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천사>
“야, 뒤에 봐 뒤에!”
“이런 시팔! 뭐 이리 많아?”
욕설과 함께 검을 휘두르지만 다섯 명이 한 팀으로 이루어진 플레이어들은 여유로웠다. 고작해야 열 마리 정도의 크릭 무리들 따위, 5회 차 플레이어인 그들에게는 손쉬운 몬스터였다.
크릭은 원숭이 형태의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몬스터였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을 웃도는 힘이나 재빠른 몸놀림은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아포칼립스에서 구를 대로 구른 5회 차, 게다가 B클래스 판정을 받은 나름 중견급 플레이어들이었다.
마법사와 사제, 2명의 전사, 궁수로 이루어진 파티는 순식간에 크릭 무리를 잡을 수 있었다. 숲의 중앙에 가까워진 그들이 잡은 몬스터는 벌써 300이 훌쩍 넘어, 퀘스트 완료가 그리 멀지 않은 상태였다.
“하, 정말 찝찝해 죽겠네. 빨리 돌아가서 씻고 싶어.”
“오? 민혜, 땀 흘린 거 섹시한데?”
“꼴리냐?”
“그러면?”
“미친놈. 돌아가서 해. 지금은 힘들어.”
얇은 로브 한 장을 걸친 여성 궁수 플레이어, 민혜는 땀으로 젖은 몸매를 과시하며 까르르 웃었다. 남성 플레이어나 민혜나, 이런 대화가 익숙한 모양이었다.
남성 플레이어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뻗었다. 로브로 다 가려지지 못한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며 남성 플레이어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흐응. 변태같이 왜 이래?”
“왜? 숲에서 하는 야외 플레이도 괜찮을…….”
퍼석-.
민혜의 얼굴로 시뻘건 피가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민혜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을 바라봤다.
날아간 머리통. 원래 몸의 주인은 그녀의 연인이었던 남자의 것이었다. 그간 공들여 모은 옷이나 한손 도끼를 쥔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 아……?”
“뭐야, 이 두부 같은 머리는? 맷집 스텟이 몇인 거지?”
낯선 목소리에 민혜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함께 있던 일행들은 어느새 그녀의 연인처럼 머리가 없었다. 그들의 머리는 목이 베어져 땅에 떨어진 동료나 으깨어져 있었다.
민혜의 주위를 둘러 싼 플레이어는 그녀의 동료가 아닌, 처음 보는 플레이어들이었다. 순식간에 동료들이 당하자 그녀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킥킥. 이 시기쯤에 마수의 숲에는 병신들만 모여든다더니 진짜였네.”
“너, 너희 뭐야?”
“어라? 휘유, 이년은 꽤 반반한데?”
민혜의 앞에 있는 플레이어는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면서 로브로 드러난 그녀의 몸매를 위아래로 훑더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이년은 좀 가지고 놀자.”
“나쁠 것 없지. 잠시 쉴 겸. 조금만 놀다가 죽이자고.”
낄낄대는 세 명의 플레이어의 손길이 민혜에게로 향했다. 당하는 것도 싫지만, 결국엔 죽일 거라는 말에 민혜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이, 이러면 안 되지!”
“뭐래 이 년이?”
“꺄악! 같은 진형 플레이어들끼리는 살인이 금지된 것 몰라?”
바닥에 쓰러진 민혜의 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며 플레이어 한 명이 낄낄거렸다.
“미친년. 그거야 너희 악마 진형 새끼들이 정한 거고.”
‘너희? 악마?’
몇 가지 귀에 박히는 단어에 민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 설마…….”
“어? 왜 이리 놀라고 그래?”
우악스러운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새하얀 피부의 플레이어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천사 플레이어 처음 봐?”
**
[개미소굴 - 여왕개미(Boss)가 출현했습니다.]
단 하나 떠오른 메시지. 눈앞을 가득 메운 여왕개미의 위용은 라큘을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이었다.
