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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19화 (1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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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18)

    다시 사는 천재 작가 18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콘텐츠를 즐긴다.

    영화, 웹툰, 드라마 등등.

    슬프게도 문학은 21세기의 주류 콘텐츠가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문학에 끌리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 문학에서 재미를 느끼는 마니아.

    우리는 이들을 독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들 중에서 작가가 탄생한다.

    쓰는 것의 기본은 읽는 것이기에.

    둘째, 문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문학을 즐기지 않는다.

    다만 문학이라는 예술이 가진 아우라를 동경한다.

    총장은 첫 번째 부류가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두 번째 부류는 되어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날 ‘등단 작가’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두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거나,

    단지 문창과가 있는 학교의 총장이기 때문이다.

    확률은?

    반반 정도.

    그는 총장 ‘씩이나’하는 지식인.

    문학의 가치를 아예 모른다 하진 않을 테니, 해볼 만하다.

    “조인창 교수님은 문학계의 큰 스승입니다. 아마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듯한데요.”

    “그랬겠죠. 하지만 제 전공이 기계공학이라...사실 저희 학교 교수님이 아니면, 문학가엔 문외한입니다.”

    총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불쾌했으리라.

    다짜고짜 들어와서 이름 모를 교수 이름을 들먹이는 대학원생이라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살짝 달래보자.

    “당연히 모르실 수 있지요. 저도 이공계 쪽은 장님인 걸요.”

    “허허...그렇지요. 그런데 학자로서 저를 찾아오셨다 하셨는데, 무슨 일이신지?”

    “다시 조인창 교수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 분은 한국대학교에서 수십여 년간 특강을 하시고 건강 문제로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강의 자리를 제게 넘기셨지요.”

    “...한국 대학교요?”

    총장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럴 수밖에.

    인수대학교의 학벌로 한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군요. 조인창 원로 교수님께서 이상 선생을 인상 깊게 보신 모양입니다. 사실 저도 한국대학교 출신이거든요.”

    총장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문창과에 내려 온 공문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나저나, 한국대학교 출신이라고?

    이제 좀 말이 통하겠군.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총장님.”

    “네?”

    “제가 한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신 점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방금 축하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제가 앞에 있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십니까? 제가 한국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게 마뜩치 않으셨다면 왜 대학원생의 외부강의를 막으셨습니까?”

    총장이 깜짝 놀랐다.

    “막다니요. 그걸 막으면 뛰어난 대학원생들의 앞길을 막는 거나 마찬가진데요.”

    나는 대답 대신 못 믿겠단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내심 억울한 눈빛이었지만, 역시 내색은 안 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상 선생.”

    “제가 총장님 모교의 물을 흐린다고 여기신 게 아니라요?”

    “답답하군요. 됐습니다. 이런 대거리를 할 시간 없습니다. 나는 강의를 막은 적 없으니 자유롭게 해보세요, 그럼 전 할 일이 많아서.”

    총장이 나를 내쫓으려 했다.

    살짝 화가 난 모양이다.

    지금이다.

    총장의 약을 올려놨으니, 본론을 꺼낼 때가 됐다.

    “하지만 공문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공문이요? 대체 인수대학교에서 제가 모르는 공문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오늘 아침, 문창과를 통해 내려왔습니다. 저희 과 대학원생의 외부 강의를 막는다고요. 저는 지금 학자로서, 총장님께 공식적으로 이의제기를 하는 바입니다.”

    “그런 공문이 있단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답답하네요.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군요.”

    총장은 전화를 들어 비서실과 연결했다.

    “어. 오늘 문창과에 대학원생 외부 강의와 관련한 공문이 있는지 확인해 봐.”

    전화를 끊고, 총장이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거 참,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Rrrrrr....

    총장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확인해 봤어? 응...그래. 뭐? 그게 무슨...문창과 학과장이 누구지?...송희문 교수? 지금 바로 오시라고 해. 그리고 그 공문도 한 장 뽑아서 가져와.”

    달칵!

    총장이 다소 거칠게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중얼거렸다.

    “송 교수님이 왜 그런...”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대학교 교수님들도 처음에는 제 강의를 반대하셨지만, 결국 모두 동의해주셨는데...”

    “한국대학교 교수님들까지 만나 보신 겁니까?”

    “네. 국문과 교수님 일곱 분을 다 만나서 강의 약속을 받았죠. 그래서 오후에 한 분 한 분 전화를 드려 상황 설명을 하고 사과를 드리려 했습니다. 그게 예의니까요. 하지만 그러기 전에, 정말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총장님을 찾아뵌 겁니다.”

    총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교에도 ‘급’이 있다.

    한국대학의 강의 자리를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

    하지만 그 별을 따기만 하면 강사뿐만 아니라 강사의 출신학교의 ‘급’도 함께 올라간다.

    지금 총장은 그 실적을 놓칠 뻔 했다는 아득함을 느끼고 있겠지.

    똑똑.

    “총장님. 공문 가져왔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들어와.”

    비서는 공문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갔다.

    <재학생 외부강의 제한 안>

    슬쩍 봐도 하얗게 빈 곳이 많은 공문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작성을 했는지 알 만하다.

    총장은 공문을 한 번 읽어보더니, 내게 말했다.

