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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36화 (36/258)

36화

그는 잠시 말을 아꼈다. 환영 인사치고는 조촐하고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리에 모인 신규 플레이어들 중 어느 누구 하나 그에게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혜미에게로 다가가던 우성과 안현수까지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것을 확인한 그는 곧 광장의 중앙으로 움직였다. 신규 플레이어들은 행여나 가는 길을 방해할까 멀찍이 옆으로 물러섰고, 곧 그는 플레이어들의 중앙에 설 수 있었다.

“저는 1회 차 아포칼립스 플레이어 정진혁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여러분과 같은 플레이어의 입장이고,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앞서 경험했습니다.”

결국 하고 싶었던 건 연설이었나? 자신을 정진혁이라고 소개한 플레이어는 곧이어 힘 있는 목소리를 이어갔다.

“아니꼽게 들릴지 모르나 저희 기존 플레이어들은 여러분 신규 플레이어분들의 안전과 이곳의 규칙을 알려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방금과 같이 배치고사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서로 싸우는 경우를 방지하는 것도 속해있습니다.”

방금 전 얼굴을 붉혔던 두 사람을 찾아 눈으로 흘기며 정진혁은 말을 이었다.

“게임이긴 하지만 저희는 이곳 아포칼립스를 단순한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아직 네 번의 기회가 남아있겠지만 기존 플레이어들 중에는 하나의 라이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의 목숨이 현실에서의 목숨과…….”

정진혁의 설명을 빙자한 연설은 길고 지루했다. 그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들을 주절주절 읊었는데,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는 신규 플레이어들이 꽤 있었다.

단순히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그것을 구체화하여 귀로 전해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나 의외라면 플레이어들끼리 PK가 난무할 것이라 생각한 설정이 의외로 막혀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들의 약속에 기반 한 것이었다. 천사 진형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필요하고, 악마 진형의 플레이어들끼리는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존 플레이어들이 신규 플레이어들의 첫 등장에 나타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냥 이대로 두었다면 아마 이 자리는 배치고사로 인한 후유증으로 난장판이 되었을 테니까.

뒤로 갈수록 기존 플레이어들이 등장한 이유를 알 수 있어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아쉬움도 들었다. 타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포인트의 1/10이 아까웠다.

‘하긴, 내가 지금 당장 죽일 수 있는 녀석도 없겠지만.’

우성은 신규 플레이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신규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안현수를 제외한 다른 사람 모두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지금에 와서는 안현수도 우성의 상대가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규 플레이어라는 틀에서 생각한 결과였다. 기존 플레이어들이 어디까지 성장했을지는 모르는 일. 당장 눈앞에 있는 정진혁만 하더라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시 한 번 부탁… 아니, 경고합니다. 지금 이 이후로 같은 진형의 플레이어들끼리의 싸움을 할 경우, 현실에서의 살인자와 같이 대우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는지 정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다시금 기존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어리둥절했지만 요점은 ‘싸우지 마라’였기에 그리 어려울 것 없었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우성은 멀어져가는 정진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금 혜미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도 정진혁의 등장에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우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반갑다.”

“어? 어. 안녕……?”

말끝을 흐리는 게 아무래도 썩 반갑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색하다던가. 사실 어색한 건 우성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저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가 왜 이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인처럼 잘만 지내던 사람들이.”

눈치 없는 안현수가 끼어들어 우성의 등을 떠밀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말하라는 뜻이었는데, 우성은 그의 손길대로 혜미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우성이 한숨을 쉬었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는 알았지만 차마 그 말들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묻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지만 그보다 앞서 꺼내야 할 말이 있었다.

“……고맙다.”

“으, 응?”

“대신 죽어줘서… 고맙다고.”

당연히 들을 만한 말이었지만 막상 귀로 듣자 이상했는지 혜미가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두 사람의 분위기를 잠시 살피던 안현수가 가늘게 눈을 뜨더니 물었다.

“이거,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봐?”

“알 거 없어.”

바짝 들이미는 안현수의 얼굴을 장갑으로 밀어내고는 우성이 뒤쪽의 혜정에게 인사했다.

“반갑다.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네.”

“아, 네. 기억해요.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안녕하세요.”

반갑지는 않다고 하면서도 정중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혜미와는 쌍둥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동생이라도 혜미보다는 앳된 느낌이 있었다.

우성은 혜미와의 관계를 설명하고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했다. 혜정은 이미 현실에서 혜미에게서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별로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긴,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 성격에 우성을 보자마자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뒤이어 안현수가 넉살 좋게 자기 차례라는 듯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주 가벼운 모습은 아니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미 그는 우성과는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반가워요. 잘 부탁드려요.”

“숙녀 두 분이랑 같이 있으니 이거 꽃밭이네. 현실에선 남정네 같은 여형사들밖에 없는데 말이야. 하하.”

활발한 성격의 안현수 덕분에 우성은 자칫 어색할 뻔했던 혜미와의 조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중간에서 분위기를 조율해 주니 잠시였던 어색함도 금세 지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혜미에 대한 고마움이나 미안함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단순히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만큼 우성은 뻔뻔한 성격이 못되었다.

우성은 혜미에게,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혜정에게 배치고사에서 있었던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우성을 도와준 것이지만, 그 결과가 서현이에게 돌아갔으니 그녀에게 느끼는 우성의 고마움은 더욱 컸다.