4미터에 이르는 높이의 동굴을 가득 메운 거대한 덩어리는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주황색의 껍질은 다른 자이언트 앤트들에 비해 훨씬 단단해 보였고,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은 여왕개미를 지키려는 건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네임드 다음은 보스 몬스터인가.”
이제야 이 던전이 비정상적으로 넓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개미소굴은 자이언트 앤트만이 아닌, 여왕개미의 크기에 맞춰서 만들어진 던전이었다.
여전히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은 먼저 덤벼들지 않고 여왕개미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다른 때와는 달리, 먼저 다가간 사람은 안현수였다.
키에에에엑-.
구슬픈 목소리가 굴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몸을 돌린 여왕개미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너무 흉측하게 생겼다 싶었다.
여왕개미의 얼굴은 개미라고 보기보다는 애벌레에 가까웠다. 몸 역시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지만 개미처럼 몸통의 구분이 되어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자이언트 앤트들이 단순히 거대한 개미라고 본다면, 여왕개미는 진짜 ‘괴물’이었다.
뚝-.
스스스-.
주먹만 한 작은 입에서 흘러나온 침이 바닥에 고이더니 이내 부식되었다. 독인지 산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침에만 닿아도 무시 못할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징그러운 주둥이 좀 다물어라.”
슉-.
안현수의 창끝에 맺힌 푸르스름한 기운이 요동치며, 여왕개미를 향해 뻗어갔다. 마력과 용력이 가득 머금어진 창은 순식간에 여왕개미를 꿰뚫을 듯했다.
팍-.
그 때,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이 달려들며 안현수의 창에 꽂혔다. 세 마리의 자이언트 앤트들이 창에 꽂히자 흡사 창이 꼬챙이가 된 느낌이었다.
“이, 이것들 뭐야?”
키에에에에엑-!
그 순간, 조용하던 여왕개미의 목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개미라도 새끼는 새끼인 걸까? 구슬프던 여왕개미의 울음소리 속에는 진득한 분노가 섞여 안현수를 향해 두꺼운 발을 뻗었다.
“쉴드(shield)!”
퍼억-!
“컥.”
개미 다리라고 해 봤자 덩치에 비하면 얇았지만, 여왕개미의 덩치는 4미터에 육박했다. 라큘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왕개미의 다리는 충분히 두꺼웠고, 힘은 라큘과 비슷한 정도였다.
여왕개미의 다리에 얻어맞은 안현수는 뒤로 멀리 날아갔다. 때마침 혜정이 방어 마법을 걸어주었고, 조금 전에 획득한 ‘카우킹의 가죽 갑옷’덕분에 큰 상처는 면할 수 있었다.
“크… 개미주제에 힘 한번 겁나 세네.”
“그래도 오히려 전에 만났던 라큘보다는 상대하기 쉬울 것 같은데?”
우성은 안현수의 앞으로 나서며 꿈틀거리는 여왕개미의 다리를 바라봤다.
하나하나 성인 남성 다리만한 두께에, 거대한 몸뚱이에서 나오는 힘은 안현수가 밀릴 정도였다. 게다가 입에서 흐르는 침은 산성을 띄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수많은 자이언트 앤트들이 여왕개미를 보호하고 있었다.
대충 본다면 상상 속에나 떠올릴 법한 거대한 괴물. 하지만 우성은 오히려 여왕개미보다 처음에 만났던 라큘이 훨씬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일단 저 녀석은… 못 움직이잖아?”
“뭐, 그건 그렇지만.”
그 때, 혜미가 주문을 다 외웠는지 양 손을 앞으로 뻗었다.
“플레임 에로우(Flame Arrow)!”
화륵-.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화살이 날아가 펑, 소리를 내며 여왕개미의 몸에서 흩어졌다. 성체 자이언트 앤트들도 꿰뚫는 단일 공격 마법은 여왕개미의 몸에 작은 상처도 내지 못했다.
“단단한데?”
“찔러. 용력이랑 마력을 잔뜩 쏟아 부으면, 뚫리긴 할 거다.”
