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불굴의 의지의 레벨이 4로 상승합니다.]
[체내에 투입된 독이 소량 정화됩니다.]
[체내에 투입된 독이 소량 정화됩니다.]
[체내에…….]
…….
눈을 감고 있으니 메시지가 눈이 아닌 귀를 통해 시끄럽게 울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눈을 떠보니, 같은 내용의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그나마 눈을 감고 있어서 편했던 걸까? 시야가 눈에 들어오니 두통과 함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머리를 감싸는 우성을 보며 울먹이던 혜미와 혜정이 소리쳤다.
“오빠!”
“……합창하냐.”
그래도 목소리라도 나오는 걸 보니 꽤 정신을 차렸다 싶어 혜미와 혜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성의 몸에 묻은 검은색 독은 대충 닦아낸 후였지만, 물수건도 없어 완전히 닦아내지는 못한 상태였다.
“괜찮아?”
“어지럽긴 하지만… 대충은.”
“하아. 다행이다.”
더 이상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우성은 힘겹게나마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움에 눈이 핑 돌았지만 간신히 정신을 붙잡아 아무렇지 않은 척 겨우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여왕개미는?”
“죽었어. 오빠가 죽였잖아?”
“내가?”
기억이 나지 않아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왕개미의 입에 검을 쑤셔 넣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직후 어떻게 됐는지까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여왕개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독액이 몸을 뒤덮었던 것까지 생각났다.
‘그 다음부터 기억이 끊겼던 것 같은데…….’
혹시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빼앗겼던 건가 싶어 우성은 황급히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라이프는 그대로 있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무튼 잡았다, 이거지?”
“응. 남은 개미들은 나랑 현수 오빠가 처리했어. 혜정이는 여태껏 오빠 치료한다고 정신이 없었고.”
그러고 보니 메시지에서 소량의 독이 정화되었다고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래도 혜정이 우성을 상대로 끊임없이 치유 마법을 난사한 모양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있으면 치료하는 건 사제의 당연한 역할이지만, 그래도 고맙긴 했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걸 보면 아마도 걱정 꽤나 한 모양이었다. 우성은 빙긋 웃으며 혜정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플레이어 정보를 좀 더 살폈다.
‘레벨 포인트(Level Point)가 1000포인트에, 일반 포인트가 625포인트라. 이 녀석도 제법 쏠쏠한데?’
라큘처럼 별다른 피해 없이 잡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라큘에 비해서도 꽤나 많은 포인트와 레벨 포인트를 주었다. 덩치가 큰 만큼 움직임이 굼떠 상대가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입에 꿰뚫린 상태에서까지 독액을 쏘아댈 줄이야.
‘그나마 나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독에 당한 대상이 안현수… 아니, 혜미나 혜정이었다면? 높은 맷집 스텟과 <불굴의 의지>가 있는 우성이 정신을 잃을 정도면 다른 이들이야 말 안해도 결과를 상상할 수 있었다.
“끄응.”
“벌써 일어나도 괜찮아?”
“더 시간 지체할 순 없지. 퀘스트 만료날도 멀지 않았고. 탈출구도 찾아야 하잖아?”
“퀘스트라면 큰 걱정 할 필요 없어.”
“응? 왜?”
우성의 의아한 마음에 대답을 듣기보다는 ‘마수의 숲’퀘스트 내용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곧.
[288/400]
“……?”
잘못 본 건가 싶어 우성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플레이어 정보에 나타난 레벨 포인트도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왕개미를 처치한 것에 비해서 소폭 올라가 있었다.
“나, 나 대체 얼마나 잔거냐?”
“반나절 정도? 그 동안 개미새끼들이 엄청 왔지. 그래도 성체보다는 훨씬 약한 놈들이라, 오빠 없이도 처리할 수 있었어.”
무려 이곳에 들어와서 150마리 이상의 자이언트 앤트들을 처리했다는 말인가? 정신을 잃은 동안 다른 일행들이 많이 고생한 듯했다. 혜정의 뒤쪽으로 자이언트 앤트의 진액을 뚝뚝 묻힌 창을 들고 오는 안현수가 보였다.
“어? 깼네?”
“고생 많았다.”
“뭔 노인네 같은 소리야. 몸은 좀 어때? 괜찮냐?”