    “이상 선생. 먼저, 얘기해 둘 게 있습니다. 이상 선생이 한국대학교 교수님들과 이 건에 대해 얘기를 할 수도 있으니, 명확히 밝히겠습니다. 이 공문은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왜 학생의 외부강의를 막겠습니까? 한국 대학 출신이라 물을 흐린다고요? 서운한 소리입니다. 저, 그런 학벌주의자 아닙니다. 오히려 영광이라 생각하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니.

    그 말도 따지고 보면 학벌주의자가 할 만한 소리긴 했다.

    어쨌든 잠시 후 송 교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총장님.”

    연배로 따지만 송 교수가 총장보다 한참 위였다.

    하지만 교수의 위엄 따윈 던져버리고 굽실굽실 하는 게 제법 꼴사나웠다.

    “송 교수님. 어서 오세요. 잠깐 앉아보시죠.”

    “예. 총장님....어? 김혜경?”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는 영문을 모르겠단 눈으로 나와 총장을 번갈아 보며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의 공문을 보자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송 교수님, 이 공문에 대해서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만.”

    총장이 침착하게 공문을 송 교수 쪽으로 밀었다.

    송 교수는 난감할 거다.

    이현강의 말만 듣고 멋대로 공문을 냈으니.

    하여간 교수들은 이게 문제다.

    학생은 자신의 공격을 감히 되받아치지 못한다는 착각.

    내가 술이라도 푸며 욕이나 해대며 이번 일을 넘길 줄 알았나?

    “...이게...저희 과 대학원생들의 수업 참여를 위하여...”

    “강의에 나가는 학생들의 수업 참여가 미진합니까?”

    총장이 물었다.

    그럴 리가.

    날라리 같던 김한마저도 수업은 꼬박꼬박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지도교수 수업을 굳이 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송 교수는 말이 없다.

    “...제가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이 공문은 취소하는 거로 하지요.”

    아니.

    이렇게는 못 넘어간다.

    “총장님. 송 교수님께서 제가 외부 강의에 나가느라 학교 수업을 소홀이 할 까봐 걱정하시는 마음에 이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총장은 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이상 선생이 한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을 아셨다고요?! 그걸 아시고도 이런 공문을 내릴 수 있는 겁니까?”

    총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송 교수는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그것까진 몰랐습니다.”

    “아...모르셨군요. 저는 제 지도교수님께 들으신 줄 알고. 그럼 이현강 교수님과는 무관한 거지요?”

    지금 송 교수는 엄청난 고뇌 속에 빠졌을 거다.

    이 일에서 이현강을 고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덜 것인가,

    혹은 혼자 죄를 떠안고 이현강과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자네가 한국대에서 강의를 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절대 그런 공문을 안 내렸지.”

    송 교수가 나를 달래듯, 역겨울 정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이현강 교수님이 날 찾아와서 외부 강의 나가는 학생들의 기강을 한 번 잡아야겠다고 이런 공문을 내리잔 의견을 낸 거야. 나야 그 학생이 자네인 줄 알았나.”

    송 교수와 이현강의 의리는 얄팍한 습자지 같았다.

    이현강을 고발하는 것도 모자라 모르쇠로 꽁무니를 빼는구나.

    “송희문 학과장님.”

    “네, 총장님.”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땐, 학과장으로서 중심을 잡으시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화를 꾹꾹 누르는 총장의 말에 송 교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마무리를 할 때가 왔다.

    “아, 송 교수님, 총장님과 함께 만나 뵌 김에 여쭤야겠습니다. 학과 개편 보고서 건 양식이 좀 헷갈려서 그러는데요,”

    “학과 개편 보고서요?”

    총장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송 교수는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그거, 그거, 안 해도 되네. 그거 그냥 이현강 교수가 나중을 위해 자료 좀 쌓으려 한 거지, 정말 쓰란 얘기가 아니네. 아니, 바빠 죽겠는데 학기 중에 그런 보고서를 어떻게 쓰나, 총장님, 절대 아닙니다. 학과 개편 보고서라뇨. 그런 걸 갑자기 왜 시키겠습니까? 네? 하, 하하하...”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래, 얻을 건 얻었으니 이쯤에서 물러나자.

    귀찮은 일들도 처리했고.

    이현강과 송 교수를 찢어놓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이상 선생의 지도교수님이 이현강 교수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총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습니다. 이제 두 분은 나가보시지요.”

    송 교수와 나는 총장실을 나섰다.

    비서팀을 지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까지, 그와 나 사이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송 교수는 바로 욕을 지껄였다.

    “...미친놈. 총장한테 달려가다니. 누구 죽이려고 환장했어?”

    “엘리베이터에 씨씨티비 있는 거 아시죠?”

    알겠지.

    아니까 저렇게 목석처럼 서서 욕지거리를 해대는 거겠지.

    “개새끼... 너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앞길 막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너, 엠플릭스에 보낸 드라마 그게 잘 될 것 같아?”

    “심사위원이 교수님 한 분이시던가요? 엠플릭스가 그렇게 허술한 곳은 아닐 텐데요?”

    “흥. 거기 사람들 내 말 한 마디면 뽑았던 작품도 내려놓는 거 몰라?”

    “웃기지도 않네요. 제 지도교수님과의 우애나 다시 잘 다져보시죠. 그 분도 곧 총장님께 불려 가실 것 같은데.”

    “뭐 이 새끼야?”

    “제 지도교수님의 성품이라면, 이 모든 일이 학과장님이 벌이신 거라고 말씀하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띵-

    마침 1층이 되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나는 그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 유유히 인문대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속이 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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