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보이냐?’는 낯선 플레이어의 질문에 우성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뒤쪽에 있는 다른 두 명의 플레이어들의 행색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뒤쪽으로는 날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이 천사 진형의 플레이어임을 알 수 있는 어떤 불쾌한 느낌이 흘러 나왔다.
아니, 사실 불쾌하다고 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 무엇보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깨끗한 기운이었으니까.
단지 그 느낌이 불쾌하다 느껴지는 것은 우성이 악마 진형에 속해 있는, ‘마력(魔力)’과 ‘마기(魔氣)’를 사용하는 플레이어이기 때문이었다. 서로 상극이 되는 기운이기 때문에, 불쾌하다기보다는 거부감이 든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다.
‘천사는 아니고… 플레이어들인가?’
눈앞에 있는 플레이어는 어째서인지 반쪽이라고는 하나 천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 플레이어에게서 상극의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야! 벙어리냐? 대답 안 해?”
천사 플레이어의 고함에 우성은 그의 눈을 또렷이 바라봤다. 동양, 서양 계열 가릴 것 없이 검은색 계열로 변하는 악마 진형의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천사 플레이어들의 눈은 하나같이 노란색을 띄고 있었다.
세 명의 플레이어는 하나같이 동양 계열의 플레이어로 보였다. 그 중 한 명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우성에게 말을 건 플레이어와 다른 한 플레이어는 한국 플레이어였다.
“……그래, 보인다.”
“새끼 말이 짧네. 그래도 한국인이니까 봐 준다. 낄낄.”
나이가 어린 건가? 천박한 웃음을 흘리며 천사 플레이어는 우성에게서 혜미와 혜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입술을 오므리는 모습에 혜미와 혜정이 몸을 오소소 떨었다.
“날개라니, 뭔 소리냐?”
“뭐야, 넌 안 보여?”
우성에게 귓속말을 속삭인 안현수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반쪽 짜리 날개는 조금 반투명한 느낌이기도 했다.
‘하긴, 플레이어지 천사는 아닐 텐데… 그럼 뭐지?’
궁금증이 들었지만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니,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혜미랑 혜정이부터 보내.”
“안 싸워?”
“거기 형님, 우리랑 싸워 보려고?”
작게 귀에 대고 속삭였던 것인데 어떻게 엿들은 건지 천사 플레이어가 대꾸했다. 안현수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던전에서 새로 얻은 아트란의 창을 곧추세웠다.
“그럼, 도망칠 것 같냐?”
“킥킥. 병신. 허세 떨지 마. 잘 해 봐야 5회 차 허접새끼 주제에.”
‘5회 차 허접?’
묘한 어감에 우성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플레이어들의 시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사지가 이리저리 잔인하게 토막 나 있어 대충 보아서는 몇 명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넷 이상이었다.
게다가 5회 차 플레이어를 ‘허접’이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적어도 4회 차 이상의 플레이어일 것이다. 우성은 천사 진형 플레이어들이 위험하다 생각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뛰어.”
타닥-.
우성은 몸을 돌려 혜미와 혜정의 손을 낚아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안현수는 재빨리 창을 내리고 우성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천사 진형 플레이어들은 사라진 세 명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
“허억, 허억.”
얼마나 달렸을까? 우성의 손에 이끌려 달려온 혜미와 혜정은 벌써부터 숨이 차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력 스텟에 비해 체력 스텟은 보잘것없는 그녀들이었으니 이 정도 뛰었으면 지칠만 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힘내라는 말 한마디조차 아까울 지경이라, 우성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저 힐끔힐끔 뒤를 돌아 따라오지 않나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꺄악!”
결국 가장 먼저 혜정이 달리다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급히 혜정을 부축하며 안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데?”
“……왜 안 따라오지?”
아직까지 체력이 남아도는 우성은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뒤쪽을 주시했다. 녀석들 정도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데, 이상하게 따라오질 않았다.
다른 목표가 있는 건가? 아니면 가지고 노는 건가?
전자라면 다행이었고, 후자라면 소름이 끼쳤다. 하긴, 척 보기에도 정상으로 보이는 녀석은 아니었다. 조금 싸이코 기질이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가장 앞에서 우성과 대화했던 녀석.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아무래도 미성년자인 모양이었는데, 얼굴과는 별개로 한 쪽뿐인 날개도 그렇고 보통으로 보이지 않았다.
보름 동안 하멜에 머물며 제법 스텟을 올리기도 했고, 광폭화 스킬을 습득하고 아이템도 몇 가지 얻으면서 어지간한 기존 플레이어들과는 붙어볼 만 하다고 생각한 우성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만난 천사 진형 플레이어들과는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온다.”
섬뜩한 목소리가 숲을 타고 전해져 온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우성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친 새끼!”
“……안현수. 네가 혜정이 좀 다시 업어라. 일단 숲 밖으로 무조건 뛰어. 가능하면 다른 악마 진형 플레이어들을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고.”
다른 악마 진형 플레이어들과 합류할 수 있다면 함께 싸우거나 최소한 방패막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우성은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있기를 바랐다.
혜정을 업어 든 안현수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뒤에서 천사 진형 플레이어들이 언제 공격할지 몰라 우성은 혜미를 업어들지 못하고, 손을 잡은 채 안현수의 뒤를 따랐다.
‘가지고 놀고 있다.’
방금 전 목소리로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들의 능력치는 최소 4회 차 이상의 플레이어였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른다. 한명, 한명이 시작의 마을에서 만났던 칼프라는 플레이어와 비슷, 혹은 그 이상으로 보였다.
하나만 해도 버거운데 세 놈이라니. <대리인>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대리인>은… 마지막까지 아낀다.’