아직까지도 옆에서 창백한 얼굴로 치유 마법을 난사하는 혜정을 보며 우성은 손을 들었다. 메시지로 보아 체내에 투입한 독은 거의 정화된 모양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마기는 침투하지 않았지만, 만약 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다면 기절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지.
“나보다는 이제 혜정이 네가 좀 쉬어라.”
“네에…….”
마력을 얼마나 쏟아 부은 건지 혜정은 땀을 흘릴 여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체리마냥 빨갛고 촉촉하던 입술은 시퍼렇게 질리고 그렇지 않아도 희던 피부가 더욷 도드라졌다.
다행히 혜정이 지친 걸 제외하면 다른 일행들은 멀쩡해 보였다. 안현수야 원래부터 걱정할 필요 없었고, 혜미도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아이템은? 뭐 나온 거 없어?”
“……대박인거 같은데?”
대박?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였다. 보스 몬스터를 잡은 보상도 보상이었지만, 그 밖의 수확도 기대해 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죽어서 축 처져 있는 여왕개미의 뒤쪽으로 반짝거리는 몇 개의 아이템들이 보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우성은 죽어서 처진 여왕개미를 건너갔다. 비위가 꽤 강해졌는지 혜미와 혜정도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여왕개미의 몸을 밟고 뒤따라왔다.
몬스터라도 개미라는 건가? 아무래도 던전에 들어온 NPC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아둔 모양이었다. 그 중에는 몇몇 꽤 시간이 지나도 반짝거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우성은 그것들 위주로 살피기 시작했다.
[하급 마족의 정수 - 재료]
* 이름 없는 하급 마족이 가지고 있던 정수. 장비에 녹여 랜덤적으로 추가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
[아트란의 창]
* 대도시 다크듐에서 이방인(플레이어)를 위해 대장장이 아트란이 만든 창. 공들여 만들지 않은 보급형 무기지만, 아트란은 다크듐에서도 손꼽히는 대장장이로 그가 만든 창은 소량의 마기를 지니며 단단한 강도를 지닌다.
+ 관통력 10% 상승
+ 근력 2포인트 상승
+ 마력 2포인트 상승
[마력의 화염병]
* 마력을 담아 던지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는 화염병. 누가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한 위력을 지닐 것으로 추정된다.
[여왕개미의 팔찌]
* 자이언트 앤트들의 모체인 여왕개미가 수십 년 전에 삼켰던 팔찌. 그 속에서 오랜 시간 마기와 독액을 간직하던 팔찌는 본래의 기능을 잃은 대신, 다량의 마기와 독에 대한 내성을 가진다.
+ 마법저항력 5포인트 상승
+ 마력 3포인트 상승
+ 마(魔)속성 공격에 대한 공격력 5% 상승
[여왕개미의 정수 - 재료]
* 자이언트 앤트들의 모체인 여왕개미의 정수. 다량의 독을 품고 있지만 지니는 것만으로 마법에 대한 소량의 면역력을 가진다.
+ 소지시 마법저항력 5포인트 상승
하나같이 버릴 것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하급마족의 정수 같은 경우엔 지금 당장 어디에 쓸 곳은 없겠지만, 어딘가에 분명 쓸 데가 있을 것 같았다.
여왕개미의 정수는 재료 아이템이긴 하지만 라큘의 뿔처럼 소지하는 것만으로 마법저항력을 증가시켜주었다. 여왕개미의 시체를 보니, 속이 다 헤집어져 있는 게 아무래도 안현수가 정수와 팔찌를 꺼낸 모양이었다.
“일단 이 창은 현수가 가지고…….”
아트란의 창은 두 말할 것 없이 안현수의 것이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창도 아주 구리진 않지만 아트란의 창은 대도시에서 만들어진 무기였다. 소도시 하멜에서, 그것도 저가에 구입한 창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화염병은 일단 혜미가 챙겼다. 일회용 아이템이지만 여차할 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왕개미의 팔찌와 정수는 우성이 챙겼다. 아니, 챙기게 되었다.
“오빠가 잡은 건데 왜 우릴 줘?”
“하지만 마력 스텟은…….”
“팔찌에 붙은 능력치가 어디 그것뿐이야? 그리고 마력 스텟은 마법사나 사제만이 아니고, 오빠도 필요한 스텟이잖아.”
