓰신 거 아시죠? 진정성은 단순히 진짜 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감이 가냐 안 가냐의 문제죠. 참, 설명하려니 한도 끝도 없네요.”
“김혜경.”
이현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무례하고 건방지군. 이제 막 등단한 신인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인가?”
서슬퍼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나만 빼고.
“교수님은 왜 항상 오 선배님의 무례함과 건방짐은 짚지 않으시고 제게 그러시는지.”
“오희라의 말 틀린 것 하나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합평은 내가 하지. 넌 입 다물고 들어. 이 작품은 쓰레기야. 이유는 첫째, 겉멋만 살아있지. 작가의 진정성은 함몰되었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두 개의 시간대를 뒤섞었지? 그 세계를 구현하느라 바빠서 서사적 매력이 떨어져.”
“매력이란 말은 주관적입니다.”
“전혀 끌리지도 새롭지도 않은 이야기란 말이다.”
“추상적이십니다.”
“둘째, 문장들이 너무 짧아.”
“시간이 분절되어 섞여 있기 때문이죠.”
“한낱 기교에 불과해.”
“언어의 가시성으로만 획득할 수 있는 미학입니다.”
“잡기를 가지고 새로운 스타일인 척 하지 마라. 셋째. 주제의식 자체가 판타지적이야. 현실성이 전혀 없어.”
“동의가 안 되는데요. 이 글의 주제의식은 교수님께서 정하신 겁니까? 글의 주제의식을 찾는 것도 참...”
촌스럽다.
뭐 이런 알맹이 없는 악담을 길게도 하고 있나.
슬슬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다.
완벽한 소설은 없다.
어떤 소설에서 눈에 띄는 장점은 백 퍼센트 확률로 다른 면에서 단점이다.
예컨대 환상적인 작품은 다른 말로 비현실적이다.
현실성이 살아있는 작품은 다른 말로 상상력이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애매모호한 소설이 가장 나쁘다.
장점만을 말하느냐,
단점만을 말하느냐.
그것은 말하는 이의 태도에 달렸다.
오희라와 이현강의 태도야 알 만하고.
“그러니까 교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군요.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형식의 모더니티가 살아있고, 짧은 문장으로 환상적 세계를 미학적으로 재현했으며 그 안에서도 주제의식까지 발견할 수 있다고요.”
“김혜경! 지금 장난 하나?!”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는 수업을 듣는 학우분들이 더 잘 아시겠죠.”
이현강의 비난을 정당한 비판을 받아들일 이들은 없다.
적어도 당신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말이지.
촤락!
이현강이 내 얼굴을 향해 소설을 던졌다.
나는 재빨리 그것을 잡아챘다.
“이건 제가 가져가죠.”
할 만큼 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합평 끝난 걸로 알고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업 종료 시간이 5분이나 지났군요.”
“이런 건방진...! 멋대로 어딜 가나?!”
“한국대 문학 창작 특강을 맡아서요. 총장님께 얘기 잘 듣지 않으셨습니까.”
총장 이야기를 하니 이현강이 움찔했다.
나는 거기서 한 마디 더 했다.
“이런 학칙이 있지 않습니까. 대학원생이 외부 강의를 맡는 경우, 교내에서 수강하는 강의의 출석으로 인정된다고요. 저는 한국대 특강으로 이 수업 출석을 대체할 테니, 이번 학기 남은 수업 잘 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대로 강의실을 나왔다.
더 말 섞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정말로 특강에 늦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