우성이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여왕개미의 껍질은 성체 자이언트 앤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혜정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벤다고 해서 베어지긴 할까? 아닐 것이다. 저 단단한 껍질을 뚫기 위해선, 힘을 한 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가득 머금은 아포피스를 고쳐 잡으며 우성이 달려들었다.
타닥-.
키기긱-.
‘역시나.’
여왕개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수많은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이 달려들었다. 이미 여왕개미를 보호하다가 죽은 다른 자이언트 앤트들을 봤을 텐데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사악, 사악-.
[150/400]
[152/400]
...
우성의 검이 대각을 그리며 달려드는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을 베어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두세 마리씩 베어낸 덕분에 퀘스트 목표 수치 400에 빠르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퀘스트가 아니었다. 여왕개미를 잡지 못하면 이곳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되면 퀘스트를 완료해 라이프를 얻기는 커녕, 반대로 잃게 될 것이다.
“젠장. 뭐 이리 많아?”
달려드는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 때문에 여왕개미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앞으로 몇 미터만 가면 되는데, 자이언트 앤트들이 눈앞을 가리는 탓에 다리를 멈추고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180/400]
[183/400]
...
빠르게 퀘스트 달성 조건이 채워졌지만 우성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은 끝이 없었고, 얼핏 보이는 여왕개미는 작은 입을 크게 부풀리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우성이 크게 소리쳤다.
“혜정! 쉴드!”
“네, 네!”
우성의 외침에 미리부터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혜정이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우성과 안현수의 몸에 투명한 장막이 생겨났다.
그 직후.
푸와아악-.
여왕개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독액이 우성과 안현수를 덮쳤다. 덩치에 비해 크지 않은 입에서 어찌나 많은 양의 독액이 뿜어져 나오던지, 우성과 안현수의 몸을 다 가릴 정도였다.
[여왕개미의 독액에 당했습니다. 실드(Shield)가 소멸됩니다. 마기로부터 방어합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독에 대한 일부 내성을 갖습니다.]
잠시 몸을 휘청거린 우성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독액에 마기가 섞여 있었던 건가? 메시지를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마기로부터는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독에 당한 탓에 정신이 없었지만 또한 그 덕분에 눈앞을 가렸던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이 사라졌다. 녀석들은 단단한 껍질 덕분에 죽지는 않은 듯했지만, 몸을 축 늘어뜨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흐트러지는 정신줄을 가다듬으며 우성이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높은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덕분에 여왕개미의 독에도 움직일 수 있었다.
키에에에엑-.
“귀 아파… 새끼야…….”
그 순간, 아포피스에 맺힌 검붉은 마력이 폭발하며 검 끝이 여왕개미의 얼굴로 향했다.
푸욱-.
아포피스가 독액이 뿜어져 나왔던 여왕개미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입이 꿰뚫렸기 때문인지 여왕개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검신을 타고 검은색 액체가 흘러 나왔다.
“<광폭화>.”
[광폭화 스킬이 발동됩니다.]
[근력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반사능력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마력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5포인트 감소합니다.]
몸에서 힘이 샘솟는 것과 동시에 어지러움이 심해졌다. 아무래도 체력 스텟이 감소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근력 스텟과 민첩, 마력 스텟이 상승했다. 어지러움을 이겨낸 우성은 아포피스를 잡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시발. 한 번에 끝내자, 우리.”
키이이이-.
꿰뚫린 입을 타고 여왕개미의 비명이 작게 새어나왔다. 아니, 비명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까지도 새끼들을 잃을 원한이 남은 듯, 여왕개미는 몸속에 있던 체액을 내뿜었다.
푸아악-.
검은색 체액이 다시 한 번 우성을 덮쳤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혜정의 도움도 없었다. 가까이 붙은 상태 그대로 체액을 뒤집어 쓴 우성을 보며 혜미가 비명을 질렀다.
“오빠-!”
“미친!”
깜짝 놀란 안현수가 욕설을 내뱉으며 우성을 향해 달려갔으나, 곧 새끼 자이언트 앤트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를 악문 안현수가 무작정 창을 휘두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먹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온 몸을 검게 물들인 우성의 검이 여왕개미의 머리를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