마법사인 혜미에게 주려던 팔찌는 결국 우성에게 돌아왔다. 당연한 분배였다. 여왕개미를 잡은 사람이 우성인 것도 있지만, 그의 무기 아포피스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마법저항력 아이템이 없는 안현수에게는 창과 함께 여왕개미의 정수가 돌아갔다. 혜미와 혜정은 따로 아이템을 배분받지 못했지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많이 챙긴 거 아니야?”
“창이야 어차피 너밖에 쓸 사람 없고, 내가 정수까지 챙기면 너무 욕심이니까.”
“그럼 혜미나 혜정이 주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것보단 근접 계열인 우리가 사용하는 게 낫지. 이번처럼 언제 마법저항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지 모르니까.
엄밀히 말해 여왕개미의 독액 역시 마법저항력의 영향을 받는 공격이었다. 아니, 시스템 상 물리 공격을 제외한 모든 공격은 마법 공격의 영역에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만약 우성이 미리부터 여왕개미의 팔찌와 정수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왕개미의 독액을 맞았다고 기절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고작 팔찌 하나였지만, 우성은 마법저항력 5포인트라는 아이템의 효과가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던전이 좋긴 좋군.’
단순히 마을에서 수련을 했던 것보다는 아이템을 챙기고 레벨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이 성장하기엔 훨씬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던전을 돌고 아이템이 늘어남으로서 점점 더 성장하는 스텟들과 몸안에서 느껴지는 활력에 우성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안현수.”
“응?”
“네가 혜정이 좀 업어 줘. 계속 쉬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슬슬 이동해야지.”
“내, 내가?”
“그럼, 다친 내가 업을까?”
다쳤다고는 하지만 우성의 몸 상태는 꽤 멀쩡했다. 여왕개미의 팔찌를 착용함과 함께 마법저항력이 늘어나서 그런지 몸 안에 남아있던 독기가 마저 정화된 느낌이었다. 안현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지친 혜정을 보더니 곧 그녀를 업어들었다.
“왜 그랬어?”
“잘 어울리잖아.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고.”
“흐음… 그래?”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혜미는 안현수의 등에 업힌 혜정을 자꾸만 힐끗거렸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의 안현수를 보고 있으니, 정작 말을 꺼낸 우성도 배알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던전 자체는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틈틈이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이 더 출몰했지만, 굳이 안현수가 나설 필요 없이 우성의 선에서 끝났다.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은 몬스터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약했다. 오죽하면 우성의 맷집 스텟을 뚫지도 못해 기껏 이빨을 들이밀었음에도 이빨자국이 나는 정도에서 그쳤을까.
라이트(Light)마법이 흐릿해질 즘, 바깥으로부터 미약한 빛이 들어왔다. 날이 저물었는지 햇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화사한 달빛이 아름답게 들어왔다.
“드디어 세상 구경 좀 하겠군.”
“들어온지 얼마나 됐다고.”
영화를 많이 봤는지 감상에 젖은 안현수의 중얼거림에 우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 역시 습하고 쾌쾌한 공기로 가득 찬 땅속에서 나가는 게 제법 반가워 더 이상 핀잔하지는 않았다.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가니 슬슬 바깥으로 숲의 나무가 보였다. 제법 업혀서 오래 이동해서인지 혜정의 얼굴색이 돌아오고, 파래졌던 입술색이 돌아왔다.
“이제 내려와도 되요.”
“아, 아. 그래?”
무언가 아쉬운 듯 혜정을 내려놓는 안현수를 보며 우성이 피식 웃었다. 혜미는 동생 혜정과 안현수의 관계가 못마땅한지, 아니면 배가 아픈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조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자, 바깥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숨 막히던 던전을 빠져나오자 시원한 숲의 공기가 우성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응?”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져야 할 공기 속에 익숙하면서 기분 나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불길한 느낌에 고개가 돌아가고, 곧 새빨간 액체가 밟혀있는 게 보였다.
“어? 뭐야, 저것들은?”
철벅-.
바닥에 흥건하게 뿌려진 피를 즈려밟는 플레이어 셋이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임에도, 한 가지 특이하게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등에 달린 반 쪽 날개. 악마의 뿔과는 정 반대의 상징.
“……천사?”
“어? 이 새끼 봐라?”
우성과 눈을 마주친 플레이어는 자신의 한쪽 날개를 펄럭였다.
“이거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