여기서 더 이상 라이프를 소모하면 정말로 위험할지 모른다. 아니, 사실 중앙에 있던 한국 플레이어까지 있으니 대리인을 사용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못 갔네?”
휘익-.
쨍-!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얼굴에 우성은 반사적으로 아포피스를 휘둘렀다. 급하게 혜미의 손을 놓자, 앞으로 달려가던 혜미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시팔! 뭘 돌아봐! 가!”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거친 욕설까지 뱉으며 우성은 검을 휘둘렀다. 입술을 살짝 꾹 깨물며 우성은 눈앞에 검을 맞댄 앳된 플레이어를 바라봤다.
“멋지네, 형씨.”
“……나이 덜 처먹은 애새끼가 벌써부터 변태짓거리나 하고 말이야. 재밌냐?”
“응? 응. 존나 재밌는데?”
그렇게 대꾸하던 천사 플레이어는 낄낄 웃었다. 정말이지,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놈한테 비웃음이나 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흥분해서 달려들 만큼 우성은 급한 성격이 아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우성은 다른 두 명의 플레이어가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물었다.
“네 꼬봉들은 어디로 갔냐?”
“아, 그 형들은 저기 뛰어가는 여자들 잡으러 갔어. 우리 타케야 형이 한국 여자라면 환장을 하거든. 아, 타케야는 아까 내 왼쪽에 있던 형. 내 이름은 박윤성이고.”
“미친새끼. 자국 여자 다른 나라 남자한테 떠먹이면 좋냐? 박윤성, 시발새끼야.”
“뭐 어때? 어차피 순서야 나까지 돌아올 텐데.”
원래부터 이상한 성격인지, 아니면 아포칼립스를 오래 플레이하다 보니 나사 하나가 빠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정상은 아닌 듯했다.
박윤성은 한동안 실성한 사람마냥 낄낄 웃었다. 하지만 이내, 우성을 잠시 보더니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웃고 있는 우성을 발견한 것이다.
“뭘 쳐 웃어?”
“너 혼자라며?”
우성은 자신있게 아포피스를 치켜들며 박윤성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럼 조금은 할 만하지.”
“이것 봐라. 너 몇 회 차기에 이리 당당하냐?”
어이없다는 표정의 박윤성에게 우성은 제법 당당하게 대답했다.
“신규 플레이어다.”
“……응?”
박윤성의 눈이 잠시 동그랗게 떠졌다.
“풉.”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박윤성의 웃음소리가 숲이 떠나갈 듯 울렸다. 이만하면 근처에 몬스터가 몰려들 법도 한데, 주위에는 그 흔한 자이언트 앤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박윤성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을 생각하면 하급 마수들 정도는 감히 다가오지도 못할 것이다.
“시발, 존나 웃기네. 하. 간만에 좀 크게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박윤성의 눈에는 수분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 어른들 말이 틀린 게 없다니까, 시팔. 그런데 이상하다? 너 진짜 신규 플레이어 맞아? 응? 아까 보니까…….”
후두둑-.
그 순간, 우성의 발이 지면을 쓸었다. 한 줌 모래가 박윤성의 얼굴로 튀었고, 모래 알갱이가 눈앞을 가렸다.
애초부터 노리고 있던 작은 틈이었다. 우성은 기습적으로 모든 민첩 능력치를 끌어올려 박윤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숨에 목을 날릴 요령에 우성은 이미 <광폭화>를 활성화 시킨 상태였다.
후웅-.
“아아, 눈이야. 시발, 남자새끼가 비겁하게…….”
순간적인 기습이었는데, 박윤성은 어느새 하늘로 도약해 우성의 검으로부터 사정거리에서 멀리 벗어난 상태였다. 아니, 도약했다기보다는 ‘날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접혀 있던 한쪽 날개는 어느새 활짝 펼쳐져 새하얀 순백의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다. 우성은 감히 쫒아갈 생각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쳐봤다.
그 순간, 모래가 들어간 눈을 비비던 박윤성의 샛노란 눈동자가 우성을 향했다.
“……야.”
지이잉-.
박윤성의 주위로 새하얀 창이 생겨났다. 하나, 둘, 셋. 그 수를 늘려가던 창은 처형식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우성을 겨눴다.
순백의 창을 보는 순간, 우성은 저것을 하나라도 맞는 순간 끝이라고 생각했다. 게임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아포피스가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고.
“넌 뒤졌다고 복창해.”
쉬이이익-.
순백의 창이 우성을 향해 일제히 쏘아졌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우성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광폭화>를 활성화 시킨 우성은 점차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지만, 그 덕분에 더욱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와, 정말 신규 플레이어 맞아? 어지간한 4회 차 보다 나은 것 같은데.”
지잉-.
박윤성의 손에 또 다른 순백의 검이 생겨났다. 반쪽짜리 날개를 펄럭이며 우성에게 날아온 박윤성은 손에 쥔 검을 대충 몇 번 휘둘러보았다.
“검은 내 전공이 아니긴 한데, 형은 이걸로 상대해 줄게. 지금 보니 알겠어. 그거, 마검 맞지? 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진짜 말 한번 더럽게 많군. 호칭도 뒤죽박죽이고.”
“이해해. 가끔 재밌는 걸 보면 이래. 그래도 형은 운 좋은 줄 알아.”
헤헤 웃던 박윤성의 주위로 이번엔 창이 아닌 순백의 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우성은 끝없이 수를 늘려가는 검을 세는 것을 곧 포기했다.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 하늘을 가득 메운 순백의 검은,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검으로 상대해 준다는 게 이런 거였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