그 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는 네 사람의 사이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플레이어 이우성, 그리고 플레이어 안현수. 맞나?”

불청객은 바로 방금 전까지 긴 연설을 보여준 기존 플레이어 정진혁이었다. 단단한 갑옷들로 온 몸을 무장한 그는 덩치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거대한 느낌이 들었다.

겁이 많은 혜정은 가까이 다가온 정진혁의 등장에 냉큼 혜미의 뒤로 숨었다. 우성 역시 대화가 중간에 끊어진 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과 안현수를 찾는 걸 보니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지 싶었다.

“제가 이우성입니다만.”

“제가 안현수입니다.”

“겨우 찾았군. 저기 있는 대머리가 제대로 가르쳐 줬어.”

정진혁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고명균을 옆에 낀 채 바닥에 앉아있는 라정환이 보였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현실에서 조폭이라던 그는 어느새 불량해 보이는 플레이어들끼리 뭉쳐있었다.

라정환이야 익숙한 얼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는 체를 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한 번 눈길을 주고는 다시 정진혁을 돌아본 우성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플레이어 이우성, 이번 7회 차 배치고사의 우승자. 그리고 플레이어 안현수, 준 우승자. 두 사람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함께 있던 혜미와 혜정을 딱 잘라버리는 말에 우성과 안현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렇지 않아도 초면에 반말로 깔고 들어가는 정진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일행을 배제시키는 모습까지도 썩 보지 좋지 않았다.

“여기서 하시죠.”

“중요한 이야기다.”

“여기 있는 박혜미는 배치고사 3위이고, 박혜정은 그녀의 쌍둥이 동생입니다. 그리고 일행이 있는데 저희만 따로 쏙 빼서 할 이야기라는 게 대체 뭡니까?”

안현수가 앞으로 나서 따박따박 따지고 들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였다. 직업이 형사이기 때문일까?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꽤 논리 정연해 달리 반박할 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진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거만한 턱짓을 보였다.

“따라와.”

**

시작의 광장을 벗어난 네 사람이 정진혁을 따라 도착한 곳은 가까운 마을의 한 여관이었다.

여관에 도착한 우성은 혹시라도 ‘악마’, 혹은 ‘마족’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마을은 한 눈에 보기에도 사람 사는 마을이었고 마족이라고 보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여관의 1층 구석진 자리에 앉은 네 사람, 그리고 정진혁은 간단한 마실 거리를 주문했다. 대낮부터 술은 그랬는지 차 종류를 시켰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악마 진형이라더니 악마는 안 보이는군요.”

“이 마을의 이름은 ‘시작의 마을’이다. 방금 전 너희가 있던 장소는 알다시피 ‘시작의 광장’이고. 너희가 생각하는 마족이나 악마가 나오려면 몇 개 마을을 거쳐야 돼.”

정진혁의 설명에 우성과 안현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시작 처음부터 무서운 악마나 마족이 등장하면 적응이 어려울 것 같긴 했다.

“그런데 저희를 부른 이유는 뭡니까? 아니, 정확히는 저와 우성을요.”

“왜일 것 같나?”

정진혁은 대답 대신에 역으로 질문을 해 왔다. 초면에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의 없는 모습이었는데, 안현수의 표정이 찡그려진 건 당연했다.

썩 표정이 좋지 않은 우성과 안현수, 박혜미를 보며 정진혁은 피식 웃었다. 잠시 네 사람의 각각 다른 시선을 즐기던 정진혁이 힌트를 덧붙였다.

“이건 게임이다. 잘 생각해 봐.”

“……영입입니까?”

“정답. 꽤 머리가 돌아가는군.”

정진혁은 네 사람 중 우성과 안현수만을 따로 불렀다. 이번 배치고사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난 두 사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정진혁은 두 사람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저 시작의 광장에서 나오는 플레이어는 석 달에 약 2100명이다. 하루에 300명씩, 총 7번에 걸쳐 이루어지지.”

정진혁은 아까 전 광장에서 했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게임의 전반적인 배경에 대한 이야기라 광장에서의 이야기와는 달리 우성은 정진혁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현재 아포칼립스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의 국적은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렇게 총 7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시스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치고사는 국적별로 이루어지고, 저 시작의 광장으로는 석 달에 한 번, 한 주에 걸쳐 매일같이 다른 국적의 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오지.”

“그래서요?”

“머리를 조금만 더 굴려봐. 국적이 다르다고 해도 이건 게임이다. 포인트로 소원도 이루는 마당에 언어의 장벽 따위는 문제도 아니야. 게임 자체는 악마와 천사 진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속에서도 각 국적별로 플레이어들끼리의 미묘한 경쟁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다. ‘국가’라는 개념은 어딜 가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게임에서도 플레이어들이 각 국적별로 나누어져 있으면, 같은 국적을 가진 플레이어들끼리 뭉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각 국가별로는 하나씩의 대표 클랜이 창설되어있다. 내가 소속된 붉은악마 클랜은 아포칼립스 내에서 한국의 대표 클랜이지.”

“그래서 당신네들 클랜으로 들어오라, 이 소립니까?”

핵심을 짚는 우성의 질문에 정진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거다.”

은근히 애국심을 자극하며 클랜을 좋게 포장했다. 게다가 배치고사 우승자와 준 우승자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신규 플레이어에 불과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싫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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