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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37화 (37/258)

37화

호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에 정진혁의 눈썹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화가 나는 것을 참는 모습이 역력해 혜미와 혜정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안현수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성을 바라봤다. 싫어하지 않는 걸 보니, 그 역시 우성과 생각이 같은 모양이었다.

“왜지?”

일단은 이유라도 듣자는 듯, 그는 언짢다는 기분을 한껏 드러냈다. 한쪽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는 게 화가 났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냔 말이다.”

“클랜 같은 데 소속되면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겠습니까? 전 자유로운 게 좋습니다.”

단체 생활은 장점도 장점이지만 단점 역시 없다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단점을 하나 꼽으라면 행동의 제약이었다. 즉,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단체 생활이라는 걸 많이 겪어보지 않은 우성이었지만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그리고 경찰이라는 특수한 집단 안에 속해있는 안현수는 그 말에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 이유인가?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클랜 내부 규율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크게 억제할 만큼 빡빡하지 않아. 몇 가지 금지 사항과 의무만 지키면 그걸 훨씬 넘는 이익을…….”

“플레이어 살해. 이것도 허용 됩니까?”

극단적인 물음에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말이 턱 막혔다. 우성의 말은 붉은악마 클랜뿐만이 아니라 그 외 아포칼립스 내 모든 클랜에서 공통적으로 여기는 금기였다.

말문이 막힌 정진혁과는 달리, 혜미와 혜정은 놀란 표정으로 우성을 바라봤다. 안현수 역시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게, 살인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생각하고 있는 우성이 놀라운 까닭이었다.

안현수는 물론이고 혜미와 혜정 역시 우성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딸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것과 딸이 병에 걸렸다는 것, 딸을 살리기 위해 게임에 모든 걸 걸었다는 것.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현실에 가깝긴 하지만 이곳 플레이어들에게는 아직 4번의 기회가 있었다. 물론 기존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하나의 생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플레이어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과 게임의 중간에 걸쳐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절박함. 우성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감정이었다. 아니, 절박함을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우성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절박함으로 인해 각오를 다졌다.

말문이 닫힌 정진혁으로 인해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렇게 잠시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우성이 입을 열었다.

“물론 전 사람을 죽이는데 희열을 느끼는 변태나 싸이코패스는 아닙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러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라…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라는 건가?”

“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붉은악마 클랜에서는 저를 어떻게 할 겁니까?”

“한 두 번은 경고와 패널티. 그 이후로는 아마… 척결이겠지.”

“척결이라 하면…….”

“모든 라이프의 소멸. 다시 살아날 수 없을 때까지 죽일 수밖에 없다.”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였다. 아무리 한국 국적의 플레이어들이라 해도 이곳은 엄연히 한국은 아니었다. 감옥이라는 시스템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먹여주고 재워줄 리는 없으니 살인자에 대한 대우가 현실과 똑같을 리 없었다.

모든 라이프의 소멸. 그것은 즉 현실에서의 소멸과 같은 의미였다. 한 번의 죽음은 단순히 포인트를 빼앗기고 접속 금지 패널티에서 끝나지만, 모든 라이프의 소진은 현실에서의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이었다. 즉, 서현이의 존재도 사라진다.

우성은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상황이 썩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두 달에 한 번씩 자신의 라이프를 서현이에게 주어야 한다. 즉, 앞으로 열 달이면 우성의 모든 라이프가 소진되는 것이다.

‘한 시가 급해.’

포인트를 빠르게 벌 수 있는 방법. 어떻게 생각해도 그 방법은 다른 플레이어의 살해였다. 다량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 몇 명을 살해하면 라이프 하나를 획득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정진혁으로서는 우성의 말이 꼭 ‘저는 살인을 할 계획이 있습니다’로 들렸다. 그리고 만약 우성을 영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가 문제를 일으키면 클랜 내부에서 정진혁의 입지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신 나간 놈이군.”

“이해해주실 수 없다면 죄송합니다. 제의는 고맙지만 거절해야겠습니다.”

“넌 어떠냐? 설마 같은 생각인가?”

깨끗하게 우성을 포기한 정진혁은 안현수에게로 타겟을 집중했다. 그리고 은근 혜미를 흘겨보는 것이, 외모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배치고사 랭크 3위라는 성적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현수는 엄연히 우성과는 입장이 달랐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우성과 같은 특이 케이스와는 달리 그에게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클랜에 들어가 여러 권리를 누리며 안정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같은 생각은 아니지만, 저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넌 또 왜지?”

“이 친구랑 친구거든요.”

친구랑 친구다. 무슨 이상한 말인가도 싶었지만 결국 친구 따라 삼만 리라는 뜻이었다. 친구인 우성이 클랜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자신 역시 클랜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래도 우성과 같은 극단적인 이유는 아니라 정진혁은 한동안 안현수를 설득했다. 클랜에 들어올 때 좋은 장점들을 줄줄히 읊었고 간간히 협박을 하기도 했는데, 안현수는 계속해서 양 손을 교차해 확실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하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넌…….”

“저도 싫은데요.”

“……그럴 거 같았다. 제길. 빌어먹을 연놈들.”

마지막 욕은 흘리듯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안현수의 주먹이 살짝 쥐어지고, 어깨가 잠시 들썩였지만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존부터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던 정진혁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드르륵-.

찻잔은 건들지도 않은 채 정진혁은 거칠게 의자를 뒤로 밀었다. 영입이 실패한 만큼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콧김을 크게 불며 정진혁이 눈을 부라렸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멍청이들.”

“나이가 몇이신지 모르겠지만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쪽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클랜은 이쪽에서 먼저 사양이네요.”

그 때,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혜미가 결국 참다 못해 한 마디를 쏘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센 편에 드는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날카로울 정도였다.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정진혁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혜미가 기름을 붓자, 그 딴에는 겨우겨우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지랄하지 마라 썅년아. 아포칼립스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네년처럼 입 잘못 놀리는 년은 조만간 원숭이 같은 새끼들에게 다리를 벌리게 되어 있어. 싫든 좋든 간에 말이야.”

“뭐, 뭐라고요?”

성적 희롱이 섞인 욕설에 혜미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막 욕설을 꺼내려던 그녀의 입을 우성의 손이 막았다.

“이만 가주시면 좋겠는데요.”

“……어떻게 지내나 보자고. 조만간 다시 봤으면 좋겠군.”

다시 보자고는 하지만 그 의미가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 속뜻은 ‘다시 만나는 날에는 내 밑에 기어 다닐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말을 남겼지만 그렇다고 앞에서처럼 심한 욕을 한 건 아니었기에 우성이나 혜미나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여기서 달려들었다가는 정진혁에게 괜히 싸울 빌미를 줄뿐이다.

정진혁은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여관 문을 닫고 나갔다. 네 사람은 정진혁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담담히 말했다.

“앞날이 깜깜하군.”

말투와는 달리 안현수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꽤 걱정하는 표정이었는데, 우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안 따라갔지?”

“응? 누굴? 설마 저 밥맛을?”

“……밥맛인 건 인정하지만. 혜택은 꽤 괜찮던데.”

엄밀히 말해 클랜에 대한 혜택은 엄청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정진혁의 말대로 몇 가지 준수할 사항만 지킨다면 클랜 내에서 활동하는데는 지장이 없을뿐더러 어디까지나 혜택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사실 우성 역시 갈등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거대 클랜에 들어서 소위 말하는 ‘빽’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경우, 클랜은 우성의 행동에 가장 발 빠르게 처벌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성의 입장이었다. 아직까지 우성은 안현수가 말한 ‘친구’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택이라고 해봤자 크게 좋을 건 없더라고. 정진혁이라는 그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너랑 혜미랑 혜정이랑 같이 다니는 게 더 나을 것 같거든.”

“어떤 점에서?”

“클랜이 아닌 파티의 개념이지. 배치고사 1위, 2위, 3위. 뭐, 혜정이는 예외지만… 그래도 능력치가 꽤 준수하잖아? 이만한 파티면 어딜 가든 신규 플레이어로서는 꿀리지 않을 걸?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싶었는데, 네가 변명을 잘 해줘서 다행이었어.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정진혁 저 새끼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거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만.”

아무래도 안현수는 플레이어 살인에 대한 우성의 말을 변명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거나.

아무튼 귀가 솔깃해 지는 이야기였다. 혜미, 혜정과 함께 다닐 생각까지는 있었지만 거기에 안현수까지 포함되면 일행은 넷. 일반적으로 게임에서 파티(Party)라고 부를 만한 인원수였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다니는 게 아무래도 빠르게 성장하는 데에는 나을 것이다. 클랜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단체보다 자율성이 높고, 혼자가 아닌 다수인 만큼 활동의 폭 역시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넷 중에는 무려 배치고사의 랭킹 1,2,3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혜미는 몰라도 반(半) 마검 아포피스를 받은 우성과 처음부터 S클래스를 배정받고 유니크 직업 용기사를 가지고 있는 안현수는 처음부터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혜미 역시 높은 마력 능력치를 가지고 심연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어 특성이 가진 위력은 우성이 직접 겪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스텟 포인트는 분명 어딘가에 쓸 데가 있을 터.

그리고 혜정은…….

“혜정이의 능력치를 알아?”

“응. 오더가 말했잖아? 자기보다 2단계 밑의 클래스의 플레이어에 한해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혜미랑 혜정이 둘 다 B클래스야.”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더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그 직후 서현이에 관련된 일이 얽혀버리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모양이었다.

“혜미 능력치도 괜찮지만, 혜정이도 꽤 준수해. 기본 신체 능력치들이 조금 떨어져서 그렇지… 아, 듣는 것보단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어때? 너도 이제 S클래스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백 번 듣는 게 한 번 보는 것만 못했다. 우성은 망설이지 않고 혜정을 보며 말했다.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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